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끄적 끄적...2013. 5. 17. 20:16

너무나 아프고, 서럽게 읽은 책이다.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와 함게 묶어서 우리 시대의 부모에게 헌정하고 싶은 책이다.

연거푸 2번을 읽었다.

읽을 때마다 죄스러웠고 아팠고 먹먹했다.

내 역시도 부모의 '빨대'였음을 감히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 그날 아침 한 염부가 죽은채 발견되었다....

첫문장부터 나는 무책으로 무너졌다.

소금을 만드는 사람이, 자기 몸 속의 소금을 챙기지 못한채

과도한 노동으로 철저하게 무너지고 쪼그라들어

결국 입 속에 한웅큼의 소금과 함께 소금밭에서 일생을 마감한 염부1을 죽음을 보면서 나는 인정했다.

뭔가 잘못됐다는 걸.

그리고 그 잘못된 게 끝이 없이 이어지고 있다는 걸.

신경숙은 <엄마를 부탁해>에서 말했다.

엄마에게도 엄마가 필요했다는 걸 몰랐다고...

그런데 박범신의 <소금>은 내게 묻는다.

세상 끝에 혼자 버려진 아비에게 너는 언제까지 빨대를 꽂을거냐고...

염부였던 아비가 소금밭에서 죽었다!

홀로 땡볕에서 소금에 반사되는 모든 빛을 온전히 홀로 받아내서면서 버티고 버티던 그 염부를 죽인 건,

소금이 아니다. 햇빛이 아니다.

그를 죽인 건 바로 나다!

박범신의 40번째 장편소설 <소금>은 내게 살인의 이유를 물어왔다.

대답할 말이... 없다.

소설의 문장처럼,

세상의 모든 아버지들은, 아버지이기 때문에, '치사한 굴욕'과 '쓴맛의 어둠'을 줄기차게 견뎌온 것이었다.

 

엄마는 처음부터 엄마였듯, 아버지 역시 처츰부터 아버지라고만 생각했다.

아버지의 푸르른 청춘!

그런 것 따위는 관심도, 상상도, 생각도 못했었다.

막내딸의 생일에 실종된 시우의 아비도

아들의 대학등록금을 위해 부두 하역군으로 '치사해, 치사해"를 입에 달고 살던 명우의 아비도 모두 굴욕을 견디며 살아왔다.

아비가 정말 다 그런거라면!

모든 아비가 다 그렇게 치사하게 산는 거라면!

그 아비들이... 어쩌나...

우린 어떻게 해야 하나...

 

...... 애비들이 치사하면 세상이 모두 치사해진다는 아버지의 말은 하나도 그른 데가 없었다. 치사한 아버지들과 치사함을 견뎌내는 아버지들에겐 모두 '새끼'들이 딸려 있었고, 아버지들의 소망과 달리, 그 새끼들 역시 치사하게 살아가며 "치사해, 치사해, 치사해!"를 대물림받는 중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세상의 모든 아버지는 꼭 둘로 나눠야 한단다.

하나는 스스로 가출을 꿈꾸는 아버지와

다른 하나는 처자식들이 가출하기를 꿈꾸는 아버지로.

농담같은 이 말이 목울대를 막는다.

핏줄이라는 이름으로 아비에게 내미는 자식의 빈 손은 차라리 폭력이고 폭압이다.

이걸 이 책은 뼈 아프게 실감케 만든다.

마치 내 가슴 우에 수인번호가 찍히는 것 같다.

꽃을 들고 괴로운 얼굴빛으로 막 가라앉아가는 아버지.

책의 표지를 보는 게 힘겨워 나는 책장을 덮지도 못하고 활자 앞에 무력하게 무너졌다.

도대체 무슨 자격으로...

 

...... '핏줄'이라는 이름으로 된 빨대는 늘 면죄부를 얻었다.

사람들은 핏줄, 핏줄이라고 말하면서 '핏줄'에서 감동받도록 교육되었다. 핏줄조차 이미 단맛의 빨대들로 맺어져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사람들은 '사랑'이라고 불렀다. 사랑이 빨대로 둔갑했지만 핏줄이기 때문에 그냥 사랑인 줄만 알았다. 빨대를 들고 기웃거리는 젊은이들은 어디에서든 볼 수 있었다. 일차적인 표적은 아버지였다. 스물이 넘은 자식들조차 핏줄이므로 늙어가는 아비에게 빨대를 꽂아도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이 흔한 일이 되었다. 모두 그 체제가 만든 덫이었다.

더 큰 나라가 더 작은 나라를 빨고, 더 힘센 우두머리가 힘없는 졸개들을 빠는 빨대와 깔때기의 구조야말로 자본주의적 세계 구조였다.

핏줄이라고 그것을 넘어설 수는 없었다.

......아버지들은 근엄했지만 아무 힘이 없었다.

