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끄적 끄적...2016. 3. 25. 07:50

의심의 여지가 없다.

주제 사라마구는 위대한 작가다.

이건 누가 뭐래도 변하지 않는 확고한 진실이다.

신약성서를 비튼 <예수복음>을 읽으면서도 혀를 내둘렸는데

그는 자신의 마지막 작품 <카인>에서는 구약을, 아니 우리가 "여호와"라고 부르는 그 신성불가침의 영역을

가차없이, 실랄하게, 그리고 유감없이 고발한다.

나는 유신론자다.

교회에는 안나간지 오래됐지만 종교란에 "기독교"라고 적는 기독교인이다.

(이단이나 사이비는 아니지만 독실한건 아니고 뭐 나이롱 신자... 그 쯤 ....)

 

동생 아벨을 죽인 카인이 여호와를 향해 갖는 의문은 상당히 정당해보인다.

카인의 번제가 아벨의 번제보다 정성스럽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여호와는 아벨의 번제를 선택했다.

카인은 말한다.

"주께서 아벨이 죽도록 내버려두신 것보다 큰 신성모독은 없다"고!

이 발언만으로도 심히 놀라운데

바로 여호와가 공동책임을 인정하는 뉘앙스까지 풍긴다.

"너는 나를 피해 유리하는 자가 될 것이나, 아무도 너를 해치지 못할 것이다"

 

시간여행자가 되어 세상을 떠도는 카인.

또 다른 여러 현재들을 지나오는 동안 여호와에 대한 카인의 의심은 확고해진다.

아들 이삭을 번제로 죽이려는 아브라함을 보며

도대체 무슨 하나님이 아버지더라 자기 아들을 죽이라고 명령하냐며 분개하는 카인은

불타는 소돔과 고모라를 바라보면서는

죄없는 아이들까지 왜 죽어야 하는지를 이해할 수 없다 고백한다.

정직한 욥의 믿음을 실험하기 위해 사탄과 거래하는 여호와를 향해 의롭지 못하는 카인은 묻는다.

"여호와가 자신을 믿는 사람을 신뢰하지 않는데 왜 사람들이 여호와를 신뢰해야 하나요?"

 

어쩌면 기독교인들은 이 책을 보고 사탄의 책이라며고 비난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정말 그런가?

카인의 질문과 분노는 정말 부당한가?

소위 독실한 신자라고 일컬어지는 사람들은

카인과 같은 의문을 품어본 적이 없었을까?

여호와의 전지전능함과 공평함에 반기를 들고 싶다는 생각,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었을까?

 

 

아주 독실한 기독교인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 그분은 스스로를 무신론자로 말한다.

적어도 대한민국이라는 곳에서는 신은 죽었다고...

솔직히... 반론을 재기할 수가 없었다.

(어찌됐든 난 기독교인인데...)

 

카인이 내린 결론은 이렇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사랑하지도 않고

누군가 행복해지는 걸 눈뜨고 못보는게 분명하다고!

이 모든 죽음에 대해 도대체 누가 여호와를 벌할 것이며,

왜 아무도 하나님께 책임을 묻지 않느냐고.

인류의 역사는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오해의 역사이니

하나님은 우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우리는 하나님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이 책을 읽는 동안 여러 차례 머릿속이 백지상태가 됐다.

답답함에 연달아 2번을 읽었고

아마 앞으로도 몇 번은 더 읽게 될 것 같다.

결론은... 없다.

카인은 여전히 또 다른 현재 속에 있다.

그리고 그 옆에 나 역시 있다.

 

너는 진실로 카인, 아우를 죽인 그 비열하고 악한 자로구나.

당신만큼 비열하고 악하지는 않습니다.

 

오, 주여!

Posted by Book끄-Book끄
읽고 끄적 끄적...2014. 3. 17. 08:17

그리스의 대문호 니코스 카잔차키스.

우리나라엔 <그리스인 조르바>로 잘 알려진 그에게 지금 빠져있다.

<수난1,2> 권을 폭풍처럼 읽어내면서 내내 생각부터 했다.

너무 일찍 이 책을 읽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라고!

그리고 주제 사라마구의 <예수복음>을 읽은 상태로 이 책을 만나서 다행이라고!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이제부터 나는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작품들을 일부러 찾아서 읽게 될 것이다.

 

그리스의 작은 마을 "리코브리스"

그리스도의 수난극을 위해 시민들을 대상으로 각각의 역할을 정하는 마을의 원로들.

양치기 마놀리오스에게는 "예수"의 역할이 주어진다.

