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끄적 끄적...2012. 8. 24. 08:10

<Man of La Mancha>

 

일시 : 2012.06.19. ~ 2012.10.07.

장소 : 샤롯데씨어터

대본 : 데일 와서맨

작사 : 조 대리언

작곡 : 미치 리

연출 : 데이비드 스완

음악감독 : 김문정

출연 : 황정민, 서범석, 홍광호 (세르반테스/돈키호테)

        조정은, 이혜경 (알돈자)

        이창용, 이훈진 (산초)

        서영주 (여관주인), 박인배 (닥터 까라스코), 이영기 (신부) 외

 

돈키호테가 극 중에서 부르는 "impossible dream"은

정말 dream을 꿈꾸게 하는 넘버다.

<라만차>란 이름으로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초연됐을 때

이 노래가 줘던 감동과 가슴 먹먹함이라니!

오랜 시간이 지나도 선명하게 기억될만큼 인상적이고 강렬했다.

김성기, 류정한, 조승우, 정성화에 이어

2012년 서범석, 황정민, 홍광호까지 참 많은 배우들이 이 강렬하고 몽상가적인 돈키호테를 연기했다.

분명 <지킬 앤 하이드> 만큼이나 매력적이고 탐이 나는 배역임에는 틀림없다.

 

<지킬 앤 하이드>, <오페라의 유령>에 이어 돈키호테의 타이틀까지 거머 쥔 배우 홍광호!

개인적으로 이 배우는 언제쯤에 쉬겠다는 결심을 할까 진심으로 궁금하다. 

<오페라의 유령>, <지킬 앤 하이드>, <닥터 지바고>에 이어 <맨 오브 라만차>까지

쉼 없이 이어진 배우 홍광호의 여정이 관객 입장에서도 참 숨가쁘다.

최연소의 타이틀에 연연하는 게 아니라면 이제 제발 조금 쉬었으면 좋겠다.

완숙하고 노련한 배우로 성장하기 전에 지쳐서 너무 노숙한 배우가 될까봐 걱정된다.

(이제 겨우 30대 초반에 불과한데...)

 

홍광호의 세르반테스는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돈키호테는 어린 홍광호가 표현하기에는 확실히 부족하고 어설프다.

공연을 보면서 내내 영화 <은교>가 떠올랐다.

얼굴과 겉모습은 어떻게 분장과 카메라 기술, 연기로 그럴듯한 나이로 보이게 만든다해도

목소리에 담긴 젊은이의 음성을 도저히 숨길 수 없었던 박해일의 적요.

영화를 보면서 답답하고 막막했던 심정이 홍광호의 돈키호테를 보면서 또 다시 찾아왔다.

아! 이 역할은 연기력과 성량으로만 할 수 있는 배역은 아니구나 절감했다.

서범석과 황정민은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는데

홍광호는 특히 대사할 때 나이들어 보이게 하려고 너무 필사적으로 노력한다.

어차피 돈키호테도 세르반테스가 연기하는 극중 인물에 불과할 뿐인데...

그러다 보니 넘버가 두동강이 나버리고 만다.

처음 도입부는 노인의 음성으로, 그러다 클라이막스나 후반부에서는 홍광호 자신의 목소리로.

사실 좀 혼란스러웠다.

그냥 처음부터 세르반테스로 불렀다면

아마도 그의 장점이라는 "미친 가창력"을 속시원하게 만끽할 수도 있었을텐데...

정확하게 두 동강 나는 "impossible dream"을 들으면서

소리의 빈틈이 공간의 여백까지 막막하게 만들어서 참 안따까웠다.

물론 홍광호에게도 돈키호테 캐릭터는 쉽게 접근하기 힘든 역할이었겠지만

이번만큼은 그가 너무 욕심을 낸 것 같다.

한 10년 후에 이 역할을 했다면 어땠을까?

그가 만들어낸 캐릭터는 고 정주영 회장의 모습까지도 보여 본의 아니게 코믹요소까지 더해진다.

턱을 쭉 빼고 "운명이 이끄는데로~~~~", "주여~~!"를 연발할 때마다 나는 사실 많이 난감했다.

"ㅏ"를 "ㅓ"나 "ㅡ"로 발음한 것도 의도적인 것 같은데

굳이 그럴 필요가 있었을까 싶다.

