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후 끄적끄적2011. 10. 13. 05:24
1시간 30분 소요된 보스포러스 해협 크루즈에서 내려
갈라타 다리 아래에서 유명하다는 고등에 케밥(5TL)을 하나 샀다.
흔들리는 작은 배 위에서 열심히 고등어를 구워 빵에 끼우는 모습도 신기했고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그걸 사기위해 줄을 선 모습도 이색적이었다.
너무 비리면 어쩌나 조금 걱정했는데 다행히 바짝 구워진 고등어는 비린맛보다 고소한 맛이 더 많다.
홍합밥도 먹어보고 싶었는데 길거리에서 그걸 하나하나 까먹고 있을 자신은 없어서
이번 여행에서는 아쉽게도 못 먹어봤다
(맛있다는데...쩝!)
고등어 케밥은 양이 상당히 많아서 그냘 하루종일 가방에 넣어두고 허기지면 꺼내서 한 입씩 먹으면서 다녔다.
오래 두고 먹어도 별로 비리진 않았고
대신 지느러미하고 가시를 발라내는 게 좀 귀찮은 정도 ^^
에미뇌뉘 버스 정류장에서 카리에 박물관을 찾아가기 위해 책(프렌즈 터키)에 나와 있는 버스를 열심히 찾아다녔다.
근데 이건 버스 정류장이 너무 커서 또 다시 헤매기 시작했다.
결국 책에 적힌 노선을 포기하고 사람들을 붙잡고 물어봤다.
친절한 아저씨 한 분이 직접 데려다가 버스에 태워줬다.
안타깝게도 막 출발하려는 버스에 올라탄거라 몇 번 버스인지는 모르겠다.
내리면서 봐야지 했는데 내릴 때가 되니까 사람들이 다들 빨리 내리라고 해서 허겁지겁 내리느라 또 못 봤다.
버스 창문으로 목까지 내밀고 저쪽으로 가라며 손짓을 해준다.
그 사람들 눈에도 내가 영 미덥지 못했던 모양이다.
(이해한다! 그 심정!)


터키인들의 친절과 호의 속에 도착한 카리예 박물관(Kariye MUzesi, 15TL)
11세기에 지어진 카리예 박물관은 처음 이름은"코라 수도원" 이었다.
"코라"는 그리스어로 "교외(郊外)"를 뜻한단다.
아마도 구시가지 서쪽 외곽에 위치해서 그렇게 이름이 붙여진 것 같다.
개인적으로 터키여행에서 가장 기억에 많이 남고 황홀했던 곳 중에 한 곳이다.
우선 건물이 주는 묘한 아우라에 입구에 서서 한참을 바라봤다.
햇빛을 정면으로 받고 있어서 마치 건물 전체가 빛을 품어내는 느낌이었다.
한편으론 건물과 햇빛이 정면대치하고 있는 팽팽한 긴강감도 느껴졌다.
카리예 박물관은 비잔틴 시대 모자이크와 프레스코화의 진수를 보여주는 곳이란다.
원래는 기독교 수도원이었는데 아야소피아와 마찬가지로 오스만 제국때 이슬람 사원인 카리예 자미로 바뀌게 된다.
그때 미나레와 미흐랍도 만들어졌단다.
종교적인 이유로 지금껏 본 프레스코화들은 얼굴 부위가 심하게 훼손됐었는데
이곳은 이슬람시대때 모자이크와 프레스코화를 석고로 덮거나 원판으로만 가려놔서
비교적 손상없이 잘 보존되어 있다.
평화와 사랑의 대명사인 종교가 극단적인 배타성과 유일성만을 강조할 때
항상 몰살(歿殺)과 괴멸(壞滅)이라는 처참한 결과를 낳는다는 건,
참 아이러니한 비극이 아닐 수 없다.



