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끄적 끄적...2012. 11. 12. 08:40

<양철지붕>

일시 : 2012.11.01. ~ 2012.11.18.

장소 :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

대본 : 고재귀

연출 : 류주연

예술감독 : 고선웅

제작 : (주)연극열전, 경기도립극단

출연 : 이서림, 이애린, 이찬우, 정현호, 조영선, 강성해,

        강상규, 한범희

 

연극열전 네 번째 작품 <양철지붕>

사실 관람이 좀 망설여졌던 작품이긴 한데 고재귀 대본과 류주연 연출의 힘을 믿고 프리뷰를 관람했다.

2011년 경기창작희곡 공모전에서 심사위원의 극찬을 받으며 대상을 수상한 <양철지붕>은 제목 그대로 허름하게 내몰린 우리시대 밑바닥 인생의 깊고 추악한 욕망의 적나라한 고발장이다.

이런 내용의 작품...

보기 참 힘겹고 부담스럽다.

결코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성-폭력-살인, 성-폭력-살인의 순환고리를

나는 내내 신물나게 그리고 증오와 혐오의 눈으로 바라봤다.

개 잡는 인간들의 핏발서린 눈처럼 나 또한 그들을 핏발 선 눈으로 지켜봤다.

함바집 그 양철지붕을 두드리는 빗방울 소리에

함께 헐떡이는 숱한 눈과 눈은 일제히 아귀의 형상으로 사납게 던져진다.


“폭력은 어디에서 오는가.”
대본을 쓴 고재귀 작가는 이 질문에서 <양철지붕>을 시작했단다. 

폭력은...

눈과 귀에서 온다!

눈으로 본 폭력의 세상, 귀로 듣은 폭력의 세상이 또 다른 폭력을 낳는다.

묘하게 대물림되는 더럽고 추한 유산이 되버린 폭력!

의붓아버지에게 성폭행을 당했던 자매,

그 아비를 화재로 죽이고 숨어사는 두 자매의 함바집에

하나 둘 모이는 사내들, 사내들, 사내들...

아무렇지 않은 음담패설을 내뱄는 공사판 사내들의 끈적한 눈과 걸판진 입,

두 자매를 도와 의붓아버지를 죽었던 사내의 끈질긴 추격.

그리고 화재현장에서 창문으로 빠져나와 살아난 의붓아비의 아들이 공사판의 새일꾼으로 함바집에 섞여든다.

뜨내기들의 장점은,

모든 걸 숨기면서도 다 아는 것처럼 생활할 수 있다는 것.

과거나 미래 따위는 그야말로 개나 물어갈 일이다.  

 

이 이야기를 피비릿내 진동하는 참혹한 복수극으로 받아들여야 하나?

아니다, 지독히 현실적인 사실주의 작품이라고 해야 옳겠다.

친아비조차도 친딸을 유린하는 세상에 이런 류의 이야기가 뭐 그리 대단한 이슈가 될 수 있을까?

더 폭력적이고, 더 패륜적인 사건이 지금 이 현실 속에서 얼마나 많이 일어나고 있는데!

그것도 아주 버젓이! 게다가 당당하게!

류주연 연출은 이 작품이 최대한 이상하게 보였으면 좋겠다고 했다.

"이런 이상한 모습이 현재 모습과 닮아 있다는 느낌이 들면 작품의 의도는 성공"이라고.

그렇다면 류주연 연출의 눈은 아직 순진하다.

(참 다행이라고 해두자!)

또다른 살인으로 마무리된 평화로운(?) 자매에게,

과연 평범한 일상의 행복은 찾아올까?

그 자매를 기다리고 있는 반복되는 성-폭력-살인의 뫼비우스띠가 내 목까지 바짝 조여온다.

이런 젠장!

정말 달라지는 건 하나도 없단 말인가!

뜨거운 태양에 이글이글 달궈진 뜨거운 양철지붕이

지금 내 머리 위에 있다.

아~~~ 참 징글징글하다.

 

* 작품 속 배우들에게 뜨거운 박수를 보낸다.

  이렇게 무자비한 작품을 이렇게 무자비하게 연기한 배우들이 정말 존경스럽다.

  그래도 다행인 건, 이 작품 하는 동안은 뱃속은 참 든든하겠다.

  성욕과 식욕.

  폭력과 살인으로 귀결되는 욕망의 묘한 중첩이다.  