홍광호는 아마도 돈키호테라는 인물에 너무 많이 집중하고 고민한 모양이다.

세르반테스가 연기하는 돈키호테가 아닌 홍광호가 연기하는 돈키호테 말이다.

그래도 이번 작품에서는 CCM 풍으로 부르지 않아서 그 점은 개인적으로 좋았다.

 

세르반테스가 <돈키호테>라는 작품을 출판했을 때 나이가 58세였다.

세르반테스의 일생과 실제 경험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이 작품의 무게는

개인적으로 코믹이 아니라 풍자, 위트로 풀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이번 시즌 "맨 오브 라만차"는 조금 안타깝다.

태어날 때부터 영주였던 영주님도 그렇고 돈키호테도 그렇고 너무 과하게 코믹하다.

(특히 홍광호가 연기하는 돈키호테는 코믹의 정도가 더 쎄다)

그래서 닥터 카라스코와 노새끌이 사내들이 진중하고 심지어 비극적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이렇게 쓰면서도 나 역시 참 난감히다...) 

아마도 이번 관람이 이번 시즌 <맨 오브 라만차>의 마지막 관람이 되겠지만

(50% 파격 할인이 아니라면 다시 찾게 되진 않을 것 같다)

그래도 박인배 조정은, 두 배우의 새로운 발견은 꽤 알찼고 괜찮았다.

조정은의 다음 작품 <레미제라블> 판틴도 참 궁금해졌고

그리고 박인배의 다음 작품도 기대된다.

이창용 산초도 의외로 귀엽고 괜찮았다.

산초의 터줏대감이라고 할만한 이훈진과는 확실히 다른 표현이었고

(개인적으론 참 지적이고 똑똑한 산초라고 생각했다)

특히 액팅과 표정이 참 좋았다.

 

그나저나 <레미제라블>의 캐스팅은 참 의외다.

(정성화 - 장발장, 문종원 - 자베르, 조정은 - 판틴, 이주스 - 고제트, 김우형 - 앙졸라 ...)

최고의 퀄리티를 위해 주연부터 앙상블까지 원캐스팅으로 공연된단다.

런던 오리지널 크리에이티브팀 전원이 직접 한국에 내한할 예정이라니 기대가 된다.

그런데 참...

배우들이 너무 젊다.

그래서 솔직히 걱정된다. 

 

Impossible dream

 

그 꿈 이룰 수 없어도

싸움 이길 수 없어도

슬픔 견달 수 없다해도

길은 험하고 험해도

정의를 위해 싸우리라

사랑을 믿고 따르리라

잡을 수 없는 별일지라도

힘껏 팔을 뻗으리라

 

이게 나의 가는 길이요

희망조차 없고 또 멀지라도

멍추지 않고 돌아보지 않고

오직 나에게 주어진 이 길을 따르리라.

 

내가 영광의 이 길을 따라가면

죽음이 나를 덮쳐와도 평화롭게 되리

 

세상은 밝게 빛나리라

이 한 몸 찢기고 상해도

마지막 힘이 다할 때까지

가네,

저 별을 향하여

 

 

 

Posted by Book끄-Book끄
읽고 끄적 끄적...2012. 6. 20. 08:01

그런 책들이 있다.

읽고 난 후에 바로 첫 장으로 다시 되돌아가 되읽기를 시작하는 책과,

한 번 읽고 난 후 일주일 정도 시간이 지난 후에 다시 읽게 되는 책.

전자에 해당하는 책이 김주영의 <잘가요 엄마>였고

후자에 해당하는 책이 박범신의 <은교>였다.

그러나 두 부류의 책에은 공통점이 있다.

결코 2번의 읽기로 끝나지 않고 언제든 현재 진행형의 책읽기로 급변할 소지가 다분하다는 사실이다.

이런 책은 거의 항상 읽을 수록 다른 것들이 보이고,

읽을 수록 깊어지고,

읽을 수록 먹먹해지고,

읽을 수록 살붙이 같아 진다.

일흔 셋의 김주영이 쓴 참회의 사모곡.

단지 소설만이 아니었기에 더 남루하고 곡진하고 애잔했는지도 모르겠다.

