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끄적 끄적...2013. 5. 17. 20:16

너무나 아프고, 서럽게 읽은 책이다.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와 함게 묶어서 우리 시대의 부모에게 헌정하고 싶은 책이다.

연거푸 2번을 읽었다.

읽을 때마다 죄스러웠고 아팠고 먹먹했다.

내 역시도 부모의 '빨대'였음을 감히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 그날 아침 한 염부가 죽은채 발견되었다....

첫문장부터 나는 무책으로 무너졌다.

소금을 만드는 사람이, 자기 몸 속의 소금을 챙기지 못한채

과도한 노동으로 철저하게 무너지고 쪼그라들어

결국 입 속에 한웅큼의 소금과 함께 소금밭에서 일생을 마감한 염부1을 죽음을 보면서 나는 인정했다.

뭔가 잘못됐다는 걸.

그리고 그 잘못된 게 끝이 없이 이어지고 있다는 걸.

신경숙은 <엄마를 부탁해>에서 말했다.

엄마에게도 엄마가 필요했다는 걸 몰랐다고...

그런데 박범신의 <소금>은 내게 묻는다.

세상 끝에 혼자 버려진 아비에게 너는 언제까지 빨대를 꽂을거냐고...

염부였던 아비가 소금밭에서 죽었다!

홀로 땡볕에서 소금에 반사되는 모든 빛을 온전히 홀로 받아내서면서 버티고 버티던 그 염부를 죽인 건,

소금이 아니다. 햇빛이 아니다.

그를 죽인 건 바로 나다!

박범신의 40번째 장편소설 <소금>은 내게 살인의 이유를 물어왔다.

대답할 말이... 없다.

소설의 문장처럼,

세상의 모든 아버지들은, 아버지이기 때문에, '치사한 굴욕'과 '쓴맛의 어둠'을 줄기차게 견뎌온 것이었다.

 

엄마는 처음부터 엄마였듯, 아버지 역시 처츰부터 아버지라고만 생각했다.

아버지의 푸르른 청춘!

그런 것 따위는 관심도, 상상도, 생각도 못했었다.

막내딸의 생일에 실종된 시우의 아비도

아들의 대학등록금을 위해 부두 하역군으로 '치사해, 치사해"를 입에 달고 살던 명우의 아비도 모두 굴욕을 견디며 살아왔다.

아비가 정말 다 그런거라면!

모든 아비가 다 그렇게 치사하게 산는 거라면!

그 아비들이... 어쩌나...

우린 어떻게 해야 하나...

 

...... 애비들이 치사하면 세상이 모두 치사해진다는 아버지의 말은 하나도 그른 데가 없었다. 치사한 아버지들과 치사함을 견뎌내는 아버지들에겐 모두 '새끼'들이 딸려 있었고, 아버지들의 소망과 달리, 그 새끼들 역시 치사하게 살아가며 "치사해, 치사해, 치사해!"를 대물림받는 중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세상의 모든 아버지는 꼭 둘로 나눠야 한단다.

하나는 스스로 가출을 꿈꾸는 아버지와

다른 하나는 처자식들이 가출하기를 꿈꾸는 아버지로.

농담같은 이 말이 목울대를 막는다.

핏줄이라는 이름으로 아비에게 내미는 자식의 빈 손은 차라리 폭력이고 폭압이다.

이걸 이 책은 뼈 아프게 실감케 만든다.

마치 내 가슴 우에 수인번호가 찍히는 것 같다.

꽃을 들고 괴로운 얼굴빛으로 막 가라앉아가는 아버지.

책의 표지를 보는 게 힘겨워 나는 책장을 덮지도 못하고 활자 앞에 무력하게 무너졌다.

도대체 무슨 자격으로...

 

...... '핏줄'이라는 이름으로 된 빨대는 늘 면죄부를 얻었다.

사람들은 핏줄, 핏줄이라고 말하면서 '핏줄'에서 감동받도록 교육되었다. 핏줄조차 이미 단맛의 빨대들로 맺어져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사람들은 '사랑'이라고 불렀다. 사랑이 빨대로 둔갑했지만 핏줄이기 때문에 그냥 사랑인 줄만 알았다. 빨대를 들고 기웃거리는 젊은이들은 어디에서든 볼 수 있었다. 일차적인 표적은 아버지였다. 스물이 넘은 자식들조차 핏줄이므로 늙어가는 아비에게 빨대를 꽂아도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이 흔한 일이 되었다. 모두 그 체제가 만든 덫이었다.

더 큰 나라가 더 작은 나라를 빨고, 더 힘센 우두머리가 힘없는 졸개들을 빠는 빨대와 깔때기의 구조야말로 자본주의적 세계 구조였다.

핏줄이라고 그것을 넘어설 수는 없었다.

......아버지들은 근엄했지만 아무 힘이 없었다.

체제에 편입돼 과실을 따 오는 대표 선수로서 그럴듯해 보이긴 했지만, 가족들이 거대한 소비 체제에 들어 있는 한 어버지에겐 그 체제를 방어할 항거 능력이 전무했다. 핏줄에게 빠리고 핏줄의, 핏줄의, 핏줄에게도 빨렸다. 핏줄이라는 강력한 이데올로기를 명분으로 삼은 저들이 자신들의 깔때기를 채우기 위해 그 구조를 전적으로 허락하고 돕기 때문이었다. 성장한 자식을 독립시키겠다고해도, 핏줄이므로 아버지만이 비난받는 이 구조는, 체제의 입장에선 양보할 수 없는 규범이었다 ......

 

세상에 가장 힘든 노동이 바로 소금밭에서 일하는 염부의 노동이란다.

그 염부의 노동으로 소금은 세상의 모든 맛을 다 갖게 된다.

단맛, 신맛, 짠맛, 쓴맛,

소금의 맛은...

단지 짠맛만이 전부는 아니었구나!

소금이 가진 세상의 이 모든 맛이

힙겹고 치사한 노동에 팔리고 자식들에게 굽을 등을 빨리는 아비의 모든 것이라는 걸.

이 소설을 읽으며 아프게 아프게 깨닫았다.

