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후 끄적끄적2015. 10. 23. 08:43

바티칸의 시스티나 성당(Capella Sistina)은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와 "최후의 심판" 프레스코화로 유명한 곳이지만

교황을 선출하는 콘클라베(Conclave) 장소이기도 하다.

"Conclave"는 라틴어로 "열쇠가 있어야 들어갈 수 있는 방"을 뜻하는 단어로

마지막 콘클라베는 84세의 베네틱토 교황이 건강상의 이유로 사임하면서 2013년 개최됐다.

2013년 3월 13일 오후 7시 6분,

1차, 2차, 3차, 4차 투표 내내 검은 연기가 올라온 굴뚝에서 드디어 흰연기가 피어올랐고

제 266대 교황으로 프란치스코 교황이 선출됐음을 선포했다.

바티칸을 일정에 넣으면서 가장 궁금했던 곳이 바로 여기 시스티나 성당이었다.

성당으로 들어가기 직전 가이드는 몇 번씩 당부의 말을 전했다.

이곳의 프레스코화는 소음과 진동에 민감해서

사진 촬영도 할 수 없고 내부에서는 절대 침묵을 유지해야 한다고.

만약 떠들면 관계자가 다가와서 주의를 주고 심할 경우 끌려나올 수도 있단다.

그런데...

가이드의 당부는 기우였다.

천장까지 빼곡하게 그려진 프레스코화를 보는 순간 아찔했다.

실제로 다리가 휘청거려 사람들 속에서 여러번 허둥댔다.

한순간에 숨이 턱하고 막혀버렸다.

머릿속이 멍해지면서 모든 소리가 일시에 멈춰버린 진공 상태.

미켈란젤로는...

인간이 아니다.

인간이라면 이럴 순 없다.

 

시스티나 성당 안에는 미켈란젤로의 프레스코화만 있는건 아니다.

좌우로 가를란디요, 페루지노, 보티첼리 등 르네상스 거장들의 그림들도 가득한데

미켈란젤로때문에 이들의 프레스코화는 상대적으로 덜 주목을 받는다.

사실 이곳의 천장화는 미켈란젤로가 아닌 브라만테에게 의뢰됐었다.

미켈란젤로는 회화보다는 조각으로 명성을 얻었던 인물인데

브라만테가 제자 라파엘로에게 공이 돌아가게 만들려고 교황 율리우스 2세에게 일부러 미켈젤로를 추천했단다.

(그 당시 미켈란젤로의 나이는 고작 33살이었다)

브라만테의 시나리오는 이랬다.

미켈란젤로가 나가 떨어질게 분명하니 그때 라파엘로를 다시 추천해서 부와 명성을 불려주겠노라는 계산.

미켈란젤로는 교황에게 두 가지 요구사항을 조건으로 걸었다.

첫째, 작품이 완성될 때까지 어떤 누구도, 심지어 교황조차도 시스타니 성당 출입을 금한다.

둘째, 매달 월급을 꼬박꼬박 준다.

괴씸했는지 교황도 미켈란젤로에게 요구사항을 전한다.

시스티나 성당에서 매일 진행되는 미사에 방해가 돼서는 안되며 작업은 혼자서만 해야 한다는 거였다.

그야말로 박빙의 요구사항이 아닐 수 없다.

그날로 미켈란젤로는 모든 작업을 그만두고 시스티나 성당 청장화에만 전념한다.

밑에서 자신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앙쪽 창을 연결해서 작업다리를 만든 후 하루에 15시간씩 천장화 작업에 매달린다.

중간에 교황과의 불화로 잠시 피렌체로 떠나 있기도 했지만

교황의 사과함으로 사건이 일단락되면서 다시 작업에 들어가 4년 6개월 후 천장화를 완성시킨다.

(미켈란젤로가 피렌체로 떠나고 교황이 몰래 그림 일부를 보고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는 말도 있고...)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 프레스고화 구성

창세기
1. 어둠과 빛을 구별하다
2. 해와 달을 창조하다
3. 바다와 육지를 분리하다
4. 아담을 창조하다
5. 이브를 창조하다
6. 원죄를 짓고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하다
7. 노아의 제사
8. 홍수와 노아의 방주
9. 술 취한 노아

구약성서에 나오는 구원의 장면
10. 하만을 벌하다
11. 모세와 뱀
12. 다윗과 골리앗
13. 유디트와 홀로페르네스

예언자
14. 요나
15. 예레미야
18. 다니엘
19. 에스겔
22. 이사야
23. 요엘
25. 스가랴

여자 예언자
16. 리비아 예언자
17. 페르시아 예언자
20. 쿠마엔 예언자
21. 엘리트레아 예언자
24. 델피 예언자

그리스도의 조상
26. 솔로몬과 어머니
27. 이세의 부모
28. 르호보암과 어머니
29. 아사와 부모
30. 웃시야와 부모
31. 히스기야와 부모
32. 스룹바벨과 부모
33. 요시야와 부모 
 

 

천장 프레스코화 작업 이후 미켈란젤로의 건강상태는 급격히 나빠져서

시력과 어깨에 심각한 장애를 얻게까지 된다.

이런 상태라면 억만금의 돈을 준대도 프레스코화라면 이가 갈릴텐데

미켈란젤로는 60세가 넘는 나이에 또 다시 시스티나 성당 제단 뒷벽의 프레스코화 의뢰를 수락한다.