 

어머니는 나에게 크나큰 행운을 선물했다. 어머니와 내가 함께한 시간 속에서 어머니는 나로 하여금 도떼기시장 같은 세상을 방황하게 하였으며, 저주하게 하였고, 파렴치로 살게 하였으며, 쉴새없이 닥치는 공포에 떨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어머니가 내게 주었던 자유의 시간이었다. 그것을 깨닫는 데 너무나 많은 시간이 걸렸다. 아니 어머니께서 우리와 유명을 달리하고나서야 비로소 그것을 깨달았다.

 

철부지 시절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내 생애에서 가슴속 깊은 곳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진정 부끄러움을 두지 않았던 말은 오직 엄마 그 한마디뿐이었다. 그 외에 애가 고향을 떠나 터득했다고 자부했었던 사랑, 맹세, 배려, 겸손과 같은 눈부신 형용과 고결한 수사 들은 속임수와 허물을 은폐하기 위한 허세에 불과하였다. 이 소설은 그처럼 진부했었던 어머니에 대한 섬세한 기록이다.

 

마지막 장에 있는 작가의 말을 나는 몇 번이나 되읽었는지 모른다.

확실히 지상의 모든 자식은 어머니라는 존재에 갚을 수 없는 부채를 지고 있다.

아마도 그건 윤회나 부활을 거듭해도 결코 탕감될 수 없는 부채이리라.

다른 모든 것들은 단시 허세에 불과했다는 일흔 셋의 김주영의 고백이

나는 절절했고 그리고 섬득했다.

나란 존재가 평생 어머니를 파먹고 사는 무간지옥의 아귀(餓鬼)임이 분명할 것 같아서... 

 

이 소설은 작가 김주영 어머니에 대한 글이란다.

실제로 그의 모친이 2007년 정부에서 주는 "예술가의 장한 어머니상" 수상자로 결정되는데

어머니는 시상식장에 끝내 올라오지 않으셨단다.

작가의 어머니가 남긴 말은 소설 속 어머니의 말과 정확히 일치한다.

 "골목마다 종갓집이 버티고 있는 이런 괴팍스런 동네에서 사내를 두 번씩이나 갈아치웠다고 입들을 흔들비쭉거리고 눈총받고 살아왔는데, 장한 에미상을 받았다면 그 사람들 배꼽을 잡고 웃을라."

작가는 소설을 쓰면서 어머니의 이야기를 거의 사실 그대로 쓰느라 오히려 어려웠노라 고백했다.

사실과 허구 사이를 계속 고민하다 결국 사실을 선택했노라 말했다.

일흔이 넘긴 나이에 이제 더 이상 숨기고 자시고 할 것이 없었노라고...

일흔의 노구(老軀)가 남긴 어머니에 대한 참회곡.

"내려오셔야 하겠습니다"

성씨 다른 동생에게 걸려온 한 통의 전화.

아들은 무허가 화장터에서 어머니의 뼈와 살을 태우고 그 재를 고향땅에 흩부린다.

어미의 죽음에 이렇게 형식적이고 무덤덤한 후레자식이 있다니...

나는 홀로 어이없이 분개했다.

(내 속이 한 마디 한다. 너라 잘해라!)

아들은 어미를 보낸 후 동생과 보내는 짧은 시간 속에서 다시 어머니를 만났다.

지상에서 어머니를 떠나보내고 나서야 비로소 이뤄지는 모자(母子) 간의 화해는,

일종의 부러움이자 지독한 시기였다.

참회할 것만 가득한 나는

지워지지 않을 원죄(原罪)처럼 꾸역꾸역 이 책을 읽어냈다.

가슴 속에 옹이 하나 굳게 남겨둔 채...

