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끄적 끄적...2011. 5. 18. 06:27
개인적으론 에세이를 그리 좋아하지는 않지만
잠깐 쉬어보자 생각했다.
그래서 가볍게 그렇지만 생가할 수 있는 것들을 눈에 담아보기로.
특히나 법정스님의 글들은 묘하게도
거의 손에 잡지 않게 된다.
아무래도 도량(?)이 부족하거나 혼자 뜨끔해져서 그럴테지만.
(이런걸 보고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해야 하나!)


류시화의 글들 그렇고 법정 스님의 글들도 그렇고
아상하게 참 안 읽게 된다.
처음부터 순서대로가 아니라 아무 페이지나 펼치고 읽기 시작해도 괜찮은 그런 책.
읽는 눈보다 더 오래 생각하고 반성해야 하는 책.
아마 그게 부끄러워서였는지도 모르겠다.
가끔 궁금하다.
수도자이긴 하지만 그렇게 외따로 떨어진 곳에서 생활하는게 힘들진 않았을까?
평생을 아주 단촐하고 소박하게 살다가
덜컥 세상에 큰 가치를 남기고 떠난 법정 스님.
하지만 세상은 그분이 남긴 뜻을 그대로 받아들인 마음이 없는 모양이다.
소각같은 유언을 남겼지만
아직 그의 글들은 여전히 생전때보다 더 세상에 가득하다.
씁쓸하겠구나....
오래된 법정의 글을 읽으면서 뜬끔없이 이런 생각에 빠진다.
무.소.유.
참 요원하고 허망한 바람일 수 있구나 싶어 안스럽다.
어쩐지 평화로운 쉼이 담보인 것 같아서...


<야생초 편지>의 저자 황대권.
한때 MBC 일반에 <책책책을 읽읍시다>라는 프로가 있었다.
거기에 이 책이 소개되고 나서 공전의 히트를 쳤었고
황대권이라는 파란만장한 사람에 대하 사람들이 알기 시작했고
그의 책을 읽기 시작했다.
(일시적인 붐이었다는 게 안타깝긴 하지만 그래도 그게 어딘가!)
억울한 옥살이는 사람의 일생을 의외의 곳으로 옮겨 심는다.
이 사람의 삶도 딱 야생초같다.
가녀리지만 굳건하게 어느새 뿌리를 내리고 일가를 이룬 야생초같은 사람.
이 책은 전작의 아기자기한 재미는 적지만 오래 두고 쓴 일기같이 담백한 글이다.
진솔하고 그리고 개인적인...
가끔 궁금하다.
지금은 어느 곳에서 어떤 뿌리를 내리고 있는지가...

내가 바랐던 모습이기도 하다.
의외의 곳으로 옮겨져 그 곳에서 뿌리 내리는 것.
바람은 참 요원하고 그리고 아직 거칠다.
장미를 부러워 하기는커녕 나는 민들레조차도 눈물나게 부럽다.
민들레일 수 있다면...
바람은 여전히 벅차다.
Posted by Book끄-Book끄
읽고 끄적 끄적...2009. 12. 14. 06:12
놀랐다.
<아담이 눈뜰 때>의 작가 장정일이 무려 10년만에 쓴 소설 <구월의 이틀>
그리고 또 놀랐었다.
그가 변한 것 같아서...
그런데 역시 그는 변하지 않았다.
동시에 또 많이 변하기도 했다.
20대 초반에 만난 장정일이란 작가는 내겐 거부감과 동의어였다.
너무나 과감하고 노골적인 성적인 표현이 심한 불쾌감까지도 느끼게 했다.
그의 소설들은 그런 초기의 선입견으로 인해 참 안 읽었다.
그에 반해 그가 쓴 <독서일기>들은 참 잘도 찾아 봤었는데...



금과 은이 은과 금으로 변해가는 과정은 섬뜩하리만치 무섭다.
결국 정치는 그것을 버리고 문학의 길을 선택하고
작가는 위조지폐범이라는 오명(?)을 뒤집어 쓴 체 신 우익의 정치 의식 앞에 자리를 내준다.
어쩌면 세속 국가이기에 가능한 역할 바꾸기인지도 모르겠다.
"우익청년 탄생기"라는 설정은 오히려 너무나 신선하기까지하다.
읽으면 읽을 수록
재미 이외의 것으로 인해 숨이 막힌다.
이 세기에 대한 조롱이었을까? 아니면 희망이었을까?
노무현 대통령 집권 전반에 대해 작가 장정일은 우익인가? 좌익인가?
복잡해진다.
류시화의 시 <구월의 이틀>을 꼼꼼히 읽어보면 답이 나올까?



