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끄적 끄적...2013. 8. 21. 08:47

<낙원을 그린 화가 고갱>

일시 : 2013.06.14. ~ 2013.09.29.

장소 : 서울시립미술관

주최 : 서울시립미술관, 한국일보

주관 : 한국일보문화사업단

 

지난 봄에 예술의 전당에서 고흐전을 봤을 때

한 옆에 6월에 서울시립미술관에서 고갱전이 열릴거란 포스터를 확인했다.

고흐와 고갱.

꼭 잊지 말고 챙겨봐야지 생각했다.

일요일의 서울시립미술관.

여유있게 관람하고 싶어 10시 개관시간보다 일찍 도착했는데 놀랐다. 

이미 기다리고 있는 관람객이 꽤 많아서...

지난번 고흐전에서도 놀랐었는데 우리나라 부모들의 교육열(?)은 참 대단하다.

꼭 유치원 야외수업장에 온 느낌.

전시장에서 꼬마녀석들을 보면 늘 신선하고 부럽다.

이해를 하든, 못하든 어릴 때부터 이런 문화를 접할 수 있다는 거.

이 녀석들은 아직 실감하지 못한테지만 확실히 축복이다.

 

이번 전시는 고갱의 3대 걸작을 비롯해서 총 60여점의 작품이 전시됐다.

늘 고갱의 사진과 작품을 보면서 이국적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번 전시회를 보면서 그 이유를 충분히 알았다.

출생과 성장과정, 화가로서의 전향, 이 모든 게 고갱에게 이국을 꿈꾸게 했다는 걸.

고갱은 고흐와는 또 다른 의미로 불행한 예술가다.

그리고 후대에는 고흐에게 밀려서 상대적으로 그의 불행은 가려지고 흐려졌다.

어쩌면 고갱에게 있어 고흐는 사후 트라우마가 아닐까?

두 사람은 지금 서로 어떤 모습으로 재회하고 있을까...

 

 

가난, 매독, 다리 부상, 전시 실패, 질병, 소송, 실연, 자식의 죽음, 자살 시도...

고갱의 삶도 고흐의 삶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숨가쁘다.

타이티섬에서의 원주민과의 삶.

그 세게가 정말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고갱의 낙원이었을까?

고갱은 가족을 버리고 열대지방으로 도망갔고

그 댓가로 가난과 불행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심장바미로 홀로 쓸쓸히 사망했다.

고갱에게는...

더이상 돌아갈 곳이, 도망칠 곳이 없었다.

나는 고갱의 색채 속에서 숨겨져있는 어쩔 수 없는 깊은 슬픔.

그걸 선명하게 목격했다.

아.팠.다.

고갱의 3대 걸작을 한번에 본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데

나는 오히려 이 세 작품보다는 다른 작품들이 더 맘에 담겼다.

이상했던 건,,

이 세 작품 모두에서 나는 "살의(殺意)"를 느꼈다.

혹시 내 심리상태의 투영이었을까?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139.1 x 374.6 cm)를 대면하면서는 세 번 압도당했다.

(운이 좋게도 꽤 오랜 시간 이 작품을 혼자 독식할 수 있었다)

첫번째는 엄청난 규모에.  

두번째는 색채에

그리고 마지막에는 제목이 주는 존재감에 압도당했다.

그림을 마주하기가... 버거웠다.

(결국 눈싸움에서 처절하게 패배하고 도망쳤다)

그런데 나는 왜  저기 뒤쪽 청록의 세계가 더 눈에 들어왔을까?

마치 사후의 세계같던 그곳이...

 

<여인과 백마>

<세 명의 타이티인>

<타이티의 여인들>

<파아 이헤이헤(아름다움을 위하여), 타이티의 목가>

<소녀의 초상>, <안녕하세요 고갱씨>

 

맨 위의 그림 <여인과 백마>를 제외하고 모두 표정이 암울하다.

고갱이 그린 "낙원" 속 사람들은 왜 한결같이 저런 표정이어야 했을까?

