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끄적 끄적...2015. 3. 9. 07:55


<아가사>

일시 : 2015.02.11. ~ 2015.05.10.

장소 : 홍익대 대학로 아트센터 대극장

작가 : 한지안

작곡 : 허수현

안무, 예술감독 : 우현영

연출 : 김지호

출연 : 최정원, 이혜경 (아가사) / 강필석, 김재범, 윤형렬 (로이)

       박한근, 정원영, 주종혁, 려욱 (레이몬드) 

       김형균, 황성현 (아치발드) / 박준후, 안두호 (폴)

       이선근, 박종원 (뉴먼) / 주정화, 한세라 (베스)

       소정화, 박서하 (낸시) / 윤경호, 정승준 (에릭 헤리츠)

제작 : 아시아브릿지컨텐츠(주), (주)캔들미디어

 

소극장 초연때 나쁘지 않게 봤던 작품이라 작품의 규모가 커지면 엉성했던 부분들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건 아닌가 걱정스러웠다.

작품을 대폭 수정하면서까지 대극장용으로 만들걸 보면 

이 작품에 무한한 애정과 믿음이 있다는 뜻이기도 하니 일단은 그걸 믿어보기로 했다.

게다가 캐스팅의 귀재인 김수로가 이번에도 역시나 환상의 캐스팅을 공개했다.

작품이 잘 나왔다면 세 명의 로이를 다 보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일단 첫 관람은 가장 궁금했고, 가장 잘 어울릴거라 생각된 강필석으로 선택했다.

다른 캐스팅은 크게 문제되는게 없긴 했는데

개인적으론 아가사를 선택하는게 가장 난관이었다.

이혜경, 최정원 두 배우 전부 내 취향의 배우가 아니라 고민이 오래 됐는데

처음 선택을 뒤집고 최정원으로 최종 결정했다.


결론은...

작품 자체도, 배우들이 전부 괜찮았다.

(심지어 나랑 정말 안맞는 최정원 배우까지도...)

개인적으론 초연때보다 훨씬 더 빠져들어서 봤던것 같다.

초연땐 좀 늘어지는 부분들이 많았는데 이야기가 많이 정리됐고

개연성과 흐름도 더 긴밀해졌다.

로이의 미스터리함이 초연보다 약해지긴 했지만

로이가 좀 더 현실쪽으로 나와주니 "로이=아가사"의 등식은 훨씬 자연스럽더라.

초연때는 로이의 의상이 붉은색이었는데

이번에는 아가사의 의상이 붉은색으로 바뀌었고 

전체적으로 초연에 비해 "로이"에 변화가 많아졌다.

비중은 초연에 비해 많이 줄었지만 임펙트는 훨씬 강렬해졌다.

그리고 그걸 강필석이라는 배우가 너무 잘 표현했다.

대사톤과 타이밍, 표정도 정말 절묘하더라.
이 작품 전체를 끌고 가는 배우가 강필석이라는 확신이 들 정도였다.

<쓰릴미>에 이어 강필석 배우의 포텐과 매력이 "로이"라는 역할에서 또 다시 터져줬다.

늘 본인의 능력과 역량보다 덜 평가받는 배우라고 생각돼서 안스러웠는데

이제 그만 안심해도 되겠다.

강필석 배우의 "라비린토스" 비밀이 풀려 이제 제대로 전성기가 시작될 것 같다.

정말, 정말, 정말 매력적인 "로이"였고,

그보다 더 매력적이고 강렬한 강필석이었다.

아리아드네의 붉은 실로 라비린토스를 빠져나온 영웅 테세우스.

배우 강필석이 바로 그 테세우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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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 끄적 끄적...2014. 1. 9. 08:53

<Agatha>

일시 : 2013.12.31. ~ 2014.02.23.

장소 : 동국대학교 이해랑예술극장

극본 : 한지안

작곡 : 허수현

연출 : 김태형

출연 : 배해선, 양소민(아가사 크리스티) / 김수용, 진선규, 박인배(로이)

        박한근, 김지휘, 윤나무 (레이몬드) / 홍우진, 오의식 (폴&뉴몬)

        추정화, 한세라 (베스&낸시), 황성현 (아치벌드 크리스티)

주최 : 아시아브릿지컨텐츠(주)

 

김수로 프로젝그 여덟번째 작품인 창작뮤지컬 <아가사>

이쯤되면 김수로의 바람은 어느정도 이뤘다고 해도 되겠다.

"김수로 프로젝트"는 이제 탄탄한 브랜드로 자리를 잡았고

기존 인기작만 우려먹는 안일한 운영이 아니라 연극과 뮤지컬을 종횡무진 누비면서 라이선스 초연작에 여엿한 창작물까지 속속들이 공개하고 있다.

그것도 한 해에 몇 편이나 무대에 올리는 부지런한 행보다.

작품도 지금까지는 다 괜찮았고, 흥행도 나쁘지 않았고

공연장도 배우진도 김수로의 마당발 때문인지 대체적으로 작품에 맞게 선택을 잘했다.

그냥 잠깐의 외유인줄로만 알았는데

기획자로서 김수로의 근성과 열정에 참 대단하다.

개인적으론 "연극열전"보다 "김수로프로젝트"에 더 큰 점수를 주고 싶다.

 

<아가사>도 일단 배우진이 너무 좋아서 망설임없이 선택했다.

추리의 여왕 "아가사"의 실제 사건을 모티브로 만들었다는 점도 흥미를 끌었고

김태형 연출에 대한 믿음도 있었다.

1926년 2월 소설가 아가사 크리스티는 감쪽같이 사라진다.

