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끄적 끄적...2015. 11. 16. 08:24

읽는 동안 몸을 아프게 하는 이야기가 있다.

박범신의 <은교>와 <소금>이 그랬고

김현의 <남한산성>과 <내 젊은 날의 숲>이 그랬다.

입 안이 헐기 시작한건,

이 책을 읽기 시작하고 정확히 하룻밤이 지난 금요일 아침부터였다.

사실 그때까지 이 이야기를 어떻게 읽을지 결정을 내리지 못했었다.

서둘러 읽어낼지 아니면 한 장 한 장 시간을 들여 읽어나갈지를...

그 사이 입안은 점점 더 심해졌고

지금은 물을 삼키는게 힘들 정도로 헐어있고 부어있다.

손가락으로 왼쪽 볼을 누르면 찌르는 통증이 깊게 파고든다.

아마도 앞으로 며칠은 더 견뎌내야 할 듯 싶다.

염증약과 진통제를 삼키며 나는 이 이야기 속의 "당신"을 생각했다.

주호백의 유일한 당신인 윤희옥을,

윤희옥의 당신이었던 김가인과 윤희옥의 당신이 된 주호백을,

김가인의 당신이었을 윤희옥을.

그리고 그들의 부식되지 않은 기억들을...

이야기 속에서 박범신은 말한다.

기억은 지속된다고.

심지어 어떤 기억은 스스로 번식하고 확장한다고.

 

 

 

원(願)이 깊어지면 원(怨)이 된다

한 번 원(怨)을 원(願)으로 믿게되면 삶의 방향은 엉망이 될 수밖에 없다..

일흔넷의 나이에 희옥은 비로소 주호백이라는 "당신"을 "공평"하게 사랑하기 시작했다지만

그건 희(喜)인지 비(悲)인지 나느 모르겠다.

 가끔 두렵다.

생명력 짱짱한 "기억"이 미래의 나를 갉아먹으면 어쩌될까 싶어서..

그렇게 미래의 기억은 다 지워지고

과거의 기억에만 붙들려 있다가 급기야 나를 놓아버리게 되는건 아닐지.

내겐 주호백처럼 매화 나무 아래 사체를 유기해 줄 "당신"도 없는데...

 

지금 내 몸이 아픈 이유는

주호백의 마지막을 거둔 윤희옥의 "공평"이,

그 "공평"의 마디마디가 전부 이해되서다.

홍매 나무 아래 놓여진 의자에 앉아있는 여인.

촛점이 멈춰진 눈.

파킨슨병으로 제 멋대로 흔들리는 손과 발.

그리고 점점 꺼져가는 기억.

그 여인이 나의 과거고 현재고 미래같다.

 

공평하다는건,

얼마나 불공평한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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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끄적 끄적...2013. 5. 17. 20:16

너무나 아프고, 서럽게 읽은 책이다.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와 함게 묶어서 우리 시대의 부모에게 헌정하고 싶은 책이다.

연거푸 2번을 읽었다.

읽을 때마다 죄스러웠고 아팠고 먹먹했다.

내 역시도 부모의 '빨대'였음을 감히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 그날 아침 한 염부가 죽은채 발견되었다....

첫문장부터 나는 무책으로 무너졌다.

소금을 만드는 사람이, 자기 몸 속의 소금을 챙기지 못한채

과도한 노동으로 철저하게 무너지고 쪼그라들어

결국 입 속에 한웅큼의 소금과 함께 소금밭에서 일생을 마감한 염부1을 죽음을 보면서 나는 인정했다.

뭔가 잘못됐다는 걸.

그리고 그 잘못된 게 끝이 없이 이어지고 있다는 걸.

신경숙은 <엄마를 부탁해>에서 말했다.

엄마에게도 엄마가 필요했다는 걸 몰랐다고...

그런데 박범신의 <소금>은 내게 묻는다.

세상 끝에 혼자 버려진 아비에게 너는 언제까지 빨대를 꽂을거냐고...

염부였던 아비가 소금밭에서 죽었다!

홀로 땡볕에서 소금에 반사되는 모든 빛을 온전히 홀로 받아내서면서 버티고 버티던 그 염부를 죽인 건,

소금이 아니다. 햇빛이 아니다.

그를 죽인 건 바로 나다!

박범신의 40번째 장편소설 <소금>은 내게 살인의 이유를 물어왔다.

대답할 말이... 없다.

소설의 문장처럼,

세상의 모든 아버지들은, 아버지이기 때문에, '치사한 굴욕'과 '쓴맛의 어둠'을 줄기차게 견뎌온 것이었다.

 

엄마는 처음부터 엄마였듯, 아버지 역시 처츰부터 아버지라고만 생각했다.

아버지의 푸르른 청춘!

그런 것 따위는 관심도, 상상도, 생각도 못했었다.

막내딸의 생일에 실종된 시우의 아비도

아들의 대학등록금을 위해 부두 하역군으로 '치사해, 치사해"를 입에 달고 살던 명우의 아비도 모두 굴욕을 견디며 살아왔다.

아비가 정말 다 그런거라면!

모든 아비가 다 그렇게 치사하게 산는 거라면!

그 아비들이... 어쩌나...

우린 어떻게 해야 하나...

 

...... 애비들이 치사하면 세상이 모두 치사해진다는 아버지의 말은 하나도 그른 데가 없었다. 치사한 아버지들과 치사함을 견뎌내는 아버지들에겐 모두 '새끼'들이 딸려 있었고, 아버지들의 소망과 달리, 그 새끼들 역시 치사하게 살아가며 "치사해, 치사해, 치사해!"를 대물림받는 중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세상의 모든 아버지는 꼭 둘로 나눠야 한단다.

하나는 스스로 가출을 꿈꾸는 아버지와

다른 하나는 처자식들이 가출하기를 꿈꾸는 아버지로.

농담같은 이 말이 목울대를 막는다.

핏줄이라는 이름으로 아비에게 내미는 자식의 빈 손은 차라리 폭력이고 폭압이다.

이걸 이 책은 뼈 아프게 실감케 만든다.

마치 내 가슴 우에 수인번호가 찍히는 것 같다.

꽃을 들고 괴로운 얼굴빛으로 막 가라앉아가는 아버지.

책의 표지를 보는 게 힘겨워 나는 책장을 덮지도 못하고 활자 앞에 무력하게 무너졌다.

도대체 무슨 자격으로...

 

...... '핏줄'이라는 이름으로 된 빨대는 늘 면죄부를 얻었다.

사람들은 핏줄, 핏줄이라고 말하면서 '핏줄'에서 감동받도록 교육되었다. 핏줄조차 이미 단맛의 빨대들로 맺어져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사람들은 '사랑'이라고 불렀다. 사랑이 빨대로 둔갑했지만 핏줄이기 때문에 그냥 사랑인 줄만 알았다. 빨대를 들고 기웃거리는 젊은이들은 어디에서든 볼 수 있었다. 일차적인 표적은 아버지였다. 스물이 넘은 자식들조차 핏줄이므로 늙어가는 아비에게 빨대를 꽂아도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이 흔한 일이 되었다. 모두 그 체제가 만든 덫이었다.