Posted by Book끄-Book끄
읽고 끄적 끄적...2011. 5. 4. 06:30
김 훈의 책을 읽으면
고인이 된 박완서 작가가 생각난다
(얼마전에 어머님의 뜻에 따라 전재산인 13억을 서울대에 기부한다는 가족들의 발표가 있었다.
 돌아가셔도 작가 박완서는 따뜻한 큰엄마의 모성은 지극하고 감동적이다.
 뒤늦게 작가가 안 되었다면 당신의 삶도 지키고 살아내기 힘들었을텐데...
 돌아가신 고인도, 가족들도 모두 진정한 '오블리스 노블리제'다.)
작가 박완서가 그랬다.
김훈의 버르장머리없는 짧막한 글을 보면서 내내 추웠다고, 
그리고 실제로 그 추위가 자신의 6,25 동난 때를 떠올리게 해서 실제로 몸에 감기몸살이 왔었노라고...
몸이 아프고 으슬으슬했을 때 나도 김훈의 책을 연겨푸 두 권 손에 잡았다. 
내 몸의 추위를 김훈이 글이 주는 더 큰 추위로 버텨보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3주간 약봉지를 끌어안고 있다
겨우 김훈을 말한다.
그런데 정말 말할 수는 있는 건가?

<내 젊은 날의 숲>
오직 눈(目)뿐인 세상.
글이 아니라 한 땀 한 땀 정성으로 그린 그림을 보는 느낌이다.
세밀화 그 이상의 묘사에 나는 감히 감동을 운운하기도 벅차다.
아마도 나는 이 책을 한 열 번쯤은 읽게 될 것 같다.
그리고 그 매 번을 나는 당황하면서 아득할 것이다.
김 훈이란 작가를 절필시키고 싶을만큼 이 글은 내겐 언제까지라도 치명적일 것이다.
아주 명확하게 확실하게...
줄거리뿐만 아니라 묘사 하나하나를 따라가는 것도 아득하다.
이걸 어떻해야 하나...
작은 여백과 빈숨까지 다 보는 시선.
어떻게 그걸 종이위에 그대로 다 표현할 수가 있는가!
김훈은 괴물이다.
그리고 그는 펜을 든 화가다.


o 눈 덮인 숲속의 추위는 바라보기에 따뜻했다.
o 추위 속에서 나무들은 우뚝하고 강건했다.
o 얼음이 녹은 늪의 수면은 팽팽했고 거기에 물벌레 한 마리가 기어다녀도 물은 주름잡혔다.
o 숲이 수런거리는 소리와 나무의 입김으로 가득찬 시간.
o 눈 속에서 꽃이 필 때 열이 나는지 꽃주변의 눈이 녹아 있었다.
o 풀을 들여다보면서 내 몸속으로 흘러들어오는 식물들의 시간을 나는 느꼈다.
o 색깔들이 물안개로 피어나는 시간이었다.
o 완전히 사랑하고 이해해야만 볼 수 있는 빈틈.
o 본다고 해서 보이는 것이 아니고 본다와 보인다 사이가 그렇게 머니까 본다와 그린다 사이는 또 얼마나 
  아득할 것인가
o 백작약 꽃잎이 필때부터 꽃의안쪽에서부터 이미 추락을 예비하는 피로의 낌새가 보였다.
o 작약꽃은 피면서 동시에 졌고 지면서 또 피었다.
o 5월의 숲은 강성했다.
o 편지의 글씨체는 어려보였다.
0 꽃잎에 이슬을 매단 채 아침햇살을 받으면 패랭이꽃 이파리 끝까지 긴장하면서 쟁쟁쟁 소리가 날듯한 기
  운을 뿜어내는데 흐린 날 아침에 꽃은긴장하기 않았다.
o 여름의 숲은 크고 깊게 숨쉬었다. 나무들의 들숨은 땅 속의 먼 뿌리끝까지 닿았고 날숨은 온 산맥에서
  출렁거렸다.
o 꽃은 쳐다보는 사람을 향해서 피어있다.
o 꿈이 힘들어 보이네요
o 저물 때 숲은 낯설고 먼 숲의 어둠은 해독되지 않는 시간으로 두렵다.
o 멀리 보는 시선이 헐거웠다.
o 가엾고 투명한 다임잇소리
o 직접 보지 않았기 때문에 말은더욱 치열히지는 모양이다.
o 깊어서 끌어낼 수 없는 울음이 밴 흔들림이었다.
o 가을의 서어나무는 날마다 헐거워져서 안쪽이 들여다 보였다.
o 나무의 죽음은 느리게 진행되어서 살아가는 일처럼 나무는 죽는다.
   나무는 한 그루 안에서 늙음과 젊음이 순환하는 것이다. 나무의 시간은 인간의 시간과는 다르다.
o 눈이 쏟아지는 날에 흐려서 보이지 않던 것들이 귀를 기울이면 보인다.
o 귀로 더듬는 세상의 모습
o 숲에 눈이 쌓이면 눈에 덮이는 익명성 속에서 나무들은 편안해 보였다.
o 숲에 내리는 눈은 바람에 따라서 풍경을 열었다가 닫고 지웠다가 다시 돌려놓는다.
o 숲속의 겨울 취위는 한군데로 뭉쳐서 강추위가 되지 않고 추위가 숲에 고루 퍼져서 나무들을 덮고 나무
  들은 추위 속에서 풋풋해 보였다.
o 울음이 너무 멀어서 가까이 다가오지 않았다
.


