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끄적 끄적...2010. 11. 24. 05:44
2008년 오스트리아에서 믿을 수 없는 사건이 발생했었다.
(해외토픽에서 이 뉴스를 본 게 선명하다. 도저히 믿겨지지 않았었다.)
요제프 프리츨이라는 73세의 노인이
24년간 자신의 친딸을 밀실에 가두고 성폭행해온 사건이었다.
게다가 딸은 감금당한 채로 아버지의 아이까지 낳았다고 한다.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희대의 사건!
엠마 도노휴의 소설 <ROOM>은 바로 이 사건에서 모티프를 얻었다.

특별한 엄마와 아들이 있다.
하루종일 두사람은 재미있는 놀이를 하면서
이 세상 어떤 부모자식의 관계보다도 사랑스럽고 친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처음에 두 사람의 이런 관계 때문에 이 소설은 오히려 평화스럽고 사랑스럽게 느껴진다.
아마도 아이의 눈으로 쓰여졌기에 더 그랬으리라.



그런데 사실은 두 모자가 생활하는 곳은
뒷마당 헛간에 철제로 만들어진, 외부와 철저히 격리된 밀실(Room)이다.
외부세상을 알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오래된 TV 뿐이고
매주 일요일 그녀를 강금한 올드 닉이란 인물이 필요한 물품을 가져다 준다.
그만 알고 있는 문의 비밀번호를 누르고... 삐릭 삐릭...
아이의 다섯살 생일에 엄마는 말한다.

난 열아홉 살이었는데 그가 날 훔쳤어.
그가 나한테 잠드는 나쁜 약을 먹였어.
일어나 보니 난 여기 있었단다.
우린 여기서 나가야 해! 그것도우리 힘으로!

두 사람은 탈출계획을 짜고 드디어 어렵게 어렵게 성공한다.
다섯 살 어린 아이는 엄마가 세운 계획을 실행하면서 (물론 중간에 작은 실수들이 있었지만)
엄마와 자신의 생명을 구한다.
작은 방이 세상의 전부였던 아이는 이제 텔레비젼 밖의 세계가 진짜라는 걸 하나씩 알게 된다.
아이는 직사광선에 노출되는 데에도 특별한 주의가 필요하고
바람이 빰에 닿은 느낌조차도 낯설게 받아드릴만큼 
외부 세계를 경험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이렇게 세상에 나온 그들은 당연의 세간의 이목에 집중된다.
7년간 납치되어 강금당한 채 강간과 폭행을 당한 여자!
그리고 죽이고 싶도록 증오스러운 납치범의 아들을 낳은 여자!
그러나 그 아들 잭 때문에 고통의 시간을 버텨내고 탈출을 계획한 여자!
세상으로 겨우 탈출에 성공한 엄마에게 세상은 묻는다.
"단 한 순간이라도 아이의 머리를 베개로 눌러버리고 싶지 않았나요?" 
누군가는 그녀에게 스톡홀름 신드롬(Stockholm syndrome)을 의심한다.
인질이 범인에게 동조하고 감화되는 비이성적인 심리 현상을 뜻하는 스톡홀름 신드롬!
감금되어 있는 현실을 뻔히 알면서도 무책임하게 아이를 낳았다는 비난의 말도 듣는다.
여자는 말한다.
"난 사람들이 우리가 끔찍한 일을 겪은 유일한 사람들인 양 취급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사람들은 온갖 방식으로 감금돼 있어요"
힘들었을까?
엄마는 치료와 보호를 받고 있던 클리닉에서 한웅큼의 약을 삼킨다.
꼼짝도 하지 않고 자고만 있는 엄마를 보며 아이는 말한다.
"엄마가 없어졌어요"



