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끄적 끄적...2011. 4. 21. 06:12


또 다시 봤다.
Jekyll & Hyde.
이번 시즌 네 번째 관람이고 이 말에 '벌써'라는 수식어를 달기에는 상당히 많이 뻘쭘하다.
이번 시즌만도 10번 이상 본 사람이 수두룩할테니까...
개인적으로는 이번 시즌 자체 막공이라고 생각하고 예매했던 공연이다.
류정한의 마지막 지킬 선언에 이어, 김선영의 마지막 루시 선언...
아마도 류지킬의 막공 루시가 김선영이었다면 굳이 예매까지 하는 수고를 보이진 않았을거다.
김소현 엠마를 피하고 김준현, 홍광호 지킬을 피하고나니 남들에게 필사적이었던 조승우 지킬이 김선영 루시때문에 어부지리가 됐다.(음하하 ^^ 묘한 쾌감이 있다.)

OD 컴퍼니에서 차기작으로 계획되어 있던 <라만차>를 엎고 8월까지 이 작품을 계속 가기로 했다니 장사가 소문보다 훨씬 더 잘되는 모양이다. 
거기다가 8월 이후로는 지방공연이란다.
역시 지킬은 OD 최고의 효도상품이 아닐 수 없다. (근데 어째 좀 뒷끝이...)

조승우가 영화 촬영으로 5월 초에 빠지면서 
그럴싸하게 새로운 지킬을 뽑겠다며 대대적으로 오디션을 본 모양인데 
공개된 캐스팅은 내 예상과 정확히 일치한다.
<아이다>를 마친 김우형의 지킬 복귀와
<오페라의 유령>의 크리스틴 최현주가 <몬테크리스토>를 마치고 새롭게 엠마로 투입된다.
그러니까 오디션은 일종의 쇼였던 셈...
세상에 짜고 치는 고스톱은 많다.
조승우도 빠지는 마당에 안전하게 가고 싶은 심정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그래도 10년의 관록 OD이고 신춘수인데,
한 명 쯤은 정말 완벽히 새로운 new face가 있지 않을까 조금은 기대했건만... 

 

 

