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끄적 끄적...2015. 9. 11. 07:55

 

<아버지와 아들>

 

일시 : 2015.09.02. ~ 2015.09.25.

장소 : 명동예술극장

원작 : 이반 투르게네프

극작 : 브라이언 프리엘

연출 : 이성열

출연 : 오영수, 남명렬, 김호정, 이명행, 윤정섭 외 

제작 : 국립극단

 

러시아의 3대 문호 이반 투르게네프의 소설 <아버지와 아들>이 연극으로 올라왔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개인적으로 안톤 체흡보다 쉽웠지만 안톤 체흡만큼 매력적이진 않았다.

그런데 배우들의 힘이 정말 너무 좋았다.

러시아 작가의 작품들은 일단 등장인물 이름부터 머리가 아프다.

나였다면 등장인물들 이름을 외우는 것만으로도 한나절이 걸릴지도 모른다.

 

러시아 작품을 읽을 때는 개인적으로 곤혹스러울 때가 많다.

등장인물 이름이 너무 어려고 심지어 길기까지 해서 각인되기가 쉽지가 않다.

그래서 개인적으론 주요 인물들은 따로 애칭을 만들어 기억한다.

물론 본래 아름과 비슷한 애칭으로... 

그래도 고마운건 이 연극은 등장인물 이름이 고색창연하지 않아 상대적으로 고생을 덜했다.

사실 이 작품은 이명행과 남명렬, 김호정 배우때문에 선택했는데

의외로 비자로프 윤정섭 배우에게 더 많이 몰입했다.

이명행의 아르까디나는 꼭 <푸르른 날에>의 오민호 같았고

거의 모든 인물들이 시종일관(?) 여기 저기 흔들리고 휘둘려서 개인적으론 난감했다.

 

혁명을 꿈꾸는 니힐리스트 바자로프.

낭만적인 사랑은 허무라고 주장하던 그가

절망적으로, 미친 듯이, 말도 안되게, 열정적인 사랑에 빠진다.

지독한 사랑에 빠진 사람은...

안타깝게도 딱 그만큼의 지독한 절망에도 함께 빠진다.

그 절망에서 빠져나오는 방법은 두 가지 뿐이다.

그 사랑을 이루던가, 아니면 완벽한 파멸을 실현하던가!

발진디푸스에 전염돼서 사망하긴 했지만 비자로프의 죽음은 확실히 후자의 가깝다.

니힐리스트에게 사랑이라니...

자신이 그토록 경멸한 단 하나의 무모한 열정에 그렇게까지 삶 전체가 휘둘려버리다니...

비극이 예견되긴 했다.

 

그런데 이 작품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은 왜 이렇게까지 유아적인가!

아들을 숭배하는 아비도 유아적이고

아들과 친구같은 아비도 유아적이고

결투를 신청하는 빠벨도 유아적이고

발진디푸스에 전염된 비자로프를 찾아간 안나도 유아적이고,

죽은 비자로프의 신념을 뒤따르겠노라 말하고 행동하지 않는 아르까디나도 유아적이다.

덕분에 깊고 멈출 수 없는 우울에 빠져버린 사람은 다름 아닌 "나"다.

그래도 체홉은 이렇게까지 우울하지는 않았는데...

 

<아버지와 아들>

어렵지 않은 작품이지만.

결코 이해하고 싶지 않은 작품이다.

그런데 그게 바로 세대고, 삶이고, 사랑이니 난들 어쩌겠는가....

 

Posted by Book끄-Book끄
보고 끄적 끄적...2010. 5. 24. 05:55

기간 : 2010.05.19 ~ 2010.05.23
장소 : 대학로 예술극장 소극장
극본 : 지경화
연출 : 채승훈
극단 : 창파
출연 : 남명렬, 김호정, 민경진, 이명호



제 31회 2010 서울연극제 참가작 8편 중에 
피날레을 장식하는(?) 작품이었던 연극 <옥수수밭에 누워있는 연인>
극본과 연출자는 낯설었지만
든든한 출연진만으로도 "must see" 목록에 포함시켰던 작품이다.
그런데 연극을 보고 난 후의 이 복잡하고 심란하고 불편한 감정들을 어떻게 말해야 할까?
공연장을 나서면서 "이제 살았구나..." 하는 안도감에
저절로 숨이 깊어진다.
참 막막하고 어려운 작품이구나...
그래도 정말 다행스러운 것은,
공연장에서 이해하지 못하고 앉아 있었던 찌질이가
결코 나 혼자만은 아니었다는 사실이 아주 큰 위로가 된다.




