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동네 책거리2009. 12. 8. 05:33
 <네가 어떤 삶을 살든 나는 너를 응원할 것이다> - 공지영


 네가 어떤 삶을 살든 나는 너를 응원할 것이다


작가 공지영....

참 할 말이 많은 사람이기도 하고, 할 말이 없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한때 그런 말들이 있었어요.

“오죽하면 공지영이고 신경숙이겠느냐고....”

저 신경숙과 공지영의 모든 책들을 거의 다 읽었습니다.

위에 적은 말, 어느 부분 동의하는 부분도 있고, 그렇지 않은 부분들도 있긴 하지만 어쨌든 한때 문학계에선 이런 말이 떠돌았드랬죠.

사실 전 공지영이라는 작가에게 좀 불만이 있는 편입니다..(제가 또 뭐라고 불만씩이나...)

깊게 들어갈 것 같으면서 그 언저리만 열심히 맴도는 느낌의 불편한 망설임, 그리고 좀 살았던 어린 시절의 과거를 자꾸 내비치며 “그래, 난 늬들하고 태생부터 좀 다르게든...”하고 눈을 살짝 내리까는 약간은 공주병적인 문장들하며, 어찌 생각하면 뻔뻔하다 싶을 만큼의 당당함이 그닥 제 마음에 와 닿지 않았던 거죠.(저의 완전 찌질한 열등감의 발동임을 어찌 고백하지 않을런지.....ㅋㅋ)

저 여자는 무슨 복에 부모 잘 만나 풍족한 어린 시절을 보내고, 뭔 복에 당대 잘나가는 작가, 감독, 교수들만 두루두루 남편으로 만났는지....

그냥 느낌에 손에 물 안 묻히고 곱게 자란 태가 줄줄 난다고 생각했죠.

왜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작가는 줄담배를 달고 살고, 머리는 기름기 동동 흐르고, 뭐 한 사나흘은 족히 못 잔 것 같은 꽹한 눈에 거칠거칠한 검은 피부...한마디로 꾀죄죄함의 전형이었는데 공지영이란 작가는 비쥬얼부터 영 작가스럽지 않다는 말도 안 되는 편견을...

그런데 이 작가...

어느새 “공지영스럽다”는 트렌드를 만들어 버린 것 같습니다.

적어도 사람들은 이제 거의 아는 것 같아요.

몇 문장 읽어보고도 “아~, 이게 공지영꺼구나...”하고..


오늘 소개할 책은 공지영의 그 숱한 소설들 중 하나가 아니라 산문집의 일종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공지영식 독서노트라고 할 수 있죠.

제가 좋아하는 분야이기도 합니다.(제가 싫어하는 건 뭘까~~~~~~요???????)

공지영의 소설 <즐거운 우리 집>의 연장선상에 있는 책이라고 미디어들은 말하는데 전 이 말이 참 맘에 안 듭니다.

단지 “위녕”이라는 딸이 등장한다고 해서 그렇게 소위 싸잡아 분류하는 건 어쩐지 참 불편하네요.

엄마가 딸에게 주는 편지라는 글귀도 좀 불편합니다.

이 책을 처음 봤을 때 제 느낌은....

확실히 공지영은 여우같은 작가라는 생각이었습니다.

이 책을 읽다 보면 "전시회"를 관람하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합니다.

그림처럼 읽혀지는 책이라고 하면 이해가 되실까요?

대략 꼽아 봤더니 20권의 책들이 소개되어 있고 그리고 소소한 단편들이며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들도 중간중간 나옵니다.

이런 형식의 독서노트는,

확실히 없었던 것 같습니다.

서간문의 형식을 빌어서 쓴 독서 노트라....

그래서 어찌 보면 따분하고 줄거리 위주로 진행될 것 같은 책들의 소개가 마치 "storytelling"처럼 자연스럽게 다가옵니다.

공지영이 소개하는 책들은 이곳에서 image making 되어 입체적으로 서서히 바라보게 됩니다.(마치 일정한 거리를 두고 감상(?)하는 그림 같다고 할까요~~ 그녀가 심지어 큐레이터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책의 전반적인 내용을 소개하는 게 아니라 강렬했던 부분들, 구절들, 그리고 그녀가 느꼈던 느낌들을 1차원적인 여과과정만을 거쳐 표현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부담스럽지 않고 과히 전문적이지도 않아 오히려 다정하기까지 하죠.

그 다정함에 엄마가 딸에게 보내는 편지글이라는 단서까지 붙어 있으니 그 말캉함이 win-win 효과를 거두고 있다고나 할까요?

확실히 작가 공지영은 여우적 육감이 발달할 것 같습니다...(한없이 부러울 따름이죠.... 이럴 땐 차라리 늑대적 육감이라도 심히 갖고 싶어진다는... 아~~~우~~~~)

책을 읽으면서 공지영이라는 작가에 대해 느끼는 제 선입견마저도 그대로 포용될 정도로 온기가 있는 글이었습니다.

사실 독서 노트...

작가 입장에서는 별 힘들이지 않고 쓸 수 있으면서 판매의 부담감 또한 없는 글이라고 생각합니다.(어디까지나 벤댕이 소갈딲지를 자랑하는 제 좁은 식견으로다....)

잘 쓰면 이렇게 베스트셀러에 오를 수도 있고, 그렇지 않다 해도 개인적인 기록의 출판으로 남길 수도 있으니까요.

그래서 작가들은 한번씩 “독서노트”를 남기고 싶어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 공지영....

새로운 형식을 만들어 낯설게 하기에 확실히 성공한 것 같습니다.

가끔은 이 여자의 여우같은 행보가 어디까지 갈지 사뭇 궁금하기도 합니다.

Posted by Book끄-Book끄
달동네 책거리2009. 11. 30. 05:51
 <죽도록 책만 읽는> - 이권우



죽도록 책만 읽는

지난번에 소개한 간서치 이덕무와 유사한 책벌레의 책을 한 권 소개하려고 합니다.

책을 읽고 싶은데 어떤 책을 읽는 게 좋을지 모르겠다고 생각되는 분께 적극 권하고 싶은 책입니다.

일곱 개의 챕터로 구성된 이 책은 어느 한 쪽에 치우침 없이 다방변의 주제에 대한 책들을 적당한 호기심과 흥미를 유발하도록 소개하고 있습니다.

저 역시도 이 책을 보면서 희망도서 목록에 상당한 책들을 추가했고 지금 열심히 읽고 있는 중입니다.

저처럼 두루뭉술하게 주절주절(?) 책을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소위 말하는 에센스만을 짧고 간략하게 소개해 주고 있는 책입니다.

솔직히 꽤나 열등감과 부러움을 자아내게 만드는 책이죠.

그래도 평소에 책 좀 읽는다고 자부했었는데 이곳에 소개된 책들을 살펴보고는 읽지 않은 책이 훨씬 더 많다는 걸 알고는 번데기 앞에 주름잡은 스스로에 대해 반성하게 만든 계기도 됐습니다.

책의 저자 이권우!

서평잡지 <출판저널>의 편집장을 했던 사람입니다.

그야말로 책에 파묻혀 지냈던 사람이고 현재도 책을 통해 여전히 밥벌이를 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스스로 “호모 부커스”를 자처하는 사람이기도 하죠.


“호모 부커스”

책 읽는 인간 존재라는 뜻의 신조어죠.(사실은 꽤 오래된 단어이긴 합니다만...)

이 말 속에는 “공유”의 의미도 함께 포함되어 있습니다.

흔히 독서라는 건 지극히 개인적인 행위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책 읽는 자의 궁극적인 목적은 저 또한 “공유와 소통”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작가 개인과의 생각과 감정 공유를 넘어 더 많은 타인과의 적극적인 소통의 시작이 “독서”의 매력이라고 개인적으로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호모 부커스”들은 상당히 개방적이며 지독히 현실적이기까지 하죠.

어설픈 독서가들은 현실과 이상 사이의 혼동을 겪게 되지만 “호모 부커스”들은 현실과 이상을 명확하게 구분함으로써 스스로 최대한 편견 없이 판단하고 평가하는 공정함까지 소유하게 됩니다.

“박학다식”이라는 말 속에 항상 “다독”이 포함되어 있는 이유기도 하죠.

눈이 갖는 기억력, 그래서 저는 책을 통해 얻게 되는 기억과 지식들에 대해 차별성을 두게 되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책은 말이죠...

사람을 참 조용히 수다스럽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이 책, <죽도록 책만 읽는>도 그런 의미에선 상당히 수다스러운 책이죠.

그런데 그게 “바글바글” 떠들며 밖으로 퍼지는 소란스러움이 아니라 “소곤소곤” 다가오는 울림이라는 게 그 차이점이죠.

무려 110권이나 되는 책들의 수다를 들을 수 있습니다.

신문을 펼쳤을 때 부담감 없이 재미있게 보게 되는 한 컷짜리 카툰 같다고나 할까요?

짧은 글 속에 필요한 것들만 쏙쏙 알차게 들어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짧은 글 속에 촌철살인의 문구들을 자주 만나게 됩니다.

가령, “고전”에 대해 말하면서,

“고전, 제목은 알아도 정작 읽어보지 않은 책”이라는 스피노자의 말을 인용하면서 정곡을 찌르는 이야기를 시작하죠.

“...... 오늘, 다시 고전을 읽는 데는 다른 무엇보다 토론과 논쟁의 정신이 필요하다. 세월의 담금질을 겪으면 겪을수록 그 정신의 순도가 높아지는 것을 일러 고전이라 한다. 앎과 지혜의 고갱이가 가득 쌓인 곳간인 셈이다. 그러나 이 곳간은 좀처럼 자신의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 지적 호기심이나 의무감만으로 고전을 읽으면서 고전을 면치 못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그 정도로는 권위와 명성, 그리고 오해의 더께가 잔뜩 끼인 고전의 빗장을 열어젖힐 수 없다. 나는 고전의 문을 여는 열쇠는 치열한 문제의식이라고 여겨왔다. 우리 시대의 문제상황을 깊이 이해하고, 그 타개책을 찾기 위한 지적 분투의 필요성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을 달리 표현하면, ‘질문만들기’라 할 수 있다.

