여행후 끄적끄적2018. 11. 5. 10:45

개와 늑대의 시간.

아마 그쯤이었을것 같다.

어둠이 찾아오기 바로 전의 하늘.

파란빛도, 푸른빛도, 청록빛도 아닌

전후좌우 위와 아래,

모든 방향의 색이 조금씩 달라지는게

다 보이는 그 찰나의 순간.

이 순간만큼은

공간도 시간속에 먹힌다.

그것도 아주 완벽히!

 

 

이 날의 기억 하나 ...

오래 걸어 갈증이 심했다.

물이 간절했다.

주변엔 마켓도, 슈퍼도 없었다.

저녁을 먹고 있는 사람들 사이를 지나 가야 한다는게 망설여졌다.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 뭔가를 먹거나 마시고 있었고

나는 완벽하게 혼자였다.

혼자 고립된 느낌.

외로움은 아니었고 무서움의 일종이었다.

여기서 내가 사라져도 아무도 모르겠구나... 하는.

 

 

어두워진 타르티니 광장에 

한참동안 머물렀다.

사람들이 하나 둘 떠난고 점점 비어가는 광장,

비로소 이곳이 광장이라는게 실감됐다.

사람이 모이는 광장과

사람이 없어야 비로소 전부가 보이는 광장.

그러나 그 둘은 결코 다르지 않다.

그 둘의 간극에 내가 있다는게...

나는 참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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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후 끄적끄적2018. 11. 2. 15:36

두번째로 옮겨간 sun set point.

타르티니 광장을 지나

해지는 모습이 잘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바다로 떨어지는 붉은 해는,

그대로 생명이고 숨이다.

 

 

바다빛이...

찬란한 금빛이다.

어쩌면 저기 물 속 깊은 곳에 엄청난 규모의 금광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환상, 착각, 망상...

부족할 것 없는 여행이라는

확신을 갖게 만든 한 장면.

물에서 나오는 사람이 있고,

물 속으로 들어가는 사람이 있고,

물 위에 떠있는 사람이 있고,

그걸 보고 있는 사람도 있고...

 

 

사실은...

좀 무서웠었다.

혼자 돌아가야 한다는게.

숙소이든, 여행이든, 삶이든, 일생이든.

그 무서움증을 잊을 수 있었던건,

저 노래 때문이었다.

밴드의 연주와 매력적인 목소리를 가진 가수의 노래.

난생 처음 듣는, 모르는 노래였는데 그래서  

흥겨웠다.

 

피란은 내게 많은 기억을 남긴 도시였다.

풍경과 날씨, 그리고 노래로.

좋은거 옆에 좋은거, 그 옆에 더 좋은거.

피란이...

내겐 딱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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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후 끄적끄적2018. 11. 1. 09:15

숙소에서 나와 젤라토를 먹으며

석양을 기다렸다.

솔직히 말하면...

피란의 Sun Set Point는 따로 없다.

날이 흐리지만 않는다면

눈에 보이는 모든 곳이 다 sun set point.

 

 

석양을 보기 위해 처음 자리 잡은 곳은,

등대가 한 눈에 보이는 피란의 초입.

피란 초입에서 석양의 초입을 기다린다.

시작되는 석양.

조금만 더 그 안으로 들어가야겠다.

빛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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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후 끄적끄적2018. 10. 31. 11:07

피란에서...

어쩌면 나는 유령이었는지도 모른다.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고,

존재하지 않지만 존재하는 그런...

익명이 주는 평온함,

그게 참 좋았다.

나를 아는 사람도 없고

내가 아는 사람도 없는

그런...

 

 

잠깐잠깐씩,

벽에 붙은 이정표를 보며

이곳과 저곳을 놓고 저울질하다 피식 웃금이 났다.

이곳이든 저곳이든

어차피 내겐 다 낯선 곳일 뿐인데...

그런 낯선 곳이 이렇게 친밀면

또 어쩌라는건지... 

 

 

잠시 걸음을 멈췄다.

sorry dear!

I spend all my money in beers.

I bought you just a bit of Piran's air.