베드로와 유다. 야고보, 요한그리고 마리아까지...

그러다 이 풍요로운 마을에 유랑민들이 들어온다.

터키의 침략으로 삶의 터전을 빼앗긴 그들은 리코브리스에 도움을 요청한다.

자기의 것을 나눠야 하는 상황 앞에서.

인간은 아주 필사적으고 구체적으로 이기적이 된다.

소위 말하는 지도자의 지위에 있는 사람들의 위선과 욕망.

그걸 이 작품은 아주 민망할 정도로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역할극은 이제 더 이상 역할극이 아닌 현실이 된다.

또 다시 "예수"를 핍박하는 인간의 역사가 시작된다.

 

...... 헛되군요, 나의 예수님.

       2천년이 지났는데도 인간들은 여전히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고 있지 않습니까?

       도대체 언제쯤이면 당신은 다시 태어나 이번만큼은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고

       우리 가운데서 영원히 사실 겁니까? ......

 

조물주의 창조는 늘 반복되고

그래서 인간의 창세기도 늘 반복된다.

당연히 인간의 출애굽기도 반복되고

예수의 골고다 고난도 반복된다.

구약과 신약의 끝없는 반복.

수없이... 수없이... 몇 번씩 반복되고 있는 예수의 십자가 고난.

인간은 자기 자신이 못 박히기 전까지는 결코 아무것도 깨닫지 못한다.

그게 인간의 불행이고,

인간의 역사다!

 

인간의 사악함은...

신의 창조 그보다 훨씬 더 멀리까지 가버렸다.

그래서 이젠 신조차도 어쩌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닐까?

그저 수없이 못박히는 예수만 보낼 뿐...

 

그랗다면 예수는,

앞으로 몇 번을 더 못박혀야 할까?

감히 신에게 부탁하고 싶다.

이제 인간을 버리라고...

Posted by Book끄-Book끄
그냥 끄적 끄적...2011. 2. 19. 09:04
벌써 일주일째 머리속 딱따구리와 씨름중이다.
(차라리 내 머리속 지우개가 낮지...)
이번 놈은 꽤나 장기전으로 머물고 있다.
삼사일 정도의 작은 놈은 그런데로 그리고 습관적으로 버텼는데
아무래도 지금까지 온 딱따구리 중에서 제일 큰 놈이 온 모양이다.
오른쪽을 시작해서 정중앙을 거쳐 현재는 왼쪽으로 자리 이동을 했다.
이번 놈은 너무 영역표시를 넓게 한다.
딱딱딱딱! 딱딱딱딱!
나름대로 박자와 리듬을 가지고 열심히 쪼아댄다.
이러다 정말 머릿속에 휑한 구멍이라도 뚫리는 건 아닌지 걱정이다.
급기야는 걸을 때조차도 이마를 잡고 걷는다.
매일 하던 운동도 덕분에 일주일째 못하고 있다.
풀어주지 못한 어깨 근육들이 덩달이 꺄약 꺄약 비명을 질러댄다.
거기다 오랜 친구같은 빈혈이 주인의식을 발동한다.
소위 삼박자가 아주 제대로 맞아떨어졌다.
이것들이...
언제까지 내 몸에서 굿판을 벌일지 모르겠다.



편두통, 빈혈, 어깨 통증.
일단 편두통만 해결되면 나머지도 소강상태로 접어들 것 같은데
좀처럼 머릿속 딱따구리가 날아갈 기미가 없다.
공기좋은 수목원을 찾아가서 직접 풀어줘야 하는 건 아닌지...
지금 현재로선 진통제도 효과가 거의 없다.
책을 읽는 것도 그래서 힘들다.
베른하르트 슐링크와 주제 사라마구가 어떻게든 위로해보려고 지금 열심히 노력중이시다.
(베르하르트 슐링크의 <디른 남자>를 읽고 지금 주제 사라마구의 <수도원의 비망록>을 읽는 중이다)
괜히 미안해진다.
특히나 주제 사라마구에게...
아껴둔 책이었는데...
읽은 책들도 짧게 정리해서 남겨야 하는데 현재로써는 이만 총총총... 이다.
주말을 지나고 나면
제발 머릿속 딱따구리가 날아가버렸으면 좋겠따.
"고마 해라~~~ 마이 묵었다..."