질문을 만든 사람이 고전을 경전처럼 여길 리 없다. 고전의 지은이와 토론과 논쟁을 벌이게 마련이다. 막장을 뚫고나갈 지혜를 묻고, 그 답이 현재적 가치가 있는지 토론한다. 도전적인 토론은 논쟁을 불러일으킨다. 이 과정에서 지은이의 사상이 안고 있는 한계가 드러나며, 이를 넘어서기 위한 대안을 찾게 된다. 이쯤 되면, 고전의 주위를 맴도는 지은이라는 ‘유령’이 가만히 당할 리 없다. 해석의 오류를 지적하거나 자신의 다른 책을 참조해야 한다고 복화술로 변호하기도 한다. 고전을 읽는 행위는, 그러므로 묵독일 수 없다. 제대로 읽으면 그것만큼 소란스러운 책읽기가 없다. 자신도 모르게 카니발적 책읽기에 몰두하게 된다..... “

고백컨대, 

저를 완벽히 KO패 시킨 문구였습니다.


“왜 책을 읽어야 하는가?” 그리고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하게 만드는 책입니다.

책은 그러니까 “앎과 함”의 일치를 위해 우리에게 꼭 필요한 행위라고 이 책은 말합니다.

환상은 현실보다 힘이 세다고 하죠. 그래서 우리는 환상에 머물고픈 욕망에 늘 빠지게 됩니다. 그게 어쨌든 일반적인 힘의 논리니까 말입니다.

책은. 그러니까 그 환상을 극도의 차가운 정열로 바라보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를 “~~카더라” 통신에 빠지지 않고 바른 시각과 주관을 갖게 만들어 주죠.

생각해보면 정말 책만큼 누구에게나 민주적인 것도 없는 것 같습니다.

책장을 열기만 한다면 누구에게나 공평한 세계를 그것도 비밀 없이 송두리째 보여주죠.

“다 열어보였으니 어디 한 번 맘껏 들여다봐라!”

책벌레들을 그래서 흔히 관음증 환자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책에 새겨진 다른 사람의 욕망을 책장을 커튼 삼아 훔쳐보는 책벌레들...

그러나 책을 탐하는 관음의 시선은 훨씬 더 근원적이고 깊고 고요합니다.

책을 구하고, 읽고, 즐거움을 나누는 모든 과정에 대한 일종의 은밀한 흥분감이죠.

그래서 책의 자궁이라는 것이 있다면 저 역시도 기꺼이 몸을 웅크려 작은 태아가 될 용의가 있음을 고백하게 됩니다.

“죽도록 책만 읽어도” 다 읽혀지지 못할 책들의 세계.

그 책들의 세계 속에 몸을 웅크리고 지독히 탐욕스런 관음의 시선으로 책들을 바라보자 권하고 싶습니다.

마술사의 비밀을 아는 순간 눈속임의 실체가 드러나는 게 아니라 드디어 스스로 같은 마술사가 되는 거라고 하죠.

오늘 해리포터의 세계로 함께 들어가자 여러분께 손 내밀고 싶습니다.

깊고 고요하고 간절하고 농밀한 관음의 세계가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Posted by Book끄-Book끄
달동네 책거리2009. 11. 23. 06:31
 <책만 보는 바보> - 안소영 

 
책만 보는 바보

<책만 보는 바보>

제목만 보면 어떤 책이라고 생각되나요?

좋은 책을 소개해 주는 서평집 같다는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습니다.

혹시 “간서치(看書痴)”란 단어를 들어본 적이 있을까요?

“간서치(看書痴)”란 말 그대로 “책만 보는 바보”라는 뜻으로 “책벌레”를 가리키는 말이죠.

조선의 역사 속에서 “간서치”라 할 만한 인물을 꼽으라면, (어디까지나 지극히 저의 개인적인 취향임을 밝히는 바입니다.)

정조 이산, 연암 박지원, 다산 정약용, 청장관 이덕무, 퇴계 이황, 율곡 이이 등을 꼽을 수 있을 겁니다.

특히 청장관 이덕무는 아예 자기 자신을 “간서치”라고 부를 정도로 책 속에 파묻혀 지냈던 인물이죠.

이 책, <책만 보는 바보>는 그러니까 바로 규장각 검서관(檢書官)이었던 이덕무(1741~1793), 그 지독한 책벌레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저자 안소영은 청장관 이덕무가 1761년 쓴 자서전 <간서치전>을 읽고 그에게 매료되어 이 책을 집필하게 됐다고 합니다. 그것도 스스로 이덕무가 되어, 역사 속의 그를 버젓이 지금의 시대 안으로 불러내고 있습니다. 이 책을 읽고 있으면 이덕무라는 역사 속 인물이 마치 내 옆에 앉아서 조곤조곤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집니다.

일생을 책 속에 파묻혀 책만 읽는다...

어떻게 생각하면 생활력 없고 현실적이지 못한 무책임한 한량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이덕무 그 자신은 결코 책만 보는 바보가 되고 싶었던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의 진정은 세상에 쓰임이 되는 사람이길 간절히 원했죠.

그런데 이 바람은 그에겐 넘지 못할 높은 산과도 같았습니다.

바로 “서자(庶子)”라는 그의 출신 성분 때문이었죠.

“...... 사람으로 태어나 가장 비참한 것은 쓰일 데가 없다는 것이다. 책만 파고들면 무엇 하나? 내 말과 글로는 세상을 조금도 바꾸어 놓지 못하는 것을. 몸을 움직여 할 줄 아는 일이 무엇이던가? 어렵게 뜻을 세웠다 하더라도 세울 뜻을 펼쳐 보일 데가 없는 나의 인생은 내내 외롭고 서럽기만 했다.....”

이덕무는 왕족의 후손이었으나 적자 혈통이 아닌 서자 혈통이었습니다. 그의 할아버지로부터 시작돼 후손으로 이어진 서럽고 서러운 서자라는 핏줄.

이 보이지 않는 서러운 핏줄로 이덕무의 앞길은 가로막히고, 주눅들 수밖에는 없었죠. 그때마다 그는 “두려움과 무기력감”에 빠져 괴로워했다고 고백합니다.

적자와 서자의 구별이 엄격했던 조선!

그 시대에 서자가 낄 자리는 도저히 없었습니다. 농사를 짓거나 장사를 하여 먹고살 방도를 찾아보려 하여도 양반의 핏줄이라 하여 달가워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존대를 받으며 구종을 부릴 수 있는 당당한 양반의 처지 또한 아니었죠. 그럴 때마다 그는 어머니가 물려준 보잘것없는 핏줄이 아니라, 아버지가 물려준 이기적인 양반의 핏줄이 한스러울 따름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가 책만 보는 바보가 될 수밖에 없었던 건 서러운 핏줄에 대한 한스러움과 어쩌지 못하는 신분에 대한 벽 때문이었던 거죠.


이서구, 유득공, 박제가, 백동수.

소위 백탑파라고 불리우는 이덕무의 깊은 벗들입니다.

명문가의 적자인 이서구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다 이 서러운 핏줄인 서자 출신이죠.

이들의 사귐은... 참 다정하고 멋스럽습니다.

아끼던 일곱 권의 <맹자> 한 질을 팔아 생계를 꾸려야 했던 이덕무를 보며 자신이 아끼던 <좌씨춘추>를 팔아 술을 샀던 7살 아래의 유득공. 우수한 성적으로 무과에 합격했으나 서자 출신으로 오랫동안 관직에 나가지 못해 산 속으로 들어간 2살 아래 처남 백동수, 사물에 대한 세밀한 관찰과 연구에 능했으나 쓰일 곳이 없어 오히려 더 마음이 아팠던 9살 아래 박제가. 명문가의 후손으로 이덕무와는 무려 13살의 나이 차이가 있던 어린 이서구까지...

그들의 사귐에는 나이와 신분을 초월하는 깊이 그 이상의 것이 있었습니다.

특히 나이 차이가 가장 많았던 이서구와의 사귐은 “이심전심”의 마음까지도 전해집니다.

“...... 아무리 책을 좋아하는 벗이라 해도, 책의 향기를 코끝으로 먼저 느끼는 예민한 후각과 책을 만질 때마다 설레는 손끝의 미세한 떨림까지 시시콜콜 나누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이서구와는 굳이 이러한 느낌과 취향을 꺼내어 나눌 필요도 없었다. 그도 역시 그러하였으므로 ...... 수십 년 동안 그와 나 사이에서 오고 간 책들은, 서로의 손대가 묻어 닳아 갔다 ......”

책을 손에 잡는 그 작은 공간이 온 우주를 다 담을 수 있을 만큼 드넓고도 신비로웠다고 말하는 이덕무. 그는 책을 읽기 위해 방에 들어서는 순간 가지런히 꽂혀 있는 책들이 모두 자신을 향해 눈길을 돌리는 것만 같다고 말합니다. 책과 눈이 마주치는, 그 책 속에 담긴 누군가의 마음과 자신의 마음이 마주치는 설렘까지도 온전히 벗들과 나눌 수 있었던 그가 저는 참 부럽고도 존경스러울 따름입니다.


이 책 속에는 그에게 서러운 핏줄을 잊고 더 큰 세계를 만날 수 있게 도와준 스승과의 인연도 담겨져 있습니다.