이 치사한 세상을 살아내는 걸 가장 무서워하는 사람이 사실은 아비들였음을 나는 몰랐다.

아니 모른척 했다.

그래서 끝내 시우에게 돌아가지 않는 아비가 나는 다행스러웠다.

 

아마도 나는 이 책을 다시 또 읽게 될거다.

읽을 때마다 나는 끝없는 참회록에 얼굴을 들지 못하게 될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또 다시 이 책을 읽게 될거다.

날마다 고통스럽고 날마다 황홀하기 위해서.

(아마도 나는 황홀보다는 고통쪽에 더 많이 머무를 수밖에 없겠지만...)

 

차디찬 소금이 입 안에 가득하다.

이 소금은 어떻해야 하나... 나는.

Posted by Book끄-Book끄
읽고 끄적 끄적...2012. 1. 20. 06:00
8년 만에 만들어진 여섯번째 단편집이라고 했다.
작가 신경숙은 이 단편들이 특별하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청탁을 받아서 쓴 게 아니라 자신이 쓰고 싶을 때마다 자발적으로 쓴 작품들이기 때문이란다.
그리고 책을 만들면서 그녀는 새삼 알게 됐단다.
우리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서로 연결되어 있는지도 모르는 체 우리는 서로의 인생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것을.
7편의 글을 읽으면서 나는 생각했다.
어쩌자고 그녀는 조목조목 나에 대한 이야기를 이렇게 했을까!
책 장을 넘기는 손이 힘겹다.
그녀의 글들을 나는 점점 수월하게 읽어내기 힘들어진다.
몰래 침잠되어 있는 깊게 숨겨놓은 한 부분을 기어이 뚝 건드리는 것 같다.
매번 그녀는 왜 내게만 이렇게 잔혹한가!
책을 읽고 나면 그녀가 만든 익명성의 그들과 이니셜의 그들이
내 꿈 속에 들어와 나를 흔든다.
내가 너라고...

세상 끝의 신발
화분이 있는 마당
그가 지금 풀숲에서
어두워진 후에
성문 앞 보리수
숨어 있는 눈
모르는 여인들



개인적으로는 이십대보다 삼십대가 좋았고 삼십대보다는 사십대가 된 지금이 나쁘지 않다. 이유는 단 하나다. 연애감정에서 멀어졌다는 것, 그토록 막연하고 불안하고 죽을 것 같은 고통스런 감정들이 모두 다 연애감정에서 비롯된 것만은 아니었으련만 마음이 연애감정에서 멀어지자 자유로워졌다. 쓸쓰란 자유. 그 자유가 나쁘지 않았다.....내게는 영원히 찾아올 것 같지 않았던 평화가 거기 있었다. 다시 한 사람을 향한 격정 속에 빠져서 매 순간을 휘둘리고 싶지 않다. 한 사람을 욕심내는 일은 격정만 주는 게 아니라 절망을 함께 준다. 그래서 가차없이 그 사람에게 상처를 입혀버리기도 한다. 그 격정과 절망 속에 다시 나를 밀어넣고 싶지 않았다.

익명성의 삶, 이니셜로 불리는 삶에 대한 로망.
어느날 내가 K가 되어, A가 되어, S가 되어 그 도시를 떠돌게 될 것만 같은 기시감!
혹은 정이나 채여도 상관없겠다.
나 역시도 언어장애와 식이장애를 가진 관계장애인이다.
격정과 절망 속에 나 역시 더이상 나를 밀어넣고 싶지 않다.
그래서 나는 단절을, 결별을 선택했다.
그렇게 해서 조금 자유로워지고 싶었다.
생각만틈 많이 자유로워지진 않았지만 그래도 나는 내 선택들이 옳았음을 안다.
정말 내 이야기였을까?
그녀는 이 이야기들를 도대체 어떻게 온전히 꺼내왔을까?
겹쳐지는 이력(履歷) 앞에 나는 손수무책이다.
내 한 손이 완벽히 나를 배신하고 다른 행동을 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심정.
그랬나!
"그가 지금 풀숲에서"의 그의 아내처럼 나도 외계인손증후군을 겪었던걸까?
어쩌면 "화분이 있는 마당"에서처럼 귀신이 차려진 밥을 달게 먹으며 담소를 나눴을지도 모르겠다.
현실을 때론 넘기 힘든 벽으로 가려진 이물(異物)의 삶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신경숙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이 우울하고 고독한 시대에도 문학이 있다는 것!
그래서 나는 아직 설렌다.

Posted by Book끄-Book끄
보고 끄적 끄적...2011. 6. 10. 06:20
우려했었다.
그래서 볼까 말까를 두고 고민하다가 50% 할인 티켓이 있어서 티켓팅을 했다.
그런데 그러면서도 또 고민했다.
연극까지야 이해를 하겠는데 뮤지컬로 바뀐 <엄마를 부탁해>는 왠지 조심스럽고 위험해보였다.
그리고...
연극은 안 봐서 모르겠지만 뮤지컬을 확실히 그랬다.
미국과 영국에서 경이로운 판매부수를 올리고 있는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 기사와
MBC "나는 가수다"에서 임재범이 부른 "빈잔"의 피쳐링으로 일약 신데렐라가 된 차지연.
이 두 가지만으로도 광고효과는 엄청났다.
이도 저도 모르겠다면 마당놀이로 유명한 "김성녀" 의 장년층 관객 확보까지...
게다가 가요계의 마이다스 손으로 유명한 김형석이 음악을 담당했다지 않는가!
탄탄한 원작에, 연기력 검증된 배우들에, 음악까지...
일단 태생은 은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난 격이다.