끔찍한 범죄를 이야기하는 아이의 시선은
신비스러울만큼 사랑스럽다.
범죄이야기를 이렇게 읽어도 되는 건가?
죄책감이 들 만큼 아이는 사랑스럽고 순수하다.
엄마를 병원에 남겨두고 외할머니집에서 생활하게 된 아이는 생각한다.
...... 네 살 때는 텔레비전에 있는 모든 것이 그냥 텔레비젼인 줄 알았지만, 다섯 살이 되자 엄마는 텔레비전 안의 많은 것들이 진짜 물건들의 그림이고 밖의 세상도 정말 진짜라고 알려주었다. 그런데 이제 바깥세상에 나와 보니 그중에 많은 것들이 진짜가 아니었다 ......
아이의 눈에 보이는 그대로를 말한 것에 불과하지만
이 말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범죄를 보는 우리의 심리에는 어느 정도 관음의 시선이 있음을 인정하게 된다.
끔찍한 범죄일수록 더 자극적이게 묘사하고 폭로하려는 심리.
어쩌면 이게 스톡홀름 신드롬보다 더 잔인한 인간심리인지도 모르겠다.
작가는 자극적인 범죄 자체에 세상의 시선이 집중되는 사이
피해자들이 어떤 삶을 살아가게 될지에 이야기의 촛점을 맞췄다고 한다.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는 세상은 또 얼마나 상습적으로 일어나던지...
성범죄 관련에서는 항상 이런 역치현상이 빈번하게 발생한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안타깝게도 더욱 더.

엄마의 시선과 힘...
어떤 상화에서도 이해되지 못할 만큼 강한 것 같다.
세상이 한 아이를  범죄자의 핏줄로 보는 동안에도
엄마의 눈에는 단지 사랑스럽고  반드시 지켜야할 자신의 아들일 뿐이다.
올드 닉이라는 범죄자의 손아귀에서 간신히 벗어난 엄마는
이제 세상이라는 더 큰 손아귀로부터 아들을 지켜내야 할지도 모른다.
차라리 밀폐된 좁은 방이 아들을 지키기가 훨씬 더 쉬웠을까?
그래도 엄마는...
결국은 자신의 아들을 지키고 보호해내지 않을까?
아들과 홀로 독립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 
나 스스로도 그 희망과 의지가 결코 꺽이지 않으리라 안심했다.  

소설을 읽으면서
내내 "시선"과 "모정"에 가슴이 뻐근했다.
Posted by Book끄-Book끄
읽고 끄적 끄적...2009. 10. 20. 06:14
이제야 읽었다.
연극의 명성으로만 들었던 책.
어떤 내용일지 궁금했지만 선듯 손에 잡지 못했던 책.
연극도, 책도 명성으로만 알고 있던 책.
너무 진지할까봐 혹은 너무 민망할까봐 사뭇 걱정스러웠었는데
전혀 그런 느낌은 들지 않는다.



모든 여성은 대개 성기에 대한 엄청난 부담과 부끄러움을 안고 성장한다.
성기에 대한 부끄럽지 않아도 되는 때를 희망하며
이 책은 비밀시되고 은밀하게 취급했던
여성 성기게 입을 달고 말을 시작한다.
가령, 여성 성기에 옷을 입힌다면 적당한 옷은 어떤 것일까?
대표되는 냄새는 어떤 것일까?
그리고 말을 건다면 그 처음을 어떻게 시작할 것인가?
이런 질문에 당신도 한 번 답해보라 은근히 부추킨다.



재미있는 에피소드도 있다.
이 책을 처음 출판하기로 했던 출판사는
작가에게 계약금가지 지불했지만
결국 출판을 포기했하고 원고를 반환했다고 한다.
그 내용이 파격적이거나 과격하지도 않았는데
단지 여성 성기 운운하는 것에 지례 겁을 먹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강간이나 할례!
여성 성기에 행해지는 저급하고 치명적인 불행.
이 불행을 멈추는 시작은 은어나 속어로 불려지고 있는 여성 성기에
제대로 된 이름을 당당하게 부르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단다.
불행은 계속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만 종식될 수 있고
이를 가능하게 하는 유일한 길은 여성 스스로 처벌이나 응징에 대한 두려움 없이
여성 성기에 대해 말하게 하는 것이라는 게 이 책의 요지이기도 하다. 