작은 병에 적혀있는 문구에 빵 터졌다.

심지어 8ml라고 용량까지 적혀있다.

미소를 짓게 만드는 귀여운 센스에 감동했다.

숙소로 들어와 소박한 저녁을 먹고 서둘러 밖으로 나왔다.

Piran의 석양,

 처음과 끝을 보기 위해서...

Posted by Book끄-Book끄
여행후 끄적끄적2018. 10. 26. 14:18

조용했던 성벽에...

중국인 가족이 올라왔다.

엄청 멋을 낸 엄마와 배가 불룩한 아빠, 그리고 불만이 가득한 아들.

순식간에 고요가 깨졌다.

중국어의 4성 성조는 정말이지 타의추조을 불허할만큼 파괴적이다.

고민이 됐다.

이대로 깔끔하게 포기하고 종탑을 내려갈까, 그대도 좀 버텨볼까...

난사에 가까운 핸드폰 카메라 셔터 소리에 조금 더 버티기로 했다.

경험상,

셔터소리가 요란하면 대부분 금방 끝이 나더라.

그리고 예상 적중.

무지 전투적으로 속전속결을 선보인 가족들에게 깊은 감사를...  

 

 

이곳은 완벽한 곳이다.

일생을 혼자 살대도 이곳에서는 외롭지 않을 같다.

크지 않아 속속들이 다 알 것 같지만

결코 다는 보여주지 않는 곳.

친근하면서도 낯설게 하루하루를 살 수 있을 것 같은...

먼 바다를 보고,

가까운 광장을 보고,

끊긴 성벽을 보고,

주황색 지붕들 보고...

이 좁고 작은 종탑 위에서 나는 1시간 넘게 있었다.

숨고 싶었지만 숨을 곳이 전혀 없었다.

 

 

종탑을 내려오니 관리자가 묻는다.

위에 누가 또 있느냐고...

아무도 없다고 말했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뭐지?

아직 close time은 아닌데...

짧은 영어실력이 탈로날까봐 궁금증을 그대로 남겨두고 돌어섰다.

아무도 없는 성 죠지 성당의 나무의자에 감동했

그림같은 파란 하늘 밑엔 거짓말처럼 서있는 하얀 성당의 파사드에 동요됐다.

한참을 떠나지 못하고 그 앞서 서있었던건

그 시간, 그 곳 있던

내가 제일 좋아하는 하늘빛 때문이었다.

 

저 하늘빛은...

사는 내내 계속 그리워하게 될 것 같다.

그때처럼 지금도,

지금처럼 그때도...

Posted by Book끄-Book끄
여행후 끄적끄적2018. 10. 23. 08:54

피란 성벽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두 가지가 눈에 들어온다.

파란 바다와 하늘아 맞닿은 수평선,

그리고 우뚝 솟은 피란 종탑.

다음 목적지는 자연스럽게 피란 종탑이 됐다.

이 종탑이 성 죠지 성당의 부속건물인지,

독립된 건물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하늘빛은 예술이다.

미카엘 대천사님도 저 위에서 내려다보면 참 보람차시겠다.

 

 

바로 옆에 있는 다각형 건물이 보이길래 잠깐 들여다봤다.

"Battistero"

셰레당이란다.

그러니까 가운데 있는 우물(?)이 세례식을 올리는 메인 장소.

건물 외부만큼이나 내부도 깨끗하고 소박하다.

순결한 신앙의 고백을 의미하는 것일까?

잘은 모르겠지만 작고 소박한 이곳이 난 퍽 마음에 들었다.

뒤돌아서 바라본 피란의 윤곽도 너무 아름다웠고.

 

 

종탑 매표소에서 나 혼자뿐이다.

피란 성벽에 이어 두번째 만나는 2유로의 행복.

이쯤되면 독점투어라고 불러도 무방하겠다.

종탑을 올르는 계단은 최근에 다시 만들어진게 같은데

특이하게도 나무로 되어있다.

나무에서 풍기는 냄새도 특별했고,

중간중간 계단과 난간에 나타나는 천사를 보는 것도 좋았다.