딱딱딱딱! 딱딱딱딱!
참 무던히도 일관적인 놈!
Posted by Book끄-Book끄
읽고 끄적 끄적...2011. 1. 15. 06:21
참 이 양반 OO법도 참 많다.
이번에는 이외수의 비상법이란다.
역시나 정태련이 그림을 그리고...
이외수를 좋아하는 작가의 리스트에 올려본 적은 없지만
정말이지 생존법이니, 비상법이나 이제 그만큼 했으면 됐으니
다 때려치우고시고 제발 소설 좀 쓰셨으면 좋겠다.
이러다 외모뿐만 아니라 글쟁이로서도 기인되시겠다 싶어 좀 걱정스럽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책들...
참 나를 불편하게 한다.
두꺼운 종이를 사용해(남들은 고급지라고 하겠지만....) 들고다니기에 무겁고
읽을 부분보다 여백이 더 많아 왠지 속았다는 느낌도 들고
특히나 요즘같은 칼바람엔 책장을 넘기느라 손도 너무 부산하고 처량하다.
(주제 사라마구나 폴 오스터의 첫줄부터 끝줄까지 빽빽하게 채워진 글이 마구마구 그리워지고)
명상 좀 하면서 인간답게 살라고 강요하는 것 같아서 그렇고,
남들은 잘 그렸다고 할지 모르지만 왠지 좀 괴기스런 그림들에 섬뜩섬뜩하다.
더군다나 내가 참 무서워하는 곤충의 왕국이 시리즈로 들어 있다.
꽃들은 또 얼마나 황량하던지...
명상을 하고 싶다가도 당췌 무서워서...
이제 며느님도 신춘문예 당선하셔서 후배작가가 되셨는데
네비게이션도 안 나온다는 그 좋은 감성마을에서 싱싱한 글 좀 써 주셨으면...
트위터 글에만 매진하지 마시고...
하악하악!
Posted by Book끄-Book끄
달동네 책거리2010. 8. 31. 05:55

<The Road> - 코맥 매카시

로드(THE ROAD)

“미국 현지에서 감히 <성서>에 비견되었던 소설”
이런 광고와 함께 2008년 6월 우리나라를 그야말로 강타했던 소설입니다.
<The Road>
책의 첫 페이지부터 마지막 페이지까지 일관성(?)있게 계속 길 위를 떠도는 (도저히 목적지가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이유는...) 내용입니다.
어쩌면 우리나라 정서와는 어울리지 않는 내용이기에 이해가 어려운 부분도 있고 심지어는 거부감마저도 느껴질 수 있는 그런 소설입니다.
글쎄요... 개인적으로는 왜 이 소설이 성서에 비교되고 있는 건지 납득은 잘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사실은 독특한 메시지를 준고 있다는 사실이죠.
“인류 대제앙에서 살아남은 사람들... 그 묵시론적 이야기”... 이 책에 대한 평들의 대부분을 장식하는 해드라인 문구입니다.
하지만 그것도 제에게 설득력이 좀 없어 보입니다.(또 저의 찌질한 이해력 부족이 그 밑바닥에 깔려있긴 하겠지만요)
그들이 살아남은 유일한 사람도 아니고, 그리고 이 책엔 어떤 묵시론적인 암시나 계시 혹은 계명 같은 것들은 등장하지도 않습니다.
폐허와 추위의 땅 위에서 살아남는 10가지 방법쯤을 알려주는 길 위의 삶을 다룬 실용서는 더더욱 아닙니다.
주인공인 남자와 소년은 "불을 운반하는 사람"이라는 상징적인 의미의 존재입니다.
불이라… 인류의 문명이 시작이 불에서 비롯됐던가요?
그렇다면 그들을 계속 걷게 만들었던 건 다시 꽃피워야 할 새로운 문명에 대한 책임감이었을까요? 아니면 모든 회복의 근본이어야 할 선한 인간성 회복이었을까요? 그것도 아니면 항상 무엇인가의 완벽한 해답인 사랑? 아니면 판도라의 상자에 마지막으로 남았던 절망을 이겨낼 희망?
어쩌면 그 모든 것 다 일 수도 있고, 전혀 다른 어떤 것일 수도 있습니다.
(당신이 느끼는 바로 그것일 수도 물론 있죠)

