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끄적 끄적...2010. 11. 8. 06:33
2009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루마니아 작가 헤르타 뮐러.
얼마전에 <숨그네>를 읽고 얼마나 매혹당했던지...
너무 늦게 그녀의 글을 알게 된 게 맘이 상할만큼 너무나 아름다웠다.
한 줄, 한 줄 내려쓰면 그대로 시가 되는 그녀의 소설은
마치 그림을 보는 것 같고 시를 읽는 것 같다.
화려한 미사여구 없이도 그렇게 보석같은 글을 쓸 수 있다는 게
신비에 가까운 놀라움이자 경이로움이었다.
소설 <저지대>는 모두 19 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1982년 처음 출간될 당시에는 검열로 네 편이 삭제됐었고
나머지 열다섯 편도 대폭적은 삭제와 수정을 거친 후에야 출간될 수 있었단다.
자국 루마니아에서조차 금서 조치까지 내려졌던 그녀의 첫 소설 <저지대>
정치는, 이데올로기는
항상 문학을 두려워하고 급기야 기를 쓰고 억압하려 든다.
그러나 문학은 결국은 이 모든 걸 보란듯이 이긴다.
아름다움이라는 치명적이자 결정적인 무기로...
 


헤르다 뮐러의 소설은 난해하다.
아니 아예 줄거리조차 갖추지 못한 단상들도 많다.
그러나 읽고 있으면 
시를 읽는 것 같고
평화로운 전원 풍경을 그린 그림을 앞아 두고 있는 느낌이다.
불안감 가운데 느껴지는 평온함!
이상하지?
그닥 평화롭고 아름다운 내용이 아닌데도 그렇다.
오히려 비루하고 남루한 사람들의 보잘 것 없는 이야기인데도
나는 그 속에서 지독한 아름다움에 빠져들고 만다.
풍경과 대비되는 사람들의 삶!
그게 바로 현실이기에 눈물나게 아름다운걸까?
잔인하리만큼 솔직하고, 지독히 슬픈!
헤르타 뮐러가 창조해낸 비범한 목소리.
컨템퍼러리 픽션

과장이 아니라 사실이었다.
이 표현은...



나치가 몰락하고 루마니아 독재정권의 횡포가 갈수록 심해지던 그녀의 고향 마을.
헤르타 뮐러는 그곳을 이렇게 표현했다.
“모든 것이 고여 있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 감옥과도 같은 곳" 이라고...
소설 <저지대>는 그 감옥과도 같은 곳에 살고 있는 어린 아이의 일인칭 기록이다.
무관심, 음주, 폭력, 가난.
죽은 아비의 장례식에서 과거 아버지가 저지른 일들을 듣는 딸.
그것도 이웃 사람들에게...
침묵도 웃음이고, 슬픔도 조롱이고, 현실은 거짓이다.
중, 단편의 모음이면서도 한가지 이야기이기도 한 소설.
때로는 몇 줄의 시도 대하장편 소설이 될 수도 있다는 걸
헤르다 뮐러의 언어적 표현을 통해 절감했다.
"목소리 없는 유년 시절"
그녀는 그 시절을 그렇게 말했다.
헤르타 뮐러는 “자기 둥지를 더럽히는”, “수프에 침을 뱉은” 작가로 낙인찍히며,
말 그대로 사회에서 축출당했다.
마을 사람들은 창문을 열고 지나가는 뮐러를 향해 침을 뱉었으며,
뮐러의 가족들은 마을에서 고립되고 말았다
<저지대> 출간 후 해르다 뮐러는
보수적인 독일 소수민 사회에서도, 루마니아 사회에서도 배척당할 수밖에 없었단다.
원하는 작품을 쓸 수도, 루마니아 독재정권에 협조할 수도 없었던 그녀는
결국 1987년 독일로 망명한다.
그러나 독일에서도 그녀는 언제나 루마니아인이었단다.

소설의 뒷부분에 그녀가 2009년 노벨 문학상을 받을 당시의 연설문이 실려있다.

“어떤 면에서 사람은 언제나 타자인 것 같다.
한번 그곳에 소속되지 못하면, 그것으로 끝이다.”

“나는 죽음의 공포에 삶의 욕구로 반응했습니다.
삶의 욕구는 낱말의 욕구였습니다.
오직 낱말의 소용돌이만이 내 상태를 표현할 수 있었습니다.
낱말의 소용돌이는 입으로 말할 수 없는 것을 글로 표현해냈습니다.”