공무원으로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의 뇌물죄와 알선수재로 가족을 부양한 아비도
민통선 안 국립수목원의 계약직 전속 세밀화가가 되어
고요 속에서 꽃과 나무를 들여다 보는 딸도
그 딸에서 새벽마다 절박하게 무내용의 전화를 해대는 엄마도
다 아득하고 가엾고 그리고 시리다.
갓지은 고슬고슬한 밥에 묻혀 주먹밥으로 엉키고 뭉치는 아버지의 하얀 뼛가루를 읽는 건
차라리 고요함이었고 아늑함이었다고 해두자!
아버지의 죽음과 50여년 만에 늙은 여동생에게 인계된 쌍추쌈이 먹고 싶다는 어린 병사의 고요한 일괄 유골이  
서럽게... 서럽게... 겹쳐진다.

새들은 흩어진 따뜻한 주먹밥을 달게 먹었을까?
목울대가 시큰하다.
묵묵히 입 안에 온기를 넣으며 
나는 내내 고요하고 싶다.

* 조연주!
   박범신의 <은교>가 다 자라면 꼭 그녀 같을 것 같다.
   전혀 다른 두 작가가 만든 두 인물이 묘하게도 하나로 겹쳐진다.
   은교와 연주...
Posted by Book끄-Book끄
읽고 끄적 끄적...2011. 1. 17. 06:00
작가 박범신이 말했다.
...... 작가로 36년을 살았지만, 문학은 내게 여전히 자유의 다른 이름이며 또 방부제이다. 일부 독자들은 아직도 '청년작가'라는 이름으로 나를 부른다. 나의 소망은 청년작가가 아니라 죽을 때까지 강력한 '현역작가'로 살아가고 싶다는 것이다...... 쓰는 행위를 멈추지 못하는 게 최근 나의 딜레마다. 소설의 자궁 속으로 들어가 '순직'하고 싶은 욕망이 내 속에서 날로 커지는 걸 보는 건 황홀하면서, 동시에 두렵다 ......

누구보다 열혈청년처럼 열심히 쓰고 있는 현역작가 박범신!
이야기로 만들어낸 꺼리들이 아직 그에게는 무궁무진한 모양이다.
그저 놀랍다.
어느 때는 너무나 순식간에 그가 책을 내는 것 같아 읽어내는 것 자체에 무섬증이 일기도 한다.
그의 몸이 전부 언어가 되어 책 속에 콕콕 들어 박힐 것 같아서...
작은 계집아이 "은교"를 만난 떨림이 채 가시지도 않았는데
어느 틈에 <비지니스>가 눈 앞에 펼쳐져있다.
끔찍하게 자본주의적이면서
끔찍하게 서글픈 현실을 담고 있는 <비지니스>
간교하고도 잔인한 독재자인 자본의 품 안에서
사람들은 단지 실패한 자와 성공한 자, 두 종류만으로 구별된단다.
그리고 교육도 일종의 '비지니스'의 일종이고...
자식의 과외비를 위해 몸을 파는 유부녀와
부잣집의 숨겨놓은 잉여 재산만을 훔치는 전직 강력계 형사 타잔.
그 둘의 관계는 윤리적으로 공평하다.
소설속 그녀는 말한다.
"내가 원죄를 가졌든 그에게도 감춰온 원죄가 있다는 사실이 오히려 기뻤다..."



