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끄적 끄적...2010. 8. 9. 05:41
예전에 이 책에 대해서 잠깐 들었을 때
재미가 있을까 생각했었다.
100% 편지로 구성된 소설.
타인의 편지나 일기를 들여다 보는 지적 관음증의 즐거움을 알긴 하지만
시대가 시대인지라 이 소설이 소위 먹힐 수 있을까 싶기도 했다.
책의 배경도 그렇고, 읽고 있고 있는 현재의 시점도 그렇고...

소설의 저자 매리 앤 셰퍼는
1976년에 방문했던 영국해협 채널제도의 건지 섬을 배경으로 책을 쓰겠다고 결심하고
수년에 걸친 조사기간을 거쳐 집필을 시작한다.
그러나 소설이 거의 끝나갈 무렴 암 진단을 받게 되고
마지막 정리 작업을 조카이자 동화작가인 애니 배로우즈에게 부탁한다.
결국 그녀는 자신의 최초의 책이 출판되는 걸 보지 못하고
2008년 2월 7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데뷔작이 유고작이 된 셈.
죽기 얼마 전의 인터뷰에서 그녀는 이 책에 대한 특별한 애정을 밝히기도 했다.
"이 책은 독자들 사이에 굉장한 네트워크가 있다. 독자들이 사랑할 수밖에 없는 매력적인 소설이다" 라고...
어쩌면 자신의 첫 소설에 대해 지나칠만큼 자만하고 있는 것처럼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책을 읽다보면 "독자들 사이의 네트워크"라는 말을 이해하게 된다.
처음엔 한없이 지루하고 나른하게 생각된 이야기에 나도 모르게 점점 빠져들게 된다.
우리나라에 소개된 책의 이력도 좀 별나다.
이 책은 2008년 출판됐다가 바로 절판됐었다.
그런데 특이한 사실은 독자들의 입소문과 국내에 있는 독서모임에서의 토론 등에 자주 등장하면서
2010년 2월 새롭게 재번역되어 출판되는 성과를 이뤘다.
(내가 읽은 책은 절판된 2008년 책이다. 재번역된 책은 제목에 한 글자가 추가됐다.  
 건지 아일랜드 감자껍질파이 클럽이 건지 아일랜드 감자껍질파이 북클럽으로 ^^)



건지 섬(Guernsey Island)은 영국해협에 위치한 영국 왕실 자치령으로 채널제도에 속한 실제 섬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 정부는 이 섬을 비롯한 채널제도가 요충지가 아니라는 이유로
군사적인 방어를 하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독일군은 기회를 잡아 이 섬에 폭격을 가하고 영국으로 진격하기 위한 교두보로 활용한다.
그 기간이 무려 5년.
이 책은 바로 독일 점령하에서 5년의 시간을 견딘 건지 섬 사람들의 이야기다.
책의 주인공 줄리엣은 인기 작가이자 칼럼니스트다.
전쟁이 끝나고 오랜 시간이 흐른 어느 날 그녀는 건지 섬에 사는 한 남자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는다.
그는 ‘건지 아일랜드 감자껍질파이클럽’이라는 독특한 이름의 문학회 회원인 도시였다.
이 편지를 계기로 줄리엣은 건지 섬의 문학회 회원들과 편지를 주고받기 시작한다.
나치 감시 하에서 문학회를 조직해 삶의 의지를 이어나간 건지 섬 북클럽 회원들.
그들은 처음에는 책과 전혀 인연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독일군에게 잡혀가는 걸 피하기 위한 방편으로 만들어진 북클럽이
어떻게 그들의 삶을 변화시키고
결국은 줄리엣마저 변화시켜 잠시 방문한 그녀를 주저앉게 만들었는지가 아주 잔잔하고 진솔하게 담겨있다.
섬 사람들 10여 명과 나눈 168 통의 편지들.

...... 독서에 대해, 그리고 독일군이 여기에 있던 시절, 독서가 우리의 기운을 어떻게 북돋아주었는가에 대해 더 많은 이야기를 해줄 수 있어요 .....

그리고 나는 이 구절의 의미를 아주 정확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읽는 내내 아마 포근하고 따뜻했었던 건지도... 



"독서"라는 행위는
나치 독일의 암울한 절망을 이기게도 하고
때로는 사람의 운명을 새롭게 바꾸게도 한다.
그리고 이 책이 바로 그런 이야기들의 실현이기도 하다.
이런 책을 읽게 되면
가슴이 뛴다.
이제 막 시작된 연예처럼...
Posted by Book끄-Book끄
보고 끄적 끄적...2009. 11. 14. 15:59
오랫만에 대학로에서 소극장 뮤지컬을 봤다.
한동안  큰 작품들만 열심히 본 것 같아서...
연극 <마라, 사드>를 봤을 때는 여름의 끝이었는데
그날의 대학로는 완전히 가을 속에 젖어있었다.



참 좋은 공연이란 소리를 많이 들었었는데
<판타스틱스>
이제서야 나와 인연이 닿았다.



"Try to remember"
여명이 영화 "유리의 성"에서 불러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던 노래.
이 노래가 바로 뮤지컬 <판타스틱스>의 넘버라는 걸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반세기동안 공연된 세계 최장수 뮤지컬이라는 <판타스틱스>
뮤지컬 넘버들도 참 좋다.
소소한 재미와 아기자기함.
그리고 바로 앞에서 느껴지는 배우들의 모습
어쩌면 저렇게 가까이에서 천연덕스럽게 연기할 수가 있을까?



