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끄적 끄적...2016. 7. 25. 10:09

 

<코펜하겐>

 

일시 : 2016.07.14. ~ 2016.07.31.

장소 : 동숭아트센터 동숭소극장

작가 : 마이클 프레인 (Michael Frayn)

번역 : 양영일

연출 : 윤우영

출연 : 남명렬(닐스 보어), 서상원(베르너 하이젠베르그), 이영숙(마그리트)

제작 : 극단 청맥

 

내가 이 연극을 처음 봤던게 2010년 3월이다.

혹시나 싶어서 블로그를 뒤적였더니 다행히 그때 쓴 후기가 있더라.

어려운 작품이라 꽤 곤혹을 치른 흔적이 역력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치열하게 이해하려고 애쓴 모습이 보인다.

전체적으로 삼각형 구도를 보여준 무대에 대한 개인적인 평은 지금봐도 꽤 그럴듯 했다.

기억을 되돌리면,

이 작품에 대한  전체적인 느낌은 불안함에서 균형으로 가는 여정이었다.

 

"기억이란건 일기장처럼 묘한 놈이야. 기억의 시간 속으로 실제처럼 걸어 들어가게 되지"

보어의 대사 처럼 지금 내 머릿속에도 두 개의 장면이 자리잡는다.

2010년 <코펜하겐> 공연 장면과 1941년 하이젠베르그와 닐스 보어가 코펜하겐에서 만나는 장면이.

2010년엔 미처 몰랐었는데 이 작품위트있고 재미있다.

세 명의 등장인물은 수시로 과거와 현재를 오가고

숱한 독백과 대화들 역시도 수시로 장면과 시점을 넘나들며 사방으로 튄다.

마치 원자핵에 충돌된 중성자가 2의 제곱승으쪼개지는 것럼.

chain reaction.

결국 1막 후반부에 이 연쇄반응에 한 번의 폭발 위기가 닥친다.

감정이 고조된 하이젠베르그의 회상 장면.

(개인적으로 이 장면이 이 작품의 결정적 장면이라고 생각하는데

 감정이 앞선 서성원 배우의 딕션이 무너진건...  내내 아쉬움으로 남는다.)

 

이 작품 묘하게 연극 <레드>와 겹쳐진다.

바하의 "Fugue in G minor"가 나와서기도 하지만

공통적인 하나의 명제가 숨겨져있다.

"자식은 아버지를 살해해야만 해!"

학문이나 예술에서 일가를 이루기 위해 필요불가분한 일. 

지독한 역설이고 모순이다.

절망의 극복이고 희망의 극복이다.

그래서 이 작품이 내게 이렇게 매혹적으로 다가왔던 모양이다.

2010년 보다 훨씬 더!

 

그렇다면 이 이야기에 답은 있을까?

아니 답이라는게 과연 필요할까?

모든게 끝이 났지만

언제 다시 시작될지 그 누구도 모르는데...

 

* 내가 처음 남명렬 배우의 작품을 본 건 2005년 <에쿠우스>의 다이사트였다.

  그때 나는 막 짝사랑에 빠진 사람처럼 연극을 보는 내내 두근대고 설랬었다.

  그런데 이 작품을 보면서 그때의 설렘이 또 다시 재현됐다.

  내가 보고, 느낀건 물리적인 "청춘"을 뛰어넘는 생명력이자 매혹이었다.

  다이사트와 닐스 보어.

  대책없는 삼각관계가 시작되는 순간이다.  

  ^^

 

Posted by Book끄-Book끄
보고 끄적 끄적...2010. 4. 5. 06:36
무대 위엔 꼭지점을 아래로 향하는 커다란 역삼각형이 층층히 쌓여진 종이더미 위에 위태롭게 서있다.
균형이 잡힌 정삼각형도 아닌 불안한 모습 그대로...
그 불안함 속에 해답을 위한 힌트라도 주는 듯.
높이 달린 창문을 통해 한 줄기 빛이 퍼져온다.
그러나 그 빛조차도 자세히 보면 불안한 삼각형의 형태다.
그리고 삼각 구도로 놓여 있는 의자 세 개.
그 의자마저도 정삼각형의 구조를 살짝 벗어나
시작은 분명 어느 한쪽으로 불안하게 기울어져 있다.
(물론 극이 진행하면서 정삼각형의 구조를 쟘깐씩 보여주긴 하지만)
내게 연극 <코펜하겐>의 첫인상은 그러니까
평형에 대한, 균형에 대한 일종의 불안한 도전이며 거부처럼 느껴진다.

