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끄적 끄적...2012. 3. 23. 06:05
다행이다.
나는 아직 위로와 휴식을 맏을 곳이 있다.
가끔 이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게 뭘까를 생각한다.
그건 단 하나!
실.명. (失明)
볼 수 없다는 건, 아니 더 정확히 말해 읽을 수 없다는 건
내겐 생명의 끝장(失命)을 뜻하기도 한다.
볼 수 있다면, 읽을 수 있다면,
나는 아직 위로받고 있는 거고, 아직 쉴 만한 곳이 있다는 의미다.
사람마다 각자의 절실함이 있다면 나는 이걸 내 절실함이라 내세우며 다독이리라.
그래, 내게 이게 유일이고 최강이다.



두 권의 책을 읽다.
트위터에 이미 유명 인사인 혜민 스님의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과
서른 세 살 인생의 절정에서 시한부 선고를 받은 중국의 젊은 여교수 위지안의  <오늘 내가 살아갈 이유>
혜민 스님은 하버드에서 비교종교학 석사과정 중에 출가를 결심해서
2000년 봄에 해인사에서 사미계를 받고 조계종 승려가 됐다.
승려이자 교수인 혜민 스님의 트위터 글들에 살을 붙여 책을 출판했다.
위지안은 자신의 삶이 얼마 남지 않음을 알고 블로그에 자신의 이야기를 연재했단다.
그 글들이 그녀 사후에 책으로 출판됐다.
두 권의 책 모두 소소하고 단백하고 소담하다.
읽으면서 나는 몇몇의 문장에 위로받고 그리고 몇몇의 에피소드에 짠했다.

사람과의 인연은, 본인이 좋아서 노력하는데도
자꾸 힘들다고 느껴지면 인연이 아닌 경우일 수 있습니다.
될 인연은 그렇게 힘들게 몸부림치지 않아도 이루어져요.
자신을 너무나 힘들게 하는 인연이라면 그냥 놓아주세요

인연이라고 믿었던 사람때문에 지금 힘든 사람에게 이 문장은 뭔가 편안함과 결단을 주기에 충분하다.
자신을 너무나 힘들게 하는 인연이라면 그냥 놓아주라는 혜민 스님의 말...
옳다! 옳다! 다 옳다!
혜민 스님의 책에서 단지 이 부분만을 얻었을 뿐인데도
나는 그걸로 충분했다.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런 아픔 속에 살면서
위지안은 말했다.
그 어떤 고통도 다 지나간다
이별? 지나간다. 마음의 상처? 지나간다. 실패? 다 지나간다.
설령 불치병이라도 모두 다 흘러가는 구름이다.
그녀의 담대함에 나는 울컥했다.
문득문득 떠오르는 과거 때문에 섬득했는데 그녀의 말은 내게 위로와 다독임이 됐다.
물론 모든 과거가 추억일 순 없지만
모든 추억은 과거다.
추억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면 후회하게 된다.
인생의 어느 순간, 당신은
그때까지 쌓아둔 추억 더미 속에서
삶의 의자와 희망을 찾아내기 위해 필사적으로 허우적거릴 수도 있다.
그 즈음에는, 알게 될 것이다.
당신의 추억이 우주에서 하나밖에 없는 값진 재산이라는 것을...
하루를 추억 속에서 보낸 날은 참 오래 산 기분이 든다고 그녀가 말했다.
가만 생각해보니 그녀의 말이 옳다.
나는 참 많은 걸 잃고 살았구나...
그녀의 할머니가 돌아가시며 남긴 "지안이 과자값"에 질투하고
항암치료로 대머리가 된 그녀를 따라 세 가족이 머리를 밀고 함께 사진관에서 가족 사진을 찍는 모습에 질투했다.
절망은 원래 구경하는 사람에게만 크게 보인다고 했던가!
그러나,
불같은 질투를 품은 절망은 사위어가는 불처럼 무력하다.
내 시간은 시한부 인생보다 더 시한부스러웠던 거다.
너무나 강렬하게 그녀가 부러웠다.
죽은 자를 부러워하는 산 자라니...
어쩔 수 없이 또 다시 처연해진다.

