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끄적 끄적...2010. 2. 19. 00:09


일시 : 2010.02.05 ~2010.02.21
장소 : 아크코 예술극장 소극장
원작 : 데이비드 해어
연출 : 최용훈
출연 : 윤소정(에스메), 서은경(에이미), 김영민(도미닉), 
        백수련(이블린), 이호재(프랭크), 김병희(토비)


이 매력적인 연극에 대해서 어떻게 이야기할까?
윤소정, 김영민의 캐스팅만으로도 나는 탐이 났었다.
오랫만에 온 몸이 제대로 호사를 누리겠구나 기대하며 기다렸고 그리고 확실히 그랬다.
연극이 시작되기도 전에,
정성껏 꾸며 놓은 무대를 보면서 나는 혼자 "이쁘다!"를 연발했다.
확실한 뭔가가 있으리라는 떨리는 예감까지....


연극 <에이미>는 전부 4 막으로 되어 있다.
짧은 피아노 연주로 시작되는 각각의 막은
시간의 변화를, 세대의 변화를 그리고 논쟁과 원초적인 다툼을 담고 있다.
제목만으로는 참 순한 연극일거라고 생각했었는데...
그런데..
참 치열하고 아프고 그리고 정곡을 찌르는 연극이었다.
표면적으로만 보면,
이 연극은 모녀간의 논쟁, 그리고 사위와 장모간의 논쟁이다.
원만한 관계가 펼쳐지지 않으리란 건 상황만으로도 눈에 선하다.
그런데 표면상의 치열함보다 극의 내면이 담고 있는 치열함이 훨씬 더 치명적이고 날카롭다.
폭로와 논쟁, 그리고 결별.
예술가의 용기와 평론가의 질투.
장모님(에스메)을 연극에 빗대 고상하고 우아하게게 포장하지 말라며
연극의 종말은 운운하는 평론가 사위 도미닉.
천박하고 비열한 성공과 권력을 혐오하는 예술가 장모.
선입견과 편견으로 이루어진 대화는 피가 튀는 전쟁터보다 오히려 더 살벌하다.

 

뭐랄까?
처음엔 분명 연극으로 바라봤었다.
그런데 연극이 다 끝난 후엔 도저히 연극으로만 보여지지가 않았다.
연극 안에서 도미닉은 비난한다.
"연극이라는 자폐적인 작은 예술세계는 보통 사람들의 삶과는 철저히 유리되어 있다"고.
연극으로 대변되는 고전적 예술 매체를 통해 자신을 은근이 경멸하는 어머니를 비난하는 말이었지만
이 말은 지금의 공연예술을 향한 일침인 동시에
공연물 속에 빠져 살고 있는 마니아를 자처하는 자폐적인 관객에 대한 일침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나를 향한 말이란 뜻이다. 나 역시도 자폐적 성향이 너무 다분하기에...)
에스메와 도미닉의 관계는 극이 진행됨에 따라 여러 차례 뒤집힌다.
(그 둘 사이에서 에이미만 정말 죽어라고 죽어난다. 급기야는 실제로도...)
은근히 치명적으로...
그러나 그 역전은 또 아니러니하게도 도저히 화목하게 지낼 수 없다고 믿었던
두 사람의 관계 회복을 위한 하나의 열쇠이기도 하다.



에스메와 도미닉으로 대변되는 영화(영상매체)와 연극의 대립과 반목.
그리고 과거와 현대의 충돌은
어딘가에서 결국은 만나게 될 몰입 혹은 화합의 길에 대한 의문을 던진다.
모든 예술적 행위는 어쨌든 "몰입"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니까.
그 둘은 어쩌면 에이미의 바람처럼
결국은  다른 시선(Amy's view)를 갖게 될른지도 모른다.
도미닉이 에이미를 배신한 게 인생의 한 장이었고
이제 그 장도 모두 끝났듯이,
다른 세대(매체)의 시작을 암시하고 있는지도...
세상에 이런 화해도, 이런 예고도, 이런 시작도 있을 수 있구나 싶어 눈이 매웠다.



누군가는 이 연극의 네 개 막을 "맛"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1 막은 봄나물로,
2 막은 단단한 육질이 느껴지는 고기로,
3 막은 진한 커피로,
그리고 마지막 4 막은 박하사탕으로...
적극적으로 공감했다.
아주 적절하고 그리고 동시에 아름다운 비유다.



