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끄적 끄적...2017. 9. 7. 15:17

 

내가 이런 말을 했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읽고 있으면

동물탈을 쓰고 우물 속에 웅크리고 앉아 재즈를 들으면서 맥주를 마셔야 할 것만 같다고.

그리고 읽고 난 뒤에는 뭔가 완결되지 못한 찜찜함까지...

 

그런데 이 소설은 어딘지 좀 달랐다.

뭐랄까, 예술의 완벽한 조합이라고 할까!'

회화과 음악 그리고 문학의 완벽한 삼위일체를 보는 느낌이랄까?

게다가 비엔나 여행을 앞둔 내게는 이 책의 내용 일부에 눈이 번쩍 뜨이기도 했다. 

이데와(Ieda)와 메타포(metaphor)의 현현(顯現)이라니...

그것도 그림을 빌려서...

역시나 무라카미 하루키의 세계다.

개인적으론 지금까지 읽은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 중에서 가장 흥미로웠다

권 당 600쪽이 넘는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순식간에 읽어 내려갔다.

나 역시 그런 생각을 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가 전부가 아닐거란 생각.

시간도 공간도 다르지만 "나"를 공유하는 또 다른 세상.

내가 인식하든, 인식하지 못하든 그런 세계가 공존하고 있다고 믿는다.

그렇지 않다면 내 삶도 순순히 설명될 수 없으니까...

그러고보니 꼭 IQ84 같네 ^^

 

The other side of the moon

혹은

Two moons

Posted by Book끄-Book끄
읽고 끄적 끄적...2014. 11. 14. 07:58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작 소설집을 읽었다.

<여자 없는 남자들>

무라카미 하루키는 나랑 참 안맞는 작가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신작이 나오면 어찌됐든 매번 읽게는 되는것 같다.

개인적으로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은

단편도 장편같고, 장편도 단편같다.

현실도 아니고 공상도 아니고, 현실과 공상 그 어디쯤의 세상.

여자도 아니고 남자도 아니고, 여자와 남자 그 중간쯤의 존재.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아닌 블랙홀같은 시간.

늘 그런 느낌이다.

그런데 나는 왜 매변 그의 책을 읽는걸까?

뭐가 됐든 은근하게 풍기는 몽환적인 분위기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술술 잘 읽히는 것도 한 몫을 할테고.

 

 

드라이브 마이 카
예스터데이
독립기관 
셰에라자드 
기노
사랑하는 잠자 
여자 없는 남자들

 

총 일곱 편의 단편은 지극히 하루키스러웠다.

"익명성"이 주는 신비함과 자유분방함.

모든 작품 속에서 역시나 그게 느껴졌다.

나는 가끔 일본이라는 나라가 비현실이라는 가상공간위에 세워진건 아닌가 의심한다.

정서적인 공감지수가 낮아서일까?

특히나 성적인 자유분방함은 도무지 현실같지 않다.

(일본이라는 나라가 정말 이런가????)

부럽다는 의미는 아니고 사실 읽다보면 많이 거북스럽다.

그걸 아무렇게 않게 일상처럼 그려내는 하루키가 무섭다는 생각도 들고...

 

일본이라는 나라는 정말 모르겠다.

그리고 하루키라는 작가도 정말 모르겠다.

아마도 그를 완벽히 이해하려면

양가죽을 뒤집어쓰고 우물에 쭈그려앉아 맥주를 마셔야 만가능할 것 같다.

^^

Posted by Book끄-Book끄
읽고 끄적 끄적...2013. 7. 17. 08:18

신간이 출판될때마다 꼭 챙겨서 읽는 편이지만

솔직히 나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매니아는 아니다.

어쩌다보니 우리나라에 출판된 그의 책을 다 읽기는 했지만

그건 어쩌면 일종의 습관같은 거일수도 있다.