11일 후 시골의 한 호텔에서 발견된 그녀는

그 사이에 자신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하지 못하노라 말했다.

그리고 평생 이 사건에 대한 언급을 회피했단다.

그 열 하루라는 시간의 추적!

작품은 그 사건의 언급으로 시작된다.

 

조명이나 무대도 전체적으로 괜찮았고.

"라비린토스(rabyrinthos)"나 "독"처럼 귀에 확 꽃히는 넘버들도 좋았다.

단지 스토리전개가 좀 느슨하다는게 단점!

본격적인 미스터리가 시작되기까지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

솔직히 좀 지루하더라.

로이의 정체도 너무 쉽게 알 수 있어서

미스터리 특유의 죄어오는 듯한 긴장감도 기대보다는 덜했고

춤은 살짝 엉성하더라.

개인적으론 공연 포스터와 첫곡 "악몽"이 너무 많은 정보를 준 건 아닌가 싶다.

"하나의 입구, 하나의 출구..."

공연관람 15년 차가 넘어가다보니 이젠 시놉만 봐도 어느 정도 스토리 전개와 결말이 눈에 보인다.

이 작품도 내가 예상했던 것과 거의 똑같더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흥미롭게 관람할 수 있엇던 건

역시나 배우들 때문이었다.

윤나무 레이몬드가 기복이 좀 심하긴 했지만

전체적으로 배우들 연기는 다 좋았다.

특히 로이 역의 박인배는 여러모로 돋보이더라.

(매번 느끼지만 박인배는 소리도, 연기도, 딕션도, 눈빛도 정말 좋은 배우다.)

작품 자체에 대한 재관람 의사는 별로 없지만

혹시라도 하게 된다면,

아마도 로이 박인배 때문일 것 같다.

 

Posted by Book끄-Book끄
그냥 끄적 끄적...2010. 10. 11. 08:23
제주돌문화공원서 공연 형식 전통 혼례 - (제주=연합뉴스) 김지선 기자

"이렇게 제주의 열린 공간, 대자연에서 많은 사람들과 함께 축제 분위기 속에서 결혼할 수 있어 정말 좋습니다."

현대무용가 홍신자(70) 씨가 독인 출신의 한국학자 베르너 삿세(Werner Sasse. 69) 한양대 석좌교수와 혼례를 치른 9일 오후 제주돌문화공원 하늘연못에서는 청명한 가을 날씨 만큼이나 아름다운 결혼식이 펼쳐졌다.
'홍신자 시집가는 날'이란 이름으로 열린 이날 결혼식은 예식과 공연이 어우러진 그야말로 축제의 한마당이었다.



오후 3시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하객들이 연꽃차(茶)를 나누며 시작된 결혼식은 홍씨가 이끄는 '웃는돌 무용단'이 1천300여㎡ 규모의 하늘연못에 꽃잎을 뿌리고 신랑신부가 그 위를 건너 중간에서 만나는 퍼포먼스에서 절정을 이뤘다.
또 서도소리 명창 박정옥 선생의 주례로 진행된 혼례에서 전통 평양식 혼례 복장을 입은 홍씨와 삿세 교수는 각각 가마와 말을 타고 등장해 큰 박수를 받았다.
홍씨와 인연이 있는 무용가들은 태평무 등을 추며 신랑신부의 하나됨을 축복했고, 하객은 물론 제주돌문화공원을 찾은 방문객들까지 두 사람의 영원한 사랑을 기원했다.
또 한글날을 맞아 결혼식 중간에 하객 모두가 일어나 '한글날 노래'를 부르는 뜻깊은 시간도 마련 됐다.

홍씨는 지난 9월 제주돌문화공원 오백장군 갤러리 개관식에서 '설문대할망과 오백장군 신화'를 무용으로 재현하는 등 제주와 각별한 인연을 이어왔다.
두 사람은 지난해 11월 한 미술전시회에서 처음 만난 뒤 몇 차례의 여행을 함께 하면서 급속히 가까워져 지난 4월 삿세 교수가 거주하는 전남 담양의 목조 기와 한옥에서 약혼식을 올렸다.

홍신자씨는 1967년 스물일곱의 나이로 뉴욕에서 춤에 입문, 1973년 파격적인 형식의 무용 '제례(祭禮)'로 주목받기 시작했으며 30대 후반에 훌쩍 인도로 떠나 라즈니쉬로부터 명상과 구도의 춤을 익히고 1993년 귀국해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에서 '웃는돌 무용단'을 이끌고 있다.
베르너 삿세 교수는 독일인 최초의 한국학자로 40년 이상 한국과 인연을 맺어오다 2006년 한국으로 아예 이주했다. 유럽한국학협회(AKSE) 회장을 지냈으며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을 독일어로 처음 번역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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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를 보고 역시 홍신자라고 생각했다.
황혼의 로맨스라고?
아니 누구보다 젊고 정열적인 모습이라 놀랐다.
마치 연못에서 피어나는 순백의 수련을 바라보는 느낌.
이렇게 아름다눈 신랑 신부의 모습을 또 언제 봤을까?
결혼식의 의미보다 문화예술의 한마당으로 만든 홍신자, 베르너 삿세의 부부의 그 일탈과 일상이 나는 너무나 부럽고 아름답다.
"홍신자 시집가는 날"
얼마나 이쁘고 정직한 이름인지...
넘새스럽지 않느냐고, 다 늙어 주책이라고 웃지 말자!
참 아름다운 청춘처럼 그들은 젊고 아름답다.
황혼도 이렇게  순백으로 젊을 수 있구나...
나는 그 젊음에 진심으로 경의를 표한다.

