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끄적 끄적...2011. 10. 28. 07:52

<레드>

기간: 2011년 10월 14일~11월 6일
장소: 동국대학교 이해랑예술극장
출연: 강신일, 강필석.
연출: 오경택
극본: 존 로건

이 작품에 대해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감히...
앉은 자리에서 쉬지 않고 100번을 보라고 해도 능히 그렇게 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니 또 다시 보고 싶다며 시위하듯 계속 앉아있을 것 같다.
나를 무기력한 좀비로 만들어버린 작품 <레드>
이 날이 고작 세 번째 공연되는 날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랜 기간 공연된 것처럼 두 배우의 호흡이 완벽하게 일치되고 완숙미까지 느껴진다.
심지어 나는 두 배우의 모습에서 질투에 가까운 지독한 관능미까지 느꼈다.

오경택 연출은 처음부터 로스코 역에는 깅신일 밖에 없다고 생각했단다.
작품을 보고 나면 연출가의 무한한 신뢰가 결코 빈말이 아님을 절감하게 된다.
내가 본 건 배우 강신일이 아니라
미술사에서 인상파를 끝장낸 실제의 마크 로스코(Mark Rothko,1903~1970)), 그가 분명하다.
오경택 연출의 선택과 믿음이 그저 고맙고 감사하게 느껴질 뿐이다.
연극 <레드>는 고작 3년 밖에 안 된 작품이다.
극본을 쓴 "존 로건"은 미국 최고의 극작가라는 평을 받고 잇는 사람이다.
<글래디에이터>, <스타트랙>, <스위니토드> 같은 굵직한 작품들이 만든 사람이 바로 존 로건이다.
<레드>는 2009년 12월 런던 돈마 웨어하우스 극장에서 초연됐다.
2010년에 브로드웨이 골든 씨어터에서 공연되면서 그해 토니어워즈 연극부분 6개 부분을 석권하는 파란을 일으켰다.
최우수 작품상, 감독상, 조명상, 음향상, 무대디자인상, 남우조연상.
실제로 작품은 정말 어느 한부분 소홀한 곳이 없다.
섬세하고 아름답다못해 극단적으로 탐미적이다.
배우의 연기와 줄거리뿐만 아니라 작품을 구성하는 모든 부분들이 송두리째.
그곳도 피도 눈물도 없이 완벽하게...



할 수만 있다면 작품의 대사 하나하나를
오도독오도독 씹어 삼켜 내 몸 속에 채워두고 싶다.
두 배우는 어떻게 이 대사들을 자기 자신에게 완벽하게 체화(體化)시킬 수 있었을까?
강신일, 강필석 두 배우의 모습을 바라보는 건 
미안할만큼 황홀한 충격이었다.
특히나 두 사람이 커다란 캔버스에 붉은 물감으로 밑칠을 하는 장면에선
점점 가빠지는 숨소리를 들으면서 지독한 관능미에 빠져버렸다.
문득 이런 생각도 했다.
매번 이 역을 어떻게 감당할까?
너무나 완벽하게 연기하는 두 사람의 모습에 덜컥 겁이 났던거다.
이 작품이 끝나면 두 사람...
어떻게 될까???



<레드>는 화가와 조수의 이야기이라지만
구세대와 새로운 세대의 충돌과 대립, 완강함과 유함이기도 하다.
"자식은 아버지를 몰아내야 돼, 존경하지만 살해해야 돼"
극중에서 로스코는 조수 캔에게 말한다.
그러나 자신이 인상파를 몰아냈듯이 누군가 자신을 몰아내고 있을때는 절대적 진실에 도전을 받는양 
거침없이 야만에 가깝게 분노한다.
이기적이지만 예술에 대한 자신만만한 당당함.
그래, 그건 꼭 레드가 갖는 속성과 똑같다.
강렬하고 고집스럽고 고통스럽고 비밀스러운...
레드의 어쩔수 없이 그 안에 끈적거리는 피의 농도가 숨어있다.
그래서 레드는 위험하고 거침없고 그리고 파괴적이다.
"삶에서 내가 딱 두려운 게 하나 있거든. 그건 언젠가 블랙이 레드를 삼켜버릴 거라는 거야"
레드의 종말은 모든 것의 종말이다.
비.극.적.으.로.