이 책을 재미있다고 말해야 하나 섬뜩하다고 말해야 하나.
많이 다르긴 하지만 영화 <황해>를 생각나게 한다.
평범한 사람이 살인자가 되는 과정을 그린 영화.
자본주의가 무서운 게 여기에 있다.
평범한 사람을 살인자로, 범죄자로 만들어 간다는 것에...
그것도 아주 쉽게!
이제 세상의 주인은 자본이고
그래서 삶의 유일한 전략은 비지니스란다.
섬뜩하고 무섭지만 그러나 확실히 진실이다.



평범한 주부가 몸을 파는 창녀가 되는 과정도 섬득하지만
강력계 형사가 도둑이 되는 과정이 씁쓸하다.

... 경찰에 몸담고 있던 그 시절의 그는 타협이라곤 할 줄 모르는 우직하고 정직한 사람이었다. 업소에서 뇌물을 주면 뇌물죄를 추가했고, 업소들과 내통하거나 뇌물을 받는 동료들은 가차 앖이 감찰부서로 넘겼다. 결과적으로 불법 영업을 일삼는 업주들은 물론 동료들에게까지 그라는 존재는 눈엣가시가 되었다. 그를 쫓아내려고, 업주들과 동료 경찰들이 짜고 파놓은 함정은 도처에 있었다. 그는 결국 음모에 말려들었고, 마침내 비리경찰로 몰려 경찰복을 벗지 않을 수 없었다. 터무니없는 모함이었지만 업주들과 동료 경찰들이 짜 맞춘 너무도 교묘한 함정이어서 빠져나올 길이 없었다 ...

몸을 팔아가면서 아들의 과외비를 내는 여자는 
아들이 자면서 이 가는 소리를 들으며 몸을 부르르 떤다.

... 아이가 이를 갈면서 걸어가야 할 벼랑길이 한눈에 바라보이는 기분이었다. 그것은 내가 몸을 팔면서까지 부추기고 내몰아온, 자본주의 무한 경쟁 사이로 난 광포하고 가파른 벼랑길이었다. 패배하면 죽는다, 라고 말해온 것이 나였고, 아비가 갔던 길을 답습하면 안 된다, 라고 채찍질해온 것이 나였다. 나는 그 애가 오로지 전사가 되기를 바랐다 ...

소설은 읽으면 읽을 수록 목줄기를 잡아챈다.
숨을 쉬기가 점점 힘들어진다.
적나라한 현실을 들여다보는 건 참 참혹하다.

... 대도(大盜)로 알려진 '타잔의 정부'가 되는 일과 '자식의 과외비를 위해 몸 파는 어머니'가 되는 일 중에서 어떤 것이 더 비윤리적인 일인지를 알 수 없었다. 다른 게 있다면 '타잔의 정부'는 하나뿐이고 '과외비를 위해 몸 파는 어머니'는 이 도시에 여럿이라는 사실뿐이었다. '여럿'이라는 사실이 죄를 더는 길이 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 도시에서의 윤리성이란 안팎에서 일관되게 지켜지는 가치가 아니라, 지켜지고 있다고 객관적으로 인정되어 얻어내는 가치였다. 쉽게 말해 들키면 반윤리, 안들키면 윤리라 할 수 있었다 ...

더군다가 작가 박범신이 작가의 말에 남긴 글이 더 가슴을 옭죄온다.
그는 지금  자본주의적 폭력성을 좀더 적극적으로 다룬 장편 소설 <나의 손은 말굽으로 변하고>를 쓰고 있단다.
뭘 더 보여주고 싶은걸까?
"좀더 적극적으로"라는 표현이 문득 섬득하다.
Posted by Book끄-Book끄
읽고 끄적 끄적...2010. 8. 17. 06:40
만약 이 책이 뼈가 있고 살이 있는 형이상학적인 존재라면
나는 이 책의 단어 하나 하나까지도 전부 오도독 오도독 탐욕스럽게 씹어 삼켜
그대로 내 몸 안에 고이고이 간직하고 싶다.
탐이 나도록 아름답고
겁이 나도록 관능적인 소설 <은교>
이 이야기를 사랑이 아니라고 누가 말할 수 있을까?
누군가의 심장에 칼을 쑤셔박는 심정으로 쓴 노시인의 긴 고백의 글은
여기 이렇게 한 사람의 심장뿐만 아니라 온 몸에 칼 이상의 것을 쑤셔박았다.
그래, 어쩌면 이 글에는 정말 차가운 폭력성이 담겨 있는지도 모르겠다.
생로병사가 없는, 아니 생로병사를 이기는 관능.
그 관능은 시간을 이키는 칼이며,
그러므로 최종적으로 누군가의 죽음을 부른다.
신생(新生)의 폭설같은....