그의 책을 읽고 있으면

하얀 양떼 가죽을 뒤집어 쓰고 우물 속에 쪼그리고 앉아

적당한 간격으로 맥주를 들이키면서 서서히 몽롱한 상태로 빠지는 느낌이랄까?

거기에 한 가지를 취가하자면 장어덮밥 정도가 있을지도 모르겠고...

(그런데 맥주도, 장어도 내 취향은 아니라서...)

이런 이야기 주변에 책 좀 읽는 사람들에게 하면 막 웃는다.

어쩜 그렇게 딱 무라카미 하루키라고!

게다가 이 책은 시작도 하기 전에 두 가지가 무시무시했다.

일단 엄청나게 긴 제목이 무시무시했고

어떻게든 이 책의 판권을 차지하기 위한 출판사의 사투도 무시무시했다.

게다가 출판 하루 만에 전국의 서점가를 완저히 휩쓸어버린 것도 것도 무시무시했다.

이건 정말이지 근래에 보기 드문 쓰나미였다.

아! 그런데 민음사 너무 급했나보다.

오타가 너무 많다. ㅠ.ㅠ

적어도 다섯 개 정도 발견한 것 같다.

(양억관의 번역은 확실히 좋았고!)

 

 

레드, 블루, 화이트, 블랙 색채 가득한 네 명의 고교 동창생과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

나고야를 떠나 홀로 도코로 진한간 다자키는

영문도 모른 채 대학교 2학년 때

흐트러짐 없이 조화롭고 친밀한 이들 그룹으로부터 그야말로 가차없이 추방당힌다.

"스스로에게 물어봐!"

모호하고 잔인한 말과 함께!

16년이라는 시간이 지나  36살이 된 다자키는 타의에 의한 자의(?)로 이들 한 명씩 찾아가 당시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들에게서 듣게 된 이야기는 이렇다.

그가 추방된 건 시로를 강간해서라고.

시로가 그 상황을 너무도 상세하게 고백해 믿을 수밖에 없었다고.

게다가 그에게 어이없는 누명(?)을 씌운 시로는 몇 년 전에 교살된 채로 삼일만에 발견됐단다.

급기야 일본을 떠나 필란드에 살고 있는 예리까지 찾아간다.

그런데 그녀는 처음부터 시로의 말을 믿지 않았었다고 말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추방시킨 이유는

"내가 유즈를 지켜야만 했기 때문이야.

 그 애가 정신적으로 그만큼 심각한 문제를 끌어안고 있었어.

 그만큼 절박한 지점까지 가 버렸어."

순간, 감이 왔다.

이들 모두가 사실은 공통체의 와해를 간절히 바랬다는 걸.

일종의 희생자가 필요했던 걱다.

...... 고등학교 시절, 다섯 명은 빈틈 하나 없이 거의 완벽한 조화를 이루었다. 그들은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이해했다. 구성원 모두가 거기에서 깊은 행복을 맛보았다. 그러나 그런 최고의 행복이 영원히 계속될 수는 없다. 낙원은 언젠가는 사라지는 것이다. 사람은 제각기 다른 속도로 성장해 가고, 나아가는 방향도 다르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피할 수 없는 위화감이 생겨났을 것이다. 미묘한 균열도 나타났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이윽고 미묘한이란 말로는 처리할 수 없는 뭔가가 되었을 것임에 분명하다.

시로의 정신은 아마도 그런 다가올 미래의 압박을 견뎌내지 못했을 것이다.

시로는 아마도 그런 상황에서 도망치고 싶었던 게 아닐까. 끊임없이 감정 조절을 요구하는 긴밀한 인간관계를 더는 버텨 낼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 스스로의 힘으로는 그 테두리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녀는 그 정도로 강인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시로는 쓰쿠루를 배신자로 만들어 버렸다. 다자키 쓰쿠루라면 그런 입장에 처한다 해도 나름대로 잘 살아갈 수 있을 거라는 직관이 시로에게 있었을 것이다 ......