Posted by Book끄-Book끄
보고 끄적 끄적...2012. 2. 29. 06:05

초연때부터 너무나 좋아했던 뮤지컬 <Story of My Life>
재공연 후 두번째 관람이다.
첫번째 관람은 고영빈 토마스에 이창용 엘빈.
초연때보다 노래를 많이 낮춰 불러서 솔직히 놀랐다.
아무래도 류정한 말고 다른 배우들에겐 버거웠던 음역대었던 모양이다.
좀 낯설긴 했지만 여전히 이 작품은 아름답다.
재공연 관람 첫번째 고려 대상은 이창용 앨빈이었다.
그 다음 카이 토마스가 궁금하긴 했는데 여의치가 않아 고영빈 토마스로 봤다.
(나중에 카이 토마스를 보려고 했는데 어느 틈에 출연진에서 빠져있더라)

두 번째 관람은 완전히 새로운 페어!
조강현 토마스와 정동화 앨빈.
미안한 말이지만 정동화는 관람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뮤지컬 <셜록홈즈>에서 조강현의 목소리와 연기에 놀라서 뒤늦게 이 작품에 합류한 그의 토마스가 정말 너무 많이 궁금했다.
28살이면 아직 시작 아닌가?
연습이든, 재능이든 분명히 뭔가가 있는 배우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외모에서도 그렇고 언듯언듯 류정한 토마스를 떠올리게 만들지만 확실히 표현은 서로 다르다.
류정한 토마스가 잰틀하고 때때로 귀여운 작가였다면
조강현은 토마스는 약간은 성마르고 예민한 그래서 안스러운 작가의 모습이었다.
이렇게 다를 수 있구나.
같은 배역을 배우마다 해석하는 방법이...
류정한, 조강현 두 배우가 해석하고 표현한 토마스 모두 나는 좋았다.
세련되게 노련한 류정한의 토마스와 
조심스럽지만 강단진 조강현의 토마스 모두.




나만 그렇게 느꼈는지 모르겠지만
조강현의 토마스에서는 외모부터 언듯언듯 류정한의 모습이 스친다.
미니미 혹은 아바타의 개념이 아니라 선배의 장점을 받아서 재창조한 느낌이랄까?
노래 부를 때 생소리를 내는 걸 다듬는다면 앞으로가 무척 기대되는 배우다.
감정과 표정도 참 좋았다.
하지만 이날 가장 의외의 인물은 정동화 앨빈이다.
지금껏 나는 이창용이 앨빈의 정석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런 내 생각을 정동화가 바꿔놨다.
전작 <스프링 어웨이크닝>를 보면서도 그의 연기에 별로 감흥이 없었는데
SOML에서 정동화가 표현한 앨빈은 감동적이었고 따뜻했다.
자칫 잘못하면 이석준 앨빈처럼 과장이 심한 찌질한 어른아이가 될수도 있는데
(이창용은 바르고 성실한 순수청년 이미지에 가깝다)
정동화 앨빈은 과장스럽지도 그렇다고 철없지도 않았다.
그래, 딱 유령같았다고 해두자.
공포감을 뺀 유령, 일종의 수호천사 같았다.
(정말 천사 클라렌스였을까?)
표정과 행동, 그리고 어투까지 감동적이었다.
진심으로 정동화 앨빈때문에 몇 번 울컥했다.
이번 시즌이 끝나기 전에 꼭 다시 보고 싶다.
이 두 사람의 페어를!



<Story of My Life>
개인적으로 너무나 좋아하고 격하게 아끼는 작품이다.
이 작품을 계속 공연하는 전용극장이 하나 생기면 좋겠다고 생각할만큼 나는 <SOML>이 너무나 좋다.
이번에 관람하면서도 내용을 뻔히 다 알고 있는데 설마 울게 될까? 싶었는데
여지없이 또 눈물이 나더라.
어쩌면 그 눈물은 불같은 질투의 다른 표현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토마스와 앨빈의 우정이 너무나 탐나서 할 수만 있다면 훔치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토마스가 될 수 없다.
그리고 앨빈 또한 될 수 없다.
그러니 이 작품을 보면서 불같은 질투에 휩싸일 수밖에...

토마스와 앨빈처럼
내 머릿속에서 누군가 나타나 챕터 하나하나씩을 뽑아 들면서
내 이야기를, 우리의 이야기를 하나하나 들려주면 좋겠다.