더 큰 나라가 더 작은 나라를 빨고, 더 힘센 우두머리가 힘없는 졸개들을 빠는 빨대와 깔때기의 구조야말로 자본주의적 세계 구조였다.

핏줄이라고 그것을 넘어설 수는 없었다.

......아버지들은 근엄했지만 아무 힘이 없었다.

체제에 편입돼 과실을 따 오는 대표 선수로서 그럴듯해 보이긴 했지만, 가족들이 거대한 소비 체제에 들어 있는 한 어버지에겐 그 체제를 방어할 항거 능력이 전무했다. 핏줄에게 빠리고 핏줄의, 핏줄의, 핏줄에게도 빨렸다. 핏줄이라는 강력한 이데올로기를 명분으로 삼은 저들이 자신들의 깔때기를 채우기 위해 그 구조를 전적으로 허락하고 돕기 때문이었다. 성장한 자식을 독립시키겠다고해도, 핏줄이므로 아버지만이 비난받는 이 구조는, 체제의 입장에선 양보할 수 없는 규범이었다 ......

 

세상에 가장 힘든 노동이 바로 소금밭에서 일하는 염부의 노동이란다.

그 염부의 노동으로 소금은 세상의 모든 맛을 다 갖게 된다.

단맛, 신맛, 짠맛, 쓴맛,

소금의 맛은...

단지 짠맛만이 전부는 아니었구나!

소금이 가진 세상의 이 모든 맛이

힙겹고 치사한 노동에 팔리고 자식들에게 굽을 등을 빨리는 아비의 모든 것이라는 걸.

이 소설을 읽으며 아프게 아프게 깨닫았다.

이 치사한 세상을 살아내는 걸 가장 무서워하는 사람이 사실은 아비들였음을 나는 몰랐다.

아니 모른척 했다.

그래서 끝내 시우에게 돌아가지 않는 아비가 나는 다행스러웠다.

 

아마도 나는 이 책을 다시 또 읽게 될거다.

읽을 때마다 나는 끝없는 참회록에 얼굴을 들지 못하게 될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또 다시 이 책을 읽게 될거다.

날마다 고통스럽고 날마다 황홀하기 위해서.

(아마도 나는 황홀보다는 고통쪽에 더 많이 머무를 수밖에 없겠지만...)

 

차디찬 소금이 입 안에 가득하다.

이 소금은 어떻해야 하나...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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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 끄적 끄적...2012. 11. 9. 08:27

<빨래 2000회 기념 공연>

부제 : The Memory

일시 : 2012.10.12. ~ 2012.11.11.

장소 : 학전그린 소극장

대본 : 추민주

작곡 : 신경미, 한정림, 민찬홍

제작 : 명랑씨어터 수박

출연 : 박호산 (솔롱고) / 이보라 (서나영) / 강정임 (주인할메) 

        김송이 (희정엄마) / 윤성원 (구씨) / 김지훈 (빵)

        최호중 (마이클) / 송은별 (여직원)

 

창작 뮤지컬 <빨래>가 벌써 2000회가 넘었단다.

올 초에 12차 팀 이진규 솔롱고와 최주리 서나영을 봤었는데 특별한 기념 공연을, 게다가 박호산이 솔롱고로 몇 번 출연한다고 해서 일부러 예매를 했다.

몽고에서 온 불법체류 노동자 솔롱고와 서점 계약직 직원 강원도 처녀 서나영의 힘겹고 서러운 서울살이 이야기.

사회의 주류가 아닌 소외받고 무시받는 쪽방살이 군상이 만들어내는 서럽고 뜨거운 이야기 <빨래>

예전 관람 때도 보는 내내 좀 막막하고 서글펐었다.

극적인 효과를 위한 과장된 이야기라고 말 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실제 현실은 작품 속 내용보다 훨씬 더 비루하고 남루하고 서럽다.

게다가 이 뮤지컬을 본 직후 손에 잡은 책이 공교롭게도 박범신의 <나마스테>였다.

불법체류자 신세로 아무 말도 못하고 뭇매를 맞는 몽골 청년 솔롱고에 눈이 맑은 페루의 청년 카밀은 정확히 겹쳐진다.

그리 오래 되지도 않았다.

불과 몇 십 년 전만해도 우리 자신이 솔롱고였고 카밀이었다.

코리안 드림보다 더 큰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는 대한민국의 솔롱고와 카밀.

그런데 이제는 다 잊었다.

...... 다른 누가 아니라, 바로 우리가 좀 더 잘 살자고 데려오고, 오게 만든 외국인 노동자들이었다. 배고프지 않은 우리가 하기 싫는, 더럽고 위험하고 힘든 일들을 시키기 위해, 온갖 불법적인구조와 착취의 시스템을 우리 스스로 만들어놓고서 그들을 불러들인 후, 이제 구조개선을 명분 삼아 그들을 무자비하게 내몰겠다는 뻔뻔하고 잔인한, 내 조국에 대해 그 순간 나는 너무도 화가 났다 ......

책 속의 외국인 노동자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

"한국 정부가 우리에게 불법체류자가 되라고 권한다."

산업 연수생으로 들어왔다 불법체류자가 되어 여권도 월급도 받지 못하고 끝없는 노동에 시달리는 사람들.

한국인보다 얼굴색이 조금 더 검기 때문에,

한국인보다 가난한 나라에 태어났기 때문에,

한국인이 하지 않으려고 하는 더럽고, 위험하고, 힘들 일을 하는 그들의 코리안 드림을

우리는 얼마나 많이, 체계적이고, 구체적으로 무너뜨렀던가!

정확히 말하면,

대한민국의 산업, 그 가장 밑바닥을 채우는 사람들이 바로 이들이다.

스리랑카, 네팔, 가차흐스탄, 방글라데시, 필리핀, 베트남...

이들이 우리 산업의 근간이다.

우리는 이들에게 "너네 나라로 가!" 라며 함부러 말 할 자격이 없다!

그들이 너네 나라로 가버리는 순간 우리 산업의 근간은 무너지고 흔들린다.

우리는 왜 이렇게 빨리 말리는 시누이같은 존재가 됐을까?

우리가 그들이었었는데...

<빨래>의 한 구절처럼 그들도 때리면 아프고, 슬프면 눈물 흘리는 사람들인데...

참으라는 말,

이들에겐 너무나 잔인하고 무책임한 폭력의 언어다.

<빨래>도 <나마스테>도 참 절망적이고 아픈 현실이고, 처절한 삶이다.

그나마 뮤지컬 <빨래>는 일말의 희망을 꿈꾸고 있어 다행이다.