황병기의 <미궁>만큼 내게 미궁같았던 무용가 홍신자!
이제 그녀는 가장 젊고 가장 아름다운 순백의 신부로 태어났구나...
진심으로 아름답다.
꼭 잡은 두 손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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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동네 책거리2010. 10. 5. 05:24

<환상의 책> - 폴 오스터

 환상의 책

폴 오스터...
참 매력적이고 그리고 신비감 가득한 미국 작가입니다.
개인적으로 “폴 오스터”와 터키의 국민 작가 “오르한 파묵”을 자꾸 비교하게 되는데요, 두 사람 모두 신비적 탐미주의자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습니다.
차이가 있다면 “오르한 파묵”은 환상 속에서 현실을 이야기한다면 “폴 오스터”는 정확히 그 반대의 방법을 택하죠. 현실 속에서 환상을 이야기하는...
그러면서도 두 작가의 이야기 방식은 참 묘하게 닮아있습니다.
“오르한 파묵”이 지적이고 명석한 백과사전적인 글을 치열하고 아름답게 쓴다면, “폴 오스터”는 가십거리스러운 사건을 잡아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면서 현실감을 갖게 만듭니다.
둘 다 범접할 수 없는 독특한 스타일을 만들어 낸 작가라고 할 수 있죠.
그리고 두 사람의 책을 우리나라에 번역하는 번역가도 멋진 한 쌍의 페어를 연출합니다.
“오프한 파묵”에게는 번역가 “정영목”이, “폴 오스터”에게는 번역가 “황보석”이...
아마도 두 이국의 작가가 다른 번역가들을 만났다면 과연 지금과 같은 느낌을 전달받을 수는 없을 것이라 감히 단정합니다.

폴 오스터의 소설들...
참 재미있습니다. 그러나 읽기를 쉽게 포기하게 만드는 책이기도 하죠.
소위 말하는 고비를 넘어야만 폴 오스터의 이야기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일단 그 고비를 넘기면 손에서 놓기가 싫어질 정도죠. 그런데 그 고비라는 게 좀처럼 넘기가 힘들다는 게 문젭니다.
읽지 않고 포기하는 자에게는 결코 비밀의 문이 열리지 않으리라는 묵시록 같기도 합니다.
우리나라에 현재 그의 소설은 전부 14권이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 중에서 저는 정확히 8권의 소설을 읽었네요.
개인적으로 폴 오스터의 화두(話頭)는 실종과 풍자, 그리고 미스터리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읽은 폴 오스터의 거의 모든 주인공들은 결국은 실종을 선택하죠.
그 과정에서 우리는 숱한 미스터리와 세상을 향한 풍자를 맞닥뜨리게 됩니다. 그리고 그 길고 긴 실종의 과정은 동양의 선(仙) 사상과 묘하게 닮아있기도 합니다.
2002년 쓰여진 이 책의 원제는 “Book of illusion"입니다.
2008년 우리나라에 발표된 “환상의 책”이라는 제목보다는 “Book if illusion"이라는 원제가 확실히 더 폴 오스터스럽네요.
"illusion"이라는 뜻에는 왠지 은밀하고 비밀스런 느낌이 있는데, "환상"이라는 단어는 허황된 눈속임과 노골적인 드러냄이 느껴지기 때문이죠.
“Book of illusion"의 첫 장은 프랑스 낭만주의 작가 “샤토브리앙”의 짧은 글로 시작됩니다.
...... 인간은 하나의 동일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니다.
    끝에서 끝까지 이르는 여러 다른 삶을 살며 그것이 바로 비극의 원인이다 .....

그러니까 이 책은 두 사람이지만 동시에 같은 사람이기도 했던 누군가에 대한 기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두 사람의 같지만 다른 삶 이야기, 그리고 추적과 멈춤, 끌어당김과 거부가 잔잔하지만 집요하게 이어집니다.
그리고 그건 모든 인간의 모습, 그것이기도 하죠.

