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끄적 끄적...2010. 11. 9. 06:26
아자르 - 가리 사건
1974년 에밀 아자르라는 무명작가가 자신의 첫 소설 <그로칼랭>을 출판사에 보냈다.
그리고 메르퀴르 드 프랑스 출판사에서 이 책을 출간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편집자들은 작가에게 난해한 마지막 장을 잘라낼 것을 요구했고.
소설가는 이를 받아들여 책을 출간했다.
소설은 대성공을 거뒀다.
이게 바로 프랑스 문단을 뒤흔든 아자르-가리 사건의 시작이다.
당시에 비밀은 완벽히 지켜졌다.
에밀 아자르라는 신인 작가는 브라질에 사는 것으로 되어 있었고,
원고와 관련된 모든 사항들은 피에르 미쇼라는 중개자에 의해 전달됐다.
1975년 9월 에밀 아자르는 두번째 소설 <자기 앞의 생>을 세상에 내놓는다.
이번에는 더욱 완벽한 조치를 취하기 위해 아자르에게 실체를 마련하기로 했다.
자신의 오촌 조카 폴 파블로비치를 에밀 아자르로 내세웠다.
가짜 이력도 꼼꼼히 준비했다.

1956년 로맹 가리는 자신의 본명으로 쓴 <하늘의 뿌리>로 공쿠르 상을 수상했다.
1975년 또 다른 이름 에밀 아자르로 쓴 소설 <자기 앞의 생>도 공쿠르 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1980년 12월 2일,
로맹가리는 자신이 바로 "에밀 아자르"라는 유서를 남기고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이로써 로맹 가리는 한 작가에게 두 번 주지 않는다는 공쿠르 상을 중복 수상하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남기다.
로맹 가리는 나중에 <에밀 아자르의 삶과 죽음>에서 말했다.
"내가 얼마나 통쾌했을지 상상해보시라" 라고... 
로맹 가리!
그는 프랑스 문단에 통쾌한 한방을 날렸다.
그리고 동시에 문학적으로도 전무후무한 일을 남겼다.



로맹 가리는 에밀 아자르란 이름으로 4권의 책을 출간했다.
<그로칼랭>, <자기 앞의 생>, <가면의 생>, <솔로몬 왕의 불안>
아자르의 작품이 인기를 얻으면서 그의 실체에 대해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프랑스 시민들은 "아자르어(語)"라는 별명까지 만들 정도로 그의 독특한 문체에 열광했다.
아자르어는 매우 독창적이면서도 '부적절함'에 기반을 두고 있단다. 
코믹하면서도 동시에 불안정한 언어.
로맹 가리는 왜 에밀 아자르라는 제 3의 인물을 만들었을까?
아마도 그는 "로맹 가리"라는 오래된 진부함에서 탈피하고 싶었으리라.
로맹 가리라는 작가적인 한계에 대해 또 다른 탈출구를 만들고 싶었는지도...
소설은 다른 것, 다른 세계의 창조이며 자기에서 벗어나 다른 삶을 사는 출구가 될 수 있기에...
한 사람에게 주어진 두 개의 천재성!
신은 가끔은 이렇게 불공평할 때가 있다.



에밀 아자르란 이름으로 쓰여진 첫번째 소설 <그로칼랭>
이야기 자체는 상당히 그로테스크하다.
파리에 사는 서른일곱살 독신남 미셸 쿠쟁.
그는 아프리카에서 온 2m 20 cm의 거대한 비단뱀을 자신의 반려동물로 선택했다.
그 뱀에게 심지어 열렬한 포옹이라는 뜻의 "그로칼랭"이란 이름까지 지어줬다.
"비단뱀은 천성적으로 붙임성이 좋은걸요, 착착 감기니까요."
쿠쟁의 한 마디에 그야말로 나는 팡 터졌다.
비단뱀은 탈피하지만 항상 다시 시작합니다. 그렇게 프로그래밍이 되어 있어요. 새로 거듭나지만 조금 더 새로워질 뿐 똑같은 상태로 되돌아옵니다.
그래서 로맹 가리에게도 에밀 아자르가 필요했던건지도 모르겠다.
책은 두 개의 결말을 동시에 수록하고 있다.
출판됐을 당시에 편집자가 삭제를 요구한 대로 삭제된 결말과
그리고 원래 의도였던 결말, 네 장의 추가된 일명 그로칼랭의 생태학적인 결말.
두 결말의 차이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쿠쟁에게도 로맹 가리에게도 더 이상 그로칼랭은 필요하지 않다.
완전히 그 자신의 껍질에 만족해버렸기 때문에...
쿠쟁은 스스로 비단뱀이 되어 세상을 기어다니기로 작정한 것 처럼 보인다.
불편하게 기묘하며 어느 면에서는 충격적이기까지 한 결말들.
많은 사람들이 자기 껍질 속에서도 불편해하는 것은 그 껍질이 자기 것이 아니기 때문이란다.
이 소설의 두 결말이 다 불편한 건 그래서이리라.