박물관 본관 정중앙에는 황금색 성경을 든 예수 그리스도 프레스코화가 있다.
그리스어로 쓰여진 문장의 뜻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그 외쪽에는 천국의 열쇠를 손에 들고 있는 사도 베드로가,
오른쪽에는 로마까지 3차 선교여행을 했던 사도 바울의 초상화가 있다.
동쪽 홀 끝에는 부활한 예수와 24원로들,
맞은편에 아담과 하와를 죽음에서 살리는 예수의 성화가 그려져있다.
실제로 눈 앞에 보고 있으면서 저 높은 곳까지 어떻게 그림을 그렸을까 그자 놀라울 뿐이다.
색채의 조화와 성화의 선명도는 마치 실제의 인물을 눈 앞에서 보는 느낌이다.
높은 곳에 그려진 저 아름답고 거룩한 성화들은 지극한 간절함이자 소망이며 진실한 기도다.
그렇다.
종교에는 간절함과 소망이 전부여야 한다.
권력과 지배가 전부여서는 안된다.
터키의 자미를 보면서 자주 생각했던 어쩔 수 없는 화두(話頭).
어쨌든 바라는 건,
한 종교의 문화가 다른 종교에게 더이상 불결한 이물질로 취급되어서는 안 된다는 결론이다.
그래서 몰살과 괴멸의 역사를 또 다시 갖지는 말자는 간절한 바람도.
빼앗고 말살함으로 권위가 유지되는 믿음이라면
더이상 믿음도 종교도 아니다!
카리예 박물관의 훼손되지 않은 성화를 보면서
낯선 이방인은 인고(忍苦)와 책임(策任)으로서의 상생(相生)의 믿음을 생각했다.

Posted by Book끄-Book끄
그냥 끄적 끄적...2010. 9. 30. 06:16
10시 넘어서 집에 들어가니 종이 상자가 식탁 위에 보였다.
얼마전부터 방과후 교실에서 요리교실을 다니고 있는 초등학교 2학년 여자 조카.
요 녀석이 또 뭘 만들었나 싶어 상자를 열어봤다.
귀여운 머핀 3총사!



비록 좀 까맣게 타긴 했지만
내게는 세상에서 제일 맛있을 것 같은 머핀이다.
사실 아까워서 먹지도 못하고 보고만 있었다.
조막만한 손으로 이걸 만들었을 조카 녀석이
그리고 다 구워진 빵을 가지고 자랑하려고 집에 곱게 가지고 왔을 조카 녀석이
마냥 귀엽고 사랑스럽다.
얼마나 재재거리면서 자랑했을까?
자기 엄마가 퇴근해서 데리러 올 때까지 또 얼마나 기다렸을까? 
추석 전에는 송편을 만들어와서 재재거렸었는데...
(송편 중에 속이 안 들어있는 게 하나 있는데 복불복 송편이라나 뭐라나... ^^)
이렇게 뭘 들고 온 날은 꼭 한 마디 한다.
"이모! 이모 컴퓨터에 올려줘~~~!" (^^)



또 얼마전에는 도예반에서 만들었다고 다기들을 몇 개 들고 왔었다.
라면기, 생선접시, 그리고 손톱만한 장난감 도자기까지...
팔이 안으로 굽는다고 할지 모르지만
요 녀석은 유달리 손재주가 많다.
아이클레이로 뭘 만들어낼 때도 그렇고
종이접기를 할 때도 그렇게
이모를 놀라게 할 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주변에선 가끔 내게 말한다.
엄마도 아니면서 참 애뜻하게 지극정성이라고...
솔직히 말하면
조카 녀석들을 위해서라면 나는 뭐든 할 수 있다.
이상하지?
조카 녀석들의 커가는 모습은
늘 종교처럼 신성하다.
그러니 나는 늘 맹목적이 될 수밖에...

사이비종교 추종자라고 놀린데도 어쩔 수 없다.
할.수.없.다.!

Posted by Book끄-Book끄
읽고 끄적 끄적...2010. 8. 23. 05:38
세계사의 흐름을 다섯 가지 코드로 분석한 역사서다
당연히 역사학자가 쓴 책일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다.
이 글을 쓴 사이토 다카시는 일본 메이지대학 문학부 교수다.
그렇다면 팩션류의 글일까?
이번에도 아니다.
아주 재미있고 그리고 쉽게 이해되는 정말 착한(?) 역사서다.



욕망 (Desire)
1. 세계를 양분하는 근대의 원동력 : 커피와 홍차
2. 세계사를 달리게 하는 양대 바퀴 : 금과 철
3. 욕망이 사람을 움직인다 : 브랜드와 도시

모더니즘 (Modernism)
1. 근대화의 힘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
2. 자본주의는 기독교로부터 생겨났다.
3. 경시된 근대의 '신체'

제국주의 (Imperialism)
1. 야망이 만들어낸 '제국'이라는 괴물
2. 성공하는 제국. 실패하는 제국
3. 세습은 제국 붕괴의 첫걸음

몬스터 (Monsters)
1. 현대세계를 지배하는 자본주의
2. 20세기 최대의 실험, 사회주의
3. 위기가 만들어낸 파시즘이라는 괴물

종교 (Religions)
1. 세계사를 움직이는 일신교 3형제 :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2. 암흑이 아니었다! - 재인식되는 중세
3. 이슬람에 대해 우리가 잘못 알고 있던 것들