그렇게 해서 탄생된 작품이 걸작 "최후의 심판"이다.

이 프레스코화에는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는데

처음 공개됐을때는 "신성모독"이라며 엄청난 비난이 받아야만 했다.

작품 속 인물들이, 심지어 예수 그리스도까지 전부 벌거숭이로 그렸던게 문제가 됐다.

교황은 계속해서 그림 수정을 요구했고 미켈란젤로는 끝까지 이를 거부했다.

결국 미켈란젤로의 제자에 의해 중요 부위를 가리는 작업이 이뤄지긴 했는데

스승의 그림에 손을 댔다는 자책감으로 제자는 결국 자살을 하고 만다.

그리고 나는 이 제자의 마음이 가슴 속에 깊이 깊이 맺힌다.

얼마나 괴롭고 고통스러웠으면 자살이라는 극단의 방법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을까!

결국 스승의 그림이 제자에게 진정한 "최후의 심판"이 되버리고 말았다.

천재성이 낳은 비극.

천국과 지옥을 바라보는 마음이...

참 버겁고 많이 아프다.

또 다시 휘청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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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후 끄적끄적2015. 8. 11. 08:25

두오모 성당 바로 앞에 있는 산 조반니 세례당은

피렌체의 수호성인 산 조반니(사도 요한)를 기리기 위한 것으로

피렌체에서 가장 오래된 종교 건축물이다.

두오모 성당이 완성되기 전까지 이곳이 대성당으로 사용됐다고.

이곳은 대문호 단테가 세례를 받은 곳으로도 유명한 곳.

실제로 2차 세계대전 직후까지 피렌체 시민들의 세례식이

외부는 흰색과 녹색 대리석에 기하학적인 문양으로 장식되어 있는데

남, 북, 동쪽으로 세계의 울입문이 달려있다.

하지만 현재는 보수중이라 건물 전체를 가림막으로 막아놔서 외부를 전혀 볼 수 없었다.

(맨 첫 사진은 보수 공사 하기 전 모습)

 

 

남쪽 문은 안드레아 피사노의 작품으로 산 조반니 세례자 요한의 삶을 묘사하고 있고

북쪽 문은 가베르티의 작품으로 예수의 삶이 조각되어 있다.

동쪽 문 로렌초 기베르티가 만들었는데 무려 28년에 걸쳐 만들어졌다

이 문이 그 유명한 "천국의 문(Gates of Paradise)"으로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이 우리나라에 방한했을때 경복궁 고궁박물관에 전시되기도 했었다.

워낙 유명한 작품이라 세 문 중 동쪽문만이 관광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하지만 진품은 노후와 훼손때문에 두오모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고 이곳에 있는 건 복사품이다.

그리고 두오모 박물관은 보수중이라 전면 폐쇄.(ㅠ.ㅠ)

"천국의 문"에는 각각 벽감 원형 장식 속에 작은 형상들과 흉상이 들어 있고

그 사이에 구약성서 10개의 에피소드가 새겨진 5개의 직사각형 부조가 들어 있다.

그런데 왜 "천국의 문"일까?

10개의 부조 어느 것을 봐도 "천국"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데...

사실 이 동쪽 문이 처음부터 "천국의 문"으로 불린건 아니다.

문이 완성되고 두어 세대가 지난 후,

미켈란젤로가 두오모 광장에 서서 이 문을 바라보며 감탄하면서 그랬단다..

"이 문의 아름다움은 가히 천국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세워둘 만하다!"

그 이후부터 "천국의 문"이라고 불리기 시작했다고...

나도 미켈란젤로 흉내라도 내보고 싶었는데

앞에 완강하게 버티고 있는 철책때문에

멀리서 보는 것도, 가까이 다가가서 보는 것도 다 아쉽기만 하더라.

 

 

산 조반니 세례당 내부,

소박하고 고요하고 성스러운 곳.

조그만 소리도 크게 울릴 것 같아 발걸음까지 조용조용해졌다.

높은 곳에 안치되어 있는 석관은

주제단과 세례당으로 쓰일 당시 사용했던 작은 우물,

그리고 크고 작은 혹은 높고 낮은 석관들.

세례당 밖과 안의 시간은 확연히 다르다.

지속의 시간과 멈춤의 시간.

오묘한 바닥 패턴을 따라 걸으며 나는 그것에 대해 생각했다.

한 켠에 나란히 모셔져 있는 조각상은 전부 도나델로의 작품으로 세 명의 예언자들이다.

Imberbe,Barbuto, Geremia.

도나델로의 "막달라 마리아"를 볼 수 없는 섭섭함을

이 예언자 세 분의 조각상으로 달랬다.

(하지만.... 도저히 달래지지가 않더라...) 

 

 

고개를 들어 천정을 올려다본다.

쿠폴라를 중심으로 5단의 프레스코화가 황금빛 빛을 뿜어낸다.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을 모티브로 조르주 바사리가 그린 프레스코화

하지만 바시리는 작품을 완성하지 못하고 사망했고

그 뒤를 주카로(Zuccaro)가 이어받아 1579년 완성시킨다.