모든 장면이 다 기억에 남아있지만
특히 마지막 장면은 압권이다.
캔을 떠나보낸 로스코가 자신의 그림을 대면하고 있는 그 모습.
캔버스의 붉은 빛은 조명이 어두워지면서 점점 블랙으로 변한다.
로스코는 그 블랙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다.
이제 더이상 블랙이 두렵지 않은 건까?

그림에서 제일 중요한 건 사유(思有)라고 로스코가 말했다.

장소를 만들어내는 그림. 교감의 장소가 되는 그림.
그는 보는 사람의
 심장을 멈추게 하기 위해 그림을 그린다고.
사람들이 그림을 보고 생각을 하게 만들기 위해서 그린다고.
연극을 보고 집요한 담론과 논쟁이 계속해서 나늘 따라다닌다.
로스코는 블랙이 레드를 삼켜버릴까봐 두려웠다지만
나는 레드가 나를 삼켜버릴까봐 두렵다.
"널 저울에 달아봤더니 부족하더리."

실제로 로스코는 1970년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그러나 그의 색 레드는 아직 살아있다.
따라서 로스코는 영원히 불멸(不滅)의 존재가 됐다.

 

Posted by Book끄-Book끄
보고 끄적 끄적...2011. 3. 11. 06:02


<거미여인의 키스>

일시 : 2011.02.11. ~ 2011.04.24.
장소 : 대학로 아트원 씨어터 1관
출연 : 정성화, 박은태 (몰리나) 
         최재웅, 김승대 (발렌틴)
연출 : 이지나
원작 : 마누엘 푸익


"무대가 좋다" 시리즈 일곱 번째 작품 <거미여인의 키스>가 드디어 무대위에 올랐다.
지난해 각종 뮤지컬 시상식에서 <영웅>으로 남우주연상을 거머쥔 정성화의 연극 데뷔작이기도 하다.
정성화가 게이 역을?
미안하지만 솔직히 비쥬얼상으로는 좀 많이 부담스러운 게 사실이다.
반면 몰리나 역에 더블 캐스팅된 박은태 역시도 연극 데뷔작이긴한데 그의 게이 역은 괜찮아 보인다.
가녀리고 야리야리한 이미지가 강한 편이라서...

정성화의 몰리나?
다른 역할도 아니고 민족의 영웅 "안중근"이었던 사람이 아닌가?
물론 드라마 "개인의 취향"을 언급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그런척을 하는거고 이 작품에서 몰리나는 스스로를 완전히 여자라고 생각하는 캐릭터다.
어쩌면 정성화를 캐스팅하면서 이런 반전효과를 일부러 노렸던 건 아닐까?,
거기다기 <헤드윅>과 <쓰릴미>로 동성애 연기 전문배우(?)라고 할 수 있는 최재웅과 페어를 이룬다?
일단 관객을 흡입할 수 있는 필요충분조건은 충분히 갖췄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실제로 그들의 조합은 성공적인 티켓 파워를 보여주고 있다.
아마도 "무대가 좋다" 최고의 흥행작이자 최대의 수입작이 되지 않을까?
다른 시리즈에 비하면 공연기간도 짧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정성화 몰리나와 최재웅 발렌틴.
개인적으로 최재웅의 발렌틴에 기대가 많이 됐다.
그의 대사톤과 표정을 나는 심하게 좋아하기에...
특히 작품 속에서 그가 "아니!"라는 대사를 하게되면 그 느낌이 참 묘하다.
단순한 이 단어가 이상하게도 그대로 가슴에 꽃힌다.
<거미여인의 키스>에서 반정부혁명가 발렌틴의 대사에도 "아니!" 라는 단어가 적쟎게 등장한다.
솔직히 그걸 누가 알아채기나 하겠는가 말이다만,
아무튼 나는 그가 "아니!" 라는 대사를 할 때가 참 좋다.
(사람들이 그러겠다. 참 이상한 사람이야.... )