“공자가 말씀하시길...”을 스스로 “스승이 말씀하시길...”로 고쳐 읽었을 정도로 이덕무는 공자의 사상과 이론에 심취해 있었죠.

월식과 일식으로 지구의 자전을 설명한 담헌 홍대용.

그는 이 세상의 중심은 바로 자기 자신이라며 우리나라 입장에서 본다면 중국도 북쪽의 큰 땅덩어리에 불과할 뿐이라고 말합니다. 조선 양반들의 지나친 사대주의의 폐해를 꼬집는 의미심장한 말이라 할 수 있죠.

선입견을 버려야만 조선이 이롭게 변할 수 있다고 말한 연암 박지원.

선입견은 결국, 자신만의 생각에 사로잡혀 사람과 사물의 본래 모습을 바라보지 못하는 편견이기도 하다고 연암은 말합니다. 그러한 편견에 사로잡힌 세상은 새로운 활기라고는 없는 세상, 변화를 거부하는 낡은 것들로만 가득한 세상이 될 것이라고 경고하죠.

조선에서도 알아주는 명문가의 자손인 연암은 자신보다 13살이나 어린, 그것도 서자 출신인 박제가를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의복을 정갈하게 갖추고 인사까지 합니다.

심지어 헤어지는 자리에서 박제가에게 이런 말까지 했다고 하네요.

“슬기로운 젊은이여! 부디 오래오래 사시게!”

이 두 스승은 그들을 자애로 대해줌으로써 세상 보는 눈을 바르게 열어 주었습니다. 자칫 기가 꺾이거나 흔들리기 쉬운 그들의 서러운 마음을 바로잡아 주고, 그들이 글을 쓰거나 문집을 낼 때마다 일일이 읽어 보고 격려해 주었다고 합니다.

아마도 이런 스승들의 가르침과 격려가 있었기에 이들 서러운 서자들이 드디어 규장각 검서관이 될 수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스승의 추천으로 연경사신단이 되어 연행길에 오른 이들은 탕탕평평의 정책을 표방한 정조의 부름을 받아 차례차례 대궐에 입궐하게 됩니다.

그 날의 감격에 대해 이덕무는 말합니다.

“...... 버려진 물건처럼 이리저리 구르던 우리들의 삶도 이제 쓰일 데가 있다는 것이 감격스럽기만 했다. 규장각 서고에 가득한 책들 속에서 좀벌레로 늙어 간다고 해도, 이 세상 어딘가에 나의 자리가 있다면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었다. 뽀얗게 쌓인 먼지를 털어 내고 세상의 빛을 향해 나온 책들처럼, 벗들과 나의 시대는 그렇게 새롭게 열리고 있었다......” 라고.

한때는 자식의 초롱초롱한 눈망울과 재능을 보는 것이 너무나  두려웠다고 그는 말합니다.

그 어린 아이들의 마음과 생각이 영글어 갈 무렵에는 이 세상에 태어나 무슨 꿈을 꾸며 살아야 하는지 묻는 것만 같아 두려웠다고요. 철이 들어 자신들의 처지를 알고 체념한 듯 꽉 다문 입술을 보면 서글프기까지 했다 말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아이들의 이야기에 마음껏 같이 웃어 주고, 이 세상의 모든 것이 궁금하기만 한 그 물음에 성의껏 대답해 줄 수 있게 되었노라 진심으로 기뻐하고 있습니다. 여릿여릿한 뼈대와 무른 살들이 차츰 강건해지고 단단해지듯이, 품은 뜻에 따라 자신의 삶을 만들어 나가려는 노력들을 진심으로 격려하고 축복해 줄 수 있을 것 같다고 말이죠.

그리고 실제로 이들 서얼 출신 백탑파는 조선의 역사 속에서 수많은 업적을 남깁니다.

박제가의 <북학의>, 유득공의 <발해고>, 그리고 이덕무의 아들에 의해 정리되어 세상에 나온 이덕무의 <청장관전서>, 정조의 명에 따라 이덕무, 박제가, 백동수에 의해 만들어진 <무예도보통지>까지...

특히 <무예도보통지>는 무예 동작 기법을 세세하게 그림으로 그려 넣음으로써 글을 모르는 병사들까지도 쉽게 따라 배울 수 있게 만든 이론과 실제가 겸비된 최초의 군사 훈련서이기도 하죠.

이렇게 세상 속으로 나온 이들은 더 큰 미래의 조선을 생각하며, 자신의 아이들에게 이어질 더 나은 세계를 위하여 일생을 공헌하고 헌신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업적들의 근본은 어릴 때부터 시작된 방대한 깊이의 책읽기에서 비롯된 것임을 누구도 부인하지 못합니다.

그가 책을 통해 나눴던 옛사람들과의 깊은 시간의 공유를 이제 저는 아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눈에 보이지도 않고 손에 잡히지도 않는 시간이지만, 그 시간의 흔적은 사람의 기억과 마음속에 남는다고 합니다. 그 흔적은 그렇게 서로의 삶 속에 깊숙이 들어가면서, 시간 속에 길을 내기도 하고, 각자의 시간을 서로에게 나누어 주기도 한다네요.

시간을 나눈다는 것,

그것은 반드시 얼굴을 마주 대하고 있는 사람들끼리만 할 수 있는 일이 아닐 것입니다. 책을 통해 우리는 옛사람들의 시간을 나누어 받을 수도 있고, 그 반대로 우리의 시간을 옛사람에게 나누어 줄 수도 있다고 이덕무는 말합니다. 그들의 소망이 나를 통해 이루어질 때 옛사람들은 그만큼의 사간을 더 살아가고 있는 것이라고요.

그렇다면 어설픈 저의 책읽기 또한 옛사람들에게 생명을 주는 하나의 의미가 될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간서치 이덕무의 말처럼 어쩌면 저 역시도 조금은 이덕무의 벗이 되었다 감히 말할 수 있을지도요.

“...... 오랜 세월이 흐른다 하더라도 누군가 나의 마음속에 스며들어와 나의 진심을 이해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서로 시간을 나눌 수 있다. 옛사람과 우리가, 우리와 먼 훗날 사람들이, 그렇게 서로 나누며 이어지는 시간들 속에서 함께 하는 벗이 되리라 ......”


* 책을 읽으면서 중간중간 나오는 모퉁이 그림들이 너무 예뻐 눈을 떼지 못했습니다. 다정하고 소담스러운 그 단정한 그림들이 너무 사랑스러워서요.

이 책, 아무래도 오래오래 그리고 깊게깊게 사랑하게 될 것만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이덕무의 단정한 마음을 빌어 그가 밝힌 책읽기의 이로움을 옮겨 봅니다.

1. 굶주린 때에 책을 읽으면, 소리가 훨씬 낭랑해져서 글귀가 잘 다가오고 배고픔도 느끼지 못한다.

2. 날씨가 추울 때 책을 읽으면, 그 소리의 기운이 스며들어 떨리는 몸이 진정되고 추위를 잊을 수 있다.

3. 근심 걱정으로 마음이 괴로울 때 책을 읽으면, 눈과 마음이 책에 집중되면서 천만 가지 근심이 모두 사라진다.

4. 기침병을 앓을 때 책을 읽으면, 그 소리가 목구멍의 걸림돌을 시원하게 뚫어 괴로운 기침이 갑자기 사라져 버린다.


나의 책읽기는 나에게 어떤 이로움을 주는지...

오래오래, 깊게깊게 생각하게 합니다.


Posted by Book끄-Book끄
달동네 책거리2009. 11. 18. 06:14
 <다산1, 2> - 한승원


 다산. 1


“나는 왜 영·정조 시대에 몰입하는가?”

늘 궁금한 부분이긴 한데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그냥 미친 듯이 그 시대의 인물들과 그 시대의 역사가 좋습니다.

다산 정약용만 해도 그래요.

영조, 정조, 순조, 헌종까지 모두 4대의 왕을 두루 거친 인물이고 그 4대에 걸쳐 벼슬을 했던 사람입니다.

18년간의 강진 유배시절 동안 엄청난 분량의 책을 집필했던 사람.

그리고 조선시대 진정한 의미의 지식 아카데미를 형성했던 사람이기도 한 다산 정약용.

그에 관한 책을 69세의 노구의 작가 한승원이 펴낸다고 했을 때 솔깃했습니다.(물론 저는 또 다시 살짝 흥분모드 됐겠죠!)


먼저 이 책은,

팩션이라고 하기에는 확실히 2% 부족한 감이 있습니다.

쉽게 읽혀지는 소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볍게 다가오는 글은 절대로 아닙니다.

전 개인적으로 정약용의 정보력, 박학다식함, 여러 사람을 각기 다른 방식으로 가르쳤던 엄청난 지도력, 그리고 쉼 없는 활동력 등이 늘 불가사의했습니다.

한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 지금 75세의 나이로 사망할 때까지 이뤘던 일들의 양이 참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지금처럼 클릭 한번에 온갖 정보가 주루룩 나왔던 시대도 아니고...

다산 정약용은 말합니다.

“사람의 머릿속에 책이 5천권 이상 들어 있어야 세상을 제대로 뚫어보고 지혜롭게 판단할 수 있다.”고...

5천권 이상을 읽어야 한다는 게 아니라, 5천권 이상이 들어 있어야 한답니다. 그건 이해를 하고 있어야 한다는 의미쟎아요.

솔직히 일생동안 5천권의 책을 읽는 사람이(이해는 고사하고) 과연 몇이나 되겠습니까?

이 말의 의미 속에는 내 삶을 부지런하게 이끌라는 또 다른 의미도 들어 있습니다.

정약용의 말을 한마디 더 인용해볼까요!

“이불 속의 달콤한 맛을 꿈지락거리며 즐기는 것은 게으름이다. 게으름은 세상을 반만 살게 하는 악귀다.”