 

이 작품을 뮤지컬이라고 할 수 있을까?
노래가 이만큼은 나와야 뮤지컬이다 라고 정해져 있는 건 아니지만
이 작품은 뮤지컬보다는 연극이라고 분류하는 게 옳을 것 같다.
"미안하다"는 메인테마가 있긴 하지만 작품을 보고 난 후에 귀에 남는 OST가 전혀 없다.
차라리 요즘 유행하는 집요한 최면성 후크송이라도 한 곡 있었으면 좋았겠다는 바람마저 생긴다.
(개인적으로 후크송을 정말 싫어함에도 불구하고...)
노래가 주는 임팩트가 전혀 없고
대사는 주로 고래고래 소리지르는 난장판 싸움질이다.
나는 그래도 좀 더 따뜻하고 안온한 느낌이길 바랬는데...
배우들이 질러대는 고함은 보는 내내 괴로웠고(엄마를 잃어버린 게 괴로운게 아니라)
맨 앞자리에서 자꾸 고개를 외면하게 만든다.
마치 누가 더 목소리를 크고 짜증스럽게 내는지 내기라도 하는 것 같다.
그래도 어머니 이야기가 아닌가 말이다.
원작자 신경숙이 이 작품을 봤으면 뭐라고 했을까 문득 궁금해진다.
(남편 남진우 교수가 안식년이라 외국에 체류중인게 다행이다 싶다)
신경숙의 작품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 중에서 <엄마를 부탁해>는 첫문장부터 나를 속수무책으로 무너뜨렸었는데
이 뮤지컬을 보면서는 단 한번도 울지 않았다.
(이상하다... 나는 공연을 보면서 뚝하면 울어서 옆사람을 무안하게 만드는 편인데...)



 

오랫만에 이계창의 연기를 보는 즐거움은 있었지만
이계창, 차지연, 김경선 세 명 모두 배역에 어울리지 않았다.
한 태(胎)에서 나온 자식들이 아니라 한 명씩 입양해서 모인 가족들 같다고나 할까?
김경선이 차지연의 동생으로 나온 건...
아무리 무대 위에서라지만 아닌 것 같다.
후반부에선 정말 김경선이 장녀같더라.
약국, 공사장  장면도 어색하고 난감했고
(오지랍 넓은 약사 아저씨는 또 왜 그렇게 소리를 지르시던지...)
난데없이 등장하는 "ㄱㄴㄷ" 노래는 급기야 작품을 상당히 뽀뽀뽀스럽게 만든다.
그런데 미안하게도 요즘 어린이프로도 이렇게까지 유치찬란 조잡하진 않다.
에피소드 연결하는 방식도 산만하고 이야기의 흐름이 자연스럽지가 않다.
소리지르던 배우들이 마지막에 뚝뚝 눈물 흘리는 모습을 마주하는 건 난감한 그 이상이었다.
(내가 너무 독한년이라서 그런가???)
맨 앞에서 하도 어이없는 표정으로 앉아있어서 내내 미안하더라.
엄마 김성녀를 빼고 모든 배우들이 버럭버럭 소리를 지른다.
이러다 단체로 득음하는 건 아닌지...
충무아트홀 대극장이라는 명함이 무색할 정도로 휑한 무대는 또 어쩌란 말인가?
무대 사용 평수로 대관료를 받는 것도 아닐텐데
그 넓은 공연장을 왜 그렇게 과하게 아껴가며 사용했는지...


내가 생각하는 <엄마를 부탁해>는
엄마의 부재 또는 실종을 결코 죽음으로 곧장 연결시키는 게 아니었다.
죽음보다 더 근원적인 어떤 것이어야 했는데
이 작품은 시작부터 내내 엄마의 죽음을 죽어라 암기하고 복기하게 한다.
작가 신경숙도 말했었다.
작품 속에서 엄마가 죽었다고 단정짓지는 말아달라고...
자신은 엄마의 죽음을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니었다고...
내가 생각하는 <엄마를 부탁해> 역시도 진혼곡이 아니다.
그러기엔 우리들 엄마가 너무 안스럽지 않은가!
마지막 장면에서 공중부양 중이신 미켈란젤로의 피에타상 앞에서 장녀(차지연)가 말한다.
"우리 엄마를 가여워해주세요.
 우리 엄마를 잊지 말아 주세요!
 그리고 우리 엄마를 부탁해요!"

미안하지만...
우리는 절대로 엄마를 가여워해서는 안 된다.
그럴 자격이 우리에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당하다 못해 노골적인 결말에 나는 그만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원작의 그 절절함과 간절함은 도대체 어디로 실종되버렸는가!
무대위 피에타상보다 더 공중부양된
엄마를 부탁해...를 도대체 어쩌란 말이냐...
Posted by Book끄-Book끄
읽고 끄적 끄적...2011. 5. 26. 06:07
한국과 미국의 엄마를 읽다.
<엄마를 부탁해>는 이제서야 읽은 건 아니고
다시 손에 잡은 책이다.
아무래도 내가 지금 어떤 울림을 찾고 있는 중인가보다.
치치고 힘들 때 위로받을 수 있는 완벽한 장소는 역시 엄마,
그 품 속이다.


전미 그리고 영어권에서 출판돼 호평을 받고 있다는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
엄마를 잃어버린지 일주일째다...
첫문장부터 사람의 마음을 무장해제시키면서 억장을 무너뜨린 책.
이 책은 내게 살면서 계속 곱씹으며 몇 번씩 읽게 될 책 중 한 권이다.
책 속의 엄마는 지금쯤 어디에 있을까?
나는 이 이야기가 마냥 현실처럼 느껴져
어쩐지 서울역 역사를 지날 때도 몇 번씩 두리번거리게 된다.
뼈가 드러나는 발로 파란 슬리퍼를 신고 있는 그 엄마가 꼭 어딘가에서 아직 헤메고 있을 것 같아서...
모녀관계는 서로 아주 잘 알거나 타인보다도 더 모르거나 둘 중 하나란다.
뜨끔하다.
나 역시도 그렇지 않은가 말이다.
엄마라는 말에는 친근감만이 아니라 나 좀 돌봐줘 라는 호소가 배어 있다는데
참 열심히 모른척 하며 사는 사람이 바로 딸들이다.
정말 엄마들은 이 모든 걸 어떻게 매일매일 감당하며 살았을까?
박소녀라는 할머니의 이름은 그래서 더 서럽다.
...... 너에게 엄마는 처음부터 엄마였다. 너의 엄마에게도 첫걸음을 뗄 때가 있었다거나 세살 때가 있었다거나 열두살 혹은 스무살이 있었다는 것을 상상해본 적이 없었다.너는 처음부터 엄마를 엄마로만 여겼다.처음부터 엄마로 태어난 인간으로...
그 엄마가 말한다.
...... 나는 이제 갈란다 ...... 라고.
죽어서도 이 집 사람으로 있는 것은 벅차고 힘에 겹다고.
오십년도 넘게 이 집서 살았으니까 이제는 좀 놔달라고.
나는 그냥 내 집으로 가서 쉬겠다고...
그 엄마가 자신의 엄마의 무릎을 찾아 태어난 집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또 다시 이기적으로 "그럼 나는...." 이라고 묻는다.

