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끄적 끄적...2010. 11. 13. 05:54

연극 <프루프>

장 소 : 대학로예술마당 3관
기 간 : 10월 12일(화)~12월 12일(일)
극 본 : 데이비드 어번

연 출 : 이유리
출 연 : 로버트 - 남명렬, 정원종, 
         캐서린 - 윤지, 강혜정 
         클레어 - 하다솜, 김태인
         해롤드 - 김동현



나무 액터스와 악어 컴퍼니의 야심작(?)
"무대가 좋다" 시리즈 세 번째 작품이자
타블로와 결혼 후 아기를 낳고 한동안 쉬고 있던 강혜정의 복귀작 연극 <프루프>
그러나 난 이윤지 캐서린을 선택했다.
2 년 전에 김지호와 남명렬이 부녀로 나왔던 <프루프>를 보면서 그 느낌이 얼마나 좋았던지...
그때 이 작품을 보면서 김지호가 나이가 좀 더 어렸다면 좋았을텐데 하는 생각을 했었다.
김지호 자체는 내가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연기를 잘했었고 집중력도 놀라웠었다.
단지 그녀가 25살로 나오는 게 나홀로 어색했었는데...
그래서였는지도 모르겠다.
이윤지의 캐서린을 선택한 건.
그리고 왠지 그녀는 똑 부러지고 야무지게 연기를 할 것 같았다.
아버지 로버트역은 전혀 망설임이 없이 배우 남명렬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무대 위에서 존재감 있다는 표현,
배우 남명렬만큼 적절하게 들어맞는 경우가 또 있을까?
그의 딕션과 톤은 가히 환상적이다.
연극을 보는 내내 나는 로버트가 내 아버지가 아니라는사실에 불같이 질투가 났다.
(이게 말이 되느냐 말이다)



천재 수학자 로버트는 20대에 이미 학계가 깜짝 놀랄 수학적 업적을 남겼다.
그러나 그 천재성이 오히려 그에게 견디기 힘든 독이었을까?
말년은 정신분열 증세와 불안장애로 혼란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캐서린의 보호를 받으며...
아버지의 수학적인 천재성을 물려받은 캐서린은
아버지를 돌보기 위해 학업도 포기한다.
...... 캐서린은 분명 내 삶을 구원해주었다. 
       그 아이의 힘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나는 결코 그 아이에게 보답하지 못할 것이다 ......

캐서린의 21살 생일에 쓴 로버트가 일기.
문득 두 부녀의 관계에 또 다시 질투가 난다.
로버트에게 딸 캐서린은 어떤 의미였을까?
그리고 연극은 우리에게 무엇을 증명하고 싶었던 걸까?
우울증마저도 너무나 수학적인 딸 캐서린,
아버지 로버트는 혼자 남겨진 그 딸에게 환영으로라도 나타나
새 삶을 시작할 힘을 남겨주고 싶었는지도 모르겟다.
네 삶에 새로운 삼페인을 스스로 떠뜨리라고...
스스로를 죽은 사람임을 인정하면서 퇴장하는 아버지의 탈육체화된 모습을 보면서
난 그 어떤 실체보다 더 현실적으로 만져지는 로버트의 존재감를 느꼈다.
마지막 유산, 혹은 찬란한 유산이라는 식상한 표현이라도 꼭 해야할 것 같다.
부재가 분명한 한 사람이 버젓이 현실로 변하는 그 시점.
아버지는 딸에게 모든 걸 주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늘 모녀관계에만 익숙했는데 무대에서 만나는 부녀관계는 참 뜨겁고 사랑스럽고
그리고 안타까움의 연속이었다.
부녀의 사랑은 할과 캐서린의 사랑마저도 유치하게 만들어 버린다.
그리고 캐서린과 클레어의 관계까지도.
캐서린은 정말 그랬을까?
아버지의 천재성이 가장 번득이던 20대 중반,
지금 그 나이를 지나야 하는 자신에게도 혹시 아버지의 정신병이 유전되는게 아닐까 불안했을끼?
작품 속에서는 그런 뉘앙스가 아주 많이 풍기지만
난 결코 아니라도 말하련다.
딸이자 보호자이자 협력자이자 간병인이었던 캐서린.
그 부녀의 관계는 무엇으로도 증명될 수 없고
그 누구라도 감히 끼어들 여지가 없다.
연극은 마치 그것을 증명하는 어렵고 난해한 공식 같다.


