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끄적 끄적...2011. 1. 13. 05:31
기욤 뮈소와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우리나라에 정말 고마워해야 한다. ^^
매번 책이 출판되면 광속으로 베스트셀러에 진입시키는 두 사람.
한 번도 내 돈 내고 구입한 적은 없지만
어찌됐건 출판이 되면 읽게 되는 책이다.
희한하다.
굳이 찾아 읽는 것도 아닌데...



좀 미안한 발언이긴 하지만
생긴 것과 다르게 "하이틴 로맨스"스러운 글을 쓰는 기욤 뮈소.
이 사람 책이 개인적으로 기대되는 북리스트에 올라간 적은 한번도 없다.
그러나 나름대로 재미는 확실히 있다.
이 사람의 모든 책들은 영화화에 대한 소망이 담뿍 담겨있다.
(아마도 조만간 판권으로 한 밑천 잡지 않을까 싶다)
<종이 여자>는 지금까지 읽은 기욤 뮈소의 소설들과 별반 다르지 않지만
그래도 가장 읽을만한 소설이었다.
(기욤 뮈소의 책은 그래도 다 읽었다.)
개인적으로 뒷부분을 반전으로 마무리한 게 맘에 든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기윰 뮈소만큼 Killing Time에 적당한 소설을 쓰는 사람도 없는 것 같다.
서너시간을 뚝딱 지나가게 만드니까...
기욤 뮈소는 이 책을 자신의 소설들 중에서 가장 애착이 많이 가는 작품이라고 말했다.
그럴만하다 싶다.
많이는 아니지만 기존의 소설들과는 약간은 다르니까.



집필에 몰두하다 보면 아슬아슬한 외줄타기를 하는 듯한 느낌이 들 때가 많았다. 글쓰기에 빠져 살다 보면 현실의 자리를 허구에 내주는 적도 많았다. 내 소설속 영웅들이 너무나 현실적이다 못해 내가 가는 곳마다 나타나곤 했다. 그들의 고통, 회의, 행복이 온전히 내 것이 되어 집필을 끝내고 나서도 쉽게 현실세계로 돌아오지 못했다.

소설 속 주인공인 베스트셀러 작가 톰의 말이다.
사랑하는 여자와 헤어진 톰은 예고된 3부작 마지막 책을 쓰지 못하고 방황한다.
그러다 만나게 된 "빌리" (내가 요즘 "빌리"라는 이름만 들어도 무한 애정 상승이다. ^^)
그런데 이 여자가 다름아닌 톰의 소설속 등장인물이다.
인쇄 불량 파본책에서 떨어진 여자.
"빌리"는 말하다.

우리 거래를 하는 게 어때요? 나는 당신이 오로르를 되찾아 오는 걸 돕고, 당신은 날 위해 3부작 소설의 마지막 편을 쓰는 거예요. 내가 다시 책 속으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은 그것밖에 없으니까...

현실에서 이런 일을 겪게 된다면?
솔직히 환장하게 좋을 것 같다.
나 역시도 한번쯤 만나서 이야기하고 싶은 인물들이 꽤 많으니까...
작가도 그렇겠지만 책을 읽는 독자도 가끔 그렇다.
현실의 자리를 허구에게 내주기도 한다.
책을 완성시키는 건 작가가 아니라 독자란다.
그 말엔 전적으로 공감한다

