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혁'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2.01.11 <Steve Jobs> - 월터 아이작슨
  2. 2009.07.20 달동네 책거리 55 : <추 락>
읽고 끄적 끄적...2012. 1. 11. 05:57
주말을 이 어마어마한 사람과 함께 보냈다.
무료 925 페이지에 달하는 월터 아이작슨의 <Steve Jobs>를 손에 잡은 첫 느낌은,
엄청난 놀라움과 소심한 망설임이었다.
왠만한 책 3권을 합쳐놓은 것 같은 백과사전적 두께가 주는 묵직한 압도감이란!
지하철에 서서 책장을 넘기는데 손목이 시큰했다.
저절로 분책(分冊)의 소망이 간절해지는 무게였다.
다 읽으려면 시간이 꽤 걸리겠구나 싶었는데 이틀만에 읽었다.
이미 거의 대부분 알고 있는 내용인데도 여전히 처음 아는 사실처럼 재미있고 흥미로웠다.
애플 제품이라고는 단 하나도 없으면서 (그 흔한 아이폰도 없다)
나는 스디브 잡스와 애플의 매니아라고 자처한다.

이 전기의 시작은 스티브 잡스에서부터다.
아인슈타인, 벤저민 프랭클린, 키신저 등 세계적 위인의 전기를 썼던 유명한 전기 작가 월터 아이작슨에게
스티브 잡스가 오느날 전화를 했단다.
자신의 자서전을 써달라고 부탁하기 위해서.
...... 우리 아이들이 나에 대해 알았으면 했어요. 아이들이 나를 필요로 할 때 항상 곁에 있어 주진 못했지요. 그래서 아이들이 그 이유를 알기를, 내가 무엇을 했는지 이해하기를 바랐습니다. 그리고 몸이 아프기 시작하니까 내가 죽고 나면 다른 사람들이 나에 관한 책을 쓸 거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하지만 그들이 뭘 알겠습니까? 제대로 된 책이 나올 수가 없을 겁니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직접 내 얘기를 들려주어야겠다 싶었지요 ......
성마른 장작같이 꼬장한 스티브 잡스의 고백에 나는 또 뭉클해졌다.
이 사람, 마지막까지도 인문학적인 감각과 과학적 재능을 결합한 완벽주의자다.
이게 바로 스티브 잡스다!



나는 가끔 스티브 잡스를 생각한다.
어쩌면 나도 그의 현실 왜곡장(reality distortion field)에 빠져버렸는지도 모르겠다.
어이없게도 그가 어딘가에 살아서 계속 혁신적인 제품들을 만들어내고 있을 것만 같다.
이미 발표된 아이디어지만 아무도 사용하지 않아 사장되어 버린 그것을 지금도 기막히게 찾아내
환상적으로 접목시켜 아무도 생각해내지 못했던 제품을 비밀리에 만들고 있을 것만 같다.
애플의 페쇄적인 end to end 통합 서비스 방식 일괄 솔루션은
내겐 일종의 미스터리고 신비다.
이런 애플을 두고 폐쇄적인 기업이라고 비난하는 사람도 많지만
난 일종의 완벽주의자적인 자신감의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솔직히 사용자 대부분은 그런 폐쇄적인 서비스로도 어떤 제품보다 훨씬 더 개방적인 생활을 하고 있다.
이 모든 것들의 시작이 스티브 잡스에서 비롯됐다.
그리고 스티브 잡스는 영원한 애플의 심장이다.
그가 살아있든, 살아있지 않든!
경쟁에서 이기거나 돈을 많이 버는 게 목표가 아니라
가능한 한 가장 위대한 일을 하는 것, 나아가 거기서 한 발자국 더 아나가는 게 스티브 잡스의 목표였단다.
확실히 스티브 잡스가 복귀한 애플로 세상을 더 살기 좋은 곳이 됐다.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만큼...)
스티브 잡스는 두 가지 유산을 남기고 싶어 했단다.
혁신과 변혁을 선도하는 위대한 제품을 만드는 것과
영구히 지속될 수 있는 회사를 구축하는 것 두 가지가 그것이다.
그는 애플이 스스로 재창조할 수 있는 기업이기를 꿈꿨고 스티브 잡스가 살아 있는 동안은 확실히 그랬다.
현재 애플의 CEO는 스티브잡스가 병가 중에 애플을 훌륭히 이끈 팀쿡이다.
(오늘 아침 인터넷 뉴스에 애플의 팀 쿡이 세계 최고 연봉을 받는 CEO라는 기사가 실렸더라)
스티브 잡스 사후 아직 맥월드 행사도 신제품 출시도 없다.
애플 제품이라고는 단 하나도 없는 나지만 지금 기다리고 있다.
스타브 잡스가 부재하는 애플의 새로운 혁신 제품이 과연 무엇일지...