연극 <프루프>는 영화 <뷰티풀 마인드>의 천재수학자 존 내쉬와 그의 가상 딸을 소재로 쓰여진 작품이다.
2001년 드라마부문 퓰리처상과 토니어워즈 최우수작품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데이비드 어번의 극본은 아름답고 치밀하다.
아쉬움이 있다면 부녀를 제외한 다른 두 사람이 이질적으로 느껴졌다는 점이다.
언니 클레어 역의 하다솜은 너무 신경질적이여서 오히려 정신과적인 진료를 받을 사람은 캐서린이 아니라 바로 그녀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2년 전 봤던 클레어는 이지적으로 도시적인 느낌이 강했었는데...
초반에 캐서린과 머리 영양제(?)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는 마치 미장원 종업원이 손님에게 할당량을 채우기 위해 열심히 강매하는 느낌까지 들더라.
그리고 그 옆에서 손톱 손질하면서 함께 수다떨기에 딱 제격이었던 캐릭터 할까지!
목소리와 외모에서 지석진을 떠올리게 했던 김동현 할은,
아무리봐도 수학자같은 이미지는 아니여서 보는 내내 당혹스럽웠다.


클레어와 할 덕분에
순간순간 이 연극이 이렇게 수다스러운 작품이었나 생각했다.
(놀랍도록 새로운 경험이었다)
이윤지 캐서린은...
전체적으로 나쁘지 않앗다.
목소리 톤이 급작스럽게 변한다거나 과장되게 표현하는 부분도 있었지만
첫 연극 무대라는 걸 감안한다면 앞으로의 모습도 기대가 된다.
2시간 동안 이야기를 끌고 나가야 하는 캐서린.
그 역할을 한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텐데...
과거와 현재를 오가면서 끊임없이 감정의 변화를 조율하는 일도 쉽지 않았으리라.
스스로도 어느정도 대견해하고 있지 않을까?
젊은 배우들의 연극 무대 도전!
지금까지 "무대가 좋다" 시리즈 중에서 개인적으로는 가장 좋았던 작품이다.



"다 됐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위험한 때야!'
연극 속에서 논문 초고를 들고 찾아온 할에게 로버트가 던진 말이다.
모든 증명의 완성은 항상 이런 반추가 아닐까?
살면서 우리가 증명해야 하는 모든 것들에게 마지막으로 던지는 화두!
그게 사랑이든, 학문이든, 집착이든, 두려움이든. 정신병이든,
다 됐다고 생각하는,
가장 위험한 그 때를 지나오는 증명만이
오직 위대하고 완벽한 증명이 될 수 있듯이...

한 편의 연극을 보고...
어쩌자고 또 다시 이렇게  멀리 와버렸는지...
Posted by Book끄-Book끄
달동네 책거리2010. 8. 6. 08:33