초경의 기억, 여성의 오르가즘, 신음소리
그리고 버자이너의 질감과 클리토리스에 대한 독백들.
이 책을 통해 만나게 되는 이야기다.
그러나 별 기대는 마시라.
어쩌면 당신들이 생각하는 그런 내용은 절대 아닐 수 있으니...
읽을 수록 왠지 서글퍼지는 책이다.
왠지 여성이, 여성을 여성이게 만드는 생물학적 성적 차이가
성적 차별보다 더 접근하기 힘든 철옹성처럼 느껴진다.



1996년 오프 브로드웨이 극장에서 초연됐다는
연극 <버자이너 모놀로그>
우리나라도 지금 대학로 소극장에서 오랫동안 공연되고 있다.
위노라 라이더, 우피 골드버그, 케이트 윈슬렛, 브룩쉴즈, 기네스 펠트로 등
전 세계 유명 여배우들이 노개런티로 출연하게 만든 연극
그 출연료는 보스니아 등 소외된 세계 여성들을 위한 기금으로 사용되고 있다.
한 마디로 무지 착하고 기특한 연극!
기회가 된다면 한 번 찾아서 보고 싶다.
혼자 조용히 버자이너의 독백들.
대꾸하게 될까? 나는?
Posted by Book끄-Book끄
달동네 책거리2009. 7. 27. 06:25
 <메신저> - 마커스 주삭


메신저


마커스 주삭!

2008년 <책도둑>이란 2권의 책을 통해 처음 알게 된 상당히 새파랗게 젊은 작가! (고백컨대 개인적인 시기심 엄청 심난하게 들어있습니다)

순서가 좀 많이 뒤바뀌긴 했지만 <책도둑>보다 먼저 쓴 그의 책 <메신저>가 뒤늦게 번역돼  우리나라에 소개됐네요.

<메신저>라....

제목에서부터 이미 너무 많을 걸 말하고 있는 것 같아 문득 걱정부터 앞섭니다.

“어라! 이 사람, 도대체 메신저라는 제목을 이렇게 대놓고 정면에 내세우고 얼마나 재미난 이야기를 할 수 있다고....”

그런데 이 걱정은 역시나 쓸데없는 기우였습니다.(그리고 이 부분에서 한 번 더 개인적인 몹쓸 놈의 시기심 등장합니다....)

재미! 

여기서 개그콘서트 달인 김병만의 말투를 잠시 빌리렵니다.

“재미요? 그거 안 읽어 봤으면 말을 마세요~~”


에드 케네디.

19년 동안 내내 별 볼일 없이 오히려 한심의 축에 더 많이 몸을 담그고 살아온 불법 택시 운전사를 이제 여러분께 소개합니다.

더불어 소위 노는 물이 같은 세 명의 절친들까지도요.

2명의 남자 친구들 리치, 마브, 그리고 1명의 여자 친구 오드리(비록 일방통행이긴 하지만 에드가 짝사랑하고 있는 오랜 친구랍니다 ^^)

우연히 은행 강도를 붙잡아 졸지에 잠시 동네 우상이 된 에드는 어느 날 우편함에서 세 개의 주소가 적힌 다이아몬드 에이스 카드 한 장을 받게 됩니다.

별 볼일 없던 에드가 메신저로서의 삶이 시작되는 순간이네요.

카드에 적힌 주소로 찾아간 에드는 그곳에서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받게 될 세 명의 사람들을 한명씩 만나게 됩니다.

밤마다 자신의 아내를 강간하는 남자와, 이미 한참 전에 죽은 남편 지미를 그리워하며 살고 있는 노년의 밀라, 그리고 매일 아침 맨 발로 달리기를 하는 소녀 소피까지...