오래 전에 실종된, 그래서 죽었다고 믿어지는 무성 코미디 배우 “헥터 만”, 그리고 얼마 전 비행기 사고로 사랑하는 아내와 두 아이를 잃고 스스로를 불행의 삶 속으로 밀어 넣는 것으로 시간을 보내는 대학교수 “데이비드 짐머”.
어느 날, 데이비드는 TV를 통해 헥터 만이 출연한 오래된 무성 코미디 영화 한 편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헥터의 콧수염과 양복은 그에게 깊은 아우라를 남기죠.
절망 속에 살던 대학교수 짐머는 세상에 남겨진 헥터의 무성영화 12편을 보기 위해 집을 나서 몇 개월 동안 세계를 돌아다닙니다. 그리고는 다시 9개월 동안 칩거하듯 세상과 단절한 체 헥터 만에 대한 집필을 시작하고 드디어 <헥터 만의 무성 세계>라는 제목의 책을 출판하게 됩니다.
그리고 어느 날 우편함에 배달된 한 통의 편지.
헥터 만의 부인이라고 자처하는 사람이 쓴 편지의 내용은 "그가 당신을 만나고 싶어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데이비드는 처음에는 이 편지를 믿지 않았습니다.
그가 진짜 헥터 만인지 어떻게 아느냐는 답장에 그녀는 다시 편지를 보냅니다.
“제 말이 진실임을 아시는 유일한 방법은 초청을 받아들이시는 것입니다.”
편지는 계속 이어집니다.
“그 사람이 1929년 할리우드를 떠난 뒤 여러 편의 장편 특작 영화들을 쓰고 감독했다는 말씀을 드린다면 오시겠다는 마음이 드실는지요? 헥터는 이미 아흔이고 나날이 건강을 잃어 가고 있어요. 그 사람은 제게 남긴 유언장에다 자신이 세상을 뜨고 나서 24시간 내에 그 필름들과 원본을 모두 파기하라고 했는데, 저로서는 그 사람이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그녀의 편지 내용대로라면 헥터 만은 스스로 자발적인 실종을 선택했다는 이야기네요.
이 대목에서 주인공보다 오히려 제가 더 헥터 만의 진실을 추적하고 싶어지는 열망이 가득합니다.
다행히 그를 데리고 가기 위해 한 여자가 등장합니다.
헥터 만의 전기를 쓰고 있다는, 헥터 만과 함께 영화를 만들었던 카메라맨의 딸 엘머가.
함께 뉴멕시코 블루스톤 농장을 향하면서 데이비드는 헥터 만의 모든 생애에 대한 이야기를 자세히 듣게 됩니다.
그야말로 그녀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나다니엘 호손의 <모반>처럼 그를 산 채로 먹어치워 버렸습니다.
영화배우로서의 헥터 만의 삶, 그리고 스스로 실종을 선택하고 콧수염을 자르고 양복을 벗고 허먼 레서로의 삶, 얼굴을 가면으로 가리고 라이브 포르노 공연배우로 살았던 삶.
그는 그 삶들이 자신에 대한 보복 내지는 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죽음보다 단순하고 파멸보다 더 나은 방법, 끝장을 보지 않고서도 자신을 계속 죽여 나갈 수 있는 방법으로 그는 타락을 선택했던 거죠.
... 만약 내 삶을 구할 생각이라면 그 삶을 파멸시키기 일보 직전까지 가야 한다....
그런데 참 아이러니하고 재미있는 건,
헥터 만의 삶이 바로 데이비드의 삶이기도 하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두 사람은 분명 다른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어쩌면 두 사람의 삶이 이렇게까지 동일할 수 가 있을까요?
“도플갱어” 혹은 “평행이론”이었을까요?

이 이야기는 일종의 “미궁”입니다.
비극적이면서 동시에 희망을 주는 결말.
어쩌면 “믿거나 말거나”류의 황당한 결말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다 읽고 나면 말이죠. 이런 생각을 심각하게 하게 됩니다.
“이게 정말 허구일까?”
폴 오스터의 이야기의 끝은 항상 그렇습니다.
“당신들이 이 책을 읽고 있을 때면 이 책을 쓴 사람이 벌써 오래전에 죽었다고 믿어도 좋다.”
이런 신비주의가 무책임의 한 형태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세상 모든 사람의 삶은 어쨌든 모두 익명성의 보장이고, 실종이고 그리고 은밀함의 추구임에는 분명하죠.
“나는 빌려다 쓰는 삶을 살고 있었다.”
폴 오스터의 소설 속 주인공들은 매번 이런 고백을 합니다. 그렇게 말함으로써 읽는 이에게 당신의 지금 삶은 어떠며 은밀한 질문을 던지죠.
만약에 빌려다 쓰는 삶이라고 느낀다면 그것은 단지 잠시 동안의 실종이라고 말합니다.
조만간 누군가에 의해 진실이 담긴 삶의 문이 열릴 것이고 그렇게 되면 당신의 이야기는 맨 처음부터 다시 새롭게 시작될 거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지금은 은밀하고 비밀스럽게 잘 보관하고 있어야 한다고 충고하는 셈이죠.
끝나지 않은 이야기를 읽고 있다는 느낌.
그러데 그 이야기는 앞으로도 결코 끝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세상에는 알아야 할 이야기가 있고 알지 않는 게 오히려 더 좋은 이야기가 있다고 합니다.
이야기를 알고난 전과 후가 극명하게 달라지는 경우에는 더더욱 말이죠.
저는 말이죠. 책을 읽으면 매번 그 책 속으로의 실종을 간절히 꿈꿉니다.
내 책이라는 소유욕보다 내 이야기라는 소유욕이 백배는 더 강하죠.
그래서 늘 또 다른 이야기를 찾아 나서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폴 오스터의 <환상의 책>
그 속에서 제 맘 같은 구절이 있어 에필로그로 남겨봅니다.

...... 여기까지 온 당신들은 실로 위대하다 ......


Posted by Book끄-Book끄
보고 끄적 끄적...2010. 9. 15. 05:49

양화진 문화원 목요강좌가 다시 시작됐다.
지난주 목요일 가야금 연주자 황병기 선생님의 강의가 있어서 오랫만에 양화진을 다녀왔다.
<침향무>, <비단길> , <미궁>, <춘설>, <달아 노피곰>
"황병기의 음악은 모순을 명상하는 것이다"
"하이스피드 시대의 정신적인 해독제다"
그의 음악에 대해서 사람들은 말한다.
나 역시도 그의 음악을 듣고 있으면 저절로 가만히 있게 된다.
그리고 그건 책을 읽는 것조차 불가능하게 만드는
완벽한 고요함이자 경건함이다.
바짝 다가와있는 내면과의 조우...
때로는 현실처럼 섬득하고 때로는 꿈결같이 황홀하다.