책의 마지막 부분에 연세대학교 문화인류학 강사 우석훈의 해제도 흥미롭다.
이 책을 두고 "백과사전적 지식의 귀환"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아주 딱 들어맞는 표현이다.
한 분야에 대해서 깊게 파고 들어가는 전문가적인 지식이 아니라
전반적인 흐름을 쉽게 이해하고 파악할 수 있는 글이다.
전체적인 그림을 그리게 해준다는 의미다.
흩어져 있는 퍼즐들이 하나로 맞춰지는 재미랄까?
5개의 코드를 다시 세 개씩 세분화해서 설명하는 방식도 간소하니 좋다.
때로는 비교하는 방식으로,
때로는 역사를 풀어서 이해시키는 방식으로.
또 때로는 자신의 생각을 꽤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방식으로 책을 엮어간다.
큰 틀 안에 나름대로 변화가 많아 읽는 동안에 지루할 틈이 없다.
"시선을 지배하는 자가 세상을 지배한다"고 했던가!
그렇다면 이 책도 확실히 어느 정도는 지배적이리고 할 수 있겠다.
사회주의, 자본주의, 파시즘 등 자칫 딱딱하고 정치적일 수 있는 부분까지도
재미있고 부드럽게 설명한다.
몰랐던 이슬람 종교가 가지는 "느슨함"을 알게 됐고
종교의 이면에 숨어있는 끝나지 않는 제국주의 욕망을 다시금 생각하게 됐다. 
유일신을 믿는, 사랑을 최우선으로 손꼽는 일신교 3형제(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는
왜 늘 다툼과 분쟁이 끊이지 않을까?
한번쯤 궁금해했던 문제에 대해 어느 정도 해답을 주기도 한다.
반대를 위한 반대 "파시즘"의 아이러니와
노동자를 해방한다는 사회주의가 오히려 노동자를 국가의 노예로 만드는 현실,
붕괴된 소련의 모습에 대한 설명도 독자의 이해를 쉽게 끌어낸다.
색다른 시각을 갖게 하는 놀라운 책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누구라도 한 번즘 읽어보면 괜찮을 책 (^^)
상식을 조금 넓혀준다고나 할까?
혹 전문가를 꿈꾼다면 나머지는 자신이 할 몫이다.
사실 이만큼만이라도 알고 있다는 게 어딘가?
상식이 무너진 시대에... (?)
Posted by Book끄-Book끄
읽고 끄적 끄적...2010. 7. 22. 06:27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 <천국에서  만난 다섯 사람>, <단 하루만 더>의 작가,
미치 앨봄의 신작 <8년의 동행>을 읽다.
그의 첫번째 책이자 공전의 베스트셀러가 됐던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처럼
이 책 역시도 실화라고 미치 앨봄은 밝혔다.
그는 작가가 어떤 책에 대해 단정적으로 말하기란 힘든 일이지만
개인적으로 지금까지 자신이 쓴 책들 중 가장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말하기도 했다.
8년이라는 세월을 거쳐 완성된 실제 이야기라...
뭐가 있겠지! 아니면 그가 독특한 글쓰기의 패턴을 이어가고 있는건지도...



앨버트 루이스(Alberr lewis)와 헨리 코빙턴(Henry Covington)
사는 것도 다르고 인종도 다르며 한 번도 서로 만나 본 적이 없는 두 남자의 이야기,
그럼에도 타인의 삶을 변화시켰다는 공통점을 지닌 두 남자의 이야기.
2000년 봄, 미치 앨봄이 강연을 마치고 나오던 어느날,
여든 두살인 유교대 랍비 앨버트 루이스로부터 뜻밖의 부탁을 받게 된다.
"내 추도사를 써 주겠나?"
언제나 타인에게 추도사를 했던 랍비를 위한 추도사...
그리고 쓰레기통 뒤의 어둠 속에서 자신을 살려준다면 삶을 하나님에게 바치겠다고 약속하는 한 남자 헨리.
교도서 복역, 마약판매와 복용의 전과 경력이 있는 그는
"내 형제는 내가 지킵니다"라는 교회의 목사가 되어 있다.
미치 앨봄과 그 두 사람을 각각 따로 만나서 잉야기하게 되지만
그 둘은 서로 비슷하다.
이 책에서 가장 많이 이야기하고 있듯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
...... 우리는 서로 다른 것 같지만 사실은 모두 연결되어 있다.
그것이 타인을 가족처럼 보듬고 사랑해야 하는 이유다.
그런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하나의 크고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 수 있으니,
삶이란 너무나 위대한 여정 아닌가 ......

