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끄적 끄적...2012. 1. 13. 00:07
2011년 마지막 관람 공연이었다.
예기치 않은 일로 예매했던 공연을 무려 4개나 취소했었다.
형편상 이 공연도 취소해야 했지만 그럴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 초등학교 3학년 조카랑 경희대학교 평화의 전당으로 향했다.
(어쩔수 없이 11만원이나 하는 VIP 1매는 결국 날려버렸다)
내가 너무나 사랑하고 아끼는 임태경의 연주.
예전 그때처럼 나는 그의 연주로 평온한 위로를 받고 싶었다.
그래서 잠시 짧은 숨이라도 쉴 수 있게 되길 진심으로 바랬다.
숨을 허덕이며 올라가는 경희대 평화의 전당 오름길이 조금은 설랬던 것도 아마 그런 이유였으리라.
임태경의 공연를 그래도 꽤 여러번 관람했었는데
이날 만큼 총체적 난국에 아비규환은 없었다.
매스컴의 위력이 실로 엄청나구나 절감하며 혀를 내둘렀다.
(그는 항창 KBS "불후의 명곡"으로 스타 아닌 스타가 되어 있었다)
7시 30분에 시작해야 하는 공연은 거의 1시간 가깝게 지연됐다.
다름 아닌 티켓 배부 문제로...
공연을 과하다 싶게 많이 보는 나도 이런 기현상(?)은 정말이지 생전 처음이다.
당혹스러웠다.
그리고 그 시간들이 내내 몹시도 힘들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이...


1. Miserere (Zucchero)
2. 사랑이 사랑을 버린다
3. 사랑의 찬가
4. Donde Voy (with 기타리스트 서정설)
5. La fortezza grand der perche (김원정, 서정실)
6. Dom what May (Moulin Rouge OST, with 김원정)
7. 옷깃
8. 처음 그때처럼 (주몽 OST)
9. Bon Nuit, Mon Amor
10. 대성당의 시대

- Intermission

1. Marry you
2. Twist and Shout
3. La Bamba
4. 첫눈이 온다구요
5. 동백아가씨
6. 이태리 정원(with IS)
7. Po Kare Kare Ana (IS)
8. 할렐루아 (G.F. Handel / 한국오라토리오싱어즈)
9. Hallelujah (L. Cohen)
10. 혁명 (김대성 작곡, 임태경 작사)


취지 자체는 정말 좋은 공연이었다.
"청소년 전용 예술공간 설립기금 마련을 위한" 송년 콘서트.
그러나 취지만큼 공연의 내실을 따라주지 않았다.
너무나 성의없이 준비한 기획과
리허설도 제대로 하지 않은 것 같은 공연!
보는 내내 피로감과 절망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줄타기했다.
예전같지 않은 임태경의 목소리도 안타까웠고....
내 욕심인지 모르지만
그 정도밖에 안 되는 공연이었다면
찾아온 관객들에게 죄송하다며 전액 환불을 하고 중지를 해야 하는 게 옳은 판단같다.
초대권 남발이 많았다고는 하지만
적지 않은 금액을 지불하고 그 자리에 앉은 나로서는
때로는 심한 모욕감마저 느꼈다.
그래서 몇몇 좋았던 그의 연주들까지도 싸잡아 형편없게 생각됐다.
왜 이런 공연이 됐을까?
1달이 훨씬 지난 지금 다시 생각해봐도 안타깝고 힘겨운 공연이다.
그걸 만회하려고 죽을 힘을 다해 최선을 다하는 임태경의 모습.
그러나 그런 노력으로는 도저히 채워지지 않는 그런 공연!
앵콜송 하기 전에 그가 토로한 솔직한 말들을 들으면서도
그가 연주하면서 내내 힘들었다는 걸 알면서도
끝까지 공연을 강행했던 건 여전히 옳지 않은 일처럼 느껴진다.
그도 상처받았겠지만
이번 공연은 나도 정말 많은 상처를 받았다.
(정말 힘겹게 본 2011년 내 마지막 공연이었단 말이다!)