나는 이리저리 열망하는 상태, 잠복 상태를 겪고 있다. 누군들 그렇지 않겠는가. 그것은 불안, 식은땀, 출산 전 구토, 파격적인 외침으로 표출된다. 나는 정체를 드러내지 않기 위해, 불안을 조장하지 않기 위해. 예의 바르고 품위 있게 지내기 위해 식품을 먹는다. 게다가 사람들은 고용과 부끄러움 없이 유익한 삶을 위해 모두가 훌륭한 모습으로 가장할 수 있도록 인공 팔다리를 제작한다. 때로는 미래에 받아들여질 날을 대비해 한밤중에 얼어나 척추를 유연하게 하는 체조를 한다.

철학적이면서 동시에 정치적이다.
결코 재미있거나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은 아니다.
제대로 읽는다면,
소설 속에 은밀하게 깔려있는 조롱과 저항을 읽어내는 재미도 특별할 것이다.
(물론 내가 그 재미를 다 느꼈다는 건 아니다. 맛을 좀 봤다고 할까?)
정말 2미터가 넘는 비단뱀같은 소설이다.
그냥 보고만 있을 때는 혐오감이 일어 피하고 싶지만
일단 착착 감기는 뱀의 똬리 속에 들어가 있으면 속수무책이 될 수밖에 없는 그런 이야기.
"선택적 친화력"
로맹 가리의 그로칼랭을 읽으면서 이 단어에 절감하는 중이다.

...... 선택적 친화력. 헛되이 모색한 끝에 감정이 끌리는 대로 선택하는 거야. 사전에도 나오지만 사전은 장래를 위해 있는 거니까 믿으면 안 돼. 확실히 친화력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어. 나는 그게 무슨 뜻인지 전혀 모르니까. 뭔가 남다른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나는 뜻을 모르는 표현을 자주 신중히 사용해. 적어도 거기에는 희망이 있으니까. 이해를 못하면 가능성이 있는 거야. 그게 내 인생관이야. 나는 항상 주위에서 모르는 표현을 찾지. 그러면 적어도 그게 다른 무엇을 뜻한다고 생각할 수 있으니까 ......

나는 또 다시 충격을 받았다.
로맹 가리에게도.
에밀 아자르에게도.
그리고 두 인물이자 동시에 한 사람었던 그가 쓴 소설들에도...
확실히 신은 불공평했다...
Posted by Book끄-Book끄
보고 끄적 끄적...2010. 5. 24. 05:55

기간 : 2010.05.19 ~ 2010.05.23
장소 : 대학로 예술극장 소극장
극본 : 지경화
연출 : 채승훈
극단 : 창파
출연 : 남명렬, 김호정, 민경진, 이명호



제 31회 2010 서울연극제 참가작 8편 중에 
피날레을 장식하는(?) 작품이었던 연극 <옥수수밭에 누워있는 연인>
극본과 연출자는 낯설었지만
든든한 출연진만으로도 "must see" 목록에 포함시켰던 작품이다.
그런데 연극을 보고 난 후의 이 복잡하고 심란하고 불편한 감정들을 어떻게 말해야 할까?
공연장을 나서면서 "이제 살았구나..." 하는 안도감에
저절로 숨이 깊어진다.
참 막막하고 어려운 작품이구나...
그래도 정말 다행스러운 것은,
공연장에서 이해하지 못하고 앉아 있었던 찌질이가
결코 나 혼자만은 아니었다는 사실이 아주 큰 위로가 된다.




안개가 짙게 깔린 듯 운명적이며, 미스터리 하며, 원초적이며,
잔혹하며, 그로테스크하다!!

현실보다 잔혹한 환상, 환상보다 짜릿한 상상...

연극의 메인 헤드라잇은 이렇게 거하고 완강했다.
뒷북이긴 했지만 뒤늦게 시놉시스를 찾아봤다.
(시놉시스... 대략 참 난감하게 줄거리를 전해준다
 이것은 말을 한 것도, 말을 안 한 것도 아니여~~)