통증은 너무 강렬해서 스스로 저 자신을 파괴한다고 했던가?
그래서 헤르타 뭘러의 소설이 이렇게까지 처연하게 아름다울 수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확실히 파괴를 통해 창조의 유토피아를 만들어냈다.
굴욕을 품위로 바꾸는 그녀의 글들.
많은 걸 잃었기에, 그리고 그 잃음을 견뎠기에
그녀의 글들은 시가 되고 그림이 되고 빛이 된다.
더 많은 낱말들을 사용할수록 우리는 더 자유로워진다고 그녀는 말한다.
낱말이 주는 자유...
어쩌면 내가 책 속에서 그토록 헤매는 이유도 이것 때문은 아닐까?
헤르다 뮐러는...
적어도 그녀의 글은
정확하고 분명했다.
그리고 지독히... 지독히... 아름다웠다.
Posted by Book끄-Book끄
읽고 끄적 끄적...2010. 10. 6. 06:31
오르한 파묵!
또 다시 이 사람에게 완벽하게 매혹당하다.
이런 이야기일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노벨 문학상 수상 이후 첫 장편소설
오르한 파묵은 말했다.
"나는 이 소설로 기억될 것이다”

5월에 우리나라에 출판됐을 당시에 바로 손에 넣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책을 펼쳐보지 않았었다.
오래오래 숨겨놨었다.
힘들 때, 지칠 때, 위로가 필요할 때 펼쳐보리라 다짐했었다.
지금은 더 오래 이 책을 간직했어야 했던건 아닌가 후회하고 있는 중이다. 
이렇게 휩싸이면 제자리를 찾기가 또 얼마나 버거울까?
단지 소설책일뿐인데도 나는 이 매혹과 질투와 신비에 화가 난다.
오르한 파묵의 책을 읽는 동안은
나는 먹지 않아도, 자지 않아도 괜찮다.
허기도 졸음도 그의 책을 손에 잡는 동안만은 저절로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버린다.
오르한 파묵!
비참함이 느껴질 정도로 나를 완벽히 매혹시키는 작가!
그것도 여러 번,
철저히 치명적으로...



한 여자와 만나 44일 동안 사랑하고,
339일 동안 그녀를 찾아 헤맸으며,
2864일 동안 그녀를 바라본 한 남자.


또 다시 신물나는 사랑 이야기라고?
맞다!
그러면서 동시에 아니다.
한 사람을 너무 사랑한다고해서
그 사람의 입과 손이 닿았다는 이유만으로 담배꽁초 4,213개를 집에 모아놓는 사람이 있을까?
귀걸이, 소금통, 도자기 개인형, 화장수 병, 라크 잔, 설탕통, 모과를 가는 강판 등은 어떤가?
이 정도의 집착이라면 사랑이 아니라
단지 도착적인 정신병의 일종이라고 판단하고 싶어질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책을 다 읽고 나면 인정하고 희망하게 된다.
언제가 꼭 "순수 박물관"을 방문하리라.
그래서 케말이 수집하고 보관했던 퓌순의 흔적이 남겨진 이 모든 물건들을 두 눈으로 확인하리라.
물론 "순수 박물관"을 방문할 땐 반드시 이 책을 들고 가게 될 것이다.
책 안에 있는 1회 무표 입장권을 보여주면서 말이다.
너무 책 속에 빠진 생각이라고 말하고 싶을까?
역시나 그렇지 않다.
올해 하반기에 터키 이스탄불에 "순수 박물관"이 정말로 일반에 공개된단다.
(계획대로라면 8월에 이미 공개됐을지도 모르겠다)
소설의 주요 배경이 된 이스탄불 추쿠르주마에 있는 퓌순의 집.
그곳을 방문하면 소설에 나오는 모든 물건들을 실제로 볼 수 있단다.
번역자의 말처럼 이야기가 책에서 나와 현실에 존재하고 있는 것을 목격하게 되는 셈이다. 
소설의 모든 것들을 재현한,
작가가 창조한 한 편의 소설이 이렇게 현실로 재현된다는 게 신비롭다.
문학이 현실을 새롭게 창조할 수 있다는 사실!
글의 힘에 전율이 인다.
...... 오르한 파묵이라는 작가의 작품을 번역하는 가장 큰 보람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그의 작품을 전 세계에서 누구보다 먼저 읽어 볼 수 있는 특권을 갖는 것이며, 처음 읽는 순수한 감동과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것이라고 답하겠다. 그러므로 이후에 이어질 지옥과도 같은 번역의 고통을 이겨 낼 수 있는 힘도 아울려 얻는 것이라고 ......
번역자 이난아는 말했다.
나는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번역자가 너무 부러워서 불같은 질투가 난다.



퓌순과 케말.
그 둘의 사랑은 이루어졌을까?
이루워졌을 수도 있고 이루어지지 않았을 수도 있다.
인생은 절대로 우리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다고 했던가?
그렇더라도 이 사랑은 충분히 의미있고 그리고 완벽하게 아름답다.
사랑하는 사람이 눈 앞에서 사라졌을 때 삶의 모든 광채도 함께 사라졌다고 말하는 사랑.
그 사람을 보는 것만으로도 모든 것이 한순간에 제자리를 찾는 것 같고,
세상이 의미 있고 아름다운 곳으로 변해버린다는 사랑.
그녀와 한 집에 살 수 없기에 그녀의 손길이 닿았던 물건들을 하나하나 훔치는 사랑.
그 사소한 물건들은 아름다운 순간을 연상시키는 물건을 넘어, 순간의 일부가 된다.
그리고 그것은 집착적으로 사랑하지만 '소유할 수 없는' 누군가에게서 어떤 일부를 떼어 내는 행복이란다.
9년의 기다림 끝에 함께 할 수 있게 된 두 사람의 최후가 되어버린 밤.
신파라고 작위적이라고 비난하진 말자.
이 책을 읽으면 소설속 이야기는 그대로 현실이 된다.
그것도 의심할 여지가 없는 생생한 현실.
나는 내 가슴팍으로 운전대가 꽃힌 것처럼 내내 극심하게 아팠다.
그리고 그 고통은 묘하게 육체의 통증을 동반했다.
영리한 사람들은 인생이 아름다운 것이며, 인생의 목적이 행복이라는 것을 잘 안단다.
그런데 나중에는 행복하다고 말하는 건 바보들 뿐이라나!
"순수 박물관"은 그런 바보들을 위한 책이며 장소다.
점점 사라지고 희미해지는 "시간"이  하나의 "공간"으로 형체를 갖게 되는 곳.
<순수 박물관>
터키에 가게 되면 꼭 이곳에서 하루를 보내리라. 
꼭 그렇게 하리라...

