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끄적 끄적...2014. 4. 9. 08:16

책을 읽는 중간 중간 후회가 밀려드는 책이 있다.

두 가지 이유로.

내가 왜 이 책을 읽고 있는지 이해하지 못하면서 그야말로 기계적으로 책장을 넘길 때,

그리고 지금처럼 왜 좀 더 빨리찾아 읽지 않았을까 하는 자책 비슷한 감정에 빠질 때.

"타이밍"이라는 거,

참 절묘하구나 비켜가는구나...

이 책을 그리스 여행 가기 전에 읽었었다면,

아마도 내 여행의 걸음과 느낌과 veiw는 정말 많이 달랐으리라.

Fira의 빛나는 태양 아래 그렇게 아낌없이 넋을 잃기만 하진 않았으리라.

여행자의 관광에 밀려 삶의 터전을 옮겨야 했던 원주민의 가난한 삶.

그걸 나는 여행 내내 외면했다.

아니 단 한 번도 밀려난 사람들에 대한 생각을 품지도 못했다.

빠듯하게 계획한 여행도 아니었는데 그때는 왜 그랬을까?

이 책 한 권만 먼저 만났었다면...

왜 나는 저스트 고나 프렌즈 시리즈를 찾아봤을까?

얼마나 실용적인 여행을 하겠다고!

 

솔직히 말하면,

이 책을 읽기까지 좀 망설였다.

미학 기행이라니...

어딘지 젠체하는 기분도 들었고

게다가 저자의 모습은 미학을 논하기에는 소위 말해 새파랗게 젊어 보이기까지 했다.

'자기가 무슨 이윤기라도 된다고 생각하나!"

살짝 빈정이 상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랬는데...

책장을 넘기면서 수없이 되뇌었다..

정말 멋지다. 이 책!

그리스의 바람과 햇빛이 시간을 품고 고스란히 글 속에 담겨 있다.

 

길의 감촉,

그 서걱거리는 황홀한 소리를 저자는 다 듣었고 느꼈고 만졌다.

...... 걷는다는 것은 머리가 아닌 몸으로 생각하는 방법이다. 몸으로 생각하는 경험은 훨씬 직관적이고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다. 머리로 생각하는 것은 메모장과 연필 그리고 논리력이 필요하다. 질문 대부분이 구체적 형상이 없이 물음과 답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몸으로 생각하는 경험은 걸으며 닿는 길의 감촉, 목덜미를 감싸게 하는 바람, 등을 데우는 태양까지도 기억한다. 물론 이런 경험은 대화를 통하기보다 제 몸에 귀 기울일 때 가능하므로 혼자하는 여행에서 더 큰 법이다. 무엇보다 '걷는 생각'은 억지로 하는 생각과는 전혀 다른 수월한 방법이다. 억지스런 생각이 반드시 그 자리에서, 무언가 해야 한다는 의무감이라면 '걷는 생각'은 자리를 벗어나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것이 바로 벗어나는 행위, 걸으며 생각하는 해방감이다. 그리고 영감은 바로 이 자유로운 순간순간에 온다 ......

"걸으며 생가하는 해방감"

머릿속으로 바람이 치는 그리스의 종소리가 울린다.

...... 내게 여행은 느긋함보다는 치열함이었다. 여행을 떠나는 순간부터 한순간도 멈추지 않았다. 꺼져가던 열정을 다시 사리기 위해서 걷고 또 걸었다. 지독하게 걸어 오르고 그곳에서 묻고 대답한다. 왜 여기 있는지, 왜 나였는지, 이제 어디로 가는지 그야말로 끊임없이 '물음'을 적어간다 ......

그리스의 파르테논 신전을 보면서 나는 시간을 생각했다.

신전 위를 가득 덮고 있던 구름도

사납게 옷길을 날리던 바람도 다 고대로부터 오는 시간이었다.

오래 침묵하게 만드는 시간.

그렇게 그리스의 시간은 과거로 향해 있었다.