어쨌든 이 세 명에게 성공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한 에드. (그 과정은 책을 통해 직접 확인해보라고 말한다면 좀 얄미울까요? 그래도 그리 하렵니다... ^^)

왠지 모를 평온함과 행복감에 잠깁니다.

매일 밤 엄마가 아빠에게 강간당하는 모습을 봐야만 했던 딸 안젤리나가 어느날 에드에게 했던 말이 생각나네요.

“우릴 구해주러 왔나요? 노력은 해줘서 고마워요”

애드가 첫 번째로 전달한 메시지는 아마도 더 좋은 사람이 되려고 애쓰는 모든 "노력", 그 자체였는지도 모르겠네요.


집으로 돌아온 에드에게 또 다시 클럽 에이스 카드 한 장과 짧은 편지가 건네집니다.

“고향의 돌에게 기도하라”

에드는 이 일에 선택받은 사람이 다른 사람이었으면 좋겠다고 잠시 소망하기도 하지만 어쨌든 이 일이 자신에게 주어졌음을 점점 인정하게 되고 결국 해야만 하는 일들을 하나하나 실행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어렵게 찾아낸 “고향의 돌”에 적혀 있는 세 명의 이름.

토마스 오라일리 신부의 텅 빈 성당을 사람으로 가득 찬 축제의 장으로 만들고, 아이스크림 하나로 생계에 지친 어린 어머니 앤지 카루소의 마음을 위로하고, 그리고 비록 온 몸에 멍이 들긴 했지만 개빈 로즈의 금이 간 형제애를 회복시키는데도 성공합니다.

두 번째 메시지는 "관심"이었을까요?


세 번째 카드인 스페이드 에이스도 에드를 찾아 왔네요.

역시나 3명의 이름이 적혀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엔 작가들 이름이네요.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온 에드는 책 제목과 책에 표시된 페이지를 연결해 드디어 세 개의 주소를 알아냅니다.

이 메시지 안에는 어쩌자고 에드의 어머니도 포함되어 있네요.

살짝 금이 간 부분을 애써 외면하며 지내고 있는 어머니와 아들.

“왜 날 그렇게 미워하세요?”

아들의 질문에 어머니는 답을 합니다.

“왜냐하면 널 보면 그 사람이 생각나거든. 넌 여기 있어. 바로 그게 문제야”

어머니는 자신의 남편이 그랬던 것처럼 아들이 이 구질구질한 동네를 떠나지 못하고 죽게 될까봐 싫었던 겁니다. 오히려 둘째 아들보다 더 뛰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못한 게 말이죠.

망연자실해있는 아들에게 어머니는 한 마디 말을 더 남깁니다.

“사랑이 아주 커야만 너를 이렇게 미워할 수 있는 거야”

세 번째 메시지는 이해를 통한 "감사"였던 것 같네요. (어디까지나 제 생각입니다)

힘들긴 하겠지만 에드는 어머니를 이해하게 될 것이고 그리고 결국은 감사하게 될 거라는 걸 믿습니다. 다른 두 명에게 그랬던 것처럼 말이죠.

에드는 혼자 생각합니다.

“장소가 아니라 사람이 문제예요. 만일 내가 이곳을 떠난다 해도 먼저 여기서 더 나은 사람이 된 다음에 떠날 거예요.”라고...


네 번째 카드, 에드의 손에 남겨진 하트 에이스에는 세 개의 영화 제목이 적혀 있습니다.

<옷가방>, <캣 벌루> , <로마의 휴일>

어쩐지 드라마틱하고 로맨틱하게 느껴지기도 하네요.

그런데 이 세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 혹은 배우의 이름이 바로 에드의 별 볼일 없는 세 명의 친구들 이름과 일치합니다.

영화 순서대로 리치, 마빈, 오드리까지...

이제 에드는 순서대로 이들의 메신저가 돼야만 합니다.