체제에 편입돼 과실을 따 오는 대표 선수로서 그럴듯해 보이긴 했지만, 가족들이 거대한 소비 체제에 들어 있는 한 어버지에겐 그 체제를 방어할 항거 능력이 전무했다. 핏줄에게 빠리고 핏줄의, 핏줄의, 핏줄에게도 빨렸다. 핏줄이라는 강력한 이데올로기를 명분으로 삼은 저들이 자신들의 깔때기를 채우기 위해 그 구조를 전적으로 허락하고 돕기 때문이었다. 성장한 자식을 독립시키겠다고해도, 핏줄이므로 아버지만이 비난받는 이 구조는, 체제의 입장에선 양보할 수 없는 규범이었다 ......

 

세상에 가장 힘든 노동이 바로 소금밭에서 일하는 염부의 노동이란다.

그 염부의 노동으로 소금은 세상의 모든 맛을 다 갖게 된다.

단맛, 신맛, 짠맛, 쓴맛,

소금의 맛은...

단지 짠맛만이 전부는 아니었구나!

소금이 가진 세상의 이 모든 맛이

힙겹고 치사한 노동에 팔리고 자식들에게 굽을 등을 빨리는 아비의 모든 것이라는 걸.

이 소설을 읽으며 아프게 아프게 깨닫았다.

이 치사한 세상을 살아내는 걸 가장 무서워하는 사람이 사실은 아비들였음을 나는 몰랐다.

아니 모른척 했다.

그래서 끝내 시우에게 돌아가지 않는 아비가 나는 다행스러웠다.

 

아마도 나는 이 책을 다시 또 읽게 될거다.

읽을 때마다 나는 끝없는 참회록에 얼굴을 들지 못하게 될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또 다시 이 책을 읽게 될거다.

날마다 고통스럽고 날마다 황홀하기 위해서.

(아마도 나는 황홀보다는 고통쪽에 더 많이 머무를 수밖에 없겠지만...)

 

차디찬 소금이 입 안에 가득하다.

이 소금은 어떻해야 하나... 나는.

Posted by Book끄-Book끄
보고 끄적 끄적...2012. 9. 26. 08:11

<아버지> 

일시 : 2012.09.07. ~ 2012.09.30.

장소 : 동국대학교 이해랑예술극장

원작 : 아서 밀러 <세일즈멘의 죽음>

연출 : 김명곤

제작 : (주)아리인터웍스

출연 : 이순재, 전무송 (아버지) / 장은풍, 판유걸 (아들)

        차유경, 전선아, 문영수, 고동업, 계미경,

        우지순, 권재진, 설현석

 

2005년 남산예술극장에서 아서 밀러의 <세일즈맨의 죽음>이 공연됐었다.

그 당시 영화감독으로 한창 유명세를 떨치고 있던 장진이 연출로 나섰었고, 배우진도 화려했다.

전무송, 전양자, 박상원, 민성현이 아버지, 어머니, 두 아들로 출연했었다.

개인적으로 배우들의 연기가  좋아서 아직까지 기억에 남겨져 있는 작품이다.

특히 전무송, 전양자의 두 사람의 연기는 정말이지 너무 좋았다.

아서 밀러의 <세일즈맨의 죽음>을 한국적(?)으로 각색한 연극 <아버지>

지난 4월에 대학로에서 공연됐던 작품이 이번에 재공연됐다.

얼마전 드라마 "각시탈"에도 모습을 비췄던 배우 김명곤이 재공연에서도 연출을 맡았다.

대한민국에서 아버지로 산다는 것!

연극은 지난하고 피로한 이 땅의 아버지라는 삶을 짙은 비극으로 그려낸다.

 

“너희 아버진 돈도 많이 벌지 못했고, 신문에 이름이 난 적도 없지만 훌륭한 가장이다.

 평생토록 방방곡곡 다니면서 회사 물건을 팔아줬는데 이제는 나이 먹었다고 폐물 취급을 한단다.

 너희 아버진 폭풍 속에서 항구를 찾고 있는 조각배 같은 분이셔.”

 

극 중 어머니의 대사가 가슴을 친다.

이 땅은...

청년도, 아비도, 그리고 여자도(심지어 아직 어린 아이들조차도) 모두 살기 힘든 땅이 돼버렸다.

뼈아프게 슬프다.

해체되고 부서지는 이 땅의 모든 것들이.

 

대배우 이순재의 연기는...

감히 뭐라고 운을 때지 못할만큼 엄청난 존개감이었다.

1935년생, 77세라는 연세가 도저히 믿기지 않을만큼 어마어마했다.

열정적이었고 동작과 대사 하나하나가 꼼꼼했다.

마이크를 쓰지 않는 연극무대에 자신의 소리를 끝자리 관객에게까지 전달시켜야 한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만 생각해서 모든 대사를 버럭버럭 큰소리 치며 할 수는 없지 않는가)

간혹 묻혀버리는 대사들도 있긴 했지만

연세와 공연장 환경을 생각하면 크게 문제될 정도는 아니다.

단지 보면서 좀 이물감이 느꼈던건,

다른 배우들과의 발란스면에서 연세가 너무 많지 않았나싶다.

(아들이 아니라 마치 손주 같아서...)

출연한 배우들 전부 다 연기를 잘했지만 특히 아들 동욱역의 장은풍의 연기는 돋보였다.

너에겐 배짱이 있어서 무슨 일을 하던 다 잘할거라며 비행기를 태우던 아버지.

