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끄적 끄적...2011. 1. 20. 06:27
하나의 단어에 시만큼 많은 세계와 의미를 담고 있는 게 있을까?
어쩐지 시인들은 나와는 다른 언어를 쓰는 제 3의 사람들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다른 언어라는 게 다행스럽게도 이해불가는 아니다.
가령 오규원에게 "여자" 라는 단어는 얼마나 깊고 넓고 그리고 애틋하고 여린가.
정현승에게 "눈물"은 한 세상의 탄생만큼 크고 위대하다.
천상병에게 "새"라는 한 음절의 단어는 또 어떤가?
누군가에게는 스쳐 지나가는 단어에 불과할 뿐인데
시인에게 그 단어는 세계의 모든 것 보다 더 모든 것이다.
그래서 시를 성큼성큼 빠르게 읽으면 왠지 그 단어들에 많이 미안해진다.
누군가에게 한 편의 짧은 시는 평생을 읽어도 읽어도 다 못 읽는 완결되지 않는 대하소설이 될 수도 있겠다.
문득 시 속 단어가 담고 있는 세계가 너무 넓고 깊어
그 안에서 길을 잃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나는 하게 된다. 거침없이...
시를 읽는 눈은 그래서 차지게 야무지면서도 듬성듬성하다.
시인 김승희는 말했다.
"시인은 천형을 앓는 무당이다"
가슴에 날이 바짝 선 작두 하나 올라온다.
맨발로 그 위를 올라서란다.
비릿하고 섬뜩하지만 거부할 수 없는 길.
천형의 삶!



시인들은 천성적으로 오래된 미래를 볼 줄 아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들은 마지막 순간에도 시를, 글을 놓치 못하고 제자의 손바닥에까지 쳔형의 문신을 새긴다.
한적한 오후다
불타는 오후다
더 잃을 것이 없는 오후다
나는 나무 속에서 자본다

"만성폐쇄성폐질환"을 앓다 2007년 타계한 시인 오규원은
제자의 손바닥에 유언같은 마지막 문장을 남겼단다.
어쩐지 처연하면서 쿨럭하고 잔기침이 쏟아지는 문장이다.
어디선가 한 잎의 쬐그만 여자 낙엽처럼 또르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그 여자 남기고 시인은 정말 눈을 감았을까?
어쩌면 지금도 시인은
자신의 단어들과 함께 만나지지 않는 두 철길에 나란히 서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 길에 자갈돌처럼 깔려 있는 숱한 기다림들.
눈 앞의 삶은 끝나도 기다림은 결코 끝이 없다.
Posted by Book끄-Book끄
달동네 책거리2009. 2. 9. 06:05
 

<맛> - 로알드 달


 맛

오늘은 어디 저한테 맛 좀 한번 보실래요?

ㅋㅋ 오늘 소개할 책 이야깁니다(설마 혹시 긴장하신 건 아니시죠?)

로알드 달...

이름이 익숙치 않은 분들이 많겠지만 <찰리의 초콜릿 공장>, <마틸다>, <그렘린>의 작가라고 하면 다들 무릎을 칠 것 같습니다.

그 기발한 상상력과 살벌하다 못해 발랄한 반전의 묘미라니...

이 사람, 천부적인 이야기꾼에 엄청난 내기꾼이라고 하네요.

이야기를 통해 독자와 엄청난 내기를 하는 작가라고 할 수 있죠.

그런데 그 내기에서 번번이 독자가 지게 된다고 하니 그의 내공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되시겠죠?

1990년에 작가가 타계했을 때 누군가가 말했다죠.

로알드 달은 자신의 전문분야인 이야기를 들고 급기야 하느님과 내기를 하러 이 세상을 떠났다고...

어쩐지 그의 기발한 상상력이 아직도 그곳에서 현재 진행형으로 이어지고 있을 것만 같습니다.

혹시 알아요?

조니 뎁이 주연한 <찰리의 초콜릿 공장>을 보고 그의 팬이 되어 버렸을지...


<맛>

10편의 짧은 이야기가 주는 풍미가 아주 다양합니다.

눈과 입이 즐거운 디저트가 쭉 나열되어 있는 느낌이랄까요?

왜, 디저트 앞에서 고민하게 되쟎아요.

go냐... stop이냐...

이 책도 그런 느낌입니다.