늘 함께 너저분한 방에 모여 허접한 카드놀이로 시간을 보냈던 친구들.

항상 너무나 친하기에 잘 알고 있었다고 내내 착각했던 친구들에게서 고백되는 "진실"들.

그러네요. 세상 모든 사람에겐 누구나 비밀이 한 가지씩은 있다는 거.

그 비밀을 폭로가 아니라 고백해야만 비로소 진실이라는 자유와 만날 수 있게 된다는 거.

어쩐지 이 네 명의 친구들이 이제는 우정 그 이상의 울타리를 얻게 될 것만 같습니다.


에드는 이제 마지막 카드가 될 조커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안에 담길 세 명의 사람은 과연 누가 될지....

그러나 전달 된 마지막 카드 조커에는 지금까지의 방식과는 다르게 3명이 아닌 단 한 사람의 주소만이 쓰여 있습니다.

“시핑 스트리트 26번지”, 바로 에드 자신의 집 주소죠.

책의 남은 페이지가 얼마 없는데 이 이야기는 이제야 진짜 시작되려는 것 같습니다.

에드는 과연 마지막까지 메신저로서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을까요?


에드의 집,
한 남자가 그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모든 일을 자신이 준비했다며 그 남자는 에드에게 말합니다.

“내가 그런 건 네가 평범함의 전형이기 때문이야.

 너 같은 녀석이 일어서서 그 모든 사람들을 위해 그런 일을 할 수 있다면,

 다른 사람들도 모두 할 수 있을 거 아냐.

 모두가 자신의 능력 이상의 일을 하며 살 수 있을 거 아냐.

 어쩌면 나도 그렇게 살 수 있을 거 아냐”

에드는 묻습니다.

“나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남자는 대답합니다.

“계속 살아, 에드! 책만 여기서 멈출 뿐이야”

소설에 나오는 대사 치곤 꽤 독하네요.

그러나 이 책이 환상 혹은 한 여름 밤의 꿈이라고는 절대로 생각하지 않길 당부드립니다.

왜냐하면 에드가 받은 마지막 카드 조커는, 사실은....

에드드가 아니라 책을 읽고 있는 바로 당신에게도 전달된 메시지니까요.

자, 지금쯤이면 당신은 에드의 메시지를 받을 준비가 되어 있을까요?

준비가 되어있다면 당신이 받은 마지막 메시지는 과연 무얼 품고 있을까요?

이쯤 되면 저 역시도 당신이 받았을 그 메시지가 진심으로 궁금해집니다....


Posted by Book끄-Book끄
달동네 책거리2009. 7. 20. 06:21
 <추락> - J.M. 쿳시


 추락


지적이면서 끔찍하게 치열한 책을 만나게 되면 등골이 오싹해지는 기분이 듭니다.

그리고 나면 정말 미칠 정도로 그 내용 속에 빠져들게 되죠.

오랜만에, 정말 오랜만에 그런 경험을 다시 했습니다. 지금 소개하는 <추락>이 바로 그런 충격을 안긴 책입니다.

오싹하다 못해 머릿속까지 서늘해지는 느낌.

J.M. 쿳시라는 작가의 책을 처음 읽게 된 게 도무지 억울하고 속상해서 화가 다 날 정도라고 하면 이해가 되실까요?

이 소설의 원 제목은 <치욕>입니다.(개인적으로 우리나라에서 왜 “추락”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됐는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번역가 왕은철이란 분이 작가와 합의해서 제목을 고쳤다고는 하는데 “치욕”이라는 원제가 더 책의 내용에 적합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J.M. 쿳시!

가장 타협하지 않는 작가이자 가장 분명하고, 가장 용감한 작가로 알려진 사람!

2003년 스웨덴 한림원은 그를 96회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지목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플리처상보다 더 권위 있다고 알려진 부커상을 그것도 한 작가에게 두 번 주지 않겠다는 전례를 깨고 세계 최초로 두 번이나 수상한 작가이기도 합니다.