이야기에 이야기에 이야기를...

Posted by Book끄-Book끄
여행후 끄적끄적2011. 10. 14. 05:42
카리예 박물관을 나와서 예윕 자미를 가기 위해서
또 다시 열심히 헤맸다.
역시나 적재적소에 나타나서 도움을 주는 터키 현지인 덕분에
1.25 TL 로컬 버스(동네 마을 버스?)를 무사히 탈 수 있었다.
안내 책자에도 노선이 자세히 나와있지 않아 어떻게 가야하나 혼자 걱정하고 있었는데...
이제 헤매고 걷는데 재미를 넘어 쾌감이 느껴질 정도다.
(이런 길치도, 이런 저질 체력도 너끈히 받아주는 도시, 터키~~)

 



에윕 술탄 자미(Eyup Sultan Camii)!
이슬람의 예언자 무하마드의 애제자 에부 에윕 엔사리를 기념하기 위해 만들었단다.
(당연히 누군지 모른다. ^^)
에윕이라는 인물은  674~678 년에 성전의 기수로 활약했고
콘스탄티노플 공략 때 전사했다고 책에 써있다.
그가 죽은 뒤 8세기나 지나 그의 무덤이 발견됐고
메흐메트 2세가 그 자리에 자미를 지을 것을 명령해서 지금의 에윕 술탄 자미가 탄생됐다.
그 이후 이곳은 새로운 술탄이 즉위할 때 성검 수여식이 거행되는 국가적인 장소로 사용됐다.
지금도 에윕의 무덤에는 참배를 위한 발길이 계속되고 있단다.
이런 성스러운 이력때문인지
다른 자미보다 기도하러 오는 사람들도 많고 코란을 독경하는 소리도 끊이지 않는다.
그리고 특히나 복장규정이 엄격하기로 유명하다.
여자는 스카프를, 남자는 긴바지를 꼭 입고 가야 한다는데
그날 복장이 반바지에 티셔츠라서 쫒겨나지나 않을까 걱정스러웠다.
자미 가운데와 벽 주위에는 발을 씻는 사람들로 꽉 차 있다.
(이슬람 자미의 특징 중 하나는 꼭 발을 씻고 들어가간다는 거!)



내가 찾은 날이 일요일이었는데 아마도 결혼식이 있었는지
여러 쌍의 신랑, 신부와 가족들로 자미 마당이 북적였다.
그 틈을 이용해서(?) 자미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다행히 쫒겨나지 않았다.
떨리는 마음으로 들어갔는데 기도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바라보자니
왠지 나까지도 숙연해지고 간절해진다.
코란을 읊는 사람들의 눈빛은 아이처럼 맑고 깨끗했다.
1층 마나렙 근처는 오직 남자들만 기도할 수 있는 곳인지 여자들이 한 명도 없다.
가파르고 좁은 계단을 통해 2층에 올라가야 에삽을 쓴 여자들이 기도하는 곳이 보인다.
(터키의 남존여비 사상은 우리나라보다 은근한듯 하지만 오히려 더 심한 것 같다)
창을 통해 비치는 햇빛 속에서
자미의 밝은 곳은 찬란했고, 어두운 곳은 고요했다.
왠지 더 오래 있기에는 복장이 너무 미안해서 서둘러 마당으로 나왔다.
그리고 혼났다.
나이 지긋하신 할아버님(랍비?)이 반바지 입은 나를 보고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뭐라고 하신다.
죄송하다고 고개를 몇 번씩 숙였는데 이해를 하셨는지는 모르겠다.



에윕 술탄 자미를 오른편에 바짝 두고 피에르로티 찻집을 향해 산언덕을 올라갔다.
피에르로티 찻집(Pierre Loti Kahvesi)!
프랑스 작가 피에르로티가 여기서 바라보는 풍경을 너무나 좋아해서
이곳에서 차를 마시면서 작품을 썼다고 해서 유래된 이름이다.
찻집까지 케이블카로 쉽게 올라갈 수 있지만
가능하면 꼭 걸어서 올라가길 권한다.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골든혼과 주변 경치는 안내서의 말과 피에르로티의 고백이 거짓말이 아님을 증명한다.
촉각까지 살아 있는 풍경이랄까!
바라보고 있으면 시선에 따라 몸의 일부가 톡톡 말을 건다.
바람도 그려질 것 같고, 햇빛도 만져질 것 같은 풍경들.
길 양편에 있는 공동묘지를 따라 걸어서 올라가고 걸어서 내려오다보면
죽음이 일상의 공간처럼 아무렇지 않게 느껴진다.