안개가 짙게 깔린 듯 운명적이며, 미스터리 하며, 원초적이며,
잔혹하며, 그로테스크하다!!

현실보다 잔혹한 환상, 환상보다 짜릿한 상상...

연극의 메인 헤드라잇은 이렇게 거하고 완강했다.
뒷북이긴 했지만 뒤늦게 시놉시스를 찾아봤다.
(시놉시스... 대략 참 난감하게 줄거리를 전해준다
 이것은 말을 한 것도, 말을 안 한 것도 아니여~~)

<시놉시스>
시와 도시의 경계에 선 어느 허름한 집. 여명이 어슴푸레한 새벽 그 집엔 이선(김호정)과 한보(남명렬)가 있다. 그들은 무언가로부터 도망친 듯 불안하고 초조하다. 지금 그들은 일종의 모의를 하고 있다. 이선의 아버지(한영:남명렬)로부터 거액의 돈을 타내기 위한 모략. 과연 그들은 아침을 맞아 그들의 계산대로 모든 일을 처리할 수 있을까 그들은 걱정된다. 현실의 고통과 존재하지 않는 이상이 억울하다. 마치 거인의 걸음과도 같은 파열음이 들리고 한보는 이선을 집에 남겨둔 채 밖으로 뛰쳐나간다. 그리고 얼마 뒤 낯선 부자(父子)가 집에 들어선다. 이들 부자 역시 평범한 일상의 인물들과는 거리가 멀다. 마치 마음과 육체의 고통들이 당장의 그것들을 넘어 형이상학적인 쾌락이 된 듯하다. 그리고 아버지(민경진)는 죽는다. 이선과 아들(이명호)만 남았다. 그들은 다르지만 또 닮기도 하다. 그들은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들을 이야기한다. 그때 한영이 찾아오고 한영은 총을 쏴 아들을 맞힌다. 마치 사냥꾼의 행동과도 같이. 그 사냥꾼은 바로 이선의 아버지다. 이선과 한영은 그러나 너무나 먼 거리에 있어 볼 수 없는 것처럼 서로에게 외롭다. 오늘로 인생의 마지막을 장식하려는 듯 집에 남은 모든 사람들은 자신이 가질 수 있는 가장 비극적 통로로 자신을 몰아넣기 시작한다.



처음에 나는 맨발로 등장하는 이선(김호정)과 아들(이명호)은
이미 죽은 사람들, 즉 "귀신들"이라고 생각했다.
한보(남명렬)가 느끼는 추위와 두려움을 이선은 전혀 느끼지 않았고
오히려  어느 면에서는 편안해 보이고 심지어는 그 상황을 즐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것은 모든 상황를 스스로 만들어낸 창조자가 
자신의 뜻데로 모든 게 이루어지는 걸 지켜보며 즐거워하는 묘한 관음의 시선같아 보였다.
(핀셋에 꽃혀있는 아직 살아있는 나비 표본을 바라보는 수집가의 섬뜩함이랄까?)
창백한 얼굴에 베낭을 메고 등장하는 아들은,
늙은 아버지를 졸졸 따라다니며
끊임없이 투정과 떼를 쓰는 비정상적으로 유아적인 인물이다.
불안한 시선과 페티즘을 떠올리게 하는 베낭에 가득한 여자 신발들.
그러니까  여자의 아버지 한영(남명렬)과 남자의 아버지(민경진)은
이 두 귀신들에 의해 상징적으로 죽은 존재들이며
이미 죽은  두 사람의 환상 속에만 살아있는 인물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결국은 그 환상 속 인물들과의 관계마저도
끝장을 내고 끊어버리게 되는 그런...



지금 가만히 되집어 생각해도 극의 내용은 집요하게 어렵고 표현은 찬란하게 수사적이다.
인간의 자유 의지와 숙명과의 갈등을
나비와 사막이라는 단어 속에 마구마구 구겨넣고
참을성있게 앉아있는 관객에게 일방통행적인 이해와 공감을 끊임없이 
그것도 지나치게 강요하는 것 같다.
그 강요는 심지어 거의 무차별적으로 쏟아붓는 폭력처럼 어이없이 일방적이다.
이쯤되면,
작품의 이해 여부를 떠나서
그대로 수건을 던지고 링위에 뻗어버리는 편이 어쩌면 훨씬 나은 선택이 될 것 같다.
무차별 폭력의 뒤끝은 아직까지도 불편하고 내내 찜찜하다.

"도대체 나는 왜,
 일방적으로 그렇게 얻어터지고 있어야만 했는가?"
(혹시 나 지금 K-1 본거니???)
Posted by Book끄-Book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