대문학이란 "대작가"가 쓴 것이다. 대작가란 바로 "죽은 작가", 곧 작고한 작가를 말한다. 그렇다고 오해는 말아라. 죽은 작가들이 다 대작가가 되는 것은 아니다. 작고한 지 몇 백, 몇 천 년이 되었는데도 여전히 우리와 같은 현대인들에게 영감을 주고 사색의 기원이 되어주는 살아 있는 작가, 죽은 지 오래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 자신의 고민이나 세계의 곤경을 풀기 위해 찾아볼 수밖에 없는 작가. 그런 작가가 대작가다. 아무리 유명하거나 업적이 탁월하더라도 아직 살아 있다면 그냥 "작가"이고, 좀 더 미안하지만 죽고 나서 점차 잊히기 시작한다면 그 또한 작가다. 요약하자면 작가들은 죽고 나서야 비로소 "작가생활"을 시작한다. 살아생전의 작가생활은 호구를 면하기 위한 고통에 불과하지만, 죽는 순간부터 시작하는 제2의 작가생활은 망각과의 싸움이다. 그런 뜻에서 지금 살아 있는 작가들은 진정한 작가생활을 하고 있는 게 아니고, 그냥 호구를 면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죽었으면서도 여전히 작가생활을 하고 있는 작가가 대작가이고, 그런고도 대문학은 절대 옛날 작품이 아니다.



우리가 김대중이나 노무현을 따르는 무리를 향해 "빨갱이"와 같은 인장을 찍어대는 것은, 그만큼 우리들에게 논리가 없기 때문이야. 달시 말해 저 인장들은 그들과 더 말하지 않겠다는 우리의 결단을 보여주는 것들이지. 그런데 그들과 더 말하지 않겠다는 우리의 결단은 바로 우리들이 쓸 수 있는 논리가 풍족하지 않다는 것을 역으로 드러내주는 증거고, 저 인장들이야말로 논리로는 그들을 이길 수 없다는 우리의 탄식이나 같은 거야. 논리로 못 이기니까, 무턱대고 "빨갱이"와 같은 낙인을 찍는 거지. 이미 우리는 이승만 시절부터 "말 많으면 빨갱이"라는 말을 사용해왔는데, 그것의 반대말이 "할 말 없는 우파"지. 이처럼 논리에서는 지고 들어갈 수밖에 없다는 게, 우리들의 한계고 절망이야.
한마디로 노무현 대통령 탄핵은 김대중에 이어 연속해서 진보 정권이 들어선 것에 위기를 느낀 보수주의 세력의 사활을 건 총궐기였으며, 노무현 이후 세 번이나 연속해서 좌파 정권이 들어서면 다시는 자신들이 발붙일 곳이 없다는 조바심의 발로였다.


작가가 된다는 것은 위조지폐범이 된다는 말이야. 그건 죄지. 왜냐하면 도능 중앙은행에서만 찍어낼 수 있기 때문이야. 돈만 그런 게 아니라 한 국가나 사회에서 통용되는 윤리나 가치, 질서나 신념 따위도 공인되거나 권위를 가진 합법적인 기관을 통해야해. 그런 걸 만드는 곳이 바로 법원이고 학교고 종교지. 기관은 아니지만 전통이나 고전 같은 것도 공인된 가치를 찍어내는 무형의 기관이랄 수 있지. 그런데 작가는 그런 기관에서 만들어내는 것과 다른 가치를 만들어 퍼뜨리는 사람이야. 다시 말해 중앙은행에서 찍은 게 아니라 불법으로 찍은 위조지폐를 유통시키는 사람이 작가지. 일단 나는 그럴 능력이 없어. 게다가 나는 워낙 중앙은행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속물이기도 해. 언젠가는 보란 듯이 중앙은행의 총재가 되고 싶지. 위조지폐 따위나 만들며 한평생을 사는 건 좀스러워



(금) : 나는 소설을 쓰겠어. 언젠가 너의 중세의 알레고리였던 "바보들의 배"에 비유해서, 문학을 "패배자들의 배"라고 불렀지. 문학은 세상에서 패배한 사람들이 타는 배나 같다고.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아까 말한 국민작가라는 개념으로부터, 나는 문학이란 현실로부터 패배한 자들의 산물이라는 일반적인 솔설은 물론이고 너의 위조지폐범론을 뛰어넘는 가능성을 발견했어. 그건 네가 하려는 정치보다 보잘것없거나, 힘이 없는 게 결코 아니댜.

(은) : 나는 배의 바닥짐 같은 사람이나 가치를 좋아해. 바닥짐을 싣지 않으면 강한 바람이나 큰 파도에 휩쓸려 난파할 우려가 커. 그래서 멈 바다를 항해하는 배는 반드시 바닥짐을 싣고 다녀. 바닥짐이 없으면 배가 침몰하는 것처럼, 보수가 없으며 국가나 사회도 뒤집어져. 그래서 나는 보수주의자가 됐어.

Posted by Book끄-Book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