경희대학교 평화의 전당 음향이 그렇게 형편없는지도 처음 알았고
리허설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마이크와 음향이 얼마나 쓰레기 같은 줄도 알았고
예의없이 과감하게 문을 여닫으며 들낙거리는 관중들이 어떤 건지도 알았고
마치 자신들이 주인공인냥 서슴없이 종횡무진 다니던 카메라의 난폭함도 알았고
영상으로 어떻게 해보겠다는 무대 영상의 무례함도 알았다.
참 색다른 경험과 충격이 끊임없이 튀어나온
차마 믿겨지지 않은 총제적인 무례함의 공연!
기억에 남는 건,
세쌍둥이로 구성된 퓨전국악그룹 IS(Infinite Sound)의 연주와 노래.
가야금, 거문고, 해금의 소리가 오래 남았다.
그리고
공연 마지막 곡인 임태경의 새노래 <혁명>은
장중하고 아름다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태경의 변함없는 연주 레파토리는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특히나 이날 연주는 일정한 흐름과 형식이 없어 산만하기 그지 없었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 다시 연주를 할 수 있을까 한동안 꽤 심각했던 임태경이었는데...
회복되지 않는 목소리로
어떻게든 만회하려고 하는 모습이 안스럽고 민망했다.
여러 가지로 그리고 여러 사람이 상처 받은 공연이었다.
이를 어쩌나...
아.프.다.
Posted by Book끄-Book끄
읽고 끄적 끄적...2010. 6. 17. 06:34
소설 노동자 김탁환과 과학콘서트 정재승이 만나서 책을,
그것도 소설책을 썼단다.
뇌 과학자와 팩션 소설가가 만나 쓴 미래소설.
일단은 귀가 솔깃한 내용 아닌가?
이 두사람의 인연은 KAIST에서 시작된다.
KAIST 바이오 및 뇌공학과 교수인 정재승.
그리고 좀 의외라고 생각될지 모르지만 소설가 김탁환이 KAIST 교수로 오면서
우연한 술자리에서 이 이야기가 시작됐다고 한다.
1990년대 초에 사건이 하나 있었단다.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까???)
서울대공원에서 한 여자가 남자 친구에게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보여달라며
사자 우리에 손수건을 던진 후 가져오라고 했단다.
그런데 이 남자,
사랑에 눈이 멀었는지 어땠는지 모르지만 사자 우리 안을 들어갔단다.
그 최후는.... 뻔하지 않겠는가?
결국 남자는 사자에게 처참하게 죽임을 당함으로써 엽기적인 결말이 백주대낮에 발생하게 된거다.
나중에 이 남자의 시신을 부검했더니 그의 입 속에서 사자털이 잔뜩 나왔다나.
인간의 "생존 본능"이 그 상황에서 사자를 물어뜯게 만들었다는 거다.
그리고 이 세기의 사건은 과학자 정재승의 뇌리에 각인되어 화두가 되었단다.
소설을 써 보고 싶다는 생애 첫 충동을 일으킬만큼...



자신의 생존을 위협하는 순간,
엄청난 분노와 함께 미친 듯이 덤벼대는 인간의 폭력 성향.
이 "생존 본능"을 인공적으로 만들어 낼 수는 없을까?
로봇에게 생존 본능을 코드화해서 자신을 분해하거나 부수려는 존재에게 맞서 분노하게 만드는 일이 가능할까?
소설 <눈먼 시계공>은 그러니까 정재승의 화두에
김탁환의 캐릭터가 만나면서 이야기가 되어 세상에 나온 셈이다.
영화 <블레이드 러너>, <데몰리션맨>을 떠올리게 하는 소설이다.
지방 자치제가 활성화되고 국가보다 지역 내 기업의 경제적 영향력이 증대된 2049년의 세계에서는
국가라는 개념이 사라지고 특별시 체제로 재편하는 게 유행처럼 늘어나게 된다.
인간과 사이보그, 그리고 로봇이 함께 공존하는 세상.
마치 월드컵과 K-1을 연상시키는 로봇 배틀원 경기에 열광하는 사람들.
그리고 의문의 연쇄 살인 사건.
발견되는 시체는 하나 같이 뇌가 사라진 상태다.
피해자의 뇌에 남겨진 기억을 끌어내 범인을 잡았던 비밀 수사대 스티그마팀은 당혹스럽다.
뇌가 깜쪽같이 사라져버렸으니...