혹시 고갱이 찾은 낙원은 "낙원"이 아니었던건가!

어쩌면 그랬을지도....

 

"나는 고요함을 찾아, 그리고 문명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떠난다.

 나는 단순한, 아주 단순한 예술을 하고 싶다"

 

고갱은 도대체 어디로, 얼마나 멀리 떠나버렸던 걸까?

미술관을 나오면서 나는 고갱의 화두를 숙제처럼 받아 안았다.

 

<숲 속의 작은 터, clearing>

<창가의 꽃병>

 

내 마음을 가장 많이 잡았던 그림은 이 두 작품.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고갱풍의 그림은 아니지만

이 정물화가 풍기는 따스함과 청량함은 지금도 내내 잊혀지지 않는다.

특히 "숲 속의 작은 터"는 한글 제목보다 "clearing"이라는 원제의 느낌 그대로다.

그림 앞에 한참을 서있었다.

숲의 냄새가 나는 것 같고, 흙의 향이 나는 것 같고, 구름이 실제로 움직임이는 것 같다.

급기야 나는 저 작은 터에 오롯이 앉아있는 사람을 무작정 나라고 믿어버리기로 했다.

"창가의 꽃병"은 테이블보의 구김에서 삶의 냄새가 맡아졌다.

작은 정물화가 이렇게까지 인간적일 수 있다는 걸 고갱이 내게 보여줬다.

어쩌면 이런게 고갱이 말한 "단순한 예술"이 아닐까?

고갱의 낙원을 나는 이 작은 정물화에서 읽었다.

 

전시장을 들어가면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고흐의 문구.

"고갱은 멀리서 온 사람이고 또 멀리 갈 사람이다!"

고흐는 고갱의 삶이 부러웠었던 모양이다.

고갱전을 보면서 나는 내내 고흐의 질투라는 말도 안되는 환상에 사로집혔다.

그건 고흐를 향한 고갱의 질투일수도 있고...

그게 비록 이해되지 못하는 일방적인 질투일지라도

그게 있다면 삶은 살아질 수 있는거다.

질투가 끝나는 순간,

고흐와 고갱의 예술도 끝났다.

고갱과 고흐는 그렇게 스스로의 결말을 선택했다.

삶은 두 사람을 그렇게 묶었다.

적어도 내게 있어 고갱과 고흐는 동일하다.

 

"Vivre c'est chanter et aimer"

(삶이란, 노래하고 사랑하는 것이다!) 

Posted by Book끄-Book끄
읽고 끄적 끄적...2010. 1. 8. 06:14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
내게 작가 최영미를 알게 한 최초의 책이자 그녀의 첫 책.
20대에 이 시집을 소유했을 땐
서른이 요원했기에 이해하지 못할까봐 건성건성 들춰봤었다.
(사실 그때는 내게 서른이란 시간은 결고 오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턱없이 어이없는 자신만만함이었음을 그때 조금이라도 알았었더라면...)
"서른"이 지나 내 잔치가 끝났을 때 다시 조목조목 읽어보리라 혼자 다짐했던 책.
그리고 오랫동안 나는 그 책을 외면했다.
지금은...
이미 "서른"을 훌쩍 넘겨버린 나는
이 시집의 제목만으로 덜컥 겁이 나 감히 책 장을 펼쳐보지도 못한다.
마치 뭉턱 시간을 통째로 도려낸 것 같은 느낌.
그 느낌은 실제로 살점이 떨어져 나간 것처럼 아리고 처절하다.



<길을 잃어야 진짜 여행이다>
제목만 들었을 땐 여행집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책 표지에 산문집이라는 자신의 소속이 정확히 밝혀져 있다.
최영미의 단어 선택은 정직했다.
1부 "아름다움에의 망명"은 그녀가 그동안 국내의 신문과 잡지 들에 기고한 여행과 관련된 글들을 모은 부분이다.
2부 "예술가의 초상"은  문학, 미술, 영화 등 문화 전반에 대한 그녀의 짧은 사색과
개인적인 경험들이 오롯이 담겨있다.
1부의 글조차도 여행지를 소개한다는 느낌보다
어떤 특정한 그림이나 조작에 일일이 말을 걸고 있다는 느낌...
그것도 조근조근한 독백으로....
여행지를 담은 그 흔한 사진조차도 이 책에센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시를 쓰고 소설을 쓰는 최영미가 아나라
서울대 미대와 홍익대 미술대학원을 거친 미술학자로서의 최영미를 만날 수 있다.



