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끄적 끄적...2011. 6. 14. 05:47
누군가는 그랬다.
공선옥의 소설속 인물들이 너무 구질구질하고 우울하다고.
그래서 그 기분이 꼭 자신한테까지 퍼지는 것 같아서 읽다가 그만두게 된다고.
그렇다. 공선옥의 인물들은 정확히 이런 모습이다.
그런데 나는 그 인물들을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 없다.
내 살 같고, 내 뼈 같아 마디마디가 저리고 손톱끝까지 아파온다.
한참을 붙들고 울고 싶은 심정...
그러나 그 인물들은 지친 울음 끝에서 항상 새롭게 시작할 힘을 보여준다.
절망 속에서 희망이 피어날 수 있다는 걸 난 그녀가 만들어낸 인물을 통해 절실하게 깨닫는다.
그녀는 나에겐 하나의 현실이며 동시에 극적인 다큐다.
1년 사이에 자폐아 아들과 남편을 모두 잃은 여자!
이야기 속에서도 단 한번도 본명을 내비치지 않는 여자!
막걸리와 빵으로 하루하루를 버티는 여자!
아이와 남편이 좋아했던 작은 정원엔 이제 이웃 건물에서 버린 쓰레기로 가득차고
그 집에서 살아있지만 철저히 죽어있는 여자!
이 여자가 나는 안스러워 자꾸 내 가슴을 쓸어내리고 또 쓸어내렸다.
어쩌면 좋을까... 이 여자...
그리고 이 여자때문에 아픈 나는 또 어쩌면 좋을까...
...... 사는 동안은 눈물 흐르는 소리를 견디며 살아야 할 것이었다.
눈물 흐르는 소리를 듣고 사는 것은 삶이 아니라 일종의 형벌일 터였다.
그 형벌을 달게 받기로 했다. 달게 받기로 한 때부터 고요해졌다 ......

그녀의 고요는 죽음보다 더 적막하다.
죽음보다 깊고 죽음보다 더 차다.



영란과 이정섭!
체기같은 마른 울음을 몸 안에 담고
길고 지루한 장마같은 생을 살아가는 사람.
매혹은 힘겨움을 이기지 못한다는데
나는 이들의 힘겨운 삶에 어이없이 매혹당하고 말았다.
때로 사랑이 사람을 살리기도 하지만, 환별 또한 그럴 수 있다는 사실 앞에
나 역시도 전율했다.
누구를 향한 환멸이건, 환멸이 사람을 살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을...
공선옥이 말한다.
...... 이 이야기는, 한 슬픔의 사람이 어떻게 슬픔을 딛고 다시 살아갈 힘을 얻게 되는가에 관한 것이다.
누구나의 생애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을 겪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숙명이다. 아프더라도 또한 살아가야만 한다. 그러하니, 산다는 것은 고해(苦海), 고통의 바다를 건너가는 것이라는 말은 맞는 말이다.
나는 '지금 슬픈 사람'들이 자신의 슬픔을 내치지 않기를 바란다. 외면하지 말기를 바란다. 슬픔음 방치하지 않기를 바란다. 이제는 슬픔을 돌볼 시간이다. 내 글의 독자들이 슬픔을 돌보는 동안 더 깊고 더 따스하고 더 고운 마음의 눈을 얻게 된다면, 그리하여 더욱 아름답고 더욱 굳건한 삶을 살아가게 된다면, '슬픔의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쓴 사람으로서, 많이 기쁠 것이다 ......
어쩌면 이 이야기가 상처받은 두 남녀의 새로운 시작이라는 식상한 구조였다면
나는 가차없이 외면했을 것이다.
변하는 건 없다.
본명을 드러내지 않는 여자는 "영란"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허름한 영란집에서 간재미회를 만들어낼 것이다.
그리고 그녀에게 사랑은 다시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 떠나버린 사랑이 남긴 상처는 남은 사람의 일생을 관통한다.
그러니, 사랑한다면 떠나지 않아야 한다. 떠날 거면 사랑하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 한다 ......