조승우 지킬!
첫 대사부터 오래 누적된 신체적 피로와 정신적 피폐함이 여실히 느껴졌다.
넘버들을 부를 땐 클라이막스에서 아주 많이 낮춰부르기까지 한다.
그리고 이렇게 낮춰부르는게 이젠 거의 정석이 되어버린 것 같아 안타깝다.
동작 하나 하나에, 대사 한 마디 한 마디에 무거운 피로감이 뚝뚝 넘쳐나게 흐른다.
보는 입장에서 참 안스럽고 조마조마해서 몹시도 불편하고 그래서 더불어 혼곤하게 피곤했다.
그런데 참 신기한 건,
이런 불편한 피로감이 오히려 묘한 긴장감을 줬다는 사실이다.
This is the moment를 부르기 전에 지킬이 집사 풀에게 던지는 대사 한 마디.
"우리 아버지의 한참때를 기억해?"
나 역시 확실히 그리고 똑똑히 기억한다.
조승우 지킬의 한창 때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시즌의 조승우 <지킬 앤 하이드>가 감동적인 이유는,
확실히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섬세하고 깊이있는 연기에 있다.
솔직히 넘버들은 예전의 모습에 비하면 너무도 많이 "허약"해졌지만 (이 단어 정말 절실하다....) 
그의 연기는 그 어느때보다 지금이 가장 감탄스럽다.
Jekyll에 가까운 Hyde,
Hyde에 가까운 Jekyll의 모습은 작품 자체를 완벽하게 반전시킨다.
이 날 공연을 보면서,
나는 Jekyll의 고집과 집념이 너무나 Hyde스러워 때때로 신물이 났다.
대사 톤도 오히려 Jekyll일때 빠르고 강팍했고, 
Hyde는 느리고 진중해 오히려 따뜻했다.
점점 Hyde에 지배당하는 Jekyll을 보는 건 연민이고 아픔이고 괴로움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그런 복합적인 감정을 그렇게까지 잘 표현할 수 있을까?)
"내가 가야 할 길"은 개인적으로 아주 의미있게 생각하는 두 장면 중 하나인데
(나머지 하나는1막 후반부의 절절한 4중창)
이번 시즌에서는 단 한 번도 만족감을 느끼지 못했었다.
그런데 이 날 절규에 가까운 조승우 지킬의 연기를 보면서 솔직히 진심으로 아득했다.
그 순간만큼은 조승우 Jekyll이 통제하고 있었던 게
비열하고 잔혹한 Hyde가 아니라 확실히 "나"였다!
이 날 공연을 보면서 이제 다시 조승우 Jekyll은 보지 말자 다짐했다.
눈 뜨고 볼 수 없을만큼 아프고 불쌍해서
깊은 연민과 달래질 수 없는 슬픔으로 내 몸 마디마디가 다 쓰라리고 아팠다.
누군가 직접 내 몸에 대고 거친 망치질을 하고 있는 느낌!
만약 또 이런 느낌을 받게 된다면 
공연장에서 어쩔 수 없이 거칠고 강팍한 통곡을 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김선영 루시!
뮤지컬계의 여신이라고 불려지는데 솔직히 그 찬사조차도 그녀를 표현하기에는 부족하다.
2004년 겨울인가 2005년 봄인가 그녀가 처음 루시로 캐스팅 됐을 때가 생각난다.
그때 그녀는 무대 위에서 아주 수줍었고 어색했으며 그리고 춤도 뻣뻣했었다.
오히려 한참 어린 소냐 루시가 무대 위에서 더 여유로웠고 관능적이었다.
그렇다고 지금의 선영 루시가 엄청난 관능미를 발산하고 있다는 말은 아니다.
그녀의 루시는...
뭐랄까? 아주 깊은 은밀함과 처연함으로 가득하다.
dangerous game에서 소냐는 극도의 관능미가 느껴지지만
선영 루시는 극도의 보호 본능과 연민을 불러일으킨다.
어떻게든 그녀를 하이드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게 해주고 싶다는 절박한 간절함.
꼭 거미줄에 걸린 여리고 순한 생명을 보는 느낌이다.
지금까지 딱 한 번 봤었다.
내가 본 그녀의 모든 공연을 통틀어 무대 위에서 그녀가 소위 삑사리라는 것을 내는 걸...
(그때도 Jekyll & Hyde 무대이긴 했다)
그녀는 신앙에 가까울만큼 절대적인 믿음을 져버리지 않고 
언제나 안정적으로 연기했고,
늘 아름다운 고음을 완벽에 가깝게 거뜬히 표현했다.
(그래도 그 정체불명의 빨간 모자는 정말 안습이다...제발~~~!)
가끔은 궁금하기도 하다.
그녀에게 슬럼프라는 게 있기는 할까?.
안정적이라는 게 어쩌면 변화없고 평이하다는 말의 완곡한 표현이 될 수도 있겠지만
그녀의 안정감은 노련함과 완벽함의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김선영이라는 배우는,
배역의 중요도나 포지션이 아니라
그녀 자체로서 이미 빛이 나는 절대적인 존재감을 발산하다.
(이런걸 "미친 존재감" 혹은 "아우라"라고 표현해야겠지!)
이번 시즌을 끝으로 그녀 역시도 류정한처럼 배우로서의 그녀 삶에서 루시를 떠나보낸다.
그러나 난 여전히 기대하고 기다린다.
또 다시 어떤 시작을 선택함으로써 스스로 빛을 발할지를... 
 

 
조정은 엠마는 자리를 잘 잡은 것 같다.
그러나 최현주 엠마가 들어오면 솔직히 좀 위태로울 수도 있을 것 같다.
최현주라는 배우가 워낙에 발성이 좋고 하모니와 발란스를 잘 맞춰서...
혹시 그녀가 들어오면 지킬, 어터슨, 엠마, 덴버스경의 4중창이 다시 웅장해질 수 있을까?
그렇다면 자체 막공이라는 이날의 다짐이 무효가 될 수도 있는데... ^^
어터슨 이희성은 여전히 과도하게 흥분하는 것 같고
주교 김태문과 프룹스 이용진도 웃음 코드가 너무 강하다.
(그리고 여전히 도플갱어같은 머리 스타일이고...)
예전보다는 공연이 전체적으로 점점 가벼워지는 건 개인적으로 많이 아쉽다,
지킬 한 쪽으로만 무게감이 집중되는 것 같아서 어째 불안불안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시 <Jekyll & Hyde>는 명물허전이다.
보면 볼수록 지킬을 연기하는 사람에 따라 새로운 발견과 감동을 찾게 된다.
Jekyll 자신의 고백처럼 딱 그런 공연이다.

"이젠 멈출 수가 없어요. 중독처럼..."

그래서 정말이지 이제 그만 선전했으면 좋겠다.
솔직히...