그러나 그런 아들은 자신의 인생이 시간당 4천 5백원짜리 싸구려 불량품이라며

자신이 이렇게 된 건 순전히 아버지때문이라고 소리친다.

우연히 목격한 아버지의 불륜 현장.

세상에서 가장 위대했던 아버지는 이제 아들에게서 남아있지 않다.

한 순간에 무너져버리고 끝장나버리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아들의 오열은...

비참했다.

그런 아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주기 위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아버지.

2억 3천의 보상금이 아들에게, 

남겨진 가족들에게 과연 새 삶을 선사할 수 있을까?

 

연극 속에서 아버지가 죽은 형에게 읽어주는 마종기의 시는...

이 작품 전체를, 이 사회 전체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씁쓸하고 참담한 시다.

이 시대의 모든 며루치떼들의 비명이 귓속에서 펄떡댄다.

생으로 잡혀 온몸을 비틀며 꾸덕꾸덕 말려지는

이 땅의 모든 아버지가 눈물겹다.

 

 

며루치는 국물만 내고 끝장인가

                                    - 마종기

 

(아내는 맛있게 끓는 국물에서 며루치를

하나씩 집어내 버렸다. 국물을 다 낸 며루치는

버려야지요. 불썽도 없고 맛도 없으니까요.)

 

며루치는 국물만 내고 끝장인가.

뜨겁게 끓던 그 어려운 시대에도

며루치는 곳곳에서 온몸을 던졌다.

 

(며루치는 비명을 쳤겠지. 뜨겁다고,

숨차다고, 아프다고, 어둡다고.)

 

떼거리로 잡혀 생으로 말려서 온몸이 여위고

비틀어진 며루채때의 비명을 들으면.

 

시원하고 맛있는 국물을 마시면서

이제는 쓸려나간 며루치를 기억하자.

 

(남해의 연한 물살, 싱싱하게 헤엄치던

은빛 비늘의 젊은 며루채떼를생각하자.

드디어 그 긴 겨울도 지나고있다.) 

Posted by Book끄-Book끄
읽고 끄적 끄적...2010. 11. 8. 06:33
2009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루마니아 작가 헤르타 뮐러.
얼마전에 <숨그네>를 읽고 얼마나 매혹당했던지...
너무 늦게 그녀의 글을 알게 된 게 맘이 상할만큼 너무나 아름다웠다.
한 줄, 한 줄 내려쓰면 그대로 시가 되는 그녀의 소설은
마치 그림을 보는 것 같고 시를 읽는 것 같다.
화려한 미사여구 없이도 그렇게 보석같은 글을 쓸 수 있다는 게
신비에 가까운 놀라움이자 경이로움이었다.
소설 <저지대>는 모두 19 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1982년 처음 출간될 당시에는 검열로 네 편이 삭제됐었고
나머지 열다섯 편도 대폭적은 삭제와 수정을 거친 후에야 출간될 수 있었단다.
자국 루마니아에서조차 금서 조치까지 내려졌던 그녀의 첫 소설 <저지대>
정치는, 이데올로기는
항상 문학을 두려워하고 급기야 기를 쓰고 억압하려 든다.
그러나 문학은 결국은 이 모든 걸 보란듯이 이긴다.
아름다움이라는 치명적이자 결정적인 무기로...
 


헤르다 뮐러의 소설은 난해하다.
아니 아예 줄거리조차 갖추지 못한 단상들도 많다.
그러나 읽고 있으면 
시를 읽는 것 같고
평화로운 전원 풍경을 그린 그림을 앞아 두고 있는 느낌이다.
불안감 가운데 느껴지는 평온함!
이상하지?
그닥 평화롭고 아름다운 내용이 아닌데도 그렇다.
오히려 비루하고 남루한 사람들의 보잘 것 없는 이야기인데도
나는 그 속에서 지독한 아름다움에 빠져들고 만다.
풍경과 대비되는 사람들의 삶!
그게 바로 현실이기에 눈물나게 아름다운걸까?
잔인하리만큼 솔직하고, 지독히 슬픈!
헤르타 뮐러가 창조해낸 비범한 목소리.
컨템퍼러리 픽션

과장이 아니라 사실이었다.
이 표현은...



나치가 몰락하고 루마니아 독재정권의 횡포가 갈수록 심해지던 그녀의 고향 마을.
헤르타 뮐러는 그곳을 이렇게 표현했다.
“모든 것이 고여 있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 감옥과도 같은 곳" 이라고...
소설 <저지대>는 그 감옥과도 같은 곳에 살고 있는 어린 아이의 일인칭 기록이다.
무관심, 음주, 폭력, 가난.
죽은 아비의 장례식에서 과거 아버지가 저지른 일들을 듣는 딸.
그것도 이웃 사람들에게...
침묵도 웃음이고, 슬픔도 조롱이고, 현실은 거짓이다.
중, 단편의 모음이면서도 한가지 이야기이기도 한 소설.
때로는 몇 줄의 시도 대하장편 소설이 될 수도 있다는 걸
헤르다 뮐러의 언어적 표현을 통해 절감했다.
"목소리 없는 유년 시절"
그녀는 그 시절을 그렇게 말했다.
헤르타 뮐러는 “자기 둥지를 더럽히는”, “수프에 침을 뱉은” 작가로 낙인찍히며,
말 그대로 사회에서 축출당했다.
마을 사람들은 창문을 열고 지나가는 뮐러를 향해 침을 뱉었으며,
뮐러의 가족들은 마을에서 고립되고 말았다
<저지대> 출간 후 해르다 뮐러는
보수적인 독일 소수민 사회에서도, 루마니아 사회에서도 배척당할 수밖에 없었단다.
원하는 작품을 쓸 수도, 루마니아 독재정권에 협조할 수도 없었던 그녀는
결국 1987년 독일로 망명한다.
그러나 독일에서도 그녀는 언제나 루마니아인이었단다.