생명은 태동할 때도 눈물겹고
살아갈 때도 눈물겹고
소멸할 때도 눈물겹다단.
그래서 세상의 모든 생명은 눈물로 이루어져 있는지도 모른단다.
<영란>을 읽으면서 나는 끝없이 "영란"을 불러 세웠고
그렇게 불러 세운 "영란"은 나를 위로한다.
내가 불러서 올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이 세상에서 내가 부르면 달려올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대답을 알고 싶다고 직접 불러봐야 한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그러나 차마 그러지 못하는 건,
아무도 달려오지 않을까봐서다.
차디찬 한기만이 우뚝 서있을까봐 두려워서다.
내 속으로 키운 한기를 견뎌낼 수 없을 것 같아서다.
공선옥은 어떻게 견뎠을까?
어떻게 견디면서 울음같은 글들을 내내 썼을까?
그녀는 언제나 내게 서러운 눈물을 심는다.

깊게 깊게 울고 싶다.
그러나 또 깊게 깊게 참는다.
울어도 편치않을 울음이라면
울지 않는 게 나을테니까...
Posted by Book끄-Book끄
읽고 끄적 끄적...2011. 3. 10. 06:19
공선옥의 글을 읽으면 소름이 오싹오싹 끼친다.
그녀의 글들은 아름답고 절절하고 측은하다.
뭔가 내 것이 있다면 그대로 퍼주고 싶은 인물들을 읽으며
나는 여러번 작고 조용히
그러나 결정적으로 위로받았다.
그녀의 글들은 때론 내겐 몸에 좋은 약이었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소설 공모에 당선하고 받은 첫 상금으로
그녀는 조그만 밥상을 샀노라 말했다.
그때까지 움막같은 샛집에서 그녀는 아이들과 함께 맨 바닥에 밥과 찬을 부려놓고 밥을 먹었노라 말했다.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울컥했다.
그랬구나...
그래서 그녀의 글이 이렇게 뜨거운 김이 펄펄 나는 밥처럼
사생결단으로 치열하고 처절하고 서글펐구나.
폭력보다 더 파괴적인 것이 내 속에 정통으로 어퍼컷을 날린다.
아파라... 아파라...
그런데 나는 그 뭇매를 앞으로더 한참을 더 받아내고 싶다.
그것도 철저히 일방적으로...



꽃 진 자리
영희는 언제 우는가
도넛과 토마토
아무도 모르는 가을
명랑한 밤길
빗속에서
언덕 너머 눈구름
비오는 달밤
79년의 아이
지독한 우정
폐경 전야
별이 총총한 언덕



전남 곡성 출생, 전남대 국문과 졸업.
어쩌면 그래서인지도 모른다.
팔이 안으로 굽는다고...
전남 곡성군 삼기면 의암 110번지!
살아본 적은 없지만 주민등록에 적혀있는 내 본적지.
그래서 그녀의 글들은 구절구절이 대를 이어 연결된 핏줄과 뼈마디가 내지르는 외침같이 느껴졌는지도.
<오지리에 두고 온 서른살>, <내가 가장 예뼜을 때>
공선옥의 소설 제목들은 그 자체만으로도 문득 서럽고 고되다.
그리고 <명랑한 밤길>에 담겨있는 12편의 단편들을 읽으면서도
나는 꺼이꺼이 속울음을 울며 가슴을 쳤다.
윤자, 경자, 문희, 인자, 연희......
어쩌자고 인물들은 이름조차도 서럽게 촌스럽고 보잘 것 없는지...
심지어 이름조차 갖지 못한 아내와 남편들을 읽으면서
나는 이 희망없는 사람들이,
구석을 찾아들어가는 게 습관인 사람들이 마치 내 몸의 일부인냥 아팠다.
재혼가정의 아비의 아들 쉽쇅끼와 어미의 아들 괴쇅끼의 엉겨붙음은
차라리 인간적이고 정직해서 생의 활기마저 느껴졌다.
결손가정, 가난, 물난리, 치매, 우울증...
눅눅하다 못해 물에 온 몸이 담겨 축축 가라앉는 이야기.
그럼에도 그 속에 어김없이 생의 떳떳함과 결연함이 있다.
어쩌면 그건 생의 변방에서 함께 살아온 사람들만이 공유할 수 있는 느낌인지도 모르겠다.
치열하고 구질구질하기 한 이야기는
그 궁색함과 초라함으로 오히려 장관을 이룬다.
12편의 단편들을 다 읽고 나서
나는 그만 울고 싶어졌다.
곡을 하듯 서럽게 서럽게 울음을 토해내고 싶었다.