공연을 보기 전에 일부러 마누엘 푸익의 <거미여인의 키스> 원작을 읽었다.
뒷부분의 보고서 부분 약간을 제외하고는 100% 대사로 구성된 작품이다.
원작은...
아주 매력적이었다.
솔직히 이 연극이 원작을 따라오기에는 확실히 부족하다.
연극은 "사랑"에 촛점이 맞춰진 것 같은데
원작은 "이해"의 부분에 더 촛점이 맞춰져 있는 것 같다.
어디까지나 지극히 개인적인 견해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빌라 데보토 감옥 D동 7호실.
동일한 두 곳을 나는 지금 약간은 다른 두 곳으로 이해하는 중이다.
원작을 읽으면서 나 역시도 묘하게 위험에서 벗어났다는 느낌을 공유했다.
따지고보면 그들은 언제나 위험한 상황에 소위 던져진 사람들인데...
"결코라는 말이 얼마나 무서운 말인지 이제야 알겠어"
연그에서는 없었지만 원작에서 내 눈을 사로잡았던 대사다.
두 주인공의 모든 것을 말해주는 대사라고 생각했었는데...
(연극 대사에 있었는데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건가???)




몰리나가 끝없이 이야기하는 영화들!
원작에서는 4편의 영화가 등장하고 연극에서는 "표범여인" 영화만 나온다.
이 많은 영화를 어떻게 다 말할까 걱정했는데 역시나 기우였다.
만약에 원작대로 했다면 아마도 산만하지 않았을까 싶다.
최재웅의 연기는...
엔딩부분이 너무 감상적이었던 걸 제외하면 역시나 괜찮았다.
개인적으로 엔딩부분은 참 맘에 안 든다.
뭐랄까. 좀 천박하다는 느낌이랄까?
그림자로 보여지는 두 사람의 성행위를 말하는 게 아니라
발렌틴에 의해 너무 자세하게 설명되는 몰리나의 최후가...
원작에서는 발렌틴이 몰리나의 죽음을 알았을까?
나는 아니었을거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언제까지나 발렌틴에겐 몰리나가 살아있는 거미여인으로 남겨지지 않았을까?
그게 몰리나의 소원이기도 했으니까...
"난 너와 함께 남아 있고 싶어. 지금 내 단 한 가지 소원은 너와 함께 있는 거야"



정성화의 몰리나는 너무 과하게 코믹했던 것 같다.
그가 머리에 두건을 쓰고 나와 털퍼덕 바닥에 주저앉으면
찜질방에 퍼져있는 아줌마 같은 느낌이 들어 자꾸 웃음이 났다.
나름대로 역할에 몰입하고 있고 감정표현도 좋은데 어쩐지 뭔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그래서 박은태의 몰리나가 지금 상당히 궁금해졌다.
(4월 3일에 박은태, 김승태 페어를 예매했다.)
개인적으로 박은태, 최재웅이 만나면 괜찮은 작품이 나올 것 같다.
(이 둘의 조합이 있긴 한데 보게 될지는 아직 모르겠다...)
자신을 완벽하게 여자라고 생각하는 몰리나를
볼록하고 후덕한 정성화의 모습으로 보는 건 일종의 비극이었다.
외형적인 걸 말하는 게 맞긴 한데 좀 다른 의미로...
아름답고 매력적은 여성의 모습이 아닌 소위 아줌마 몸매의 몰리나.
그래서 정성화 몰리나의 코믹한 모습이 더 비극적으로 보여졌는지도 모르겠다.

솔직히 말하면,
이 작품에 대해서 아직 생각이 다 정리된 건 아니라서
참 두서없는 글이 되고 말았다. (*^^*)

 

참!
무대의 느낌은 참 좋더라.
전형적인 감옥의 모습을 생각했는데 의외였다.
사실 상당히 괜찮더라.