Posted by Book끄-Book끄
보고 끄적 끄적...2011. 4. 11. 08:53


<봄 날>

부 제 : 가슴으로 만나는 아름다운 시간
일 시 : 2011.03.31. ~ 2011.04.17.
장 소 : 대학로 예술극장 대극장
대 본 : 이강백
연 출 : 이성열
주 최 : 극단 백수광부
출 연 : 오현경(아버지), 이대연(장남),
         장성익, 강진휘, 정만식, 박완규,
         유성진, 김현중, 김란희


배우 오현경이 또 다시 아버지 역으로 출연한다는 소식만으로도 무척 탐나는 연극이었다.
행여 놓칠세라 서둘러 조기예매를 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1984년 초연 당시 제 8회 대한민국연극제 대상을 수상했던 작품.
2008년, 무려 24년만에 극단 백수광부와 이성열 연출에 의해 다시 무대에 올랐을 때
전석 매진이라는 대기록을 세우면서 서울연극제 연출상까지 수상했다.
그리고 이번엔 24년만이 아니라 3년만에 올려진 세번째 <봄날>
1984년, 2008년에 이어 또 다시 배우 오현경이 아버지 역으로 무대 위에 선다.
배우 윤소정과 오현경.
존재감만으로도 무대를 빈틈없이 꽉 채우는 대가들.
이런 찬사조차도 배우 오현경과 윤소정에겐 왠지 민망하고 죄송스럽다.
도대체 어디서 그런 열정과 힘이 나오는 걸까?


짧은 봄날같은 젊음!
젊음은 구차한 욕망이고 버려진 그리움은 질기디 질긴 절망인가?
젊음도 그리움도 단지 탐욕의 다른 이름처럼 느껴진다.
회춘을 꿈꾸며 어린 소녀를 품어 따뜻한 기를 받으려하는 초라한 늙음도
그런 절대권력의 아비를 상대로 역성혁명을 꿈꾸듯
아비를 속이고 숨겨놓 재산을 파헤쳐 대처로 떠나 돌아오지 않는 비겁한 젊음 역시도
비루하고 누추하긴 모두 마찬가지다.
그러나 어쩌랴!
그 비루함이 바로 인간의 모습인걸...
따지고보면 젊음도 봄날도 너무 짧기에 그 댓가가 이렇게 큰 건지도 모르겠다.
산불로 황폐하고 시커멓게 변해버린 청계산의 아무도 끄지 않는 불처럼..

 

의외로 무대와 뒷배경이 빈약하고 초라해서 놀랐다.
그래도 배우 오현경이 나오는 작품인데...
그런데 참 신기하고 이상한 건,
30여분이 지난 뒤 아버지 역의 오현경 선생님이 등장하면서부터는
정말이지 무대의 휑한 여백은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더라.
장남으로 나오는 이대연도 그러더라.
"선생님은 무대에만 서시면 기운이 솟아나세요.
 평소와 달리 무대에 서는 순간 엄청난 집중력이 살아나시거든요"
75살의 배우 오현경은,
쉰아홉에 식도 수술을 받을 당시 상태가 안 좋아져서 심폐소생술로 간신히 살아났다고 한다.
그리고 계속되는 위암, 목디스크 수술을 포함한 4번의 대수술. 
현재 체중은 고작 54kg이란다.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 
54kg의 몸피를 가진 노인의 발성으로 공연장 전체가 그렇게 꽉꽉 찰 수 있다는 사실이...
딕션은 또 얼마나 정확하시던지... 
무대에 서 있는 모습 자체가 감동이었다.
공연이 끝나고 함께 연기했던 자식같은 후배 배우들도
그리고 관객들도 진심으로 우러나오는 감동의 박수를 보냈다.
(연극 자체도 감동적이지만 마지막 그 모습은 꼬끝이 찡하게 감동적이었다)

 