비록 그 꿈이 현실에서 도무지 실체적인 형상으로 나타나주지 않을지라도...

Korean dream은 도대체 언제까지 impossible dream이 될까!

 

배우들은 솔롱고 박호산과 서나영 이보라를 빼고는 전체적으로 좋았다.

박호산은 솔롱고를 하기에는 사실 불혹을 넘긴 나이가 너무 부담스럽다.

(보면서 내내 기념 공연이라 참 다행이라는 생각을 어쩔 수 없이 했다.)

이날 컨디션이 안 좋았는지 박호산의 노래는 많이 힘겨웠고

대사는 난감할 정도로 어색했다. 

한국말을 못하는 외국인이 아니라 뭐랄까 지능이 좀 떨어진 지적장애우의 느낌이랄까?

그래도 다행인 건,

극이 진행될수록 두 주인공이 점점 자리를 잡아갔다는 사실.

(내가 지금까지 본 박호산의 작품 중에서 최고의 컨디션 난조를 보인 작품이다.)

확실히 현재 공연중인 12차 팀에 속해 있는 김송이(희정엄마)와 송은별(여직원)은

무대를 종횡무진 누비며 제 역할을 충실해 해줬고

주인할머니(강정임), 마이클(최호중), 구씨(윤성원), 빵(김지훈)도 참 잘 해줬다.

두 주인공을 제외하면 모든 배우가 멀티맨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많은 배역들은 참 능청스럽게 잘 해낸다.

아무리 생각해도 <빨래>의 주인공은 확실히 누가 뭐래도 이들임이 분명하다!

이들이 아니었으면 난 참 지루하고 힘들었을 것 같다.

 

기념 공연...

참 많은 걸 생각하게 한다.

누구를, 무엇을 위한 기념 공연일까???

Posted by Book끄-Book끄
읽고 끄적 끄적...2012. 6. 20. 08:01

그런 책들이 있다.

읽고 난 후에 바로 첫 장으로 다시 되돌아가 되읽기를 시작하는 책과,

한 번 읽고 난 후 일주일 정도 시간이 지난 후에 다시 읽게 되는 책.

전자에 해당하는 책이 김주영의 <잘가요 엄마>였고

후자에 해당하는 책이 박범신의 <은교>였다.

그러나 두 부류의 책에은 공통점이 있다.

결코 2번의 읽기로 끝나지 않고 언제든 현재 진행형의 책읽기로 급변할 소지가 다분하다는 사실이다.

이런 책은 거의 항상 읽을 수록 다른 것들이 보이고,

읽을 수록 깊어지고,

읽을 수록 먹먹해지고,

읽을 수록 살붙이 같아 진다.

일흔 셋의 김주영이 쓴 참회의 사모곡.

단지 소설만이 아니었기에 더 남루하고 곡진하고 애잔했는지도 모르겠다.

 

어머니는 나에게 크나큰 행운을 선물했다. 어머니와 내가 함께한 시간 속에서 어머니는 나로 하여금 도떼기시장 같은 세상을 방황하게 하였으며, 저주하게 하였고, 파렴치로 살게 하였으며, 쉴새없이 닥치는 공포에 떨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어머니가 내게 주었던 자유의 시간이었다. 그것을 깨닫는 데 너무나 많은 시간이 걸렸다. 아니 어머니께서 우리와 유명을 달리하고나서야 비로소 그것을 깨달았다.

 

철부지 시절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내 생애에서 가슴속 깊은 곳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진정 부끄러움을 두지 않았던 말은 오직 엄마 그 한마디뿐이었다. 그 외에 애가 고향을 떠나 터득했다고 자부했었던 사랑, 맹세, 배려, 겸손과 같은 눈부신 형용과 고결한 수사 들은 속임수와 허물을 은폐하기 위한 허세에 불과하였다. 이 소설은 그처럼 진부했었던 어머니에 대한 섬세한 기록이다.

 

마지막 장에 있는 작가의 말을 나는 몇 번이나 되읽었는지 모른다.

확실히 지상의 모든 자식은 어머니라는 존재에 갚을 수 없는 부채를 지고 있다.

아마도 그건 윤회나 부활을 거듭해도 결코 탕감될 수 없는 부채이리라.

다른 모든 것들은 단시 허세에 불과했다는 일흔 셋의 김주영의 고백이

나는 절절했고 그리고 섬득했다.

나란 존재가 평생 어머니를 파먹고 사는 무간지옥의 아귀(餓鬼)임이 분명할 것 같아서... 

 

이 소설은 작가 김주영 어머니에 대한 글이란다.

실제로 그의 모친이 2007년 정부에서 주는 "예술가의 장한 어머니상" 수상자로 결정되는데

어머니는 시상식장에 끝내 올라오지 않으셨단다.

작가의 어머니가 남긴 말은 소설 속 어머니의 말과 정확히 일치한다.

 "골목마다 종갓집이 버티고 있는 이런 괴팍스런 동네에서 사내를 두 번씩이나 갈아치웠다고 입들을 흔들비쭉거리고 눈총받고 살아왔는데, 장한 에미상을 받았다면 그 사람들 배꼽을 잡고 웃을라."

작가는 소설을 쓰면서 어머니의 이야기를 거의 사실 그대로 쓰느라 오히려 어려웠노라 고백했다.

사실과 허구 사이를 계속 고민하다 결국 사실을 선택했노라 말했다.

일흔이 넘긴 나이에 이제 더 이상 숨기고 자시고 할 것이 없었노라고...

일흔의 노구(老軀)가 남긴 어머니에 대한 참회곡.

"내려오셔야 하겠습니다"

성씨 다른 동생에게 걸려온 한 통의 전화.

아들은 무허가 화장터에서 어머니의 뼈와 살을 태우고 그 재를 고향땅에 흩부린다.

어미의 죽음에 이렇게 형식적이고 무덤덤한 후레자식이 있다니...

나는 홀로 어이없이 분개했다.

(내 속이 한 마디 한다. 너라 잘해라!)

아들은 어미를 보낸 후 동생과 보내는 짧은 시간 속에서 다시 어머니를 만났다.

지상에서 어머니를 떠나보내고 나서야 비로소 이뤄지는 모자(母子) 간의 화해는,

일종의 부러움이자 지독한 시기였다.

참회할 것만 가득한 나는

지워지지 않을 원죄(原罪)처럼 꾸역꾸역 이 책을 읽어냈다.

가슴 속에 옹이 하나 굳게 남겨둔 채...