이 부분을 읽어 나가면서,

나는 이 책을 좋아하기로 작정했다.

완벽하고 절실하게 공감했기 때문이다.

이건 좀 위험한 발언이긴한데,

나란 인간은 가족이라는 공통체에서도 자발적으로 탈락하고픈 욕망이 강하기 때문에!

다자키와 나와의 차이점은,

존재를 부정당한 사람과 존재를 부정하는 사람의 차이, 거기에 있다.

 

이쯤되면 이제 말해도 되겠다.

지금껏 읽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중에서 가장 좋았노라고...

책의 앞, 혹은 뒤에 작가의 변이나 작품 해설, 번역가의 소감 따위 없이

아주 냉정하고 깔끔하게 책장을 덮게 만든 것도 완벽하다.

그런데 한 가지는 영 아쉽다.

그레이 하이다의 존재가 정말 어이없이 실종돼 버렸다는 거.

실종된 채로 끝났다는 거.

그러다보니 죽음의 승계를 받았다는 의문의 피아니스트 이야기조차 신비감이 희미해져버렸다.

(그레이라는 색깔이 품고 있는 희미함에서 비롯된, 완벽히 의도된 실종이었을까???)

 

읽을수록 알겠다.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인 그가

굳이 어른아이의 성장소설을 쓴 의도를!

...... 사람의 마음과 사람의 마음은 조화만으로 이어진 것이 아니다.오히려 상처와 상처로 깊이 연결된 것이다. 아픔과 아픔으로 나약함과 나약함으로 이어진다. 비통한 절규를 내포하지 않은 고요는 없으며 땅 위에 피 흘리지 않는 용서는 없고, 가슴 아픈 상실을 통과하지 않는 수용은 없다. 그것이 진정한 조화의 근저에 있는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

이번엔 내게 강력한 펀치를, 그것도 아주 제대로 날렸다.

젠장!

온 몸이 얼얼하다.

 

인생은 길고 때로는 가혹하다.

희생자가 필요할 경우도 있다.

누군가가 그 역할을 해야만 한다.

Posted by Book끄-Book끄
읽고 끄적 끄적...2010. 10. 27. 05:56
제목만 봤을 때는 무라카미 하루키에 대한 헌사같은 책이라고 생각했다.
글을 쓴 저자는 현재 메이지 대학교 문화부 교수 사이토 다카시.
소개글에 말의 권위자라고 나와 있는데 솔직히 어떤 의미의 표현인지는 잘 모르겠다.
좀 거하게 말하자면,
하루키의 소설 뿐만 아니라 일본의 현대문학 속에 등장하는
사랑에 대한 느낌과 그 언어적 표현에 대한 통찰이다.
참 묘한 건 객관과 주관 그 중간의 어디쯤에서 적당히 감성적으로 쓰여진 글이다.
살짝 시니컬하기도 하고 관조적이기도 하면서 때론 열정적이다.
사랑한다면, 사랑하고 싶다면, 사랑했다면,
일본 소설 속 사랑 언어에 주목하라...
딱히 그러고 싶진 않았는데 읽다보면 그 표현들에 주목하게 된다. 이상하지?



part 1 쿨한 사랑 - 무라카미 하루키
<상실의 시대>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1973년의 핀볼>

part 2 나쁜 사랑
<금각사> 미시마 유키오
<산시로> 나츠메 소오세키
<겐지 이야기> 무라사키 시키부

part 3 보통 사랑
<지금 만나러 갑니다> 이치카와 다쿠지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 카타야마 쿄이치
<선생님의 가방> 가와카미 히로미
<전차남> 나카노 히토리


기억하기 딱 좋은 편수인 10편의 일본 소설이 나온다.
물론 이야기의 줄거리를 무시할 순 없지만 
여기선 각각의 소설에 나오는 어떤 부분들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자유롭고 소박하게 쓰고 있다.
나는 이 책들을 읽으면서도 이런 부분들을 놓쳤었구나 새삼 성긴 책읽기에 웃음이 나기도 했다.
때론 이런 책들이 묘하게 가슴에 담길 때가 있다.
고민하지 않고 소풍처럼 읽을 수 있는 적당히 평화롭고 한가한 책이...