무대가 짱짱하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존재감을 발산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배우 오현경의 모습을 보면서 마디마디 절감하고 감동했다.
“전 감투, 돈과 같은 세속적인 욕심은 전혀 없어요. 하지만 다 내려놓을 때도 됐는데도 배우의 자존심만은 양보 못하겠어요. 어두운 객석의 누군가가 최선을 다한 나의 연기에 ‘감정의 교류’를 했을 거라는 자부심, 그게 바로 배우의 자존심이죠.”
이동은 시간적인 것이고 정착은 공간적인 것이다.
그래서 음악은 시간예술이고, 미술은 공간예술에 속한다면
배우는 이 두 가지를 전부 아우르는 존재가 아닐까?
새로운 정착지를 찾아다니는 유목민으로서 배우의 완성은
그런 이유로 시간의 경과가 필연적인지도 모르겠다.
솔직히 나는 "아우라"라는 말에 그닥 긍정적인 편이 아니다.
그런데 배우 오현경의 무대를 보면서
왜 우리가 배우를 향해 "아우라"를 운운하는지
그 근본적인 이유를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건 카리스마조차도 쉽게 접근할 수 없는 그런 위엄이고 진심으로 충만함이었다.
그가 무대에 선 모습을 또 다시 볼 수 있을까!
폭력같은 갈증이 목울대를 넘는다.
울컥, 울컥!
배우 오현경은 좋겠다.
그는 결코 더 이상 나이들지 않으리라.
그의 회춘이, 그의 청춘이
그의 이팔청춘이 나는 눈부시게 고맙다.

노쇄한 아비가 남긴 마지막 말끝이 내내 나를 붙잡는다.
"그놈들 얼굴이나 다시 봤으며...
 죽기 전에 다시 봤으면..."

그래, 봄날은 너무 짧다.

Posted by Book끄-Book끄
달동네 책거리2010. 10. 5. 05:24

<환상의 책> - 폴 오스터

 환상의 책

폴 오스터...
참 매력적이고 그리고 신비감 가득한 미국 작가입니다.
개인적으로 “폴 오스터”와 터키의 국민 작가 “오르한 파묵”을 자꾸 비교하게 되는데요, 두 사람 모두 신비적 탐미주의자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습니다.
차이가 있다면 “오르한 파묵”은 환상 속에서 현실을 이야기한다면 “폴 오스터”는 정확히 그 반대의 방법을 택하죠. 현실 속에서 환상을 이야기하는...
그러면서도 두 작가의 이야기 방식은 참 묘하게 닮아있습니다.
“오르한 파묵”이 지적이고 명석한 백과사전적인 글을 치열하고 아름답게 쓴다면, “폴 오스터”는 가십거리스러운 사건을 잡아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면서 현실감을 갖게 만듭니다.
둘 다 범접할 수 없는 독특한 스타일을 만들어 낸 작가라고 할 수 있죠.
그리고 두 사람의 책을 우리나라에 번역하는 번역가도 멋진 한 쌍의 페어를 연출합니다.
“오프한 파묵”에게는 번역가 “정영목”이, “폴 오스터”에게는 번역가 “황보석”이...
아마도 두 이국의 작가가 다른 번역가들을 만났다면 과연 지금과 같은 느낌을 전달받을 수는 없을 것이라 감히 단정합니다.

폴 오스터의 소설들...
참 재미있습니다. 그러나 읽기를 쉽게 포기하게 만드는 책이기도 하죠.
소위 말하는 고비를 넘어야만 폴 오스터의 이야기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일단 그 고비를 넘기면 손에서 놓기가 싫어질 정도죠. 그런데 그 고비라는 게 좀처럼 넘기가 힘들다는 게 문젭니다.
읽지 않고 포기하는 자에게는 결코 비밀의 문이 열리지 않으리라는 묵시록 같기도 합니다.
우리나라에 현재 그의 소설은 전부 14권이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 중에서 저는 정확히 8권의 소설을 읽었네요.
개인적으로 폴 오스터의 화두(話頭)는 실종과 풍자, 그리고 미스터리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읽은 폴 오스터의 거의 모든 주인공들은 결국은 실종을 선택하죠.
그 과정에서 우리는 숱한 미스터리와 세상을 향한 풍자를 맞닥뜨리게 됩니다. 그리고 그 길고 긴 실종의 과정은 동양의 선(仙) 사상과 묘하게 닮아있기도 합니다.
2002년 쓰여진 이 책의 원제는 “Book of illusion"입니다.
2008년 우리나라에 발표된 “환상의 책”이라는 제목보다는 “Book if illusion"이라는 원제가 확실히 더 폴 오스터스럽네요.
"illusion"이라는 뜻에는 왠지 은밀하고 비밀스런 느낌이 있는데, "환상"이라는 단어는 허황된 눈속임과 노골적인 드러냄이 느껴지기 때문이죠.
“Book of illusion"의 첫 장은 프랑스 낭만주의 작가 “샤토브리앙”의 짧은 글로 시작됩니다.
...... 인간은 하나의 동일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니다.
    끝에서 끝까지 이르는 여러 다른 삶을 살며 그것이 바로 비극의 원인이다 .....