...... 내가 태어난 어두운 집 마루에 엄마가 앉아 있네. 엄마가 얼굴을 들고 나를 보네...엄마가 파란 슬리퍼에 움푹 파인 내 발등을 들여다보네. 내 발들은 푹 파인 상처 속으로 뼈가 드러나 보이네. 엄마의 얼굴이 슬픔으로 일그러지네. 저 얼굴은 내가 죽은 아이를 낳았을 때 장롱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이네. 내 새끼. 엄마가 양팔을 벌리네, 엄마가 방금 죽은 아이를 품에 안듯이 나의 겨드랑이에 팔을 집어넣네. 내 발에서 파란 슬리퍼를 벗기고 나의 두발을 엄마의 무릎으로 끌어올리네. 엄마는 웃지 않네. 울지도 않네. 엄마는 알고 있었을까. 나에게도 일평생 엄마가 필요했다는 것을......

엄마!
엄마가 가버리면...
그럼 나는 이제 어떻해?


처음에 사람들은 아들을 보고 부러워했다.
18개월도 안 된 아이가 신문을 읽고 책의 내용을 줄줄이 말할 때
사람들은 그 아이를 천재라고 불렀다.
그러나 아이의 천재성은 그렇게 활자 속에서만 살아있다.
일반적인 신체발달도 따라오지 못하고 또래 집단 속에서 어울리지도 못하고
아들은 구석에서 언제나 조용히 책장만을 넘긴다.
아이의 세계는 오로지 책 속에, 활자 속에만 있다.
아스퍼거 증후군(Asperger syndrome)
사회적 상호작용에 어려움을 겪고
관심사와 활동에 상동증이 나타나는 자폐 스텍프럼 장애(ASD)의 일종.
다른 ASD와는 달리 일반적으로 언어능력이나 인지발달 지연을 발생하지 않지만
서투른 동작과 특이한 언어사용이 보고된단다.
책 속의 벤 역시도 초고도 비만과 배설조절 능력 상실, 화가 나면 과격한 행동을 한다.
너무나 자랑스러웠던 아이가
이제는 숨기고 싶은 괴물로 변해버린 상황.
오랜 싸움 끝에 눈물로써 엄마가 내린 결론은,
아이를 (이제는 아이라고 하기엔 이미 장년에 속하지만 엄마에게 모든 자식들은 여전히 언제나 아이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거였다.
내 아이의 다름을 인정하는 것!
그래서 아이를 평범하게 만들려는 숱한 시도들을
이제 엄마는 중단할 것이다.
그리고 모자(母子)는 서로 공존하고 의지하면서 평화롭게 사는 방법을 하나하나 배워갈 것이다.
아마도 확실히!

새상의 모든 엄마들을,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엄마는 상식적으로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살아온 인생이 아니란다.
엄마가 할 수 없는 일까지도 오직 엄마라는 이유때문에 다 해내며 살아온 존재가 바로 엄마다.
우리에게 엄마의 존재는 어떤 의미일까?
절대로 엄마처럼은 살지 않겠다고 여러번 다짐하는 자식들은, 아니 나는!
결코 모르는 게 아니었다.
단지 언제나 열심히 모르는척 하려고 최대한 외면했을 뿐이라는 걸.
어떤 엄마도 결코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는 걸
우리는 영원히 잊어버린 척 살기로 작정했는지도 모르겠다.
잊어버렸기에
그래서 잃어버렸는지도...

세상 모든 엄마들을...
우리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정말 어떻게 해야 하나...
정말...
Posted by Book끄-Book끄
그냥 끄적 끄적...2011. 3. 31. 15:55


미국에서 4월 5일 출간되는 신경숙의 장편소설 ‘엄마를 부탁해’(Please Look After Mom·번역 김지영)에 대한 미 언론과 서점들의 호평이 잇따르고 있다. 뉴욕타임스는 사전 제작한 4월 3일자 북 섹션에서 ‘엄마를 부탁해’에 대해 한 면 전체(광고 제외)로 북리뷰를 싣고, “모성(母性)의 신비에 대한 날 것 그대로의 헌사(Raw Tribute to the Mysteries of Motherhood)”라고 호평했다.

이 신문은 지하철 서울역에서 아버지의 손을 놓친 뒤 실종된 엄마를 찾아 나서는 자식들의 시선으로 그려낸 ‘엄마를 부탁해’의 줄거리를 자세하게 서술한 뒤, “신경숙 소설의 문장들은 다 큰 어른 독자들마저도 자주 움찔움찔하게 만든다”고 평했다. 그리고는 “서로를 잘 알고 있다고 믿는 사람들 사이에 얼마나 큰 틈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 주는 소설”이라면서 “너무 아름답고 슬퍼서 잊히지 않을 정도의 여백이 있는 신경숙의 작품은 화자를 계속 옮겨가며 놀라울 만큼 속도감 있고 강력하게 슬픔을 표현했다”고 적었다. 
 

미국판 표지 <엄마를 부탁해>


또 유명 패션지인 엘르 4월호는 “모성의 비밀스러운 희생과 몽상을 그려낸 감동적인 초상화. 한국인들의 경험에 뿌리를 둔 소설을 국제적인 성공으로 끌어올렸다”고 했고, 서평전문지 북리스트는 “날카롭고 베는듯한 문장. 강력한 감동”이라고 극찬했다. 미국의 유명 방송인 오프라 윈프리가 발행하는 O매거진은 4월호에서 ‘지금 선택해야 할 톱 10’으로 ‘엄마를 부탁해’를 꼽았고, 아마존닷컴도 ‘4월의 특별한 책’으로 이 책을 선정했다.