전작들과 비슷한 방식, 비슷한 이야기라
느낌과 감동(?)까지 비슷하다. 
"인간"이라는 이름의 연결된 "공동체"의 의미와 존재 이유.
그 안에 종교도 믿음도 삶과 죽음도 모두 담겨있다.
책의 내용은 별다를 것이 없긴 하지만
인물들이 나누는 짧은 대화들이 따뜻하다.
특별한 담론이 아닌 일상어인데 가슴 속에 차곡차곡 담긴다.
아마 그래서 미치 앨봄도 이런 글쓰기를 계속 하게 되는 건지도 모르겠다.
사실은 자신이 따뜻해지고 싶어서... (^^) 
그 마음이 세 개의  자선단체를 운영하게 하는지도...
노블리스 오블리제, 미치 앨봄!



"아름답지 않은가?"
"네?"
"인생 말이야!"

행복의 비결이 뭔가요?
만족할 줄 아는 것.
그게 다인가요?
감사할 줄 아는 것.
그게 다인가요?
자신이 가진 것에 대해서, 자신이 받은 사랑에 대해서, 그리고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것들에 대해서.
그게 다인가요?
그래, 그게 전부야.

사람들이 죽음을 앞에 두고 제일 두려워하는 게 뭘까요?
이런 거겠지. 죽음 다음엔 뭐가 있을까? 나는 어디로 가게 될까? 그곳은 내가 상상하던 그런 곳일까?
맞아요. 그럴 거예요.
그래, 하지만 또 다른 게 있지
뭐요?
사람들에게 잊히는 것.

우리 가족이 함께 찍은 사진이야.
죽음의 망령이 내 곁을 어슬렁거리는 느낌이 들 때마다 이 사진을 들여다본다네.
가족들 모두 카메라를 보고 환하게 웃고 있는 모습을.
그리고 이렇게 중얼거린다네.
'앨, 자네 괜찮은 삶을 살았어. 이들이 있으니 자넨 죽어도 결코 죽는 게 아니야.'라고.

저들은 영영 산 자들의 기억에서 지워졌고,
아예 존재한 적도 없는 사람들과도 같으며,
그것은 마지막 숨이 끊어지는 것보다 더욱 커다란 상실이라네.
그들은 두 번째 죽음을 맞는 것이라네.    - 토머스 하디
Posted by Book끄-Book끄
읽고 끄적 끄적...2010. 6. 30. 06:37
역시 주제 사라마구다.
충격적이고 파격적이고 그리고 놀랍도록 문학적이고 신비하다.
주제 사라마구의 최대 문제작 <예수복음>
이 책은 사실 1998년 그가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을 때
우리나라에 <예수의 제2복음>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됐다가 절판됐다.
2010년 1월 정영목 번역에 의해 다시 초판된 책.
(나로서는 정말 다행이다 싶다. 주제 사라마구와 정영목의 만남이...)
1991년 이 작품의 포르투갈에서 처음 발표됐을 때
주제 사라마구는 조국 포르투갈을 떠나야만 했다.
그후에 유럽문학상으로부터 심사를 거부당하기도 했고
1998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을 당시에는 로마교황청에서 유감을 표명했다.
바로 이 작품때문에...
"신성모독"과 "편협한 이념의 소유자"라는 비판과 함께...
1995년에 나온 <눈먼 자들의 도시>가 신약의 끝인 묵시록에 해당된다면
이 책 <예수복음>은 신약의 출발인 복음서에 해당된다고 한다.
Veni Vidi Vici (베니 비디 비시)
말 그대로 이 책은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다...



책의 어떤 내용이 로마교황청의 분노를 샀을까?
표면적으로 말하자면 이 책의 내용 전체가 다 그렇다.
하나님에 의해 이용당하는 예수.
예수가 신의 아들이 아니라 우리와 똑같은 인간으로
숨쉬고 사랑하고 갈등하며 자신의 운명을 회의한다면?
동정녀 마리아에게 찾아와 수태고지를 했던 인물이
천사가 아니라 악마였다면?
그리고 창녀로 알려진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의 연인이었고 오랜 시간 사실혼 관계였다면?
이야기의 시작은 한 편의 명화를 꼼꼼히 해설하는 것처럼 섬세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의 모습.
왠지 거룩한 신성과 인간적인 연민이 함께 느껴지는 도입부.
글의 마지막 장면 역시도 십자가 처형 장면이다.
뼈에 목이 박히고 옆구리는 창에 찔려 극심한 고통과 갈증을 느끼며 
서서히 죽어가는 예수.
그때 저 높은 곳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린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며, 내가 기뻐하는 자다"
예수는 그 순간 자신이 당했다는 것을 알았다.
희생 제단에 가는 양처럼 꾐에 빠진 것이다.
인간들이여, 하나님을 용서하라. 하나님은 자신이 한 짓을 알지 못한다

예수의 입 속에 담긴 마지막 말...
확실히 로마교황청이 신성모독을 내세우며 유감을 표명할만큼 충격적인 내용이다.