세익스피어의 작품 <로미오와 줄리엣>을 어쩔 수 없이 떠올리게 만드는 작품.
벽을 사이에 둔 애뜻한 두 연인
두 집안 사이에 벽이 놓이게 된  배경은 (실제로 벽이다... 담벼락)
사실 두 아버지들의 합동잔적에 의해서다.
일부러 둘을 연결시켜주기 위해 의도적으로 계획한 원수지간이라는...
(아버지들은 사실 둘도 없는 "베프"였던 거쥐~~~)
자식들은 부모의 말에 엇나가려는 경향(?)이 다분하기 때문에 두 아버지는 이런 속임수를 쓰기로 한거다.
이제 어떤 사건을 만들어 어쩔 수 없이 두 사람이 화해하게 만들어 두 연인을 연결시켜줘야 한다.
루이자가 꿈에서 본 모습 그대로 일을 꾸미기로 한 아버지들.
그리하여 LPG  엘가로(가스 배달부 아님 ^^)를 고용해
아주 최신식 버전의 인디언식 겁탈 시나리오가 시작된다.
두 아버지의 모습이 무지 귀엽고 사랑스럽다.
(실제로 극을 보면서 이 두 사람 때문에 정말 많이 웃었다)



11월 8일 casting - 마트 : 김산호    헨리 : 서현철



해설자이자 극의 작가인 김태한의 노래로 시작되는 <판타스틱스>
어쩜 저런 코믹한 얼굴에서 이렇게 감미로운 목소리가 나올 수 있을까? (좀 죄송...)
항상 그의 코믹한 배역에 익숙한 나는
잠시 놀란다.
(뮤지컬 "그리스"에서 케니키의 현란한 춤과 엘비스 프레슬리 같던 목소리가 생각나 혼자 웃었다)
무엇보다 이 뮤지컬을 재미있게 볼 수 있었던 건
헨리 역의 서현철과 머티머 역의 김지훈 때문이었다.
이렇게들 잘 생기신 분들었구나...
의상이 누더기가 될 정도로 가난한(?) 떠돌이 유랑극단의 유일한 단원들.
그 허름한 옷이며, 얼굴이며, 목소리며, 동작이며...
일주일이 지난 지금 생각해도 웃음이 절로 난다.
"인디언식 겁탈"의 두 주역 (^^) 

관객을 한 명 동참시킨 그들의 연기는
능청을 넘어 오히려 너무 자연스럽더라.
30년 동안 줄리엣만 한 배우라면서 앞 자리에 앉아있는 여성 관객을 무대 위로 불러낸다.

- 니 이름이 뭐야?
- OO요.
(앞에 나온 관객은 실제로 자신의 이름을 댄다)
- OO! 니 이름은 줄리엣이라고 했지? 너는 신입단원 앞에서 부끄럽지도 않냐?

- 내가 늘 말했지? 배역을 생활화하라고!
- 어째 너는 30년을 해도 연기가 늘지를 않냐...


두 사람의 만담같은 대사가 자꾸 귓 속을 맴돈다.
한번만 로미오를 시켜달라는 머티머에게 죽는 장면을 해보라면서 헨리가 한 말

- 헨리 : 줄리엣이 왜 죽었어?
- 머티머 : 정확한 건 부검을 해봐야 알 것 같은데요...
- 헨리 : 너 땜에 죽었쟎아~~~ 너 땜에~~~ 속 상해서....
(줄리엣의 손에 있는 독약을 마시려는 머티머에게)
- 헨리 : 니꺼 먹어! 니꺼! 왜 남의 꺼 먹어~~~

따지고 보면,
로미오는 정말 줄리엣 때문에 속 상해서 자기가 가지고 온 독약을 먹고 죽었는데
난 왜 이렇게 웃기기만 한건지...

중간에 마트 김산호의 입으로 꽃가루가 들어가 상대역 루이자 최보영까지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그 장면이 어찌나 재미있었는지 관객들까지 한참을 웃을 수밖에 없었다.
너무 생생하게 귀여운 모습이여서...


모든 사랑은 "환상"이다.
그리고 모든 공연도 역시 "환상"이다.
사랑과 공연.
두가지 환상이 만났으니 그 궁합 한 번 제대로다.
오랫만에 무대 위에서 본 최보영과 강인영도 너무 반가웠다.
(강인영씨 다리 참 아팠겠어요... 당신의 멋진 노래를 많이 들을 수 없어 안타까웠지만 그래도 존재감은 좋았어요...)
무대 양 옆에서 초대형 필 하모닉 오캐스트라 못지 않게
멋진 반주를 해줬던 두 대의 피아노까지...
오랫만에
알차고 풋풋한 공연을 봤다는 풍성한 만족감.
소문날만 하다는 생각도 더불어 하게 된다.



맘이 우울한 사람들에게 꼭 권하고 싶다.
환상적으로 맘이 풀릴테니까...
극장을 나오면
사랑에 대한 "환상"까지는 아니더라도
분명 유쾌한 웃음이라는 동반자를 만나게 될 것이다.
아마도 꽤 좋은 입소문이 나지 않을까 기대된다.
Posted by Book끄-Book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