Posted by Book끄-Book끄
그냥 끄적 끄적...2012. 2. 10. 06:27
TV를 거의 보지 않는 내가 요즘 잊지 않고 챙겨보는 드라마가 생겼다.
40% 육박하는 시청률을 자랑하는 MBC 드라마 <해를 품은 달>
정은궐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만든 퓨전 사극 드라마다.
(그런데 사실 퓨전 사극이라는 말. 참 안 어울린다)
내가 처음부터 끝까지 다 본 드라마는 2편 정도였다.
<베토벤 바이러스>, <성균관 유생들의 나날>
그런데 아역 배우들에게 감탄하면서 보는 드라마는 아마도 이게 처음이지 않을까 싶다.
김유정과 여진구에게 연기 수업 받아야 할 어른 연기자들 참 많구나 했다.
정말 배역에 빙의되서 연기하는 아역들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감탄을 넘어서 때론 공포스럽기도 하다.
(이 아이들을 감히 아역이라고 불러도 될까?

 



한가인의 연우역 미스캐스팅 논란과 연기력 논란이 아직까지 있긴 하지만
(공감은 한다. 국어책을 참 성실하게 읽긴 하더라)
어쨌든 성인 연기자로 넘어온 <해를 품은 달>을 보면서 
끊임없이 놀라고 있는 건 아직 어린 배우 김수현의 열연이다.
스물 다섯살이라고 했던가?
<드림 하이> 송삼동도, <자이언트>의 이범수 아역 연기도 본 적이 없어 모르지만
어쨌든 그 나이가 믿어지지 않는 연기다.
"훤앓이"까지는 아니더라도 나도 이 녀석을 보고 있으면
가끔 묘하게 두근거린다. 
배우 김수현의 진면목은
기억을 잃은 연우와의 달달한 로맨스 장면보다는
자신보다 이십년 이상 연배가 있는 선배연기자들과의 장면에서다.
조정대신들과의 그 오묘하고 찰진(?) 밀땅은 혀를 내두르게 한다.
배테랑 연기 경력의 선배들앞에서 주눅들을만도 한데
팽팽하고 짱짱한 것이 제법이다.
때로는 선배들을 압도하기도 한다.
이 녀석!
제법 멋지다!




기사에 보니 이 녀석이 <뿌리깊은 나무> 한석규를 제치고
"사극 속 가장 매력있는 왕 1위"를 했단다.
(이런 설문은 도대체 어디서, 왜 하는지 모르겠지만...)
암튼 요새 김수현이 대세긴 한 모양이다.
(항간에선 김수훤이란다)
정은궐의 소설 <해를 품은 달>을 읽긴 했는데
드라마 작가 진수완이 원작과 적당히 가감해서 현재까진  잘 쓰고 있는 것 같다.
(개인적으로 소설은 드라마처럼 재미있지 않았었는데...)
책과 드라마도 인기있지만
요즘 이 소설의 원작자인 정은궐의 미스터리도 증폭하고 있는 중이다.
<성균관 유생들의 나날>, <규장각 각신들의 나날>에 이어 <해를 품을 달>까지
연속 고공 행진을 이어가고 있다.
정은궐이라는 이름도 "은빛 궁궐"이라는 필명이라는데
얼굴은 물론이고 성별과 직업 그 어떤 것도 공개된 게 없다.
(여자라는 이야기는 있긴 하더만...)
작가 본인이 신상을 밝히는 걸 꺼려해서 모든 인터뷰도 거절하고 있단다.
지금은 청나라로 간 잘금 4인방의 이야기를 준비하고 있다는데
제목이 <청나라 스파이들의 나날>이라나?
(제목을 좀 바꿔야 하지 않을까? <청나라 간자들의 나날> 쯤으로...)
역사나 고어, 대궐 풍습에 대한 지식은 확실히 해박한 것 같다.
뭐든지 한 길을 계속 파면 일가를 이루기는 하는 모양이다.
가끔은 정은궐이란 작가, 로맹 가리 같은 부류는 아닐까 살짝 의심하게 된다.
이미 작가로 엄청난 명성을 얻은 로맹 가리가
에밀 아자르라는 또 다른 이름으로 <그로칼랭>과 <자기 앞의 생>을 쓴 것처럼
이미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유명 작가가 정은궐이란 이름으로 철저히 비밀을 유지하고 작품을 발표하는 건 아닌지...
뭐 안 될 것도 없지 않을까?
소설가 박범신도 <은교>를 발표하면서 그랬다.
"요즘에는 한번 필명으로 작품을 써서 신춘문예나 문학상에 응모해 볼까 싶은 생각도 가끔 들곤 해. 로맹 가리처럼 말이야"
비약일진 모르겠지만 그럴 수도 있을 것 같다.

김수현과 정은궐의 <해를 품은 달>
확실히 대단하긴 하다!
TV와 담 쌓고 사는 나를 이렇게 모니터 앞에 앉혀 놨으니 말이다.
오랫만에 본 낯선 내 모습!
어쩐지 살짝 재미있다.

Posted by Book끄-Book끄
읽고 끄적 끄적...2011. 5. 4. 06:30
김 훈의 책을 읽으면
고인이 된 박완서 작가가 생각난다
(얼마전에 어머님의 뜻에 따라 전재산인 13억을 서울대에 기부한다는 가족들의 발표가 있었다.
 돌아가셔도 작가 박완서는 따뜻한 큰엄마의 모성은 지극하고 감동적이다.
 뒤늦게 작가가 안 되었다면 당신의 삶도 지키고 살아내기 힘들었을텐데...
 돌아가신 고인도, 가족들도 모두 진정한 '오블리스 노블리제'다.)
작가 박완서가 그랬다.
김훈의 버르장머리없는 짧막한 글을 보면서 내내 추웠다고, 
그리고 실제로 그 추위가 자신의 6,25 동난 때를 떠올리게 해서 실제로 몸에 감기몸살이 왔었노라고...
몸이 아프고 으슬으슬했을 때 나도 김훈의 책을 연겨푸 두 권 손에 잡았다. 
내 몸의 추위를 김훈이 글이 주는 더 큰 추위로 버텨보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3주간 약봉지를 끌어안고 있다
겨우 김훈을 말한다.
그런데 정말 말할 수는 있는 건가?