너는 한때 나의 연인이었지
내 곁에 있을 때조차 나의 그리움이었지
지금 너는 다른 사랑을 찾았어
행복이 너의 것이길
고통과 번민은 나의 것이니
삶이 너의 것이 되길, 너의 것이 되길


<순수 박물관>을 탈고한지 얼마 지나지 않았지만
오르한 파묵은 이미 새로운 소설 집필에 착수했단다.
그러니 견디자, 버티자.
그의 글을 읽기 위해서라면 긴 노동같은 기다림도 나는 기꺼이 감수할 수 있다.
괜찮다.
견딜 수 있다,
버틸 수 있다.
Posted by Book끄-Book끄
읽고 끄적 끄적...2010. 8. 17. 06:40
만약 이 책이 뼈가 있고 살이 있는 형이상학적인 존재라면
나는 이 책의 단어 하나 하나까지도 전부 오도독 오도독 탐욕스럽게 씹어 삼켜
그대로 내 몸 안에 고이고이 간직하고 싶다.
탐이 나도록 아름답고
겁이 나도록 관능적인 소설 <은교>
이 이야기를 사랑이 아니라고 누가 말할 수 있을까?
누군가의 심장에 칼을 쑤셔박는 심정으로 쓴 노시인의 긴 고백의 글은
여기 이렇게 한 사람의 심장뿐만 아니라 온 몸에 칼 이상의 것을 쑤셔박았다.
그래, 어쩌면 이 글에는 정말 차가운 폭력성이 담겨 있는지도 모르겠다.
생로병사가 없는, 아니 생로병사를 이기는 관능.
그 관능은 시간을 이키는 칼이며,
그러므로 최종적으로 누군가의 죽음을 부른다.
신생(新生)의 폭설같은....



이 이야기는 <살인 당나귀>라는 제목으로
작가 박범신의 개인 블로그(http://blog.naver.com/wacho)를 통해 연재했던 소설이다.
(당나귀는 소설 속 노시인의 몰고 다니던 오래된 코란도이가도 혹은 시인 자신이기도 하다)
한 달 반이라는 짧은 시간동안 폭풍같이 써내려간 이야기.
그리고 그 이야기가 제목을 바꿔 <은교>로 출판됐다.
<고산자>를 발표한 후 박범신은 말했었다.
"감수성을 충분히 해방시키는 아름답고 슬픈 연애소설을 준비중" 이라고...
그리고 그는 <은교>라는 작품을 책으로 출판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지난 37년 동안의 작가 생활을 주마등처럼 떠올리게 하는 작품이다. 내 안의 다양한 욕망과 감수성을 반영했기에 앞으로도 오랫동안 남는 소설일 것 같다." 라고.
그리고 나 또한 거기에 한 마디를 덧붙인다.
내게도 이 이야기가 그렇다고.....
<촐라체>, <고산자> 그리고 이 책 <은교>까지.
박범신은 3권의 책을 "갈망의 삼부작"이라고 이름 붙였다.
<촐라체>에서는 히말라야를 배경으로 인간 의지의 수직적 한계를,
<고산자>에서는 역사적 시간을 통한 꿈의 수평적인 정한을,
그리고 <은교>에 이르러, 비로소 실존의 현실로 돌아와
존재의 내밀한 욕망과 그 근원을 감히 탐험하고 기록했다고 느끼기 때문이란다.
그리고 독자들에게 한 마디 당부를 한다.
'밤에만' 쓴 소설이니, 독자들도 '밤에만' 읽기를 바란다고...
나 또한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이 책을 손에 잡고 있을 때는 대부분 밤이었다.
책을 읽는 동안 가슴은 뜨거웠고
생각은 차가웠다.



69살 노시인 이적요가 17살 계집아이 한은교에게 느끼는 감정을 읽으면서 누구도 감히 비난하진 말자.
부도덕하다고, 혹은 추잡하다고 손가락질하지도 말자.
그걸 "사랑" 아니라면 도대체 뭐라고 이름 붙일 수 있을까?
시인의 노트와 그의 제자가 남긴 노트, 그리고 시인의 변호사 Q.
이 책은 세 사람의 목소리가 번갈아 가며 등장한다.
이야기의 중심은 모두 "은교" 였던가?
혹은 노시인 "이적요" 였던가? 아니면 그의 제자 "서지우" 였던가?
모든 예술과 문학의 시작이 질투라면,
그래, 이 세 사람의 관계는 그대로 예술이고 문학이다.
시인의 노트에 남겨진 글들은
그리고 어떤 시들보다도 아름답고 황홀하다.
단어 하나 하나가 전부 살아서 나를 수시로 꿀꺽 꿀꺽 삼켜버려 읽는 동안
많.이.두.려.웠.다.