정말 이쯤은 돼야 500여권이 넘는 책을 저술할 수 있었겠죠.


이 책은 1801년 신유사옥으로 죽을 고비를 간신히 넘기고 귀양살이를 하게 된 다산이 자신의 운명을 어떻게 이겨냈는지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회상과 꿈의 형태로 과거의 이야기와 바램들이 여러 개의 액자소설처럼 곳곳에 끼워져 있어 재미를 더합니다.

어린 시절부터 주자학을 읽은 다산은, 성년이 된 다음에는 천주학에 심취했지만 나라에서 금하고 조상의 제사를 지내지 못하게 한다는 이유로 천주학을 버리고 정학으로 돌아서게 됩니다.

그러나 그의 재능을 시기했던 노론 벽파들은 천주교를 신앙으로 받아들여 순교한 그의 셋째 형 정약종을 근거 삼아 둘째형 정약전과 그를 태형에 처하고 유배를 보냅니다.

노구의 몸으로 유배를 떠나는 두 사람은 그 길로 다시 만나지 못하는 처지가 되고 말죠.

다산에게 둘째형은 멘토의 위치에 있었습니다.

다산은 책을 완성하면 둘째형에게 보내 감수하게 하고 부족한 부분에 대한 첨삭을 전해 받기도 했을 정도니 그 둘의 애틋함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이 되시나요?

그런 둘째형이 유배 중 사망하게 되고 역시 유배중이라 차마 찾아가지 못하는 정약용은 애끓는 탄식을 하게 됩니다.

형제이면서, 스승이며 아비이기도 했던 형.

그런 형을 잃은 그의 상실감과 절망이 읽는 동안 가슴 아리게 만들었습니다.

애뜻한 혈육의 정은 자식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강진에 유배되어 있으면서도 다산은 자식들에게 살뜰한 편지를 자주 보내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게으르고 나태한 자식들을 호되게 야단치기도 했죠.

닭을 키운다는 아들의 말에 “양계”에 대한 체계적인 책을 만들어 보라며 그와 관련된 자세한 조언까지 하는 걸 보면 그의 박학다식의 경지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조차 되지 않습니다.

개인적으로 전 정약용은 신선의 경지에 도달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말은 종교적인 표현은 아닙니다. 그저 한 사람의 힘으로 이룰 수 없는 길을 그야말로 지극한 경지까지 스스로 만들어 간 사람이기에 위대함 그 이상을 느끼게 되는 거죠.

제게 있어 다산 정약용은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 그 자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더 관심이 가는 지도 모르겠네요.


“예가 아닌 것은 보지도 말고, 예가 아닌 말은 듣지도 말고, 예가 아닌 말은 입에 담지 말며, 예가 아니면 행하지 말라.”

이 말은 한사코 예를 외면하고 있는 지금의 위정자들에게 정말 필요한 잠언인 것 같습니다.

“물은 배를 뜨게도 하지만 배를 전복시키기도 한다. 임금은 배다. 임금도 잘못하면 백성들이 그를 정치하고 바꿀 수 있다.”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나만은 아닐 것이다....”라고.

그러나 이 책을 읽고 나면 이러한 나태하고 편협한 이기심이 조금씩 불편해지기 시작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이 글은 참 다정하다는 느낌입니다.

멀게만 생각되는 역사 속의 인물 정약용을 내 바로 옆에서 느낄 수 있게 만들어 주니까요.

글이 다정할 수 있다는 거...

저처럼 또 다는 누군가도 느낄 수 있다면 좋겠네요. ^^


* 참고로 정민의 <다산 선생 지식 경영법>과 이덕일의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 1, 2> 권이 있습니다.

앞의 책은 분량도 꽤 되고 좀 전문서적의 느낌이라 쉽게 손에 잡히지 않을지도 모르겠지만 조목조목 읽다보면 정약용의 신비감에 완전히 매료되게 만듭니다. 심지어 읽는 이를 진정한 정약용 마니아로 환골탈태시키는 매우 위험한(?) 책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후자에 소개한 책은 2권으로 되어 있긴 하지만 쉽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책입니다.
이덕일이라는 작가가 쓴 책들은 개인적으로 적극 추천하고 싶습니다.
역사를 참 재미있고 흥미진진하게 이야기해주는 사람입니다. 역사의 신비감과 아련함이 내 옆의 현실감으로 바짝 다가오는 느낌이죠.
혹 관심이 가신다면 한번 읽어보심이......
(후회는 없을 것임을 확실히 보증하는 바입니다...^^)


Posted by Book끄-Book끄
달동네 책거리2009. 11. 16. 05:52
 <기발한 자살 여행> - 아르토 파실린나


기발한 자살 여행 


처음으로 읽어 본 핀란드 작가의 소설입니다.

이 책을 알게 된 경로는 저에게는 참 특이합니다.

처음엔 일본에서 제작한 영화로, 그 다음엔 우리나라에서 제작한 창작 뮤지컬로, 드디어 마지막으로 만난 게 원작소설이네요.

그냥 일본 작품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집단 자살이라는 코드가 동유럽의 코드라고는 생각되지 않았거든요.

작가 아르토 피실린나는 핀란드의 국민작가로 전 세계에 수많은 마니아층을 확보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기이한 유머의 대가라고 알려져 있죠. 평범한 이야기를 별나게 쓰는 작가라고 하네요.

“별난 평범함”이라...

이해되지 않는 언어의 조합인데 이 책을 읽고 나면 그 의미를 완전히 이해하게 됩니다.

아르토 파실린나... 출생부터가 참 별나네요.

1942년 길 위 트럭 안에서 태어났다고 합니다. 그의 가족이 독일군을 피해 도망치던 트럭 안에서요(그냥 웃어 넘기에는 좀 처절하죠.)

그는 스스로도 고백합니다.

“나는 유년기 초기에 네 곳의 나라를 경험했다. 그래서 도망은 늘 내 글에 등장하는 소재이다.” 라고요.

“피실란나”라는 이름은 “돌로 세워진 요새”라는 뜻으로 그의 아버지가 지어준 이름이라고 합니다. 그 안에는 마치 그들 가족의, 그리고 그의 소망이 담겨 있는 듯 하네요. “정착”과 “평온”에 대한 소망이 말이죠.

아들에게 이런 이름을 남기고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로 인해 그는 남겨진 어머니와 8명의 식구들을 위해 어릴 때부터 노동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15살부터는 글쓰기를 시작했고요.

그는 이런 모든 경험들이 자신의 작품에 고스란히 녹아있다고 말합니다.

어느새 핀란드뿐만 아니라 유럽 전역에서 가장 많이 읽혀지는 작가 가운데 한 명이 된 아르토 파실린나.

이 책을 읽으면서 또 다른 블랙 유머의 대가 “로알드 달”을 많이 떠올렸습니다.

“유머”라는 것에도 다른 의미와 다른 표현 방식이 있구나 생각했죠.


“핀란드”

뭐가 가장 먼저 떠오르나요?

“휘바 휘바!”를 외치며 건강한 치아를 위해 자기 전에도 챙기는 자이리톨 껌?

이렇게 치아 건강까지 생각하는 이 나라 사람들의 가장 고약한 적은 사실 “우울증”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스스로도 이미 너무나 잘 알고 있다고 하네요. 자신들이 우울한 민족이라는 걸 말이죠. 살인은 단지 100여 건인 데 비해 매년 자살 시도는 1500여 건이나 된다는 사실이 이런 핀란드의 우울을 대변한다고 하겠습니다.

이 책에는 그런 자살의 이면을 제대로 뒤집어 삶으로의 자연스러운 복귀를 유도하는 멋진 블랙 유머가 깔려 있습니다.

그것도 강력한 충격이나 계기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연스러움”을 통해서요.

사실 이 책이 재미있는 건,

별 볼일 없는 군상들이 다름 아닌 우리들의 모습을 정확히 대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바로 나 자신의 대역배우인 셈이죠.


빛과 기쁨의 축제날인 성 요한의 날.

4번의 파산과 4번의 자살 시도 이력이 있는 렐로넨 사장은 자신의 헛간에서 또 다시 자살을 결심하죠.

그런데 이런!

먼저 와서 목을 메고 있는 누군가를 발견하게 됩니다.

오지랖 넓게도 일단 이 사람을 구해내죠. 그가 바로 현역 육군 대령 켐파이넨입니다.

그들은 서로 이야기를 나누다 친구가 되고 “자신들처럼 자살하고픈 사람들을 한 번 모아보자!”며 이상한 의기투합(?)을 하게 됩니다.

그들을 교화해서 삶으로 복귀시키자는 건전한 의도가 아니라 함께 집단 자살을 하려는 의도로 말이죠.

그들은 신문의 부고란에 광고를 하고 답신이 오길 기다립니다.

놀랍게도 며칠 뒤 612통이라는 어마어마한 답신이 그들의 손에 들려집니다.

그 편지들의 공통점은 외로움과 쓸쓸함 일색이었죠.

일단 두 사람은 답장을 보낸 사람 중에 가까운 곳에 혼자 살고 있는 푸사리 부인을 비서로 고용해 자살 세미나에 참석하라는 초대장을 보내고 시내의 한 레스토랑을 빌립니다.

끝까지 세미나에 남은 사람들은 대령 켐파이넨을 지휘관으로 렐로넨 사장과 푸사리 부인을 보좌관으로 임명하고 버스를 대절해 함께 자살 여행을 떠나기로 결정하죠.

이동 중에 그들은 편지를 보냈던 사람들을 한 사람씩 탑승시킵니다.

의처증과 편집증 남편에게 구타를 당하던 여인, 이미 고물이 되어 버린 배에 너무나 집착해 빈털터리에 되어 급기야 가족까지 떠나버린 육지선장, 전직 노동조합 간부, 오판의 희생양이 되어 교도소에 수감됐었다고 주장하는 밍크 서커스 단장에 세미나를 개최했던 레스토랑 종업원까지...