부커상 심사위원들은 “쿳시가 수상식에 참석하지도 않을 것이고 그 이후의 만찬장에서도 그의 자리가 비어있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그를 선택했다”고 밝히기까지 했네요.

그리고 누군가는 이런 표현을 쓰기도 했습니다.

"그의 글은 아이스 피겔로 얻어맞은 느낌"이라고....

누군가는 또 말합니다.

"심오한 정치의식을 지니면서도 모든 단어들을 아름답게 조합하는 작가"라고요.

그의 글은 비록 이 책이 처음이긴 하지만,

실제로 여기에 나오는 모든 단어들은 에너지로 충만합니다. 그 에너지는 때론 “파렴치”한 욕망의 형태로, 때론 걱정 가득한 “부성애”의 마음으로, 때론 비난과 욕설, 그리고 원망과 싸움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살아 있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 살아 있기에 인정해야 하는 혹은 살아 있기에 떠날 수 없는 사람들의 선택에 대한 이야기.

이 소설 안에는 그런 살아 숨쉬는 현실이 그대로 담겨있습니다.

글의 위대함이란,

그 안에 살아온 시대가 거짓 없이 그대로 투영되어 있을 때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균형과 흥미를 잃지 않으면서도 진실을 품는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우리네 같은 평범한 사람들은 감히 시도하기조차 어려운 일일 겁니다.

J.M. 쿳시, 이 사람의 글은 그래서 그대로 현실이 되어버립니다.


50을 넘긴 “데이비드 루리”.

욕망에 따라 행동하는 대학교수 루리는 스무살 제자 멜라니와 충동적인 사랑에 빠져 잠자리를 함께 합니다. 결국 멜라니 부모의 고발로 진상위원회가 열리게 되고 루리는 추문의 한가운데 위치하게 되죠.

사과문 발표를 강요하는 그들의 요구를 거부한 루리는 결국 대학을 떠나 딸이 살고 있는 남아프리카 농장에 잠시 머무르게 됩니다.

루리는 말합니다.

“내 사건은 욕망의 권리에 관한 것이다. 어떤 동물도 본능을 따랐다는 것 때문에 벌을 받게 된다는 걸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이야기의 초반은 이렇게 좀 불편하고 파렴치하기까지 합니다.

책 제목 그대로 욕망대로 살아가는 한 인간의 추락상을 보여주고 있죠.

이 루리라는 남자의 욕망은 비난받아 마땅하긴 하지만 그래도 당당함과 이유 있음에 무조건 손가락질 할 수 없음을 인정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적어도 이 사람은 자신이 스스로 욕망에 따라 살고 있음을 확실히 인정하고 있으니까요. 잠시 가면을 쓰고 기다리라는 주위의 권고조차 거부할 정도로요.

딸의 농장에서 함께 지내던 루리에게,

어느 날, 3명의 흑인 남성이 딸을 집단 강간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그 일로 급기야 딸 루시는 임신까지 하게 됩니다.

자 이제부터 이 이야기는 “치욕”의 이야기로 전개됩니다.

자신에게 일어난 일들은 단지 추락으로 받아들일 수 있지만 내게서 생명이 시작된 딸에게 일어난 사건은 “추락”을 넘어 “치욕”으로 다가옵니다.

이 사람, 이 치욕의 시간을 어떻게 견디고 버텨나갈까요?

백인 지배가 종결되고 흑인 정권이 들어선 지금의 남아프리카 공화국.

과거 우리나라가 그랬던 것처럼 이곳도 지금 혼란과 변혁의 시대를 통과하고 있는 중입니다.

수백년간 지속되어 온 흑백갈등이 단순히 정권의 교체만으로 하루아침에 모두 해결될 수는 없는 일이겠죠.

어쩌면 혼란의 시대를 살아가기 위해서 그 땅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겐 그만큼의 희생과 포기가 필요한 건지도 모릅니다.