역사 속의 세 사람,
닐스 보어(남명렬), 베르너 하이젠베르그(김태훈), 그리고 닐스 보어의 아내 마그리트(조경숙)
스스로 현실 속의 사람들이 아님을 고백하고 있는 이 사람들은
지금 하나의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는 중이다.
“왜, 1941년 하이젠베르그는 보어를 방문했는가?”


아버지와 아들 같은 사제지간이자 오랜 연구 동료인 보어와 하이젠베르그는
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서로 적국으로 갈라서게 된다. 
하이젠베르그의 위험하면서도 비밀스러운 방문은
50년간 토론을 벌여왔으나 그닥 명확한 결론을 얻지 못한 상태다.
연극은 세 번의 리플레이를 거듭한다.
그리고 매번 다시 묻는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그가 찾아왔을까?” 를...
이들 세 사람은 이 질문을 통해
도대체 지금 어떤 해답을 얻고자 하는걸까?



연극 <코펜하겐>은 노골적으로 말해 아주 많이 어렵다.
그리고 심각하다.
게다가 지독히 아름답기까지 하다.
핵분열, 중성자, 원자로, 원자탄의 제조, 불확정성 원리와 상보성의 원리 등
수시로 등장하는 물리학의 개념들로 머릿속은 이미 무한대의 복잡성 안에 놓여있다.
어쩌면 이 연극을 이해하기 위해선 관객들에게 지독한 인내심이 필요할지도...
그러나 연극 <코펜하겐>에서 중요한 건,
그런 과학 원리나 학자적인 이론이 아니라 
그 이론을 끌어냈던 인간들의 본성과 진실을 이해하는 것이다.
"Dark side of the moon"
그렇다면 그건 확실히 불가능한 일도, 어려운 일도 아니긴 하다.
마침내는 인간이란 객체의 유사성을 이해할 수 있게 될테니까...
시간의 개념조차도 무력하게 만드는 핵폭발을 능가하는 인물들의 충돌과 대면은
사뭇 진지하면서도 무척 재미있다.
수시로 돌출하는 날카로운 삼각형의 모서리들은
한쪽은 역사를 향해, 한쪽은 인물을 향해, 나머지 한쪽은 상황을 향해
거침없이 전진하기도 하고 일시에 후퇴하기도 하면서 극의 생명감을 예리하게 살려낸다.
입 속에서서 쏟아져나오는 숱한 이론들과 과학에 몰두한 인간의 지독한 광기.
그리고 그 광기 속에 보여지는 학문에의 순수한 열정.
"과학"으로 덧씌워진 "인간" 본성에 대한 질문과 탐구.
그 치열함이 극 속에서 제 2, 제 3의 긴장감으로 고스란히 살아난다.
폭풍같은 치열함들...
(이런 치열함을 만나게 되면 나는 그만 정신을 잃게 된다...)



<마라, 사드> 이후에 무대 위에서 만난  배우 남명렬은
역시나 늘 아름답고 섬세하고 그리고 정확하다.
그는 매번 무대 위에서 삶의 터를 개척한다.
끝없는 유목민으로서의 연극배우 남명렬의 아우라가
그래서 나는 늘 깊고 다정하고 믿음직스럽다.
연극 무대는 시간과 열정을 배반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배우 남명렬.
 “살아가는 세월만큼 무대 위에서 녹아나기 마련이에요. 그 세월은 관객들에게 어필될 수 있어요.
  그러니 연극이 나의 길이라고 생각한다면 시선을 조금 길게 봤으면 해요.”

이 말에 지극히 공감하는 관객이 여기도 이렇게 있다는 걸 그가 알까? (^^)
그는 연극 <코펜하겐>을 통해 관객과 ‘의미 있는 소통"을 희망한단다.
"우리는 현재 재미와 가벼움, 즐거움을 위해 달려가는 말 위에 있죠. 잠시 말고삐를 잡고 ‘속도를 조정해볼까’ 하는 마음을 갖고 있다면 이 작품과 함께 했으면 해요. 담론 자체는 거대하지만 그 속에 인간적인 부분들이 많이 있거든요. 유머도 있고. 어느 방향으로 튈지 모르는 말초적 세상에서 무언가를 돌아보고 싶다면 좋은 계기가 될 거라고 생각해요.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애쓰고 있고요."
속도를 조정하기...
어쩌면 지금 우리에게 제일 필요한 일이 바로 그건지도 모르겠다.
아이러니하게도 치열한 연극 <코펜하겐>을 보고 나는 느긋한 "여유"를 느꼈다.
당연하지 않은가?
원래 인간의 삶이란 이렇게 늘 불확실 한거니까...
Posted by Book끄-Book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