터키 여행 중에 의외의 곳에서 느닷없이 공동묘지가 나타나고는 했는데 
그걸 바라보는 시선은 두려움이나 꺼림직한 고개 돌림이 아니라
오히려 친근함과 평온한 고요였다.
이곳도 그랬다.
내가 결코 알 수 없는 사람들의 무덤임에도 나는 그네들이 다정했다.
그리고 여기에, 다정한 그네들 옆에 내 자리도 하나 있으면 참 좋겠다는 간절한 소망도 품었다.
이곳에서라면 결코 깰 수 없는 잠도 기꺼이 달게 잘 수 있을 것 같아서..
하얗게 비어 있는 묘비명에 슬쩍 내 이름을 써두고 싶었다.

죽음은 때론 불같은 질투다!


Posted by Book끄-Book끄
읽고 끄적 끄적...2010. 10. 6. 06:31
오르한 파묵!
또 다시 이 사람에게 완벽하게 매혹당하다.
이런 이야기일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노벨 문학상 수상 이후 첫 장편소설
오르한 파묵은 말했다.
"나는 이 소설로 기억될 것이다”

5월에 우리나라에 출판됐을 당시에 바로 손에 넣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책을 펼쳐보지 않았었다.
오래오래 숨겨놨었다.
힘들 때, 지칠 때, 위로가 필요할 때 펼쳐보리라 다짐했었다.
지금은 더 오래 이 책을 간직했어야 했던건 아닌가 후회하고 있는 중이다. 
이렇게 휩싸이면 제자리를 찾기가 또 얼마나 버거울까?
단지 소설책일뿐인데도 나는 이 매혹과 질투와 신비에 화가 난다.
오르한 파묵의 책을 읽는 동안은
나는 먹지 않아도, 자지 않아도 괜찮다.
허기도 졸음도 그의 책을 손에 잡는 동안만은 저절로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버린다.
오르한 파묵!
비참함이 느껴질 정도로 나를 완벽히 매혹시키는 작가!
그것도 여러 번,
철저히 치명적으로...



한 여자와 만나 44일 동안 사랑하고,
339일 동안 그녀를 찾아 헤맸으며,
2864일 동안 그녀를 바라본 한 남자.


또 다시 신물나는 사랑 이야기라고?
맞다!
그러면서 동시에 아니다.
한 사람을 너무 사랑한다고해서
그 사람의 입과 손이 닿았다는 이유만으로 담배꽁초 4,213개를 집에 모아놓는 사람이 있을까?
귀걸이, 소금통, 도자기 개인형, 화장수 병, 라크 잔, 설탕통, 모과를 가는 강판 등은 어떤가?
이 정도의 집착이라면 사랑이 아니라
단지 도착적인 정신병의 일종이라고 판단하고 싶어질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책을 다 읽고 나면 인정하고 희망하게 된다.
언제가 꼭 "순수 박물관"을 방문하리라.
그래서 케말이 수집하고 보관했던 퓌순의 흔적이 남겨진 이 모든 물건들을 두 눈으로 확인하리라.
물론 "순수 박물관"을 방문할 땐 반드시 이 책을 들고 가게 될 것이다.
책 안에 있는 1회 무표 입장권을 보여주면서 말이다.
너무 책 속에 빠진 생각이라고 말하고 싶을까?
역시나 그렇지 않다.
올해 하반기에 터키 이스탄불에 "순수 박물관"이 정말로 일반에 공개된단다.
(계획대로라면 8월에 이미 공개됐을지도 모르겠다)
소설의 주요 배경이 된 이스탄불 추쿠르주마에 있는 퓌순의 집.
그곳을 방문하면 소설에 나오는 모든 물건들을 실제로 볼 수 있단다.
번역자의 말처럼 이야기가 책에서 나와 현실에 존재하고 있는 것을 목격하게 되는 셈이다. 
소설의 모든 것들을 재현한,
작가가 창조한 한 편의 소설이 이렇게 현실로 재현된다는 게 신비롭다.
문학이 현실을 새롭게 창조할 수 있다는 사실!
글의 힘에 전율이 인다.
...... 오르한 파묵이라는 작가의 작품을 번역하는 가장 큰 보람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그의 작품을 전 세계에서 누구보다 먼저 읽어 볼 수 있는 특권을 갖는 것이며, 처음 읽는 순수한 감동과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것이라고 답하겠다. 그러므로 이후에 이어질 지옥과도 같은 번역의 고통을 이겨 낼 수 있는 힘도 아울려 얻는 것이라고 ......
번역자 이난아는 말했다.
나는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번역자가 너무 부러워서 불같은 질투가 난다.



