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끄적 끄적...2011. 3. 9. 06:02
 

박완서의 글은 그렇다.
오랫동안 깊고 따뜻하게 생각한 마음의 진득함,
꽁꽁 얼어있는 발을 녹여주는 포근함.
그리고 오래오래 고은 뽀얀 사골 국물에 후루룩 밥 말아 먹는 것 같은 꽉찬 포만감까지 느껴진다.
그래서 그분의 책이 꽃혀있는 서점 코너만 들어서도
시골 할머니집 아랫목에 앉아있는 느낌이었다.
그 할머님은 이제 더 이상 찐고구마를 소반에 담아 내올 수 없게 됐지만...
그래도 여전히 그 기억은 가슴을 따뜻하고 뭉클하게 한다.
갑작스럽게 실감이 된다.
더 이상 그 분의 새로운 자식들을 읽을 수는 없다는 사실이.
이제 아픈 배를 쓸어주고 지친 어깨를 두드려주던 정답던 손길을 마냥 그리워만 해야하는구나.
그랬다. 내게 박완서라는 소설가는,
두터운 가마솥에서 방금 긁어낸 푸짐한 누룽지같았다.
그래서 박경리의 타계 소식보다도
박완서의 타계 소식이 내겐 더 치명적이었다.


<잃어버린 여행가방>
박완서의 기행산문집.
노구의 몸을 한 발 한 발 움직여 찾았던 곳.
그 장소보다도 그 곳을 말하는 그분의 시선이 너무나 따뜻하고 정겹다.
챕터 시작 첫 페이지에 작게 담겨 있는 얼굴 사진은...
책 장을 넘기고 싶지 않을 만큼 오랜시간 다정하게 마주하게 한다.
문득 궁금하다.
누가 찍었을까?
풍요롭고 따뜻한 당신의 미소는 지금도 여전히 수줍은 소녀같다.
내게 박완서는 분명 로망이다.
이렇게 나이 들고 싶다는 로망...
어느날은 나도 박완서처럼 남도땅을 하나하나 밟으며 폭삭폭삭한 흙의 결을 느끼고 싶고
젖은 낙엽이 풍기는 냄새에 오랫동안 안겨있고 싶다.
비가 품은 냄새처럼 은근하고 약간은 비릿한 그 냄새...
벌써부터 이 모든것들이 당신처럼 그저 그립다.

...... 모든 것은 돌고 돈다. 가장 앞서갔다고 생각되는 게 가장 처진 게 될 수도 있다. 지금 가장 낙후된 고장처럼 보이는 것이 가장 앞선 희망의 땅이 될 수도 있다. 발전이란 이름으로 만신창이가 된 국토에 마지막 남은 보석 같은 땅이여, 영원하라 ......

박완서는 말했다.
...... 타는 사람보다도, 나는 사람보다도, 뛰는 사람보다도, 달리는 사람보다도, 기는 사람보다도, 걷는 사람이 난 제일 좋다 ......

이 글귀처럼
그분은 생전에 우리나라의 남도땅 구비구비를,
바티칸을, 중국을 통해 백두산을, 상해를
에티오피아와 인도네시아를
세계의 지붕 티베트를, 가트만두를 걷고 또 걸었다.
걷는 육신의 피로함은
말간 정신의 청명함으로 지금 내 눈 앞에 활자화되어 있다.
겸손하고 나직한,
그러나 선연하고 강인한 그분의 글을 나도 다리품하듯 읽고 또 읽었다..

"그립다"는 말...
참 두고두고 서럽구나......