Posted by Book끄-Book끄
달동네 책거리2010. 8. 31. 05:55

<The Road> - 코맥 매카시

로드(THE ROAD)

“미국 현지에서 감히 <성서>에 비견되었던 소설”
이런 광고와 함께 2008년 6월 우리나라를 그야말로 강타했던 소설입니다.
<The Road>
책의 첫 페이지부터 마지막 페이지까지 일관성(?)있게 계속 길 위를 떠도는 (도저히 목적지가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이유는...) 내용입니다.
어쩌면 우리나라 정서와는 어울리지 않는 내용이기에 이해가 어려운 부분도 있고 심지어는 거부감마저도 느껴질 수 있는 그런 소설입니다.
글쎄요... 개인적으로는 왜 이 소설이 성서에 비교되고 있는 건지 납득은 잘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사실은 독특한 메시지를 준고 있다는 사실이죠.
“인류 대제앙에서 살아남은 사람들... 그 묵시론적 이야기”... 이 책에 대한 평들의 대부분을 장식하는 해드라인 문구입니다.
하지만 그것도 제에게 설득력이 좀 없어 보입니다.(또 저의 찌질한 이해력 부족이 그 밑바닥에 깔려있긴 하겠지만요)
그들이 살아남은 유일한 사람도 아니고, 그리고 이 책엔 어떤 묵시론적인 암시나 계시 혹은 계명 같은 것들은 등장하지도 않습니다.
폐허와 추위의 땅 위에서 살아남는 10가지 방법쯤을 알려주는 길 위의 삶을 다룬 실용서는 더더욱 아닙니다.
주인공인 남자와 소년은 "불을 운반하는 사람"이라는 상징적인 의미의 존재입니다.
불이라… 인류의 문명이 시작이 불에서 비롯됐던가요?
그렇다면 그들을 계속 걷게 만들었던 건 다시 꽃피워야 할 새로운 문명에 대한 책임감이었을까요? 아니면 모든 회복의 근본이어야 할 선한 인간성 회복이었을까요? 그것도 아니면 항상 무엇인가의 완벽한 해답인 사랑? 아니면 판도라의 상자에 마지막으로 남았던 절망을 이겨낼 희망?
어쩌면 그 모든 것 다 일 수도 있고, 전혀 다른 어떤 것일 수도 있습니다.
(당신이 느끼는 바로 그것일 수도 물론 있죠)

일단 이 책에 나오는 사람들의 특징은 익명성에 있다 하겠습니다.
남자, 소년, 사내, 노인, 여자….
그 누구도 구체적인 이름이나 심지어는 형체조차도 소유하지 않기도 하죠.
마치 현대인처럼요…(혹시 난 이름이 있는데…. 라고 말하고 싶으신가요????)
어쩌면 불탄 거리에 꽂혀 있는 반쯤 타버린 인간 미라들과 주인공들이 서로 다르지 않음을 말하고 싶었던 건 아니었을까요?
살아남음의 이유가 어떤 목적과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우연 내지는 일종의 눈속임 같은 건 혹 아닐지…
실제로 이들이 살아 있는 사람들이라고 누가 감히 이야기 할 수 있을까요? 
이 책의 주인공들.
그들이 실제 "부자지간"인지도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마치 어린 신을 모시고 길에 떠나는 제자의 느낌이라고 할까요? 물론 그 신의 어깨 위엔 반드시 인류 구원이라는 대전제가 걸려 있어야 하겠죠!!
그런 점에선 확실히 성경의 모티브가 느껴지긴 합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모르지만 주인공들이 있는 지금 이 세계는 불의 재앙으로 거의 모든 인류와 세상이 멸종 상태에 있습니다.
아직 뜨거운 재앙이 열기가 채 식지 않은 이곳에서 그들은 필사적으로 음식을 구하며 방수포에 의지하여 추위를 견디며 남쪽으로 남쪽으로 낡은 쇼핑 카트를 끌고 이동하고 있습니다.
이 모습만 떠올린다면 참 코믹하고 우수운 비주얼이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두 주인공의 선문답에 가까운 단답형의 대화.
그들의 대화는 지금 그들이 처한 환경만큼이나 미약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렬한 생명의 숨결이 느껴져 차라리 비장하기까지 합니다.
잠시 찾았던 완벽한 환경의 은신처마저도 그들은 버려야 했고 또 다시 굶주림과 추위의 땅으로 마른 몸과 낡은 카트를 끌고 들어섭니다. 늘 그랬듯이…
이젠 슬슬 제 몸도 피곤해지기 시작합니다.
때론 이런 환경에 영 어울리지 않는 아이의 동정심에 제가 다 화를 내면서 몇 개 남지 않은 깡통이 마치 내 것인냥 움켜쥐며 눈에 핏발을 세우고 있는 제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책의 표현처럼 순간 제가 "좀비"가 된 듯한 느낌이죠.
이제 어떻게 살아남아야 하는 걸까요?
"인간이 살 수 없는 곳에서는 신도 살 수도 없다"고 말하는 그곳, 아니 이곳에서요.
지금 내 세상에서 "재앙"이란 어떤 형태일까요?
그 "재앙"을 뚫고 우리는 꼭 뭔가를 남겨야만 하는 걸까요?
소년은 어느 순간 묻습니다.
"아빠! 우리는 지금도 좋은 사람들인가요?"