<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 - 주노 디아스

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

책을 읽고 주노 디아스(Junot Diaz)라는 작가가 너무나 궁금해졌습니다.
1968년 도미니카 산토도밍고 출생, 1974년 가족과 함께 아메리카 드림을 꿈꾸며 미국으로 이민, 뉴저지에서 생활, 엄청난 독서광인 영문학 전공자, 1996년 첫 단편 소설집 <Drown> 발표. 엄청난 호평을 받으며 1999년 “21세기를 빛낼 최고의 작가 20인”에 선정.
그리고 길고 긴 11년 동안의 침묵.
2007년 첫 장편 소설 <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 발표.
이 책으로 또 다시 미국의 온갖 문학상을 휩쓸어버린 사람.
2007년도 고맥 매카시의 <로드>가 플리처상을 수상했을 때 비평가들은 말했다고 합니다. 앞으로 <로드>를 넘어설 만한 소설은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그러나 2008년 이 작품을 최종 선정작으로 결정하면서 그들은 자신들의 결정을 다시 번복하게 됩니다.
현재까지만 30개국에 판권이 팔렸으며 영화로까지 만들어 지고 있는 이 책.
도대체 어떤 내용이기에 한갓 가난한 나라의 도미니카계 이민자에 불과한 주노 디아스의 책이 미국 전역에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켰을까요?
센세이션...
이 책의 모든 내용은 확실히 센세이션 합니다.
책의 번역자는 말합니다.
“도발적인, 관능적인, 정치적인 그리고 눈물 나게 우습고도 감동적인” 이야기라고.
하나의 소설 안에 이 모든 수식어를 전부 적용시킬 수 있다는 게 과연 가능할까요?
대하소설도 하닌 달랑 한 권 분량의 책에...

이 책에는 미국에 정착한 도미니카계 이민자 데 레온 가족이 나옵니다.
그리고 “푸쿠”라고 불리는 일종의 저주로 대변되는 단어가 나오죠.
언제나, 어디에나 존재하면서 지금도 여전히 힘을 발휘하는, 누군가의 삶에, 운명에 저주를 퍼붓는 “푸쿠”는 유럽인의 라틴아메리카 침략과 함께 이 땅에 발을 들인 신세계의 파멸과 저주를 뜻한다고 합니다.
이 소설은 3대에 걸쳐 데 레온 가문에 이어진 오랜 저주 “푸쿠”에 맞서 인생을 지켜낸 한 남자 오스카 와오의 삶을 그리고 있습니다. 책의 제목처럼 “짧고 놀라운 삶”을 말이죠.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사람은 그러나 데 레온 가문의 사람이 아닌 한때 오스카의 누나 롤라의 남자친구였던 유니오르라는 사람입니다.
자, 그렇다면 이 이야기는 또 어느 정도의 객관성을 유지하겠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겠네요.
이 소설은 한 집안의 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뛰어 넘어 식민지 작은 나라가 갖는 생존에 대한 절실함이자 군부 독재의 완벽한 철권통치에 홀로 맞서는 이야기이며, 현대 미국의 대중문화를 향해 “너더리(넌더리)”라며 과감하게 비꼬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동시에 믿기지 않는 사랑 이야기이기도 하죠.
누군가는 말합니다.
“...... 잠시 고민하다, 우리는 이것을 ‘인생'이라 부르기로 했다...... ”