그리고 버스 운수 회사 사장 코르펠라의 동참으로 이들에게 40인승의 최신식 고급 버스까지 생기게 됐습니다.

이렇게 모인 33인의 첫 번째 단체 자살 현장은 실패로 끝이 납니다.

절벽을 향해 돌진하는 순간 탑승자 다수가 급정거 스위치를 눌러버렸거든요.

그들은 회의를 하고 장소를 바꾸기로 결정합니다. 그리고 국경을 넘죠.

핀란드를 거쳐 노르웨이를 지나 스위스로...

이쯤 되면 이들이 마치 단체 관광 여행자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실제로 이들은 지나가는 곳에서 자유시간을 갖고 유명한 곳을 관광하기도 하고 야외 캠핑도  즐기면서 점점 진짜 여행자의 모습을 보여주죠.


“죽음을 위한 무명 인사들의 단체”

어느 틈에 이들에 대한 소식이 국가정보부에까지 들어갑니다.

현직 대령에, 전직 노동조합 간부에 최대 운수 회사 사장까지... 뭔가 낌새가 이상하다고 생각한거죠. 게다가 세미나에 참석했던 사람 중 몇몇이 밤을 지내기 위해 몰래 숨어 들어간 차고가 하필이면 남예멘 대사의 관저였던 겁니다. 술에 취한 그들은 그곳에서 자살을 시도하다가 급기야 화재가 발생되죠.

스위스에서는 독일 훌리건들과 집단 패싸움을 벌이기도 하고, 실종된 3명의 여자들은 프랑스에서 도덕적인 혼란을 야기시켜 24시간 내 추방명령을 받기까지 합니다.

국가정보부는 판단하죠.

그들이 필란드의 대외 관계에 깊이 개입하고 있다고 말이죠.

...... 핀란드 관광버스 한 대가 목숨이 경각에 달린 사람들을 싣고서 세상을 질주하고 있다.

그 비밀 자살 단체의 회원 몇 명이 외교와 군사 분야에서 적이 의심스러운 활동에 연루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아니 어쩌면 모든 회원이 휘말려들었을지도 모른다......

국가정보부는 비공식적인 자문회의를 열기로 결정을 하고, 정부 기관 산하의 여러 부처에서 관계자들을 초빙합니다. 외무성, 경찰청, 대학병원의 신경정신과, 관광공사 그리고 정보부에서 파견한 사람들까지 말이죠.

이런 사실을 알 길이 없는 그들은 어쨌든 계속 여행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도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하네요.

하나 둘, 하차를 희망하는 사람들이 생겨납니다.

말기암 환자와 에이즈 환자가 버스에서 내려 두 사람만의 새 삶을 시작하겠다고 말하죠.

순간 사람들은 그들의 무책임성을 비난합니다.

하차를 비난하는 게 아니라, 에이즈라는 사실을 숨기고 버스를 탔다는 사실을요.

아이러니 아닙니까?

어차피 함께 죽겠다고 그 버스에 동승했는데 에이즈 따위가 뭐 그리 대수라고...

하긴 뭐 홀리건들과의 집단 패싸움에서 몰골이 말이 아니었을 때도 흉측한 모습으로는 죽기 싫다고 죽음을 연기했던 사람들이니 곱게 죽고 싶기도 했을 겁니다.

하차 희망자는 점점 속출하고 그들의 집단자살의 의도를 알게 된 지역대표는 자신의 지역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다며 다음날 아침까지 떠나줄 것을 요구합니다.

버스에 탑승한 사람들은 과연 굳이 집단 자살을 감행해야 할 필요가 있는지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합니다.

결국 세상은 살 만한 곳이며, 고향 핀란드에서 엄청나 보였던 문제들이 유럽의 다른 곳에서는 아주 사소해 보인다고 사실도 서서히 깨달게 되죠. 같은 운명을 짊어진 동료들과의 긴 여행은 다시 삶의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으며, 유대감은 자의식을 굳건하게 다져주기까지 했습니다.

좁은 생활 영역으로부터 벗어나면서 세상을 보는 시야가 넓어지게 된 자살 희망자들은 새롭게 삶의 재미를 발견하기에 이릅니다. 그들이 초여름에 생각했던 것보다 미래는 훨씬 더 밝게 보였던 거죠.

그리고 여행 중에 탄생된 여러 쌍의 연인들도 삶의 의욕을 부추키게 됩니다.

우리의 지도자 켐파이넨 대령과 보좌관 푸사리 부인마저도 그들 앞에서 결혼을 발표하네요.

삶은 결국은 그런 것이라네요.

계속해서 양파껍질을 벗겨내는 일이라고...


여기서 이 이야기가 끝이 난다면 무지 평범하고 재미없는 이야기가 되겠죠?

뒤에 기막히게 유머러스한 반전이 여럭 개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사라져버린 버스의 행방을 끈질기게 추적하기로 결의한 국가정보부 자문위원회의 모습이요.

같은 장소에서 같은 방식으로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 회의를 이어가는 자문위원회.

비밀 단체의 흔적은 유럽 한가운데서 이미 사라졌지만 국가의 안전과 명성을 위해 이렇듯 중요한 회의를 절대로 중단해서는 안 된다는 게 그들의 최종 결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회의를 거듭할수록 새롭게 밝혀지는 사실은 조금도 없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렇게 몇 년 동안 같은 회의를 계속해왔고, 그리고 현재까지도 심각한 위험성을 경고하며 회의를 계속하고 있다는 내용입니다.

저는 이 부분에서 완전히 박장대소하고 말았습니다.

우리나라든, 유럽이든 정치하는 분들은 늘 그렇게 남의 다리만 계속해서 그것도 지치지도 않고 긁어대는 것 같아서요.

“자살”이라는 무겁고 심각한 내용을 이렇게 유쾌하고 발랄한 마무리로 폭소를 자아내게 한다는 게 이 책의 묘미인 것 같습니다.

한때 유럽 전역에서는 실제로 이 소설을 패러디한 “즐거운 자살 희망자들의 모임”이 생겨나기도 했었다네요.

이 책이 금서(禁書)로 분류되지 않고 여전히 잘 읽혀지고 있는 걸 보면 아마도 그 모임들은 이 책의 내용처럼 단지 유쾌한 모임의 하나로 끝이 났던 것 같습니다.


왠지 조금은 우울해야만 할 것 같은 가을의 끝자락,

울증을 희망하는 모든 분들께 강력한 예방 백신으로 권해드리고 싶은 책입니다.

이들의 기발한 여행에 함께 동승하고 나면 아마도 박장대소로 하차할 수 있을 겁니다.

푸.하.하.!


Posted by Book끄-Book끄
읽고 끄적 끄적...2009. 11. 6. 06:30
처음 읽었던 핀란드 작가의 소설이다.
아르토 파실란나,
핀란드의 국민작가라고 한다.
왠지 하루종일 자일리톨 껌을 징걸징걸 씹으며
우울과 고독함에 젖어 있을 것 같은 나라 핀란드.
(우울하긴 하지만 그래도 건강한 치아를 생각해서 항상 자이리톨 껌을.... ^^)
실제로 핀란드 사람들의 가장 고약한 적은 "우울증"이란다.
살인은 단지 100여 건인데 비해 매년 1500여 건의 자살이 발생한다는 나라 핀란드.
이 소설은 이런 우울의 핀란드를 배경으로
놀랍도록 재미있는 블랙 유머를 선사한다.




가볍게 읽을 수 있지만 묘한 깊이감이 있는 소설.
이 소설은 두 사람의 만남에서 시작된다.
네 번의 파산선고를 받은 사업가와 현직 대령
아이러니하게도 이 두 사람의 첫만남은 자살의 순간이다.
같은 목적으로 찾은 시골의 한적한 헛간에서의 만남.
이 만남에서 집단 자살 여행이라는 프로젝트가 시작된다.
살기 위해서, 혹은 죽기 위해서
아니면 단순한 호기심과 재미를 위해서
그들과 동참하는 동행자가 생기고
최고급 신형 버스에 올라탄 이 33인은 죽을 곳을 찾아
함께 여행을 시작한다.



자살에 대한 이야기를
이런 유쾌한 터치로 그것도 끝까지 유머와 반전의 묘미까지 잃지 않고
쓸 수 있다는 게...
나는 집단자살보다 더 끔찍하고 무섭다.
책을 읽지 않아도
이야기의 결말은 이미 알 수 있지만
그 확실한 결말을 앎에도 불구하고
내내 재미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게 놀랍다.
등장하는 캐릭터를 내 주위의 누군가에 맞춰보는 퍼즐의 즐거움까지 은근히 소유하다...
얼마전엔 이 원작을 가지고
우리나라 실정에 맞게 새롭게 각색해 뮤지컬이 만들어지기도 했었는데

<남한산성>에서 인조로 분했던 배우 성기윤이 대령으로 분했었다.
실제로 뮤지컬을 보지 않았지만 진지했을 그의 모습이 상상돼 살짝 웃음이 머문다.
어쨌든 집단 자살 여행의 끝은 강력한 삶으로의 복귀다.
당연하지 않은가!!!



제 3회 청소년문학상을 수상한
최민경의 <나는 할머니와 산다>
좀 흉흉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유쾌하다.
청소년소설이라 깊이감은 많이 떨어지지만 분명 참신함은 있다.
책을 읽기 전에는
할머니(귀신)가 수시로 등장해 이야기를 휘젖고 다니진 않을까 걱정스러웠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이 책 속엔 귀신으로서의 할머니의 음성은 단 한 줄도 없다.
하지만 분명 주인공은 염연히 할머니와
그것도 이미 돌아가신 할머니와 산다.