‘엄마를 부탁해’는 미국 유명 출판사인 크노프(Knopf)에서 초판 10만부를 찍었고, 이례적으로 공식 발매도 전에 2판에 들어가는 등 연일 화제를 낳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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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은 기쁘고 황홀하다.
그리고 미국에 이어 영국에서도 곧 출판될 예정이란다.
그런데 과연 영미권 사람들이 엄마를 향한 이 절절함과 냉정함을 얼마나 알아챌 수 있을까?
첫 문장부터 숨이 탁 막혔던 소설이다.
"엄마를 잃어버린지 일주일째다"
엄마를 잃음으로써 자식을은 태어난 곳도 돌아갈 곳도 모두 잃었다.
그리고 잃은체로 살아간다.
꼭 여기저기 찢기고 뜯겨야만 난파선이 되는 건 아니다.
이 복잡하고 아리고 가슴 뜯기는 감정을 그들이 과연 온전히 이해해줄 수 있을까?
그들에게 정말 말하고 싶다.
엄마를 부탁한다고...

* 그런데 미국판 표지는 정말 못봐주겠다.
   책의 감성을 송두리째 침몰시킨다.
   이게 최선입니까? 정말 최선이예요?
   진심으로 묻고 싶다...
 

Posted by Book끄-Book끄
읽고 끄적 끄적...2011. 1. 28. 06:37
궁금했었다.
은희경의 침묵이 너무 길어서 도대체 그녀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건지...
이걸 쓰느라고 그랬나?
은희경의 성장소설 <소년을 위로해줘>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는 자꾸 책 제목을 "소년을 응원해줘"라고 되낸다.
급기야 책장을 덮을 때마다 표지를 보면서 깜짝깜짝 놀랐다.
왜 그랬을까?
왜 "위로"가 "응원"으로 읽히는걸까?
어쩌면 은희경도 이 어린 청춘들을 사실을 응원해주고 싶었던건지도 모르겠다.
더불어 지나버린 자신의 청춘까지도...
위로받은 청춘을 지나온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책을 읽다가 뜬금없이 이런 생각을 오래 했다.



5년 만에 출판된 은희경의 장편소설.
2005년 <비밀과 거짓말>이 출간된 직후
은희경은 이 소설을 쓰기로 결심했단다.
따지고 보면 이 소설을 위해 그녀는 참 오랜 시간을 침묵으로 버텼고
나는 오랜 시간을 기다림으로 버텼다.
은희경의 글들...
그녀만의 독특한 뉘앙스는 늘 내게 향수 비슷한 것을 느끼게 한다.
향수라고 해서 아주 오래된 과거를 들추는 게 아니라
고작 얼마 지나지 않은 사소하고 소소한 기억을 들춘다.
분명히 전경린이나 신경숙과는 또 다른 류(流)를 소설이다.



이 책을 재미있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그렇다고 재미없었노라 말 할 수 있을까?
성장소설은 재미로 이야기할 수 있는 건 아닌 것 같다.
그렇다고 깊이를 따지기에도 왠지 아닌 것 같고...
굳이 주인공들이 강연우, 독고태수, 민기훈(G-그리핀), 이채영이 아니면 또 어떤가!
이곳엔 모든 사람이 과거에 겪었던 청춘과
지금 열심히 겪고 있는 청춘이 그대로 담겨있다.
청춘이란 그런 거란다.
"세월이 지나야만 완벽히 소유할 수 있는" 게 바로 청춘이란다.
우리의 하루하루는 클래식일 수도 있고
헐렁하고 자유로운 힙합일 수도 있을 것이다.
혹은 담벼락에 몰래 그려놓는 반항기 풍기는 그림같은 것일 수도...
뭐가 됐든 사실 어떤가!
정답은 없지만 절대적이고 지배적인 시간이고 공간인걸.
누군들 안 그럴까????

참 오랫만에 읽은 은희경은...
참 그녀답게 덤덤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나는 그런 은희경의 덤덤함이 
징글징글하게 좋다.
Posted by Book끄-Book끄
읽고 끄적 끄적...2010. 6. 11. 06:30
신경숙이 새로운 장편소설을 썼다.
<엄마를 부탁해>로 공전의 베스트셀러를 만들었던 그녀가 1년만에 다시 선보인 소설.
놀랍다. 그녀의 바지런함이...


"엄마를 잃어버린지 일주일째다"
<엄마를 부탁해>는 첫 문장부터 이미 내 숨을 턱 조여 왔었다.
차마 다음 줄을 읽지도 못하고 한참을 허망해하던 기억...
엄마를 잃음으로서 놓쳐버린 그 가족들이 원망스러웠고 그런 이야기를 쓴 신경숙이 원망스러웠었다.
엄마에게 그래서는 안 된다고...
왜 당신은 늘 비극보다 더 아픈 이야기만 만드냐고...
책 장을 한장씩 넘길 때마다 마디마디로 날카로운 얼음이 박이는 것 같이 아프고 얼얼했었다.
예수를 안고 있는 마리아의 피에타 상 앞에서
나는 차마 고해성사도 하지 못했다.
내가 엄마를 놓친 것 같아서...

그런 그녀가 이제 뭘 이야기하고 싶었을까?
신경숙의 일곱 번 째 소설의 시작은 이랬다.

......그가 나에게로 전화를 걸어온 것은 팔 년 만이었다.
나는 단 번에 그 목소리를 알아들었다.....