황병기 선생님은 1936년 서울 종로에서 태어났다.
사회자 김종찬님이 청중들에게 정통적인 서울 사투리를 듣게 될 것이라고 말했는데
뭐랄까, 말씀하시는 게 꼿꼿하고 단정하셨다.
(그런데 지금 서울 사람들이 서울 사투리를 알까?)
가야금으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황병기 선생님은 음악이 아닌 법학을 전공하셨다.
서울대 법대 2학년 때 KBS 주최 전국 국악 공쿠르에서 1등을 하면서 음악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단다.
사실 본인은 가야금을 업으로 삼게 되리라고 생각하지 않으셨다고 한다.
극장지배인, 화학공장 관리인, 영화사 사장 등 여러 직업을 거쳤고
38살에 음악을 직업으로 삼을 것을 선택했다고 한다.
(그때까지 가야금을 놓치 않았고 대학에서 계속 가야금을 가르쳤다고 한다)
본인은 15살에 가야금을 처음 알게 됐는데
모든 악기 연주는 정신적인 수양이나 연주가 아니라 육체적인 연주라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매일 단련해야만 한다고...



선생님은 한국음악을 두고 음 하나하나가 마치 붓글씨를 쓰는 것 같다는 표현을 하셨는데
강연을 듣는 모든 사람들이 그 의미를 충분히 이해했다.
청구영언에 나온 시조 한 소절을 불러주셨는데
정말 딱 그 느낌이었다.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
한국의 소리는 실한 소리, 영근 소리, 공력이 담긴 소리라고 한다.
그래서 공든 힘이 담겨있기 때문에 아름답다고.
그런 소리를 우리는 얼마나 이해하고 느낄 수 있을까?
생각하면 씁쓸할 뿐이다.
어쩌다 우리는 클래식보다 국악에서 더 멀어지게 됐을까?
소위 가방끈이 길다고 하는 사람일수록 오히려 우리 음악을 더 안 듣는다는 선생님의 지적은
스스로도 면목없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가방끈도 길지 않으면서 나는 왜 국악을 모르는가...)



한국음악이 지향하는 것은 생명체로서의 인간의 희열을 표현하는 것이라는 말씀도 하셨다.
우리 음악이 어렵다고 생각하고 점점 듣지 않게 되고 멀어지게 되는데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마음을 여는 게 중요하단다.
음악을 듣는 것도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편견을 없애는 것이 그 시작이라고...
더불어 예술을 향유하는데까지 애국심을 발휘할 필요는 없다는 충고도 남기셨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솔직히 우리나라 음악 교육은 전혀 애국심 운운할 꺼리조차 없긴 하다.
멀리도 아니고 내가 중고등학교다닐 때만 생각해도
음악시간에 국악을 배웠던 기억은 고작 서너번에 불과했던 것 같다.
어릴때부터 배우고 접해야 들을 줄도 안다는데
그런 의미에서 우리나라의 교육은 우리 음악과 오히려 멀어지게 만들고 있는 것 같다.
(지금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솔직히 달라졌으리라고 생각되진 않는다)
 

                                                <황병기의 "비단길">

황병기 선생님은 지금 74세다.
강연이 끝난 후 누군가가 질문을 했다.
만약에 음악을 업으로 삼기로 결정한 38세로 돌아간다면 어떻게 하시겠느냐고...
선생님의 대답이 참 멋지셨다.
"늙어 가는 재미가 활홀하다"
그러고 싶다.
나중에 나 역시도 고희가 훨씬 지났을 때
스스로에게 늙어가는 재미가 황홀하다 말할 수 있기를...
그렇다면
일가를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겠지.
황병기 선생님의 말씀은
그분의 해왔던 가야금 연주만큼이나 청연했고 고요했고
그리고 평온했다

Posted by Book끄-Book끄
읽고 끄적 끄적...2010. 2. 25. 06:00

오늘 같은 날씨에 읽기에 딱 좋은 소설.
그동안 폴 오스터의 책들을 그래도 꽤 읽었고
그 책들 모두 재미있었지만
이번에 읽은 <환상의 책>이 제일 마음에 든다.
왠지 묘한 이질감과 미궁 속에 빠지는 느낌.
책을 읽는 내내 가야금 연주자 황병기의 "미궁"을 떠올렸다.
그 음악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괴기스러운 음악을 차마 끌 용기조차 내지 못했다.
말 그대로 나는 완전히, 그리고 완벽히 얼어있었다.
그대로 고정돼버렸던 무시무시한 기억.
내가 간직한 최고의 아름답고도 섬뜩하고도 그리고 끔찍했던 음악 "미궁"
물론 그 정도의 충격을 줄 수 있는 무언가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싶긴 하지만
이 책도 왠지 다른 세계를 들여다보는 관음의 시선과 귀를 갖게 한다.



"Book of illusion"
원제가 더 매력적이고 직접적인 책.
"illusion"이라는 뜻에는 왠지 은밀하고 비밀스런 느낌이 있는데
"환상"이라고 번역했을 땐 왠지 허황된 눈속임같은 느낌가 강하다.
그래서 번역된 책을 볼 때는 항상 그 원제를 찾아보는 게 중요한 포인트!
탐정소설과 연예소설이 영화적으로 뒤섞여 있는 책.
책을 보면서 스크린을 보고 있다는 착각을 하게 만드는 책.
그러면서도 열렬히
인간의 주체성과 자아에 대한 깊은 생각과 고민을 하게 만드는 책.
스스로에 대한 진실성에 연타를 가한다.
그래서 읽는 사람을 당혹하고 불편하게 만들기도 하는 책.