가끔 생각하게 된다.
"사랑"이라는 건 말일까? 행동일까? 감정일까?
이 모든 것이라고 대답하겠지만 어쩐지 그 시작은 말(고백)이 아닐까?
표현되어지든, 표현되어지지 못하든.

그리고 나는 사랑을 하고 있었다.
그 사랑은 몹시 복잡한 곳으로 나를 끌어들이고 있었다.
주위의 풍경에 마음을 쓸 여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고백을 세상을 다르게 보고, 다르게 느끼게 한다.
극도의 무관심이든, 극도의 관심이든
고백의 순간 이제 더이상 처음과 같을 수는 없게 되는 것.

나의 외로움이 너의 외로움이 되는 것,
망연히 벽에 얼굴을 묻고 눈물을 흘려야 했던 것, 왜 너를 사랑했냐고,
왜 나를 사랑했냐고 따지고 싶어도 따질 수 없는 것,
한 번이라도 더 보고 헤어질 것이라고 후회해도 이미 엎질러진 물이라는 것,
그것을 입 밖에 내밀 수 없었던 사랑이라는 것.

너와 나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것.
그래서 그 경계의 끝에서 비록 누군가 너덜거리게 된데도
사랑이 두려운 남자도 여자도
모두 운명같은 사랑을 꿈꾼다.
운,명.같.은.사.랑.
얼마나 대책없는 단어끼리의 조합인가!

하도 사랑, 사랑하기에
그것이 뭐가 그렇게 대단하기에 난리냐 싶어
사랑을 해봤지만 그 감정 별 것 아니던데,
라고 말하면서도 사랑 없이 못 사는 것이 사람인지라,
누군가 사랑, 그것은 말이야, 서두를 떼기만 해도 또다시 두근거린다.


아닌 척 하면서도 그만,
이 문장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사랑, 참...
또 다시 모질구나... 싶어서...
Posted by Book끄-Book끄
읽고 끄적 끄적...2010. 8. 5. 06:32
7월 28일에 드디어 <1Q84> book 3 가 출판됐다.
선주문 예약판매만으로도 베스트셀러에 진입했다고 했던가?
우리나라에 무라카미 하루키의 골수팬들은 참 많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그러면서도 무라카미 하루키와 무라카미 류가 같은 사람인 줄 알고 있는 사람도 많다는 사실 ^^
무라카미 하루키는 내게는 좀 늦게 글발(?)이 붙는 편이다.
좋아하는 작가에 포함되어 있지는 않지만 새 책이 출판되면
외면하지는 않고 읽게 되는 그런 작가다.
그래도 어쨌든 일가를 이룬 작가임에는 틀림없다.
늘 생각하는 건데,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을 읽고 있으면 그런 느낌이다.
양털을 뒤집어 쓰고 우물에 웅크리고 앉아 맥주를 마시는 기분.
자발적인 시원한 고립이긴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많이 불편한 느낌!



노란색의 커다란 달, 그리고 초록색의 작은 달
두 개의 달의 뜨는 1Q84의 세계.
책의 구절처럼 이 세계에서 모든 건 암시와 수수께끼로 혹은 누락되고 변형된 형태로만 말해야 한다.
일부러 정리하지 않고 의도적으로 흩어트린 이야기.
책 속의 인물들조차도 그 사실을 확실히 알고 있다.
눈을 뜨고 있는데 아무것도 안 보고 있는 상태.
"정말 기묘한 세계로군. 어디까지 가설이고 어디서부터 현실인지 그 경계가 갈수록 모호해져."
"이건 원래 내가 속한 세계가 아니야."