소설의 뒷부분에 그녀가 2009년 노벨 문학상을 받을 당시의 연설문이 실려있다.

“어떤 면에서 사람은 언제나 타자인 것 같다.
한번 그곳에 소속되지 못하면, 그것으로 끝이다.”

“나는 죽음의 공포에 삶의 욕구로 반응했습니다.
삶의 욕구는 낱말의 욕구였습니다.
오직 낱말의 소용돌이만이 내 상태를 표현할 수 있었습니다.
낱말의 소용돌이는 입으로 말할 수 없는 것을 글로 표현해냈습니다.”


통증은 너무 강렬해서 스스로 저 자신을 파괴한다고 했던가?
그래서 헤르타 뭘러의 소설이 이렇게까지 처연하게 아름다울 수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확실히 파괴를 통해 창조의 유토피아를 만들어냈다.
굴욕을 품위로 바꾸는 그녀의 글들.
많은 걸 잃었기에, 그리고 그 잃음을 견뎠기에
그녀의 글들은 시가 되고 그림이 되고 빛이 된다.
더 많은 낱말들을 사용할수록 우리는 더 자유로워진다고 그녀는 말한다.
낱말이 주는 자유...
어쩌면 내가 책 속에서 그토록 헤매는 이유도 이것 때문은 아닐까?
헤르다 뮐러는...
적어도 그녀의 글은
정확하고 분명했다.
그리고 지독히... 지독히... 아름다웠다.
Posted by Book끄-Book끄
그냥 끄적 끄적...2010. 11. 5. 06:02
매번 남북 이산가족 상봉에 대한 내용를 뉴스로 보거나 기사로 읽을 때면
어쩔 수 없이 눈물이 난다.
내가 결코 알 수 없는 혈육의 헤어짐으로 인한 너무나 길고 긴 고통!
그분들이 흘리는 눈물을 보고 있으면
모든 것이 그대로 정지된다.
언제 또 만나게 될까?
남편을, 아내를, 자식을 또 다시 언제 보게 될까?
이제 고령의 나이가 많아서 건강상의 문제로 결국 상봉을 포기하는 분도 계신단다.
일생 품고 있던 소원을 결국 이루지 못한 분들...
그분들의 회한은 또 얼마나 깊을까?



5년 전부터 치매를 앓고 있다는 남측의 박상화(88) 할아버지는 북측의 딸 박준옥(64)을 보고
그 자리에서 한 눈에 늙은 딸을 알아봤단다.
미안하다며 계속 눈물을 흘리는 모습에 가슴이 아려온다.
가물거리는 기억 속에서도 어린 딸의 모습만큼은 끝까지 붙들고 계셨었나보다.
4살 때 헤어진 뒤 처음 만난 딸에게
"내 딸아 미안하다, 내가 혼자 내려오는 것이 아닌데…"라며 눈물을 쏟는 모습을 보면서
이산의 아픔과 고통에 내 눈까지 붉어진다.



북측의 두 동생을 만나 눈물을 흘리고 계시는 남측의 전춘자(83) 할머니.
할머님 역시도 파킨슨병을 앓고 있지만 상봉행사 중에는 내내 맑을 정신을 유지하셨단다.
7살, 5살에 헤어진 동생은 이제 64세, 62세의 노인이 되어 있다.
홀로 남쪽으로 내려와 고생할 동생들 생각에 명절마다 밥을 제대로 먹을 수가 없었다고 말하는 할머님은
여동생에겐 자신이 입고 있던 스웨터까지 벗어주고
남동생에겐 쓰고 있던 돗보기를 벗어줬다.
할머님은 이미 무려 60kg에 달하는 생필품과 의약품을 동생들에게 건네주고서도
하나라도 더 주고 싶어 안달하신다.
"동생들에게 챙겨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주고 싶었다"는 할머님.
그 절절하고 애끓는 심정을 내가 감히 알겠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미 사망한 형을 대신해서 나온 조카를 만난 남측의 조중휘(76) 할어버지.
저 두 손 안에는 얼마나 많은 세월과 그리움과 아픔이 담겨있을까?
늙은 조카를 만나는 더 늙은 삼촌.
분단은 이렇게 일가의 사간을 송두리째 잡아먹어 버렸다.