그러니까 이 책은 두 사람이지만 동시에 같은 사람이기도 했던 누군가에 대한 기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두 사람의 같지만 다른 삶 이야기, 그리고 추적과 멈춤, 끌어당김과 거부가 잔잔하지만 집요하게 이어집니다.
그리고 그건 모든 인간의 모습, 그것이기도 하죠.

오래 전에 실종된, 그래서 죽었다고 믿어지는 무성 코미디 배우 “헥터 만”, 그리고 얼마 전 비행기 사고로 사랑하는 아내와 두 아이를 잃고 스스로를 불행의 삶 속으로 밀어 넣는 것으로 시간을 보내는 대학교수 “데이비드 짐머”.
어느 날, 데이비드는 TV를 통해 헥터 만이 출연한 오래된 무성 코미디 영화 한 편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헥터의 콧수염과 양복은 그에게 깊은 아우라를 남기죠.
절망 속에 살던 대학교수 짐머는 세상에 남겨진 헥터의 무성영화 12편을 보기 위해 집을 나서 몇 개월 동안 세계를 돌아다닙니다. 그리고는 다시 9개월 동안 칩거하듯 세상과 단절한 체 헥터 만에 대한 집필을 시작하고 드디어 <헥터 만의 무성 세계>라는 제목의 책을 출판하게 됩니다.
그리고 어느 날 우편함에 배달된 한 통의 편지.
헥터 만의 부인이라고 자처하는 사람이 쓴 편지의 내용은 "그가 당신을 만나고 싶어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데이비드는 처음에는 이 편지를 믿지 않았습니다.
그가 진짜 헥터 만인지 어떻게 아느냐는 답장에 그녀는 다시 편지를 보냅니다.
“제 말이 진실임을 아시는 유일한 방법은 초청을 받아들이시는 것입니다.”
편지는 계속 이어집니다.
“그 사람이 1929년 할리우드를 떠난 뒤 여러 편의 장편 특작 영화들을 쓰고 감독했다는 말씀을 드린다면 오시겠다는 마음이 드실는지요? 헥터는 이미 아흔이고 나날이 건강을 잃어 가고 있어요. 그 사람은 제게 남긴 유언장에다 자신이 세상을 뜨고 나서 24시간 내에 그 필름들과 원본을 모두 파기하라고 했는데, 저로서는 그 사람이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그녀의 편지 내용대로라면 헥터 만은 스스로 자발적인 실종을 선택했다는 이야기네요.
이 대목에서 주인공보다 오히려 제가 더 헥터 만의 진실을 추적하고 싶어지는 열망이 가득합니다.
다행히 그를 데리고 가기 위해 한 여자가 등장합니다.
헥터 만의 전기를 쓰고 있다는, 헥터 만과 함께 영화를 만들었던 카메라맨의 딸 엘머가.
함께 뉴멕시코 블루스톤 농장을 향하면서 데이비드는 헥터 만의 모든 생애에 대한 이야기를 자세히 듣게 됩니다.
그야말로 그녀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나다니엘 호손의 <모반>처럼 그를 산 채로 먹어치워 버렸습니다.
영화배우로서의 헥터 만의 삶, 그리고 스스로 실종을 선택하고 콧수염을 자르고 양복을 벗고 허먼 레서로의 삶, 얼굴을 가면으로 가리고 라이브 포르노 공연배우로 살았던 삶.
그는 그 삶들이 자신에 대한 보복 내지는 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죽음보다 단순하고 파멸보다 더 나은 방법, 끝장을 보지 않고서도 자신을 계속 죽여 나갈 수 있는 방법으로 그는 타락을 선택했던 거죠.
... 만약 내 삶을 구할 생각이라면 그 삶을 파멸시키기 일보 직전까지 가야 한다....
그런데 참 아이러니하고 재미있는 건,
헥터 만의 삶이 바로 데이비드의 삶이기도 하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두 사람은 분명 다른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어쩌면 두 사람의 삶이 이렇게까지 동일할 수 가 있을까요?
“도플갱어” 혹은 “평행이론”이었을까요?