일단 이 책에 나오는 사람들의 특징은 익명성에 있다 하겠습니다.
남자, 소년, 사내, 노인, 여자….
그 누구도 구체적인 이름이나 심지어는 형체조차도 소유하지 않기도 하죠.
마치 현대인처럼요…(혹시 난 이름이 있는데…. 라고 말하고 싶으신가요????)
어쩌면 불탄 거리에 꽂혀 있는 반쯤 타버린 인간 미라들과 주인공들이 서로 다르지 않음을 말하고 싶었던 건 아니었을까요?
살아남음의 이유가 어떤 목적과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우연 내지는 일종의 눈속임 같은 건 혹 아닐지…
실제로 이들이 살아 있는 사람들이라고 누가 감히 이야기 할 수 있을까요? 
이 책의 주인공들.
그들이 실제 "부자지간"인지도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마치 어린 신을 모시고 길에 떠나는 제자의 느낌이라고 할까요? 물론 그 신의 어깨 위엔 반드시 인류 구원이라는 대전제가 걸려 있어야 하겠죠!!
그런 점에선 확실히 성경의 모티브가 느껴지긴 합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모르지만 주인공들이 있는 지금 이 세계는 불의 재앙으로 거의 모든 인류와 세상이 멸종 상태에 있습니다.
아직 뜨거운 재앙이 열기가 채 식지 않은 이곳에서 그들은 필사적으로 음식을 구하며 방수포에 의지하여 추위를 견디며 남쪽으로 남쪽으로 낡은 쇼핑 카트를 끌고 이동하고 있습니다.
이 모습만 떠올린다면 참 코믹하고 우수운 비주얼이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두 주인공의 선문답에 가까운 단답형의 대화.
그들의 대화는 지금 그들이 처한 환경만큼이나 미약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렬한 생명의 숨결이 느껴져 차라리 비장하기까지 합니다.
잠시 찾았던 완벽한 환경의 은신처마저도 그들은 버려야 했고 또 다시 굶주림과 추위의 땅으로 마른 몸과 낡은 카트를 끌고 들어섭니다. 늘 그랬듯이…
이젠 슬슬 제 몸도 피곤해지기 시작합니다.
때론 이런 환경에 영 어울리지 않는 아이의 동정심에 제가 다 화를 내면서 몇 개 남지 않은 깡통이 마치 내 것인냥 움켜쥐며 눈에 핏발을 세우고 있는 제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책의 표현처럼 순간 제가 "좀비"가 된 듯한 느낌이죠.
이제 어떻게 살아남아야 하는 걸까요?
"인간이 살 수 없는 곳에서는 신도 살 수도 없다"고 말하는 그곳, 아니 이곳에서요.
지금 내 세상에서 "재앙"이란 어떤 형태일까요?
그 "재앙"을 뚫고 우리는 꼭 뭔가를 남겨야만 하는 걸까요?
소년은 어느 순간 묻습니다.
"아빠! 우리는 지금도 좋은 사람들인가요?"

남자는 소년을 남기고 이제 눈을 감으려 합니다.
그는 소년에게 남쪽으로 계속 가라고 말합니다.
소년은 잠시 길 위에서 마주쳤던 작은 아이를 떠올리며 묻습니다.
"하지만 길을 잃으면 누가 찾아주죠? 누가 그 아이를 찾아요?"
남자가 마지막 말을 합니다.
"선(善)이 꼬마를 찾을 거야. 언제나 그랬어. 앞으로도 그럴 거고…."
아빠라는 남자를 잃은 소년은 또 다른 남자를 만납니다.
함께 가자고 말하는 남자에게 소년은 말합니다.
"아저씨가 좋은 사람이란 걸 어떻게 알 수 있죠?"
남자는 말합니다.
"알 수 없지. 그냥 운에 맡겨야지, 뭐"
길을 잃은 소년의 앞에 나타난 남자는 꼬마를 찾아온 선(善)이었을까요?
만약 그 질문이 당신에게 주어진다면 뭐라고 말하고 싶으세요?

* 이상하게도 불편한 책들을 많이 읽고 좋아하게 됩니다.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일게 되는 건 그 불편함이 주는 즐거움과 의미 때문일겁니다.
   이 책을 읽다 보면 자꾸 또 다른 불편한 작가 주제 사라마구의 <눈 먼 자들의 도시>를 어쩔 수 없이 떠올리게 
   됩니다.
   책 표지를 다시 살펴봤죠.
   역시나 주제 사라마구의 책을 번역했던 정영목의 번역작이네요.
   이 책의 마지막 4페이지는 옮긴이의 말이 실려 있습니다.
   이 부분도 꼭 읽어보라고 권해드리고 싶네요.
   번역가의 작가에 대한 애정과 작품에 대한 믿음을 느낄 수 있는 부분입니다.
   "코맥 매카시"에 대해 어쩌면 더 잘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