이상한 빙의 현상!
(빙의현상이긴 하되, 간접적인 빙의현상... 이해가 될까?)
그러나 기억할 것은,
이 책은 어쨌든 청소년문학이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깊이감이 부족하다느니, 유치하다느니 평하지 말자.
당신의 중학교 시절을 생각해보라.
읽다보면 당신의 중학교 시절보다 책의 주인공이 훨씬 더  성숙한 존재임을 알게 된다.
기억나는가?
그 때, 당신이 얼마나 유치했는지...
그리고 그 유치함이 얼마나 심각하고 절실했었는지를...




6살에 입양돼 이제 16살이 된 조은재.
아빠의 실직은 벌써 2달을 넘어서고 있고 
치매가 있던 할머니는 동네 공사현장 물웅덩이에 빠져 얼마 전에 돌아가셨다.
이런 심각한 상황들이 아주 유머러스하게 전개된다.
아이스럽게 유쾌하다.
진짜 엄마와 가짜 엄마를 논하는
주인공의 성숙함 또한 귀엽고 이쁘다.
죽은 사람이 산 사람의 몸에 들어오는 건 뭔가 할 일이 있기 때문이란다.
당신이라면 어떻까?
그 할 일을 하라고 온전히 자신의 몸을 내 줄 수 있을까?
어른이 된다는 건 피곤한 일이란다.
항상 무슨 일인가로 마음을 졸이며 살아햐 하기에...
그래...
사실은 정말로 말도 하기 싫을 정도로 피곤하다.
그렇다고 이미 어른이 되어버렸는데 
이제와서  못해먹겠다고 반납할 수도 없는 노릇.

현실을 인정하고 믿자!
그걸 믿는 동안은 생도 함께 빛날 것이라는 당돌한 16살 소녀의 말을 기억하며...
살자! 살자! 살자!
이것 말고 더 좋은 다른 방법이 없다면
어차피 누구든 살 수 밖에는 없다.

Posted by Book끄-Book끄
달동네 책거리2009. 11. 4. 09:31
 <공무도하> - 김 훈


공무도하 


제가 개인적으로 참 좋아하는 작가입니다.

김훈의 글들은 단 한 번도 서정적이지 않았죠. 오히려 너무 사실적이었으며, 심하다 싶게 물고 늘어져 집요하다는 생각까지 갖게 만듭니다. 그러면서 아이러니하게도 끔찍스럽게 아름답기까지 합니다.

30년 넘게 기자생활을 했던 사람, 그리고 여행과 자전거를 너무나 좋아하는 사람. 자신의 직업을 작가가 아니라 자전거레이서라고 소개하는 61살의 김 훈.

<밥벌이의 지겨움>, <풍경과 상처> 제가 만난 김훈의 첫 책들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기행 산문들 <자전거 여행 1, 2>와 <바다의 기별>.

오히려 그의 소설은 뒤늦게 찾아 읽은 셈이네요.

<빗살무늬토기의 추억>, <칼의 노래>, <현의 노래>, <강산무진>, <남한산성>, 그리고 <공무도하>까지...

여전히 연필과 원고지로 글쓰기를 고집하는 너무나 아날로그적인 그가 지난 5월 네이버를 통해 자신의 여섯 번째 소설 연재를 시작했습니다.

이 소식을 접했을 때 저는 적잖은 충격을 받기도 했죠.

그런데 역시나 김훈답네요.

소설을 연재하면서 단 한 번도 댓글을 들여다보지 않았다는 말하는 그.

독자와 작가는 서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름다운 관계라고 그는 말합니다.

연재를 시작하면서 그는 말했습니다.

"약육강식은 모든 먹이의 기본 질서이고 거대한 비극이고 운명이다. 약육강식의 운명이 있고 거기에 저항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운명이 있다. '공무도하가'는 강 건너 피안의 세계로 가자는 것이 아니라 약육강식의 더러운 세상에서 함께 살자는 노래다. 나는 인간 삶의 먹이와 슬픔, 더러움, 비열함, 희망을 쓸 것이다."

이 책, <공무도하>

서정적인 제목과는 다르게 책의 내용은 결코 서정적이지 않습니다.

비굴과 굴욕, 치사와 번잡스런 인간의 이면에 대한 이야기죠.

“사랑아, 강을 건너지 마라”

표지에 쓰여 있는 문장에 속지 말라는 충고 또한 함께 드립니다.

 

公無渡河 (공무도하) : 님아, 저 물을 건너지 마오

公竟渡河 (공경도하) : 임은 그예 물을 건너셨네

墮河而死 (타하이사) : 물에 쓸려 돌아가시니

當奈公河 (당내공하) : 가신님을 어이 할꼬


기억하십니까?

술에 취해 강을 건너다 물에 휩쓸려버린 남편(백수광부)를 바라보며 애절한 노래를 불렸던 백수광부의 처.

학창시절에 이 고대가요를 배웠을 때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왜 백수광부의 처는 남편이 물에 들어가지 못하게 직접 말리지 않고 보고만 있었는지를...

그러나 지금은 알 것 같습니다.

세상엔 말릴 수 있는 것과 말릴 수 없는 게 있다는 걸 말이죠.

이 책 <공무도하>는 이 땅의 숱한 백수광부와 그를 바라만 볼 수밖에 없는 숱한 백수광부의 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인간은 비루하고, 인간은 치사하고, 인간은 던적스럽다. 이것이 인간의 당면문제이다. 시급한 현안문제다.”

장철수라는 소설 속 인물의 입을 통해 발설되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다수의 비루하고 치사하고 던적스러운 인간들이 건넌 물보다 더한 것들에 대한 이야기...

부끄러움도, 죄스러움도, 비밀스러움도 그들과 함께 기꺼이 앞서거니 뒷서거니 건너갑니다.

동료를 배반하고 풀려남으로써 고향 창야를 등지게 된 운동권 출신 장철수, 소방서 인명구조 특공조장 박옥출은 백화점 화재현장에서 4억 5천 만원 상당의 귀금속을 들고 나와 장물로 팔아넘깁니다, 치매기 있는 외할머니와 함께 비닐하우스에 버려지듯 살던 아들, 그 아들이 친구처럼 키우던 개에 물려 사망한 사건을 뉴스로 보고 세상으로부터 숨어버린 어미 오금자, 본처가 있는 줄 모르고 속아 결혼한 남편으로부터 도망친 베트남 여성 후에. 물막이 공사 크레인에 깔려 사망한 딸의 보상금을 몰래 수령하고 사라진 아비 방천석...

숱한 백수광부들은 지금 “해망(海”望)이라는 도시에 모여 있습니다.

바다(물)를 바라본다는 뜻의 해망!

그래서 이 책의 곳곳에는 “바라봄”이라는 그 아득함과 노곤함, 그리고 무력감이 오랜 상처처럼 담겨있습니다.

그리고 그들 백수광부를 바라보는 백수광부의 처 문정수, 노목희.

일간지 사회부 기자 문정수가 노목희를 찾아오는 밤이면 그는 추적할 수도 없고 전할 수도 없는 숱한 백수광부들의 세상을 노목희에게 말합니다.

노목희는 그를 다독이며 진심으로 답합니다.

“냅둬... 제발 좀 그냥 냅둬!”

그래요, 어쩌면 진실을 폭로할 자신이 없다면 우리 모두 백수광부의 처가 되어 그저 손끝으로만, 애타는 심정으로만 물을 건너는 남편을 말릴 수밖에 없을 테죠.

그리고 우리가 건너야 하는 게 어디 물 뿐이겠습니까!

물보다 더 한 것들을 건너고, 물보다 더 한 것들을 건너는 사람을 이편에서 그저 보고 있기만 해야 하는...

그래서 인간이란 존재가 이렇게 비루하고 던적스럽고 소란스러운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책을 읽고 있으면 어쩔 수 없이 적나라하게 겹쳐지는 우리네 현실과 만나야 합니다.

새만금 간척사업, 매향리 미군폭격훈련장, 의정부 미순∙효선 사건, 동남아시아 여성 상대의 국제결혼, 가족의 해체와 남겨진 아이의 버려짐. 그리고 업무상 배임, 불법 장기매매와 투기, 정부주도의 독점사업에 이르기까지...

벌거벗겨진 우리의 현실을 그대로 들여다 봐야하는 부끄러움과 민망함도 있습니다.

“증발과 해체는 숨막혔고 스산했다.”

이 문장에 저는 그만 턱하고 숨이 막혔습니다.

어쩌면 누군가에겐 이 모든 게 하찮은 소리로 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알까요?

그 하찮은 소리가 너무나 유혹적이라는 사실을요.

그런 이유로 비록 하찮을지라도 쓸데없는 일이 되버리는 건 결코 아니라는 걸 말이죠.

작가 김훈은 고백은 그래서 차라리 속이 시원해지기까지 합니다.

“나는 나와 이 세계 사이에 얽힌 모든 관계를 혐오한다.

 나는 그 관계의 윤리성과 필연성을 불신한다.

 나는 맑게 소외된 자리로 가서, 거기로 새로 태어나든지 망하든지 해야 한다......

 나는 왜 이러한가. 이번 일을 하면서 심한 자기혐오에 시달렸다.

 쓰기를 마치고 뒤돌아보니, 처음의 그 자리다...“


이 책 <공무도하>

강을 건너가지도 못하고 물가에 선 사람에게 재차 묻습니다.

이제 어찌 할지를 말이죠...

김 훈,

그의 글은 때로는 너무 정직해서 오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무딘 칼끝을 가지고도 그는 예리한 상처를 남길 줄 아네요.

벌려진 상처를 바라보는 또 다른 백수광부의 처가 지금 여기 오도카니 남아있습니다.