1층은 세례자 요한의 일생이,

2층은 예수 그리스도의 일생이,

3층은 구약성서 속 요셉의 일생이,

4층은 창세기의 주요 장면이 그려져 있고

마지막 5층은 비잔틴 문양으로 장식되어 있다.

산 조반니 세례당 프레스코화 "최후의 심판" 단테의 <신곡>에 영감을 주기도 했는데

이 그림을 보고 <신곡>의 루시퍼가 탄생됐단다.

아무리 두 눈을 크게 뜨고 프레스코화를 뚫어져라 쳐다봐도

아름답다는 생각만 가득할 뿐 도저히 괴물의 영감은 떠오르지도 않던데...

확실히 거장의 눈은 다른 것이 보이는 모양이다.

거장의 흉내조차 낼 수 없는 평범한 나같은 사람은

그저 감탄만으로도 감당이 안 될 뿐.

저 높은 천정에 황금의 모자이크를 하나하나 붙여 나간다는 건,

그 자체로 위대한 종교이며, 해탈이며, 영생이다.

불멸의 바사리와 주카로.

산 조반니 세례당 프레스코화로 인해

이 두 사람은 죽지 않은 영생의 삶을 허락받았다.

Posted by Book끄-Book끄
여행후 끄적끄적2015. 7. 24. 08:15

두오모 성당의 내부는

셩당의 외부가 워낙 화려하고 웅장해서 그런지

내부의 모습을 보고 실망하는 사람들도 있단다.

그런데 나는 이 소박하고 아담한 내부가 아주 아늑하고 따뜻하더라.

쿠폴라의 프레스코화를 제외하면

내부 벽은 그림도 거의 없고 장식물들도 성당 규모에 비하면 많지 않다.

하지만 창문마다 가득한 스테인드글라스는 로렌 초 기베르티의 작품.

가까이 다가서서 바라보면 그 색감의 화려함과 표현의 섬세함에 깜짝 놀라게 된다.

다른 장식물이... 굳이 필요하지 않겠구나 싶을 만큼.

예수 고해상도 표정 속에 고통과 다 이루었다는 완성의 거룩함이 생생하다.

성모마리아 대관식으로 장식된 시계(?)가 가장 유일하게 화려한 작품이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기원 촛대.

촛대 자체보다도 조심스럽게 불을 밝히는 사람들들 모습을 한참 바라봤다.

간절함을 담은 눈빛과 조심스런 손길.

내가 두오모 성당에서 본 가장 아름다운 모습.

 

 

두오모 쿠폴라의 천정 프레스코화.

바사리(Vasari)와 주카리(Zuccari)에 의해 만들어진 이 작품의 제목은 "최후의 심판" 이다.

모두 5단으로 그려졌는데

성당 내부에서 올려다보면 천국이,

쿠폴라에 올라가면서 보면 지옥이 훨씬 잘 보인다.

두 거장이 만들어낸 아주 계획적이고 의도적으로 구도다. 

그러니까,

이 프레스코화는 바라보는 있는 사람에게 마치 잠언록을 펼쳐든 기분을 들게 한다.

최후의 심판날,

그대가 가게 될 곳이 과연 어디일지를  생각하라는 삼엄한 경고.

그림에 눈맞추기가 두렵다...

 

 

따뜻하고 빛으로 가득한 천국의 모습과

어둡고 기괴한 지옥의 모습.

실제로 쿠폴라를 오르는 중간에 머리 위로 바짝 올려다본 지옥은,

너무나 섬득하고 끔찍했다.

바닥으로 인정사정 없이 내쳐지는 악인들의 모습을 머리 위로 올려다보니

내가 지금 지옥에서 있는 느낌이다.

찔리고, 던져지고, 불구덩이에 밀어지고, 머리 셋 달린 괴물에게 찢기고...

꼭 종교를 떠올리지 않더라도

적어도 제일 바닥으로는 떨어지지 말자고 혼자 각오 높게 다짐했다.

 

쿠폴라 가장 상단의 그림들.

쿠폴라 프레스코화에 대해 알고 갔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했다.

여행을 준비하면서 피렌체나 로마는 스페인만큼 준비하지 못했었다.

사전지식이란 것도 상식의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고

심지어 흔한 여행서마저도 챙기가지 않았다.

그래서 돌아와서 뒤늦게 로마와 피렌체 관련 책들을 뒤적이고 있다.

소처럼 열심히 되새김질 하는 중 ^^

그런데... 이것도 그리 나쁘진 않다.

왜냐하면 뒤늦은 되새김질이 의외로 아주 꿀맛이라서...

^^  

Posted by Book끄-Book끄
보고 끄적 끄적...2013. 1. 16. 09:03

<바티칸 박물관전>

부제 : 르네상스이 천재화가들

장소 : 예술의 전당 한가람 미술관

일시 : 2012.12.08. ~ 2013.03.31.

 

세계 3대 박물관.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 영국의 대영 박물관, 바티칸 박물관.

한가람미술관에서 세계 3대 박물관 중 한 곳인 바티칸 박물관전이 열렸다.

(몇 년 전 클림트전 이후에 한가람 미술관을 찾은 건 정말 오랫만이다) 

세계에서 가장 작은 나라 "바티칸 시국"

교황이 살고 있고 전세계 가톨릭의 중심지.

그곳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회화, 장식미술, 조각 73점이 한국에 전시중이다.