데 레온 가문의 첫 번째 “푸쿠”는 할아버지인 아벨라르 세대의 “트루히요”라는 도미니카 독재자였습니다.
트루히요는 실제 인물로 도미니카 공화국에 전에 없는 평화와 번영을 안겨준 대통령이었습니다. 그러나 국민들은 그 번영의 대가로 자신들의 시민적, 정치적인 자유를 희생해야만 했죠. 독재정치가 무서운 건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채워지지 않는 “탐욕”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트루히요도 그랬죠. 탐욕으로 인해 불공정 분배가 시작되고, 그것을 은폐하고 가리기 위해 수많은 정적들을 이유 없이 처단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다 군부의 지지를 잃기 시작하죠.
어디서 많이 보던 스토리 아닌가요? 우리가 실제 겪었던 스토리 결말처럼 트루히요도 농장으로 차를 몰고 가다 기관총 사격으로 암살을 당하게 됩니다.
어떤 생각이 드나요?
우리와 전혀 다른 나라에서 우리나라와 똑같은 현대사를 본다는 거.
사람들은 말합니다. 사는 건 전부 다 똑같은 거라고...
어쩌면 이 말은 정말 진리이고 진실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두 번째 “푸쿠”는 오스카 어머니의 인생을 덮칩니다.
외과 의사였던 아버지, 그리고 간호사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벨리. 그녀는 유일하게 살아남은 데 레온 가문의 핏줄이기도 합니다.
난봉꾼이었던 대통령 트루히요에게서 재능과 미모를 겸비한 두 딸을 지키기 위한 아벨라르의 노력은 결국 국가원수 중상 및 모독죄라는 결과로 그의 인생과 가문 전부를 초토화시킵니다. 재산은 몰수되고 자식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아벨라르 자신도 고문으로 인해 식물인간으로 감옥에서 생을 마감합니다. 그의 아내는 제 정신이 아닌 상태로 막내 딸 벨리를 낳고 스스로 자동차에 몸을 던지죠. 아벨라르가 그렇게 지키기 위해 노력했던 딸들마저도 모두 결국은 죽음에 이릅니다.
그렇게 모든 몰락과 추락을 겪고 살아남은 데 레온 가문의 유일한 혈육 벨리의 “푸쿠”는 남자였습니다.
그녀의 육체는 만신창이가 되어 버렸고 결국 모든 희망을 버린 채 뉴욕으로 떠나죠.
그녀에게 새로운 인생, "푸쿠“의 저주를 이기는 ”사파“의 인생이 열리게 될까요?

데 레온 가문의 세 번째 “푸쿠”는 우리의 주인공인 140kg 거구의 남자 오스카에게 찾아옵니다.
성적 매력을 유산처럼 물려받는 도미니카의 전형적인 남성들과 달리 오스카에겐 실수로도 먼저 말을 걸어오는 여자조차 전혀 없습니다.
학교 다닐 때는 유색인종에 뚱뚱한 몸으로 인해 조롱을 받았고, 교사가 된 지금도 그 상황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단지 학생일때는 같은 나이의 동료에게서 였는데 이제 나이 어린 제자들로 그 상대가 달라진 것만이 유일한 차이일 뿐이죠.
변함없이 형편없는 그의 삶 속에 그녀 “이본”이 말을 걸어옵니다.
오스카 인생 전체에서 처음으로 말을 건 여자의 등장이네요.
“이본”이라는 여자는 오스카에 비해 한참 연상인데다 반 은퇴한 창녀였죠. 게다가 소위 기둥서방이라고 불리는 경찰 애인까지 있습니다.
여기까지 읽은 분들은 그렇고 그런 이야기를 상상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렇고 그런 이야기의 결말에 3대에 걸쳐 내려온 이 집안의 모든 “푸쿠”의 저주가 송두리째 사라져 버립니다.
이상하죠?
어느 틈에 오스카에게 위로받고 있는 제 모습을 발견합니다.
 
삶에는 미신과도 같은 저주를 불러오는 “푸쿠”만 있는 게 아니라고 작가는 말합니다.
사람을 살아 있게 만드는 무엇, 저주를 피하고 “푸쿠”에 대항하는 역주문인 “사파”도 있다고 말해주죠. 그러니 사람이 산다는 건 결국 모두 “사파”인 셈인가요?
이 책을 읽고 있으면 참 묘한 감정에 쌓이게 됩니다.
순서 없이 아무렇게나 벌려놓은 벼룩시장 좌판을 보는 것도 같고, 아주 정확하고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는 백과사전을 들여다보는 느낌도 듭니다.
재미있으면서도 지독히 지적인 책!
뜨거운 불판을 들고 얼음장 위에 서 있는 느낌이라고 할까요?
이야기가 아니라 모든 역사를 읽고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이런 류의 책은...
소위 궁합이 잘 맞는 사람에겐 스파크가 제대로 튀게 만들죠.
그러니까 이 책은 저와 상당히 궁합이 잘 맞는 책이었습니다.
문득 타인의 마음이 궁금해지는 것도 어쩔 수 없네요.
당신이 이 책을 읽게 된다면
이 책은 당신에게 “푸쿠”가 될까요? 아니면 “사파”가 될까요?