Posted by Book끄-Book끄
읽고 끄적 끄적...2010. 6. 30. 06:37
역시 주제 사라마구다.
충격적이고 파격적이고 그리고 놀랍도록 문학적이고 신비하다.
주제 사라마구의 최대 문제작 <예수복음>
이 책은 사실 1998년 그가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을 때
우리나라에 <예수의 제2복음>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됐다가 절판됐다.
2010년 1월 정영목 번역에 의해 다시 초판된 책.
(나로서는 정말 다행이다 싶다. 주제 사라마구와 정영목의 만남이...)
1991년 이 작품의 포르투갈에서 처음 발표됐을 때
주제 사라마구는 조국 포르투갈을 떠나야만 했다.
그후에 유럽문학상으로부터 심사를 거부당하기도 했고
1998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을 당시에는 로마교황청에서 유감을 표명했다.
바로 이 작품때문에...
"신성모독"과 "편협한 이념의 소유자"라는 비판과 함께...
1995년에 나온 <눈먼 자들의 도시>가 신약의 끝인 묵시록에 해당된다면
이 책 <예수복음>은 신약의 출발인 복음서에 해당된다고 한다.
Veni Vidi Vici (베니 비디 비시)
말 그대로 이 책은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다...



책의 어떤 내용이 로마교황청의 분노를 샀을까?
표면적으로 말하자면 이 책의 내용 전체가 다 그렇다.
하나님에 의해 이용당하는 예수.
예수가 신의 아들이 아니라 우리와 똑같은 인간으로
숨쉬고 사랑하고 갈등하며 자신의 운명을 회의한다면?
동정녀 마리아에게 찾아와 수태고지를 했던 인물이
천사가 아니라 악마였다면?
그리고 창녀로 알려진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의 연인이었고 오랜 시간 사실혼 관계였다면?
이야기의 시작은 한 편의 명화를 꼼꼼히 해설하는 것처럼 섬세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의 모습.
왠지 거룩한 신성과 인간적인 연민이 함께 느껴지는 도입부.
글의 마지막 장면 역시도 십자가 처형 장면이다.
뼈에 목이 박히고 옆구리는 창에 찔려 극심한 고통과 갈증을 느끼며 
서서히 죽어가는 예수.
그때 저 높은 곳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린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며, 내가 기뻐하는 자다"
예수는 그 순간 자신이 당했다는 것을 알았다.
희생 제단에 가는 양처럼 꾐에 빠진 것이다.
인간들이여, 하나님을 용서하라. 하나님은 자신이 한 짓을 알지 못한다

예수의 입 속에 담긴 마지막 말...
확실히 로마교황청이 신성모독을 내세우며 유감을 표명할만큼 충격적인 내용이다.



남자로서 한 여자와 육체적인 사랑을 하는 예수,
그리고 하나님은 아들과의 만남에서 자신의 계획을 밝힌다.
내가 유대인의 하나님에서 더 많은 사람들의 하나님이 되도록 예수가 도와야만 하고
그러기 위한 예수의 역할은 순교자라고 말한다.
그 말을 따르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예수.
하나님은 예수에게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말한다.
순교자의 죽음은 고통스러워야지, 또 가능하다면 수치스러워야지,
그래야 신자들이 감동해서 더 헌신하게 되니까
.
체념하듯 질문하는 예수.
제가 죽은 뒤에 미래는 어떻게 되나요?
하나님의 대답한다.
교회가 생길거다.
유머러스게 들리는 이 대답의 의미심장함에 순간 멍해지기도 했다.
하나님과 악마와의 대화에서도 이런 유머러스한 섬뜩함이 계속된다.
자신을 다시 천국에 받아주면 예수는 죽을 이유가 없을거라는 악마의 거래성 말에
하나님은 대답한다.
내가 계속 선이려면 자네가 계속 악이 되는 게 긴요해.
하나님과 관련된 일은 모두 악마와도 관련이 되어 있다고 책은 말한다.
(그리고 이 말은 사실은 정말 진실이다)
책을 읽으면 읽으수록 지금 이 시대의 "종교"라는 의미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딱히 기독교나 가톨릭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모든 의미의 종교를.
예수는 하나님께 요구한다.
당신이 다른 신들에게 거두는 승리가 얼마나 많은 고통과 주음을 가져오는지,
사람들이 당신의 이름과 제 이름으로 싸우는 전투에 얼마나 많은 죽음과 고통이 필요한지 말씀해
줄 것을...
마치 예리한 둔기로 강타당한 느낌이다.
자신의 목적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 하나님의 모습과
거대한 힘 앞에 결국은 불복할 수 밖에 없는 나약한 한 인간으로서의 예수.
그러면서도 마지막엔 종교로 대표되는 세상의 모든 거짓과 허상을 향해 한 방 제대로 먹이는 예수의 모습.
이런 충격적인 글들...
종교적인 비난보다 주제 사라마구의 상상력이 나는 더 두럽고 무섭다.
그리고 더 두렵고 무서운 것은,
이제 더 이상 주제 사라마구의 새로운 작품을 만날 수 없게 됐다는 사실이다.
2010년 6월 18일.
이 천재의 타계가 나는 세상의 "종말"처럼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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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사라마구의 작품들 (보라색은 내가 읽은 작품들)>