Posted by Book끄-Book끄
그냥 끄적 끄적...2011. 1. 24. 10:11

참 눈이 많은 계절이다.
나란 동물이 참 이기적인게,
창으로 바라보는 눈은 낭만적이고 이쁘고 동화적이지만
그 속에 발을 딛고 서면 그 순간 바로 현실의 불편이 절감된다.
신발 밑창으로 집요하게 파고드는 눈,
그래서 걷는 걸음을 어이없이 삐걱거리고 만들고
때로는 사람을 세상에서 가장 우수운 꼴로 바닥에 내동댕이 치는 눈.
거기다가 바람이라도 작정한듯 합체를 하면...
그런 날은 정말이지 아무리 동화적인 눈이라도 더이상 동화로 보이긴 힘들다.
저절로 느껴지는 추위에 어깨도 우수수 떨린다.
눈이 푸지게 오는 날은 날씨가 포근한 거라는데
이상하지?
눈이 오면 내 체감 기온이 형편없이, 현실감없이 그대로 뚝 급강한다.
어딘지 냉랭하게 낯설고
도도할 정도로 차갑고
살갖에 날카로운게 닿는 듯한 금속성의 쨍한 느낌.
손발이 저릴 정도의 냉기는 그대로 날 선  칼끝처럼 예리하게 다가온다.

잠시 폭설...
어제 순간적으로 서울에 쏟아진 눈은
고립을 생각케 했다.
뭘 그렇게 잊고 싶었을까?
새하얗게 새하얗게 지워내려는 눈발의 의지가 너무 독해
순간 덜컥 겁이 난다.
혹시 나를 찾는 거였나?
거친 눈발이 고립시키겠다 작정한 건
혹 내가 아니었을까?
그러나 눈발은 답할 이유가 없다며
여지없이 성큼성큼 폭력처럼 쌓인다.

이대로 이 순백의 폭력을 그대로 견뎌야 하나?
어쩌면 나는 
너무 깊고 큰 원죄를
품었었나보다. 

Posted by Book끄-Book끄
읽고 끄적 끄적...2010. 6. 17. 06:34
소설 노동자 김탁환과 과학콘서트 정재승이 만나서 책을,
그것도 소설책을 썼단다.
뇌 과학자와 팩션 소설가가 만나 쓴 미래소설.
일단은 귀가 솔깃한 내용 아닌가?
이 두사람의 인연은 KAIST에서 시작된다.
KAIST 바이오 및 뇌공학과 교수인 정재승.
그리고 좀 의외라고 생각될지 모르지만 소설가 김탁환이 KAIST 교수로 오면서
우연한 술자리에서 이 이야기가 시작됐다고 한다.
1990년대 초에 사건이 하나 있었단다.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까???)
서울대공원에서 한 여자가 남자 친구에게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보여달라며
사자 우리에 손수건을 던진 후 가져오라고 했단다.
그런데 이 남자,
사랑에 눈이 멀었는지 어땠는지 모르지만 사자 우리 안을 들어갔단다.
그 최후는.... 뻔하지 않겠는가?
결국 남자는 사자에게 처참하게 죽임을 당함으로써 엽기적인 결말이 백주대낮에 발생하게 된거다.
나중에 이 남자의 시신을 부검했더니 그의 입 속에서 사자털이 잔뜩 나왔다나.
인간의 "생존 본능"이 그 상황에서 사자를 물어뜯게 만들었다는 거다.
그리고 이 세기의 사건은 과학자 정재승의 뇌리에 각인되어 화두가 되었단다.
소설을 써 보고 싶다는 생애 첫 충동을 일으킬만큼...



자신의 생존을 위협하는 순간,
엄청난 분노와 함께 미친 듯이 덤벼대는 인간의 폭력 성향.
이 "생존 본능"을 인공적으로 만들어 낼 수는 없을까?
로봇에게 생존 본능을 코드화해서 자신을 분해하거나 부수려는 존재에게 맞서 분노하게 만드는 일이 가능할까?
소설 <눈먼 시계공>은 그러니까 정재승의 화두에
김탁환의 캐릭터가 만나면서 이야기가 되어 세상에 나온 셈이다.
영화 <블레이드 러너>, <데몰리션맨>을 떠올리게 하는 소설이다.
지방 자치제가 활성화되고 국가보다 지역 내 기업의 경제적 영향력이 증대된 2049년의 세계에서는
국가라는 개념이 사라지고 특별시 체제로 재편하는 게 유행처럼 늘어나게 된다.
인간과 사이보그, 그리고 로봇이 함께 공존하는 세상.
마치 월드컵과 K-1을 연상시키는 로봇 배틀원 경기에 열광하는 사람들.
그리고 의문의 연쇄 살인 사건.
발견되는 시체는 하나 같이 뇌가 사라진 상태다.
피해자의 뇌에 남겨진 기억을 끌어내 범인을 잡았던 비밀 수사대 스티그마팀은 당혹스럽다.
뇌가 깜쪽같이 사라져버렸으니...