자신이 사망한지 1주기가 되는 날 발표하라는 시인의 노트.
그 속엔 두 가지 비밀이 쓰여있다.
자신이 은교를 사랑했다는 것과, 그리고 자신의 제자 서지우를 죽였다는 것.
그럼으로 해서 자신이 판 암굴 속으로 스스로 걸어들어가 죽음을 선택한 노시인.
그의 머리맡엔 은교가 선물한 작은 토끼 인형이 놓여 있었다.
총.총.총. 뛰던 은교의 발소리를 떠올리게 하는 토끼...
평생 시(詩)만을 써온 시인 이적요가
서지우라는 제자의 이름을 통해 발표한 포르노그래피 소설.

...... 어쨌든 나는 사람들이 '천박한 것'이라고 비난하도록 획책해 쓴 그것이, 시인 이적요의 작품이라고 까발겨질 날이 언젠가 올 거라고 예감했고, 그 작품이 마침내 책이 되어 나왔을 때, 본능에 따른 나의 또다른 충동, 예컨대 나와 나의 시세계가 얼마나 하찮은가 하는 것을 세상에 극적으로 까발리는 과정 안에, 돌입했다고 느꼈다.... 결국은, 시인으로 성역화해온 나의 '빛나는 성취'를 스스로 시궁창에 버리고 싶은 자학의 한 수단으로, 서지우를 대리인 삼아 내가 '당신들 문법'에 맞춰 포르노그래피 소설을 썼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

문학은 어떤 이에겐 질병이라고 했던가?
그래서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그런 사람도 있다고...
노시인은 자신의 제자를 두고 이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결국 자신 또한 고백한다.

...... 내가 세상이라고, 시대라고, 역사라고 불렸던 것들이 사실은 직관의 감옥에 불과했다는 것을, 시의 감옥이엇다는 것을 알았다. 나의 시들은 대부분 가짜였다 ......

그리고 이 말은 은교라는 한 아이를 사랑함으로써 시작된 고해성사로 끝을 맺는다.

...... 너를 만나고 비로소 나의 진짜 얼굴을 스스로 보게 된 셈이다. 세상 사람들은 그러므로 나의 '진짜' 얼굴을 보아야 한다. 시인 이적요는 '전략'에 따라 자신의 '우상화'를 염두에 두고 시를 써온 '가짜 시인'이었고, 불과 열입곱 살 된 소녀를 통절하게 간음하고 싶었으며, 질투심에 눈이 멀어 끝내 제자를 죽인 사람이다. 어떻게 그 사실을 다 묻어두고 무덤 속에서나마 그 모든, 시끄러운 우상화를 받아들일 것인가. 인생의 마지막에 너를 통해 만나 경험한 본능의 해방이야말로, 나의 유일한 인생, 나의 싱싱한 행복이었다. 그게 바로 나 이적요다. 이적요는 본능을 가진 인간이었을 뿐 신성을 본 적도 만난 적도 없다. 그러하니, 아무도 더이상 내게 속지 말라...... 그리고 내 무덤에 짐승이라고 침을 뱉고 살인자라고 돌을 던지라. 그것이 나의 마지막 소망이다 ......



책은 지독히도 탐욕적이고 관능적이며
동시에 문학적 은유들로 넘실댄다.
누군들 맘 속에 자신만의 처녀이자 자신만의 등롱인 "은교"가 없을까?
맘 속에 간직한 신성(神性)에 가까운 영원한 신부 "은교"
그렇다면 그 "은교"에게로 향하는 길이
멸망으로 이르는 좁고 어두운 길이라 한들 누군들 간절히 가고 싶지 않을까!

...... 은교를 만나면서 나는 보다 젊어지고 싶었다. 그게 죄인가. 그 애를 통해 아직도 생피처럼 더운 나의 욕망을 확인했을 뿐, 나는 아무런 범죄도 저지르지 않았다. 나의 은닉된 욕망에게 형벌을 선고할 수 있는 자는 그러므로 나뿐이다 ...... 아니, 청춘이 될 수 없을지라도 청춘인 듯이, 나는 젊은 저들과 오지게 맞장을 뜨고 싶었다 ......
 
숨통을 조여오면서도 숨통을 트이게 하는 문장이다.
이 아름답고 지독한 연애 이야기를 나는 또 어떻게 감당할까?
사랑, 질투 그리고 음모라는 통속적인 단어로 이 소설을 말하고 싶진 않다.
이 소설은...
그대로 한 편이 시이고
그대로 한 점 풍경화다.
그러므로 이 책을 읽게 되는 이여!
반드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으니, 그것은 
눈빛이다.
그들의 눈빛!
그리고 당신의 눈빛!