마흔을 훌쩍 넘긴 한 여자가 말한다.
"여행과 스포츠는 내 삶이 다하도록 나와 함께 할 정열이다"
지독히 그리고 강력히 그녀가 부러워 야생의 짐승처럼 물어뜯고 싶어진다.
진심으로 나는 그러고 싶었다.
여행지에서 편하고 손발톱을 깎으며 오래 밀린 일기를 쓰고 싶었다.
호들갑스럽지 않게 유명 여행지를 눈도장찍듯 훓고 지나가는 게 아니라
며칠이라도 감정이 바닥날 때까지 한 곳에 정착하듯 머물며 일상을 보낼 수 있기를...
아직도 계속 건축중인 가우디 성당 앞에서, 
미켈란젤로의 가죽을 들고 있는 섬뜩한 장면이 숨어있는 "최후의 심판" 앞에서
나는 졸음처럼 밀려오는 시간들을 오래동안 보내고 싶었다.
그 꿈은 요원하고 늘 가파라 상상만으로도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몇 가지 표현과 글들이 눈에 들어와 담아본다.
특별히 공감했던 부분들과 지극히 부러웠던 부분들.
문득 숨쉬며 살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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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여자들은 프랑스 여자들보다 화장이 진하다. 유럽의 남쪽으로 내려갈수록 여인네들으 얼굴이 울긋불긋해진다. 내 경험을 일반화하지면, 젊은 여성에게 두터운 화장을 강요하는 사회일수록 여성의 지위가 낮다.

The ugly can be beautiful, but the pretty never - 고갱
예술을 알면, 문학을 좋아하면 인생이 복잡해진다. 좋게 말해 인생이 풍요로워진다. 보통 사람들은 밖에 보이는 것만 보고 이렇다 저렇다 미추를 논하는데, 예술가들은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다른 각도에서 보는 사람들이거든, 자신이 남다른 생을 살아야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들이 눈에 들어오는 법이다. 그래서 위대한 인생이 위대한 예술을 낳는다는, 예술가는 모두 불행하다는 신호가 성립하지.

버락 오바마, 그는 인종이 아니라 인간에 호소했다. 그는 선동하지 않고 설득했다. 자신감이 그의 성공의 열쇠였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처럼 대단한 자신감의 이유를 묻는 기자에게 그는 이렇게 답했다. 어려서부터 여러 대륙, 여러 문화에서 자라며 사람들과 소통하는 법을 배웠노라고.

나는 이 모든 처음, 최초들을 의심한다.

어쩐지 이건 너무 만들어진 장치라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진짜 상처는 드러나지 않는 법이다. 그리고 너무 고통스러우면 눈물도 마른다. 그 눈물을 억지로 짜내려는 모든 시도는 그래서 결국 어설픈 신파로 전락할 따름이다.
그날의 광주에 대한 지식인의 해묵은 "부채의식"에서 태어난 영화 <꽃잎>. 장선우 감독이 과거를 들여다보는 창에는 시종일관 감상이라는 필터가 부옇게 끼어 있다. 신파의 본질은 자기 연민이다. 일종의 정신적 딸딸이에 다름 아니다. 감상과 자기 연민의 안개를 거도 광주는 언제 신파에서 구출될 것인가? "우리"는 언제 눈물을 그치고 현실을 직시할 것이가? 이는 장선우뿐 아니라 우리 모두의 화두이다. 서둘러 고아주를 형상화하려는 허튼 기도보다는 지금은 차라리 광주를 손대지 않고 그냥 놔두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시사회장을 떠나며 나는 다짐했다. 싸구려로 위로받느니 차라리 냉정한 무관심을 택하겠노라고.   - 장선우 감독의 영화 <꽃잎>을 시사회를 본 후 느낌을 적은 글

시는 그것을 쓴 사람이 아니라 시를 필요로 하는 사람의 것이다.