2009 『카인(Caim)』
2008 『코끼리의 여행(El viaje del elefante)』
2005 『죽음의 중지(As intermitencias da morte)』
2004 『눈뜬 자들의 도시(Ensaio sobre a lucidez)』
2002 『도플갱어(O Homem duplicado)』
2000 『동굴(A Caverna)』
1997 『이름 없는 자들의 도시(Todos os nomes)』
1995 『눈먼 자들의 도시(Ensaio sobre a cegueira)』
1991 『예수복음(O Evangelho segundo Jesus Cristo)』
1989 『리스본 쟁탈전(Historia do Cerco de Lisboa)』
1986 『돌뗏목(A Jangada de pedra)』
1984 『히카르두 헤이스가 죽은 해(O Ano da Morte de Ricardo Reis)??』
1982 『수도원의 비망록(Memorial do convento)』
1981 『바닥에서 일어서서(Levantado do Chao)』
1977 『서도와 회화 안내서(Manual de pintura e caligrafia)』
1947 『죄악의 땅(Terra de pecado)』 

주제 사라마구의 <인간의 조건 3부작>으로 불리는 『눈먼 자들의 도시』『동굴』『도플갱어』는 전부 읽었다.
좀 시간이 왔다갔다 하면서 우리 나라에 번역되기는 했지만
『눈뜬 자들의 도시』『이름 없는 자들의 도시』『돌뗏목』『리스본 쟁탈전』『죽음의 중지』도 읽었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수도원의 비망록』까지 읽으면 현재 우리나라에 출판된 그의 책 전부를 읽게 된다.
마지막을 한 권을 남겨놓고 허탈해하고 있었는데 좋은 소식이 들린다. 
2010년 『예수복음』을 시작으로
해냄 출판사에서『코끼리의 여행』『히카르두 헤이스가 죽은 해』두 권이 출간될 예정이란다.
정말 다행스럽게도 내게 종말은,
아직까지는 유보중이다...

Posted by Book끄-Book끄
찍고 끄적 끄적...2010. 3. 15. 06:10
오랫만에 영풍문고를 다녀왔다.
서점을 가면 왠지 모르게 편안해지면서
유난히 눈이 반짝거리는 나.
이때가 내가 유일하게 쇼핑(?)에 탐욕스러워지는 때다.
갖고 싶었던 책들이 너무 많았지만
그 중에서 특히나 맛있어 보이는(?) 3권의 책을 선택했다.


주제 사라마구의 <예수복음>
천명관의 <고령화 가족>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귀향>
(탁월한 선택 ^^)



주제 사라마구의 책들은 늘 한 번도 실망시키지 않았고
천명관은 몇 년 전에 <고래>라는 소설을 정말 재미있게 봤던 기억에 선택했다.
날 것들에 대한 이야기가 그땐 꽤나 신선했었는데...
그의 두 번재 소설을 보니 무지 반갑고 기대도 된다.
그리고 또 다른 책 <귀향>은
<더 리더-책 읽어주는 남자>의 영화제작으로 뒤늦게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신작이다.
또 어떤 사실(fact)을 가지고 아름답고 깊은 슬픔을 만들어냈을까?
그의 이력만큼이나 그의 글들은 내겐 즐거움과 신비다.
새롭게 손에 품게 된
세 권의 책이 주는 풍요로움.
나는 지금 아주 깊고 본격적으로 행복하다.
Posted by Book끄-Book끄
달동네 책거리2010. 2. 10. 06:20
<크리에이티브 마인드> - 허버트 마이어스, 리처드 거스트먼

 

크리에이티브 마인드

맨 처음 책을 손을 잡게 되면 잡는 순간 느낌이 오는 책이 있습니다.

저의 경우는 오르한 파묵의 모든 책들이 그랬고(정말로 그의 모든 책들...) 파트리크 쥐스킨트, 알랭 드 보통, 주제 사라마구가 그랬습니다.