은교는 나에게 슬픔과 함께, 생애에 경험해보지 못한, 청춘의 광채와 위로를 주었다.
사.실.이.다.
나는 어느새 이적요가 되어 늙은 관 속에 내 몸을 누인다.
누윈 몸은 고요했으며 더불어 편안했다.
Posted by Book끄-Book끄
읽고 끄적 끄적...2010. 1. 8. 06:14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
내게 작가 최영미를 알게 한 최초의 책이자 그녀의 첫 책.
20대에 이 시집을 소유했을 땐
서른이 요원했기에 이해하지 못할까봐 건성건성 들춰봤었다.
(사실 그때는 내게 서른이란 시간은 결고 오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턱없이 어이없는 자신만만함이었음을 그때 조금이라도 알았었더라면...)
"서른"이 지나 내 잔치가 끝났을 때 다시 조목조목 읽어보리라 혼자 다짐했던 책.
그리고 오랫동안 나는 그 책을 외면했다.
지금은...
이미 "서른"을 훌쩍 넘겨버린 나는
이 시집의 제목만으로 덜컥 겁이 나 감히 책 장을 펼쳐보지도 못한다.
마치 뭉턱 시간을 통째로 도려낸 것 같은 느낌.
그 느낌은 실제로 살점이 떨어져 나간 것처럼 아리고 처절하다.



<길을 잃어야 진짜 여행이다>
제목만 들었을 땐 여행집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책 표지에 산문집이라는 자신의 소속이 정확히 밝혀져 있다.
최영미의 단어 선택은 정직했다.
1부 "아름다움에의 망명"은 그녀가 그동안 국내의 신문과 잡지 들에 기고한 여행과 관련된 글들을 모은 부분이다.
2부 "예술가의 초상"은  문학, 미술, 영화 등 문화 전반에 대한 그녀의 짧은 사색과
개인적인 경험들이 오롯이 담겨있다.
1부의 글조차도 여행지를 소개한다는 느낌보다
어떤 특정한 그림이나 조작에 일일이 말을 걸고 있다는 느낌...
그것도 조근조근한 독백으로....
여행지를 담은 그 흔한 사진조차도 이 책에센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시를 쓰고 소설을 쓰는 최영미가 아나라
서울대 미대와 홍익대 미술대학원을 거친 미술학자로서의 최영미를 만날 수 있다.



마흔을 훌쩍 넘긴 한 여자가 말한다.
"여행과 스포츠는 내 삶이 다하도록 나와 함께 할 정열이다"
지독히 그리고 강력히 그녀가 부러워 야생의 짐승처럼 물어뜯고 싶어진다.
진심으로 나는 그러고 싶었다.
여행지에서 편하고 손발톱을 깎으며 오래 밀린 일기를 쓰고 싶었다.
호들갑스럽지 않게 유명 여행지를 눈도장찍듯 훓고 지나가는 게 아니라
며칠이라도 감정이 바닥날 때까지 한 곳에 정착하듯 머물며 일상을 보낼 수 있기를...
아직도 계속 건축중인 가우디 성당 앞에서, 
미켈란젤로의 가죽을 들고 있는 섬뜩한 장면이 숨어있는 "최후의 심판" 앞에서
나는 졸음처럼 밀려오는 시간들을 오래동안 보내고 싶었다.
그 꿈은 요원하고 늘 가파라 상상만으로도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몇 가지 표현과 글들이 눈에 들어와 담아본다.
특별히 공감했던 부분들과 지극히 부러웠던 부분들.
문득 숨쉬며 살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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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여자들은 프랑스 여자들보다 화장이 진하다. 유럽의 남쪽으로 내려갈수록 여인네들으 얼굴이 울긋불긋해진다. 내 경험을 일반화하지면, 젊은 여성에게 두터운 화장을 강요하는 사회일수록 여성의 지위가 낮다.

The ugly can be beautiful, but the pretty never - 고갱
예술을 알면, 문학을 좋아하면 인생이 복잡해진다. 좋게 말해 인생이 풍요로워진다. 보통 사람들은 밖에 보이는 것만 보고 이렇다 저렇다 미추를 논하는데, 예술가들은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다른 각도에서 보는 사람들이거든, 자신이 남다른 생을 살아야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들이 눈에 들어오는 법이다. 그래서 위대한 인생이 위대한 예술을 낳는다는, 예술가는 모두 불행하다는 신호가 성립하지.

버락 오바마, 그는 인종이 아니라 인간에 호소했다. 그는 선동하지 않고 설득했다. 자신감이 그의 성공의 열쇠였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처럼 대단한 자신감의 이유를 묻는 기자에게 그는 이렇게 답했다. 어려서부터 여러 대륙, 여러 문화에서 자라며 사람들과 소통하는 법을 배웠노라고.

나는 이 모든 처음, 최초들을 의심한다.