Posted by Book끄-Book끄
달동네 책거리2009. 7. 20. 06:21
 <추락> - J.M. 쿳시


 추락


지적이면서 끔찍하게 치열한 책을 만나게 되면 등골이 오싹해지는 기분이 듭니다.

그리고 나면 정말 미칠 정도로 그 내용 속에 빠져들게 되죠.

오랜만에, 정말 오랜만에 그런 경험을 다시 했습니다. 지금 소개하는 <추락>이 바로 그런 충격을 안긴 책입니다.

오싹하다 못해 머릿속까지 서늘해지는 느낌.

J.M. 쿳시라는 작가의 책을 처음 읽게 된 게 도무지 억울하고 속상해서 화가 다 날 정도라고 하면 이해가 되실까요?

이 소설의 원 제목은 <치욕>입니다.(개인적으로 우리나라에서 왜 “추락”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됐는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번역가 왕은철이란 분이 작가와 합의해서 제목을 고쳤다고는 하는데 “치욕”이라는 원제가 더 책의 내용에 적합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J.M. 쿳시!

가장 타협하지 않는 작가이자 가장 분명하고, 가장 용감한 작가로 알려진 사람!

2003년 스웨덴 한림원은 그를 96회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지목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플리처상보다 더 권위 있다고 알려진 부커상을 그것도 한 작가에게 두 번 주지 않겠다는 전례를 깨고 세계 최초로 두 번이나 수상한 작가이기도 합니다.

부커상 심사위원들은 “쿳시가 수상식에 참석하지도 않을 것이고 그 이후의 만찬장에서도 그의 자리가 비어있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그를 선택했다”고 밝히기까지 했네요.

그리고 누군가는 이런 표현을 쓰기도 했습니다.

"그의 글은 아이스 피겔로 얻어맞은 느낌"이라고....

누군가는 또 말합니다.

"심오한 정치의식을 지니면서도 모든 단어들을 아름답게 조합하는 작가"라고요.

그의 글은 비록 이 책이 처음이긴 하지만,

실제로 여기에 나오는 모든 단어들은 에너지로 충만합니다. 그 에너지는 때론 “파렴치”한 욕망의 형태로, 때론 걱정 가득한 “부성애”의 마음으로, 때론 비난과 욕설, 그리고 원망과 싸움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살아 있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 살아 있기에 인정해야 하는 혹은 살아 있기에 떠날 수 없는 사람들의 선택에 대한 이야기.

이 소설 안에는 그런 살아 숨쉬는 현실이 그대로 담겨있습니다.

글의 위대함이란,

그 안에 살아온 시대가 거짓 없이 그대로 투영되어 있을 때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균형과 흥미를 잃지 않으면서도 진실을 품는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우리네 같은 평범한 사람들은 감히 시도하기조차 어려운 일일 겁니다.

J.M. 쿳시, 이 사람의 글은 그래서 그대로 현실이 되어버립니다.


50을 넘긴 “데이비드 루리”.

욕망에 따라 행동하는 대학교수 루리는 스무살 제자 멜라니와 충동적인 사랑에 빠져 잠자리를 함께 합니다. 결국 멜라니 부모의 고발로 진상위원회가 열리게 되고 루리는 추문의 한가운데 위치하게 되죠.

사과문 발표를 강요하는 그들의 요구를 거부한 루리는 결국 대학을 떠나 딸이 살고 있는 남아프리카 농장에 잠시 머무르게 됩니다.

루리는 말합니다.

“내 사건은 욕망의 권리에 관한 것이다. 어떤 동물도 본능을 따랐다는 것 때문에 벌을 받게 된다는 걸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이야기의 초반은 이렇게 좀 불편하고 파렴치하기까지 합니다.

책 제목 그대로 욕망대로 살아가는 한 인간의 추락상을 보여주고 있죠.