 <김탁환과 정재승>

이야기는 로봇 격투 경기와 살인 사건이 함께 맛물리면서 긴박하게 이어진다.
이야기 자체는 아주 흥미롭고 재미있다.
책장을 금방금방 넘기게 만들만큼...
김탁환이야 탁월한 스토리텔러로 유명한 사람이고
정재승 또한 입담 있는 과학자로 여러 편의 베스트셀러를 쓴 작가이기도 한다.
바이오 및 뇌공학자로 실제 소설의 내용과 비슷한 연구를 하고 있는 정재승의 과학적 상상력도 재미있다.
인간의 뇌와 로봇의 완벽한 인터페이스.
예전에는 결코 가능하지 않을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이제는 충분히 가능할거란 쪽으로 변했다.
(딱히 이 책 때문에 그렇게 됐다는 의미는 아니다. 세상은 늘 불가능을 현실화시키는 걸 계속 봐왔으니까...)
Impossilbe! 그건 아무것도 아니라는데...
정말 그렇게 되고 있음을 절감하고 체감한다.
기계와 인간이 몸을 섞는 그런 시대가 온다면,
우리는 어찌됐든 그걸 새로운 진화와 혁명으로 받아들이게 될까?
로봇의 머리에 인간의 머리를 이식하게 된다면
그 존재를 사이보그가 아니라 인간이라고 정의내릴 수 있을까?
입력된 코드에 의해 계산과 통계를 통해 행동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해서 행동하게 된다면...

이 소설에서는 인간의 "분노와 증오"를 격투 로봇에게 이입시킴으로
폭발적인 에너지를 내도록 프로그래밍 시킨다.
일부러 극심한 공포와 자극 속에서 사람을 살해함으로써
인간의 뇌에 저장되어 있는 그 살해 순간의 분노를
엄청난 폭력으로 분출시키는 프로그래밍.
기억은 세포를 바꾸고 세포의 변화가 곧 기억이 된단다.
그러니 기억은 과거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위해 존재한다.
SF적인 상상이라고 치부해버리기엔 세상은 너무 멀리까지 와 있다.
그러한 세계에서 나는 살아갈 수 있을까?
책장을 덮은 뒤끝은 영 찜찜하다.
당신의 전두엽엔 어떤 기억이 저장되어 있는가?
언젠가는 누군가 당신의 분노와 증오의 기억을 노리게 될지도 모른다.
다들 머리를 조심하라!!!!

Posted by Book끄-Book끄
달동네 책거리2010. 2. 20. 05:56
 <이갈리아의 딸들> - 게르드 브란튼베르그


 이갈리아의 딸들


기발하고 재미있는 역발상(?)의  소설도 있다는 걸 아시나요?

오늘 소개할 책이 그런 책 중 한 권입니다.

작가 게르드 브란튼베르그 1941년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출생. 오랫동안 교사 생활을 했다고 하네요. 1970년대 초반부터는 여성해방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오슬로 여성의 집>과 <매맞는 아내들을 위한 쉼터>에서 일해 오고 있다고 합니다.

이 사람이 쓴 또 다른 책들은 <전세계의 동성애자여, 일어나라>, <그래, 이젠 그만>, <성 크로와에게 바치는 노래>, <페리호를 타고> 등이 있답니다(작가의 성향이 조금 이해되시겠죠?) 이 책은 모국어로 출판됐을 때 보다 영어로 번역되어 나왔을 때 오히려 더 큰 반향을 일으켰다고 하네요.

유럽에선 연극으로 장기 공연되기도 했다고 하고요...

<이갈리아의 딸들>

이 책은 성의 역할이 완전히 뒤바뀐 나라에 대한 이야깁니다.

먼저 “이갈리아”라는 단어에 대해서 간단히 설명드릴께요.