어쩐지 이건 너무 만들어진 장치라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진짜 상처는 드러나지 않는 법이다. 그리고 너무 고통스러우면 눈물도 마른다. 그 눈물을 억지로 짜내려는 모든 시도는 그래서 결국 어설픈 신파로 전락할 따름이다.
그날의 광주에 대한 지식인의 해묵은 "부채의식"에서 태어난 영화 <꽃잎>. 장선우 감독이 과거를 들여다보는 창에는 시종일관 감상이라는 필터가 부옇게 끼어 있다. 신파의 본질은 자기 연민이다. 일종의 정신적 딸딸이에 다름 아니다. 감상과 자기 연민의 안개를 거도 광주는 언제 신파에서 구출될 것인가? "우리"는 언제 눈물을 그치고 현실을 직시할 것이가? 이는 장선우뿐 아니라 우리 모두의 화두이다. 서둘러 고아주를 형상화하려는 허튼 기도보다는 지금은 차라리 광주를 손대지 않고 그냥 놔두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시사회장을 떠나며 나는 다짐했다. 싸구려로 위로받느니 차라리 냉정한 무관심을 택하겠노라고.   - 장선우 감독의 영화 <꽃잎>을 시사회를 본 후 느낌을 적은 글

시는 그것을 쓴 사람이 아니라 시를 필요로 하는 사람의 것이다.

세계는 인간 없이 시작되엇꼬, 또 인간 없이 끝날 것이다. - 레비스트로스(프랑스 인류학자이며 사상가)

사랑받지못했으므로 청춘을 잃은 사람들, 그래서 젊은 적이 없기에 늙을 수도 없는 사람들에게 이 책이 위로가 되면 좋겠다. - 잉게브르크 바흐만의 산문집 <삼십세>

예술에 재능이 없는 사람이 예술에 집착하는 것만큼 무서운 일은 없다네 - 에밀 졸라의 이 말에 깊은 상처를 받아 그후로 죽을 때까지 세상과 인간을 등지며 산 화가 세잔
Posted by Book끄-Book끄
읽고 끄적 끄적...2009. 11. 5. 06:13
숙제처럼 읽었던 두 권의 책.
소모임에서 추천한 책이라 조금은 의무감에서 책을 폈다.
나라는 사람에게서 제일 부족한 것이
어쩌면 인문적 사고와 철학적 사고인지도 모르겠다.
매번 이런 책을 읽을 땐
왠지 뒤가 찜찜한 느낌...
뭔가 빙빙 돌려서 같은 말을 하고 있는 사람을 앞에 두고 있는 것 같은 막막함.
이 사람에게 계속 질문을 해야 하는 건가?
아니면
알려주는 것만 고맙게 받아야 하는 건가?
사실은... 아직 선택을 하지 못했다.



<문학의 숲에서 리더의 길을 묻다>
8권의 소설 속 문제적 주인공들에게서 성공한 리더 혹은 성공하지 못한 리더의 모습을 찾고
그들의 이유와 특징을 꼽아준다.
소개된 8권의 책 중에서 내가 읽은 책은 단지 2권 뿐이다.
아서 밀러의 <세일즈맨의 죽음>과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
내가 알지 못하는 주인공에 대한 분석은
홀로 막막했고 암담했다.
굳이 꼭 그 책들을 읽어야만 본문을 이해햘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어쩐지 수박의 겉만을 열심히 본 기분이다.
그 느낌은 살짝 참담했음도....



세상 모든 사람들은 전부 리더를 꿈꿀까?
아직도 리더의 자리는 소수의 선택받은 자의 자리일거라고
대부분의 사람은 생각한다.
"개천에서 용난다"는 말을 어쩌면 평생 육화된 체험으로 이해하며 살지 못할지도...
리더의 삶은,
"긍정과 소통"의 깊이에 있는 건 아닐까?
예전에 학교다닐 때 배웠던 운동에너지 공식
" E=MC2 "
내가 생각하는 리더의 공식이다.
리더의 에너지는 질량 비례하고 속도의 제곱에 비례한다.
그들의 가진 지식과 소통의 정도에 비례하고 판단의 제곱에 비례한다...
그 값에 따라 타인에게 리더의 에너지가
명확히 전달되고 확산되어야 한다는 나는 생각한다.
에너지를 잃은 리더는 더이상 리더일 수 없다는 게 내 좁은 소견.
좀 억지스런 대입일까???
사실 아직 나는...
"리더의 길"보다 "문학의 숲"이 더 모호하고 난해하다.
그 끝나지 않는 신비감이 때론 날 지치게도 하고 기운차게도 한다.



<클루지>
독특하고 신선해서 처음엔 재미있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끝까지 그 느낌이 유지되지 않아 안타깝다.
인간의 "진화"라는 게
꼼꼼히 따지고 계획되어 합리적인 방향으로 이루어진 게 아니라.
우연과 비합리, 불완전한 해결책에 의해 이루어졌단다
전적으로 클루지(kluge)스럽게...
결국 인간의 진화라는 것은 땜장이의 처지와 비슷하다고 말한다.
그때 그때 자투리를 모야 조립한 것이 인간 진화의 진실이라고...
어쩐지 색동저고리를 바라보는 느낌이다.
이쁘고 귀엽긴한데,
이미 나이든 사람에게 입으라고 하면
구체적이고 실질적으로 다가오는 당혹감...