남자로서 한 여자와 육체적인 사랑을 하는 예수,
그리고 하나님은 아들과의 만남에서 자신의 계획을 밝힌다.
내가 유대인의 하나님에서 더 많은 사람들의 하나님이 되도록 예수가 도와야만 하고
그러기 위한 예수의 역할은 순교자라고 말한다.
그 말을 따르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예수.
하나님은 예수에게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말한다.
순교자의 죽음은 고통스러워야지, 또 가능하다면 수치스러워야지,
그래야 신자들이 감동해서 더 헌신하게 되니까
.
체념하듯 질문하는 예수.
제가 죽은 뒤에 미래는 어떻게 되나요?
하나님의 대답한다.
교회가 생길거다.
유머러스게 들리는 이 대답의 의미심장함에 순간 멍해지기도 했다.
하나님과 악마와의 대화에서도 이런 유머러스한 섬뜩함이 계속된다.
자신을 다시 천국에 받아주면 예수는 죽을 이유가 없을거라는 악마의 거래성 말에
하나님은 대답한다.
내가 계속 선이려면 자네가 계속 악이 되는 게 긴요해.
하나님과 관련된 일은 모두 악마와도 관련이 되어 있다고 책은 말한다.
(그리고 이 말은 사실은 정말 진실이다)
책을 읽으면 읽으수록 지금 이 시대의 "종교"라는 의미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딱히 기독교나 가톨릭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모든 의미의 종교를.
예수는 하나님께 요구한다.
당신이 다른 신들에게 거두는 승리가 얼마나 많은 고통과 주음을 가져오는지,
사람들이 당신의 이름과 제 이름으로 싸우는 전투에 얼마나 많은 죽음과 고통이 필요한지 말씀해
줄 것을...
마치 예리한 둔기로 강타당한 느낌이다.
자신의 목적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 하나님의 모습과
거대한 힘 앞에 결국은 불복할 수 밖에 없는 나약한 한 인간으로서의 예수.
그러면서도 마지막엔 종교로 대표되는 세상의 모든 거짓과 허상을 향해 한 방 제대로 먹이는 예수의 모습.
이런 충격적인 글들...
종교적인 비난보다 주제 사라마구의 상상력이 나는 더 두럽고 무섭다.
그리고 더 두렵고 무서운 것은,
이제 더 이상 주제 사라마구의 새로운 작품을 만날 수 없게 됐다는 사실이다.
2010년 6월 18일.
이 천재의 타계가 나는 세상의 "종말"처럼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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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사라마구의 작품들 (보라색은 내가 읽은 작품들)>

2009 『카인(Caim)』
2008 『코끼리의 여행(El viaje del elefante)』
2005 『죽음의 중지(As intermitencias da morte)』
2004 『눈뜬 자들의 도시(Ensaio sobre a lucidez)』
2002 『도플갱어(O Homem duplicado)』
2000 『동굴(A Caverna)』
1997 『이름 없는 자들의 도시(Todos os nomes)』
1995 『눈먼 자들의 도시(Ensaio sobre a cegueira)』
1991 『예수복음(O Evangelho segundo Jesus Cristo)』
1989 『리스본 쟁탈전(Historia do Cerco de Lisboa)』
1986 『돌뗏목(A Jangada de pedra)』
1984 『히카르두 헤이스가 죽은 해(O Ano da Morte de Ricardo Reis)??』
1982 『수도원의 비망록(Memorial do convento)』
1981 『바닥에서 일어서서(Levantado do Chao)』
1977 『서도와 회화 안내서(Manual de pintura e caligrafia)』
1947 『죄악의 땅(Terra de pecado)』 

주제 사라마구의 <인간의 조건 3부작>으로 불리는 『눈먼 자들의 도시』『동굴』『도플갱어』는 전부 읽었다.
좀 시간이 왔다갔다 하면서 우리 나라에 번역되기는 했지만
『눈뜬 자들의 도시』『이름 없는 자들의 도시』『돌뗏목』『리스본 쟁탈전』『죽음의 중지』도 읽었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수도원의 비망록』까지 읽으면 현재 우리나라에 출판된 그의 책 전부를 읽게 된다.
마지막을 한 권을 남겨놓고 허탈해하고 있었는데 좋은 소식이 들린다. 
2010년 『예수복음』을 시작으로
해냄 출판사에서『코끼리의 여행』『히카르두 헤이스가 죽은 해』두 권이 출간될 예정이란다.
정말 다행스럽게도 내게 종말은,
아직까지는 유보중이다...