이 이야기는 일종의 “미궁”입니다.
비극적이면서 동시에 희망을 주는 결말.
어쩌면 “믿거나 말거나”류의 황당한 결말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다 읽고 나면 말이죠. 이런 생각을 심각하게 하게 됩니다.
“이게 정말 허구일까?”
폴 오스터의 이야기의 끝은 항상 그렇습니다.
“당신들이 이 책을 읽고 있을 때면 이 책을 쓴 사람이 벌써 오래전에 죽었다고 믿어도 좋다.”
이런 신비주의가 무책임의 한 형태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세상 모든 사람의 삶은 어쨌든 모두 익명성의 보장이고, 실종이고 그리고 은밀함의 추구임에는 분명하죠.
“나는 빌려다 쓰는 삶을 살고 있었다.”
폴 오스터의 소설 속 주인공들은 매번 이런 고백을 합니다. 그렇게 말함으로써 읽는 이에게 당신의 지금 삶은 어떠며 은밀한 질문을 던지죠.
만약에 빌려다 쓰는 삶이라고 느낀다면 그것은 단지 잠시 동안의 실종이라고 말합니다.
조만간 누군가에 의해 진실이 담긴 삶의 문이 열릴 것이고 그렇게 되면 당신의 이야기는 맨 처음부터 다시 새롭게 시작될 거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지금은 은밀하고 비밀스럽게 잘 보관하고 있어야 한다고 충고하는 셈이죠.
끝나지 않은 이야기를 읽고 있다는 느낌.
그러데 그 이야기는 앞으로도 결코 끝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세상에는 알아야 할 이야기가 있고 알지 않는 게 오히려 더 좋은 이야기가 있다고 합니다.
이야기를 알고난 전과 후가 극명하게 달라지는 경우에는 더더욱 말이죠.
저는 말이죠. 책을 읽으면 매번 그 책 속으로의 실종을 간절히 꿈꿉니다.
내 책이라는 소유욕보다 내 이야기라는 소유욕이 백배는 더 강하죠.
그래서 늘 또 다른 이야기를 찾아 나서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폴 오스터의 <환상의 책>
그 속에서 제 맘 같은 구절이 있어 에필로그로 남겨봅니다.

...... 여기까지 온 당신들은 실로 위대하다 ......


Posted by Book끄-Book끄
보고 끄적 끄적...2010. 4. 5. 06:36
무대 위엔 꼭지점을 아래로 향하는 커다란 역삼각형이 층층히 쌓여진 종이더미 위에 위태롭게 서있다.
균형이 잡힌 정삼각형도 아닌 불안한 모습 그대로...
그 불안함 속에 해답을 위한 힌트라도 주는 듯.
높이 달린 창문을 통해 한 줄기 빛이 퍼져온다.
그러나 그 빛조차도 자세히 보면 불안한 삼각형의 형태다.
그리고 삼각 구도로 놓여 있는 의자 세 개.
그 의자마저도 정삼각형의 구조를 살짝 벗어나
시작은 분명 어느 한쪽으로 불안하게 기울어져 있다.
(물론 극이 진행하면서 정삼각형의 구조를 쟘깐씩 보여주긴 하지만)
내게 연극 <코펜하겐>의 첫인상은 그러니까
평형에 대한, 균형에 대한 일종의 불안한 도전이며 거부처럼 느껴진다.

역사 속의 세 사람,
닐스 보어(남명렬), 베르너 하이젠베르그(김태훈), 그리고 닐스 보어의 아내 마그리트(조경숙)
스스로 현실 속의 사람들이 아님을 고백하고 있는 이 사람들은
지금 하나의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는 중이다.
“왜, 1941년 하이젠베르그는 보어를 방문했는가?”


아버지와 아들 같은 사제지간이자 오랜 연구 동료인 보어와 하이젠베르그는
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서로 적국으로 갈라서게 된다. 
하이젠베르그의 위험하면서도 비밀스러운 방문은
50년간 토론을 벌여왔으나 그닥 명확한 결론을 얻지 못한 상태다.
연극은 세 번의 리플레이를 거듭한다.
그리고 매번 다시 묻는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그가 찾아왔을까?” 를...
이들 세 사람은 이 질문을 통해
도대체 지금 어떤 해답을 얻고자 하는걸까?