이 루리라는 남자의 욕망은 비난받아 마땅하긴 하지만 그래도 당당함과 이유 있음에 무조건 손가락질 할 수 없음을 인정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적어도 이 사람은 자신이 스스로 욕망에 따라 살고 있음을 확실히 인정하고 있으니까요. 잠시 가면을 쓰고 기다리라는 주위의 권고조차 거부할 정도로요.

딸의 농장에서 함께 지내던 루리에게,

어느 날, 3명의 흑인 남성이 딸을 집단 강간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그 일로 급기야 딸 루시는 임신까지 하게 됩니다.

자 이제부터 이 이야기는 “치욕”의 이야기로 전개됩니다.

자신에게 일어난 일들은 단지 추락으로 받아들일 수 있지만 내게서 생명이 시작된 딸에게 일어난 사건은 “추락”을 넘어 “치욕”으로 다가옵니다.

이 사람, 이 치욕의 시간을 어떻게 견디고 버텨나갈까요?

백인 지배가 종결되고 흑인 정권이 들어선 지금의 남아프리카 공화국.

과거 우리나라가 그랬던 것처럼 이곳도 지금 혼란과 변혁의 시대를 통과하고 있는 중입니다.

수백년간 지속되어 온 흑백갈등이 단순히 정권의 교체만으로 하루아침에 모두 해결될 수는 없는 일이겠죠.

어쩌면 혼란의 시대를 살아가기 위해서 그 땅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겐 그만큼의 희생과 포기가 필요한 건지도 모릅니다.

흑인지배 지역에서 살아가기 위해 백인의 선택,

만약 당신이 그 세계를 선택했고, 선택한 그 세계에 머무르기 위해서 값을 치러야 한다면 당신은 어떤 추락도 혹은 어떤 치욕도 감당할 자신이 과연 있을까요?

살아가는 게 욕망의 문제라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는 선택의 문제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흑인들의 땅을 떠나라는 아버지에게 딸은 자신의 선택을 말합니다.

“그러나 어쩌면 다시 시작하기에는 좋은 지점일 거”라고...

딸 루시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걸, 아무 것도 없는 상태로 밑바닥에서 출발하는 걸 배우겠다고 말합니다.

재산도, 무기도, 권리도 위엄도 그 무엇도 없는 본질에서부터 출발하겠다고요.

아비는 딸에게 묻습니다.

“넌 그 아이를 사랑하니?”

딸은 말합니다.

“아니요. 제가 어떻게 그럴 수 있겠어요. 하지만 그것에 관한 한 모성을 믿어야지요. 아버지, 저는 좋은 엄마가 될 작정이에요. 좋은 엄마이자 좋은 사람이 되겠어요. 아버지도 좋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해보세요“

딸은 지금 아버지의 과거에 대해 책망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불안하고 혼란한 세계를 살아내고 있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믿음. 그들이 시작할 때 반드시 지니길 바라는 그 믿음에 대한 묵시론적 바램의 표현이죠.

불안의 시대면 여지없이 나타나 점점 커져만 가는 틈.

그 틈을 매울 수 있는 건 자신에 대한 “믿음” 그 하나뿐이라고 이 책은 말하고 있습니다.

한 세대와 한 세대 사이에는 커다란 장막이 존재한다고 합니다.

그 장막이 내려오는 걸 보지 못했다고 해서 이미 내려진 장막의 존재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는 일이겠죠.

누가, 왜, 어떻게 이런 장막을 내렸는가에 대한 진상규명 탁상공론은 이제 더 이상  필요하지 않습니다.

누군가는 그 장막의 끝을 잡아야만 하겠죠.

다시 끌어 올리든, 힘껏 끌어 내리든 말입니다.

지금 스스로 추락의 시대, 치욕의 시대를 산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다시 한 번 정직하게 그 질문의 방향을 생각해봐야 합니다.

만약 견딜 수 있다면,

그리고 그 자리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당신의 치욕은 결코 당신을 추락으로 이끌진 않을 거라는 걸 믿습니다.


Posted by Book끄-Book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