이 책에서 나라의 이름으로 나오는 “이갈리아”는 평등주의를 뜻하는 “egalitarian” 단어와 이상국을 뜻하는 “utopia” 두 단어가 합성된 말로 “평등한 유토피아”란 뜻입니다.

좀 느낌이 오시나요? 

이 나라에서는 여성을 움(wom)으로 남성은 맨움(manwom)으로 부르고, 아내는 여전히 “wife”, 남편은 “housebound”라고 부릅니다.

여성들은 자신에게 정자를 제공한 아이 아버지에게 '부성보호'를 지명할 수 있고(쉽게 말하면 남자 가정부라는 뜻이죠 ^^), 맨움들은 부성보호를 받기 위해 다달이 행정관서에 가서 피임약을 먹고 사인을 받아야 합니다. 나는 이 나라가 지정한 여자에게만 정자를 제공하겠다는 뭐 그런 서약 비슷한 거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사회를 이끌어가고 정치를 하고, 경제 주체가 되는 사람들이 wom이고 manwom은 그 여자가 벌어오는 돈으로 가정을 꾸미고, 미용실을 가서 본인 자신을 가꾸고, 자녀를 양육하는 뭐 대략 그런 나라입니다.

여성들은 당당히 윗옷을 벗어 가슴을 자랑스럽게 드러내고 다니고 대신 남성들이 여성처럼 “페호”라는 코르셋 같은 보호기를 착용해야 하는 나라. 댄스파티에서 수줍게 여성의 춤 신청을 받기위해 신경전을 벌이는 나라. 혹 여성에게 선택받지 못하면 어떻게 하나 전전긍긍하는 남자들이 사는 나라...

그런 나라가 바로 “이갈리아‘라는 곳입니다.


이 책은 어떻게 생각하면 코믹한 책이고 어떻게 생각하면 심각하다 못해 공포감마저도 느껴지는 내용입니다.

성의 역할의 기존의 개념과 정확히 정반대인 나라.

남자들이 여성들에게 강간당하고,

여자들에게 구타당한 멍든 얼굴을 진한 화장으로 감추는 남자들이 사는 곳.

정자가 수치의 근원이고 월경은 힘의 원천인 사회.

어찌됐든 내용적인 면에서 이 책은 페미니즘을 이야기할 때 항상 나오는 책이기도 하지만 어쩐지 저는 페미니즘 소설로 치부하기엔 너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작가 스스로도 이 책이 조금은 지나치다고 말하고 있지만, 어쨌든 굉장히 재미있고 신선하고. 동시에 생각거리를 만들어 주는 내용임에는 분명합니다.

여성과 남성이 아닌 “사람”을 생각하게 만드는 책이죠.

갑자기 가수 김건모가 부른 “핑게”라는 가사의 일부가 생각납니다.

“~~~~~입장 바꿔 생각을 해봐~~~~”

인간과 인간을 이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

“역지사지”

이런 입장 바꿔 생각하는 게 이루어지지 않으면 바야흐로 "갈등" 구조가 표면화되는 거죠.

어떤 형태이든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사이엔 갈등이 생기게 되면 그 구조 자체를 파괴하고자 시도하는 움직임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어떤 특정 개인이든, 상황이든요.

이곳에도 그런 사람이 존재하게 됩니다.

잃어버린 자아와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려는 남자, “페트로니우스”가 바로 그 도화선에 해당하는 인물이죠.

그에게 아버지는 멘토의 역할을 합니다.

강간당한 아들에게(아들을 강간한 그 여자는 임신을 하게 되고 페트로니우스에게 부성보호를 명령하죠) 아비는 말합니다.

"그에게서 부성보호를 받으면 안 된다. 페트로니우스! 삼십년 간, 아니면 네가 버틸 수 있는 한, 하루 스물 네 시간 꼬박, 처음부터 끝까지 고달프고 힘든 일이라구. 그리고 만일 세세한 부분까지 아내를 만족시키기 위하여 스물 네 시간 내내 일하지 않는다면, 우리에게 돌아오는 것은 비난뿐이야. 페트로니우스! 만일 내가 너라면, 지금...만일 내 입장이라면...나는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할 거야. 가정과 아이에 대한 꿈은 집어치우고 내 자신을 찾고 싶어...”