오래 전에 실종된 무성 코메디 영화배우 헥터 만과
평행이론 같은 삶을 사는 대학교수이자 작가 데이비드 짐머.
그 두 사람의 같지만 다른 이야기, 그리고 추적과 멈춤, 끌어당김과 거부들...
책의 시작에는 샤토브리앙의 글이 헌사처럼 적혀있다.
...... 인간은 하나의 동일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니다.
끝에서 끝까지 이르는 여러 다른 삶을 살며 그것이 바로 비극의 원인이다 ..... 

비극적이면서도 동시에 유쾌한 희망을 함께 건네는 결말에
유난히 나는 신나했다.
"믿거나 말거나"의 뉘앙스로 끝을 맺는 폴 오스터의 글들은
오히려 그렇게 함으로써 이 모든 이야기가 마치 사실이었던 것 같은 착각을 하게 한다.
어딘가  헥터 만이 출연한 <마틴 프로스트의 내면적인 삶>, <투명 인간> 같은 영화가 있을 것만 같고
어딘가 데이비드 짐머가 쓴 <헥터 만의 무성 세계>라는 책이 있을 것만 같아
그것들을 찾아 나서고 싶은 욕구마저 안긴다.
마치 삼원색 같은 책,
그러면서도 어느새 무지개의 다채로움까지 선사한다.
폴 오스터의 세계.
늘 유사하면서도 결코 한번도 같지 않았던 그의 세계.
그가 만들어내는 환상의 세계들이 나는 아직도 많이 궁금하다.



그의 세계를 하나하나 섭렵해나가는 재미는 그래서 항상 새롭고 신비롭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읽은 세계들이 더 많다는 사실.
그리고 그의 책을 읽게 되는 이유는
내게 늘 실종을 꿈꾸게 한다는 사실.
그게 포인트다. ^^

<국내에 소개된 폴 오스터의 작품>

  • 고독의 발명 (The Invention of Solitude) (1982)
  • 뉴욕 삼부작 (The New York Trilogy) (1987)
  • 폐허의 도시 (In The Country of Last Things) (1987)
  • 달의 궁전 (Moon Palace) (1989)
  • 우연의 음악 (The Music of Chance) (1990)
  • 거대한 괴물 (Leviathan) (1992)
  • 오기 렌의 크리스마스 이야기 (Auggie Wren's Christmas Story) (1992)
  • 공중 곡예사 (Mr. Vertigo) (1994)
  • 빵굽는 타자기 (Hand To Mouth) (1997)
  • 동행 (Timbuktu) (1999)
  • 환상의 책 (The Book of Illusions) (2002)
  • 신탁의 밤 (Oracle Night) (2004)
  • 브루클린 풍자극 (The Brooklyn Follies) (2005)
  • 어둠속의 남자 (Man in the Dark) (2008)
  • Posted by Book끄-Book끄
    읽고 끄적 끄적...2009. 10. 22. 05:57
    오랫만에 황홀하게 지적이며, 탐욕스럽게 흥미롭고
    문학적으로 탐미적인 책을 만나다.
    아직도 손과 머리 속에 끈적거리며 달라붙어 있는
    치명적이게 관능적인 소설
    클라스 후이징의 <책벌레>



    책 속에서 길을 읽고 미아가 되지 않기 위해서
    책장을 펼친 사람은 극도로 조심해야만 한다.
    잔잔한 긴장감이 온 몸의 숨통을 서서히 조이는 그런 느낌.

    요한 게오르크 티니우스 그리고 팔크 라인홀트.
    책을 읽기 시작했다면 반드시
    공평하게 동행해주어야만 하는 두 사람!
    단 한명이라도 손을 놓치거나 감정적으로 치우치게 된면
    아마 미궁 속으로 깊게 빠져버릴지도 모른다.
    빠져나올 수 있다고 믿는가?
    그렇다면 그건 단지 당신만의 착각일 뿐이다.



    요한 게오르크 티니우스!
    "책을 펼칠 때면 언제나 그의 주변세계는 베일에 가려졌다"
    그를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신시키는 하나의 힘이었던 "독서"
    책에 대한 지독하고 집요한 애착,
    중독에 가까운 도서수집벽을 가진 목사.
    그는 급기야 책을 소유하기 위해 목사의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몇 번의 살인을 저지른다.
    아무런 죄의식 없이...
    (심지어 그의 장모까지도... 아주 태연하고 자연스러워 심지어 경건함까지 느껴진다.)
    더 많은 책을 사기 위한, 더 많은 책을 소유하기 위한 살인.
    그의 목사관 윗층은 책의 천국으로 지상 위에 재림한다.



    다른  한 사람, 팔크 라인홀트!
    우연히 고서점에서 구입한 티니우스의 전기를 읽은 그는  
    의도적으로 그리고 자발적으로
    티니우스의 복제품으로  변한다.
    (물론 그는 살인이라는 극단적인 요소까지 모방하지는 못하지만, 거의 치명적인 상태로까지는 만든다.)
    티니우스가 쓴 책 5권을 전부 소유하게 된 팔크 라인홀트.
    그는 티니우스의 책들을 텍스트화시켜 열개의 글의 양탄자를 탄생시킨다.
    기호학적이며, 비밀스럽기까지 한 텍스트들.
    방 안에 홀로 칩거한 채 오로지 텍스트에만 빠져드는 라인홀트.
    그 모습은 한창 열렬한 연애에 빠진 사람의 모습과 정확히 일치한다.
    전희, 사랑, 애무, 쾌락과 욕정, 그 뒤에 남은 허무와 극도의 피로감.
    그는 티니우스가 남긴 텍스트 전부를 컴퓨터 안에서 분석하면서
    또 다른 텍스트들를 출산한다.
    드디어 열번째 출산으로 독서의 비밀을 알아낸 라인홀트.
    그리고 그는 비밀을 혼자만 간직하고
    자신이 만든 열번째 양탄자를 타고 그곳을 떠난다.
    방 안에 홀로 남겨진 컴퓨터가 켜지면
    커서와 같은 모습의 그가 화면 가장자리 저쪽으로 서서히 사리진다.