(솔직히 더 많이 있긴 한데. 뭐 하자는 플레이가 될까봐 그만 하렵니다...)

이 책 <크리에이티브 마인드>는 책 표지부터 저한테 말을 거는 느낌이 들었던 책입니다.(이런 순간엔 마치 내가 책으로 빙의 되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면 믿으시겠어요?)

어쩐지 자꾸 저를 부르는 것 같아 단번에 집어 들었습니다.

사실 다른 책을 소개하려고 했는데 저의 생각을 급선회시킨 짜릿한 장본인 되시겠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무지 무지 무지 무지 재미있는 책입니다.

이 책의 저자들 역시 엄청난 창의력을 가진 디자이너로 세계 유수의 상들을 싹들이 한 우리 기준에서 생각하면 선택받은 극히 적은 소수인들입니다.

한마디로 사람 주눅 들게 하는 인간들이란 뜻이죠.

이 책에서 우린 그런 무시무시한 인간들을 자그만치 20명이나 만나야 합니다.

근데 매력적인 건 책장을 넘길수록 이 무시무시한 인간들이 마치 바로 내 옆에 앉아 조곤조곤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다는 겁니다.

처음엔 무지 부담스러웠죠.(이들이 좀 대단한 사람들이라 말이죠... 저 실제가 아님을 알면서도 당황하고 몸 둘 바를 몰라하고 있더랬습니다)

그런데 읽다보니까, 글쎄 제가 이 사람들한테 완전 집중하고 있는 겁니다. 더 이야기해달라고 떼를 쓰는 마음으로요.(이거 빙의 맞죠? 정신분열인가?)


요즘엔 사실 "창조"의 홍수 속에 살고 있는 실정이긴 합니다.

얼마나 창조할 게 많으면 정당에서도 창조를 이름으로 내세우며 목에 핏대를 세우시겠어요?(것도 영 창조적이지 않게시리... 모냥 빠지게....)

예술계는 물론이고 과학ㆍ기업ㆍ정치에 이르기까지 이 말을 쓰지 않으면 오히려 어색할 지경이기까지 하죠. 서점에만 나가봐도 창조, 창의력 관련 서적이 봇물처럼 쏟아져 아예 대형 서점엔 '창조력 계발'이라는 부스가 별도로 마련되어 있을 정돕니다. 하지만 이런 책들은 대개 창조적인 인물들의 삶과 업적을 정말 그야말로 열심히 추적해 나열하는 수준이죠.

그러면서 평범한 우리 인간들 엄청 기운 빠지게 만드는 예기치 못한 역효과를 만드는 불상사까지 낳기도 하죠.


이 책엔 다양한 사람들이 자신의 육성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저널리스트, 기자, 연출가, 극작가, 작가, 경영인, 건축가, 영화감독, 작곡가, 디자이너, 유리조형가, 화가, 퍼스널컴퓨터 발명가, 박물관장, 조각가, 사진작가....

이 사람들의 공통점은...

“일을 즐긴다”는 아주 단순한 명제였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일을 통해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하고 싶다는 소망이었구요.

그들은 또한 말합니다.

창조적인 사람은 개방적이라고요, 그들은 자신의 아이디어를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어 합니다. 그들은 알고 있었던 거죠. 공동 작업이 얼마나 창조적일 수 있는지를, 그리고 그것을 통해 새로운 “전체”가 창조되는 짜릿함을요.


요즘 제가 절실히 느끼고 있는 부분입니다.

공동 작업의 엄청난 “창조성”을요...

예전엔 혼자 잘 하면 된다는 생각이 대부분이었습니다. 혼자 잘하려고 노력하다 보니 오히려 타인을 탓하게 되고, 다른 사람의 실수를 습관으로 생각하기도 했습니다.(이 책 아주 못쓰겠습니다. 과거의 안 좋은 모습을 고백까지 하게 만드니...)

다행인 것은,

요즘은 함께 일하는 즐거움에 대해 깨달았다는 겁니다.(완전 기특한 버전...)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얻어지는 증대 효과도 전 정말 느끼고 있거든요.

이 책의 표현 데로 정말 짜릿한 흥분이었습니다.

이런 제 마음이 아무래도 이 책을 불렀던 것 같습니다.

(확실히 책에는 영혼이라는 게 있는 것 같습니다...)


책을 보면서 저는 짧은 <독서노트> 같을 걸 기록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이 책은 제 노트의 많은 부분을 차지했고 그리고 문장 전체를 그대로 받아 적은 부분들도 참 많이 있습니다.