스티브 잡스는 말했다.
"나는 일에서도 삶에서도 행운을 누렸습니다.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지요"
멋지다! 이 사람!
세상을 상대로 이런 고백을 당당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영원한 구루인 애플은
이제 드디어 신화의 세계로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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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히 장악하고 있는 것처럼 굴어라. 그러면 사람들은 그런 줄로 알 것이다.

애플의 마케팅 철학 - 공감, 집중, 인상

단순함이란 궁극의 정교함이다. 진정한 예술가는 단순화에 목숨을 건다.

기능은 형태를 따라간다

내가 곧 죽는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 그것은 인생의 중대한 선택들을 도운 그 모든 도구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외부의 기대와 자부심, 망신 또는 실패에 대한 두려움 등 거의 모든 것이 죽음 앞에서는 퇴색하고 진정으로 중요한 것만 남더군요.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을 상기하는 것은 아까운 게 많다고 생각하는 덫을 피하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우리는 이미 알몸입니다. 가슴을 따르지 않을 이유가 없지요.

자신이 쓰고 싶은 물건을 만든다

필요성조차 못 느끼다가 어느 순간 그것 없이는 살 수 없게 되는 기기들이 있다. 그는 이런 기기들을 요리해 내는 무시무시한 능력을 가졌다. 애플은 기술과 선(禪)이 결합된 경험을 제공하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를 제공하는 유일한 방법은 폐쇄형 시스템일 것이다.

폐쇄형 시스템은 혹평을 받긴 하지만 매우 효과적이며 사용자들에게 이익을 안겨 준다. 기술 업계에서 스티브 잡스보다 더  확실하게 이를 입증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애플은 하드웨어와 스프트웨어, 서비스를 일괄 제공하고 그것들을 철저히 통제함으로써 끊임없이 경쟁자들을 앞지르고 빛나는 제품을 내놓을 수 있다.

여정 자체가 보상이다

잡스가 만든 제품들에는 그의 성격이 반영되었다. 스티브 잡스 자신의 철학도 그러했다. 그의 성격과 열정, 즉 완벽주의, 비범한 재능, 열망, 예술성, 악마성, 통제에 대한 집착은 그의 비즈니스 접근 방식 및 거기에 기인한 혁신적인 제품들과 얽혀 있다.

잡스의 성격과 제품들을 한데 묶는 통일장 이론은 그의 가장 두드러진 특성, 즉 맹렬함으로 시작한다.

내 열정의 대상은 사람들이 동기에 충만한 위대한 제품을 만드는 영속적인 회사를 구축하는 것이었다. 그 밖의 다른 것은 모두 2순위였다. 물론 이윤을 내는 것도 좋았다. 그래야 위대한 제품을 만들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윤이 아니라 제품이 최고의 동기부여였다..... "고객에게 그들이 원하는 것을 줘야 한다" 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내 방식이 아니다. 우리의 일은 고객이 욕구를 느끼기 전에 그들이 무엇을 원할 것인가를 파악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직접 보여 주기 전까지는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모른다. 그것이 내가 절대 시장조사에 의존하지 않는 이유이다. 아직 적히지 않은 것을 읽어 내는 게 우리의 일이다.

내가 하는 모든 것은 다른 사람들의 노고와 우리가 올라설 수 있도록 어깨를 빌려 준 사람들의 성과에 의존한다. 그리고 우리 중 많은 사람들 역시 인류에게 무언가를 기여하기를, 그러한 흐름에 무언가 추가하기를 바란다. 이것의 본질은 우리가 각자 알고 있는 유일한 방식으로 무언가를 표현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재능을 사용해 깊은 감정을 표현하고 이전 시대에 이뤄진 모든 기여에 대해 고마움을 표현하고 그 흐름에 무언가를 추가하려고 노력한다. 이것이 나를 이끌어 준 원동력이다.