 <김탁환과 정재승>

이야기는 로봇 격투 경기와 살인 사건이 함께 맛물리면서 긴박하게 이어진다.
이야기 자체는 아주 흥미롭고 재미있다.
책장을 금방금방 넘기게 만들만큼...
김탁환이야 탁월한 스토리텔러로 유명한 사람이고
정재승 또한 입담 있는 과학자로 여러 편의 베스트셀러를 쓴 작가이기도 한다.
바이오 및 뇌공학자로 실제 소설의 내용과 비슷한 연구를 하고 있는 정재승의 과학적 상상력도 재미있다.
인간의 뇌와 로봇의 완벽한 인터페이스.
예전에는 결코 가능하지 않을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이제는 충분히 가능할거란 쪽으로 변했다.
(딱히 이 책 때문에 그렇게 됐다는 의미는 아니다. 세상은 늘 불가능을 현실화시키는 걸 계속 봐왔으니까...)
Impossilbe! 그건 아무것도 아니라는데...
정말 그렇게 되고 있음을 절감하고 체감한다.
기계와 인간이 몸을 섞는 그런 시대가 온다면,
우리는 어찌됐든 그걸 새로운 진화와 혁명으로 받아들이게 될까?
로봇의 머리에 인간의 머리를 이식하게 된다면
그 존재를 사이보그가 아니라 인간이라고 정의내릴 수 있을까?
입력된 코드에 의해 계산과 통계를 통해 행동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해서 행동하게 된다면...

이 소설에서는 인간의 "분노와 증오"를 격투 로봇에게 이입시킴으로
폭발적인 에너지를 내도록 프로그래밍 시킨다.
일부러 극심한 공포와 자극 속에서 사람을 살해함으로써
인간의 뇌에 저장되어 있는 그 살해 순간의 분노를
엄청난 폭력으로 분출시키는 프로그래밍.
기억은 세포를 바꾸고 세포의 변화가 곧 기억이 된단다.
그러니 기억은 과거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위해 존재한다.
SF적인 상상이라고 치부해버리기엔 세상은 너무 멀리까지 와 있다.
그러한 세계에서 나는 살아갈 수 있을까?
책장을 덮은 뒤끝은 영 찜찜하다.
당신의 전두엽엔 어떤 기억이 저장되어 있는가?
언젠가는 누군가 당신의 분노와 증오의 기억을 노리게 될지도 모른다.
다들 머리를 조심하라!!!!

Posted by Book끄-Book끄
보고 끄적 끄적...2010. 5. 24. 05:55

기간 : 2010.05.19 ~ 2010.05.23
장소 : 대학로 예술극장 소극장
극본 : 지경화
연출 : 채승훈
극단 : 창파
출연 : 남명렬, 김호정, 민경진, 이명호



제 31회 2010 서울연극제 참가작 8편 중에 
피날레을 장식하는(?) 작품이었던 연극 <옥수수밭에 누워있는 연인>
극본과 연출자는 낯설었지만
든든한 출연진만으로도 "must see" 목록에 포함시켰던 작품이다.
그런데 연극을 보고 난 후의 이 복잡하고 심란하고 불편한 감정들을 어떻게 말해야 할까?
공연장을 나서면서 "이제 살았구나..." 하는 안도감에
저절로 숨이 깊어진다.
참 막막하고 어려운 작품이구나...
그래도 정말 다행스러운 것은,
공연장에서 이해하지 못하고 앉아 있었던 찌질이가
결코 나 혼자만은 아니었다는 사실이 아주 큰 위로가 된다.




안개가 짙게 깔린 듯 운명적이며, 미스터리 하며, 원초적이며,
잔혹하며, 그로테스크하다!!

현실보다 잔혹한 환상, 환상보다 짜릿한 상상...