연극 <코펜하겐>은 노골적으로 말해 아주 많이 어렵다.
그리고 심각하다.
게다가 지독히 아름답기까지 하다.
핵분열, 중성자, 원자로, 원자탄의 제조, 불확정성 원리와 상보성의 원리 등
수시로 등장하는 물리학의 개념들로 머릿속은 이미 무한대의 복잡성 안에 놓여있다.
어쩌면 이 연극을 이해하기 위해선 관객들에게 지독한 인내심이 필요할지도...
그러나 연극 <코펜하겐>에서 중요한 건,
그런 과학 원리나 학자적인 이론이 아니라 
그 이론을 끌어냈던 인간들의 본성과 진실을 이해하는 것이다.
"Dark side of the moon"
그렇다면 그건 확실히 불가능한 일도, 어려운 일도 아니긴 하다.
마침내는 인간이란 객체의 유사성을 이해할 수 있게 될테니까...
시간의 개념조차도 무력하게 만드는 핵폭발을 능가하는 인물들의 충돌과 대면은
사뭇 진지하면서도 무척 재미있다.
수시로 돌출하는 날카로운 삼각형의 모서리들은
한쪽은 역사를 향해, 한쪽은 인물을 향해, 나머지 한쪽은 상황을 향해
거침없이 전진하기도 하고 일시에 후퇴하기도 하면서 극의 생명감을 예리하게 살려낸다.
입 속에서서 쏟아져나오는 숱한 이론들과 과학에 몰두한 인간의 지독한 광기.
그리고 그 광기 속에 보여지는 학문에의 순수한 열정.
"과학"으로 덧씌워진 "인간" 본성에 대한 질문과 탐구.
그 치열함이 극 속에서 제 2, 제 3의 긴장감으로 고스란히 살아난다.
폭풍같은 치열함들...
(이런 치열함을 만나게 되면 나는 그만 정신을 잃게 된다...)



<마라, 사드> 이후에 무대 위에서 만난  배우 남명렬은
역시나 늘 아름답고 섬세하고 그리고 정확하다.
그는 매번 무대 위에서 삶의 터를 개척한다.
끝없는 유목민으로서의 연극배우 남명렬의 아우라가
그래서 나는 늘 깊고 다정하고 믿음직스럽다.
연극 무대는 시간과 열정을 배반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배우 남명렬.
 “살아가는 세월만큼 무대 위에서 녹아나기 마련이에요. 그 세월은 관객들에게 어필될 수 있어요.
  그러니 연극이 나의 길이라고 생각한다면 시선을 조금 길게 봤으면 해요.”

이 말에 지극히 공감하는 관객이 여기도 이렇게 있다는 걸 그가 알까? (^^)
그는 연극 <코펜하겐>을 통해 관객과 ‘의미 있는 소통"을 희망한단다.
"우리는 현재 재미와 가벼움, 즐거움을 위해 달려가는 말 위에 있죠. 잠시 말고삐를 잡고 ‘속도를 조정해볼까’ 하는 마음을 갖고 있다면 이 작품과 함께 했으면 해요. 담론 자체는 거대하지만 그 속에 인간적인 부분들이 많이 있거든요. 유머도 있고. 어느 방향으로 튈지 모르는 말초적 세상에서 무언가를 돌아보고 싶다면 좋은 계기가 될 거라고 생각해요.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애쓰고 있고요."
속도를 조정하기...
어쩌면 지금 우리에게 제일 필요한 일이 바로 그건지도 모르겠다.
아이러니하게도 치열한 연극 <코펜하겐>을 보고 나는 느긋한 "여유"를 느꼈다.
당연하지 않은가?
원래 인간의 삶이란 이렇게 늘 불확실 한거니까...
Posted by Book끄-Book끄
보고 끄적 끄적...2010. 1. 6. 06:36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 100주년 되는  
2009년 10월 26일 시작했던 뮤지컬 <영웅>
개인적으로 2009년 공연 관람 마지막을 좋은 작품으로 마감했다. ^^
<영웅>은 2009년 12월 31일 그 대단원(?)의 막이 내려졌고
나는 12월 27일 나의 네 번째 관람이자 마지막 관람을 끝냈다.
(다시 볼 수 없다는 게 왠지 슬프다.
 이 초연 멤버들을 고스란히 다시 모아서 재공연을 할 수는 있을까???)
폭풍같이 몰아치던 눈발을 뚫고 찾아간 LG 아트센타
폭설로 길이 엉망이 됐지만 늘 그렇듯 관람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날씨 탓인지도 모르지만 왠지 무겁게 가라앉은 느낌.
마지막을 향안 작은 준비처럼 느껴졌다.