<1Q84> book 1과 book 2를 읽으면서는 큰 느낌이 없었다.
혼란스러웠고 솔직히 말하면 이게 다 뭔가 싶기도 했다.
그런데 book 3를 읽는 동안은 확실히 달랐다.
아주 쉽고 편안하게 집중해면서 읽을 수 있었다.
뭐지? 나도 달이 두 개 뜨는 세상에 들어와 버린 건가?
이야기는 여전히 인물을 중심으로 흩어져 있지만 통일성은 있다.
"선구"의 리더를 살해하고 숨어있는 아모마메는 그 살인의 밤에 수태를 한다.
남자와의 접촉없이 수태한 그녀는 그 아이가 20년 전부터 만나지 못한 덴고의 아이임을 확신한다.
(이 부분 무지 성경적이지 않나? 수태고지까지는 아니지만...)
교단은 리더의 사망으로 새로운 후계자이자 '목소리를 듣는 자'가 필요해졌다.
그리고 그들은 아오마메, 덴고 그리고 뱃 속의 작은 생명 모두를 모조리 손에 넣으려 하고 있다.
'목소리를 듣는' 새로운 시스템으로서.
선구측이 제안하는 협상을 거부한 아오마메는 필사적으로 다짐한다.
덴고를 만나 둘이 함께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작은 것을 지키겠노라고...



그 둘은 아오마메의 바람처럼 만나게 될까?
우여곡절을 겪긴 하지만 결국 그들은 만난다.
그리고 아오마메가 1Q84의 세계로 들어왔던 처음 복장 그대로
이번에는 수도고속도로 비상계단을 역으로 통과함으로써
덴고와 함께 달이 하나 뜨는 세계로 들어간다.
여기서 중요한 건,
"돌아간다"는 게 아니라 "들어간다"는 사실이다.

...... 이곳이 어떤 세계인지, 아직 판명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것이 어떤 구조를 가진 세계이건 나는 이곳에 머물 것이다. 아오마메는 그렇게 생각한다. 우리는 이곳에 머물 것이다. 이 세계에는 아마도 이 세계 나름의 위협이 있고, 위험이 숨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세계 나름의 수많은 수수께끼와 모순으로 가득 차 있을 것이다.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는 수많은 어두운 길을 우리는 앞으로 수없이 더듬어가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래도 좋다. 괜찮다. 기꺼이 그것을 받아들이자. 나는 이곳에서 이제 어디로도 가지 않는다. 어떤 일이 있어도, 우리는 단 하나뿐인 달을 가진 이 세계에 발을 딛고 머무는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말하고 싶었던 건 이것이었나?
아마 그래서 읽은 이들의 의견이 분분한건지도 모르겠다.
역시 무라카미 하루키다 라는 사람과 결말에 실망했다는 사람이 팽팽하다.
사실 약간 교과서적이고 교훈적인(?) 결말이긴 하지만
나는 나쁘지 않았다.
이야기를 쫒아가다 보면 결국 이렇게 되겠구나 하는 걸 감지할 수 있기 때문에
어쨌든 제 갈 길을 갔다고 생각된다.
단지 해결(?)되지 못하고 죽어간 인물들은 좀 안스럽긴 하다.
아마도 이야기가 여기서 끝이 난 것 같지는 않다.
남겨진 암시와 수수께끼들이 아직 버젓히 존재하고 있기에...
그리고 리틀 피플 6명에 의해 지금 한창 만들어지고 있는 공기 번데기도 있기에...
여기가 "끝~~!"이라며 종지부를 찍어도 딱히 상관없긴 하지만
나는 아무래도 book 4가 계속 나올 것 같다.
어쩌면 그 이상의 긴 이야기가 나올게 될지도...
Posted by Book끄-Book끄
읽고 끄적 끄적...2010. 2. 1. 06:19
19주째 1위에 있었던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1Q84>를 끌어내린 소설이란다.
처음 들어보는 작가 이름.
작가를 찾아봤더니 2006년에 소설집을 출판했었다.
<그 겨울의 우화>
신경숙의 아류작인가 하면서 읽었던 기억이 어렴풋하게 떠오른다.
내용은.... 전혀 기억에 없다.
어쨌든 지금 현재진행형의 베스트셀러 소설이라니 한번 읽어보기로 했다.
비운의 삶을 살다간 조선의 마지막 황녀에 대한 이야기.
소설 <덕혜옹주>
소설 출간 한달 만에 무려 9만여부가 판매됬다고 한다.
55세의 작가 권비영 스스로도 자신의 작품이 베스트셀러에 오른 것에
어리둥절해하고 놀라워하고 있는 중이란 기사를 봤다.
뭐지???