연극의 메인 헤드라잇은 이렇게 거하고 완강했다.
뒷북이긴 했지만 뒤늦게 시놉시스를 찾아봤다.
(시놉시스... 대략 참 난감하게 줄거리를 전해준다
 이것은 말을 한 것도, 말을 안 한 것도 아니여~~)

<시놉시스>
시와 도시의 경계에 선 어느 허름한 집. 여명이 어슴푸레한 새벽 그 집엔 이선(김호정)과 한보(남명렬)가 있다. 그들은 무언가로부터 도망친 듯 불안하고 초조하다. 지금 그들은 일종의 모의를 하고 있다. 이선의 아버지(한영:남명렬)로부터 거액의 돈을 타내기 위한 모략. 과연 그들은 아침을 맞아 그들의 계산대로 모든 일을 처리할 수 있을까 그들은 걱정된다. 현실의 고통과 존재하지 않는 이상이 억울하다. 마치 거인의 걸음과도 같은 파열음이 들리고 한보는 이선을 집에 남겨둔 채 밖으로 뛰쳐나간다. 그리고 얼마 뒤 낯선 부자(父子)가 집에 들어선다. 이들 부자 역시 평범한 일상의 인물들과는 거리가 멀다. 마치 마음과 육체의 고통들이 당장의 그것들을 넘어 형이상학적인 쾌락이 된 듯하다. 그리고 아버지(민경진)는 죽는다. 이선과 아들(이명호)만 남았다. 그들은 다르지만 또 닮기도 하다. 그들은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들을 이야기한다. 그때 한영이 찾아오고 한영은 총을 쏴 아들을 맞힌다. 마치 사냥꾼의 행동과도 같이. 그 사냥꾼은 바로 이선의 아버지다. 이선과 한영은 그러나 너무나 먼 거리에 있어 볼 수 없는 것처럼 서로에게 외롭다. 오늘로 인생의 마지막을 장식하려는 듯 집에 남은 모든 사람들은 자신이 가질 수 있는 가장 비극적 통로로 자신을 몰아넣기 시작한다.



처음에 나는 맨발로 등장하는 이선(김호정)과 아들(이명호)은
이미 죽은 사람들, 즉 "귀신들"이라고 생각했다.
한보(남명렬)가 느끼는 추위와 두려움을 이선은 전혀 느끼지 않았고
오히려  어느 면에서는 편안해 보이고 심지어는 그 상황을 즐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것은 모든 상황를 스스로 만들어낸 창조자가 
자신의 뜻데로 모든 게 이루어지는 걸 지켜보며 즐거워하는 묘한 관음의 시선같아 보였다.
(핀셋에 꽃혀있는 아직 살아있는 나비 표본을 바라보는 수집가의 섬뜩함이랄까?)
창백한 얼굴에 베낭을 메고 등장하는 아들은,
늙은 아버지를 졸졸 따라다니며
끊임없이 투정과 떼를 쓰는 비정상적으로 유아적인 인물이다.
불안한 시선과 페티즘을 떠올리게 하는 베낭에 가득한 여자 신발들.
그러니까  여자의 아버지 한영(남명렬)과 남자의 아버지(민경진)은
이 두 귀신들에 의해 상징적으로 죽은 존재들이며
이미 죽은  두 사람의 환상 속에만 살아있는 인물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결국은 그 환상 속 인물들과의 관계마저도
끝장을 내고 끊어버리게 되는 그런...



지금 가만히 되집어 생각해도 극의 내용은 집요하게 어렵고 표현은 찬란하게 수사적이다.
인간의 자유 의지와 숙명과의 갈등을
나비와 사막이라는 단어 속에 마구마구 구겨넣고
참을성있게 앉아있는 관객에게 일방통행적인 이해와 공감을 끊임없이 
그것도 지나치게 강요하는 것 같다.
그 강요는 심지어 거의 무차별적으로 쏟아붓는 폭력처럼 어이없이 일방적이다.
이쯤되면,
작품의 이해 여부를 떠나서
그대로 수건을 던지고 링위에 뻗어버리는 편이 어쩌면 훨씬 나은 선택이 될 것 같다.
무차별 폭력의 뒤끝은 아직까지도 불편하고 내내 찜찜하다.

