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끄적 끄적...2012. 11. 14. 08:15

<멸(滅)>

부제 : 2012 국립극단 삼국유사 프로젝트

일시 : 2012.11.03. ~ 2022.11.18.

대본 : 김태형

연출 : 박상현

출연 : 정보석, 신덕호, 정나진, 우미화, 이동준, 이상홍, 김민하 외

 

국립극단의 "삼국유사 프로젝트"

이거 정말 엄청난 물건이다!

지금까지 네 편 모두를 봤는데 이 대단한 상상력들과 대단한 연기에 감탄 그 이상을 하게 된다. 

작가와 연출, 배우와 무대가 거의 엄청난 몰입과 집중으로 완벽하게 나를 유혹하고 붙잡는다.

관람하는 동안은 그야말로 속수무책이다.

결코 탈출은 꿈도 꾸지 못할 극형의 죄수가 되어 옴짝달짝 못하게 사로잡혔다고 할까? 

 

연극 <멸>은 "삼국유사 가이 제2" 가운데 김부대왕편을 모티브로 만들었단다.

좀 경력이 되는 작가의 대본이라고 생각했는데 신예 작가(김태형)라서 놀랐다.

역사의 빈틈을 무한한 상상력으로 날개를 달아 준 느낌이다.

사촌인 경애왕을 죽이고 신라 56대 왕에 오른 김부대왕(경순왕)의 종말로 향하는 욕망과

후삼국의 은밀하고 치열한 이권다툰,

마의태자의 비극적인 비화를 표현한 독특한 발상이 대단히 매혹적이었다.

역사는 승자의 입장에서 기록되는 게 아니라 살아남은 자의 입장에서 기록되는 거라고 했나!

그렇다면 나는 이 작품을 통해 다른 해석을 해보고 싶다.

역사는 상상하는 자에 의해 기록된다!... 라고

그런 의미에서 작가 김태형은 역사가라고 말해야 할 것 같다.

 

후삼국의 고대사를 현대적인 복장과 무대로 표현한 건 파격적이면서도 현실적이다.

심지어 실용적이라는 생각까지도 든다,

(연극에 "실용적"이라는 단어가 어울릴지는 모르지만...)

포석사의 교합제 모습도 박정희 정권의 삼청동 안가를 떠올리게 하고

마피아나 일본의 아쿠자의 세력다툼을 떠올리게 하는 왕위쟁탈전과

쿠테다로 정권을 잡고 장기집권을 꿈꾸던 김부대왕의 모습은

자꾸 우리의 현대사를 떠올리게 한다.

보고 있으면 허를 찌름과 동시에 찬찬하고 부끄러운 복기(復記)를 하게 만든다.

 

어쩌면 역사 속에서 진실같은 건 정말 중요한 게  않을지도 모르겠다.

다만 진실처럼 보여지는 게 중요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작품 속 김부의 대사처럼 성군(聖君) 따위는 애초에 없다는 말도 옳다!

어떻게 보여지는냐가 중요할 뿐이다.

그게 진실이고, 그게 역사가 된다.

세상에 영원한 단 한 가지.

욕.망!

그러나 욕망의 끝은 "잃음"이다.

그것도 모든 것을 온전히 잃어야 진정한 끝장이다.

아무 것도 남지않음을 알면서도 인간은 왜 끝없이 욕망하고 욕망할까?

어쩌면 인간은 욕망을 쫒는 게 아니라

파괴됨을, 무너짐을 쫒는 게 아닐까?

다 잃어봐야만 비로소 느낄 수 있는 극한의 쾌감.

그래서 기꺼이 역겨운 냄새를 풍기는 권력을 잡기 위해 애쓰고

그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끝없이 타인의 피를 요구하는지도 모르겠다.

인간의 속성이란 벰파이어의 그것과 같다.

그러니 웃.어.라.

 

대사들의 팽팽함이 대단하다.

그리고 그걸 표현하는 배우들의 내공 역시 기막히다.

이건 매력적이라거나 매혹적이라는 말 외의 단어를 찾아야 할 것 같다.

이런 작품 다시 만나기란 배우 입장에서도, 관객 입장에서도 쉽지 않을 것 같다.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를 떠오르게 하는 아비와 아들의 관계(김부-일, 견횐-신검),

마치 연인같은 모자 관계.

묘한 대립을 이루는 형제들(일-굉, 신검-금강).

온갖 애정과 애증의 관계들이 활어처럼 펄떡인다.

모든 인물들이 마치 날카로운 모서리를 가진 전투용 칼같다.

무대 위를 종횡무진 사납게 찌르면서 격하게 파고드는 걸 보고 있으면 순간 아득해지진다.

권력의 가파른 상승과 몰락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이는 무대도 의미심장했고

이런 비극적(?)인 내용에 의외로 생기발랄(?) 음악을 사용한 것도 이색적이다.

극의 초반부 교합제를 올리는 신모의 대책없이 어색한 랩과

장난감 총소리같던 조잡한 음향 따윈 충분히 용서될만큼 멋진 작품이다.

그래도 마지막 장면은 도저히 한 마디 안 할 수 없다.

극장 옆구리가 열리면서(?)

강풍기로 낙엽이 날리는 장면은 지금껏 이 작품에 갖던 경외감을 일순간 무너뜨렸다.

욕망을 쫒던 김부의 허망하고 초라한 역사적 퇴장을 보여주고 싶었다는 건 알겠는데

보는 입장에서는 참 코믹하고 황당하게만 느껴졌다.

심지어 강풍기 옆에서 최대한 몸을 숨기고 낙엽을 뿌리고 있을 스텝의 모습까지 떠올라 혼자 민망했다.

스텝들이 잘 막고 있어서 그럴 일은 없겠지만

문이 열렸는데 의도치 않은 상황이 발생한다면

배우도, 관객도, 문 앞의 사람도 참 황당하겠다 싶다.

이것 좀...

어떻게 해주시면 안 될까?

 

모든 배우들이 다 아름다웠지만

특히 정보석, 이동준, 이상홍의 연기가 각인되듯 남는다.

목소리톤과 딕션, 감정 표현이 그야말로 끝장이었다.

배우 정보석인 이 작품이 "시대를 파괴하면서 배우에겐 많은 자유를 줬다"고 했는데

그 말의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겠다.

 

이 작품.

치열하고, 아름답고, 그리고 깊다.

아마도 한동안은 거듭해서 생각하고 또 생각하게 될 것 같다.

기억에서 결코 쉽게 멸하지 않을 작품이다.

滅하지 않을 滅이라...

이 또한 모순이겠지만 어쩌라!

그게 진실인 걸.

 

* 이제 삼국유사 프로젝트 한 작품 남았다.

  "로맨티스트 죽이기"

  역시나 무지 기대하면서 기다리는 중이다.

  이번엔 잊지 않고 조기예매를 했다.
  <멸>은 조기예매를 놓쳐서 문화릴레이티켓으로 예매했었다.

  (당연히 조기예매를 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나중에 확인하니 예매를 아예 안 했더라.)

  게다가 당일날 티켓을 안 가져가 6000원을 현장 지불했다.

  지갑 속에 <꿈>, <꽃이다>, <처용은...>을 계속 가지고 다녔었는데

  공연 보는 날 아침 뭐에 씌였는지 3장 전부를 티켓 모아놓는 가방에 곱게 넣어버렸다.

  아침에 내가 한 일도 기억 못하고 막상 공연장앞에서 티켓을 찾다가 잠깐 맨붕 상태가 되버렸다.

  챙길 건 잘 챙기자!

Posted by Book끄-Book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