나는 짬짬이 그 시간의 간격을 더듬어가며 시간의 거리를 좁혔다.

 

그리스...

처음이자 마지막이라고 생각한 곳이다.

다시 가게 될 일이 있을가 싶어 잠깐 머무르는 시간 동안 발걸음이 바빴다.

플라카 지구를 밤늦게 산책할 때도

인심좋은 주인장이 잔돈이 없다며 엽서 10장을 그냥 가져가라고 줄 때도

다시 올 일 없는 이곳에서 참 고마운 기억을 담는구나 생각했다.

그런데 이 책을 읽고

나는 다시 그곳을 꿈꾸게 됐다.

꼭 뭘 보겠다는 소망이 생긴건 아니다.

단지 그곳에서 햇빛 속에 오래 앉아 불오나전한 나를 느껴보고 싶어졌다.

과거로부터 이어지는 상징들을 먼발치에서 바라보면서

"Carpe Diem"와 "Memento Mori"를 좌우에 거느리고 고대의 제전에 혼자 빠져 보고 싶다.

그러나 예언같은 신탁을 받게될지도.

 

이 책은,

너무 짧았던 그리스에서의 시간을

니코스 카잔차키스를, 니체와 베르그송을,

심지어 아폴론과 디오니소스까지도 내내 그리워하게 만들었다.

욕망과 멀어지기 위해 메테오라 그 깊은 수도원을 스스로 오른 수도자의 절실함.

그 절실함이 나를 부른다.

니체와 베르그송, 니코스 카잔차키스에게 길을 물어

그곳을 찾아가야겠다.

스스로 봉쇄를 선택한 간절함에 답하기 위하여!

신탁이 제우스의 번개처럼 내 몸을 후려친다고 해도

 

 

* 여행을 귀중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두려움이다  - 니체

  나는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다.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 니코스 카잔차키스 묘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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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후 끄적끄적2014. 1. 15. 08:11

2년마다 한번씩 자유여행을 가야겠다고 혼자 다짐했었다.

그리고 두번째 다녀온 자유여행.

원래 예정대로라면 스페인과 포르투칼을 여행하는 거였는데

동생네가 함께 가자고 조르는 바람에 그래도 익숙한 터키로 방향을 수정했다.

그냥 터키 일주를 할지, 이스탄불과 산토리니를 갈지 두 가지로 고민하다

아무래도 조카들이 초등학생이라 터키일주는 무리일 것 같아 이스탄불과 산토리니로 정했다.

결론적으론...

선택은 나쁘진 않았다.

여행하는 내내 날씨는 좋았고

특히 아테네와 산토리니에 머무르는 동안은

지중해의 햇빛 속에 두명하게 헹궈지는 느낌이었다.

walking and warlking의 꿈을 충분히 실행하진 못했지만

그래도 짬짬이 혼자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골목길을 기웃거렸던 시간들,

하늘과 바다를 바라봤던 시간들.

그리고 사람들의 모습들을 몰래몰래 훔쳐봤던 시간들.

길을 찾아 이리저리 우왕좌좡하며 시행착오를 반복했던 시간들이

지금은 다 추억 그 이상이 됐다.

그건 그러니까...

"힘"이다.

앞으로의 2년을 버텨내게 하는 힘.

 

아쉽게도 골목과 길, 풍경같은 다정한 사람들의 모습을 많이 담지 못했다.

이런 것들은 적어도 내게는 하나의 완벽한 "이야기"인데

이번 여행에서는 그 이야기에 충분히 귀기울이지 못했다.

산토리니에서 만난 "casablanca soul"

이 골목 앞에서 혼자 얼마나 웃었던지!

골목 입구에 앉아있는 상점 주인 아저씨에게도 풍부한 casablanca의 soul이 느껴지더라.

루멜리 히사르에서 한 어머니가 아장아장 걷는 아기의 손을 잡고 조심조심 계단을 내려가는 모습은

정말 홀릴듯 오래 쳐다봤다.

아름답고, 귀엽고, 따뜻하고, 다정해서...