"도대체 나는 왜,
 일방적으로 그렇게 얻어터지고 있어야만 했는가?"
(혹시 나 지금 K-1 본거니???)
Posted by Book끄-Book끄
읽고 끄적 끄적...2010. 5. 14. 06:20
영국 최초 흑인 여성 판사 콘스턴스 브리스코
그녀가 자신의 어린 시절을 이야기한다.
부모에게 사랑받으면서 행복하고 즐겁게 지낸 어린시절이 아닌,
친어머니에게 학대와 지독한 멸시를 받았던 과거의 사실을...
"어머니의 지독한 폭력과 따돌림...... 그러나 희망은 남는다"
의붓어머니가 아닌 친어머니가
자신이 낳은 딸을 이렇게까지 학대할 수 있는지 읽으면서도 믿어지지 않는다.
어머니는 항상 자신의 딸을 때린다.
어머니의 학대로 인한 불안때문에 생긴 야뇨증,
엄마는 침대에 오줌을 쌌다며 밥을 굶기고, 젖은 옷을 며칠씩 입게 한다.
심지어 젖은 옷들을 비닐 봉지에 담아 밀봉시킨 후 밤마다 그 옷을 꺼내 딸에게 다시 입으라고 한다.
어차피 오즘을 쌀텐데 마른 옷이 무슨 필요가 있느냐며...
못생겼다고 조롱하고, 칼로 팔을 그어버린다.
아이만 혼자 남겨놓고 이사를 가버린다.
그리고는 가끔씩 들러 열세살 아이한테 집세와 전기세를 내라고 한다.
아이가 혼자 있는 집에 찾아와 두꺼비집을 열고 퓨즈를 빼 전기를 끊어버린다.
극도로 괴롭힘을 당한 소녀는 머리카락이 하나둘 빠져 대머리가 된다.
어머니에게 꼬집히고 맞은 탓에 가슴에 외상성 종양이 생겨 수술까지 받는다.
학교를 다니면서 생할비를 벌기 위해 사무실 청소, 병원 밤 근무, 여성복 판매원으로 일하느라
어린 소년는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한다.
하루하루 생존을 위해서 살아내면서 어린 소녀는 결심한다.
법정변호사가 되겠노라고...



"내 인생을 통틀어 가장 후회하는 게 너를 낳았다는 거다. 하지만 시계를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은 너와 나 둘 다 알고 있지. 나는 남은 평생 동안 계속 후회할 거다. 그런 걸 너도 알고 있지? 안 그래? 못생긴 것. 오줌 싸는 건 또 어떻고. 정상적인 애들은 벌써 옛날에 안 하는 짓을 너만 하고 있지. 못생긴데다 오줌을 싸는 걸로도 모자라서, 머리까지 훌렁 벗겨졌지. 한 사람의 엄마가 감당하기엔 지나친  것 아니냐?"
"엄마, 언제쯤 전기를 다시 쓸 수 있을까요?"
"네 문제가 뭐냐 하면 말이다, 클레어. 넌 언제 입을 닥쳐야 하는지 몰라. 그게 네 문제야. 전기를 쓰고 싶으면 돈을 내면 간단한 일이다."
"너를 가졌을 때는 낙태가 불법이었지. 그렇지만 않았다면 떼버렸을텐데...."

부모에게 이런 말을 듣는 아이가 과연 정상적인 성인이 될 수 있을까?
어머니는 딸을 병균 취급을 하면 다른 자식들과 섞이는 것조차 싫어한다.
청동버클이 달린 가죽 벨트로 딸을 때리면서
더럽고 더러운 창녀같은 년이라고 소리지른다.

아이는 대학 입학 허가를 받고 떠나기전,
엄마를 찾아가 묻는다.
"내가 뭘 잘못했나요? 말해줄 수 있나요? 엄마는 내가 엄마를 미워하게 만들었어요"

  - 콘스턴스 브리스코

책이 출판되고 난 후 어머니측 변호사가 그녀를 상대로 고소장을 제출했단다.
책의 내용이 사실이 아니라면서...
결국 재판으로 이어졌고 그녀는 승소를 했다.
재판장을 나서며 그녀는 말했단다.
"절대로 어머니를 용서하지 않을 겁니다. "
세상에는 도저히 용서가 안 되는 일, 용서해서도 안 될 일이 있다는데,
두아이의 엄마가 된 콘스턴스 브리스코의 어린 기억은
그렇게 그녀의 몸 속에, 맘 속에 치료될 수 없는 상처로 남아있다.

절망과 고통 속에서 어린 그녀가 버틸 수 있었던 건,
엄마의 학대를 피해 잠시 함께 생활한 K 선생님 덕분이었다.
법정 변호사가 되겠다고 했을 때
그녀의 엄마는 머리 좋은 사람, 공부 잘하는 사람만이 대학을 갈 수 있다면 비웃었다.
그녀의 엄마는 그녀가 머리가 좋다는 것도, 공부를 잘 한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
엄마의 비웃음에 상처받은 그녀에게 K 선생님은 말한다.
"목표를 높이 세워야 하는 거야. 이 세상에는 너를 가로막을 수 있는 사람이 딱 한 명 있어.
 이 말을 잊지 마라. 너를 가로막을 수 있는 건 너밖에 없어.
 너는 멀리까지 나아갈 능력을 갖고 있단다. 그냥 가기만 하면 돼."