...... 그려, 울어라, 울어, 하먼, 밥 묵고 살라면 울어야제. 울어야 밥맛 나고 밥 묵어야 심이 나제. 별것이나 있간디. 암것도 없어. 태나서 우는 놈이 사는 벱이여. 울어야 산 목심이여. 그저 내 울음이 내 묵심줄이여. 뜨건 눈물 퐁퐁 쏟아가매, 팥죽 같은 땀 펄펄 흘려가매. 아이갸, 죽을 목심은 울지도 못헌단게. 나는 울지도 못혀. 심이 없어 울지도 못혀. 젊어 울제 늙어 못 울어. 울지도 못허는 나는 갈랑게 너거들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석달 열흘간을 션허거 울어부러라 ......

실껏 울고나면,
이 말 때문에 또 위로가 되지 않을까?
진심으로 나는 산 목심이고 싶어,
죽을 것처럼 석달 열흘간을 울고 싶다.
손바닥으로 땅을 치고 온 몸으로 발버둥치면서...
또 모르지,
몸을 산발로 풀어헤치고 억척스럽게 울고 나면
살아낼 새로운 힘이
오도독 오도독 독하게 생겨날지도...
Posted by Book끄-Book끄
달동네 책거리2009. 9. 8. 05:28
 <내가 가장 예뻤을 때> - 공선옥 

 

내가 가장 예뻤을 때
 

작가 공선옥!

얼마전 그녀가 올해 7월에 제 24회 만해문학상 수상자로 결정됐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소설집 <나는 죽지 않겠다>, <명랑한 밤길>이 그 수장작이라고 하네요. 제가 그녀의 책으로 처음 읽었던 건 <오지리에 두고 온 서른 살>이라는 소설이었습니다. 두 여자의 삶이 어찌나 가슴 짠하던지 그만 덜컥 화가 나기도 했죠. 도대체 왜 나는 그녀의 글을 전적으로 이해하는가? 그리고 전적으로 의지하는가? 어느 날은 속이 상하기까지 했습니다.

1964년 전라남도 곡성 출생....

그녀의 말투가, 하다못해 그녀의 글 속에 나오는 투박한 사투리나 함지박만하게 쏟아내는 푸짐한 욕설들이 그토록 낯설지 않았던 건 “곡성”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네요. “전남 곡성군 삼기면....”으로 시작되는 저의 본적지. 그래서 그녀가 들려주는 이야기 속의 대사나 문체들 그리고 느낌들에서 근원적인 포근함과 따뜻함, 그리고 도망가고 싶은 욕구마저도 느끼게 된 거라는 걸 이제는 이해합니다.

“본적지”라는 이름의 고향!

어쩌면 누군가는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단지 서류 속에만 존재하는 아버지의 땅일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언젠가는 한번쯤 돌아보게 되는 그런 곳, 실질적이든 아니면 마음 안에서든 찾게 되는 부모의 땅, 그리고 내 생명의 시작이었던 땅.

<내가 가장 예뻤을 때> 이 책을 읽으면서 실제로 살아보지 않은 제 본적지에 대한 희미한 동경에 많이 당황스러웠습니다. 그렇다면 이 책 속에 도대체 뭐가 들어 있었던 걸까요?


이미 위로 딸을 셋이나 둔 집에 네 번째 딸이 태어납니다. 부아가 난 할아버지는 이름을 지어달라는 아들에 말에 한마디 합니다.

"니무랄 것! 암꺼나 허라고 혀!”

그래서 네 번째 딸의 이름은 “암꺼나 혀”의 “해금”이 되어 버렸습니다.

순금, 정금, 영금, 해금 그리고 마지막 5번째 딸 영미(“영미”라는 이름은 내리 다섯의 딸을 낳은 어미가 “금”자에 대해 갖는 마지막 반항이자 일종의 시위였던건 아닐지...)

딸 다섯의 넷째 딸이라니, 그 존재성마저도 너무나 희미한 “마해금” 그녀가 이 책의 서술자입니다. 그녀는 이제 스무 살 무렵을 살고 있는, 그리고 광주라는 대도시가 스무 살인 그녀 삶의 근원지죠.

처음 “광주”라는 지명을 봤을 때, 조심스러웠습니다. 그 때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건가? 그렇다면 어쩐지 자신이 없을 것 같아서요.... 그러나 다행히 이 책은 그런 제 두려움을 살짝 피해갑니다. 그렇다고 아예 관계가 없는 건 아닙니다. 해금은 광주민주화항쟁 때 공중에서 날아오는 유탄에 친구 경애를 잃습니다. 그리고 그 사건은 그들 친구들에게 분명 어떤 형태로든 변화를 가져오죠.