이 이야기는 <살인 당나귀>라는 제목으로
작가 박범신의 개인 블로그(http://blog.naver.com/wacho)를 통해 연재했던 소설이다.
(당나귀는 소설 속 노시인의 몰고 다니던 오래된 코란도이가도 혹은 시인 자신이기도 하다)
한 달 반이라는 짧은 시간동안 폭풍같이 써내려간 이야기.
그리고 그 이야기가 제목을 바꿔 <은교>로 출판됐다.
<고산자>를 발표한 후 박범신은 말했었다.
"감수성을 충분히 해방시키는 아름답고 슬픈 연애소설을 준비중" 이라고...
그리고 그는 <은교>라는 작품을 책으로 출판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지난 37년 동안의 작가 생활을 주마등처럼 떠올리게 하는 작품이다. 내 안의 다양한 욕망과 감수성을 반영했기에 앞으로도 오랫동안 남는 소설일 것 같다." 라고.
그리고 나 또한 거기에 한 마디를 덧붙인다.
내게도 이 이야기가 그렇다고.....
<촐라체>, <고산자> 그리고 이 책 <은교>까지.
박범신은 3권의 책을 "갈망의 삼부작"이라고 이름 붙였다.
<촐라체>에서는 히말라야를 배경으로 인간 의지의 수직적 한계를,
<고산자>에서는 역사적 시간을 통한 꿈의 수평적인 정한을,
그리고 <은교>에 이르러, 비로소 실존의 현실로 돌아와
존재의 내밀한 욕망과 그 근원을 감히 탐험하고 기록했다고 느끼기 때문이란다.
그리고 독자들에게 한 마디 당부를 한다.
'밤에만' 쓴 소설이니, 독자들도 '밤에만' 읽기를 바란다고...
나 또한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이 책을 손에 잡고 있을 때는 대부분 밤이었다.
책을 읽는 동안 가슴은 뜨거웠고
생각은 차가웠다.



69살 노시인 이적요가 17살 계집아이 한은교에게 느끼는 감정을 읽으면서 누구도 감히 비난하진 말자.
부도덕하다고, 혹은 추잡하다고 손가락질하지도 말자.
그걸 "사랑" 아니라면 도대체 뭐라고 이름 붙일 수 있을까?
시인의 노트와 그의 제자가 남긴 노트, 그리고 시인의 변호사 Q.
이 책은 세 사람의 목소리가 번갈아 가며 등장한다.
이야기의 중심은 모두 "은교" 였던가?
혹은 노시인 "이적요" 였던가? 아니면 그의 제자 "서지우" 였던가?
모든 예술과 문학의 시작이 질투라면,
그래, 이 세 사람의 관계는 그대로 예술이고 문학이다.
시인의 노트에 남겨진 글들은
그리고 어떤 시들보다도 아름답고 황홀하다.
단어 하나 하나가 전부 살아서 나를 수시로 꿀꺽 꿀꺽 삼켜버려 읽는 동안
많.이.두.려.웠.다.



자신이 사망한지 1주기가 되는 날 발표하라는 시인의 노트.
그 속엔 두 가지 비밀이 쓰여있다.
자신이 은교를 사랑했다는 것과, 그리고 자신의 제자 서지우를 죽였다는 것.
그럼으로 해서 자신이 판 암굴 속으로 스스로 걸어들어가 죽음을 선택한 노시인.
그의 머리맡엔 은교가 선물한 작은 토끼 인형이 놓여 있었다.
총.총.총. 뛰던 은교의 발소리를 떠올리게 하는 토끼...
평생 시(詩)만을 써온 시인 이적요가
서지우라는 제자의 이름을 통해 발표한 포르노그래피 소설.