드디어 맨움들에 의한  맨움해방주의가 싹뜹니다.

맨움도 움이 가진 것과 똑같은 권리, 권력, 기회를 가져야 하며, 평등을 얻기 위해서는 현재의 상황이 변해야 한다는 정치적 신념. 이것에 근거한 사회운동을 부르짖게 되죠.

이제 그들의 외침이 순탄치 않으리란 건 예상이 되시겠죠?

언제나 힘든 시작엔 필사적인 억압이 있었으니까요. 어느 시대든, 어떤 상황이든, 그리고 누가 어떻게 시작을 했든...


그렇다면 이 책,

결국 여성해방을 꿈꾸는 내용인건가요?

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엄밀히 말하면 양성해방을 말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양성존중라는 표현이 적절할 것 같네요.

여성이기에, 남성이기에 보호받아야 하고 인정받아야 한다는 게 아니라 인간이기에, 사람이기에 하나의 귀중한 객체로 보호받고 인정받아야 한다는 사실.

더 이상 누군가가 누군가의 인생에 얹혀사는 존재가 아닌, 그래서 팔자 고치는 삶을 꿈꾸는 게 아니라 내 삶을 내가 살아가야만 나에 대한 진정한 자존감을 갖게 된다는 걸 말하고 싶었던 모양입니다.(쓰고 보니 참 교훈적이네요....^^)

이 책을 읽고 여자란 무엇인가? 혹은 남자란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게 아니라 <나>란 무엇인가를 생각할 수 있다면 좋겠다는 바램을 해 봅니다.

"혁명"이라는 말...

지금 우리가 꿈꾸고 희망하는 모든 것들이,

어느 순간,

우리에게 <혁명>이 될 수도 있습니다.

Posted by Book끄-Book끄
보고 끄적 끄적...2009. 10. 21. 06:20
오랫만에 대학로에서 연극을 한 편 보다.
여성 연출가 박정희 연출, 극단 풍경의 <마라, 사드>
(원제 "사드씨의 지도하에 샤랑통 병원의 연극반이 공연한 장 폴 박해와 암살")
아르코 소극장의 그 따뜻함...
무대를 중심으로 좌,우로 나누어져 있는 객석
작은 소극장의 비지정석 좌석도 
가끔은 솔솔한 재미로 다가온다.
이미 무대 위에는 배우들이 자리잡고 있다.
좌석이 전부 채워지는 내내 배우들은
마치 그곳에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시켜주듯 움직임조차 고요하다.
왠지 내가 보여지고 있다는 느낌.
괜히 몸이 움츠려든다.



개인적으로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신뢰의 깊이만큼 정당하게 인정하고 믿는 연극배우 남명렬!
그가 서는 무대라면 적어도 어떤 형태로든 배신감은 없다.
<마라, 사드>
20세기에 발표된 가장 주목할 만한 희곡 중 한 편으로 꼽히는 작품.
극작가 "페터 바이스"에게 세계적인 명성을 안겨준 작품이기도 하단다.
팽팽한 대각선의 구도 속에 느껴지는 긴장감.



무대의 배경은 샤랑통 정신 병원.
마르키 드 사드 후작은 실제로 이 샤랑통 정신 병원에 수감된 적이 있었다고 한다.
사드(남명렬)가 직접 쓴 대본을 가지고
병원 환자들은 배우가 되어 연극을 시작한다.
정확히 말하면 마라와 사드. 두 사람의 사상에 대한 논쟁!
프랑스 대혁명의 이론가 장 폴 마라(홍원기)와의 
뒤집히고 뒤집히는 지적이고 황홀한 언어의 전쟁터.
그리고 결국의 행동의 결전장.
행동하지 않는 사상가는 과연 대중의 지지를 얻을 수 있을까?
혹은 인간의 육체로 해방을 꿈꾸는 자는 진정한 해방을 소유할 수 있을까?
논쟁의 결말은
오로지 극을 보고 있는 관객의 선택에 달려있다.