남북한 합쳐 이번 상봉의 최고령자였던 남측 김부랑(97) 할머님은
남편이 북측에서 결혼해 낳은 딸 권오령(65)씨와 외손자 장진수(38)씨를 만났다.
교사이던 남편이 북한지역으로 발령받아 떠난 뒤 해방후 38선이 막히면서 헤어졌다고 할머님은
재혼을 하지 않은 채 시부모님을 모시고 1남 2녀를 키우며 살아왔단다.
할머님는 남편이 북한에서 낳은 딸인 오령씨의 손을 잡고 눈시울을 붉혔고, 
함께 온 아들 오인씨는 "아버지라고 큰 소리로 한 번 불러보고 싶었다"고 눈물을 쏟았다.
할머님은 남편의 묘소에 부어달라며 다른 선물들과 함께 술 한 병도 건넸다.
97의 연세까지 포기하지 않고 만나길 원하는  혈육의 회한.
이미 저 세상으로 떠난 남편의 자식을 부등켜안고 보듬는 할머니의 주름진 손에는
일생의 고통이 그대로 담겨있다.



이번 상봉에서 남측 94명 가운데 90대가 무려 19 분이었다.
80대는 48명, 70대는 27명, 그리고 69세 이하는 단 한 명도 없었다는 기사를 보고
더 늦기 전에 헤어짐으로 찢겨진 가슴을 감싸줄 방법이 정말 절실해졌다.
남북 고향방문 행사를 주최한 대한적십자사도
심각한 고령화에 놀라며 이산가족 상봉 정례화가 시급하다고 말했다.
가족이 헤어져 평생을 사는 것도 고통인데
남아있는 시간 또한 얼마 없다면...
정치적인 것 모두 떠나서 혈육에게 깊고 깊은 회한만은 남기지 않았으면 좋겠다.
남측도 북측도 이 문제에 대해선 어떤 정치적 관점도 개입시키지 않고
두고두고 이 분들의 뼈아픈 눈물들을 기억했으면...
주름진 두 손을 기억했으면...
점점 흐미해진 기억을 무슨 일이 있어도 붙잡고 있는 모습을 기억했으면...

헤어진 모든 이산가족들이 아무 조건 없이 다 만날 수 있기를 진심으로 기원하고 바래본다.
더 이상 눈물 흘리는 가족이 없었으면...
Posted by Book끄-Book끄
보고 끄적 끄적...2009. 11. 14. 15:59
오랫만에 대학로에서 소극장 뮤지컬을 봤다.
한동안  큰 작품들만 열심히 본 것 같아서...
연극 <마라, 사드>를 봤을 때는 여름의 끝이었는데
그날의 대학로는 완전히 가을 속에 젖어있었다.



참 좋은 공연이란 소리를 많이 들었었는데
<판타스틱스>
이제서야 나와 인연이 닿았다.



"Try to remember"
여명이 영화 "유리의 성"에서 불러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던 노래.
이 노래가 바로 뮤지컬 <판타스틱스>의 넘버라는 걸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반세기동안 공연된 세계 최장수 뮤지컬이라는 <판타스틱스>
뮤지컬 넘버들도 참 좋다.
소소한 재미와 아기자기함.
그리고 바로 앞에서 느껴지는 배우들의 모습
어쩌면 저렇게 가까이에서 천연덕스럽게 연기할 수가 있을까?



세익스피어의 작품 <로미오와 줄리엣>을 어쩔 수 없이 떠올리게 만드는 작품.
벽을 사이에 둔 애뜻한 두 연인
두 집안 사이에 벽이 놓이게 된  배경은 (실제로 벽이다... 담벼락)
사실 두 아버지들의 합동잔적에 의해서다.
일부러 둘을 연결시켜주기 위해 의도적으로 계획한 원수지간이라는...
(아버지들은 사실 둘도 없는 "베프"였던 거쥐~~~)
자식들은 부모의 말에 엇나가려는 경향(?)이 다분하기 때문에 두 아버지는 이런 속임수를 쓰기로 한거다.
이제 어떤 사건을 만들어 어쩔 수 없이 두 사람이 화해하게 만들어 두 연인을 연결시켜줘야 한다.
루이자가 꿈에서 본 모습 그대로 일을 꾸미기로 한 아버지들.
그리하여 LPG  엘가로(가스 배달부 아님 ^^)를 고용해
아주 최신식 버전의 인디언식 겁탈 시나리오가 시작된다.
두 아버지의 모습이 무지 귀엽고 사랑스럽다.
(실제로 극을 보면서 이 두 사람 때문에 정말 많이 웃었다)



11월 8일 casting - 마트 : 김산호    헨리 : 서현철



해설자이자 극의 작가인 김태한의 노래로 시작되는 <판타스틱스>
어쩜 저런 코믹한 얼굴에서 이렇게 감미로운 목소리가 나올 수 있을까? (좀 죄송...)
항상 그의 코믹한 배역에 익숙한 나는
잠시 놀란다.
(뮤지컬 "그리스"에서 케니키의 현란한 춤과 엘비스 프레슬리 같던 목소리가 생각나 혼자 웃었다)
무엇보다 이 뮤지컬을 재미있게 볼 수 있었던 건
헨리 역의 서현철과 머티머 역의 김지훈 때문이었다.
이렇게들 잘 생기신 분들었구나...
의상이 누더기가 될 정도로 가난한(?) 떠돌이 유랑극단의 유일한 단원들.
그 허름한 옷이며, 얼굴이며, 목소리며, 동작이며...
일주일이 지난 지금 생각해도 웃음이 절로 난다.
"인디언식 겁탈"의 두 주역 (^^) 

관객을 한 명 동참시킨 그들의 연기는
능청을 넘어 오히려 너무 자연스럽더라.
30년 동안 줄리엣만 한 배우라면서 앞 자리에 앉아있는 여성 관객을 무대 위로 불러낸다.