그녀는 이제 놓쳐버린 청춘을 이야기하려는가?
일곱 번째 장편을 앞에 두고 그녀는 말했다.
"여러 개의 종이 동시에 울려 퍼지는 것 같은 사랑 이야기. 청춘소설을 쓰고 싶었노라" 고...
한국어를 쓰는 작가로서 우리말로 씌어진 아름답고 품격 있는 청춘소설이 있었으면 했었노라고...
그녀가 선택한 단어가 나는 당황스럽다.
책장을 넘기면서 자꾸 그 "품격"이라는 낱말이 발목을 잡는다.
(그녀가 이런 단어를 사용하던 사람이었던가????)
"이번 소설은 멀어져가는 가까운 사람들을 보내주는 마음이 읽혔으면 좋겠고
슬픔에 빠진 사람들을 위로하려는 나의 마음이 전달되었으면 합니다"

정윤 - 단이, 이명서 - 홍미루
그리고 마치 시인 오규원을 떠올리게 하는 윤교수.
그녀의 글 속에서 이렇게 많은 인물들을 동시에 만나야 했던 적이 있던가?
놀랐다.
소설 속 등장인물들에 이름이 주어져서...
그녀의 K와, P, J에 익숙했던 나는 또 다시 당황한다.
그녀는 청춘을 현실화하고 싶었던 걸까?
남산 밑에 있던 과거의 서울예전을 떠올리는 풍경들과 거리들,
그리고 주말이면 내가 숱하게 헤매고 다니는 대학로의 골목들...
나도 늘 궁금했옸다.
다들 어떻게 견디고 있는지...

...... 팔 년 전이나 지금이나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고 그냥 흘러가는 법 또한 없다. 팔 년 만에 전화를 걸어온 그에게 어디야? 하고 담담하게 묻는 순간, 이제 내 마음속에 그에게 하지 못한 말들이 쌓여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남아 있는 격렬한 감정을 숨기느라 잘 지내고 있는 시늉을 할 필요도 없었다. 나는 정말 담담하게 그에게 어디야? 하고 묻고 있었으니까. 의문과 슬픔을 품은 채 나를 무작정 걷게 하던 그 말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그 쓰라린 마음들은. 혼자 있을 때면 창을 든 사냥꾼처럼 내 마음을 들쑤셔대던 아픔들은 어디로 스며들고 버려졌기에 나는 이렇게 견딜 만해졌을까. 이것이 인생인가. 시간이 쉬지 않고 흐른다는 게 안타까우면서도 다행스러운 것응 이 때문인가. 소용돌이치는 물살에 휘말려 헤어나올 길 없는 것 같았을 때 지금은 잊고 그 누군가 해줬던 말. 지금이 지나면 또다른 시간이 온다고 했던 그 말은 이렇게 증명되기도 하나보다. 이 순간이 지나간다는 것은 가장 큰 고난의 시절을 보내고 있는 이에게나 지금 충만한 시절을 보내고 있는 이에게나 모두 적절한 말이다. 어떤 이에게는 견딜 힘을 주고, 어떤 이에게는 겸손한 힘을 줄 테니까 ......


너무 많은 인물들이 나오고,
너무 많은 사건들이 나오고,
(실종, 분신, 거식, 죽음, 상처, 흔적, 군 의문사, 시위대.... 아, 숨차다!)
너무 많은 대화들이 오가고,
너무 많은 암시들과 시간들이 나온다.
그리고 결국 이 모든 것들은 눈군가의 "죽음"으로 실종되고,
그 실종을 누군가는 또 찾아나서고,
남겨진 사람들은 견디듯 살아간다.
그러다 때론 견딘다는 것조차 의도적이든 아니든 잊혀짐으로 성큼성큼 넘어가기도...

그랬던가?
죽음을 앞에 둔 윤교수가 남긴 손바닥 글씨처럼
모든 것엔 끝이 찾아오던가!
소설 속 청춘인 명서는 윤에게 말한다.
"어서 세월이 많이 흘러갔으면 좋겠다. 용서할 수는 없어도 이해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으면 좋겠다. 아주 힘센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나이가 들면 용서할 수 없는 게 이해가 됐던가?
그러나 내 세월은 자주 곡해를 이해라고 아득바득 우기게 만들더라...
그래서 오해할 수 있는 시간이 차라리 덜 빡빡했노라고...


모르겠다.
나는 이 "청춘"들을 이해하고 싶지 않아 지금 어깨가 뻐근하다.
아니 오히려 털어내고 싶다.
그들 청춘의 마지막 모습처럼.
한 밤 중에 산에 올라 소나무 위의 더깨처럼 쌓인 눈을 장대로 힘껏 털어내듯.
그랬었나?
나의 청춘도 섬처럼 고립되어 블멸의 풍경으로 각인되어 있었나?
것도 아니라면,
아직까지 내 청춘은 내내 현재진행형으로 고립중인가?
Posted by Book끄-Book끄
달동네 책거리2009. 12. 8. 05:33
 <네가 어떤 삶을 살든 나는 너를 응원할 것이다> - 공지영


 네가 어떤 삶을 살든 나는 너를 응원할 것이다


작가 공지영....

참 할 말이 많은 사람이기도 하고, 할 말이 없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한때 그런 말들이 있었어요.

“오죽하면 공지영이고 신경숙이겠느냐고....”

저 신경숙과 공지영의 모든 책들을 거의 다 읽었습니다.

위에 적은 말, 어느 부분 동의하는 부분도 있고, 그렇지 않은 부분들도 있긴 하지만 어쨌든 한때 문학계에선 이런 말이 떠돌았드랬죠.

사실 전 공지영이라는 작가에게 좀 불만이 있는 편입니다..(제가 또 뭐라고 불만씩이나...)

깊게 들어갈 것 같으면서 그 언저리만 열심히 맴도는 느낌의 불편한 망설임, 그리고 좀 살았던 어린 시절의 과거를 자꾸 내비치며 “그래, 난 늬들하고 태생부터 좀 다르게든...”하고 눈을 살짝 내리까는 약간은 공주병적인 문장들하며, 어찌 생각하면 뻔뻔하다 싶을 만큼의 당당함이 그닥 제 마음에 와 닿지 않았던 거죠.(저의 완전 찌질한 열등감의 발동임을 어찌 고백하지 않을런지.....ㅋㅋ)

저 여자는 무슨 복에 부모 잘 만나 풍족한 어린 시절을 보내고, 뭔 복에 당대 잘나가는 작가, 감독, 교수들만 두루두루 남편으로 만났는지....

그냥 느낌에 손에 물 안 묻히고 곱게 자란 태가 줄줄 난다고 생각했죠.