죽은 후에도 나의 무언가는 살아남는다고 생각하고 싶군요. 그렇게 많은 경험을 쌓았는데, 어쩌면 약간의 지혜까지 쌓았는데 그 모든 게 그냥 없어진다고 생각하면 기분이 묘해집니다. 그래서 뭔가는 살아남는다고, 어쩌면 나의 의식은 영속하는 거라고 믿고 싶은 겁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냥 전원 스위치 같은 것일지도 모릅니다. '딸깍!' 누르면 그냥 꺼져 버리는 거지요. 아마 그래서 내가 애플 기기에 스위치를 넣는 걸 그렇게 싫어했나 봅니다.

Posted by Book끄-Book끄
달동네 책거리2009. 7. 20. 06:21
 <추락> - J.M. 쿳시


 추락


지적이면서 끔찍하게 치열한 책을 만나게 되면 등골이 오싹해지는 기분이 듭니다.

그리고 나면 정말 미칠 정도로 그 내용 속에 빠져들게 되죠.

오랜만에, 정말 오랜만에 그런 경험을 다시 했습니다. 지금 소개하는 <추락>이 바로 그런 충격을 안긴 책입니다.

오싹하다 못해 머릿속까지 서늘해지는 느낌.

J.M. 쿳시라는 작가의 책을 처음 읽게 된 게 도무지 억울하고 속상해서 화가 다 날 정도라고 하면 이해가 되실까요?

이 소설의 원 제목은 <치욕>입니다.(개인적으로 우리나라에서 왜 “추락”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됐는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번역가 왕은철이란 분이 작가와 합의해서 제목을 고쳤다고는 하는데 “치욕”이라는 원제가 더 책의 내용에 적합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J.M. 쿳시!

가장 타협하지 않는 작가이자 가장 분명하고, 가장 용감한 작가로 알려진 사람!

2003년 스웨덴 한림원은 그를 96회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지목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플리처상보다 더 권위 있다고 알려진 부커상을 그것도 한 작가에게 두 번 주지 않겠다는 전례를 깨고 세계 최초로 두 번이나 수상한 작가이기도 합니다.

부커상 심사위원들은 “쿳시가 수상식에 참석하지도 않을 것이고 그 이후의 만찬장에서도 그의 자리가 비어있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그를 선택했다”고 밝히기까지 했네요.

그리고 누군가는 이런 표현을 쓰기도 했습니다.

"그의 글은 아이스 피겔로 얻어맞은 느낌"이라고....

누군가는 또 말합니다.

"심오한 정치의식을 지니면서도 모든 단어들을 아름답게 조합하는 작가"라고요.

그의 글은 비록 이 책이 처음이긴 하지만,

실제로 여기에 나오는 모든 단어들은 에너지로 충만합니다. 그 에너지는 때론 “파렴치”한 욕망의 형태로, 때론 걱정 가득한 “부성애”의 마음으로, 때론 비난과 욕설, 그리고 원망과 싸움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살아 있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 살아 있기에 인정해야 하는 혹은 살아 있기에 떠날 수 없는 사람들의 선택에 대한 이야기.

이 소설 안에는 그런 살아 숨쉬는 현실이 그대로 담겨있습니다.

글의 위대함이란,

그 안에 살아온 시대가 거짓 없이 그대로 투영되어 있을 때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균형과 흥미를 잃지 않으면서도 진실을 품는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우리네 같은 평범한 사람들은 감히 시도하기조차 어려운 일일 겁니다.

J.M. 쿳시, 이 사람의 글은 그래서 그대로 현실이 되어버립니다.


50을 넘긴 “데이비드 루리”.

욕망에 따라 행동하는 대학교수 루리는 스무살 제자 멜라니와 충동적인 사랑에 빠져 잠자리를 함께 합니다. 결국 멜라니 부모의 고발로 진상위원회가 열리게 되고 루리는 추문의 한가운데 위치하게 되죠.

사과문 발표를 강요하는 그들의 요구를 거부한 루리는 결국 대학을 떠나 딸이 살고 있는 남아프리카 농장에 잠시 머무르게 됩니다.

루리는 말합니다.