입장시 관객들에게 나눠준 카드 한장!
한쪽은 사드의 색 검정,
반대쪽은 마라의 색 빨강.
오늘의 관객은 마라의 결말을 선택했다.
스크린에 나타나는 영상.
6.8 혁명과 베트남전쟁, 광주항쟁, 촛불집회... 
우리나라의 근, 현대사와의 절묘한 오버랩.
의외의 마무리. 그러나 신선함이 느껴질만큼 강렬하다.
문득, 사드의 결말은 어땠을까 궁금해진다.



연극은 무척 참신하고 새롭다.
정통 연극에 뮤지컬적인 요소, 스크린을 이용한 영화적 요소.
그리고 실제 밴드들이 연주하는 음악적 요소까지 모두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결코 산만하거나 엉성하다는 느낌은 없다.
깊이와 선택에 대한 통찰 또한 잊지 않게 한다.
순간순간 관객을 몰입하게 만드는 신비감.
썰물과 밀물이 밀려왔다 밀려가는 느낌.
(분명 어떤 흐름과 호흡이 있디. 주술적이라는 생각이 들 만큼...)
같은 공간에서 느끼는 타인과의 일체감.
신비로운 접신(接神)의 황홀감.



배우 남명렬...
관객에게 정확한 감정을 전달하는 그,
보고 있는 사람을 마지막 하나까지도 완벽에 가깝게 집중시킨다.
그가 말을 하면 듣고 싶지 않아도 전부 들을 수 밖에 없다.
정확한 딕션과 호흡 그리고 여백.
커피 한 잔을 앞에 두고 선한 웃음을 웃는 그의 모습을 기억하는 나는
도무지 무대 위의 그의 모습이 신비롭기만 하다.
그와는 전혀 다른 인물인데 그는 그 인물을 너무나 그답게 보여준다.
좀 걱정스러웠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사드"라는 성도착자의 모습을 보게 되는 건 아닌지...
그런데 역시 기우에 불과했다.
상당히 지적이고 논리적이인 사드.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렬하고 파괴적이기까지 한 모습.
인간에 대한 "충동질"
코르테를 안고 마라를 성토하는 번뜩이던 사드의 눈빛,
그 속엔 누구라도 거역못할 "광기"가 버티고 서 있었다.



"마라" 역의 홍원기.
배우로서의 이 분의 무대는 처음이라 낯설다.
신춘문예 당선, 연극배우이자 연출가이며
꽤 좋은 작품을 쓴 극작가이기도 한 홍원기!
음... 뭐랄까...
아마도 개인적인 생각이긴 하지만
사드 남명렬과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느낌.
상당히 비현실적으로 보여지게 연기한다는 생각을 그것도 너무 자주 했다.
의도적이었던 건지는 잘 모르겠다.
어쩌면 조잡한 내 이해력의 한계 때문인지도...



관객이 "마라"가 아닌
"사드"를 선택하게 되면,
극중 대본을 쓴 사드의 의도대로 마라의 죽음과 함께
환자들의 난동, 경호원들의 폭력적인 진압, 사드의 승리의 미소로 막이 내려진다고 한다.
"사드의 미소"
내가 보지 못한 그 결말,
사드의 미소 속에 담긴 언어가 궁금하다.




난 당신이 배반한 혁명을 믿을 뿐이요. 혁명은 계속돼야 해. 우리 위에 군림하던 돼지 같은 놈들을 제거하고 몰아냈지만, 그놈들의 자리를 차지한 혁명 동지들은 과거의 부귀영화에 대한 유혹을 느끼고 있어. 이제 모든 건 명백해졌어. 혁명에서 득을 본 사람은 부르주아들뿐이고 민중들은 여전히 고통만 당할 뿐이야 
                                         - 마라의 변

저렇게 떼를 지어 소란을 피우는 민중을 난 경멸한다. 난 모든 선한 의도를 경멸한다. 그런 건 막다른 골목에 몰리면 사라질 뿐이다. 난 모든 희생을 경멸한다. 난 나 자신을 믿을 뿐이다. 
                                         - 사드의 변


Posted by Book끄-Book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