* 11월부터 그가 다시 새로운 글을 쓸거라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아예 대놓고 공표했습니다.

  “독자들이 바라는 희망이나 위안은 아주 인색하게 주고,

   독자를 고문하고 들들볶아 극한까지 고통을 주는 글을 쓰고 싶다”고...

  고문관이 되어 돌아올 그가 문득 궁금해집니다.

  극한의 고통...

  그 길을 기꺼이 동참하겠노라 저 또한 대놓고 말하렵니다.


Posted by Book끄-Book끄
달동네 책거리2009. 10. 23. 06:03
 

<친구> - 스탠 톨러

 
친구


오늘은 금방 읽힐 수 있는 그러면서도 재미있고 생각거리를  만드어 주는 책을 한 권 소개하려구요.

바로 <친구>라는 책입니다.

개인적으로 전 처세나 경제 관련, 자기 계발 부분엔 영 문외한인지라 이런 내용의 책은 손에 잘 잡지 않는 편이었답니다. 그러다 몇 년 전부터 읽기 시작했죠.

그런 책들은 단지 선택된 소수의 사람의 삶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딴 나라 이야기 같다고만 생각했거든요. 하지만 한권씩 읽어가면서 분명히 깨달은 건 그 책들 역시 내게 도움을 주는 내용이라는 사실입니다.

모든 책은 제겐 일단 다 재미있고 신비 그 자체이기도 하지만요.

(예전에 제 꿈은 종로서적 직원이 되는 거였습니다. 맘껏 책을 읽을 수 있을 거고, 싸게 책을 살 수 있을 거란 정말 순진한 생각을 했던 때 였죠^^ 이젠 그 꿈은 영원히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이 되버렸습니다. 아시겠지만 제 유토피아였던 종로서적이 오래전에 없어진 이유로...... 서점이 도산될 때 마다 마치 제 일부도 함께 도산하는 느낌이예요....)


시애틀 광고회사에서 일하는 주인공 "조"는 회사에서 인정받는 유능한 인재며 하는 일마다 놀라운 성과를 이루고 있죠. 지금도 프로젝트를 거의 성공시켜 22만 달러의 성과금이 지급될 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간호사인 사랑스런 여자친구도 있지만 그녀와의 관계는 처음과 다르게 왠지 어긋나는 것 같고 동료들은 매 프로젝트마다 성공하는 그를 은근히 부담스러워합니다. 그는 축하를 나눌 친구도, 동료도, 애인도 없는 것처럼 느껴지죠.

성공에 도달하면 도달할수록 마음 한구석이 허전해지는 조는 우연히 '맥스 플레이스'라는 커피숍에서 커피 한 잔을 마시게 됩니다. 그리고 그의 삶은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합니다.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이자 우울증 환자가 가장 많은 것으로도 유명한 '시애틀'

시기와 질투가 난무하는 경쟁사회에서 소외감과 외로움을 느끼는 현대인들에게 마음을 나누고 교감할 수 있는 '친구'의 존재란 어떤 의미일까요?

'행운의 절반은 나의 노력으로부터 오고, 행운의 다른 절반은 친구로부터 온다'

어쩌면 너무나 교과서적인 내용의 책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교과서라는 건 기본을 알려주기 위한 “지침서”라고도 할 수 있쟎아요.

이 책은 냉혈인간 조가 주변 사람들과 어울리게 되는 과정을 보여주면서 진정한 친구를 만드는 길, 친구를 진심으로 이해하고 그들 하나하나와 진정한 관계를 맺는 소중한 과정들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아주 교과서적으로요. ^^ (이 말이 전 맘에 듭니다. 이 책에서는요...)


이 책은 친구란 "커피"와 같다고 말합니다. 같은 원두의 커피라 해도 어떤 비율로 브랜딩 하는 가에 따라 맛과 향이 달라지는 것처럼 서로 어우러짐으로써 단점을 보완하고 장점을 극대화할 수 있다는 것. 결코 누구라도 혼자서는 충분히 완성될 수 없다는 사실을 다시 느끼게 해 줍니다. 내 잃어버린 멘토를 찾고 싶다는 꿈을 꾸게 만들기도 하죠.


믿었던 직장에서 쫓겨난 조는 그러나 더 나은 사람이 되어 더 나은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 일을 하면서 그는 과거의 모든 사람들을 True Friend로 다시 만나게 되고, 그리고 앞으로 더 많은 새로운 사람들을 True Friend로 만나게 될 것임을 저 또한 의심치 않습니다.


그런 생각을 해봤어요.

나는 항상 “멘토”만을 바라고 기다렸던 건 아닐까?

누구가 나를 이끌어주길... 그래서 나를 좀 발견해주고 그리고 나를 좀 만들어 주길...

한번도 내 자신이 멘토가 될 생각은 진심으로 못 했던 것 같습니다.

사실 그럴 만한 재능이나 능력, 배려심도 아주 심하게 부족하지만 그래도 멘토를 기다리는 사람이기보다는 멘토가 되기 위해 애써보는 사람이 되보고 싶다는 소망을 조금씩 품게 됩니다.

멘토와 멘티의 계속되는 멘토링...^^

모두를 위한 괜찮은 꿈이 될 것 같아요...


문득 제 멘토이자 친구이기도 한 분이 생각나네요.

올해 벌써 50이 되신 분인데 제가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분입니다.(나이를 지금 따져보고 저 순간 놀랐습니다.... )

함께 차 마시면서 4~5시간 정도 쉼 없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그런 분이죠.

그 분과 이야기를 하면 제 자신이 참 풍요로워 지는 걸 느낍니다.

전 그 분에게 어떤 멘티였을까요?

형편없는 수다쟁이로 기억하고 있지만은 아닐 거란 확신이 드네요.

왜냐면 그분은 제 멘토시니까요?


모든 친구의 시작은,

“믿음!”
바로 거기서부터가 처음 시작일테니 말입니다.


Posted by Book끄-Book끄
달동네 책거리2009. 10. 16. 06:01
 <꽃피는 고래 > - 김형경 

 

꽃피는 고래 


개인적으로 느낌이 좋다고 생각하는 여성 작가입니다.

신경숙, 은희경, 공지영, 전경린. 독특한 자기만의 작가 세계를 구축한 여성 작가들 중에서 김형경은 어찌 보면 굴곡 없고 평범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세월>이라는 소설이었네요. 제가 처음 김형경이라는 작가를 알게 된 게...

<새들은 제 이름을 부르며 운다>, <외출>, <사랑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 <성에>, <사람 풍경>... 참 꾸준히 그리고 성실히 달려온 작가란 생각이 듭니다.

어떤 사람은 이 분의 글은 참 심난하다고 표현하기도 했는데 그 심난함이라는 게 모두 사람들로부터 비롯된 심난함이니 과히 낯설지 않다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이 책은 교통사고로 부모를 잃은 17살 “니은”의 성장소설입니다.

참 잔인한 현실이 무심하게 그리고 태연하게 그려져 있죠.

좀 당황스러웠습니다.

아이와 어른이 중간쯤에 와 있는 “니은”과 천진함이 먹먹한 사랑으로 다가오는 어른의 이야기(참 표현력 진부하네요...^^)

평생을 고래를 쫓아다니던 처용포 대왕고래 장포수 할아버지는 언젠가 포경업이 다시 합법화 될 날을 기다리며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배를 20년 동안 간수하며 기다리고 또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제 다시는 제 손으로 살아있는 생명을 보내지 않으리라 다짐한 왕고래집 할머니는 첫정의 징글징글함을 알면서도 주인이 버리고 떠난 고양이들에게 새벽부터 밥을 챙기며 생명을 거두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면,

한 사람은 생명을 죽이는 일을 (그것도 엄청난 생명) 했었고, 한 사람은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하고 있네요.

그리고 또 한 사람.

자신을 홀로 세상에 남기고 가버린 부모가 어이없고 괴씸하기만 한 “니은”은 지금 바다와 같은 공황상태에 있습니다.

“파도는 평생 바다를 찾아다닌다...”는 말

제가 바다의 일부인지도 모르고 때론 거칠게 화를 내며 파도는 평생을 그렇게 바다를 찾아 다닌다네요

이 책의 “니은”이 꼭 그런 존잽니다.

울컥울컥 쏟아지는 감정을 차마 쏟아내지도 못하고 자꾸 안으로 안으로 숨기다 급기야 우연히 붙잡힌 고래를 안고 토해내고 마는 지경까지 이르고 말죠.

그녀의 입에선 무수한 고기들이 빠져 나옵니다.

어쩌면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네요.

무수한 작살을 꽂고서 몇 시간동안 바다에서 사투를 벌였을 고래의 몸이 제 몸 인양 그렇게 바라봤을지도, 그래서 울어내도 울어내도 그 울음은 내 것이 아니었노라 발뺌할 수 있다 믿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니은에게 왕고래집 할머니는 말합니다.

"니가 시원하게 못 울어서 마음이 아픈 거다. 슬픔이 몸 안에서 돌아다니면서 몸을 두드리는 거지...“

전 이 표현이 참 섬뜩하게 아팠습니다.

슬픔이 몸 안에서 돌아다니면서 내 몸을 두드린다니...

내 맘이 딱 그랬었는데 하면서 느끼는 섬뜩함.

이 섬뜩함을 깨고 홀로 일어서는 게 17살 주니은의 어른되기 프로젝트의 시작일 것 같네요.


고래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내 품는 피 섞인 숨결 그 잔인한 순간을 “꽃을 피운다”는 말로 이야기 할 수 있는 게 어쩌면 우리가 살아내야 하는 인생인지도 혹 모르겠습니다.

“고래가 꽃을 피우기” 위해선 쫒는 포경선의 질김도 있어야 할  것이고, 이제는 끝임을 인정하는 고래의 마지막 체념의 숨결도 있어야 하듯이 말입니다.