이런 꿈같은 풍경들에 더 많이 귀길울여야 했었는데

내내 아쉽고 아쉬웠다.

 

 

아마도 변하지는 않을거다.

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기전에 마지막으로 들르는 곳은

여전히 서점일 것이고

비행기가 땅을 벗어나면

창문을 통해서 서서히 드러나는 하늘길을 보며 여전히 설랠거고,

골목골목을 목적없이 서성이는 것도 여전할거다.

눈에 담는 것,

눈에 담기는것들에

점점 더 많이 선량해진다.

본다는 것,

그건 느낀다는 것과 동의어다.

한때 제일 절망적인게 시력을 잃는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오르한 파묵의 <내 이름은 빨강>을 읽으면서 그렇치 않다는 걸 알았다.

그래, 볼 수 없다는 건 확실히 치명적이긴 하다.

그러나 그리웠던 건 한 번이라도 봤다면

그걸 기억하면서 마음 안에서 두고두고 꺼내볼 수 있다.

사람은,

사랑때문에, 사람때문에 살 수도 있지만

기억때문에 살 수도 있다.

 

하여,

아무것도, 아무도 없는 나는

내 기억의 힘을 신앙처럼 굳게 믿는다.

그게 나를 살게 한다.

Posted by Book끄-Book끄
여행후 끄적끄적2013. 10. 2. 08:36

이번 여행 중에 그리스 아테네는 일종의 정거장이었다.

산토리리로 들어가기 전과 터키 이스탄불로 들어가기 전 하루씩 머물렀던 정거장.

5일의 사이를 두고 두 번 올라갔던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

산티그마에서 아크로폴리스로 이어지는 "플라카" 지역을 걸으면서

곳곳에 그려진 선명한 색채의 귀염성있는 벽화들을 보는 건

에피타이저에 해당하는 감각의 깨움이었다.

플라카지구는 우리나라로 치면 "인사동"같은 거리인데 

그 느낌은 확실히 다르다.

상업적인 시설의 범람은 같지만 어딘지 한가로움과 여유가 더 많이 느껴졌다.

그건 여행자라는 신분이 주는 이국의 시선 때문이었을까?

그리스에서 참 많이 먹었던 아이스크림.

달콤함은 아주 강하고 질긴 유혹이었다.

번번히 패배하면서도 이게 정말 마지막이야...를 되뇌일 수밖에 없었다.

다짐은 도저히 달콤함을 이겨내지 못하더라. 

색채의 유혹도 만만치 않았고!

 

여행의 맨 처음 목적지였던 "아크로폴리스",

그곳에서 내가 대면한 것은 "바람"이었다.

신전의 정상에 몰아치던 바람은 너무나 생생해서

인간의 접근을 저어하는 신의 확고한 손짓처럼 느껴졌다.

한걸음 한걸음 떼기가 두렵고 조심스러운 마음.

세계문화유산 1호라는 파르테논 신전을 눈 앞에서 보면서

대리석 기둥 하나의 거대함에 몸이 떨렸다.

저 거대한 기둥을 어깨에 이고 언덕까지 옮겨왔을 민초들의 죽음같은 노동이 내 어깨를 찍어누른다.

"네 눈엔 이것이 장엄뿐이냐?"

바람 속에는 민초들의 울음이 섞여있다.

그 바람의 무게 속에서 나는 어쩔 수 없이 점점 오르라드는 하나의 몸둥아리가 된다.

무신론자라도 아크로폴리스에 올라 이 바람을 온 몸으로 느끼면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신의 존재를 믿을 수밖에 없으리라.

그리고 민초들의 고통까지도...

 

산토리니에서 밤페리를 타고 아테네에 도착해서

두번째 오른 아크로폴리스는 "구름"이었다.

그리고 그건 단순한 기압의 차이에 의해 형성된 물질의 형태가 아니라

태고로부터 밀려온 시간의 현신(現身)이었다. 

시시각각 변하는 구름을 머리에 이고 웅장하게 서있는 파르테논과 에렉티온 신전은

또 다른 위압감과 신비감으로 다가온다.