게다가 르네상스의 천재 화가 3인을 한자리에서 볼 수도 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산치오.

놓치면 아무래도 후회가 될 전시회임에는 분명하다.

 

참고로 지금 예술의 전당에서는 3개의 특별 전시회가 진행중이다.

한가람 미술관에서는 "바티칸 박물관전"과 "미국 인상주의 특별전"이.

디자인 미술관에서는 "불멸의 화가 반고흐 in 파리"가 진행중이다.

반고흐전도 너무 보고 싶었는데 계단까지 길에 늘어선 줄을 보고 포기했다.

아무래도 이 전시회는 평일날 다시 찾아야 할 것 같다.

이번 바티칸 박물관전은 기대했던 것보다 작품이 적었고 그나마도 사진으로 대체한 것들도 있었지만

그래도 이 정도도 어딘가!

하긴 시스타나 경당 천정화를 뜯어올 수는 없는 일.

언젠간 이곳을 반드시 가봐야겠다.

(나의 로망 박물관 투어에 빼놓지 말고 들러야 할 곳!)

이곳에서 하루종일 천정과 벽만 들여다보고 있어도 황홀하지 않을까?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산드로 보티첼리의 프레스코를 보고 있으면

목디스크의 걱정 따윈 아무렇지 않게 던져버릴 수 있을 것 같다.

"천지창조"나 "최후의 심판"을 눈으로 보게 되면 어떤 느낌일까!

(지금은 단지 무한 상상일 뿐이다)

 

미술에 문외한이기도 하지만

작품을 둘러보는데 목판에 템페라와 금으로 그렸다는 작품들이 많았다.

템페라가 뭐지?

궁금해서 찾아봤더니 달걀 노른자와 아교를 섞은 불투명 물감을 뜻한다.

템페라는 빨리 마르기 때문에 색을 서로 섞어서 사용할 수 없지만 안료의 원래 색상과 아주 가깝게 마르는 장점이 있단다.

그림들이 거의 파란빛이 띠길래 색을 내는 특별한 안료가 아닐가 상상했는데...

(이로써 단편적인 지식 하나가 늘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의외로 보존성이 좋아 보인다.

보존을 위해 뭔가 용액을 덧바르게나 색이 더 두드러지게 복원했을 수도 있겠지만.

몇 가지 작품들이 눈에 많이 들어왔다.

상아로 만든 병풍를 보면서 그 조각술에 경탄을 했고

검은 대리석에 하얀 상아로 부조한 "십자가에서 시신을 내림"을 보면서는

그 극명한 대비효과에 섬득함마저도 느꼈진다.

안으로 삼키는 무엇으로도 위로받을 수 없는 통곡과 비통이 그대로 전달되는 것 같았다.

 

1537년 경에 만들어진 대형 태피스트리를 보면서 또 얼마나 놀랐던지...

태피스트리를 만들어본 사람은 알거다.

테두리를 이렇게 일자로 만들기가 쉽지 않다는 걸.

그것도 세로 4m, 가로 3m가 넘는 태피스트리를 이렇게 제대로 직사각형으로 짠다는 건

엄청난 노고와 세심함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스케치북만한 태피스트리를 짜면서 성격의 바닥을 보여주는 사람 여럿 봐서 내가 안다)

대리석 조각과 석고상들을 보면서

그 미세한 근육의 표현에 경이로웠고

살아 꿈뜰댈 것 같은 표정에 눈을 맞췄다.

 

기대했던 성베드로 대성당의 미켈란젤로 "피에타"상은 대리석으로 조각된 원본이 아니라

1975년 제작된 스페셜 에디션 석고상 전시라 많이 아쉬웠다.

심하게 훼손된 걸 복원했다고 해서 궁금했는데...

(아무래도 이건 직접 바티칸으로 날아가야 볼 수 있으려나!)

피에타 상을 만들었을 때 미켈란젤로의 나이는 26세였단다.

어느날 그는 피에타를 두고 미켈란젤로 작품이 아닐거라는 말을 듣게 된다.

그래서 성베드로 대성당으로 몰래 들어가 마리아의 옷깃에 서명을 남겼단다.

"페렌체 사람 미켈란젤로의 작품"이라고...

도장 한 번 제대로 찍은 셈이다.

멋지다, 미켈란젤로! 

(이렇게 뚝심있고 성깔있는 예술가의 곤조에 어찌 아니 반할쏘냐~~)

 

목판에 유채로 그린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광야의 성 히에로니무스 (1480)"는

미완이 남긴 묵시론이 오히려 더 장엄하고 비장하게 느껴졌다.

그래도 얼굴은 근육과 표정 하나하나와 완벽하게 살아있다.

인간의 이성과 정신은 늘 살아 있어야만 한다는 의미였을까? 

어느날 갑자기 몰아친 화산재로 폐허가 되버린 향락과 사치의 도시 폼페이가 떠올랐다.

(생각해보니 예전에 품페이 유물전에도 갔었다)

묵직하다 못해 두려움이 느껴지는 그림이다.

어쩌면 완성되지 못해서 더 경외감이 느껴지는지도...

"주님탄생 예고"는 그림은 내가 본 수태고지 중에서 최고다.

명화를 두고 이런 표현을 해도 되나 모르겠지만 동정녀 마리아 중에서 외모가 정말 갑이시다.