이제부터 우리는 5명의 여자들과 4명의 남자들. 아직 스무 살인 그들의 지나온 시간들을 정해진 순서 없이 마구잡이로 만나야 합니다.

경애의 갑작스런 죽음에 "세상 사람들은 왜 아무렇지 않지?“라고 반문하며 방황하던 친구 수경은 끝내 저수지에 뛰어 듭니다.

느닷없이 남편이 데리고 들어온 두 번째 마누라를 피해 딸의 자취방으로 찾아든 할머니같은 승희 모친은 추위에 떨며 찾아온 딸의 친구 해금에게 따뜻한 밥을 지어줍니다.

꾸역꾸역 울음과 함께 밥을 넘기는 해금에게 그 어미는 말합니다.

"악아, 우지 마라! 사는 것은 죄가 아닌 게로 우지를 마라!“

그렇게 등을 다독여 주던 승희 어머니는 그 밤, 돌아오지 않는 딸을 내내 기다리며 차디찬 딸의 자취방에서 뇌출혈로 사망을 하고, 그 딸은 그 사실에 충격을 받아 친구들 곁을 떠나 헤매다 배부른 모습으로 어느 날 그들 앞에 다시 나타납니다.

승희에게 마음을 주고 있던 누군가는 방황으로 시간을 보내고, 그리고 또 다른 누군가는 승희와 승희가 낳은 아들 승춘과 함께 따뜻하게 살고픈 꿈을 키워내고 있습니다.

잘 다니던 대학을 그만 둔 친구 정신은 노동자가 되어 민중 해방의 길로 들어서고, 온 동네 자랑꺼리였던 서울대생 승규 또한 학생운동에 점점 더 깊게 참여하게 됩니다.

누군가 생각합니다.

“꼭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 같아...”

그리고 도 누군가는 말합니다.

“아무리 죽을 맛이라지만 죽는 것 보단 낫잖아”


돈이 없다며 월급을 밀려온 사장은 젊은 여자를 끼고 관광호텔을 드나들고, 제 노동의 가치가 무시되고 짓밟히는 세상을 실제로 겪은 만영은 사장의 기름진 얼굴 위로 뜨겁고 기름진 고기 석쇠를 던져버립니다. 와이셔츠 공장에 취직을 한 해금은 상대보다 힘이 세다고, 더 많이 배웠다고, 더 많이 가졌다고, 더 우월하다고 믿는 자들이 부리는 오만과 횡포와 모욕과 폭력과 무례함을 이제 조금씩 경험하게 됩니다.

해금은 언제가 친구 정신이 한 말을 떠올립니다.

“그것들과 맞서기 위해선 우선은 그 오만과 횡포와 모욕과 폭력과 무례함을 견뎌내야 한다고. 모든 오만한 자들이, 모든 무뢰배들이 스스로 부끄러워할 때까지, 견디고 견뎌서, 그 견디는 힘으로 우리가 아름다워지자고. 왜냐하면 모든 추함은 모든 아름다움 앞에선 결국 무릎을 꿇게 되어 있기 때문에.....  오늘, 저 무뢰배의 오만이 횡행할 수 있는 이 야만의 구조, 이 동물적 상황을 나는 견뎌야만 한다고. 저항하기 위해 견딜 것, 아름다워지기 위해 지금은 견뎌야만 한다고....”

구로공단 여공들의 시위.

해금은 자신이 인간이기 위하여. 그리하여 그 시간을 조금이라도 인간의 시간 쪽으로 돌려놓기 위하여 운동장 한가운데로 달려 나갑니다.

유리를 밟아 피투성이에 퉁퉁 부은 발이 된 해금, 얼굴에 피멍이 든 정신은 승규가 붙잡혀 심한 고문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그리고 그 승규는 부모에게조차 알리지 못한 체 그대로 군대로 끌려가게 되죠.

보름이면 다가올 아들의 첫휴가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승규 모친에게 전해지는 소식.

아들이 군대에서 머리에 총을 쏘고 자살했다는 청천벽력같은 사실.

어미는 내 자식이 그럴리라 없다며 통곡하고 또 통곡합니다.

그 시대, 모든 어미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 통곡은 아마도 그 어미의 모든 일생동안 결코 그치지 않고 이어지리라는 걸 한자리에 모인 친구들 모두 가슴으로 느낍니다.

그들은 생각합니다.

우리는 단지 혹독한 겨울을 견디어내고 있을 뿐이라고.