어쩌면 그순간 이곳과 저곳의 세상이 서로 열렸던 것 아닐까?

그야말로 신화의 세계 속으로 빨려들어가고 있는 듯한 생생한 느낌.

그리고 누군가에게로부터 확실하고 강하게 내쳐지고 거부당하고 있다는 느낌

그렇다면!

나는 이곳에서도 그곳에서도 여전히 이방인일 수밖에 없다는 뜻인가!

그 순간 나는 소속이라는 연대가 주는 안정감을 완벽하게 버리고 싶었다.

신들은 인간들을 그들만의 세계로 쉽게 받아들여주지 않는다던데...

나는 아무런 능력도 없으면서 감히 제2의 헤라클래스를 꿈꿨는지도 모르겠다.

격(格)의 무게를 격(擊)으로 맞서고 싶었다.

신들의 세계에도 파격은 분명 있었을테니까.

 

신전을 향해 올라가는 돌바닥은

사람들의 숱한 발걸음에 거울처럼 반짝거린다.

조금이라도 한 눈을 팔면 그대로 미끄러질 정도.

인간들에게 적어도 이곳에 올라올때만큼은

걸음 하나하나까지도 "조심"해주길 바라는 신들의 엄중한 가르침일까?

인간과 신의 confrontation!

그 길을 보면서 나는 인성과 신성의 필사적인 버팀을 떠올렀다.

그것과 비교한다면 내리쬐는 뜨거운 태양빛은

차라리 온순함이리라.

 

에렉티온 신전을 떠받치고 있는 여섯명의 여사제처럼

나는 그곳을 내려와 오래 침묵했다.

바람과 구름 속에서 나를 받아낸 "아크로 폴리스"

그곳에서 나는 신의 옷깃, 그 끝을 잠시 만지고 돌아왔다.

 

이제부터 나는 어디를,

그리고 무엇을 바라봐야 하나...

Posted by Book끄-Book끄
보고 끄적 끄적...2010. 9. 1. 06:32

지난 토요일에 다녀왔다.
초대권이 있어서 마감 하루 전에 부랴부랴 찾아갔다.
비가 많이 와서 오후 내내 망설이다 수, 토요일에는 9시까지 관람시간이 연장된다는 소식을 듣고 서둘러 찾았다.
(야간 관람은 입장료가 50% 할인이라는 것도 알게 됐다. 굿~)
로뎅전도 하루 이틀 미루다가 결국은 놓쳐버리고...

대영박물관은 1753년 설립되어 4년 뒤인 1759년에 대중에게 공계된 세계 최초의 국립 공공 박물관이란다.
800만점이 넘는 유물을 소장하고 있고
주요 전시품은 그리스, 로마 시대의 조각작품들과
이집트의 고고학 자료들이다.
2000년 11월에는 "한국관"이 신설되어
구석기 유물부터 청자, 백자 등 조선 후기 미술품 250 점이 전시되어 있다고 한다.

이번 기획전시는 대영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그리스 유물 중에서
핵심되는 작품 136 점을 선별해서 전시했다.
(참고로 대영박물관은 세계 3대 박물관 중 한 곳이란다)
비가 오고 그리고 시간도 제법 늦었는데도 관람객이 꽤 많았다.
아마도 방학숙제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아이들 손을 잡고 온 엄마 아빠들의 모습이 아무래도 눈에 많이 띈다.
커다란 조각상들이 많이 전시되어 있어서
아이들도 신기해하며 바라보는 모습이 사랑스럽다.
나 역시도 초등학교때 박물관을 열심히 찾아다녔었는데......
꼭 숙제때문은 아니었지만 그냥 박물관 안에 있는 게 참 좋았다.
어린 나이였지만 네다섯시간은 거뜬없이 박물관에서 행복한 시간을 보냈던 것 같다.



이번 전시는 <그리스 신과 인간>이라는 제목으로
전부 4섹션으로 구성되어 있다.