- 니 이름이 뭐야?
- OO요.
(앞에 나온 관객은 실제로 자신의 이름을 댄다)
- OO! 니 이름은 줄리엣이라고 했지? 너는 신입단원 앞에서 부끄럽지도 않냐?

- 내가 늘 말했지? 배역을 생활화하라고!
- 어째 너는 30년을 해도 연기가 늘지를 않냐...


두 사람의 만담같은 대사가 자꾸 귓 속을 맴돈다.
한번만 로미오를 시켜달라는 머티머에게 죽는 장면을 해보라면서 헨리가 한 말

- 헨리 : 줄리엣이 왜 죽었어?
- 머티머 : 정확한 건 부검을 해봐야 알 것 같은데요...
- 헨리 : 너 땜에 죽었쟎아~~~ 너 땜에~~~ 속 상해서....
(줄리엣의 손에 있는 독약을 마시려는 머티머에게)
- 헨리 : 니꺼 먹어! 니꺼! 왜 남의 꺼 먹어~~~

따지고 보면,
로미오는 정말 줄리엣 때문에 속 상해서 자기가 가지고 온 독약을 먹고 죽었는데
난 왜 이렇게 웃기기만 한건지...

중간에 마트 김산호의 입으로 꽃가루가 들어가 상대역 루이자 최보영까지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그 장면이 어찌나 재미있었는지 관객들까지 한참을 웃을 수밖에 없었다.
너무 생생하게 귀여운 모습이여서...


모든 사랑은 "환상"이다.
그리고 모든 공연도 역시 "환상"이다.
사랑과 공연.
두가지 환상이 만났으니 그 궁합 한 번 제대로다.
오랫만에 무대 위에서 본 최보영과 강인영도 너무 반가웠다.
(강인영씨 다리 참 아팠겠어요... 당신의 멋진 노래를 많이 들을 수 없어 안타까웠지만 그래도 존재감은 좋았어요...)
무대 양 옆에서 초대형 필 하모닉 오캐스트라 못지 않게
멋진 반주를 해줬던 두 대의 피아노까지...
오랫만에
알차고 풋풋한 공연을 봤다는 풍성한 만족감.
소문날만 하다는 생각도 더불어 하게 된다.



맘이 우울한 사람들에게 꼭 권하고 싶다.
환상적으로 맘이 풀릴테니까...
극장을 나오면
사랑에 대한 "환상"까지는 아니더라도
분명 유쾌한 웃음이라는 동반자를 만나게 될 것이다.
아마도 꽤 좋은 입소문이 나지 않을까 기대된다.
Posted by Book끄-Book끄
달동네 책거리2009. 9. 25. 06:17
 <나가사키 파파>- 구효서


나가사키 파파

 

오늘 소개할 책은 <나가사키 파파>입니다.

작가 구효서님은 1958년 생으로 신춘문예를 통해 1987년 등단해서 20 여년 동안 정말 많은 소설을 발표한 분입니다.

<카프카를 읽는 밤>,  <깡통따개가 없는 마을>,  <마디>,  <그녀의 야윈 뺨>,  <물 속 페르시아 고양이>, 
<악당 임꺽정>, <낯선 여름>...

한 때 정말 열심히 찾아 읽던 소설가 중 한 분이었습니다.

<나가사키 파파>는 그가 6년 만에 선보인 장편소설입니다.(중간중간 중단편들은 계속 발표했었지만요)

기대했냐구요? 물론 기대했죠.

그리고 역시 기대하길 잘했다는 생각을 했구요.

여성의 문체를 보는 듯한 따뜻함이며 디테일한 섬세함, 그리고 어떤 한 순간을 포착해서 멋지게 서술하는 그만의 특성들을 아주 맘껏 느낄 수 있는 소설이었답니다.

이분의 단편들을 모아서 만든 아주 유명한 영화도 있는데 혹시 아시나요?

바로 홍상수 감독의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이죠.


소설의 주인공은 일본 나가사키의 음식점 '넥스트 도어'에서 일하는 21세 한국인 “한유나”입니다.
그녀는 친부를 찾으려는 일념에 바다를 건너 지금 이곳 나가사키에 있습니다.

어머니는 그런  그녀에게 아버지에 대한 진실을 알리는 조금은 철없는 메일을 보내옵니다.

이야기는 주인공의 아버지 찾기라는 가시적인 목적에, 그녀 주변 인물들의 사연과 어머니의 메일을 통한 과거의 이야기가 서로 교차되는 방식으로 진행됩니다.