힘이 되는 구절들과 만나는 건 일종의 축복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창조성”은 사람의 본성처럼 모든 사람들에게 있다고 합니다. 그걸 어떻게 발견하느냐는 누구도 뭐라고 이야기 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단지 내가 나의 창조성을, 타인의 창조성을 꺾는 그런 사람은 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랄 뿐입니다.

이 책의 소개된 “스티븐 홀”이라는 건축가는 말합니다.

“창조성은,

예술 활동에만 필요한 게 아니다.

상상력은 우리가 생존하기 위해 꼭 필요한 핵심이다.

이런 것들이 없다면 우리는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그렇다면....

저는 지금 살아있는 걸까요?


Posted by Book끄-Book끄
찍고 끄적 끄적...2010. 1. 5. 06:21
거짓이라고 말해도 믿을 것 같았다.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어도
소르라치게 쏟아지고 쏟어지던 하얀  눈.
서울에 내린 눈 25.8cm
1969년 1월 28일 25.6 cm 이후 41년 만의 대설이란다.
적설 관측 이래 가장 많은 양의 눈이 내렸다고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가 발표했다.
재설 작업을 꿈도 꾸지 못하게 만든 눈 
눈이 공포로 다가올 수 있다는 걸 알았다.
한 걸음, 한 걸음이 때론 위태롭고 아슬아슬하다.
이상하지?
주제 사라마구의 <눈 먼 자들의 도시>가 생각났다.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백색 공포에 온 도시가 휩쓸리는 이야기.
그 백색의 암흑에서 유일한 눈이었던 한 여자의 이야기...
어쩐지 내가 그 여자를 닮아있다는 생각이 든다.



한 장의 유리를 통해 보는 세상은
그러나 너무나 찬란하게 아름다웠다.
저 햐얀 눈 속에 오롯이 들어가 안기면
그대로 햐얀 온기가 스며들 것 같은 편안함과 그리고 따뜻함.
그건 단지 시선의 왜곡일 뿐인데,
한 장의 유리를 두고
나는 그 곳을 향해 끝없는 그리움을 보냈다.
오.도.카.니...
나 역시 장독대처럼 그대로 눈을 쌓고 싶다는 간절함.
조금 있으면 저것들도 흔적을 잃겠구나 하는 생각에
자꾸만 맘이 조급해졌다.
털어내야 하는데... 털어내야 하는데...
누군에게 하고 싶은 말이었을까???


나란히 빛과 함께 있는 눈은
그리고 또 한 세상이었다.
그 찬란함이 가늘게 몸을 떨게 한다.
단지 눈일뿐이라고, 풍경일뿐이라고
꾹꾹 다져진 위로를 건넨다.
이 눈발 속을 버텨내고 싶다면
단지 두 발의 단단함만 있으면 된다고...
그래서 그 단단함만
차곡차곡 눈처럼 쌓고 있던 시간.
 
Posted by Book끄-Book끄
읽고 끄적 끄적...2009. 7. 4. 07:50



지금 열심히 읽고 있는 책,
교정자의 의도적인 단어 적용으로 새로운 역사가 시작된다는 설정.
역시나 독특하고  재미있다.



주제 사라마구
내겐 신비한 그리고 명석함의 대가로 기억되는 작가.
그의 책에선
어설픈 배신조차도 느낀 적이 없다.
작가의 해박함이라는 게 이런 거구나
진심으로 존경과 찬사를 보내게 된다.

인간은 항상 정신적으로 착란상태라고 하는데...
그의 말처럼
문학은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존재했다는 게
진실로 다가온다.




누군가가 저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나가봤지만
아무도 없을 때도 있고,
우리가 딱 한 발짝 늦게 나가볼 때도 있다.

우기가 듣기는 했지만 의미를 파악하지 못한 몇몇 구절들을 제대로 이해했더라면
우리 삶이 얼마나 바뀔지 결코 알 수 없는 일이다.

모든 작가는 진정 몽상가일까?
그럴지라도
주제 사라마구의 몽상은
너무나 건설적(?)이다.
함부러 무너뜨리지 못할 견고한 성을 보는 느낌
대가가 품은 글은
결코
영원히 끝나지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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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역사는 수없이 다양한 방식으로 써질 수 있었다.
 이처럼 역사가 무한하고 다양하다는 생각이 내 글의 핵심이다.
 불가능한 일, 꿈, 환상이 실제로 일어날 가능성이 내 소설의 주제이다."
                                                                                         -  주제 사라마구
Posted by Book끄-Book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