Posted by Book끄-Book끄
읽고 끄적 끄적...2009. 9. 23. 05:59
자칭 "바람의 딸" 한비야가 또 다시 책을 냈다.
9년 동안의 NGO 월드비전 응급구호팀장으로 일했던 그녀가
9년 간의 시간을 뒤로 하고 다시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다.
미국 보스턴 터프츠대학교에 석사과정을 위해 51세에 유학을 간단다.
본격적인 구호 이론을 공부하기 위해서......



솔직히 말해서 나는 수다스러운 사람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한비야" 그녀는 스스로도 인정하듯 엄청나게 수다스럽다.
그녀의 글들은 투박하고 그리고 정제되어 있지 않다.
솔직하다고 말해야 하나? 
가끔 생각한다.
그녀의 솔직함이 오히려 좀 포장처럼 보이기도 한다는 걸....



사실, 그녀를 만나 본 적은 없지만(앞으로도 없겠지만...)
왠지 글보다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누면 더 잘 이해하고 다가갈 수 있을 것 같다.
아마도 "무픞팍 도사"에서 "조조조조..."를 연발하며 조증에 대해 열변을 토했기 때문일테지만
(나는 울울울울..... 울증이라서)
두 사람이 만나면 서로 상쇄되지 않을까 하는 자가 처방적인 바램 ^^



그녀가 추천한 책들은 다행스럽게도 내가 읽은 책들이 대부분이다.
1년에 100권 읽기를 실천하고 있다는 그녀,
나는 1년에 150권 읽기를 계획했었고 현재 3년동안 해왔다
올해 4년째150권을 무난히 넘길 수 있을 것 같다.
(그 전 몇 년 간은 나도 한비야 그녀처럼 1년에 100권 읽기부터 시작했다)
그 책들에 전부 책임을 질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대답은 "No!"다.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책 읽는 건 교훈을 얻고 자기 발전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고 이제는 생각한다.
그냥 밥을 먹고, 물을 마시듯 매번 몇 번씩 반복되는 일상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스쳐가는 일상 속에 보석처럼 얻게 되는 기쁨만으로도 책은 충분히 내겐 많은 걸 준다.



현실 불가능한 일이라고 해도 단 한 번도 이룰 수 없는 꿈을 꾸어보지 않은 청춘, 단 한 번도 현실 밖의 일을 상상조차 하지 않는 청춘, 그 청춘은 청춘도 아니다. 허무맹랑하고 황당무계해 보이는 꿈이라도 가슴 가득 품고 설레어보아야 청춘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이것이야말로 눈부신 젊음의 특권이 아니겠는가?

"독서"의 즐거움이란 책 읽는 그 자체뿐만이 아니라 도서관에 가서 책을 찾는 기대감, 찾아내서 빌려올 때의 뿌듯함, 이미 대출된 책의 차례를 기다리는 설렘, 점심을 굶어가며 모은 돈으로 서점에 가서 내 책을 사는 기쁨, 그 책을 책장에 꽃아놓고 보는 흐뭇함, 그 책을 누군가에게 빌려주고 돌려받는 날가지 괜히 조마조마해지는 조바심가지를 포함한다는 사실이다.

사람이 사람으로서 품위를 지키며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물의 최소량이 하루 15리터인데, 그것의 3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한 물로 사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하루 물 사용량은 무려 395리터, 작은 생수병으로 8백 병 가량이다.


물 부족과 어린이 사망률, 야만적이고 생명까지 위협하는 여성 할례, 타 종교에 대한 이해와 인정으로 시작되는 종교간 평화와 세계 평화, 그리고 편협되고 왜곡된 시각이 불러일으키는 잘못된 글로벌 리더의 꿈 등
아마도 한비야가 이 책을 통해 대중에게 알리고 싶었던 "화두" 들이리라.