Ⅰ 신, 영웅 그리고 아웃사이더
Ⅱ 인간의 모습
Ⅲ 올림피아의 운동경기
Ⅳ 그리스인의 삶



                  <제우스 청동상>                                    <아프로디테>

                <헤라의 대리석 두상>                            <헤라클레스 대리석 두상>

특히 대리석 조각들이 많았는데
기원전 작품들도 여럿이었다.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대리석의 질감이나 빚깔이 너무 예뻐서
한참을 넋을 놓고 쳐다봤다.
보존이 잘 됐는지, 아니면 복원을 잘 한건지는 모르겠지만
교과서나 도록에서만 봤던 제우스와 헤라, 헤라클레스 등을 실제로 보니 짜릿한 느낌마저도 든다.


섹션 3에 전시되어 있던 메인 작품 "원반 던지는 사람"은 전시 공간 자체 구성도 너무나 흥미롭고 아름다웠다.
뒤의 스크린으로는 작품을 천천히 클로즈업 시키면서 세세히 보여주고,
그 앞으로 작품을 배치했다
검정색 대리석 느낌의 바닥 기단에서도 작품이 비쳐보이고...
고개를 들면 또 다시 전시실 유리벽에 반사되는 원반 던지는 사람을 볼 수 있다.
처음에는 얼굴이 뒤를 향하는 모습이었는데
복원하는 과정에서 지금처럼 앞의 땅을 바라보는 모습이 됐다고 한다.
원래의 모습을 상상하는 재미도 특별했다.
"원반 던지는 사람"은 1948년 런던올림픽 포스터 메인 이미지로 쓰일 만큼 영국의 대영박물관이 자랑하는 최고의 걸작이라는데 작품 앞에 서면 그 아우라가 직접 느껴진다.
역동적이면서도 친밀감 가득한 몸동작.
과거의 그리스인들에겐 신비감에 가까운 탁월한 예술감각이 있었음이 분명하다.
아름다움이란 시간 속에 완숙되는구나 하는 생각도 잠시 하게 된다.


작품 자체를 돋보이게 만든 전시 공간이라
누구 손에 의해서 이렇게 꾸며졌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원반 던지는 사람"만큼 마음을 잡았던 작품은 "스핑크스"
특히나 대리석 색감이 너무 예뼈서 나오기 전에 다시 한 번 찾아가서 살펴봤다.
손톱과 발톰, 날개와 꼬리까지도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어서
마치 살아있는 동물을 보고 있는 느낌이다.
귀염성있고 충성심 가득한 반려동물 같다고 할까?



헤라클레스 일화와 그리스 신화들이 그려져있는
적회식 토기와 흑회식 토기들.
"추상적인 신체"라는 제목을 달고 있던 작품도 기억에 남는다.
키클라데스 섬의 여성상 조각으로 기원전 2,600년에서 2,400년 전 작품이라는데
현대 추상작품이라고 해서 손색이 없을 만큼 참신하고 아름답다.
남성 누드 쿠로스 조각상과 여성 누드 코레 조각상들은
인체의 굴곡과 아름다움을 섬세하게 보여주고 있다.
시간적인 여유가 좀 많았다면
찬찬히 둘러볼 수 있었을텐데
마음의 여유없이 관람한 게 지금도 아쉽다.
(그래도 놓치지 않고 볼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다...)



들어갔을 때는 하늘이 제법 푸른 빛이었는데
관람하고 나오니 어느새 어둡게 변해 있었다.
두런두런 계단에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의 모습도 다정하고
한계단 한계단 걸어 올라가는 발걸음도 다정하다.