<내 젊은 날의 숲>
오직 눈(目)뿐인 세상.
글이 아니라 한 땀 한 땀 정성으로 그린 그림을 보는 느낌이다.
세밀화 그 이상의 묘사에 나는 감히 감동을 운운하기도 벅차다.
아마도 나는 이 책을 한 열 번쯤은 읽게 될 것 같다.
그리고 그 매 번을 나는 당황하면서 아득할 것이다.
김 훈이란 작가를 절필시키고 싶을만큼 이 글은 내겐 언제까지라도 치명적일 것이다.
아주 명확하게 확실하게...
줄거리뿐만 아니라 묘사 하나하나를 따라가는 것도 아득하다.
이걸 어떻해야 하나...
작은 여백과 빈숨까지 다 보는 시선.
어떻게 그걸 종이위에 그대로 다 표현할 수가 있는가!
김훈은 괴물이다.
그리고 그는 펜을 든 화가다.


o 눈 덮인 숲속의 추위는 바라보기에 따뜻했다.
o 추위 속에서 나무들은 우뚝하고 강건했다.
o 얼음이 녹은 늪의 수면은 팽팽했고 거기에 물벌레 한 마리가 기어다녀도 물은 주름잡혔다.
o 숲이 수런거리는 소리와 나무의 입김으로 가득찬 시간.
o 눈 속에서 꽃이 필 때 열이 나는지 꽃주변의 눈이 녹아 있었다.
o 풀을 들여다보면서 내 몸속으로 흘러들어오는 식물들의 시간을 나는 느꼈다.
o 색깔들이 물안개로 피어나는 시간이었다.
o 완전히 사랑하고 이해해야만 볼 수 있는 빈틈.
o 본다고 해서 보이는 것이 아니고 본다와 보인다 사이가 그렇게 머니까 본다와 그린다 사이는 또 얼마나 
  아득할 것인가
o 백작약 꽃잎이 필때부터 꽃의안쪽에서부터 이미 추락을 예비하는 피로의 낌새가 보였다.
o 작약꽃은 피면서 동시에 졌고 지면서 또 피었다.
o 5월의 숲은 강성했다.
o 편지의 글씨체는 어려보였다.
0 꽃잎에 이슬을 매단 채 아침햇살을 받으면 패랭이꽃 이파리 끝까지 긴장하면서 쟁쟁쟁 소리가 날듯한 기
  운을 뿜어내는데 흐린 날 아침에 꽃은긴장하기 않았다.
o 여름의 숲은 크고 깊게 숨쉬었다. 나무들의 들숨은 땅 속의 먼 뿌리끝까지 닿았고 날숨은 온 산맥에서
  출렁거렸다.
o 꽃은 쳐다보는 사람을 향해서 피어있다.
o 꿈이 힘들어 보이네요
o 저물 때 숲은 낯설고 먼 숲의 어둠은 해독되지 않는 시간으로 두렵다.
o 멀리 보는 시선이 헐거웠다.
o 가엾고 투명한 다임잇소리
o 직접 보지 않았기 때문에 말은더욱 치열히지는 모양이다.
o 깊어서 끌어낼 수 없는 울음이 밴 흔들림이었다.
o 가을의 서어나무는 날마다 헐거워져서 안쪽이 들여다 보였다.
o 나무의 죽음은 느리게 진행되어서 살아가는 일처럼 나무는 죽는다.
   나무는 한 그루 안에서 늙음과 젊음이 순환하는 것이다. 나무의 시간은 인간의 시간과는 다르다.
o 눈이 쏟아지는 날에 흐려서 보이지 않던 것들이 귀를 기울이면 보인다.
o 귀로 더듬는 세상의 모습
o 숲에 눈이 쌓이면 눈에 덮이는 익명성 속에서 나무들은 편안해 보였다.
o 숲에 내리는 눈은 바람에 따라서 풍경을 열었다가 닫고 지웠다가 다시 돌려놓는다.
o 숲속의 겨울 취위는 한군데로 뭉쳐서 강추위가 되지 않고 추위가 숲에 고루 퍼져서 나무들을 덮고 나무
  들은 추위 속에서 풋풋해 보였다.
o 울음이 너무 멀어서 가까이 다가오지 않았다
.


공무원으로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의 뇌물죄와 알선수재로 가족을 부양한 아비도
민통선 안 국립수목원의 계약직 전속 세밀화가가 되어
고요 속에서 꽃과 나무를 들여다 보는 딸도
그 딸에서 새벽마다 절박하게 무내용의 전화를 해대는 엄마도
다 아득하고 가엾고 그리고 시리다.
갓지은 고슬고슬한 밥에 묻혀 주먹밥으로 엉키고 뭉치는 아버지의 하얀 뼛가루를 읽는 건
차라리 고요함이었고 아늑함이었다고 해두자!
아버지의 죽음과 50여년 만에 늙은 여동생에게 인계된 쌍추쌈이 먹고 싶다는 어린 병사의 고요한 일괄 유골이  
서럽게... 서럽게... 겹쳐진다.

새들은 흩어진 따뜻한 주먹밥을 달게 먹었을까?
목울대가 시큰하다.
묵묵히 입 안에 온기를 넣으며 
나는 내내 고요하고 싶다.

* 조연주!
   박범신의 <은교>가 다 자라면 꼭 그녀 같을 것 같다.
   전혀 다른 두 작가가 만든 두 인물이 묘하게도 하나로 겹쳐진다.
   은교와 연주...
Posted by Book끄-Book끄
읽고 끄적 끄적...2011. 1. 17. 06:00
작가 박범신이 말했다.
...... 작가로 36년을 살았지만, 문학은 내게 여전히 자유의 다른 이름이며 또 방부제이다. 일부 독자들은 아직도 '청년작가'라는 이름으로 나를 부른다. 나의 소망은 청년작가가 아니라 죽을 때까지 강력한 '현역작가'로 살아가고 싶다는 것이다...... 쓰는 행위를 멈추지 못하는 게 최근 나의 딜레마다. 소설의 자궁 속으로 들어가 '순직'하고 싶은 욕망이 내 속에서 날로 커지는 걸 보는 건 황홀하면서, 동시에 두렵다 ......

누구보다 열혈청년처럼 열심히 쓰고 있는 현역작가 박범신!
이야기로 만들어낸 꺼리들이 아직 그에게는 무궁무진한 모양이다.
그저 놀랍다.
어느 때는 너무나 순식간에 그가 책을 내는 것 같아 읽어내는 것 자체에 무섬증이 일기도 한다.
그의 몸이 전부 언어가 되어 책 속에 콕콕 들어 박힐 것 같아서...
작은 계집아이 "은교"를 만난 떨림이 채 가시지도 않았는데
어느 틈에 <비지니스>가 눈 앞에 펼쳐져있다.
끔찍하게 자본주의적이면서
끔찍하게 서글픈 현실을 담고 있는 <비지니스>
간교하고도 잔인한 독재자인 자본의 품 안에서
사람들은 단지 실패한 자와 성공한 자, 두 종류만으로 구별된단다.
그리고 교육도 일종의 '비지니스'의 일종이고...
자식의 과외비를 위해 몸을 파는 유부녀와
부잣집의 숨겨놓은 잉여 재산만을 훔치는 전직 강력계 형사 타잔.
그 둘의 관계는 윤리적으로 공평하다.
소설속 그녀는 말한다.
"내가 원죄를 가졌든 그에게도 감춰온 원죄가 있다는 사실이 오히려 기뻤다..."



이 책을 재미있다고 말해야 하나 섬뜩하다고 말해야 하나.
많이 다르긴 하지만 영화 <황해>를 생각나게 한다.
평범한 사람이 살인자가 되는 과정을 그린 영화.
자본주의가 무서운 게 여기에 있다.
평범한 사람을 살인자로, 범죄자로 만들어 간다는 것에...
그것도 아주 쉽게!
이제 세상의 주인은 자본이고
그래서 삶의 유일한 전략은 비지니스란다.
섬뜩하고 무섭지만 그러나 확실히 진실이다.