어쩌면 끝을 인정하는 고래의 마지막 숨결이 신화가 되어 꽃을 피우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고래가 정말 “신화”처럼 아직까지 숨쉬고 있는 건지도요...

알고 계셨나요?

고래에겐 혈우병이 있다는 거...

그래서 한번 상처를 크게 입으면 피가 멎지 않는다고 하네요.

넓은 바다에 살면서 우리처럼 허파로 호흡을 하고, 그리고 새끼를 낳아 젖을 먹여 키우는 고래.

허파로 호흡하는 고래가 뭍에 나오면 죽는 이유는...

숨을 못 쉬어서가 아니라 물속에선 부력에 의해 감당했던 자신의 무게를 뭍에선 도저히 감당하지 못해 제 무게에 스스로 눌려 사망하게 되는 압사라고 하네요.

어쩌자고 상처받으면 쉬 아물지 않고, 감당하지 못할 삶의 무게에 죽을 것 같는 우리네 모습과 이리도 똑 닮았는지....

그래도 그 작살을 꽂고 몇 십 년을 아니 몇 백 년을 살아가는 고래도 있다고 합니다.

그 끈질김 또한 어쩜 그리 똑 같은지...

장포수 할아버지는 분명 오래전 자신과 눈이 마주쳤던 그 고래를 찾아 다시 떠났음이 이제 분명합니다.

그 고래를 잡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고래처럼 "신화"가 되기 위해서...

그리고 결국은 "신화"처럼 숨쉬기 위해서...

우리에게 이제 "신화"는 그리 거창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인간이 이겨내고 지켜내는 모든 일들과 마음들, 그리고 진심들

그것들이 우리에게 영원히 숨쉬는 “신화”가 될 것을 이젠 알 것 같습니다.

“신화”는 기억하는 사람들의 것입니다.

이 책은 말합니다.

기억하는 일이 중요하다고요.

"그것들을 잘 떠나보내기 위해서 그리고 그 뒤에 마음속에 잘 살게 하기 위해서”라구요.


모든 것을 마음에 담고 살아갈 수는 분명 없을 겁니다.

그게 이별일 수도 있고 사랑일 수도 있고 상처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떠나보내는 게 잘 기억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더 이상 떠나보냄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이 책,

묘한 안도감에 평온함마저 안겨주네요.


Posted by Book끄-Book끄
달동네 책거리2009. 10. 8. 06:08
 <개밥바리기별> - 황석영


개밥바라기별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시간들에 대한 기록...

더 이상 절망적일 수 없을 것 같고, 더 이상 세상이 무의미해질 수도 없는 시기, 그리고 보잘 것 없는 자신의 존재감에 대한 좌절, 끝냄에 대한 무한한 동경...

사춘기를 지나 어른도 아이도 아닌 중간자적 시기의 애매함이 주는 결정되지 않는 미래의 불안감, 그리고 추락보다 더 깊을 미지의 시간들에 대한 두려움...

딱히 결론내지 않아도 이야기의 결말을 말할 수 있는 모호함이 주는 신비.

“성장소설”은 이 모든 것들이 녹아있어 마치 반은 도가니처럼 펄펄 끓고 있는데도 나머지 절반은 절대로 녹는다는 것 자체를 허용하지 않겠다는 단단한 결빙처럼 차갑기만 합니다.

이런 모순의 결합이 책 속에 나오면 이상하게도 제겐 과학보다 그 내용들이 더 현실적으로 다가오게 됩니다.

우리의 시간은 기대, 관심, 기억 이 세 가지 순간의 연속이라고 하네요. 이 가운데 어느 것 하나라도 없으면 시간은 존재할 수 없다고요. 만약에 우리가 미래를 지향하지 못하고 있다면 그건 과거를 읽어버렸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시간이라......

어쨌든 우리는 시간 속에 살고 있고, 그런 이유로 나 자신이 바로 시간, 그 자체가 되기 때문인가 봅니다.

가끔 생각해봅니다.

왜 작가들은 “성장소설”을 꿈꾸는가...하고요.

예전 같았으면 명랑만화나 청소년 권장도서쯤으로 생각했을 성장소설이 지금은 참 더없이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건 일체감이 주는 공감의 형성에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물론 그건 시대가 주는 공감이 아니라 정서가 주는 공감, 달리 말하면 이심전심의 공감이라고 할까요?

다행히 우리 세대는 전쟁도, 그리고 군부독재니, 부정선거니 하는 시국에 대한 대대적인 군중 봉기도 겪지 않아 흐린 시대가 주는 어려움과 울분에 대한 분노가 부족할 수 도 있습니다.(그렇다고 효순, 미선 사건이이나 촛불집회 같은 것들을 과소평가하는 건 절대로 아니니, 오해하지 마시길......)

이 책,

<개밥바라기별>에 나오는 주인공들의 방황과 헤맴은 이유가 있고, 그 떠돔 또한 정착하고자 하는 열망의 다른 표현이기도 합니다.

차마 문을 못 잠그고 잠을 자는 어미의 마음...

청춘을 이겨내야 참 어른이 된다면, 그 청춘을 이길 수 있는 궁극적인 힘이 바로 고요한 머뭄을 제공하는 어미의 마음이 아닐지 생각합니다.

모든 여자들은 꿈꿉니다.

내가 남자로 태어났다면...

전 개인적으로 여자의 성장소설은 내가 남자였다면... 하는 그 불가능의 바람에서부터 시작이 되고, 남자의 성장소설은 내가 어미였다면... 하는 결론으로 종착되어진다고 생각합니다.

이 두 축이 여러 가지 이야기와 생각거리를 만들어 서로 얽히게 되는 거죠.


<개밥바리기별>은 작가 황석영의 자전적인 성장소설이라고 합니다.

우리나라 작가들 중에서 이 사람처럼 파란만장했던 사람도 흔치 않을 거라 생각되네요.

방북사건으로 제 나라로 돌아오지 못하고 몇 년을 헤맸던 사람.

1993년 귀국했지만 5년간의 수감생활을 해야 했던 사람.

그리고 그 이후에 그야말로 미친 듯이 써내려간 엄청난 분량의 책들...

발표한 글의 양만큼 질적으로도 진화되어 가는 그의 글쓰기가 한때 심한 질투심으로 다가오기도 했더랬죠.

그래, 당신 참 대단하다. (더 솔직한 표현은 당신 참 잘났다...는 마음)

뭐 유치한 감정의 폭발도 살짝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요...

이 책은 인터넷 포털 사이트 네이버에 5개월간 연재했던 소설을 다시 손봐서 8월에 출판됐습니다. 작가는 “지난 몇 달간 사춘기 소년 소녀들의 광장에서 이들과 소통하면서 글을 쓸 수 있었던 점은 행운"이라고 말합니다.

이제 글쓰기가 원고지나 컴퓨터 안에서 이루어지는 개인적인 작업의 차원을 넘어섰다는 의미겠죠. 그 즉각적인 반응들이 65세 작가 황석영의 눈엔 참 신기하고 재미있어 보였던 모양입니다.

그의 반짝거리는 눈을 상상하니, 마치 그 눈이 “개밥바리기별(=샛별=금성=나그네별)”처럼 느껴지는 것도 어쩔 수 없네요.

이 책은 참, 똑똑한 책입니다.

책에 나오는 주인공들은 고등학생임에도 불구하고 훨씬 우리보다 똑똑한 지성이며 동시에 이유 있는 행동가이기도 합니다.

지금의 작가들은 과연 이런 대사들을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쓸 수 있을까? 생각하게 할 만큼요.

작가 황석영은 억압의 시대를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말합니다.

“억압이라는 것도 하나의 공감대에서 출발한다”고요.

그야말로 개인적인 체험에서 나온 말이죠.

그는 억압이라는 압박의 요소를 판소리의 추임새처럼 만들어 오히려 격려와 신명의 장단으로 바꿔버리는 그런 작가였던 겁니다.

어쩌면 대가라는 말조차도 무색한 그런 글쟁이죠.

 

"먼 길을 돌아 문예반으로 돌아온 느낌이 든다"

책을 출판하고 그가 한 말입니다.

그 신선한 발언이 17권 째의 장편을 발표한 65살의 그를 마치 이제 막 등장한 팔팔한 청년처럼 느껴지게 만듭니다.

아~ 이 사람, 이제 다시 시작하려나 보다...

글을 쓴다는 건 좋은 일이지만 제 팔자를 남에게 내주는 일이라네요.

어쩌면 작가란 유목민의 다른 이름인 것 같습니다.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이곳, 저곳을 떠돌아다니는 유목민...

그러나 전 좀 다르게 말하고 싶네요.

어느 곳을 가든 정착하고 뿌리내리고 마는 질긴 생명력을 소유한 유목민이라고..,

세상 어느 유목민보다 간단한 생사도구를 꾸리고 이 길을 내 길로 바꿔 그대로 삶을 진행해가는 사람들...

그건 자유롭게 산다는 의미가 아니라 세상 어느 곳을 가든 책임감 있게 살겠다는 치열함의 고백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저 또한 황석영의 말을 빌려 말하고 싶네요.

"너의 모든 것을 긍정하라"고...


* 책보다는 작가 황석영에 대한 개인적인 고백의 글이 되어 버린 셈이네요.

변명을 하자면, 이분의 책은 누구를 통해 만나는 것보다는 직접 읽음으로 해서 만나는 게 더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기에...

그의 글들을 읽으면 잊어버린 세대에 대한 미안함을 느끼게 됩니다.

동시에 치열함을 잃은 자신에 대한 반성도 하게 만듭니다.

어쩌면 다른 형태의 고해성사를 할 수 있는 기회가 될지도 혹 모르겠습니다...


Posted by Book끄-Book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