오랜 시간을 지나 눈 앞에서 실제로 보는 그리스 로마 유물은
신성스럽기도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안타까운 마음도 들게 한다.
이 모든 유물들이 대영박물관 소장품이라니 어쩐지 씁쓸하다.
제 나라를 잃고 강탈된 수많은 문화재들은
언제쯤 자기 자리를 찾을 수 있을까?
아무런 보상이나 조건없이 모든 유물들이 다 자기 나라로 반환된다면 좋겠다.
역시나 꿈같은 희망인가?
우리도 혹시 문 앞에 오벨리스크를 세워놓고 즐거워하고 있는 건 아니지 생각해볼 일이다.
Posted by Book끄-Book끄
보고 끄적 끄적...2010. 5. 12. 06:27
원래 예정대로라면
5월 2일 류정한의 몬테크리스토를 다시 보는 거였는데
1박 2일로 함평 나비축제를 다녀오느라
엄기준의 몬테크리스토로 계획이 수정됐다.
몬테크리스토(엄기준)와 아베 파리아(이용근)을 제외하면
다른 캐스팅은 4월 21일과 동일하다.
(차지연 메르세데스는 아무래도 나랑 인연이 없는 모양이다)



배우 엄기준을 무대 위에서 보는 건 정말 오랫만이다.
생각해보니 그의 무대를 본 건 거의가 다 소극장, 중극장이었던 것 같다.
아무래도 "엄기준"을 이야기할 때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를 빼놓을 수는 없겠다.
엄기준과 조정은의 페어는 아름답고 그리고 아팠다.
그에겐 딱 "베르테르"의 감성이 어울리는 배우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그래서 사실은 조금 기대를 했었다.
그가 그토록 좋아하는 <지킬 앤 하이드>의 프랭크 와일드혼 작품 <몬테크리스토>
어떤 느낌일지 궁금했고 TV 연기자로 변한 그가 어떤 모습으로 변화가 됐을지도 궁금했다.
지금까지 내가 봤던 엄기준의 작품들은...
괜찮았다. 그에게 썩 잘 어울렸었다.
카르멘, 젊베슬, 어쌔신, 그리스. 사랑은 비를 타고...
(쓰고 보니 그의 최근 작품은 거의 못 본 상태다. 그래서 더 궁금했는지도 모르겠다)



깜짝 놀랐다.
엄기준이라는 배우가 이랬었나???
1막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부터 나는 당황스러웠다.
류정한의 첫공때 나는 무대때문에 화가 났었지만
적어도 그 무대에 서 있는 배우때문에 화가 나지는 않았었다.
엄기준의 몬테크리스토는 유니버설아트센터의 소음과 번잡함 만큼이나
어색하고 그리고 확실히 부족했다.
(나는 아마 그도 느끼고 있을 거라고 확신한다)
그의 딕션은 때때로 명확하지 않게 뭉겨졌으며 표정은 그로테스크하게 과장됐다.
(무대와 너무 가까이 앉았다고 나는 나 자신을 책망했다. 좀 멀리 앉지 그랬느냐고...)
뮤지컬 넘버들을 너무 힘겹고 부르던 모습과
심지어 고음을 과감하게(?) 뭉턱 짤라내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내가 다 민망했다.
엄기준은 메르세데스(옥주현)에겐 단지 연하남처럼 유약했으며
빌포트(조순창)에게는 당당하지 못한 그야말로 겁먹은 죄인의 모습이었고
스승 파리아(이용근)에게는 제 스스로 아무것도 못하는 찌질이에 불과했다.
엄기준의 단테스라는 인물은 결코 몬테크리스토로 변해 복수를 할 수 있는 위인이 아니다.
이런 느낌이었으니 극이 진행될수록 어리둥절할 수밖에...
(쓰고 보니 내가 다 참담하다...)
원래 엄기준이란 배우가 그랬던가?
나는 자꾸 이 질문을 계속 할 수밖에 없었다.