“내 사건은 욕망의 권리에 관한 것이다. 어떤 동물도 본능을 따랐다는 것 때문에 벌을 받게 된다는 걸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이야기의 초반은 이렇게 좀 불편하고 파렴치하기까지 합니다.

책 제목 그대로 욕망대로 살아가는 한 인간의 추락상을 보여주고 있죠.

이 루리라는 남자의 욕망은 비난받아 마땅하긴 하지만 그래도 당당함과 이유 있음에 무조건 손가락질 할 수 없음을 인정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적어도 이 사람은 자신이 스스로 욕망에 따라 살고 있음을 확실히 인정하고 있으니까요. 잠시 가면을 쓰고 기다리라는 주위의 권고조차 거부할 정도로요.

딸의 농장에서 함께 지내던 루리에게,

어느 날, 3명의 흑인 남성이 딸을 집단 강간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그 일로 급기야 딸 루시는 임신까지 하게 됩니다.

자 이제부터 이 이야기는 “치욕”의 이야기로 전개됩니다.

자신에게 일어난 일들은 단지 추락으로 받아들일 수 있지만 내게서 생명이 시작된 딸에게 일어난 사건은 “추락”을 넘어 “치욕”으로 다가옵니다.

이 사람, 이 치욕의 시간을 어떻게 견디고 버텨나갈까요?

백인 지배가 종결되고 흑인 정권이 들어선 지금의 남아프리카 공화국.

과거 우리나라가 그랬던 것처럼 이곳도 지금 혼란과 변혁의 시대를 통과하고 있는 중입니다.

수백년간 지속되어 온 흑백갈등이 단순히 정권의 교체만으로 하루아침에 모두 해결될 수는 없는 일이겠죠.

어쩌면 혼란의 시대를 살아가기 위해서 그 땅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겐 그만큼의 희생과 포기가 필요한 건지도 모릅니다.

흑인지배 지역에서 살아가기 위해 백인의 선택,

만약 당신이 그 세계를 선택했고, 선택한 그 세계에 머무르기 위해서 값을 치러야 한다면 당신은 어떤 추락도 혹은 어떤 치욕도 감당할 자신이 과연 있을까요?

살아가는 게 욕망의 문제라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는 선택의 문제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흑인들의 땅을 떠나라는 아버지에게 딸은 자신의 선택을 말합니다.

“그러나 어쩌면 다시 시작하기에는 좋은 지점일 거”라고...

딸 루시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걸, 아무 것도 없는 상태로 밑바닥에서 출발하는 걸 배우겠다고 말합니다.

재산도, 무기도, 권리도 위엄도 그 무엇도 없는 본질에서부터 출발하겠다고요.

아비는 딸에게 묻습니다.

“넌 그 아이를 사랑하니?”

딸은 말합니다.

“아니요. 제가 어떻게 그럴 수 있겠어요. 하지만 그것에 관한 한 모성을 믿어야지요. 아버지, 저는 좋은 엄마가 될 작정이에요. 좋은 엄마이자 좋은 사람이 되겠어요. 아버지도 좋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해보세요“

딸은 지금 아버지의 과거에 대해 책망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불안하고 혼란한 세계를 살아내고 있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믿음. 그들이 시작할 때 반드시 지니길 바라는 그 믿음에 대한 묵시론적 바램의 표현이죠.

불안의 시대면 여지없이 나타나 점점 커져만 가는 틈.

그 틈을 매울 수 있는 건 자신에 대한 “믿음” 그 하나뿐이라고 이 책은 말하고 있습니다.

한 세대와 한 세대 사이에는 커다란 장막이 존재한다고 합니다.

그 장막이 내려오는 걸 보지 못했다고 해서 이미 내려진 장막의 존재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는 일이겠죠.

누가, 왜, 어떻게 이런 장막을 내렸는가에 대한 진상규명 탁상공론은 이제 더 이상  필요하지 않습니다.

누군가는 그 장막의 끝을 잡아야만 하겠죠.

다시 끌어 올리든, 힘껏 끌어 내리든 말입니다.

지금 스스로 추락의 시대, 치욕의 시대를 산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다시 한 번 정직하게 그 질문의 방향을 생각해봐야 합니다.

만약 견딜 수 있다면,

그리고 그 자리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당신의 치욕은 결코 당신을 추락으로 이끌진 않을 거라는 걸 믿습니다.


Posted by Book끄-Book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