kluge : 어떤 문제에 대한 서툴거나 세련되지 않은(그러나 놀라울 만큼 효과적인) 해결책

우리의 신념은 변덕스런 기억에 의해 조종받은다.
우리의 기억은 클루지의 모음이며 그것의 단점은 신뢰성이다.
기억은 항상 기억하는 사람의 편의에 의해
왜곡되고 간섭되고 오염된다.
그리고 이것은 사건과 시간의 불일치까지 가져온다.
신념 = 기억 능력 + 추론 능력 + 지각 능력
결국 "신념"은
우리가 "참"이라고 아는 것이 아니라
"참"이기를 바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숱한 "클루지"을
다양한 방법으로 "통찰"함으로써 효과적인 "개선"을 배워나가는 것
그것이 바로 인간의 "진화"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결론내리면서도
자연과학의 인문적 해석은
역시나 어럽다... ^^

<클루지를 이겨내는 13가지 제안>

 1. 대안이 되는 가설들을 되도록 함께 고려하라.
 2. 문제의 틀을 다시 짜고 질문을 재구성하라.
 3. 상관관계가 곧 인과관계가 아님을 명심하라.
 4. 여러분이 가진 표본의 크기를 결코 잊지 마라.
 5. 자신의 충동을 미리 예상하고 앞서 결정하라.
 6. 막연히 목표만 정하지 말고 조건 계획을 세워라.
 7. 피로하거나 마음이 산란할 때는 되도록 중요한 결정을 내리지 마라.
 8. 언제나 이인과 비용을 비교 평가하라.
 9. 누군가가 여러분의 결정을 지켜보고 있다고 상상하라.
10. 자신에게 거리를 두어라.
11. 생생한 것, 개인적인 것, 일화적인 것을 경계하라.
12. 우물을 파되 한 우물를 파라.
13. 합리적으로 되려고 노력하라.
Posted by Book끄-Book끄
읽고 끄적 끄적...2009. 10. 12. 06:27
와~~
사람 미치도록 주눅들게 만드는 책.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치도록 사랑스러운 책
두 가지 감정 속에서 정신 못차리게 만드는
마력과 매력을 함께 가지 지독한 책을 만나다.



그 제목조차도 미치토록 황홀한 책.
호모 부커스 이권우의 서평집 <죽도록 책만 읽는>
이 한 권의 책 속에서
무려 100여권의 책을  만날 수 있는 행복감.
짧은 글이지만 참 많은 깊이와 재미를 담고 있다.
이 정도로 책을 소개할 수 있으려면
내공이 어느 정도 쌓여야 하는 거지?
묘한 시기심마저도 어쩔 수 없이 갖게 된다.



문학,  인문, 자연과학, 철학, 사상, 종교
생식과 번식, 천문에서 신화와 고전까지
심지어는 읽기와 쓰기의 부분까지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부분은 광대하고 무한하다.
"비밀을 아는 순간 같은 마술가가 된다"고 했던가?
비밀을 전부 알게 된 건 물론 아니지만
어쩐지 마술사 옆의 어시스트라도 된 것 같다.
책을 읽는 동안 내 무지에 불편했고,
아직 한참은 책을 더 읽어야 하겠구나 좌절했고,
그리고 더불어 행복했다.
이 계절에 읽기에 딱 좋은 책이란 생각 ^^ 



 사랑이란, 두 사람의 공동 경험이다. 그러나 여기서 공동 경험이라 함은, 두 사람이 같은 경험을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사랑을 주는 사람과 사랑을 받는 사람이 있지만, 두 사람은 완전히 별개의 세계에 속한다. 사랑을 받는 사람은 사랑을 주는 사람의 마음속에 오랜 시간에 걸쳐 조용히 쌓여온 사랑을 일깨우는 역할을 하는 것에 불과한 경우가 많다. 그는 자신의 사랑이 고독한 것임을 영혼 깊숙이 느낀다..... 아주 이상하고 기이한 사람도 누군가의 마음에 사랑을 불지를 수 있다. 선한 사람이 폭력적이면서도 천한 사랑을 자극할 수도 있고, 의미 없는 말만 지껄이는 미치광이도, 주군가의 영혼 속에 부드럽고 순수한 목가를 깨울지도 모른다. 그래서 어떤 사랑이든지, 그 가치나 질은 오로지 사랑하는 사람 자신만이 결정할 수 있다.                                                                         - <슬픈 카페의 노래> 카슨 매컬러스



굳이 좋은 책이 무엇인가 정의한다면, 읽고 나서 지은이와 논쟁을 하고 싶은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책이라 할 수 있다. 굳이 무엇을 올해의 책으로 뽑아야 하는지 말해야 한다면, 우리 시대의 고민을 끌어안고 그 대안을 제시하고 있는 ‘뜨거운’ 책이어야 한다고 할 수 있다. 

고작 책을 창 삼아 세상과 소통하려는 나 같은 사람은, 말하자면 관음증 환자에 불과하다. 책에 새겨진 다른 사람의 욕망을, 책장을 커튼 삼아 훔쳐보는 책벌레들.


본디 작가는 유목인이다. 한곳에 머물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운 곳을 향해 움직여야 한다. 뿌리내리는 자에게 예술혼은 깃들지 않는다.