퓌순과 케말.
그 둘의 사랑은 이루어졌을까?
이루워졌을 수도 있고 이루어지지 않았을 수도 있다.
인생은 절대로 우리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다고 했던가?
그렇더라도 이 사랑은 충분히 의미있고 그리고 완벽하게 아름답다.
사랑하는 사람이 눈 앞에서 사라졌을 때 삶의 모든 광채도 함께 사라졌다고 말하는 사랑.
그 사람을 보는 것만으로도 모든 것이 한순간에 제자리를 찾는 것 같고,
세상이 의미 있고 아름다운 곳으로 변해버린다는 사랑.
그녀와 한 집에 살 수 없기에 그녀의 손길이 닿았던 물건들을 하나하나 훔치는 사랑.
그 사소한 물건들은 아름다운 순간을 연상시키는 물건을 넘어, 순간의 일부가 된다.
그리고 그것은 집착적으로 사랑하지만 '소유할 수 없는' 누군가에게서 어떤 일부를 떼어 내는 행복이란다.
9년의 기다림 끝에 함께 할 수 있게 된 두 사람의 최후가 되어버린 밤.
신파라고 작위적이라고 비난하진 말자.
이 책을 읽으면 소설속 이야기는 그대로 현실이 된다.
그것도 의심할 여지가 없는 생생한 현실.
나는 내 가슴팍으로 운전대가 꽃힌 것처럼 내내 극심하게 아팠다.
그리고 그 고통은 묘하게 육체의 통증을 동반했다.
영리한 사람들은 인생이 아름다운 것이며, 인생의 목적이 행복이라는 것을 잘 안단다.
그런데 나중에는 행복하다고 말하는 건 바보들 뿐이라나!
"순수 박물관"은 그런 바보들을 위한 책이며 장소다.
점점 사라지고 희미해지는 "시간"이  하나의 "공간"으로 형체를 갖게 되는 곳.
<순수 박물관>
터키에 가게 되면 꼭 이곳에서 하루를 보내리라. 
꼭 그렇게 하리라...

너는 한때 나의 연인이었지
내 곁에 있을 때조차 나의 그리움이었지
지금 너는 다른 사랑을 찾았어
행복이 너의 것이길
고통과 번민은 나의 것이니
삶이 너의 것이 되길, 너의 것이 되길


<순수 박물관>을 탈고한지 얼마 지나지 않았지만
오르한 파묵은 이미 새로운 소설 집필에 착수했단다.
그러니 견디자, 버티자.
그의 글을 읽기 위해서라면 긴 노동같은 기다림도 나는 기꺼이 감수할 수 있다.
괜찮다.
견딜 수 있다,
버틸 수 있다.
Posted by Book끄-Book끄
읽고 끄적 끄적...2010. 8. 17. 06:40
만약 이 책이 뼈가 있고 살이 있는 형이상학적인 존재라면
나는 이 책의 단어 하나 하나까지도 전부 오도독 오도독 탐욕스럽게 씹어 삼켜
그대로 내 몸 안에 고이고이 간직하고 싶다.
탐이 나도록 아름답고
겁이 나도록 관능적인 소설 <은교>
이 이야기를 사랑이 아니라고 누가 말할 수 있을까?
누군가의 심장에 칼을 쑤셔박는 심정으로 쓴 노시인의 긴 고백의 글은
여기 이렇게 한 사람의 심장뿐만 아니라 온 몸에 칼 이상의 것을 쑤셔박았다.
그래, 어쩌면 이 글에는 정말 차가운 폭력성이 담겨 있는지도 모르겠다.
생로병사가 없는, 아니 생로병사를 이기는 관능.
그 관능은 시간을 이키는 칼이며,
그러므로 최종적으로 누군가의 죽음을 부른다.
신생(新生)의 폭설같은....