윤소정, 김영민, 이호제, 서은경, 백수련.
그들이 만들어 낸 무대는 아름다웠고 풍성했다.
(나는 소위 젊은이로만 가득한 무대가 싫다. 
 그곳엔 어쩐지 시간도, 사람도 텅 비어 있는 것 같다.
 제 나이에 맞는 역할을 제 나이에 맞는 배우들이 공연하는 모습을 보는 건
 오랜 가업을 이어 받은 솜씨 좋은 장인의 맞춤옷을 소유하는 기분이다.) 
그러니까 나는 지금,
이들에게서 정성스런 위로를 받았노라 고백하는 중이다.
극의 마지막 세례의식을 연상시키는 장면.
극중극의 형태였지만 그 차갑고 조심성 가득한 물줄기 속에서
묘한 안도감과 씻김을 느낀다.
에스메의 마지막 대사가 지금도 내 귓가에 멈춰있다.
"시작하는거야!"
Posted by Book끄-Book끄
달동네 책거리2009. 11. 30. 05:51
 <죽도록 책만 읽는> - 이권우



죽도록 책만 읽는

지난번에 소개한 간서치 이덕무와 유사한 책벌레의 책을 한 권 소개하려고 합니다.

책을 읽고 싶은데 어떤 책을 읽는 게 좋을지 모르겠다고 생각되는 분께 적극 권하고 싶은 책입니다.

일곱 개의 챕터로 구성된 이 책은 어느 한 쪽에 치우침 없이 다방변의 주제에 대한 책들을 적당한 호기심과 흥미를 유발하도록 소개하고 있습니다.

저 역시도 이 책을 보면서 희망도서 목록에 상당한 책들을 추가했고 지금 열심히 읽고 있는 중입니다.

저처럼 두루뭉술하게 주절주절(?) 책을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소위 말하는 에센스만을 짧고 간략하게 소개해 주고 있는 책입니다.

솔직히 꽤나 열등감과 부러움을 자아내게 만드는 책이죠.

그래도 평소에 책 좀 읽는다고 자부했었는데 이곳에 소개된 책들을 살펴보고는 읽지 않은 책이 훨씬 더 많다는 걸 알고는 번데기 앞에 주름잡은 스스로에 대해 반성하게 만든 계기도 됐습니다.

책의 저자 이권우!

서평잡지 <출판저널>의 편집장을 했던 사람입니다.

그야말로 책에 파묻혀 지냈던 사람이고 현재도 책을 통해 여전히 밥벌이를 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스스로 “호모 부커스”를 자처하는 사람이기도 하죠.


“호모 부커스”

책 읽는 인간 존재라는 뜻의 신조어죠.(사실은 꽤 오래된 단어이긴 합니다만...)

이 말 속에는 “공유”의 의미도 함께 포함되어 있습니다.

흔히 독서라는 건 지극히 개인적인 행위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책 읽는 자의 궁극적인 목적은 저 또한 “공유와 소통”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작가 개인과의 생각과 감정 공유를 넘어 더 많은 타인과의 적극적인 소통의 시작이 “독서”의 매력이라고 개인적으로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호모 부커스”들은 상당히 개방적이며 지독히 현실적이기까지 하죠.

어설픈 독서가들은 현실과 이상 사이의 혼동을 겪게 되지만 “호모 부커스”들은 현실과 이상을 명확하게 구분함으로써 스스로 최대한 편견 없이 판단하고 평가하는 공정함까지 소유하게 됩니다.

“박학다식”이라는 말 속에 항상 “다독”이 포함되어 있는 이유기도 하죠.

눈이 갖는 기억력, 그래서 저는 책을 통해 얻게 되는 기억과 지식들에 대해 차별성을 두게 되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책은 말이죠...

사람을 참 조용히 수다스럽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이 책, <죽도록 책만 읽는>도 그런 의미에선 상당히 수다스러운 책이죠.

그런데 그게 “바글바글” 떠들며 밖으로 퍼지는 소란스러움이 아니라 “소곤소곤” 다가오는 울림이라는 게 그 차이점이죠.

무려 110권이나 되는 책들의 수다를 들을 수 있습니다.

신문을 펼쳤을 때 부담감 없이 재미있게 보게 되는 한 컷짜리 카툰 같다고나 할까요?

짧은 글 속에 필요한 것들만 쏙쏙 알차게 들어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짧은 글 속에 촌철살인의 문구들을 자주 만나게 됩니다.