K 선생님 친어머니에게 학대받는 한 소녀의 삶을
완벽하게 바꿔놓았다.
이 책은 영국 최초 흑인 여성 판사 콘스턴스 브리스코의 이야기이며 더불어
두 다리를 잃은 K 선생님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Posted by Book끄-Book끄
읽고 끄적 끄적...2010. 4. 15. 05:51
촛불 집회를 가지고 쓴 본격적인 소설이라 했다.
이 말을 들었을 때 "본격적인"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궁금했었다.
핸드폰 엄지족에 의해
효순.미선 사건이 발단이 됐던 촛불 집회.
<캔들 플라워>
서정적인 제목에 감춰진 불안한 불꽃의 세계를 한 번 읽어보기로 했다.
엄지족을 시청앞 광장으로 불러모은 게 청소년이었듯
이 소설의 주인공도 레인보우 마을에 사는
(참 낭만적이고 동화적인 동네 이름이다)
열 다섯살 프랑스계 반쪽 한국인 지오(Geo)와 고등학생들,
그리고 희영, 연우, 수아라는 이름의 어른 아이 세 명이다.
개 이름 같지 않은 "사과"도 빼놓지 말아야겠지...



2008년 대한민국 시청은 촛불의 물결로 타올랐다.
무엇이 월드컵도 아닌데 시민들을 시청앞 광장으로 그것도 자발적으로 모이게 했을까?
2MB 정권은 여러 사람을 그렇게 시청앞으로 등 떠밀었다.
(그런데 2MB 정권은 자기들 때문에 사람들이 모인다는 걸 열심히 모른 척 했고
 그들을 "폭도"로 매도하면서까지 어이없는 폭력을 행사했다)
이 소설이 적극적인 참여자의 시선으로 쓰여졌다면 어땠을까?
다소 낭만적이고 사춘기 취향적인 부분들이 많긴 하지만
반쪽 한국인의 눈으로 쓰여졌다는 점이 조금 다른 느낌을 갖게 한다.
일종의 "두려움"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이국의 눈에는 수만의 사람들에 의해 피어오르는
캔들 플라워가 이유가 어찌됐든신비롭고 아름답게 보여지기도 했으리라.
열다섯 살 "자연의 감각"과 "탁월한 언어 감각"을 가진 아이 지오(Geo)
정말 캐나다에서는 15살에 성인을 인정하나?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15세는 어떤가?
여전히 청소년의 자리, 아직 한참은 더 배워야만 하는 중간의 단계다.
그런데 참 재미있는 건,
점점 더 많은 어른아이가 새나라의 어린이처럼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는 우리 나라에
균형을 맞추듯(?) 소위 "애늙은이"라 부르는 제 4의 집단이 생기고 있다.
그들의 현실감각과 지성은 놀라울 정도이기도 하다.
참 아이러니 아닌가?



이 책을 읽으면서 참 많이 씁쓸했다.
광우병 소고기, 용산철거, 대운하, 4대강 정비. 재개발 철거, 6.10 촛불 문화제까지...
이 모든 것들이 광화문에 설치된 육중한 컨테이너 장벽이 되어
내 가슴팍에 올려진 것 같이 갑갑하고 아득했다.
좀 유한 표현이긴 했지만
이 책은 이명박 정부에 대한 서정적인 조롱처럼 느껴졌다.
(제발 그러길...)
가끔 지금의 정부를 보면,
내 나이가 서너살을 한꺼번에 먹게 된다고 해도 빨리 시간이 지났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품게 한다.
그래서 이 정권이 빨리 자나가버렸으면...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이 시대를 버텨나가게 하는 나의 화두!

이런 내용을 소설이 아니라 현실로 읽어내야 한다는 게 참 싫다.
누가 우리에게 이런 시대를 만들었는가?
왜  우리는 이렇게 만들어진 시대를 살아내야 하는가?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제발...
Posted by Book끄-Book끄
달동네 책거리2008. 12. 10. 08:29

<천 개의 찬란한 태양> - 할레드 호세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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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레드 호세이니는 아프가니스탄에서 태어나 현재 미국에서 살고 있는 의사 작가입니다. 외교관인 아버지를 따라 이란, 프랑스 등에서 체류했던 그의 가족은 1979년 소련의 침공으로 조국이 공산국가로 변하자 이듬해 미국으로 망명을 했다고 하네요.