<시놉시스>
시와 도시의 경계에 선 어느 허름한 집. 여명이 어슴푸레한 새벽 그 집엔 이선(김호정)과 한보(남명렬)가 있다. 그들은 무언가로부터 도망친 듯 불안하고 초조하다. 지금 그들은 일종의 모의를 하고 있다. 이선의 아버지(한영:남명렬)로부터 거액의 돈을 타내기 위한 모략. 과연 그들은 아침을 맞아 그들의 계산대로 모든 일을 처리할 수 있을까 그들은 걱정된다. 현실의 고통과 존재하지 않는 이상이 억울하다. 마치 거인의 걸음과도 같은 파열음이 들리고 한보는 이선을 집에 남겨둔 채 밖으로 뛰쳐나간다. 그리고 얼마 뒤 낯선 부자(父子)가 집에 들어선다. 이들 부자 역시 평범한 일상의 인물들과는 거리가 멀다. 마치 마음과 육체의 고통들이 당장의 그것들을 넘어 형이상학적인 쾌락이 된 듯하다. 그리고 아버지(민경진)는 죽는다. 이선과 아들(이명호)만 남았다. 그들은 다르지만 또 닮기도 하다. 그들은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들을 이야기한다. 그때 한영이 찾아오고 한영은 총을 쏴 아들을 맞힌다. 마치 사냥꾼의 행동과도 같이. 그 사냥꾼은 바로 이선의 아버지다. 이선과 한영은 그러나 너무나 먼 거리에 있어 볼 수 없는 것처럼 서로에게 외롭다. 오늘로 인생의 마지막을 장식하려는 듯 집에 남은 모든 사람들은 자신이 가질 수 있는 가장 비극적 통로로 자신을 몰아넣기 시작한다.



처음에 나는 맨발로 등장하는 이선(김호정)과 아들(이명호)은
이미 죽은 사람들, 즉 "귀신들"이라고 생각했다.
한보(남명렬)가 느끼는 추위와 두려움을 이선은 전혀 느끼지 않았고
오히려  어느 면에서는 편안해 보이고 심지어는 그 상황을 즐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것은 모든 상황를 스스로 만들어낸 창조자가 
자신의 뜻데로 모든 게 이루어지는 걸 지켜보며 즐거워하는 묘한 관음의 시선같아 보였다.
(핀셋에 꽃혀있는 아직 살아있는 나비 표본을 바라보는 수집가의 섬뜩함이랄까?)
창백한 얼굴에 베낭을 메고 등장하는 아들은,
늙은 아버지를 졸졸 따라다니며
끊임없이 투정과 떼를 쓰는 비정상적으로 유아적인 인물이다.
불안한 시선과 페티즘을 떠올리게 하는 베낭에 가득한 여자 신발들.
그러니까  여자의 아버지 한영(남명렬)과 남자의 아버지(민경진)은
이 두 귀신들에 의해 상징적으로 죽은 존재들이며
이미 죽은  두 사람의 환상 속에만 살아있는 인물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결국은 그 환상 속 인물들과의 관계마저도
끝장을 내고 끊어버리게 되는 그런...



지금 가만히 되집어 생각해도 극의 내용은 집요하게 어렵고 표현은 찬란하게 수사적이다.
인간의 자유 의지와 숙명과의 갈등을
나비와 사막이라는 단어 속에 마구마구 구겨넣고
참을성있게 앉아있는 관객에게 일방통행적인 이해와 공감을 끊임없이 
그것도 지나치게 강요하는 것 같다.
그 강요는 심지어 거의 무차별적으로 쏟아붓는 폭력처럼 어이없이 일방적이다.
이쯤되면,
작품의 이해 여부를 떠나서
그대로 수건을 던지고 링위에 뻗어버리는 편이 어쩌면 훨씬 나은 선택이 될 것 같다.
무차별 폭력의 뒤끝은 아직까지도 불편하고 내내 찜찜하다.

"도대체 나는 왜,
 일방적으로 그렇게 얻어터지고 있어야만 했는가?"
(혹시 나 지금 K-1 본거니???)
Posted by Book끄-Book끄
달동네 책거리2009. 7. 6. 06:25
<혀> - 조경란

혀
 

탐욕적인 소설. 그리고 유혹적이며 관능적인 소설.

조경란의 소설 <혀>는 식욕이라는 본능의 식탁 위에 또 다른 본능인 성욕의 재료를 푸짐하게(?) 그리고 노골적으로 차려놓습니다.

화들짝!

너무 정직하고, 그리고 적나라해서 때론 민망하기까지 하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은 읽음직한 구미가 솔솔 당깁니다.

거식과 폭식, 그리고 떠나는 사랑과 시작되는 사랑, 이 모든 관계들....

누군가에게겐 세상의 어떤 맛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맛이 있듯이 어떤 사람으로도 도저히 대신할 수 없는 사람이 있기도 합니다.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됩니다.


13년 경력의 33살 요리사 정지원,

그녀는 “WON'S KITCHEN'이라는 자신만의 쿠킹 클래스를 운영하기도 했던, 꽤나 감각적이고 탐미적인 요리사였죠.

그런 지원과 7년 간 사귀던 건축가 석주가 그녀를 떠납니다.