어쩐지 좀 이상하고 수상한 기분이 들게 만들죠. 그냥 단순히 재미있다고 하면서 가볍게 읽어버리기엔 좀 찜찜한 구석이 있습니다. 머리를 쥐어짜며 반전의 반전을 풀어야 하는 내용들이 있는 것도 아니면서요.

일단, 첫 느낌은...

그냥이 아니라 너무 재미있다는 겁니다.

짧은 블랙 코메디를 보고 있는 느낌.

인간의 욕망과 어리석음에 대한 비웃음을 아주 전면적으로 그것도 유쾌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것도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으면서 말이죠.

블랙 코메디가 불편한 건 어쩐지 내 이야기를 빗대서 두어번 비꼰것 같은 “뜨끔함” 같은 거쟎아요, 그런데 이 책에선 그 뜨끔함조차도 그냥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살벌한(?) 결말을 목격해도 웃게 되는 거죠.


어리숙한 시골사람들의 집에 방치되어 있는 골동품.

그들에게 그 골동품은 별 가치도 없는 그저 낡고 오래된 물건에 불과할 뿐입니다.

머리 좋은 골동품 가구상은 목사로 변장해서 시골 마을을 돌아다니며 흑 속의 진주를 찾아내 이미 꽤 짭짤한 수입을 올리고 있죠.

혹시나 주민들의 의심을 살까봐 그의 커다란 스테이지 왜건은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숨겨놓고 천천히 마을을 걸어 다닙니다.

번쩍! 이 골동품상의 눈에 아주 엄청난 물건(옷장)이 포착되네요.

별 관심도 없다는 듯, 그저 자신의 오래된 테이블에 어울릴만한 다리라며 촌부들과 거래 아닌 거래를 시작합니다.

“뭐 저는 그저 다리만 필요할 뿐입니다.... 나머지는 저에게도 별로....”

드디어 거래를 성사시킨 골동품상은 벌떡거리는 가슴을 안고 경매시장에서 높은 값을 받을 상상을 하며 물건을 실을 스테이지 왜건을 가지러 서둘러 문을 나섭니다.

그 사이, 촌부들은 이야기를 하죠.

“저 목사에게 필요한 건 다리뿐이라고 했지? 맘이 변할 수도 있으니까 우리가 빨리 도끼로 이 옷장을 쪼개 놓자고....”

골동품상 입장에서 본다면 식겁할 일이 지금 자신이 나온 문 뒤에서 벌어지고 있는 중이죠.


이런 식의 이야기들입니다.

설령 결말이 훤히 눈에 보일지라도 끝가지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는 강점이 있죠.

그리고 이 부분이 작가를 대가의 반열에 올려놓은 이유이기도 하구요.

살인의 도구를 찾는 경찰들에게 버젓이 그 살인도구로 식사를 만들어 증거인멸을 하는 아내, 그리고 최고의 화가가 무명시절 그린 문신을 가진 사람의 피부가 어느날 그림시장에 등장하기도 하고, 남편 몰래 8년간 바람을 피운 아내가 애인에게서 받은 이별선물(모피코트)이 남편의 애인 등에 걸쳐지는 상황...

뭐 따지고 보면 인간의 달갑지 않는 단면들에 대한 고발이라고 할 수도 있겠네요.

파라독스!!

아마도 로알드 달이 말하고 싶었던 건

인간이 갖는 자기 모순에 대한 경고였던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이 책은 단지 “맛”만 좋은 책은 아닌 것 같네요.

달콤한 초콜릿이 공포의 도가니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

경고치곤 꽤 임펙트 강한 방법 아닌가요?


* 꽤나 맛갈나는 번역에 슬쩍 앞표지를 다시 보게 됩니다.

  역시나 제가 좋아하는 세 명의 번역가 중 한 명이네요.

  "정영목"

  일단 이분의 번역한 작품이라면 저는  80% 정도는 인정하고 들어갑니다.

  이 분을 번역하면 이야기가 다시 새로워지는 느낌이거든요.

  저에겐 주제 사라마구와 거의 동일어로 생각되는 번역가이기도 하구요.

  주제 사라마구의 심각함 작품 외에도 번역의 놀라움을 음미하게 만드는 사람 중 한명입니다.

  번역도 작품이예요~~~~ 


Posted by Book끄-Book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