     안중근 : 류정한          이토 : 이희성            설희 : 김선영             링링 : 전미도

류정한의 안중근은 확실히 볼 때 마다 점점 더 강해지고 부드러워진다.
뮤지컬 배우로서의 류정한의 아우라를 최대한까지는 아니더라도
그에 가깝게 느낄 수 있는 작품.
길고 오랜 시간을 무대 위에 살아온 그에게
첫 창장 뮤지컬 도전은 새로웠고 그리고 성공적이었다.
이희성 이토는 정성화 안중근과 조합이 됐을 땐 너무 강하고 센 느낌에
살짝 거부감이 들었는데 류정한 안중근과 만날 때는
서로 불꽃이 튄다.
일종의 시너지 효과를 체감하다...
김선영...
당신에 대해선 할 말을 잃게 한다.
그녀가 무대 위에 선다면 최소한 실망할 일은 없다.
그녀는 배역에 맞게 아름답고, 그리고 늘 적절하게 빛난다.
간혹 목소리에서 피곤을 느껴졌지만 그것마저도 파란만장한 설희의 한 삶처럼 다가온다.
류정한, 김선영.
더 이상 젊지 않는 그들의 무대는 그러나 항상 그 누구의 무대보다 젊고 신선하다.
그 둘의 조합이 <라만차>에서 다시 이뤄진다니
생각만으로도 흐뭇하고 조급하게 기다려진다.
(개인적으로 오랫만에 보게 될 라만차... ^^)



좋았던 명성황후 시해 장면.
그림자로 표현된 장면의 섬뜩함.
사람의 움직임보다는 조명의 변화가 압권이다.
언어보다 빛이 먼저 그리고 강력하게 말을 걸고
그 뜻을 전달할 수 있다는 걸 다시 느끼게 된다.
그래... 그래... 좋은 장면이었어...
(한 켠에서 그 때의 일을 회상하는 설희의 의상은 또 얼마나 곱던지...
 그 고운 한복의 쪽빛이 그대로 눈물처럼 뚝뚝 떨어진다.)



   조도선 : 조휘     우덕순 : 문성혁   유동하 : 임진웅

멋졌던 남자 배우 3인.
세 사람의 목소리는 악기처럼 아름다웠고
하모니는 경쾌하고 즐거웠다.
누군가는 말하더라.
안중근까지 포함해서 이들을 영웅의 F4라고... ^^
17세 유동하를 멋지게 소화했던
73년생 임진웅의 고음은 깨끗하고 높았다.
그가 궁금해 찾아봤더니 "여행스케치" 멤버였다는 이력이 있다.
그랬구나... 그래서 그의 조율과 화합이 귀에 들어왔었구나...



설희보다 더 경국지색이었던 게이샤.
그녀는 존재감이 나는 아직도 신비롭다.
별 대사 없이도 장면마다 눈에 들어오던 그녀.
그리고 라이센스 공연 <돈주앙>에서 돈주앙보다 훨씬 더 멋지고 훌륭했던
까를로스 조휘는 역시 좋은 배우다.
그의 이력도 특이하다.
체육학과 출신의 뮤지컬 배우라...
탄탄한 체격에 멋진 목소리, 그리고 선 굵은 외모까지...
어쩐지 그가 이기적이란 생각을 하게 된다. ^^



뮤지컬 <영웅>에서 끝까지 놓치지 말고 봐야만 하는 장면이 있다면
나는 단연 관람객 기립을 꼽고 싶다.
하얼빈 의거 후 안중근이 "대한독립 만세"를 외칠 때의
관객들의 박수는 크고 웅장하다.
그리고 공연 중간중간 이런 현상들이 자주 공유된다.
마치 집단 최면 같다는 생각까지...
그러서인지 일부러라도 나는 커튼콜 때 꼭 기립을 확인하게 된다.
일제히 일어서서 박수를 치는 관객들의 모습을 꼭 두 눈에 담고 싶어서...
1층 뒷 줄에서 봤을 때도 관객들은 모두 일어서 뜨겁게 박수를 보내고 있었다.
그리고 1층 맨 앞 OP석 관람때도 뒤를 돌아보면
3층 객석까지도 관객들은 전부 일어서 있다.
"빙의의 현장"이었다고 말해두자.
(딱히 적절한 표현을 할 제간이 별로 없기에...)

그리고...
이제는 막이 내렸다.
다만, 그들의 초연 공연이 계속 진화해서 "명성황후"를 누르는 한국의 대표공연이 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그런데 정말 그럴 수 있을까?
한 나라의 국모도 아닌
일제시대 식민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이야기가
외국에서 "명성황후"같은 위치를  차지할 수 있을까?
아직 갈 길은 너무 멀겠구나 싶다...
그래도 시도할만한 가치는 충분히 있지 않을까?
턱없는 일일지라도 조용히 바램을 품어 본다.



안중근!
당신 이곳에서 잠시였겠지만 온전히 살아있었네요.
당신도 봤으면 참 좋았을텐데....
당신의 부활과 영생을!
Posted by Book끄-Book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