흑인지배 지역에서 살아가기 위해 백인의 선택,

만약 당신이 그 세계를 선택했고, 선택한 그 세계에 머무르기 위해서 값을 치러야 한다면 당신은 어떤 추락도 혹은 어떤 치욕도 감당할 자신이 과연 있을까요?

살아가는 게 욕망의 문제라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는 선택의 문제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흑인들의 땅을 떠나라는 아버지에게 딸은 자신의 선택을 말합니다.

“그러나 어쩌면 다시 시작하기에는 좋은 지점일 거”라고...

딸 루시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걸, 아무 것도 없는 상태로 밑바닥에서 출발하는 걸 배우겠다고 말합니다.

재산도, 무기도, 권리도 위엄도 그 무엇도 없는 본질에서부터 출발하겠다고요.

아비는 딸에게 묻습니다.

“넌 그 아이를 사랑하니?”

딸은 말합니다.

“아니요. 제가 어떻게 그럴 수 있겠어요. 하지만 그것에 관한 한 모성을 믿어야지요. 아버지, 저는 좋은 엄마가 될 작정이에요. 좋은 엄마이자 좋은 사람이 되겠어요. 아버지도 좋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해보세요“

딸은 지금 아버지의 과거에 대해 책망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불안하고 혼란한 세계를 살아내고 있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믿음. 그들이 시작할 때 반드시 지니길 바라는 그 믿음에 대한 묵시론적 바램의 표현이죠.

불안의 시대면 여지없이 나타나 점점 커져만 가는 틈.

그 틈을 매울 수 있는 건 자신에 대한 “믿음” 그 하나뿐이라고 이 책은 말하고 있습니다.

한 세대와 한 세대 사이에는 커다란 장막이 존재한다고 합니다.

그 장막이 내려오는 걸 보지 못했다고 해서 이미 내려진 장막의 존재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는 일이겠죠.

누가, 왜, 어떻게 이런 장막을 내렸는가에 대한 진상규명 탁상공론은 이제 더 이상  필요하지 않습니다.

누군가는 그 장막의 끝을 잡아야만 하겠죠.

다시 끌어 올리든, 힘껏 끌어 내리든 말입니다.

지금 스스로 추락의 시대, 치욕의 시대를 산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다시 한 번 정직하게 그 질문의 방향을 생각해봐야 합니다.

만약 견딜 수 있다면,

그리고 그 자리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당신의 치욕은 결코 당신을 추락으로 이끌진 않을 거라는 걸 믿습니다.


Posted by Book끄-Book끄
읽고 끄적 끄적...2009. 7. 10. 06:03
J.M 쿳시의 소설 <추락>
이 작가의 책은 처음으로 읽어봤는데
충격적이다. 그리고 강렬하다.



소설의 원래 제목은 <치욕>이라 하는데
난 이 제목이 더 이 책의 내용을 대변하는 것 같다.
백인과 흔인의 문제
흑인에 의해 강간당하는 남아프카에 사는 백인 여성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땅에 남기를 선택한 딸



누군가를 그런 표현을 썼다.
"아이스 피겔로 얻어 맞은 는낌"이라고.
J.M 쿳시....
그의 책을 탐하게 될 것 같다.
신비하고 모호하고 그리고 명석한 사람
1940년 생, 단 아홉권의 책으로 세계의 주목을 받는 사람.
가장 타협하지 않는 작가이자
가장 분명하고, 가장 용감한 작가!
심지어 그가 시상식장에 나타나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스웨덴 한림원은
그에게 "노벨문학상"을 줄 수 밖에 없었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나는
이 책 한 권으로 그 고백을 100% 이해했다.



아비도 딸도.
이 책은 이해되지 않는 것들로 가득하다.
그러나 너무나 강렬하게 살아있다.
책 속 곳곳을 팔딱거리며 뛰어다니는 생명력

"나를 죽이지 못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나를 더 강하게 만든다"

Posted by Book끄-Book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