세계는 인간 없이 시작되엇꼬, 또 인간 없이 끝날 것이다. - 레비스트로스(프랑스 인류학자이며 사상가)

사랑받지못했으므로 청춘을 잃은 사람들, 그래서 젊은 적이 없기에 늙을 수도 없는 사람들에게 이 책이 위로가 되면 좋겠다. - 잉게브르크 바흐만의 산문집 <삼십세>

예술에 재능이 없는 사람이 예술에 집착하는 것만큼 무서운 일은 없다네 - 에밀 졸라의 이 말에 깊은 상처를 받아 그후로 죽을 때까지 세상과 인간을 등지며 산 화가 세잔
Posted by Book끄-Book끄
읽고 끄적 끄적...2009. 10. 15. 06:41

"여행" 같은 책이 있다.
누구도 동반하지 않고 떠나는
혼자만의 짧은 여행같은 그런 책.



"요시모토 바나나"
열대 지방에서만 피는 붉은 바나나 꽃을 너무나 좋아해서
"바나나"라는 pan name을 만든 그녀
그리고 느긋하게 몽환적이며
부도덕적이게도 아름다운(?) 소설
무지개



눈부신 햇살과 새하얀 모래,
투명한 바다와 레몬색 상어
그리고 아내가 있는 한 남자에 대해
처음부터 하나하나 천천히
그러나 집요하게 생각하는
한 여자의 감정의 기록.
타이티섬와 동경(東京)
그 생경한 국적(?) 안에서 길을 찾아가는
그녀의 감성과 내면의 언어들.



고갱을 생각하게 하는 화려한 색채의 그림들.
그런데 어쩐지 그림 속 그녀들의 표정과 입매는
사뭇 비밀스럽다.
그럼에도 감추고 있는 것을 너무나 강렬하게 말하고 싶어하는 욕망의 눈빛
문득, 그 이야기를 전부 들어주고 싶어진다...



뜨거운 이국의 햇살 아래
차가운 열정을 만나는 느낌이라고 할까?
다 읽고 나면 나른해지는 자신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이 두 사람,
불륜일지라도 왠지 인정해주고 싶어진다.
참 위험한 마음의 고백...



그런 사람이 있다.
죽어가는 식물에게 선명한 생명의 색을 돌려주고
무관심으로 거칠어진 동물의 털에 반짝반짝 윤기를 주는 사람
그리고 그런 작은 생기들로
은밀하게 대화를 주고 받는 사람.
죽어가는 생명들에게 조금씩 조금씩, 그러나 눈치 챌 수 있게 생명을 불어넣는 사람
정말 그럴수도 있겠구나 인정하게 된다.
이런 방식으로 대화를 나눌 수도 있고
이런 방식으로 사랑을 키워갈 수도 있겠구나...
그래서 결국 단념을 확신하기 위한 떠난 여행에서
오히려 더 큰 확신을 가지고 다시 돌아가는 사람도 있겠구나.
그리고 돌아오길 바라는 기다리는 마음도 있겠구나...



불륜을 미화하려는 동의의 표현은 아니지만
이 소설의 결말이 내겐 다행스럽고도 동시에 위험하게 다가온다.
그래도 여행 속에서 얻은 마음이기에
조금은 이해한다고 말해주고 싶다.
이 책,
끈질기게 몽환적이다.
다 읽어버린 지금쯤은
꿈에서 깨어나야 하는건가?

이렇게 차갑게 관능적일수도 있구나...
열대의 뜨거운 햇빛,
반짝이는 에메랄드 물빛 속에서
내 몸 구석구석도 레몬빛 관능으로 느리게 헤엄치고 싶다.
파라다이스를 향한 차가운 열정으로...

Posted by Book끄-Book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