    황당한 소설이라고 느껴질까?
    그러나 이 책을 다 마셔버리고 나면(책의 표현데로)
    분명 충격적이라 입을 다물지 못하게 되리라.
    활자 증후군들의 식욕을 제대로 자극하는 책.
    거북한 소화불량에 빠지더라도
    탐욕스럽게 남김없이 먹어버리고 싶은 그런 책이다.



    누군가는 신성모독에 대한 이야기할지도 모르겠다.
    예수를 떠올리게 하는 티니우스의 행적들.
    그리고 12제자를 떠올리게 하는 라인홀트.
    단지 신비주의 소설이라고 단정짓지는 말기를...
    그러기엔 이 책이 가진 것들이 너무 깊고 넓다.

    후후훅 이 책을 마셔라!
    죽음을 이기는 독서의 환희와 전율.
    당신의 최후의 책벌레가 된다.


    책을 읽고 나면 이 말에 적적으로 공감하면서
    심지어 두 사람의 가장 가까운 동행자가 되기를 자처하게 될지도... 



    아주 흥미롭고 재미있는 한 대목.
    가만 보고 있으면 이 공통점들은 정말로 적절하다.

    * 책과 창녀(정부)의 공통점
    1. 책과 창녀는 둘 다 침대로 데려갈 수 있다.
    2. 책과 창녀는 시간을 뒤바꾸어놓는다. 그들은 낮을 밤처럼, 밤을 낮처럼 만든다.
    3. 책과 창녀에게는 일분일초가 귀중하지만 아무도 그것을 알지 못한다.
       그들과 좀더 가까워질 때에야 그들에게 시간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가 그들 안에 잠겨드는 동안 그들은 시간을 재고 있다.
    4. 책과 창녀는 예전부터 각각 불행한 사랑을 하고 있다.
    5. 책과 창녀 - 그들에게는 빌붙어 살면서 괴롭히는 남자들이 있다. 책에게는 비평가가 있다.
    6. 책과 창녀는 공공건물에서 산다 - 특히 대학생에게 그렇다.
    7. 책과 창녀 - 그들이 맞이한 종말을 본 사람은 드물다. 그들은 퇴락하기 전에 사라지는 경향이 있다.
    8. 책과 창녀는 어떻게 해서 지금처럼 되었는지 얘기하길 좋아하고, 그럴 때면 거짓말도 잘한다.
       그들 스스로 그 거짓말을 믿어버릴 때도 적지 않다.
       여러 해 동안 '사랑하는 마음에서' 모든 것에 열중하다가 어느날부터인가 비대히진 몸뚱이를 안고 거리를 나선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무엇인가 알아보려고' 그 주변을 돌아보기 위한 것이라는 식이다.
    9. 책과 창녀는 손님을 끌 때 등을 내보이길 좋아한다.
    10. 책과 창녀는 자식을 많이 낳는다.
    11. 책과 창녀 - '허구한 날 기도하는 늙은 어멈도 젊었을 땐 창녀'였다.
        오늘날 청소년들의 필독서 중에서 한때 평판이 나빴던 책들이 얼마나 많은가!
    12. 책과 창녀는 꼭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드잡고 싸운다.
    13. 책과 창녀 - 책의 각주는 창녀의 양말 속에 감추어진 지폐와 같다.



    "Habent sua fata libelli"
    책들은 저마다 운명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독자가 어떻게 읽는가에 따라서 책들은 운명을 달라진다.
    건전한 애서벽과 병적인 장서벽!
    이제 내가 선택한 차롄가?
    나 역시나 내가 만든 양탄자 속으로
    하나의 텍스트가 되어 실종되고 싶다.

    모든 독서의 끝은 결국 
    지독한 그리고 완벽한
    "실종"으로의 희망이다!
    Posted by Book끄-Book끄
    달동네 책거리2009. 3. 23. 21:51

    <향수> - 파트리크 쥐스킨트


     향수(어느 살인자의 이야기)(페이퍼북)

     
    파트리크 쥐스킨트!

    이 매혹적인 작가를 어떻게 소개해야 할까요?

    <좀머씨 이야기>, <콘트라베이스>, <비둘기>, <깊이에의 강요>

    우리나라에 번역된 그의 작품 모두 하나같이 다 문제작이긴 하지만 <향수>라는 책을 읽었을 때의 그 강렬함이라니...

    작가가 만든 “신세계”의 미궁에 제대로 빠져버렸다고 한다면 이해가 되실까요?

    이 책,

    사연도 참 많습니다.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라는 부재를 달고 있는 이 책은,

    1991년 12월 국내 초판 됐고(제가 가지고 있는 책이 파란 표지의 그 오래된 초판, 바로 그 거랍니다) 1995년, 2000년 두 차례 개정판이 나왔습니다.

    그리고 영화 개봉과 더불어 다시 신판이 출판되면서 폭발적인 판매 기록을 보였죠. 초스테디셀러에 등극한 이 소설은 지금까지 30쇄 이상 재판됐다고 합니다.

    (영화 예술의 힘! 작년에 주제 사라마구의 <눈먼자들의 도시>를 베스트셀러 2위에 올려놓는 걸 보면서 또 다시 절감했죠)

    그런데 이 사실도 아세요?