순수하고 가녀리면서도 고결한 느낌이 충만하다.

곁에 서있는 천사조차도 절로 경의를 표할 수밖에 없는 순결함이다.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빛은 마리아의 복부쪽으로 조심스럽게 닿아있다.

수태의 찰나를 정말 절묘하게 포착했다.

실제로 보면 그림 사이즈도 상당히 큰 편인데 앞에서 한참을 서있었다.

멀리서도 보고, 가까이에서도 보면서...

그림의 내용뿐만 아니라 색감과 명암의 표현이 내 발을 오래 붙잡아놨던 작품이다.

라파엘로의 세폭짜리 프레델라 사랑도 눈길을 오래 잡았다.

작품 자체도 따뜻하고 사랑스럽지만 청록색 색감이 평온과 안정감을 안겨준다.

어미 품 속을 파고드는 아기들.

그 중 한 명이 마치 나인듯 하다.

 

몇몇의 작품들 앞에선

욕심같아서는 좀 오래 서있고 싶었는데 그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여서 안타까웠다.

아무래도 좀 찬찬히 감상을 하려면 평일을 이용해야 할 듯!

이것 말고도 탐나는 전시회가 몇 개 더 있는데

(예술의 전당 반고호전이랑 시립미술관에서 하는 팀버튼전)

주말은 필히 삼가해야 할 것 같다.

 

어쨌든 오랫만에 전시회 나들이를 해서 주말이 풍족했다.

기본 지식 없는 문외한의 내 멋대로 이해와 감상에 불과하겠지만...

^^ 

Posted by Book끄-Book끄
읽고 끄적 끄적...2010. 3. 20. 06:09
일본 소설 두 권을 읽다.
한 권은 성장소설, 그리고 한 권은 추리소설.
요시다 슈이치의 <요노스케 이야기>
18살 요노스케가 대학생활을 하기 위해 도쿄에 홀로 올라온다.
이야기는 엽기적이지도 않고 그저 평범한 한 청년의 이야기다.
뜻하지 않게 삼바 동아리를 가입하고
뜻하지 않게 부자집 여자친구를 사귀게 되고
뜻하지 않게 무언가에 휘말리게 되는 우리의 일상과 비슷하다.
요시다 슈이치의 <페러이드>를 아주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에 손에 잡았다.
일본의 성장소설은 성적이고 가벼울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의외로 잔잔하고 평범하다.
세상 누군가의 이야기가 될 수도 있는 그런 평범함.
그러나 그 안에도 특별함은 있다.



예전에 이 책이 처음 출판됐을 때
마치 이수현을 주인공으로 쓴 것 같은 뉘앙스를 풍겼었는데
실제로 읽어보니 이수현 사건은 하나의 포인트다.
이수현과 요노스케가 지하철 선로에 떨어진 사람을 구하고 사망하게 되는 사건.
(책의 의도는 정상적이었는데, 우리나라 출판사의 홍보는 다분히 비정상적인 형태였던 것 같다.
 일종의 노이즈 마케팅이었노라 말하고 싶다.)
이 책의 의도는 그러니까
누군가의 삶이 또 다른 누군가의 삶을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바꿔놓는다는 사실이다.
보트 피블을 직접 목격하고 난민캠프의 일을 하게 되는 사람.
예기치 않은 임신으로 다니던 학교를 그만두고 생활인으로 뛰어든 젊은 부부,
고급 파티걸이엇다가 다른 삶을 살게 되는 사람,
그리고 요노스케 본인까지도...
살아간다는 건, 성장한다는 건 늘 그랬던 것 같다.
평범하지만 그래도 작은 진실을 품고 있는 책이다.



야마구치 마사야가 1989년에 쓴 추리소설 <살아있는 시체의 죽음>
(며칠 전에 블로그에 올렸었는데 그만 실수로 삭제해버렸다.
 꽤나 인상깊게 읽은 책이라 나름 수다를 좀 떨었었는데... 무지 아깝다.
 다시 쓰려니 어쩐지 김빠진 맥주를 들여다 보듯 난감하다)
20년도 더 된 소설인데 그 참신함과 기발한 상상력이 그저 감탄스러울 뿐이다.
책의 제목은 은유적인 의미로 쓰인 게 아니다.
실제로 이 책의 주인공들은 다들 버젓히 죽었던 시체들이다.
거기다가 방부처리까지 한 순도 100% 시체들이다.
쉽게 "좀비"를 떠올리면 된다.
(시신의 방부처리 작업를  "앰바밍"라 하고, 그걸 하는 사람을 "앰바머"라 부른다는 걸 이 책을 통해 알게 되다)
황당한 소설이라고 생각되는가?
그러나 읽고 있으면 더이상 황당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작가 아바구치 마사야는
일본 본격 추리소설 역사상 가장 참신한 작가로 인정받고 있다는데
나는 이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단지 이 한 권만으로도 충분히...  )



Memento Mori!
"영원"을 꿈꾸는 인간에게 주는 경고의 말,
"Remember, You must die!"
소설 속에서 허스 박사라는 인물의 입을 통해 읽는 이에게 경고장을 전달한다.
" ...... 삶과 죽음은 표리일체(表裏一體), 삶을 생각하는 일은 죽음을 생각하는 일, 죽음을 생각하는 일은 삶을 생각하는 일, 우리도 다들 살아 있는 시체라네. 되살아난 신체들은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는 게댜. 삶과 현세에 아무리 집착한들 언젠가는 이렇게 티끌이 디고 만다고 말일세. 이게 바로 20세기의 '메멘토 모리' 아니겠나. 우리 모두 집행유예 중인 시체에 지나지 않는다네......"
그리고 시체는 말한다.
"그저 '죽음'을 알기 위해 다시 살아온 듯한 기묘하고도 짧은 생애였구나!"라고...