남자는 소년을 남기고 이제 눈을 감으려 합니다.
그는 소년에게 남쪽으로 계속 가라고 말합니다.
소년은 잠시 길 위에서 마주쳤던 작은 아이를 떠올리며 묻습니다.
"하지만 길을 잃으면 누가 찾아주죠? 누가 그 아이를 찾아요?"
남자가 마지막 말을 합니다.
"선(善)이 꼬마를 찾을 거야. 언제나 그랬어. 앞으로도 그럴 거고…."
아빠라는 남자를 잃은 소년은 또 다른 남자를 만납니다.
함께 가자고 말하는 남자에게 소년은 말합니다.
"아저씨가 좋은 사람이란 걸 어떻게 알 수 있죠?"
남자는 말합니다.
"알 수 없지. 그냥 운에 맡겨야지, 뭐"
길을 잃은 소년의 앞에 나타난 남자는 꼬마를 찾아온 선(善)이었을까요?
만약 그 질문이 당신에게 주어진다면 뭐라고 말하고 싶으세요?

* 이상하게도 불편한 책들을 많이 읽고 좋아하게 됩니다.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일게 되는 건 그 불편함이 주는 즐거움과 의미 때문일겁니다.
   이 책을 읽다 보면 자꾸 또 다른 불편한 작가 주제 사라마구의 <눈 먼 자들의 도시>를 어쩔 수 없이 떠올리게 
   됩니다.
   책 표지를 다시 살펴봤죠.
   역시나 주제 사라마구의 책을 번역했던 정영목의 번역작이네요.
   이 책의 마지막 4페이지는 옮긴이의 말이 실려 있습니다.
   이 부분도 꼭 읽어보라고 권해드리고 싶네요.
   번역가의 작가에 대한 애정과 작품에 대한 믿음을 느낄 수 있는 부분입니다.
   "코맥 매카시"에 대해 어쩌면 더 잘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

Posted by Book끄-Book끄
읽고 끄적 끄적...2010. 3. 20. 06:09
일본 소설 두 권을 읽다.
한 권은 성장소설, 그리고 한 권은 추리소설.
요시다 슈이치의 <요노스케 이야기>
18살 요노스케가 대학생활을 하기 위해 도쿄에 홀로 올라온다.
이야기는 엽기적이지도 않고 그저 평범한 한 청년의 이야기다.
뜻하지 않게 삼바 동아리를 가입하고
뜻하지 않게 부자집 여자친구를 사귀게 되고
뜻하지 않게 무언가에 휘말리게 되는 우리의 일상과 비슷하다.
요시다 슈이치의 <페러이드>를 아주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에 손에 잡았다.
일본의 성장소설은 성적이고 가벼울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의외로 잔잔하고 평범하다.
세상 누군가의 이야기가 될 수도 있는 그런 평범함.
그러나 그 안에도 특별함은 있다.



예전에 이 책이 처음 출판됐을 때
마치 이수현을 주인공으로 쓴 것 같은 뉘앙스를 풍겼었는데
실제로 읽어보니 이수현 사건은 하나의 포인트다.
이수현과 요노스케가 지하철 선로에 떨어진 사람을 구하고 사망하게 되는 사건.
(책의 의도는 정상적이었는데, 우리나라 출판사의 홍보는 다분히 비정상적인 형태였던 것 같다.
 일종의 노이즈 마케팅이었노라 말하고 싶다.)
이 책의 의도는 그러니까
누군가의 삶이 또 다른 누군가의 삶을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바꿔놓는다는 사실이다.
보트 피블을 직접 목격하고 난민캠프의 일을 하게 되는 사람.
예기치 않은 임신으로 다니던 학교를 그만두고 생활인으로 뛰어든 젊은 부부,
고급 파티걸이엇다가 다른 삶을 살게 되는 사람,
그리고 요노스케 본인까지도...
살아간다는 건, 성장한다는 건 늘 그랬던 것 같다.
평범하지만 그래도 작은 진실을 품고 있는 책이다.