1912년 5월 25일 고종의 막내딸로 덕수궁에서 출생
1925년 3월 일본 학습원으로 강제 유학과 어린 나이의 조발성 치매 진단
1831년 5월 대마도백작 다케유키와 강제 정략결혼
1956년 8월 외동딸(정혜)의 자살, 계속되는 마츠자와 정신병동 감금생활과 조국의 외면
1962년 1월 37년 동안의 유랑생활 끝에 대한민국 귀환



덕혜옹주...
분명 실존의 인물인데 이 소설은 그녀를 환영의 인물로 만들어버렸다.
책임감 없는 소설의 힘에 화가 났다.
또 그 소설이 베스트셀러의 기록을 세운다니 더 화가 났다.
기사에는 쓰여 있었다.
" ...... 기구한 삶을 살다간 덕혜옹주를 다룬 소설이 최근 인기를 얻고 있는데 바로 "나라 잃은 설움이 바로 이런 것이구나"하는 것을 공감할 수 있다....."
그러나 절대 나는 공감할 수 없었다.
마지막 권위와 위엄을 남겨둬야 했을 그녀를 오히려 시장판에 내돌린 느낌.
단지 사람들에게 덕혜옹주를 일깨워주는 게 목적이었다면
차라리 그것뿐이라면 박수를 쳐줄 수도 있었다.
이 책은 단지 덕혜옹주에 대한 에피소드에 불과할 뿐.
이야기의 짜임은 엉성하며
등장하는 인물들은 그 개연성에도 불구하고 모두 죽어있다.
홀로 헛헛한 웃음을 흘리다...



일본으로 유학 떠나기 전 덕혜옹주를 찍은 사진.
다부지고 똑똑해 보인다.
그리고 그 눈빛이 어린아이같지 않다.
이 책에서 유일하게 나를 감동시켰던 건 바로 이 사진 뿐이었다.
37년동안의 유랑생활 끝에 대한제국에 돌아온 그녀는
(그녀가 돌아왔을 당시는 이미 대한제국이 아니었겠지만...)
1989년에 숨을 거둘 때까지 창덕궁에 있는 낙선재 권역,
정확하게는 낙선재 바로 옆 수강재에서 말을 잃고 지냈다고 한다.
"주로 수강재에 기거하셨고, 봄날에 이렇게 따뜻할 때 나오면 이 툇마루에 앉으셔서 멍하니 계신 것을 자주 봤습니다."
말을 못하고 정신이 오락가락했던 그녀의 삶은
이미 피폐한 황무지 그 자체였으리라.
올해가 경술국치 100년 되는 해라는데
그녀 덕혜옹주는 자신의 기구한 삶이 이런 식으로 재조명 되기를 바랬을까?
그렇게 거창한 사명감을 가지고 쓰기를 작정했다면
좀 제대로 치열하게 써 주시지...
이 책을 출판한 다산책방의 각종 이벤트의 힘도 그저 놀라울 뿐이다.
출판은 어쩌면 단지 사업일 뿐인지도...
Posted by Book끄-Book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