가령, “고전”에 대해 말하면서,

“고전, 제목은 알아도 정작 읽어보지 않은 책”이라는 스피노자의 말을 인용하면서 정곡을 찌르는 이야기를 시작하죠.

“...... 오늘, 다시 고전을 읽는 데는 다른 무엇보다 토론과 논쟁의 정신이 필요하다. 세월의 담금질을 겪으면 겪을수록 그 정신의 순도가 높아지는 것을 일러 고전이라 한다. 앎과 지혜의 고갱이가 가득 쌓인 곳간인 셈이다. 그러나 이 곳간은 좀처럼 자신의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 지적 호기심이나 의무감만으로 고전을 읽으면서 고전을 면치 못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그 정도로는 권위와 명성, 그리고 오해의 더께가 잔뜩 끼인 고전의 빗장을 열어젖힐 수 없다. 나는 고전의 문을 여는 열쇠는 치열한 문제의식이라고 여겨왔다. 우리 시대의 문제상황을 깊이 이해하고, 그 타개책을 찾기 위한 지적 분투의 필요성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을 달리 표현하면, ‘질문만들기’라 할 수 있다.

질문을 만든 사람이 고전을 경전처럼 여길 리 없다. 고전의 지은이와 토론과 논쟁을 벌이게 마련이다. 막장을 뚫고나갈 지혜를 묻고, 그 답이 현재적 가치가 있는지 토론한다. 도전적인 토론은 논쟁을 불러일으킨다. 이 과정에서 지은이의 사상이 안고 있는 한계가 드러나며, 이를 넘어서기 위한 대안을 찾게 된다. 이쯤 되면, 고전의 주위를 맴도는 지은이라는 ‘유령’이 가만히 당할 리 없다. 해석의 오류를 지적하거나 자신의 다른 책을 참조해야 한다고 복화술로 변호하기도 한다. 고전을 읽는 행위는, 그러므로 묵독일 수 없다. 제대로 읽으면 그것만큼 소란스러운 책읽기가 없다. 자신도 모르게 카니발적 책읽기에 몰두하게 된다..... “

고백컨대, 

저를 완벽히 KO패 시킨 문구였습니다.


“왜 책을 읽어야 하는가?” 그리고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하게 만드는 책입니다.

책은 그러니까 “앎과 함”의 일치를 위해 우리에게 꼭 필요한 행위라고 이 책은 말합니다.

환상은 현실보다 힘이 세다고 하죠. 그래서 우리는 환상에 머물고픈 욕망에 늘 빠지게 됩니다. 그게 어쨌든 일반적인 힘의 논리니까 말입니다.

책은. 그러니까 그 환상을 극도의 차가운 정열로 바라보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를 “~~카더라” 통신에 빠지지 않고 바른 시각과 주관을 갖게 만들어 주죠.

생각해보면 정말 책만큼 누구에게나 민주적인 것도 없는 것 같습니다.

책장을 열기만 한다면 누구에게나 공평한 세계를 그것도 비밀 없이 송두리째 보여주죠.

“다 열어보였으니 어디 한 번 맘껏 들여다봐라!”

책벌레들을 그래서 흔히 관음증 환자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책에 새겨진 다른 사람의 욕망을 책장을 커튼 삼아 훔쳐보는 책벌레들...

그러나 책을 탐하는 관음의 시선은 훨씬 더 근원적이고 깊고 고요합니다.

책을 구하고, 읽고, 즐거움을 나누는 모든 과정에 대한 일종의 은밀한 흥분감이죠.

그래서 책의 자궁이라는 것이 있다면 저 역시도 기꺼이 몸을 웅크려 작은 태아가 될 용의가 있음을 고백하게 됩니다.

“죽도록 책만 읽어도” 다 읽혀지지 못할 책들의 세계.

그 책들의 세계 속에 몸을 웅크리고 지독히 탐욕스런 관음의 시선으로 책들을 바라보자 권하고 싶습니다.

마술사의 비밀을 아는 순간 눈속임의 실체가 드러나는 게 아니라 드디어 스스로 같은 마술사가 되는 거라고 하죠.

오늘 해리포터의 세계로 함께 들어가자 여러분께 손 내밀고 싶습니다.

깊고 고요하고 간절하고 농밀한 관음의 세계가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Posted by Book끄-Book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