그러나
정직하게 말하면,
"대중"이 아닌 "나"를 향한 충고다.
Posted by Book끄-Book끄
달동네 책거리2009. 9. 14. 05:54
 <신> - 베르나르 베르베르




드디어 베르베르의 9년 동안의 역사가 끝이 났습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신> 3부작, 각각 2권씩 모두 6권의 이야기가 말이죠.

(1부 <우리는 신>, 2부 <신들의 숨결>, 3부 <신들의 신비>)

미카엘 팽송, 에즈몽 웰즈, 조제프 프르동... <개미>, <타나토노트>, <신들의 제국>, <신>으로 이어지는 주인공들의 오랜 여행도 이젠 정말 마지막이 된 셈입니다.

이 책은, 그러니까 지금까지의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썼던 책에 대한 완벽한 페러디이자 자신의 작품에 대한 스스로의 표절 내지는 블랙코메디라고 할 수 있겠네요.

거기에다 그리스 로마 신화와 불교의 석가모니, 그리고 성경의 모든 중요 모티브들까지 전부 포함하고 있는 집합체이자, 역사와 철학, 종교, 심지어는 심미주의적인 미학적 요소에 과학적 신비주의까지 갖추고 있는 그야말로 백과사전적 종합서적이라 할 만합니다. 

얼마 전 이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가 우리나라를 방한했습니다.

한국에 완간된 소설 <신>의 100만부 출판을 기념하기 위해서라네요.

다음달에 프랑스에서 출판되는 신작에 대해서도 잠깐 이야기했는데 주인공 남자가 한국인 “김예빈”이라고 합니다. 그 이름은 한국에서 자신의 책을 지금까지 열심히 출판해낸 출판사 “열린책들” 사장의 아들 이름에서 따왔다고 하니 이것도 한국적 인연이라면 인연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한국을 "작가로서의 자신을 발견해준 나라"라고 말하며 고마워하는 베르나르 베르베르,

전 세계적으로 약 1천500만부 이상이 판매된 그의 책은 한국에서만 500만부 이상이 판매고를 올렸습니다.

자국인 프랑스에서보다 동방의 작은 나라 한국에 오히려 더 많은 열혈독자를 가지고 있는 베르베르. 그의 상상력 무엇이 우리나라 사람들을 자극하고 열광하게 하는 걸까요?

문득 그의 작품이 매번 우리나라에서 성공할 때마다 궁금해집니다. 그게 도대체 뭔지가......


올림프스 산이 올려다 보이는 신들의 세계 “아에덴”

이곳에 144명의 신 후보생들이 모여 있습니다.

이들은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1호 지구를 모방한 18호 지구를 가지고 Y 게임이라는 걸 시작하려고 합니다. 오직 게임의 우승자 한 명에게만 더 높은 단계인 두 번째 산으로 나아갈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죠.

각 경기 전에는 올림프스 12신들의 강의가 준비되어 있고, 강의 후에 후보생들은 실제로 자신들이 만들어낸 민족을 계속해서 진화, 발전시켜가면서 그 민족을 18호 지구 안에서 어떤 형태로든 살아 남겨야만 합니다.

탈락자는 가차 없이 신들의 세계에서 그대로 제외되고 사라져 버리죠.

어둠뿐인 18호 지구에 드디어 최초 생명체가 탄생됩니다. 그리고 진화에 진화를 거듭해 도시 문명을 건설하고, 독창적인 영웅을 등장시켜 역사를 발전시키면 당연히 거기에 반대하는 저항세력에 의한 반란과 혁명이 시작되고, 세력 확장을 위한 국가들 간의 치열한 전쟁 또한 수반되는.......

1호 지구의 역사 그대로가 지금 18호 지구 안에서 반복되는 걸 보면서 우리는 깨닫습니다.

결국 인간이란 존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걸 말이죠. 여러 번 다시 시작한다고 해도 결국은 똑같은 잘못을 매번 반복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며 그렇게 이어지는 잘못들은 바로 우리의 근원 깊은 곳에 프로그램화되어 내재되어 있다는 사실을요.

바로 D.N.A의 형태로 말입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다른 비밀 또한 숨겨져 있습니다.

D는 지배와 분열, 파괴의 힘을 N은 중성과 영, 무지향의 힘을 그리고 A는 협력과 융화, 사랑의 힘을 뜻하죠.

이 세 가지 힘에 의해 인간의 역사는 만들어지고, 문명이 발전되며, 지배력 확장을 위해 세계대전 같은 전쟁을 유발하게 된다는 진실...... 인간의 가장 내밀하고 복잡한 그 구조의 끝에 저장되어 끝없이 전해지고 있는 DNA.