그들이 가장 예뻤던 때, 스무 살의 겨울 말입니다.


인생에는 누구에게나 그런 순간이 온다고 합니다.

“이전”과 “이후‘가 확연히 구분되는 순간 말이죠. 그런 순간은, 예기치 않게 혹은 법칙처럼 결국은 누구에게나 오고야 만다고 합니다.

이 책, <내가 가장 예뻤을 때>가 바로 그 “이전”과 “이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불과 얼만 전에 우리는 “이전”과 “이후”가 구분되는 순간을 지나왔습니다. 어쩌면 지금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 모두는 어느 정도 “광주”라는 지명에 그리고 그 때 그곳을 살아내고 지켜왔던 사람들에게 빚을 지고 있는 지도 모릅니다.

그들이 살아낸 “가장 예뻤던 때”에 말이죠.

빚을 진 자에겐 언제나 “의무”가 남습니다.

언젠가 그 빚을 제 힘으로 갚아야 하다는 실질적인 의무 이외에도 꼭 그렇게 해야만 한다는 도덕적인 의무까지도요.

당신이 가장 예뻤던 때? 그때를 당신은 기억하고 있습니까?

그때를 지나왔다면, 혹은 아직 지나오지 않았다면 기억하십시오.

그 순간을 어떻게 살아냈느냐에 따라 당신의 빚이 조금은 감면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요.

모른 척 하고 싶다면 당신은 아마도 평생을 도덕적인 빚쟁이로 살아내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치열하게, 당당하게, 그리고 절실하게

견디라고, 지키라고, 이겨내라고... 그리고 살아내라고

이 책 <내가 가장 예뻤던 때>가 말해주네요.

어쩌면 이 책은,

그러니까 “가장 예뻤던 때”를 살아온 그들이 내게 남겨준 화두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내가 가장 예뻤던 때?”
내게는 그때가 과연 언제였을까요?


* 작가 공선옥의 이력이 참 눈물겹네요.
작가가 되기 전 그녀의 직업은 한달 동안 밤낮없이 일을 해야 손에 19만원을 쥘 수 있는 미싱사였다고 합니다. 우연히 동료가 응모해준 소설이 당선돼서 통장에 입금된 60만원의 거금을 보고 그녀는 무척 놀랐다고 하네요.

먼저, 40만원으로 방을 얻고 그 다음으로 밥상을 샀다는 그녀. 늘 밥상 없이 방바닥에 차려놓고 먹던 밥이 내내 서러웠던 거죠. 뜨거운 밥과 찬을 밥상 위에 차려놓고 아이들을 앉혀 놓고 그녀는 그제서야 말했다고 합니다.

“이제야 살 길이 생겼다”고.....

말하자면, 그녀가 쓴 글들은 전부 생존과 결부된 처절한 사투였던 셈입니다.

밥상 위, 한 술 밥의 의미가 문득 처연하게 느껴집니다...


Posted by Book끄-Book끄
읽고 끄적 끄적...2009. 8. 29. 14:11
성장소설...
그랬던 것 같다.
여자의 성장소설보다 훨씬 더 많이 나왔던 남자들의 성장소설
여기서 굳이 성을 논하는 그런 비상식을 말하려는 게 아니라
오랫만에 만나는 여자 시선의 성장소설이 반가웠다.



완전히 잊고 있었던 그 때
내게도 역시나 있었을
"내가 가장 예뻤을 때"
울컨 제목에서 그리움이 밀려온다.



스무살 무렵의 나도 그랬던가?
민주화 항쟁의 도시 광주,
그곳의 스무 살 인생 10며 명,
그들 각자의 길이 나와 닮아있어 어느날은 나를 보는 것 같아 서러웠다.



점점 잊혀져가는 우라나라의 현대사를
조목조목 잊혀진 기억을 들추듯 이야기하는 해금.
과연 우리는 얼마까지 이 기록들을 기억할 수 있게 될까?
어쩌면 이렇게
직접적이고 치열하지 않게
은근히 그러나 집요하게 파고드는 방법이
더 기억의 유효기간을 연장시켜 주지 않을까?



묵묵히 앉아
막 지은 고슬고슬한 밥을
반찬 없이 찬 물에 말아 한그릇 먹은 느낌.
누군가 내 등을 쓸어내린다.
"그리 급히 먹으면 체하는 법인디....."

투박한 그 손길이 그리웠나?
꾸역꾸역 삼킨 울음이 고개든다.
Posted by Book끄-Book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