평범한 주부가 몸을 파는 창녀가 되는 과정도 섬득하지만
강력계 형사가 도둑이 되는 과정이 씁쓸하다.

... 경찰에 몸담고 있던 그 시절의 그는 타협이라곤 할 줄 모르는 우직하고 정직한 사람이었다. 업소에서 뇌물을 주면 뇌물죄를 추가했고, 업소들과 내통하거나 뇌물을 받는 동료들은 가차 앖이 감찰부서로 넘겼다. 결과적으로 불법 영업을 일삼는 업주들은 물론 동료들에게까지 그라는 존재는 눈엣가시가 되었다. 그를 쫓아내려고, 업주들과 동료 경찰들이 짜고 파놓은 함정은 도처에 있었다. 그는 결국 음모에 말려들었고, 마침내 비리경찰로 몰려 경찰복을 벗지 않을 수 없었다. 터무니없는 모함이었지만 업주들과 동료 경찰들이 짜 맞춘 너무도 교묘한 함정이어서 빠져나올 길이 없었다 ...

몸을 팔아가면서 아들의 과외비를 내는 여자는 
아들이 자면서 이 가는 소리를 들으며 몸을 부르르 떤다.

... 아이가 이를 갈면서 걸어가야 할 벼랑길이 한눈에 바라보이는 기분이었다. 그것은 내가 몸을 팔면서까지 부추기고 내몰아온, 자본주의 무한 경쟁 사이로 난 광포하고 가파른 벼랑길이었다. 패배하면 죽는다, 라고 말해온 것이 나였고, 아비가 갔던 길을 답습하면 안 된다, 라고 채찍질해온 것이 나였다. 나는 그 애가 오로지 전사가 되기를 바랐다 ...

소설은 읽으면 읽을 수록 목줄기를 잡아챈다.
숨을 쉬기가 점점 힘들어진다.
적나라한 현실을 들여다보는 건 참 참혹하다.

... 대도(大盜)로 알려진 '타잔의 정부'가 되는 일과 '자식의 과외비를 위해 몸 파는 어머니'가 되는 일 중에서 어떤 것이 더 비윤리적인 일인지를 알 수 없었다. 다른 게 있다면 '타잔의 정부'는 하나뿐이고 '과외비를 위해 몸 파는 어머니'는 이 도시에 여럿이라는 사실뿐이었다. '여럿'이라는 사실이 죄를 더는 길이 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 도시에서의 윤리성이란 안팎에서 일관되게 지켜지는 가치가 아니라, 지켜지고 있다고 객관적으로 인정되어 얻어내는 가치였다. 쉽게 말해 들키면 반윤리, 안들키면 윤리라 할 수 있었다 ...

더군다가 작가 박범신이 작가의 말에 남긴 글이 더 가슴을 옭죄온다.
그는 지금  자본주의적 폭력성을 좀더 적극적으로 다룬 장편 소설 <나의 손은 말굽으로 변하고>를 쓰고 있단다.
뭘 더 보여주고 싶은걸까?
"좀더 적극적으로"라는 표현이 문득 섬득하다.
Posted by Book끄-Book끄
읽고 끄적 끄적...2010. 8. 17. 06:40
만약 이 책이 뼈가 있고 살이 있는 형이상학적인 존재라면
나는 이 책의 단어 하나 하나까지도 전부 오도독 오도독 탐욕스럽게 씹어 삼켜
그대로 내 몸 안에 고이고이 간직하고 싶다.
탐이 나도록 아름답고
겁이 나도록 관능적인 소설 <은교>
이 이야기를 사랑이 아니라고 누가 말할 수 있을까?
누군가의 심장에 칼을 쑤셔박는 심정으로 쓴 노시인의 긴 고백의 글은
여기 이렇게 한 사람의 심장뿐만 아니라 온 몸에 칼 이상의 것을 쑤셔박았다.
그래, 어쩌면 이 글에는 정말 차가운 폭력성이 담겨 있는지도 모르겠다.
생로병사가 없는, 아니 생로병사를 이기는 관능.
그 관능은 시간을 이키는 칼이며,
그러므로 최종적으로 누군가의 죽음을 부른다.
신생(新生)의 폭설같은....



이 이야기는 <살인 당나귀>라는 제목으로
작가 박범신의 개인 블로그(http://blog.naver.com/wacho)를 통해 연재했던 소설이다.
(당나귀는 소설 속 노시인의 몰고 다니던 오래된 코란도이가도 혹은 시인 자신이기도 하다)
한 달 반이라는 짧은 시간동안 폭풍같이 써내려간 이야기.
그리고 그 이야기가 제목을 바꿔 <은교>로 출판됐다.
<고산자>를 발표한 후 박범신은 말했었다.
"감수성을 충분히 해방시키는 아름답고 슬픈 연애소설을 준비중" 이라고...
그리고 그는 <은교>라는 작품을 책으로 출판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지난 37년 동안의 작가 생활을 주마등처럼 떠올리게 하는 작품이다. 내 안의 다양한 욕망과 감수성을 반영했기에 앞으로도 오랫동안 남는 소설일 것 같다." 라고.
그리고 나 또한 거기에 한 마디를 덧붙인다.
내게도 이 이야기가 그렇다고.....
<촐라체>, <고산자> 그리고 이 책 <은교>까지.
박범신은 3권의 책을 "갈망의 삼부작"이라고 이름 붙였다.
<촐라체>에서는 히말라야를 배경으로 인간 의지의 수직적 한계를,
<고산자>에서는 역사적 시간을 통한 꿈의 수평적인 정한을,
그리고 <은교>에 이르러, 비로소 실존의 현실로 돌아와
존재의 내밀한 욕망과 그 근원을 감히 탐험하고 기록했다고 느끼기 때문이란다.
그리고 독자들에게 한 마디 당부를 한다.
'밤에만' 쓴 소설이니, 독자들도 '밤에만' 읽기를 바란다고...
나 또한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이 책을 손에 잡고 있을 때는 대부분 밤이었다.
책을 읽는 동안 가슴은 뜨거웠고
생각은 차가웠다.