그리고 숫자로 대변되는 세계들의 연속성,

1은 광물의 세계로 현실을, 2는 식물의 세계로 꿈을, 3은 동물의 세계로 소설, 4는 인간의 세계이자 영화, 5는 깨달은 인간의 세계이며 컴퓨터 속의 가상 세계, 6은 순수한 천사들의 세계, 7은 신들의 세계, 8은 무한한 신 제우스의 세계로 이어집니다.

이제 그들은 지금 그 제 9의 존재에 대한 조우만을 남겨두고 있네요.

그러나 Y 게임의 우승자만이 유일하게 두 번째 산을 올라 “9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탐험들, 모든 수수께끼들을 풀면서 여기까지 올라온 미카엘은 과연 최후의 승자가 되어 “9의 존재”를 만나게 될까요?

대답은 “No!"입니다.

최종 결과에 승복하지 못한 미카엘은 최고의 신 제우스에게 몇 번의 재경기를 요청하고 그때 마다 번번이 패하고 되죠. 몇 번을 반복해도 우승자는 라울 라조르박에게 돌아갑니다.(과거 그가 인간이었을 때 죽음탐사대인 타나토노스 시절을 함께 했던 동료이죠)


결과에 승복하지 못한 그에게 벌이 내려집니다.

자신들이 지금까지 경기를 벌였던 18호 지구에 유배되는 형벌을요. 그것도 신 후보생의 기억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는 불사의 존재로 말입니다.

이야기는 반전의 반전을 거듭하면서 (베르베르의 이야기 전개력이 그저 감탄스러울 뿐이죠.) 미카엘은 다시 신들의 세계로 돌아갑니다. 그로써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죠.

그러나 다시 돌아간 아에덴은 더 이상 신의 세계가 아니었습니다.

모든 것을 완전히 중단하라는 “9의 존재”의 명령에 따라 폐교를 선언한 제우스, 이제 더 이상 신들조차도 불사의 존재가 아닌 필사의 존재로 추락합니다. 평화롭던 신들의 세계는 혼란이 야기되고 당파가 생기더니 급기야 서로 죽이고 죽는 전쟁터로 변해버리고 맙니다.

다시 탐사대가 되어 5명의 탐사대와 함께 두 번째 산으로 오르는 미카엘.

드디어 만나게 된 “9의 존재”인 “어미니 은하”.

그리나 그들은 그곳에서 또 다른 “10의 존재”에 대한 이야기를 듣습니다.

10의 존재 “아버지 우주”는 또 다른 존재에 대해 이야기하고......

당연히 “11의 존재”일거라고 예상했던 우리는 여기서 잠시 당황합니다.

“11의 존재”가 아닌 “111”의 등장에...

제가 여기서 밝힐 수 있는 건 “111의 존재”가 어쨌든 끝이긴 하다는 겁니다.

“111”은 지금껏 지나왔던 숫자적인 세계의 해석이라기보다는 상징적인 의미이자 일종의 상형화된 기호라고 할 수 있습니다.

“111”과 비질을 하듯 좌우로 왔다갔다를 반복하는 커다란 눈.

이 세계의 창조와 종말을 결정하고 선택하는 유일무이한 “111의 존재”

당신은 뭐라고 생각되십니까?


독특한 시각과 상상력을 가진 베르나르 베르베르.

때로는 너무나 유치한 상상력으로 오히려 사람을 질리게 만들기도 하고, 때로는 지적인 블랙 유머로 날카롭게 세상을 찔러대는 사람. 꽤나 박학다식하면서 더불어 다재다능하기도 한 사람.

매년 한 편씩의 작품을 쉼 없이 발표하는 그는 자신의 이런 왕성한 상상력과 창작력의 원천을 “불안”이라고 말합니다.

"저는 굉장히 예민한 사람입니다. 신문이나 TV를 통해 어떤 문제를 접할 때 늘 대응하고 싶은 욕구를 느끼지만, 행동으로는 나설 수가 없으니 글을 통해 문제의 해결책을 전하는 것입니다. 전 아마도 평생 차분해지지는 못할 것이고, 그것은 곧 계속 글을 써야한다는 뜻입니다. 출판해주는 사람, 읽는 사람이 없더라도 계속 글을 쓸 것입니다."

천상 글쟁이로 평생을 살아가겠다는 스스로에 대한 다짐기도 하네요.

그리고 그가 지금 한 말 속에는

“111의 존재”를 완성시키는 결정적인 단서도 하나 들어있습니다.

혹시 뭔지 찾으셨나요?

정.답.은?

Posted by Book끄-Book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