작은 창을 통해 보는 피란은 액자 속 그림같았고

그대로 드러나있는 시계체(體) 시계추도 신기했다.

제일 마지막 계단은 저렇게 예쁜 어슷계단.

왼쪽, 오른쪽 한 칸씩 총총총.

 

 

다 올라오면,

이런 모습이...

"끝"이란 말은 이럴때 쓰라고 있는거다.

The End.

 

Posted by Book끄-Book끄
여행후 끄적끄적2018. 10. 22. 08:29

처음 피란(Piran)이란 도시의 이름을 들었을때

묘한 감정이 들었다.

그건 아마도...

피란(避亂)이란 단어가 떠올라서였을거다.

避亂 : 난리를 피해 다른 곳으로 옮겨가다.

그렇다면,

현재 나는 어떤 "난리" 속에 있을까?

그게 뭐든,

이곳이 그 모든 난리를 피할 수 있게 해주면 참 좋겠다...

여행 시작 전부터 나혼자 몰래 바랬었다.

아주 짧은 순간의 피란이 될지라도...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사람들이 없다.

그래서 좋았다.

오래오래 내려다봤고,

오래오래 올려다봤고,

오래오래 바라봤다.

파란 바다를 옆꾸리에 끼고 있는 축구장에 반했고,

혹시라도 축구공이 경기장을 넘어가

공을 되찾으려고 전속력으로 달려갈까?

아니면 깔끔하게 포기할까?

오래 지켜봤지만 결국 알 순 없었다.

 

 

타르티니 광장도 한 주먹 크기고

성 죠지 성당 종탑의 미카엘 천사도 눈 아래 선명하다.

또 다시 전지적 시점의 출현이다.

산과 바다, 광장과 종탑. 그리고 바다와 하늘.

이 모든걸 2유로로 볼 수 있다는건,

더없는 축복이다.

물론 두브로브니크의 성벽과는 비교가 불가하지만

위에서 내려다보는 뷰는 이곳도 만만치 않다.

아기자기한 규모가 주는 아름다움.

그게 참 좋았다.

만약 파괴된 성벽을 제대로 보수한다면

두브로브니크 성벽과 쌍벽을 이루수 있을 것 같다.

슬로베니아가, 피란이,

그럴 마음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라면,

보수하지 않을 것 같다.

이 작은 도시가 관광객으로 미어터져 변하는건 결코 보고 싶지 않으니까.

避亂할 수 있는 Piran으로

내내 남아줬으면 좋겠다.

Posted by Book끄-Book끄
여행후 끄적끄적2018. 10. 19. 09:12

수도원을 나와 골목길을 따라 뒷길로 올라갔다.

다음 목적지는 피란 성벽.

원래 피란은 성벽으로 빙 둘러쌓인 도시였는데

합스부르크 지배때 거의 대부분 파괴되버렸고

지금은 200m 정도만 남아있다.

두브로브니크 성벽과는 규모와 뷰(veiw)면에서 다 소박하지만

단돈 2유로의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표를 사러고 매표소에서 줄을 섰는데

마침 한국에서 온 단체팀 뒤에 서게 됐다.

인솔하는 가이드분이 한국분이냐고 물어봐서 그렇다고 했더니

같이 계산할테니 그냥 올라가란다.

감사 인사를 드리고 냉큼 뒷줄에 따라 붙었다.

생각지도 못한 뜻밖의 행운이라니...

감사합니다!

 

 

류블라냐에서 피란으로 이동하는 동안

워낙 버라이어티한 날씨를 경험해서 걱정이 많았는데

피란에서는 거짓말처럼 날이 화창하다.

가이드책에는,

날씨가 좋은 날 피란 성벽에 오르면

이탈리아 트리에스터와 크로아티아까지 볼 수 있다고 써있어서

은근히 기대가 된다.

(근데 뭐... 내가 워낙 길치에 발향치라서....)

 

 

혼자 조용히 둘러보고 싶어서

단체관광객과 시간차를 두고 움직였다.

오후 3시,

피란의 태양에 자비란 없다.