69살 노시인 이적요가 17살 계집아이 한은교에게 느끼는 감정을 읽으면서 누구도 감히 비난하진 말자.
부도덕하다고, 혹은 추잡하다고 손가락질하지도 말자.
그걸 "사랑" 아니라면 도대체 뭐라고 이름 붙일 수 있을까?
시인의 노트와 그의 제자가 남긴 노트, 그리고 시인의 변호사 Q.
이 책은 세 사람의 목소리가 번갈아 가며 등장한다.
이야기의 중심은 모두 "은교" 였던가?
혹은 노시인 "이적요" 였던가? 아니면 그의 제자 "서지우" 였던가?
모든 예술과 문학의 시작이 질투라면,
그래, 이 세 사람의 관계는 그대로 예술이고 문학이다.
시인의 노트에 남겨진 글들은
그리고 어떤 시들보다도 아름답고 황홀하다.
단어 하나 하나가 전부 살아서 나를 수시로 꿀꺽 꿀꺽 삼켜버려 읽는 동안
많.이.두.려.웠.다.



자신이 사망한지 1주기가 되는 날 발표하라는 시인의 노트.
그 속엔 두 가지 비밀이 쓰여있다.
자신이 은교를 사랑했다는 것과, 그리고 자신의 제자 서지우를 죽였다는 것.
그럼으로 해서 자신이 판 암굴 속으로 스스로 걸어들어가 죽음을 선택한 노시인.
그의 머리맡엔 은교가 선물한 작은 토끼 인형이 놓여 있었다.
총.총.총. 뛰던 은교의 발소리를 떠올리게 하는 토끼...
평생 시(詩)만을 써온 시인 이적요가
서지우라는 제자의 이름을 통해 발표한 포르노그래피 소설.

...... 어쨌든 나는 사람들이 '천박한 것'이라고 비난하도록 획책해 쓴 그것이, 시인 이적요의 작품이라고 까발겨질 날이 언젠가 올 거라고 예감했고, 그 작품이 마침내 책이 되어 나왔을 때, 본능에 따른 나의 또다른 충동, 예컨대 나와 나의 시세계가 얼마나 하찮은가 하는 것을 세상에 극적으로 까발리는 과정 안에, 돌입했다고 느꼈다.... 결국은, 시인으로 성역화해온 나의 '빛나는 성취'를 스스로 시궁창에 버리고 싶은 자학의 한 수단으로, 서지우를 대리인 삼아 내가 '당신들 문법'에 맞춰 포르노그래피 소설을 썼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

문학은 어떤 이에겐 질병이라고 했던가?
그래서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그런 사람도 있다고...
노시인은 자신의 제자를 두고 이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결국 자신 또한 고백한다.

...... 내가 세상이라고, 시대라고, 역사라고 불렸던 것들이 사실은 직관의 감옥에 불과했다는 것을, 시의 감옥이엇다는 것을 알았다. 나의 시들은 대부분 가짜였다 ......

그리고 이 말은 은교라는 한 아이를 사랑함으로써 시작된 고해성사로 끝을 맺는다.

...... 너를 만나고 비로소 나의 진짜 얼굴을 스스로 보게 된 셈이다. 세상 사람들은 그러므로 나의 '진짜' 얼굴을 보아야 한다. 시인 이적요는 '전략'에 따라 자신의 '우상화'를 염두에 두고 시를 써온 '가짜 시인'이었고, 불과 열입곱 살 된 소녀를 통절하게 간음하고 싶었으며, 질투심에 눈이 멀어 끝내 제자를 죽인 사람이다. 어떻게 그 사실을 다 묻어두고 무덤 속에서나마 그 모든, 시끄러운 우상화를 받아들일 것인가. 인생의 마지막에 너를 통해 만나 경험한 본능의 해방이야말로, 나의 유일한 인생, 나의 싱싱한 행복이었다. 그게 바로 나 이적요다. 이적요는 본능을 가진 인간이었을 뿐 신성을 본 적도 만난 적도 없다. 그러하니, 아무도 더이상 내게 속지 말라...... 그리고 내 무덤에 짐승이라고 침을 뱉고 살인자라고 돌을 던지라. 그것이 나의 마지막 소망이다 ......



책은 지독히도 탐욕적이고 관능적이며
동시에 문학적 은유들로 넘실댄다.
누군들 맘 속에 자신만의 처녀이자 자신만의 등롱인 "은교"가 없을까?
맘 속에 간직한 신성(神性)에 가까운 영원한 신부 "은교"
그렇다면 그 "은교"에게로 향하는 길이
멸망으로 이르는 좁고 어두운 길이라 한들 누군들 간절히 가고 싶지 않을까!

...... 은교를 만나면서 나는 보다 젊어지고 싶었다. 그게 죄인가. 그 애를 통해 아직도 생피처럼 더운 나의 욕망을 확인했을 뿐, 나는 아무런 범죄도 저지르지 않았다. 나의 은닉된 욕망에게 형벌을 선고할 수 있는 자는 그러므로 나뿐이다 ...... 아니, 청춘이 될 수 없을지라도 청춘인 듯이, 나는 젊은 저들과 오지게 맞장을 뜨고 싶었다 ......
 
숨통을 조여오면서도 숨통을 트이게 하는 문장이다.
이 아름답고 지독한 연애 이야기를 나는 또 어떻게 감당할까?
사랑, 질투 그리고 음모라는 통속적인 단어로 이 소설을 말하고 싶진 않다.
이 소설은...
그대로 한 편이 시이고
그대로 한 점 풍경화다.
그러므로 이 책을 읽게 되는 이여!
반드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으니, 그것은 
눈빛이다.
그들의 눈빛!
그리고 당신의 눈빛!

은교는 나에게 슬픔과 함께, 생애에 경험해보지 못한, 청춘의 광채와 위로를 주었다.
사.실.이.다.
나는 어느새 이적요가 되어 늙은 관 속에 내 몸을 누인다.
누윈 몸은 고요했으며 더불어 편안했다.
Posted by Book끄-Book끄
달동네 책거리2009. 12. 16. 05:48
 <고산자> - 박범신


고산자 


1993년 문화일보에 소설을 연재하다가 돌연 절필을 선언했던 박범신이 몇 년 전부터 열혈 청년 작가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1946년 생으로 올해 63세, 청년 작가 박범신!

2008년 네이버에 연재된 <촐라체>라는 소설을 아주 인상 깊게 읽은 기억때문인지 올 해 그의 생애 첫 역사소설 <고산자>가 출판된다고 했을 때 개인적으로 기대가 컸습니다.

“절필 선언 이후 처음 쓴 소설 <흰소가 끄는 수레>에서 작년에 출판된 <촐라체>까지 지난 10년 동안 나는 자기성찰, 구도 등 내면에 많이 붙잡혀 있었습니다. 한번 나로부터 떠난 소설을 갖고 싶었어요. <고산자> 이후에는 어떤 것에도 억압받지 않고 소설의 바다로 나아가고 싶습니다."

책을 발표한 후 인터뷰에서 그가 한 말입니다.

박범신, 아마도 그는 작가로서의 한 세대를 끝내고 이제 새로운 세대로 넘어가려는 모양입니다. 지금까지 자신이 살았던 시대는 너무 바빴고 변화가 많아서 현실을 보는 데만 급급했다고 고백하는 그가 이제 역사적 시점으로 눈을 돌리고 싶다고 말하네요.