인간은 불사의 영원한 생명을 잃은 대신 각각의 개별성을 손에 넣었다.
그리고 그 개별성은 성(性)을 통해 그 생명을 분열, 증식한다.
그러니까 성(性)의 대가가 바로 죽음이라는 뜻이다.
"에로스와 데스는 형제"
죽은 시체와 살아있는 여자가 끌고 다니던  분홍색 영구차에 적혀있던 이 문구는
그러니까 참 정당하고 의미심장한 조합인 셈이다.
추리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장례의식에 대한 역사와 차이,
최후의 심판날에 죽은 자도 다시 살아 하늘로 들림을 받으리라는 기독교적 맹신.
죽어서도 재화에 집착하는 시체의 모습들까지
하나하나 전부 인간의 이면에 대한 보고서같다.
책을 읽는 동안 시체들이 너무나 인간적이라 심난했다.
좀비 세계에서의 고민도 행위들도
참 인간들만큼이나 이기적이고 치열하다.
괸해 내 옆의 사람을 한 번 쳐다보게 된다.
저 사람이 인간일까? 시체일까? (^^)

* 악마가 죽어가는 사람에게 거는 다섯 가지 유혹의 덫 (책에 나오는 내용)
 ① 신앙에 대한 의심
 ② 자신의 조에 대한 절망
 ③ 이승의 재화에 대한 집착
 ④ 영혼의 구원에 대한 회의
 ⑤ 스스로를 위대하다고 보는 교만
Posted by Book끄-Book끄
달동네 책거리2010. 1. 25. 06:16
 <길을 잃어야 진짜 여행이다> - 최영미


길을 잃어야 진짜 여행이다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

나이를 깨닫고 살기엔 너무 어렸던 나의 20대 초반에 만났던 책입니다. 그 시집 앞에서 전 오지 않을 30대를 비웃듯 좀처럼 공감하기 힘들다 혼자 결정하고 책꽃이 한 켠에 방치하듯 내버려뒀더랬습니다.

나중에... 나중에... 그래 “서른”이 되면 그때 한 번 읽어주리라.

아마도 꽤나 거만한 다짐을 했었겠죠.

그리고... 정작 서른이 됐을 때는 까맣게 그 책을 잊어버렸고, “서른”을 지나버린 지금은 차마 두려워 책장의 표지도 건드리지 못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이십대였을 때 나는 나에게 삼십대의 시간은 결코 오지 않을 거라 호기있게 믿었었는데...

시인 “최영미”

그렇게 제때 읽지 못해 놓쳐버린 그녀의 시들은 아직까지도 제겐 조목조목 무안함과 면목 없음으로 남아 책꽃이 한 켠에서 물그러미 저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마치 뭉턱뭉턱 시간이 통째로 도려내진 것 같은 휑한 느낌.

그런데  때로 그 느낌은 실제로 내 살점의 일부가 뜯기는 것처럼 저릿저릿 아프고 처절하기까지 합니다.


<길을 잃어야 진짜 여행이다>

여행집 신간으로 소개된 이 책이 눈에 들어왔던 건 아마도 작가에 대한 저의 이런 막연한 부채감이 한 몫 했으리라 짐작됩니다.

부채가 눈덩이처럼 쌓여 빚더미에 앉기 전에 이번엔 제때 읽어내리라 다짐하게 됐는지도...

작가 최영미는 이 책의 표지에 산문집이라고 책의 소속을 명확히 밝혔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단어 선택은 정말이지 솔직하고 정직했습니다.

이 책에는 여행지의 흥분감과 낯섬, 그리고 이국을 향하는 신비감 따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여행지를 담은 그 흔한 사진조차 만나기 어렵죠.

여행은 “존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살기”위한 과정이라고 말하는 그녀는 이 책을 통해 삶과 사람을 기꺼이 만나 철저히 홀로 대화하고 소통하고 있습니다.

여행은 어딘가로 떠나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누군가에게로 떠나는 것 또한 포함된다고 낮게 이야기하고 있죠. 

조곤조곤한 독백같은 대화들.

책을 읽는 내내 어쩔 수 없이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이게 됩니다. 그것도 최선을 다해서 말이죠.

1부 "아름다움에의 망명"은 그녀가 그동안 국내의 신문과 잡지 등에 기고한 여행과 관련된 글들을 성실히 모아놓은 부분입니다.

시를 쓰고 소설을 쓰는 작가 최영미가 아니라 서울대 미대와 홍익대 미술대학원을 거친 미술학자로서의 그녀의 근원을 만날 수 있죠.

그녀에게 "미술"은 그러니까 영원한 노스텔지아인 셈입니다. 