왜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작가는 줄담배를 달고 살고, 머리는 기름기 동동 흐르고, 뭐 한 사나흘은 족히 못 잔 것 같은 꽹한 눈에 거칠거칠한 검은 피부...한마디로 꾀죄죄함의 전형이었는데 공지영이란 작가는 비쥬얼부터 영 작가스럽지 않다는 말도 안 되는 편견을...

그런데 이 작가...

어느새 “공지영스럽다”는 트렌드를 만들어 버린 것 같습니다.

적어도 사람들은 이제 거의 아는 것 같아요.

몇 문장 읽어보고도 “아~, 이게 공지영꺼구나...”하고..


오늘 소개할 책은 공지영의 그 숱한 소설들 중 하나가 아니라 산문집의 일종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공지영식 독서노트라고 할 수 있죠.

제가 좋아하는 분야이기도 합니다.(제가 싫어하는 건 뭘까~~~~~~요???????)

공지영의 소설 <즐거운 우리 집>의 연장선상에 있는 책이라고 미디어들은 말하는데 전 이 말이 참 맘에 안 듭니다.

단지 “위녕”이라는 딸이 등장한다고 해서 그렇게 소위 싸잡아 분류하는 건 어쩐지 참 불편하네요.

엄마가 딸에게 주는 편지라는 글귀도 좀 불편합니다.

이 책을 처음 봤을 때 제 느낌은....

확실히 공지영은 여우같은 작가라는 생각이었습니다.

이 책을 읽다 보면 "전시회"를 관람하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합니다.

그림처럼 읽혀지는 책이라고 하면 이해가 되실까요?

대략 꼽아 봤더니 20권의 책들이 소개되어 있고 그리고 소소한 단편들이며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들도 중간중간 나옵니다.

이런 형식의 독서노트는,

확실히 없었던 것 같습니다.

서간문의 형식을 빌어서 쓴 독서 노트라....

그래서 어찌 보면 따분하고 줄거리 위주로 진행될 것 같은 책들의 소개가 마치 "storytelling"처럼 자연스럽게 다가옵니다.

공지영이 소개하는 책들은 이곳에서 image making 되어 입체적으로 서서히 바라보게 됩니다.(마치 일정한 거리를 두고 감상(?)하는 그림 같다고 할까요~~ 그녀가 심지어 큐레이터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책의 전반적인 내용을 소개하는 게 아니라 강렬했던 부분들, 구절들, 그리고 그녀가 느꼈던 느낌들을 1차원적인 여과과정만을 거쳐 표현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부담스럽지 않고 과히 전문적이지도 않아 오히려 다정하기까지 하죠.

그 다정함에 엄마가 딸에게 보내는 편지글이라는 단서까지 붙어 있으니 그 말캉함이 win-win 효과를 거두고 있다고나 할까요?

확실히 작가 공지영은 여우적 육감이 발달할 것 같습니다...(한없이 부러울 따름이죠.... 이럴 땐 차라리 늑대적 육감이라도 심히 갖고 싶어진다는... 아~~~우~~~~)

책을 읽으면서 공지영이라는 작가에 대해 느끼는 제 선입견마저도 그대로 포용될 정도로 온기가 있는 글이었습니다.

사실 독서 노트...

작가 입장에서는 별 힘들이지 않고 쓸 수 있으면서 판매의 부담감 또한 없는 글이라고 생각합니다.(어디까지나 벤댕이 소갈딲지를 자랑하는 제 좁은 식견으로다....)

잘 쓰면 이렇게 베스트셀러에 오를 수도 있고, 그렇지 않다 해도 개인적인 기록의 출판으로 남길 수도 있으니까요.

그래서 작가들은 한번씩 “독서노트”를 남기고 싶어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 공지영....

새로운 형식을 만들어 낯설게 하기에 확실히 성공한 것 같습니다.

가끔은 이 여자의 여우같은 행보가 어디까지 갈지 사뭇 궁금하기도 합니다.

Posted by Book끄-Book끄
달동네 책거리2009. 10. 16. 06:01
 <꽃피는 고래 > - 김형경 

 

꽃피는 고래 


개인적으로 느낌이 좋다고 생각하는 여성 작가입니다.

신경숙, 은희경, 공지영, 전경린. 독특한 자기만의 작가 세계를 구축한 여성 작가들 중에서 김형경은 어찌 보면 굴곡 없고 평범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세월>이라는 소설이었네요. 제가 처음 김형경이라는 작가를 알게 된 게...

<새들은 제 이름을 부르며 운다>, <외출>, <사랑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 <성에>, <사람 풍경>... 참 꾸준히 그리고 성실히 달려온 작가란 생각이 듭니다.

어떤 사람은 이 분의 글은 참 심난하다고 표현하기도 했는데 그 심난함이라는 게 모두 사람들로부터 비롯된 심난함이니 과히 낯설지 않다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이 책은 교통사고로 부모를 잃은 17살 “니은”의 성장소설입니다.

참 잔인한 현실이 무심하게 그리고 태연하게 그려져 있죠.

좀 당황스러웠습니다.

아이와 어른이 중간쯤에 와 있는 “니은”과 천진함이 먹먹한 사랑으로 다가오는 어른의 이야기(참 표현력 진부하네요...^^)

평생을 고래를 쫓아다니던 처용포 대왕고래 장포수 할아버지는 언젠가 포경업이 다시 합법화 될 날을 기다리며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배를 20년 동안 간수하며 기다리고 또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제 다시는 제 손으로 살아있는 생명을 보내지 않으리라 다짐한 왕고래집 할머니는 첫정의 징글징글함을 알면서도 주인이 버리고 떠난 고양이들에게 새벽부터 밥을 챙기며 생명을 거두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면,

한 사람은 생명을 죽이는 일을 (그것도 엄청난 생명) 했었고, 한 사람은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하고 있네요.

그리고 또 한 사람.

자신을 홀로 세상에 남기고 가버린 부모가 어이없고 괴씸하기만 한 “니은”은 지금 바다와 같은 공황상태에 있습니다.