그늘 하나 없는 성벽 위에 단체관광객과 나만 있는걸보니,

다들 태양을 피해 다니는 모양이다.

이분들마저 우루루 빠져나가면,

이곳은 또 여지없이 내 차지가 되겠구나 싶다.

이대로 최대한 천천히, 그리고 최대한 느리게...

이 구역 주인 될 준비.

시~~~작!

Posted by Book끄-Book끄
여행후 끄적끄적2018. 10. 18. 13:43

타르티니 광장에서

어디로 갈지 잠시 망설였다.

사실 목적지는 종탑이었는데

골목골목을 다니다 길을 잃어 하얀 건물 앞에 도착했다.

조그마한 도시에서 조차 이렇게 길을 잃는걸보니

나는 확실히 아주 성실하고 꾸준한 길치임에 분명하다.

 

 

중정(中庭)에 홀려 들어간 곳은 Samostan SV, Franciska.

중정을 둘러싸고 있는 하얀 외벽엔 그림이 걸려있어

마치 전시회장에 들어선 느낌이었다.

텅 빈 제단을 찍은 텍스트도 있었는데

옆에는 제단화의 원래 모습이 있었다.

저 그림이 그대로 보존됐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했다.

 

 

성당 내부 모습.

작고 단정하다.

작은 도시 피란에 딱 어울리는 조용하고 아담한 성당.

발걸음 소리도 조심스럽다.

성당 내부를 천천히 둘러보다 그림이 있는 제단도 찾았다.

처음엔 12제자가 그려딘 천정 돔 때문에 갔었는데

그곳이 바로 그림이 있는 제단이더라.

하얀 벽뿐인데 어떻게 성모자상 그림이 있다는걸 알았을까... 궁금했는데

어딘가 자료가 있었겠구나... 짐작했다.

 

 

 Chiesa Della Madenna Ella Neve.

수도원과 아주 가까운 곳에 있는 작은 성당이 하나 있는데

성모 마리아에게 봉헌된 곳인것 같다.

입구를 막아서 안으로 들어갈 순 없었지만

밖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신성을 품은 모성의 거룩함이 느껴졌다.

제단 한가운데 금빛 십자가가 선명하다.

그리고 고개를 돌리면 보이는 골목, 골목들.

이곳이라면,

길을 잃은대도 아무 상관 없겠다.

물론 정말 그러면 큰 일 날테지만... ^^

Posted by Book끄-Book끄
여행후 끄적끄적2018. 10. 17. 08:43

어느 도시를 가든,

내가 그 도시를 여행하는 방법은 딱 두 가지다.

높은 곳을 올라가거나,

아니면 광장을 찾아가거나...

피란의 시작은

마땅히 광장이어야 한다.

"타르니티 광장(Tartinijev Trg)"

 

 

타르티니 광장은...

참 재미있는 곳이다.

관공서로 짐작되는 고풍스런 건물을 중삼으로

주변 3/2 가량이 건물로 둘러쌓여 있다.

그리고 눈 앞에는 푸른 바다,

머리 위에는 파란 하늘과 하얀 비행운.

작은 광장이지만

지금껏 내가 본 광장 중 가장 완벽한 광장이다.

내가 보고 싶어하는 모든 것들을 다 갖추고 있는

광장의 종합선물셋트.

 

 

피란은 3세기부터 18세기까지 베네치아공국의 일부였단다.

그래선지 곳곳에 베니스의 흔적과 느낌이 남아있다.

광장 한가운데 바이올린을 들고 서있는 동상의 주인공은

바로크 시대 활동한 피란 출신 음악가 "쥬세페 타르티니".

피란에 머무르는 동안

이 분 앞을 수십번은 지나다니게 될테니

정식으로 인사라도 해야 할 것 같다.

쨍한 햇빛 속을 뚫고 동상 앞에 섰다.

두 손 곱게 모아서 공손한 배꼽인사를 드렸다.

"안녕하세요? 쥬세페 타르티니님!

 전 이곳을 찾아온 낯선 사람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꾸벅.

Posted by Book끄-Book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