한때 최인호의 이 에세이가 서점의 베스트셀러 윗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때가 있었다.
그때는 오히려 읽을 생각을 안 했었는데...
책을 손에 잡은 건,
아마도 표지에 있는 사진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강에 떠 있는 나룻배 한 척.
그리고...
책 속에 담긴 사진들은 내가 퓨파인더로 보던 시선 그대로다.
솔직히 책의 내용보다는 사진이 눈에 밟힌 책이다.
이렇게 말하면 턱없는 소리라 생각되겠지만
꼭 내가 찍은 사진들 같다. (^^::)

"인연"이라고 단어때문에
나는 이 책이 작가 최인호가 만남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일거라고 생각했다.
하긴, 따지고 보면 "인연"이라는 게 어디 사람하고만 맺을 수 있는 건가!
사람에 대한 인연보다 오히려 더 많은 것들이 사람 아닌 것과 맺는 관계이리라.
꽃들과 나무들, 그리고 작은 것들을 바라보는 최인호의 시선이 이 책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내겐 최인호의 책들이
아직은 여전히 낯설다.

* 공교롭게도 이 두 책에 공통으로 등장하는 한 사람이 있다.
   영화배우 "안성기"
   내겐 "안성기"에 대한 일종의 오마주같은 게 있다.
   문화예술인의 "노블레스 오블리제"라고 말하면 이해가 될까? 
   따뜻하고 바른 사람에게는
   누구라도 악한 감정이 생길 수 없다는 걸 안성기를 통해 느끼게 된다.
   참 보석같은 사람이다.
   어쩔 수 없이 빛나는 사람.
   그런데 그 빛은 과하지 않고 언제나 영롱하고 깨끗하다.
   "카리스마"라는 단어조차도 왠지 주눅들게 만드는 그런 사람 *^^*
Posted by Book끄-Book끄
읽고 끄적 끄적...2009. 9. 16. 06:26
신혼의 어느 날,
가령 아내가 남편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고 하자.
"내가 아주 못생긴 여자라면... 그래도 날 사랑했을까?"
남편은 아내에게 어떤 대답을 했을까?



박민규의 소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의 시작은
아내의 이런 질문에서 시작됐단다.
너무 못생겨서 땅만 보며 걷는 한 여자,
항상 타인의 시선과, 학대, 격리, 혹은 놀이의 표적이 됐던 여자.
그런 그녀에게 다가간 한 남자
"저랑 친구하지 않을래요?"



저는 마음 속으로 스스로의 얼굴을 도려낸 여자입니다.
저는 한 번도 스스로의 인생을 평가받지 못했습니다.
저는 오로지 스스로의 태생만을 평가받아온 인간입니다.
세상은 못생긴 여자의 발버둥을 결코 용서하지 않습니다.


여자가 이별을 전하며 남자에게 남긴 편지는 아직까지도 현실에서 유효하다.
(아마도 영원히 유효하지 않을까?)
지독히 못생긴 여자의 마음엔 타인의 "장애"가 차라리  눈부시게 부럽다.
동정도 연민도 호의도 받아본 적이 없는 한 여자의 고백이 아프다.



Dark side of the moon
살아 있는 모든 것이 가지고 있는 또 다른 이면(異面)
결국 그 이면에 대한 이야기였을까?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카스테라>의 작가 박민규
그의 특이한 외모와 이력만만큼이나 소설은 특이하고 낮설고
혹은 재미있기도 하다.
7080 세대에 대한 오마주.
음악, 영화, 그림, 그 시대에 유행했던 CF까지
비틀즈나 밥 딜런의 노래와 함께 치킨과 맥주를 마시며 읽기에 딱 좋은 책(?)
켄터키 치킨의 추억....



오랫만에 책의 뒷장에서 선명하게 붙어있는
작가의 도장을 보다.
요즘엔 거의 없어졌거나 혹은 그대로 프린트 된 게 많은데...
비록 빨간 인주의 도장은 아니지만 가끔 생각한다.
저 작은 한장 한장의 도장이 작가에게 그대로 현실로 계산되던 모습을.
어느 날은,
이런 모습도 정말 죽은 왕녀가 될 수도 있겠구나 싶다.
그럼 그때는 나도 파반느나 레퀴엄 같은 걸 틀어야 하는 건가?
Posted by Book끄-Book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