앞으로 종종 역사소설을 쓰고 싶다는 박범신, 아무래도 <고산자>라는 작업이 그에게 또 다른 구도의 길이 됐던 건 아닌지 생각합니다. 


“평생 시대로부터 따돌림 당했으니 고산자(孤山子)요, 나라가 독점한 지도를 백성에게 돌려주고자 하는 그 뜻이 드높았으니 고산자(高山子)요, 고요하고 자애로운 옛 산을 닮고 싶어했으니, 그는 고산자(古山子)라고도 했다.”

대동여지도를 만든 고산 김정호(金正浩)!

그러나 지도의 명성에 비해 고산 김정호에 대한 기록은 이상하리만큼 미미하고 그 생애 또한 확실치 않다고 합니다. 생존 시기도 단지 추정에 불과할 뿐, 고향은 물론 본관, 신분조차도 여러 설로만 전해지고 있다고 하네요.

누군가는 김정호가 자신이 만든 상세한 지도 때문에 첩자로 몰려 옥사했다고도 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백두산에 올라 신선이 됐다고도 합니다.

김정호의 생에 대한 추적과 대동여지도와 관련된 진실.

<고산자>에서는 이 두 가지에 대한 작가적 상상과 해석을 만날 수 있습니다.

매서운 눈보라가 몰아치는 어느 겨울,

김정호의 아비 김해준과 22명의 무지렁이 백성들은 “홍경래의 난” 진압을 위해 차출되어 산을 넘다 그만 눈보라 속에서 길을 잃고 억울한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당시 그들은 관아에서 독점하여 제작, 관리했던 지도 한 장에 의지한 체 길을 떠난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엉터리 지도가 22명의 젊은 생명을 그대로 차디찬 눈 속에 생매장하게 만드는 이유가 됐죠.

실종된 아비를 찾아달라고 탄원하다 결국 고향 땅을 등지고 도망을 가야 했던 어린 김정호는 생각합니다.

“지도는 나라의 것이기에 앞서 백성의 것”이어야 한다고...

이 생각이 그의 온 생애동안 조선팔도를 직접 두 발로 걸으며 정확한 축적의 지도를 만들게 하는 시작이 되었습니다.

비록 허구일지라도 그가 홀로 지도제작에 일생을 바친 이유를 이 책에서 만날 수 있죠.

“조정과 양반이 틀어쥔 강토를 골고루 백성에게 나눠주기 위해서이고, 조선이라는 이름의 본뜻이 그러하듯, 강토를 세세히 밝혀 그곳에서 명줄을 잇고 있는 사람살이를 새롭게 하고자 한 것뿐이다. 땅의 흐름과 물의 길을 잘 몰라 떠도는 사람은 더 이상 없어야 한다. 그뿐이다.”

대동여지도는 22첩의 분철절첩식으로 고안된 목판본 지도입니다.

물에 불린 피나무를 이용해 22첩의 목판본 하나하나를 사람의 손으로 직접 조각해서 만든. 그것도 산맥의 고저, 강폭의 너비, 길의 유무까지 세세하게 기록한 미스터리에 가까운 정확성을 보여주고 있는 지도죠.

분철한 이유는 커다란 지도를 전부 가지고 다니는 불편을 없애고 필요한 부분만 간편하게 들고 다니기 위해서였다고 합니다.

대동여지도엔 “독도(우산국)”이 표기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아시나요?

일본이 독도를 자신들의 땅이라 주장하고 내세우는 근거에 고산 김정호의 대동여지도가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아는 분은 그리 많지 않을 겁니다.

그들은 말하죠.

“봐라! 너희들이 가장 정확한 지도라고 말하면서 그렇게 자랑스러워하는 대동여지도에도 독도가 빠져있지 않느냐?”

그러나 “독도”가 빠진 이유는 정확한 축적을 위해서였다고 합니다.

대동여지도에 독도를 표기하기 위해선 축적을 무시하고 울릉도 바로 옆에 그리던지 아니면 별도의 목판 2개를 덧대 지도의 외형을 사각틀에서 완전히 벗어나 삐져나오게 하던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고 하네요.

고산 김정호의 선택은 정확한 축적 표기를 위해 독도를 제외시켜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아마도 그건 박범신의 지적처럼 “뛰어난 과학자이며, 섬세한 예술가”였던 김정호의 장인정신에서 비롯된 고집이 아니었을까 생각됩니다.

그리고 당시 벌목금지와 고가의 목판 가격도 한 몫 했을 거라는 지적도 있습니다.


<고산자> 이 책은 상상된 이야기를 따라가는 재미도 숨겨진 역사를 따라가는 재미도 골고루 갖춘 천상 이야기라는 생각이 듭니다.

팩션소설이긴 하지만 어쩐지 역사에 비중이 조금 더 많이 느껴지는... 그러나 실제로는 역사보다 작가 개인의 상상력이 훨씬 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도 전 자꾸 역사를 들여다보는 느낌이네요. 물론 정사(正使)는 아니고 야사(夜思)나 잠사(潛史)쯤이라고 할까요?

전혀 알려지지 않은 그의 인간적인 삶에 대한 조명이며, 인연들, 그리고 신분을 넘는 지식인들과의 만남 김병연(김삿갓), 이규경, 최한기, 신위 등). 천주교 박해와 민초들의 난까지.

저에겐 조금씩 가물가물해진 역사를 다시 생각하게 만들어 준 좋은 계기가 된 책이었습니다.

작가 박범신은 첫 역사소설로 고산 김정호의 이야기를 쓰면서 “현실에 어떻게 관계하면서 살아야 하는지를 많이 배웠다”고 술회합니다.

그러면서 이제부터는 청년보다 “늙어가면서 깊어져서 향기로운 길을 가고 싶다”는 소망을 밝히기도 했습니다.

그런 그가 지금 준비하고 있는 책은 는 "감수성을 충분히 해방시키는 아름답고 슬픈 연애소설"이라니 왠지 그 이야기도 기대가 되네요.

작가라는 세계.

참 부럽지 않습니까?

이렇게 역사에 개입할 수도 있고 환갑을 넘긴 나이에 아름다운 연애를 꿈꾸고 있노라 대중 앞에 밝힐수도(?) 있으니 말입니다.

작가들처럼 직접 쓰는 행위로 개입을 할 수 없는 우리 민초들은 이렇게 “읽음”을 통해 살짝 그 끄트머리의 세계로 동참을 꿈꿉니다.

어쩐지 은밀한 즐거움까지도 발견하게 되네요.

겨울입니다.

열심히 읽고 더 많은 개입을 꿈 꿀 수 있는 시간 여행의 문이 열리는 시간입니다.

떠나는 당신의 여행 가방 안에 담겨도 좋은 한권의 책, <고산자>였습니다.




Posted by Book끄-Book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