<바리데기>라는 전형적인 “아비 찾기”의 신화 원형을 이야기의 뼈대로 채택하고 있지만 결국은 그 원형을 벗어나 “자아 찾기”로 결말을 이끌어 가고 있습니다.


유나의 직장 동료들은 대부분 일본 사회의 주변적 존재들입니다.

일본 원주민 '아이누' 출신으로 자폐적 삶을 살아가는 일급 요리사 “쓰쓰이”.

부락민(천민 집단 거주지) 출신 여성을 사랑하는 식당 지배인 '“오오카”.

'조선' 국적을 고집하는 아버지와 불화를 겪는 재일동포 3세 “미루“ 언니.

이상하게 착하고 만만한 스무 살의 퀴즈왕 “히데오”

세상의 온 벽을 찾아다니며 그림을 그리는 그래피티 아티스트인 홀 담당 “기구치”.

엄마가 보고 싶어 눈물짓지만 죽어도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중국인 “아이코”.

그동안 숨겨왔던 아련한 첫사랑의 기억과 '출생의 비밀'을 이메일로 털어놓는 철부지 엄마 박성희도 소설을 이끌어가는 또 다른 화자중 한 명입니다.

그녀의 남편 한빈, 그리고 한유나가 찾아 나선 또 따른 아빠 정민태.


궁금했습니다.

왜 <나사사키>란 지명을 차용했을까 하고요.

그래서 찾아봤죠. 그리고 나서 이해가 됐습니다.

<나가사키>는 순혈주의를 고집하는 일본 주류사회로부터 배척받는 이들의 삶터가 된 곳으로 일본 개항 역사의 시발지라 할 수 있는 곳입니다.

즉 모든 인종들이 혼합될 수 있는 그런 장소가 바로 나가사키였던 거죠.

일본의 순혈주의에서 배척당한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아웃 사이드적인 장소.


이 소설은 아버지를 찾아 나선 오랜 길을 통해 오히려 아버지라는 개념을 해체하고 자신의 진정성을 찾아가는 내용입니다.

작가의 인터뷰 내용을 그대로 옮겨 볼까요?

"소설에서 뭘 드러내고 그러면 재미없어질까봐 (메시지를) 꼭꼭 누르긴 했지만 작품 속에서 조금씩 흘러나왔을지도 모르겠다. 아버지로 대표되는 혈통, 고향, 넓게는 민족, 인종 등 테두리 짓고 공통의 정체성을 강요하는 것들에 대해 다루고 싶었다"고...


“스물한 살, 나를 충동한 것은 결국 방황이었다!”

소설에 나오는 대목처럼 정말 그럴 때가 있습니다..

“사는 게 정말 아무것도 아니다 싶을 만큼, 모든 게 만만해지며 터무니없이 행복해지는 순간, 사각형 투성이의 공간도 더 이상 답답하지 않는 순간”이..

주인공 한유나는 생각합니다.

“더 이상 헤매지 않으려면 또 다른 아버지와 가족과 고향을 찾을 게 아니라, 나를 찾아야 하는 거 아닐까.”라고요.

아버지와 가족과 고향과 나라와도 무관한 나. 기대면서 닮고, 닮아서 군림할 수밖에 없게 될 나로부터 도망친, 전혀 다른 이름의 나.

그녀는 알게 된 것 같습니다.

<나>를 찾지 않는다면 어떤 아버지를 찾던 그 아버지를 잃게 될 거라는 거, 아니 결국 스스로 찾은 아비를 버리게 될 것이라는 것을요.


그렇다면 <아버지>란 여기서 결국 내가 품고 있던 옹졸한 꿍심의 다른 이름이었던 모양입니다.

지금까지 내 불확실성이 나 때문이 아니라 불확실한 아버지 때문이었노라 밀어붙일 수 있는 아주 그럴 듯한 보호막이 아버지였던 거죠.

“퓨전”이라는 말을 많이 들으시죠?

별개의 재료들이 합쳐져 제3의 다른 어떤 것으로 재탄생되는 퓨전의 신비,

이 책에서도 그런 퓨전의 냄새를 맡을 수 있습니다(어디까지나 저의 개인적인 생각이긴 하지만....)

이질적인 사람들이 이곳 “넥스트 도어”에  모여 있습니다.

실제로 주인공은 이들을 가족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새롭게 만들어진 가족은 혈연과 지연을 중심으로 한 전통적인 가족의 의미를 파괴하고 해체하는 그런 형태의 가족입니다.

아마도 주인공은 그 세계에서 더 큰 아버지를 찾게 되지 않을까요?


이 책을 읽으면서 내내 즐거웠습니다.

그리고 저 또한 제가 일하는 곳에서 또 다른 형태의 가족을 만나서 많이 변할 수 있었음을 고백하게 되네요.

누구든 그럴 때가 없겠습니까!

나를 파괴하고 싶고, 철저하게 해체하고 싶고, 내가 내가 아니길 꿈꾸는 그런 때.

해답은 아닐지언정.

그래도 이 책은 공감을 하게 만들어 줍니다.