그것도 그녀의 쿠킹 클래스에서 요리를 배우던 젊고 도발적인 모델 출신 이세연이라는 여자와 새로운 사랑에 빠져서 말이죠.

네, 이야기 자체는 참 진부한 치정관련 연예소설이죠.

그런데 그 표현이라는 게...

섬뜩할 만큼 사실적이고 노골적입니다.

함께 같은 꿈을 꿨던 그 사람을 잃은 그녀는 다시 예전에 일했던 “노베”로 돌아가 다시 요리를 합니다.

그곳에서 그녀가 만드는 하나하나의 요리 속에는 그녀 자신의 모든 심리상태가 함께 녹아들어갑니다.

그녀는 식욕에 대한 욕구마저 점점 사라지죠.

먹는 것에 대한 거부,

그것은 곧 관계에 대한 거부이며 더 심각해진다면 모든 인간관계에 대한 극단적인 파괴까지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식욕을 가진 자는 적어도 살아갈 의욕을 가진 자라고 말 할 수 있으니까요...

입으로 향하는 욕망을 스스로 거세시켜버린 사람.

그리고 결국은 사랑하는 사람이 새롭게 사랑하게 된 그녀의 혀를 잘라(이것도 일종의 거세) 요리를 한다는 그로테스크한 결말.

심지어 그렇게 요리된 혀는 아무것도 모르는 옛 연인의 마지막 만찬이 되어 그의 입 속에 한점한점 집어 삼켜집니다.

지금껏 경험하지 못한 황홀한 맛을 남기면서요...


일류 요리사에겐 그들만의 묵시론적인 비밀이 있다고 하네요.

고객의 식욕을 채워주고 미각을 즐겁게 해주되 결코 만족시켜서는 안 된다는 묵시록.

한번 만족을 하게 되면 그 다음엔 더 큰 것을 원하게 되는 게 사람의 마음이기에 다음에 대한 기대를 반드시 남겨둬야 한다고요.

사람과 사람의 관계 속에 100% 만족이 찾아온다면 결국은 금이 간 창유리를 통해 세상을 보게 되는 순간이 시작됩니다.

그리다 누군가 한 사람이 다른 방향을 바라보게 되면 남은 한 사람은 비참하고 함구적이고 잔인해지게 되죠.

그리고 남는 건 허기처럼 찾아오는 “분노” 뿐이죠.

그럴 때 입은 두 가지 중 한가지를 선택합니다.

폭식 혹은 거식

사람에게 사랑과 굶주림, 이 두 가지가 충족되지 않았을 때 나타나게 되는 극단적인 자기 파괴의 방법!

한쪽은 입 안에 몰아넣음으로 인해 속을 채워 마침내 터뜨리겠다는 폭발의 자기 파괴.

한쪽은 입을 닫음으로 인해 내부를 태우겠다는 발화의 자기 파괴.

둘 다 막상막하의 막장 스토리이긴 하지만,

그것보다 더 극단적인 건 주인공 지원처럼 그 분노를 타인에게 쏟아내는 것일 겁니다.

이별에 대한 책임을 받아들일 수 없다면

어쩌면 누구와도 사랑을 해선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엄마 뱃속의 태아에게서 가장 먼저 생기는 기관이 바로 “입”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사람이 가장 먼저 느끼게 되는 맛은 “쓴맛”이구요.

그러고 보니 사람이 나이를 먹어 간다는 건, 입 속으로 쓴맛의 기억을 자꾸 더하는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입이 갖는 사회성과 책임감!

어쩐지 좀 입이 천근 무게로 다가오네요.

온순해보여도 입 속엔 칼과 맞먹는 무기가 있다고 합니다.

치아와 혀.

당신이 입이 기억하고 있는 맛은 무엇입니까?

문득 그게 궁금해지네요.... ^^

 

* 이 책의 내용이 파격적이고 충격적인만큼 문단에서도 큰 파란을 일으킨 문제작입니다.

  다름 아닌 “표절” 시비로요.

  현재까지 명확한 결론은 나지 않은 상태입니다.

  논란의 핵은 주이란이란 신인 작가가 조경란의 <혀>가 자신의 신춘문예 응모작인 동명의  단편소설 <혀>
  를 표절했다는 글을 올리면서 시작됐습니다.

  그리고 그 단편소설의 심사위원 중 한 명이 바로 작가 조경란이었다고 합니다.

  (그녀는 그 소설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심사위원의 모든 소설을 다 심사하는 건 아니라
  면서요....)

  왠지 주이란의 단편소설 <혀>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네요.

  표절논란에 시비를 논할 깜냥은 되지 못하지만 어쩐지 흥미진진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디까지나 문학적인 궁금증이죠.

  어설픈 활자증후군, 호모 북커스의 호기심 발동이긴 합니다만... ^^

Posted by Book끄-Book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