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2.03.26 <희랍어 시간> - 한강
  2. 2010.04.20 창덕궁 2
읽고 끄적 끄적...2012. 3. 26. 05:59

단숨에 읽었다.

그리고 마지막 책장을 넘김과 동시에 다시 첫 장을 펼쳤다.

연거퍼 두 번을 읽고 나서야 조금 숨이 쉬어졌다.

급작스런 실명(失明)같은 침묵이 밀려왔다.

난.감.하.다.

말을 잃은 여자와 시력을 읽어가는 남자의 이야기에 내가 휘둘리다니...

그 남자의 빛과 그 여자의 침묵은 가깝고도 멀다.

그들의 빛과 언어에 대한 정당한 소유권을 돌려주기 위해 나는 투쟁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연약함을 증언하는 한국의 주목할 만한 젊은 작가"

우리나라에 교환교수로 왔었던 노벨문학상 수상자 르 클레지오는 한강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이국(異國)의 작가도 진즉에 알아본 한강은 나는 좀 뒤늦게 앓고 있는 중이다.

견딜 수 없는 것을 견디며 읽게 만드는 힘!

내가 지금 읽음으로 앓고 있는 한강은 이렇다.

"어느 순간 내가 쓴 문장 자체가 너무 싫어져 한동안 글을 쓸 수 없었어요. 머리 속에 어떤 단어를 떠올려도 견딜 수 없었어요. 진실인 것 같지 않고...... 언어에 매력을 느껴 시작한 일인데, 그 언어가 왜 거꾸로 괴로움을 주는 건지"

한강은 그 고민은 아예 소설로 써서 부딪쳐 보기로 작정했단다.

그러나까 소설 <희랍어 시간>의 기원은 언어에 대한 작가 한강의 문학적 실어증에서 비롯됐다고 할 수 있겠다.

 

개인적으로 나는 목소리가 큰 사람을 싫어한다.

큰 목소리가 차지하고 있는 공간의 소란함을 나는 견뎌내기가 힘들다.

책 속의 그녀와 나는 그런 점에선 동일인물이다.

...... 말할 수 있었을 때, 그녀는 목소리가 작은 사람이었다.
그녀는 공간을 차지하는 것을 싫어했다. 누구나 꼭 자신의 몸의 부피만큼 물리적인 공간을 점유할 수 있지만, 목소리는 훨씬 넓게 퍼진다. 그녀는 자신의 존재를 넓게 퍼뜨리고 싶지 않았다 ......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살 수 있다면 나는 그쪽을 택하고 싶다.

독백같은 대화만으로도 의미가 전달되길 턱없이 소망한다.

...... 세 치의 혀와 목구멍에서 나오는 말들, 헐거운 말들, 미끄러지며 긋고 찌르는 말들, 쇳냄새가 나는 말들이 그녀의 입속에 가득 찼다. 조각난 면도날처럼 우수수 뱉어지기 전에, 막 뱉으려 하는 자신을 먼저 찔렀다 ......

말하지 못하는 사람의 설움을 생각하면 참 미안한 일인데

말함으로 인해 생기는 설움을 감당하기가 점점 힘들어진다.

말을 잃으면 글을 얻을까?

...... 말을 잃기 직전, 그녀는 어느 때보다 활달한 다변가였다. 어느때보다 오래 글을 쓰지 못했다. 자신의 목소리가 공간 속으로 퍼져나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던 것처럼, 자신이 쓴 문장이 침묵 속에서 일으키는 소란 역시 견디기 어려웠다 ......

점자책을 읽듯 한 줄 한 줄 손끝으로 집어가며 읽은 책. 

책을 읽는 내내 나는,

말을 잃는 것과 시력을 잃는 것 중 어느것이 더 힘들고 서러울까를 생각했다.

수천년 전에 이미 죽은 언어인 희랍어가 배우고 싶어졌다.

사장(死葬)된 침묵을 이해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그 침묵 속에 함께 사장되어 나는 눕고 싶었다.

 

가끔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나요
우리 몸에 눈꺼풀과 입술이 있다는 건.
그것들이 때로 밖에서 닫히거나,
안에서부터 단단히 걸어잠글 수 있다는 건.

 

닫을 수 있는 사람은,

걸어잠글 수 있는 사람은 편안하겠다.

Posted by Book끄-Book끄
찍고 끄적 끄적...2010. 4. 20. 06:27
5백년 왕궁의 뜰을 걷다.
시간 속에 처음부터 그 모습을 지켜내고 있는 것도
안스럽게 모습을 잃었던 것도
쓸쓸히 다시 모습 찾은 것도
흔적을 남기며 서 있다.
시간의 흔적을 느끼는 건
때론 숙연한 고요함이기도 하다.
비록 닳고 닳은 귀퉁이일지라도
그 처음의 시작,
태초를 생각케 하는 여지(餘址)



하늘과 처마가 서로 기댄 곳.
그 곳에 과거가 있을까?
모든 걸 기억하고 있을 것 같은 하늘 아래
모든 게 평등하고 아득해지는 시간.
지금의 것도
더 오래된 것도
더 이상 구별할 수 없는 거리.



기와지붕 끝.
불운을 지켜내는 묵묵한 삼장법사와
함께 호국의 기원하며 줄 선 무리들...
이들이 지켰던 건,
궐내 신성한 옥체였을까?
아니면 그보다 더 긴 역사였을까?
지킬 것 없는 헛헛한 눈에 이들의 위용은
한없이 부럽고 때론 긴 시간만큼 마디마디 아프다.



어쩌면 이 모든 시간도
굵은 쇳대 채워져 내내 감춰질지도...
누가 전해줄까?
빗방울 듣던 마디마디 저린 시간을...
물 속에 잠겨 오래오래  침묵하던 시간을...
Posted by Book끄-Book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