공감 또한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Posted by Book끄-Book끄
보고 끄적 끄적...2009. 6. 23. 06:38
1988년 개봉했던 더스틴 호프만과 톰 크루즈 주연의 영화 <레인맨>을 기억하는가?
이 작품은 그해 아카데미 작품상, 각본상, 남우주연상, 감독상 등
주요 4개 상을 거머쥐기까지 했다.



지금으로부터 무려 20여년 전
극장에서 이 영화를 봤었다.
아직 기억하고 있는 이유는
<킬링필드>처럼 학교에서 단체관람으로 본 게 아닌
내 돈을 내고 최초로 봤던 영화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자본주의의 위대함이여~~ ^^)



영화를 보는 내내
톰 크루즈의 잘생긴 얼굴보다
더스틴 호프만의 연기가 어린 눈에도 엄청나 보였던 기억.
"저 사람 정말 자폐아 아니야!!"
솔직히 감동을 받았던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제대로 이해나 했을까....)
그 영화의 몇 장면들은 아직 선명하게 기억 속에 남아있다.



"서번트 신드롬"을 가진 자폐아  형 "레이먼드 바비드"와
인터넷 주식 트레이더 동생 "찰리 바비드"
어느날 찰리는 아버지의 죽음으로 형의 존재를 알게 된다.
만약, 내게도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형제가 어느날 나타난다면....
그것도 같은 부모밑의...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된다.





탈렌트와 영화배우로 유명한 임원희. 이종혁의 뒤를 이어
멋진 연극배우 김명민과
감초역의 코믹 연기의 대가 뮤지컬 배우 김성기.
그 둘이
레이몬드와 찰리를 연기했다. 



씁쓸했던 것은
대중적으로 인기가 있는 두 사람이 공연했을 때와
공연료 차이가 달라졌다는 사실 (30000 -> 25000)
대중의 힘이라는 게 가격까지도 조정하는구나 싶어
왠지 연극인들이  설움에 공감하게 된다.



<햄릿>, <에쿠우스>, <나쁜 자석>
그리고 그는 기억하기 싫겠지만 첫 뮤지컬 <카르멘>까지 (그건 좀..... @@::)
내가 아는 김영민은
연극 위에서 그대로 꽃이 되는 사람이다.
그의 몰입력은 신비감까지도 불러일으킨다.
그런 그의 무대를 오랫만에 볼 수 있다는 생각에 설랬다.
그리고 그 설램에 대한 보상을 그는 역시나 해줬다.
그의 눈물...
그 간절함과 미안함과 절실함.
어쩌면 내리는 빗소리보다 내겐 더 큰 빗소리로 남겨졌는지 모른다.



내겐 적격인 <라만차의 돈키호테>로 기억되는 뮤지컬 배우 김성기1
<사랑은 비를 타고>의 소심쟁이 노총각 형,
<벽을 뚫는 남자>에서 열연했던 일인다역 (그의 알콜중독 의사는 꺄아~~~),
<미녀는 괴로워>에서의 성형외과 의사에 이어, <자살 여행>까지...
그의 코믹연기는 그야말로 물이 오를데로 올라
마치 실생활도 그렇지 않은지 의심하게 만든다.
왠지 빈 듯한 헐렁함 속에 꽉꽉 채워진 치밀함
그에게서 발견할 수 잇는 매력 포인트!



매표소 앞에 붙어 있는 홍보물.
역시 대중의 힘은 어디든 강력하다.
<베토벤 바이러스>의 여파가 이곳 공연장까지 이어지길
얼마나 바랬을까.....
(그러나 역시 대중은 대중이다!)



2시간 가량의 연극을 보면서
혹시, 
나도 <레인맨>을 잃어버린 건 아닐까? 생각했다.
시간이 자나도 레이몬드는 동생 찰리를 잊지않고
천재적인 기억력으로 매 순간순간을 전부다 기억하고 있었다.
찰리는 발음이 명확해지기도 전에 그 형을 떠나 보냈다.
(형의 자폐 증세가 동생에게 위협이 될 것을 두려워한 아버지에 의해...
그 아버지 역시 사랑하는 장남 레이몬드는 눈물로 병원에 맡겼다)
찰리의 불명확한 발음은 레이몬드를 레인맨으로 만들었다.
그 레인맨은 찰리의 힘든 순간을 함께 해준 유일한 친구였다.
자신만이 만날 수 있는  상상의 친구.
자신이 만든 <레인맨>
그렇게 알고 있었던 찰리....



형과의 재회로 찰리는
이미 이 세상을 떠나버린 아버지와의 관계까지도 회복한다.
그리고 그토록 두려워했던 한 가정을 꾸미기까지도...
혹 마음속에 잃어버린 것들이 있는가?
그렇다면 이제 찾아보라!
어쩌면 바로 거기서
당신의 관계 회복이 시작될지도 모른다.



연극 사이사이  흐르던 비틀즈의 노래와 빗소리
그리고 소극장에서 처음 만난 회전 무대
무대가 돌아가는 소음까지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 순간,
나는 <레인맨>과 완전한 소통의 관계를 이루고 있었으니까...

Posted by Book끄-Book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