불편해진 손이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미술의 정교함과 세밀함을 그녀는 글을 통해 대신 그려내기로 작정한 듯 보입니다.

2부 "예술가의 초상"은  문학, 미술, 영화 등 문화 전반에 대한 그녀의 짧은 사색과  개인적인 담론들이 오롯이 담겨있습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숨겨진 이야기들과 위대한 예술가들의 애뜻한 비화들도 만날 수 있죠.
그리고 살아있는 사람들에 대한 인간적인 사귐의 글들까지도요.
솔직히 최영미가 이런 글을 쓸 수 있다는 게 좀처럼 믿어지지 않기도 했습니다. 아무래도 저는 작가 "최영미"를 그저 여류시인으로만 기억하려 했던 모양입니다.
선입견을 가진 삐뚜름한 시선이었죠.
여성을 글은 날카롭지 않고,  대담하지 않고, 그리고 체계적이고 치열하지 않다고  생각했던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이 책에 담긴 글들...
삶이 치열하다는 걸, 하루하루가 생명을 목전에 둔 사람처럼 간절할 수 있다는 걸 가슴 뻐근하게 느끼게 합니다. 그것도 제겐 너무 치명적으로 잔잔하게...


오십을 앞에 둔 한 여자가 말합니다.

"여행과 스포츠는 내 삶이 다하도록 나와 함께 할 정열이다"

단지 이 말만으로도 지독히 그리고 강렬히 그녀가 부러워 야만의 짐승처럼 그녀의 사지를 물어뜯고 싶었다면 이해가 되실까요?

진심으로 저는 그러고 싶었습니다.
저 또한 그랬노라, 간절히 그래보고 싶었노라 그녀를 향해 발악이라도 하고 싶었습니다. 

여행지에서 할 일 없이 톡톡 손발톱을 깎으며, 발뒷꿈치의 오랜 각질을 정성껏 밀어내며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밀린 일기를 쓰고 싶었다고...

호들갑스럽게 유명 여행지를 눈도장찍듯 훓고 지나가는 게 아니라 가슴에 담긴 한 곳에 예정없이 머물면서 감정이 바닥날 때까지 그렇게 정착하듯 일상을 보내고 싶었다고... 

아직도 계속 건축중인 가우디 성당 앞에서,

미켈란젤로의 가죽을 들고 있는 섬뜩한 장면이 숨어있는 "최후의 심판" 앞에서.

나 또한 꾸역꾸역 밀려오는 졸음처럼 나른한 시간들을 오랫동안 보내고 싶었노라고...

내 눈 속에만 보이는 보물을 가슴에 숨기며 그렇게 애뜻하게, 그렇게 가슴 뻐근하게 그러면서도 잠시 무료하게 삶을 살아내고 싶었노라고...
그러나 그 꿈들이 내겐
항상 인류멸망의 최후보다 더 요원하고 늘 가팔라 상상만으로도 숨이 턱까지 차올랐노라고...


문득 그녀의 글들을 읽으며
저는 오래 참았던 숨을 크게 쉬어 봅니다.
길을 잃어야 진짜 여행이라고 그녀가 말합니다.
그러나 이제 너무 겁쟁이가 되어버린 저는 알던 길도 잃을까봐 하루하루를 전전긍긍하며 살아갑니다.
정직하게 사랑하지 못했음으로 청춘을 잃은 사람.
그래서 젊은 적이 없기에 늙을 수도 없는 사람.
이 책을 읽는 저의 시선이 꼭 이랬음을 고백하게 되네요.
마음 안에 또 다시 굵은 매듭이 한 줄 묶이는 걸 느낍니다.
"예술에 재능이 없는 사람이 예술에 집착하는 것만큼 무서운 일은 없다네"
화가 세잔은 에밀 졸라의 이 말에 상처를 받고 그후로 죽을 때까지 세상과 등지고 살았다네요.
세상에 너무 많이 집착하며 살고 있는 저는 이제 무엇과 등지고 살아야 할까요?
책장을 덮은 마음 끝이 내내 묵직합니다.

Posted by Book끄-Book끄
읽고 끄적 끄적...2010. 1. 8. 06:14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
내게 작가 최영미를 알게 한 최초의 책이자 그녀의 첫 책.
20대에 이 시집을 소유했을 땐
서른이 요원했기에 이해하지 못할까봐 건성건성 들춰봤었다.
(사실 그때는 내게 서른이란 시간은 결고 오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턱없이 어이없는 자신만만함이었음을 그때 조금이라도 알았었더라면...)
"서른"이 지나 내 잔치가 끝났을 때 다시 조목조목 읽어보리라 혼자 다짐했던 책.
그리고 오랫동안 나는 그 책을 외면했다.
지금은...
이미 "서른"을 훌쩍 넘겨버린 나는
이 시집의 제목만으로 덜컥 겁이 나 감히 책 장을 펼쳐보지도 못한다.
마치 뭉턱 시간을 통째로 도려낸 것 같은 느낌.
그 느낌은 실제로 살점이 떨어져 나간 것처럼 아리고 처절하다.