2003년, 그는 첫 소설 <연을 쫓는 아이>를 발표했고(달동네 책거리에서 지난번에 소개했던 책이기도 하구요) 4년 후인  2007년 두 번째 소설 <천 개의 찬란한 태양>을 발표했습니다.

전작이 아프가니스탄 남자의 이야기였다면 이 소설은 아프가니스탄에 남겨진 여성들의 삶에 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 인터뷰에서 작가는 말합니다.

“내 글쓰기가 아프가니스탄의 문제에 대한 논의를 일으켜 대중적 관심을 지속적으로 유지시킬 수 있길 희망한다”라고.....

(그리고 그는 충분히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단지 두 권의 책만으로도요....)


이 책에는 1959년부터 2003년까지 아프가니스탄의 끔찍했던 현대사를 관통해 온 두 여자의 삶을 그리고 있습니다.

책을 읽고 있으면 마치 다큐멘터리를 보고 있는 느낌을 갖게 합니다.

왜냐면 이 이야기는 소설이 아니라 정말 현실이니까요.

자, 그럼 이제 그 두 여자를 만나볼까요?


* 마리암

모계의 지위가 자식에게 이어지는 아프가니스탄.

부잣집 하녀였던 어머니와 주인 사이에 태어난 아이 마리암.

태어나는 순간부터 ‘하라미(후레자식)’란 이름으로 배척받는 아비 있는 사생아. 그것이 그녀의 위치였고 이름이었습니다.

가족에 편입되지 못하고 평생 좌절감에 몸부림치던 어머니 나나는 마리암이 열다섯 되던 해 딸이 아비의 집을 찾아가 그 집 앞에서 밤을 지세우던 날 자살을 합니다.

어머니는 두려웠겠죠. 혹시 혼자 남겨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그리고 딸의 곧 느끼게 될 현실과 인간 존엄성에 대한 거부 그리고 말로 표현되어질 수 없는 모든 것들이요...

혼자가 된 마리암은 아버지의 본가에서 잠시 생활하지만, 그들에게 이 아이는 단지 망신스럽고 부끄러운 존재일 뿐입니다.

그들은 마치 엄청난 은혜인양 서른 살 많은 홀아비 구두공 라시드에게 그녀를 시집보냅니다. 마리암의 나이 15살, 라시드는 45살....

남편(이 말의 끔찍스러움이여~~~) 라시드는 처음엔 다정했습니다.

아들을 몹시 바라던 그는 마리암의 유산이 계속되자 점점 본성을 드러내게 되죠.

폭행과 학대의 끝없는 시작...(이 단어는 그러나 절대...절대...절대로 부족한 표현입니다....)

밥을 제대로 짓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는 마리암에게 조약돌을 씹으라고 합니다.

마리암은 눈물을 흘리며 입 안에서 조약돌과 함께 자신의 부러지는 이를 함께 씹게 됩니다.

그녀에게 희망이라는 단어는 전혀 의미가 없는 말입니다.

이게 그녀의 삶입니다. 어쩌면 평생 동안 이어질지도 모르는.....


* 라일라

9살 라일라는 두 오빠가 전쟁터로 끌러가기 전까진 행복한 아이, 그리고 다정한 가정을 가지고 있던 사랑스런 어린 아이였습니다.

두 아들을 읽은 라일라의 엄마는 소련의 몰락만을 희망으로 아무 의미도 가치도 느끼지 않고 살아갑니다. 소련의 몰락과 함께 새롭게 시작하기 위해 카불을 떠날 준비를 하던 그들의 집으로 떨어지는 로켓 유탄.....

잃어버린 한쪽 청력과 그리고 사랑하는 티리크의 아이를 임신한 상태로 그녀의 의식은 점점 흐려집니다. 

마리암과 라시드에 의해 구출되는 라일라는 그들의 집에서 잠시 생활하게 되죠.

그리고 며칠 후 타리크가 피난길에 나머지 한쪽 다리도 잃고(한쪽은 이미 지뢰폭발로 잃어 의족을 하고 있었죠) 죽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그러나 이 소식은 모두 라시드가 꾸며낸 거짓말이었습니다)

이제 그녀도 혼자 남습니다.