반면에 옥주현은 첫공때보다 확실히 훨씬 더 좋았다.
첫공때는 나는 메르세데스의 감정에 단 한번도 공감할 수 없었는데
두번째에는 그녀의 눈물이 아팠다.
(그렇다고 100% 공감은 아니다)
이날 무대에서 그 누구보다 최고의 모습을 보여줬던 배우는
바로 몬데고 "최민철"이었다.
첫공때 나는 그가 자리를 잡고 있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안타까웠고 그의 방황(?)의 이유가 궁금했었다.
그런데 이번 공연에서는 그가 이 뮤지컬의 주인공처럼 느껴졌다.
1막에서 단테스가 불렀던 복수를 다짐하는 노래(너희에게 선사하는 지옥)의 일부를
2막에서는 몬데고가 부르게 되는데
솔직히 말해서 두 사람의 모습을 비교하지 않을 수 없다.
실제로 관객들의 박수소리도 많이 차이가 났음을 밝히지 않을 수 없겠다.
최민철의 몬데고는 표정과 톤, 그리고 액션도 아주 적절했다.
그가 무대에서 자기 자리를 찾은게 나는 몹시 반가웠다.
(역시 최민철 ^^)



첫공때 조원희의 아베 파리아가 과장이 너무 심하고 코믹해서 못마땅했는데
이용근의 파리아는 더 코믹하더라.
그래도 죽는 장면에서는 눈물이 나긴 했다.
(조원희때는 너무 힘차게 사망하셔서 ^^;;  많이 당황스러웠는데...)
무대 소음은 여전했지만 전체적으로 나쁘지 않은 공연이었다.
스크린도 첫공 때처럼 실수도 없었고 어색하지도 않았다.
(첫공때는 단테스가 자루에서 빠져나올 때 화면 전환이 늦었었고
 다른 부분에서도 타이밍이 정확하지 않았었는데...)
결국 문제는,
단테스이자 몬테크리스토였던 "엄기준"이었다는 건데...
오랜 뮤지컬 배우로서의 그의 내공이 아쉬울 따름이다.
그에게 이제부터는 TV 연기자로서의 재능만을 기대해야 하는 건가???
간절히 그의 come back을 외치고 싶다.
"Come back! Mr. Um. Please!"


                                                   2010. 05.04. 몬테크리스토 커튼콜
Posted by Book끄-Book끄
보고 끄적 끄적...2009. 11. 14. 15:59
오랫만에 대학로에서 소극장 뮤지컬을 봤다.
한동안  큰 작품들만 열심히 본 것 같아서...
연극 <마라, 사드>를 봤을 때는 여름의 끝이었는데
그날의 대학로는 완전히 가을 속에 젖어있었다.



참 좋은 공연이란 소리를 많이 들었었는데
<판타스틱스>
이제서야 나와 인연이 닿았다.



"Try to remember"
여명이 영화 "유리의 성"에서 불러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던 노래.
이 노래가 바로 뮤지컬 <판타스틱스>의 넘버라는 걸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반세기동안 공연된 세계 최장수 뮤지컬이라는 <판타스틱스>
뮤지컬 넘버들도 참 좋다.
소소한 재미와 아기자기함.
그리고 바로 앞에서 느껴지는 배우들의 모습
어쩌면 저렇게 가까이에서 천연덕스럽게 연기할 수가 있을까?



세익스피어의 작품 <로미오와 줄리엣>을 어쩔 수 없이 떠올리게 만드는 작품.
벽을 사이에 둔 애뜻한 두 연인
두 집안 사이에 벽이 놓이게 된  배경은 (실제로 벽이다... 담벼락)
사실 두 아버지들의 합동잔적에 의해서다.
일부러 둘을 연결시켜주기 위해 의도적으로 계획한 원수지간이라는...
(아버지들은 사실 둘도 없는 "베프"였던 거쥐~~~)
자식들은 부모의 말에 엇나가려는 경향(?)이 다분하기 때문에 두 아버지는 이런 속임수를 쓰기로 한거다.
이제 어떤 사건을 만들어 어쩔 수 없이 두 사람이 화해하게 만들어 두 연인을 연결시켜줘야 한다.
루이자가 꿈에서 본 모습 그대로 일을 꾸미기로 한 아버지들.
그리하여 LPG  엘가로(가스 배달부 아님 ^^)를 고용해
아주 최신식 버전의 인디언식 겁탈 시나리오가 시작된다.
두 아버지의 모습이 무지 귀엽고 사랑스럽다.
(실제로 극을 보면서 이 두 사람 때문에 정말 많이 웃었다)