“파도는 평생 바다를 찾아다닌다...”는 말

제가 바다의 일부인지도 모르고 때론 거칠게 화를 내며 파도는 평생을 그렇게 바다를 찾아 다닌다네요

이 책의 “니은”이 꼭 그런 존잽니다.

울컥울컥 쏟아지는 감정을 차마 쏟아내지도 못하고 자꾸 안으로 안으로 숨기다 급기야 우연히 붙잡힌 고래를 안고 토해내고 마는 지경까지 이르고 말죠.

그녀의 입에선 무수한 고기들이 빠져 나옵니다.

어쩌면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네요.

무수한 작살을 꽂고서 몇 시간동안 바다에서 사투를 벌였을 고래의 몸이 제 몸 인양 그렇게 바라봤을지도, 그래서 울어내도 울어내도 그 울음은 내 것이 아니었노라 발뺌할 수 있다 믿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니은에게 왕고래집 할머니는 말합니다.

"니가 시원하게 못 울어서 마음이 아픈 거다. 슬픔이 몸 안에서 돌아다니면서 몸을 두드리는 거지...“

전 이 표현이 참 섬뜩하게 아팠습니다.

슬픔이 몸 안에서 돌아다니면서 내 몸을 두드린다니...

내 맘이 딱 그랬었는데 하면서 느끼는 섬뜩함.

이 섬뜩함을 깨고 홀로 일어서는 게 17살 주니은의 어른되기 프로젝트의 시작일 것 같네요.


고래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내 품는 피 섞인 숨결 그 잔인한 순간을 “꽃을 피운다”는 말로 이야기 할 수 있는 게 어쩌면 우리가 살아내야 하는 인생인지도 혹 모르겠습니다.

“고래가 꽃을 피우기” 위해선 쫒는 포경선의 질김도 있어야 할  것이고, 이제는 끝임을 인정하는 고래의 마지막 체념의 숨결도 있어야 하듯이 말입니다.

어쩌면 끝을 인정하는 고래의 마지막 숨결이 신화가 되어 꽃을 피우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고래가 정말 “신화”처럼 아직까지 숨쉬고 있는 건지도요...

알고 계셨나요?

고래에겐 혈우병이 있다는 거...

그래서 한번 상처를 크게 입으면 피가 멎지 않는다고 하네요.

넓은 바다에 살면서 우리처럼 허파로 호흡을 하고, 그리고 새끼를 낳아 젖을 먹여 키우는 고래.

허파로 호흡하는 고래가 뭍에 나오면 죽는 이유는...

숨을 못 쉬어서가 아니라 물속에선 부력에 의해 감당했던 자신의 무게를 뭍에선 도저히 감당하지 못해 제 무게에 스스로 눌려 사망하게 되는 압사라고 하네요.

어쩌자고 상처받으면 쉬 아물지 않고, 감당하지 못할 삶의 무게에 죽을 것 같는 우리네 모습과 이리도 똑 닮았는지....

그래도 그 작살을 꽂고 몇 십 년을 아니 몇 백 년을 살아가는 고래도 있다고 합니다.

그 끈질김 또한 어쩜 그리 똑 같은지...

장포수 할아버지는 분명 오래전 자신과 눈이 마주쳤던 그 고래를 찾아 다시 떠났음이 이제 분명합니다.

그 고래를 잡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고래처럼 "신화"가 되기 위해서...

그리고 결국은 "신화"처럼 숨쉬기 위해서...

우리에게 이제 "신화"는 그리 거창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인간이 이겨내고 지켜내는 모든 일들과 마음들, 그리고 진심들

그것들이 우리에게 영원히 숨쉬는 “신화”가 될 것을 이젠 알 것 같습니다.

“신화”는 기억하는 사람들의 것입니다.

이 책은 말합니다.

기억하는 일이 중요하다고요.

"그것들을 잘 떠나보내기 위해서 그리고 그 뒤에 마음속에 잘 살게 하기 위해서”라구요.


모든 것을 마음에 담고 살아갈 수는 분명 없을 겁니다.

그게 이별일 수도 있고 사랑일 수도 있고 상처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떠나보내는 게 잘 기억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더 이상 떠나보냄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이 책,

묘한 안도감에 평온함마저 안겨주네요.


Posted by Book끄-Book끄
읽고 끄적 끄적...2009. 1. 5. 23:17
 

o 왼손을 쓰면 인생에 울 일이 많이 생긴다.

o 안다고 말할 수 없게 되는 때

o 당신은 이 집을 내키는 대로 떠났다가 돌아오면서도 아내가 이 집을 떠날 수 있다는 것을 단 한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o 아내의 손길이 스치는 곳은 곧 비옥해지고 무엇이든 싹이 트고 자라고 열매를 맺었다.

o 엄마 소리 지른 거 너무 싫어하셨는데...... 모두들 엄마한테 소리지르쟎아요.

o 말이란 게 다 할 때가 있는 법인디...

   나는 평생 니 엄마한테 말을 안하거나 할 때를 놓치거나 알아주겠거니 하며 살았고나. 인자는 무슨 말이든
   다 할 수 있을 것 같은디 들을 사람이 없구나.

o 엄마를 모르겠어. 엄마를 잃어버렸다는 것 밖에는...

o  너에게 사과하러 왔는데.... 나는 이제 갈란다.

o 나는 당신이 좋았고. 행복할 때보다 불안할 때 당신을 찾아갈 수 있어서 나는 내 인생을 건너올 수 있었다
   는 그 말을 하려고 왔소.

o 나는 알고 있었재. 내가 어느 날인가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잘 있어요, 난 이제 이 집
   에서 나갈라요.

o 엄마는 알고 있었을까. 나에게도 일평생 엄마가 필요했다는 것을...

o 엄마는 엄마가 할 수 없는 일까지도 다 해내며 살았던 것 같아. 그러느라 엄마는 텅텅 비어갔던 거야. 나는
   엄마처럼 못 사는데 엄마라고 그렇게 살고 싶었을까?

o 인생에 단 한 번도 좋은 상황에 놓인 적이 없던 엄마, 너에게 언제나 최상의 것을 주려고 그리 노력했던 엄
   마...


Posted by Book끄-Book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