(참고로 1996년 집권한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세력은, 여성들의 교육 및 취업 기회를 완전히 박탈하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 몸을 가리는 부르카를 착용하지 않은 채 집 밖으로 나온 여성들에게는 집단폭행을 가하는 등 극단적인 여성차별정책을 시행했습니다.)

절망한 라일라에게 라시드는 자신의 두 번째 부인이 되든, 거리로 나가든 선택을 하라고 말합니다. 거리는 강간과 살육이 범람하는 지옥으로 변한 지 이미 오래죠. 라일라는 그의 요구를 받아들입니다. 그녀의 몸 속엔 지켜내야 할 생명이 있었으니까요.

15살의 나이에 환갑도 넘긴 남자의 후처가 된 라일라....


증오의 상대로 만나게 된 마리암과 라일라는 가부장적이고 폭력적인 남편과 종교 근본주의로 퇴행한 사회와 맞닥뜨리면서 점차 동지적 관계를 맺게 됩니다.

남성의 소유물로 남성에 의지해야만 생존할 수 있는 탈레반의 아프가니스탄에서 여성들이 달리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없었습니다.

남성들에게 부여된 이러한 우월적 지위가 전쟁의 혼란 상황과 맞물리면서 남성의 가학적 폭력성은 가정 내에서 무자비한 폭력과 학대로 나타나게 됩니다. 그리고 여성들은 그것을 고스란히 당하게 되죠, 즉 이 책의 두 주인공이 그 희생물의 대표적 전형인 셈입니다.


마리암과 라일라는 한 남자의 아내로서 엄청난 나이차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 두 여인은 남편의 폭력을 똑같이 감내해야 하는 같은 입장에 처해 있습니다.

처음엔 서로 증오하고 미워하고 대면대면했던 그녀들은 점점 같은 상황을 감내하는 아프가니스탄에 남겨진 여인으로 동지애를 느끼게 되죠.

특히 라일라에게 자식이 생기면서 마리암은 그들 모두에게 진한 모정을 갖게 됩니다.

결국 남편의 극단적 폭력과 학대로 죽음 직전까지 몰린 라일라를 구하기 위해 마리암은 남편을 살해하게 되죠. 그리고 자신의 아들딸들을 살리기 위해 라일라를 그녀의 옛 애인 타리크와 탈출시키고 모든 죄를 스스로 감당하며 담담하게 죽음을 받아들입니다.

 

타리크와 행복한 새 삶을 살던 라일라는 결국 탈레반이 미군에 쫓겨 북부로 달아난 시점에 자신의 고국 아프가니스탄으로 되돌아옵니다.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앗아가 앙상한 뼈다귀만 남겨준 그 폐허의 현장으로요.

아마도 라일라는 자신만의 편안한 삶을 위해 남은 생을 살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것이 다시 폭력의 한복판으로 들어가는 길일지라도 그녀를 필요로 하는 많은 아프가니스탄의 아들딸들의 소리를 외면할 수는 도저히 없었겠죠. 

그녀는 전쟁의 상흔으로 고통 받는 아이들에게 마리암이 자신의 마음속에 심어준 찬란한 사랑을 나눠줄 것입이다.

이제 이 책의 제목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마도 라일라의 베품 속에서 천 개의 찬란한 태양은 계속 떠오르게 되겠죠.....

벽 뒤에 숨어서도 떠오를 천 개의 찬란한 태양이요...


이 소설을 결코 편하게 읽을 수는 도저히 없는 책입니다.

통곡을 하게 만드는 그래서 솔직히 책을 읽는 중간중간 참 많이 힘들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렇게 힘들고 아픈 책을 꼭 읽어야 하느냐고 물으면서요...

혹 누가 제가 이런 질문을 한다면 저는,

네, 꼭 읽어달라고, 그리고 제발 제발 제발 읽어달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너무 우울해서, 너무 안타까워서, 너무 서러워서, 그리고 너무 아파서 그래서 끝없이 내 온 몸이 침몰하는 느낌이 든다고 해도 꼭 읽어 보라고요....

끝없이 가라앉더라도 그 바닥에 도달하면 마침내는 그 깊은 곳을 차고 올라올 수 있게 만드는 책이니까요.

그리고 느끼게 됩니다.

내가 얼마나 다행인 존재고, 그리고 행복한 존재고, 그리고 아름다운 존재인지를요...

책 장을 덮으면서,

부르카로 나를 가리지 않겠다고 그리고 어떤 분노에든 약해지지 않겠다고 저 또한 함께 다짐했습니다.

저는 참 행복하고 다행한 사람입니다........


Posted by Book끄-Book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