이 이야기는 <살인 당나귀>라는 제목으로
작가 박범신의 개인 블로그(http://blog.naver.com/wacho)를 통해 연재했던 소설이다.
(당나귀는 소설 속 노시인의 몰고 다니던 오래된 코란도이가도 혹은 시인 자신이기도 하다)
한 달 반이라는 짧은 시간동안 폭풍같이 써내려간 이야기.
그리고 그 이야기가 제목을 바꿔 <은교>로 출판됐다.
<고산자>를 발표한 후 박범신은 말했었다.
"감수성을 충분히 해방시키는 아름답고 슬픈 연애소설을 준비중" 이라고...
그리고 그는 <은교>라는 작품을 책으로 출판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지난 37년 동안의 작가 생활을 주마등처럼 떠올리게 하는 작품이다. 내 안의 다양한 욕망과 감수성을 반영했기에 앞으로도 오랫동안 남는 소설일 것 같다." 라고.
그리고 나 또한 거기에 한 마디를 덧붙인다.
내게도 이 이야기가 그렇다고.....
<촐라체>, <고산자> 그리고 이 책 <은교>까지.
박범신은 3권의 책을 "갈망의 삼부작"이라고 이름 붙였다.
<촐라체>에서는 히말라야를 배경으로 인간 의지의 수직적 한계를,
<고산자>에서는 역사적 시간을 통한 꿈의 수평적인 정한을,
그리고 <은교>에 이르러, 비로소 실존의 현실로 돌아와
존재의 내밀한 욕망과 그 근원을 감히 탐험하고 기록했다고 느끼기 때문이란다.
그리고 독자들에게 한 마디 당부를 한다.
'밤에만' 쓴 소설이니, 독자들도 '밤에만' 읽기를 바란다고...
나 또한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이 책을 손에 잡고 있을 때는 대부분 밤이었다.
책을 읽는 동안 가슴은 뜨거웠고
생각은 차가웠다.



69살 노시인 이적요가 17살 계집아이 한은교에게 느끼는 감정을 읽으면서 누구도 감히 비난하진 말자.
부도덕하다고, 혹은 추잡하다고 손가락질하지도 말자.
그걸 "사랑" 아니라면 도대체 뭐라고 이름 붙일 수 있을까?
시인의 노트와 그의 제자가 남긴 노트, 그리고 시인의 변호사 Q.
이 책은 세 사람의 목소리가 번갈아 가며 등장한다.
이야기의 중심은 모두 "은교" 였던가?
혹은 노시인 "이적요" 였던가? 아니면 그의 제자 "서지우" 였던가?
모든 예술과 문학의 시작이 질투라면,
그래, 이 세 사람의 관계는 그대로 예술이고 문학이다.
시인의 노트에 남겨진 글들은
그리고 어떤 시들보다도 아름답고 황홀하다.
단어 하나 하나가 전부 살아서 나를 수시로 꿀꺽 꿀꺽 삼켜버려 읽는 동안
많.이.두.려.웠.다.



자신이 사망한지 1주기가 되는 날 발표하라는 시인의 노트.
그 속엔 두 가지 비밀이 쓰여있다.
자신이 은교를 사랑했다는 것과, 그리고 자신의 제자 서지우를 죽였다는 것.
그럼으로 해서 자신이 판 암굴 속으로 스스로 걸어들어가 죽음을 선택한 노시인.
그의 머리맡엔 은교가 선물한 작은 토끼 인형이 놓여 있었다.
총.총.총. 뛰던 은교의 발소리를 떠올리게 하는 토끼...
평생 시(詩)만을 써온 시인 이적요가
서지우라는 제자의 이름을 통해 발표한 포르노그래피 소설.