이상하지?
나와 비슷한 표현과 감정들을 자주 목격하게 된다.
묘한 기시감까지...
작가 이관우가 알게 된다면 식겁할지도 모르지만
어딘지 닮은 나를 본다.
그래선가?
이 책은 제목부터 낯설지 않다.
그리고 다 읽고 난 지금은 어느 부분 내 일기 같은 느낌도 든다.
재미있고 흥미롭다 이런 공감대.
"돞아보다"
아마도 이제 나도 그 세계 속에 들어가게 되려나 보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토끼굴처럼
나를 다른 세상으로 이끄는 출입구가 되어 주다.
그래서 기꺼이 그 안으로 들어가기로 결정하다...
다행이다. 행복해서....
Posted by Book끄-Book끄
달동네 책거리2008. 12. 15. 06:11
 

<사막> - 르 클레지오


 사막

 


르 클레지오

요즘 제 마음을 완벽히 사로잡은 작가입니다.

터키 작가 오르한 파묵처럼 제게 또 다른 환상과 신비주의를 선사한 사람이죠.

작가에 대해서는 달동네 책거리 41편에서 소개해서 여기서는 생략하고 바로 제가 만난 환상 속으로 안내할께요(잘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이 책 속에서 우리는 두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누르와 랄라.

이야기는 이 두 사람의 이야기가 번갈아 가며서 진행됩니다. 현재를 살아가는 아프리카 청색인간의 후예 “랄라”와 20세기 초 서구문명(기독교인)에 의해 삶의 터를 점령당하면서 뜨거운 사막으로 끝없는 유랑길에 오른 소년 '누르'의 이야기...

번갈아 가며 서술되고 있는 이 두 이야기는 서로 관련이 없는 듯 보이기도 하고, 마치 동일한 인물이 단지 시대를 바꿔 등장해 구도자적인 길을 말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 둘의 시선은 심지어 마치 일란성 쌍둥이같이 느껴집니다.)

이 책은 그 동안 우리나라에서는 절판된 책이었는데 노벨문학상 수상하면서 새로운 번역가에 의해 다시 출판하게 됐다고 하네요.

이 사람...

잃어버린 문화에 대한 절절한 굶주림이 있는 것 같습니다..

문화적 허기를 문학적 성찬으로 변모시켰다고나 할까요???

책을 읽고 있으면 가슴까지 차오르는 풍요로움을 느끼게 됩니다.

허기를 안고 끝없이 이어지는 뜨거운 사막 위를 맨발로 걸어가면서도 풍요로움을 느낄 수 있다니...(이런 게 정말 신비주의 아닌가요!!!)


로드 무비라는 장르의 영화가 있쟎아요.

이 책도 읽고 있으면 눈앞으로 하얀 스크린이 펼쳐지는 느낌입니다.

집중해서 읽다보면 책을 읽고 있다는 느낌보다는 어떤 다큐멘터리를 보고 있다고 느껴질만큼 생생합니다.

주인공들의 감정이 그대로 전달되죠.

사막 안에서 지도자를 잃고 뿔뿔이 흩어지는 민족을 바라보게 되는 누르의 아픈 시선이나 프랑스에서 우연한 기회로 하와라는 유명 모델이 된 랄라의 공허한 시선까지 그대로 따라갈 수 있습니다.

사막을 떠나왔지만 늘 사막의 뜨거운 태양을 갈구하는 랄라에겐 도시인에게선 느낄 수 없는 묘한 분위기와 생명력, 그리고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하와”라는 유명 모델이 된 청색인간의 후예 “랄라”가 도시에서 온 몸으로 발산하는 사막의 강렬함은 결국 그녀를 랄라의 태생지로 돌아오게 만듭니다.

처음 그 곳을 떠나왔을 때의 모습 그대로 맨 발에 누더기 같은 옷을 입고 말이죠.

사막에 도착한 그녀는 이른 새벽 홀로 바닷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청색인간의 후예를 잉태합니다.

랄라가 탄생시킨 생명은 어쩌면 “자연”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네요.

파괴와 재건을 반복하며, 진보든 퇴보든 어쨌든 걸어가는 자연.

그리고 그 안의 파괴자는 문명이라고 불리어 지는 우리 자신이구요.

<신>을 잃은 우리는 어쩌면 현실을 사막화하여 이렇게 계속 헤매고 있는 건지도 혹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우린 태양이 얼마나 더 뜨거워야 알게 될까요?


...... “자유로 가는 길은 끝이 없었다. 자유는 막막한 대지처럼 광활했으며 빛과 같이 아름답고 잔인하며 눈물처럼 감미로웠다. 매일 첫 새벽에 자유로운 사람들은, 그들의 거주지를 향해 남쪽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아는 자가 한 명도 남아 있지 않은 그곳으로 돌아갔다......


당신은 지금 모래와 하늘, 물처럼 흐르는 바람만 존재하는 막막한 사막 위에 서 있습니다.

느껴지나요?

또 다른 존재가 그 눈으로 이 세상을 쳐다보고 있는 걸...

storytelling..,

그 시선 속에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Posted by Book끄-Book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