    이 책이 “19금 이야기”의 선정 도서가 됐었다는 사실도요.

    책의 후반부쯤에 나오는 사형집행장에서의 집단 난교 부분과 마지막 충격적인 결말들이 이런 영예(?)를 안겨준 셈이죠.

    그것도 출판된 지 한참이 지난 후에 이런 에피소드가 생긴 걸 보면, 책은 정말 살아 있다는 환상을 여전히 품게 합니다.

    “환상”이라는 말이 나왔으니까 하는 말인데요,

    파트리크 쥐스킨트는 작가에 대한 극단적인 환상을 심어주는 사람이기도 하죠.

    전세계의 집요한 매스컴의 추적을 거의 완벽하게 피하면서 숨어있는 사람.

    대인공포가 있다는 소문, 동성연애자라는 소문, 그리고 흉한 장애가 있다는 소문에 이르기까지...  심지어 사람들과의 만남도 싫어해 문학상도 거절하고 인터뷰도 거절하며 철저하고 은둔하고 있는 작가!

    그는 자기 작품에 대한 관리 전체를 형에게 맡긴 채 현재 프랑스 남부에 있는 작은 오두막집에 잠금장치까지 하고 살고 있다고 합니다.

    친하게 지내는 사람도, 동료 작가도 없고 심지어 자신의 신상에 대해 발설한 사람이면 친구와 부모를 가리지 않고 누구와도 절연해 버릴 정도라고 하니 오래된 사진 한 장으로만 알려진 그를 세상에 불러낸다는 건 도무지 불가능해 보이네요.

    그러나 생각합니다.

    그는 지금 자신이 살고 있는 작은 오두막에서 지금 <향수>보다 더 매혹적인 작품에 몰두하고 있을 거라고...

    (사실 그의 새로운 책의 출판을 전 아주 많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책 <향수>의 줄거리는 이미 많은 분들이 알고 있을 거예요.

    질긴 생명력으로 생선 내장 더미 위, 아무 냄새도 갖지 못하고 버려지듯 태어난 아기 그르누이.

    그의 삶의 목적, 그건 사람의 “냄새”를 내 몸에 갖겠다는 강렬한 탐욕이었습니다.

    자신의 것이 아닌 것을 갖고자 하는 욕망.

    우리가 일상적으로 말하는 “탐욕”이라는 의미는 그러나 그에겐 적절치 않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그가 품은 “탐욕”은 소유에 대한 집착보다 오히려 생명에 대한 무심한듯하지만 강렬한 집착에 가깝기 때문이죠.

    “생명”이라는 거,

    “향기”를 품지 않는 생명이란 죽음의 다른 이름이라는 걸 그르누이는 그의 살인 행각을 통해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심지어 책을 읽고 있는 사람을 가장 가까운 동반자로 만들어 버리기까지 하죠.

    그를 피해 달아나는 향기가 그에게 무사히 채집되기를 나 또한 간절히 바라는 마음.

    향기를 채집하는 그의 섬세한 행동 하나 하나가 성스럽고 예술적으로 느껴지는 그 순간,

    이제 그의 옆에 제 2의 그르누이의 자리가 만들어지고 있는 겁니다.

    25명의 향기가 채집되기까지 저 역시도 그의 동조자가 되어 가만가만 숨을 죽입니다.

    어쩌면 결말 혹은 끝장을 보고 싶다는 저의 또 다른 탐욕인지도 모르겠네요.

    그의 향기에 취해 그를 탐하는 무리에 둘러싸이게 되는 마지막 결말.

    악마적인 황홀경에 빠져 그의 향기를 먹어치우는 무리 속에 나 자신이 없다고 과연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까요?

    함께 한 사람들은 이미 무언의 합의를 끝낸 듯 합니다.

    그건 “구원”의 행위였다고......

    그의 향은 우리를 구원했고 그리고 우리는 그를 각자의 몸 안에 조각내 피난시킴으로 구원을 해줬다고......

    이제 남겨진 사람을 우리는 누구라고 불러야 할까요???.......


    서번트 신드롬 (savant syndrome)!

    지능은 보통사람들보다 떨어지지만 음악연주나 달력계산, 암기, 암산 등 어떤 특별한 부분에 천재적인 재능을 보이는 사람들을 간혹 보게 됩니다.

    프랑스어로 이 말은 배우지 않고(바보 idiot) 터득한 기술(석학 savant)이라는 뜻이죠. 특히 발달장애나 자폐증 같은 뇌기능 장애를 가진 이들이 그 장애와 대조되는 천재성이나 뛰어난 재능을 보일 때 이 서번트 신드롬(savant syndrome), 석학증후군 이란 말을 하게 됩니다.

    영화 <레인 맨>에서 톰 크루즈의 형으로 나왔던 더스틴 호프만이 바로 서번트 신드롬을 가진 자폐인을 연기했었죠. 

    말하자면,

    그르누이도 서번트 신드롬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흔히 천재성은 그 “광기”로 인해 인생 전체를 “파괴”하기도 하죠.

    “Utopia”가 아닌 “Destopia”의 탄생.

    철저하게 파괴함으로써 이상향을 만들겠다는 “Destopia”

    <향수>

    그 위험한 Destopia의 세계.

    그 세계가 섬뜩했던 건 사실이지만 그보다 더 매혹적이었음을 고백할 수 밖에 없네요.


    만약, 

    당신에게 아직 향기가 있다면....

    조심하길 진심으로 당부합니다.

    조각난 그르누이가 혹 당신을 탐할 수도 있으니.....


                                                          <유일한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사진>


    Posted by Book끄-Book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