11월 8일 casting - 마트 : 김산호    헨리 : 서현철



해설자이자 극의 작가인 김태한의 노래로 시작되는 <판타스틱스>
어쩜 저런 코믹한 얼굴에서 이렇게 감미로운 목소리가 나올 수 있을까? (좀 죄송...)
항상 그의 코믹한 배역에 익숙한 나는
잠시 놀란다.
(뮤지컬 "그리스"에서 케니키의 현란한 춤과 엘비스 프레슬리 같던 목소리가 생각나 혼자 웃었다)
무엇보다 이 뮤지컬을 재미있게 볼 수 있었던 건
헨리 역의 서현철과 머티머 역의 김지훈 때문이었다.
이렇게들 잘 생기신 분들었구나...
의상이 누더기가 될 정도로 가난한(?) 떠돌이 유랑극단의 유일한 단원들.
그 허름한 옷이며, 얼굴이며, 목소리며, 동작이며...
일주일이 지난 지금 생각해도 웃음이 절로 난다.
"인디언식 겁탈"의 두 주역 (^^) 

관객을 한 명 동참시킨 그들의 연기는
능청을 넘어 오히려 너무 자연스럽더라.
30년 동안 줄리엣만 한 배우라면서 앞 자리에 앉아있는 여성 관객을 무대 위로 불러낸다.

- 니 이름이 뭐야?
- OO요.
(앞에 나온 관객은 실제로 자신의 이름을 댄다)
- OO! 니 이름은 줄리엣이라고 했지? 너는 신입단원 앞에서 부끄럽지도 않냐?

- 내가 늘 말했지? 배역을 생활화하라고!
- 어째 너는 30년을 해도 연기가 늘지를 않냐...


두 사람의 만담같은 대사가 자꾸 귓 속을 맴돈다.
한번만 로미오를 시켜달라는 머티머에게 죽는 장면을 해보라면서 헨리가 한 말

- 헨리 : 줄리엣이 왜 죽었어?
- 머티머 : 정확한 건 부검을 해봐야 알 것 같은데요...
- 헨리 : 너 땜에 죽었쟎아~~~ 너 땜에~~~ 속 상해서....
(줄리엣의 손에 있는 독약을 마시려는 머티머에게)
- 헨리 : 니꺼 먹어! 니꺼! 왜 남의 꺼 먹어~~~

따지고 보면,
로미오는 정말 줄리엣 때문에 속 상해서 자기가 가지고 온 독약을 먹고 죽었는데
난 왜 이렇게 웃기기만 한건지...

중간에 마트 김산호의 입으로 꽃가루가 들어가 상대역 루이자 최보영까지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그 장면이 어찌나 재미있었는지 관객들까지 한참을 웃을 수밖에 없었다.
너무 생생하게 귀여운 모습이여서...


모든 사랑은 "환상"이다.
그리고 모든 공연도 역시 "환상"이다.
사랑과 공연.
두가지 환상이 만났으니 그 궁합 한 번 제대로다.
오랫만에 무대 위에서 본 최보영과 강인영도 너무 반가웠다.
(강인영씨 다리 참 아팠겠어요... 당신의 멋진 노래를 많이 들을 수 없어 안타까웠지만 그래도 존재감은 좋았어요...)
무대 양 옆에서 초대형 필 하모닉 오캐스트라 못지 않게
멋진 반주를 해줬던 두 대의 피아노까지...
오랫만에
알차고 풋풋한 공연을 봤다는 풍성한 만족감.
소문날만 하다는 생각도 더불어 하게 된다.



맘이 우울한 사람들에게 꼭 권하고 싶다.
환상적으로 맘이 풀릴테니까...
극장을 나오면
사랑에 대한 "환상"까지는 아니더라도
분명 유쾌한 웃음이라는 동반자를 만나게 될 것이다.
아마도 꽤 좋은 입소문이 나지 않을까 기대된다.
Posted by Book끄-Book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