...... 어쨌든 나는 사람들이 '천박한 것'이라고 비난하도록 획책해 쓴 그것이, 시인 이적요의 작품이라고 까발겨질 날이 언젠가 올 거라고 예감했고, 그 작품이 마침내 책이 되어 나왔을 때, 본능에 따른 나의 또다른 충동, 예컨대 나와 나의 시세계가 얼마나 하찮은가 하는 것을 세상에 극적으로 까발리는 과정 안에, 돌입했다고 느꼈다.... 결국은, 시인으로 성역화해온 나의 '빛나는 성취'를 스스로 시궁창에 버리고 싶은 자학의 한 수단으로, 서지우를 대리인 삼아 내가 '당신들 문법'에 맞춰 포르노그래피 소설을 썼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

문학은 어떤 이에겐 질병이라고 했던가?
그래서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그런 사람도 있다고...
노시인은 자신의 제자를 두고 이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결국 자신 또한 고백한다.

...... 내가 세상이라고, 시대라고, 역사라고 불렸던 것들이 사실은 직관의 감옥에 불과했다는 것을, 시의 감옥이엇다는 것을 알았다. 나의 시들은 대부분 가짜였다 ......

그리고 이 말은 은교라는 한 아이를 사랑함으로써 시작된 고해성사로 끝을 맺는다.

...... 너를 만나고 비로소 나의 진짜 얼굴을 스스로 보게 된 셈이다. 세상 사람들은 그러므로 나의 '진짜' 얼굴을 보아야 한다. 시인 이적요는 '전략'에 따라 자신의 '우상화'를 염두에 두고 시를 써온 '가짜 시인'이었고, 불과 열입곱 살 된 소녀를 통절하게 간음하고 싶었으며, 질투심에 눈이 멀어 끝내 제자를 죽인 사람이다. 어떻게 그 사실을 다 묻어두고 무덤 속에서나마 그 모든, 시끄러운 우상화를 받아들일 것인가. 인생의 마지막에 너를 통해 만나 경험한 본능의 해방이야말로, 나의 유일한 인생, 나의 싱싱한 행복이었다. 그게 바로 나 이적요다. 이적요는 본능을 가진 인간이었을 뿐 신성을 본 적도 만난 적도 없다. 그러하니, 아무도 더이상 내게 속지 말라...... 그리고 내 무덤에 짐승이라고 침을 뱉고 살인자라고 돌을 던지라. 그것이 나의 마지막 소망이다 ......



책은 지독히도 탐욕적이고 관능적이며
동시에 문학적 은유들로 넘실댄다.
누군들 맘 속에 자신만의 처녀이자 자신만의 등롱인 "은교"가 없을까?
맘 속에 간직한 신성(神性)에 가까운 영원한 신부 "은교"
그렇다면 그 "은교"에게로 향하는 길이
멸망으로 이르는 좁고 어두운 길이라 한들 누군들 간절히 가고 싶지 않을까!

...... 은교를 만나면서 나는 보다 젊어지고 싶었다. 그게 죄인가. 그 애를 통해 아직도 생피처럼 더운 나의 욕망을 확인했을 뿐, 나는 아무런 범죄도 저지르지 않았다. 나의 은닉된 욕망에게 형벌을 선고할 수 있는 자는 그러므로 나뿐이다 ...... 아니, 청춘이 될 수 없을지라도 청춘인 듯이, 나는 젊은 저들과 오지게 맞장을 뜨고 싶었다 ......
 
숨통을 조여오면서도 숨통을 트이게 하는 문장이다.
이 아름답고 지독한 연애 이야기를 나는 또 어떻게 감당할까?
사랑, 질투 그리고 음모라는 통속적인 단어로 이 소설을 말하고 싶진 않다.
이 소설은...
그대로 한 편이 시이고
그대로 한 점 풍경화다.
그러므로 이 책을 읽게 되는 이여!
반드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으니, 그것은 
눈빛이다.
그들의 눈빛!
그리고 당신의 눈빛!

은교는 나에게 슬픔과 함께, 생애에 경험해보지 못한, 청춘의 광채와 위로를 주었다.
사.실.이.다.
나는 어느새 이적요가 되어 늙은 관 속에 내 몸을 누인다.
누윈 몸은 고요했으며 더불어 편안했다.
Posted by Book끄-Book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