...... 어쨌든 나는 사람들이 '천박한 것'이라고 비난하도록 획책해 쓴 그것이, 시인 이적요의 작품이라고 까발겨질 날이 언젠가 올 거라고 예감했고, 그 작품이 마침내 책이 되어 나왔을 때, 본능에 따른 나의 또다른 충동, 예컨대 나와 나의 시세계가 얼마나 하찮은가 하는 것을 세상에 극적으로 까발리는 과정 안에, 돌입했다고 느꼈다.... 결국은, 시인으로 성역화해온 나의 '빛나는 성취'를 스스로 시궁창에 버리고 싶은 자학의 한 수단으로, 서지우를 대리인 삼아 내가 '당신들 문법'에 맞춰 포르노그래피 소설을 썼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

문학은 어떤 이에겐 질병이라고 했던가?
그래서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그런 사람도 있다고...
노시인은 자신의 제자를 두고 이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결국 자신 또한 고백한다.

...... 내가 세상이라고, 시대라고, 역사라고 불렸던 것들이 사실은 직관의 감옥에 불과했다는 것을, 시의 감옥이엇다는 것을 알았다. 나의 시들은 대부분 가짜였다 ......

그리고 이 말은 은교라는 한 아이를 사랑함으로써 시작된 고해성사로 끝을 맺는다.

...... 너를 만나고 비로소 나의 진짜 얼굴을 스스로 보게 된 셈이다. 세상 사람들은 그러므로 나의 '진짜' 얼굴을 보아야 한다. 시인 이적요는 '전략'에 따라 자신의 '우상화'를 염두에 두고 시를 써온 '가짜 시인'이었고, 불과 열입곱 살 된 소녀를 통절하게 간음하고 싶었으며, 질투심에 눈이 멀어 끝내 제자를 죽인 사람이다. 어떻게 그 사실을 다 묻어두고 무덤 속에서나마 그 모든, 시끄러운 우상화를 받아들일 것인가. 인생의 마지막에 너를 통해 만나 경험한 본능의 해방이야말로, 나의 유일한 인생, 나의 싱싱한 행복이었다. 그게 바로 나 이적요다. 이적요는 본능을 가진 인간이었을 뿐 신성을 본 적도 만난 적도 없다. 그러하니, 아무도 더이상 내게 속지 말라...... 그리고 내 무덤에 짐승이라고 침을 뱉고 살인자라고 돌을 던지라. 그것이 나의 마지막 소망이다 ......



책은 지독히도 탐욕적이고 관능적이며
동시에 문학적 은유들로 넘실댄다.
누군들 맘 속에 자신만의 처녀이자 자신만의 등롱인 "은교"가 없을까?
맘 속에 간직한 신성(神性)에 가까운 영원한 신부 "은교"
그렇다면 그 "은교"에게로 향하는 길이
멸망으로 이르는 좁고 어두운 길이라 한들 누군들 간절히 가고 싶지 않을까!

...... 은교를 만나면서 나는 보다 젊어지고 싶었다. 그게 죄인가. 그 애를 통해 아직도 생피처럼 더운 나의 욕망을 확인했을 뿐, 나는 아무런 범죄도 저지르지 않았다. 나의 은닉된 욕망에게 형벌을 선고할 수 있는 자는 그러므로 나뿐이다 ...... 아니, 청춘이 될 수 없을지라도 청춘인 듯이, 나는 젊은 저들과 오지게 맞장을 뜨고 싶었다 ......
 
숨통을 조여오면서도 숨통을 트이게 하는 문장이다.
이 아름답고 지독한 연애 이야기를 나는 또 어떻게 감당할까?
사랑, 질투 그리고 음모라는 통속적인 단어로 이 소설을 말하고 싶진 않다.
이 소설은...
그대로 한 편이 시이고
그대로 한 점 풍경화다.
그러므로 이 책을 읽게 되는 이여!
반드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으니, 그것은 
눈빛이다.
그들의 눈빛!
그리고 당신의 눈빛!

은교는 나에게 슬픔과 함께, 생애에 경험해보지 못한, 청춘의 광채와 위로를 주었다.
사.실.이.다.
나는 어느새 이적요가 되어 늙은 관 속에 내 몸을 누인다.
누윈 몸은 고요했으며 더불어 편안했다.
Posted by Book끄-Book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