<길을 잃어야 진짜 여행이다>
제목만 들었을 땐 여행집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책 표지에 산문집이라는 자신의 소속이 정확히 밝혀져 있다.
최영미의 단어 선택은 정직했다.
1부 "아름다움에의 망명"은 그녀가 그동안 국내의 신문과 잡지 들에 기고한 여행과 관련된 글들을 모은 부분이다.
2부 "예술가의 초상"은  문학, 미술, 영화 등 문화 전반에 대한 그녀의 짧은 사색과
개인적인 경험들이 오롯이 담겨있다.
1부의 글조차도 여행지를 소개한다는 느낌보다
어떤 특정한 그림이나 조작에 일일이 말을 걸고 있다는 느낌...
그것도 조근조근한 독백으로....
여행지를 담은 그 흔한 사진조차도 이 책에센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시를 쓰고 소설을 쓰는 최영미가 아나라
서울대 미대와 홍익대 미술대학원을 거친 미술학자로서의 최영미를 만날 수 있다.



마흔을 훌쩍 넘긴 한 여자가 말한다.
"여행과 스포츠는 내 삶이 다하도록 나와 함께 할 정열이다"
지독히 그리고 강력히 그녀가 부러워 야생의 짐승처럼 물어뜯고 싶어진다.
진심으로 나는 그러고 싶었다.
여행지에서 편하고 손발톱을 깎으며 오래 밀린 일기를 쓰고 싶었다.
호들갑스럽지 않게 유명 여행지를 눈도장찍듯 훓고 지나가는 게 아니라
며칠이라도 감정이 바닥날 때까지 한 곳에 정착하듯 머물며 일상을 보낼 수 있기를...
아직도 계속 건축중인 가우디 성당 앞에서, 
미켈란젤로의 가죽을 들고 있는 섬뜩한 장면이 숨어있는 "최후의 심판" 앞에서
나는 졸음처럼 밀려오는 시간들을 오래동안 보내고 싶었다.
그 꿈은 요원하고 늘 가파라 상상만으로도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몇 가지 표현과 글들이 눈에 들어와 담아본다.
특별히 공감했던 부분들과 지극히 부러웠던 부분들.
문득 숨쉬며 살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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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여자들은 프랑스 여자들보다 화장이 진하다. 유럽의 남쪽으로 내려갈수록 여인네들으 얼굴이 울긋불긋해진다. 내 경험을 일반화하지면, 젊은 여성에게 두터운 화장을 강요하는 사회일수록 여성의 지위가 낮다.

The ugly can be beautiful, but the pretty never - 고갱
예술을 알면, 문학을 좋아하면 인생이 복잡해진다. 좋게 말해 인생이 풍요로워진다. 보통 사람들은 밖에 보이는 것만 보고 이렇다 저렇다 미추를 논하는데, 예술가들은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다른 각도에서 보는 사람들이거든, 자신이 남다른 생을 살아야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들이 눈에 들어오는 법이다. 그래서 위대한 인생이 위대한 예술을 낳는다는, 예술가는 모두 불행하다는 신호가 성립하지.

버락 오바마, 그는 인종이 아니라 인간에 호소했다. 그는 선동하지 않고 설득했다. 자신감이 그의 성공의 열쇠였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처럼 대단한 자신감의 이유를 묻는 기자에게 그는 이렇게 답했다. 어려서부터 여러 대륙, 여러 문화에서 자라며 사람들과 소통하는 법을 배웠노라고.

나는 이 모든 처음, 최초들을 의심한다.

어쩐지 이건 너무 만들어진 장치라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진짜 상처는 드러나지 않는 법이다. 그리고 너무 고통스러우면 눈물도 마른다. 그 눈물을 억지로 짜내려는 모든 시도는 그래서 결국 어설픈 신파로 전락할 따름이다.
그날의 광주에 대한 지식인의 해묵은 "부채의식"에서 태어난 영화 <꽃잎>. 장선우 감독이 과거를 들여다보는 창에는 시종일관 감상이라는 필터가 부옇게 끼어 있다. 신파의 본질은 자기 연민이다. 일종의 정신적 딸딸이에 다름 아니다. 감상과 자기 연민의 안개를 거도 광주는 언제 신파에서 구출될 것인가? "우리"는 언제 눈물을 그치고 현실을 직시할 것이가? 이는 장선우뿐 아니라 우리 모두의 화두이다. 서둘러 고아주를 형상화하려는 허튼 기도보다는 지금은 차라리 광주를 손대지 않고 그냥 놔두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시사회장을 떠나며 나는 다짐했다. 싸구려로 위로받느니 차라리 냉정한 무관심을 택하겠노라고.   - 장선우 감독의 영화 <꽃잎>을 시사회를 본 후 느낌을 적은 글

시는 그것을 쓴 사람이 아니라 시를 필요로 하는 사람의 것이다.

세계는 인간 없이 시작되엇꼬, 또 인간 없이 끝날 것이다. - 레비스트로스(프랑스 인류학자이며 사상가)

사랑받지못했으므로 청춘을 잃은 사람들, 그래서 젊은 적이 없기에 늙을 수도 없는 사람들에게 이 책이 위로가 되면 좋겠다. - 잉게브르크 바흐만의 산문집 <삼십세>

예술에 재능이 없는 사람이 예술에 집착하는 것만큼 무서운 일은 없다네 - 에밀 졸라의 이 말에 깊은 상처를 받아 그후로 죽을 때까지 세상과 인간을 등지며 산 화가 세잔
Posted by Book끄-Book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