야마구치 마사야가 1989년에 쓴 추리소설 <살아있는 시체의 죽음>
(며칠 전에 블로그에 올렸었는데 그만 실수로 삭제해버렸다.
 꽤나 인상깊게 읽은 책이라 나름 수다를 좀 떨었었는데... 무지 아깝다.
 다시 쓰려니 어쩐지 김빠진 맥주를 들여다 보듯 난감하다)
20년도 더 된 소설인데 그 참신함과 기발한 상상력이 그저 감탄스러울 뿐이다.
책의 제목은 은유적인 의미로 쓰인 게 아니다.
실제로 이 책의 주인공들은 다들 버젓히 죽었던 시체들이다.
거기다가 방부처리까지 한 순도 100% 시체들이다.
쉽게 "좀비"를 떠올리면 된다.
(시신의 방부처리 작업를  "앰바밍"라 하고, 그걸 하는 사람을 "앰바머"라 부른다는 걸 이 책을 통해 알게 되다)
황당한 소설이라고 생각되는가?
그러나 읽고 있으면 더이상 황당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작가 아바구치 마사야는
일본 본격 추리소설 역사상 가장 참신한 작가로 인정받고 있다는데
나는 이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단지 이 한 권만으로도 충분히...  )



Memento Mori!
"영원"을 꿈꾸는 인간에게 주는 경고의 말,
"Remember, You must die!"
소설 속에서 허스 박사라는 인물의 입을 통해 읽는 이에게 경고장을 전달한다.
" ...... 삶과 죽음은 표리일체(表裏一體), 삶을 생각하는 일은 죽음을 생각하는 일, 죽음을 생각하는 일은 삶을 생각하는 일, 우리도 다들 살아 있는 시체라네. 되살아난 신체들은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는 게댜. 삶과 현세에 아무리 집착한들 언젠가는 이렇게 티끌이 디고 만다고 말일세. 이게 바로 20세기의 '메멘토 모리' 아니겠나. 우리 모두 집행유예 중인 시체에 지나지 않는다네......"
그리고 시체는 말한다.
"그저 '죽음'을 알기 위해 다시 살아온 듯한 기묘하고도 짧은 생애였구나!"라고...



인간은 불사의 영원한 생명을 잃은 대신 각각의 개별성을 손에 넣었다.
그리고 그 개별성은 성(性)을 통해 그 생명을 분열, 증식한다.
그러니까 성(性)의 대가가 바로 죽음이라는 뜻이다.
"에로스와 데스는 형제"
죽은 시체와 살아있는 여자가 끌고 다니던  분홍색 영구차에 적혀있던 이 문구는
그러니까 참 정당하고 의미심장한 조합인 셈이다.
추리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장례의식에 대한 역사와 차이,
최후의 심판날에 죽은 자도 다시 살아 하늘로 들림을 받으리라는 기독교적 맹신.
죽어서도 재화에 집착하는 시체의 모습들까지
하나하나 전부 인간의 이면에 대한 보고서같다.
책을 읽는 동안 시체들이 너무나 인간적이라 심난했다.
좀비 세계에서의 고민도 행위들도
참 인간들만큼이나 이기적이고 치열하다.
괸해 내 옆의 사람을 한 번 쳐다보게 된다.
저 사람이 인간일까? 시체일까? (^^)

* 악마가 죽어가는 사람에게 거는 다섯 가지 유혹의 덫 (책에 나오는 내용)
 ① 신앙에 대한 의심
 ② 자신의 조에 대한 절망
 ③ 이승의 재화에 대한 집착
 ④ 영혼의 구원에 대한 회의
 ⑤ 스스로를 위대하다고 보는 교만
Posted by Book끄-Book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