근본적으로 책이란 게 뭘까? 종이 위에 일정한 순서에 따라 글자를 배열해 놓은 것에 불과해. 글을 쓰고 나서 마침표를 찍는다고 해서 그 이야기가 존재할 수 잇는 건 아니야. 내 책상 서랍에는 아직 출간되지 않은 미완성 원고들이 몇 개나 들어 있어. 난 그 원고들이 살아 있는 거라 생각 안 해. 아직 아무도 읽은 사람이 없으니까. 책은 읽는 사람이 있을 때 비로소 생명을 얻는 거야. 머리속에 이미지들을 그리면서 주인공들이 살아갈 상상의 세계를 만드는 것, 그렇게 책에 생명을 불어넣는 존재가 바로 독자들이야.
책이 서점에 깔리는 순간부터 책은 내 소유가 아니다. 그때부터 책은 독자들의 소유가 되는 거야. 나한테서 배턴을 넘겨받은 독자들이 주인공들을 자기화하지. 그러고는 자신의 머릿속에서 새롭게 주인공들의 세계를 만들지. 독자가 자기 방식으로 책을 해석해 내가 애초에 의도했던 것과 전혀 다른 의미를 부여하는 경우도 종종 있어. 하지만 그건 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라 할 수 있어.


프랑수아즈 사강이 그랬단다.
책 읽는 시간은 언제나 도둑맞는 시간이라고...
그래서 지하철 안이 세상에서 제일 큰 도서관이 되기도 한다고... 
Posted by Book끄-Book끄
달동네 책거리2010. 10. 5. 05:24

<환상의 책> - 폴 오스터

 환상의 책

폴 오스터...
참 매력적이고 그리고 신비감 가득한 미국 작가입니다.
개인적으로 “폴 오스터”와 터키의 국민 작가 “오르한 파묵”을 자꾸 비교하게 되는데요, 두 사람 모두 신비적 탐미주의자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습니다.
차이가 있다면 “오르한 파묵”은 환상 속에서 현실을 이야기한다면 “폴 오스터”는 정확히 그 반대의 방법을 택하죠. 현실 속에서 환상을 이야기하는...
그러면서도 두 작가의 이야기 방식은 참 묘하게 닮아있습니다.
“오르한 파묵”이 지적이고 명석한 백과사전적인 글을 치열하고 아름답게 쓴다면, “폴 오스터”는 가십거리스러운 사건을 잡아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면서 현실감을 갖게 만듭니다.
둘 다 범접할 수 없는 독특한 스타일을 만들어 낸 작가라고 할 수 있죠.
그리고 두 사람의 책을 우리나라에 번역하는 번역가도 멋진 한 쌍의 페어를 연출합니다.
“오프한 파묵”에게는 번역가 “정영목”이, “폴 오스터”에게는 번역가 “황보석”이...
아마도 두 이국의 작가가 다른 번역가들을 만났다면 과연 지금과 같은 느낌을 전달받을 수는 없을 것이라 감히 단정합니다.

폴 오스터의 소설들...
참 재미있습니다. 그러나 읽기를 쉽게 포기하게 만드는 책이기도 하죠.
소위 말하는 고비를 넘어야만 폴 오스터의 이야기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일단 그 고비를 넘기면 손에서 놓기가 싫어질 정도죠. 그런데 그 고비라는 게 좀처럼 넘기가 힘들다는 게 문젭니다.
읽지 않고 포기하는 자에게는 결코 비밀의 문이 열리지 않으리라는 묵시록 같기도 합니다.
우리나라에 현재 그의 소설은 전부 14권이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 중에서 저는 정확히 8권의 소설을 읽었네요.
개인적으로 폴 오스터의 화두(話頭)는 실종과 풍자, 그리고 미스터리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읽은 폴 오스터의 거의 모든 주인공들은 결국은 실종을 선택하죠.
그 과정에서 우리는 숱한 미스터리와 세상을 향한 풍자를 맞닥뜨리게 됩니다. 그리고 그 길고 긴 실종의 과정은 동양의 선(仙) 사상과 묘하게 닮아있기도 합니다.
2002년 쓰여진 이 책의 원제는 “Book of illusion"입니다.
2008년 우리나라에 발표된 “환상의 책”이라는 제목보다는 “Book if illusion"이라는 원제가 확실히 더 폴 오스터스럽네요.
"illusion"이라는 뜻에는 왠지 은밀하고 비밀스런 느낌이 있는데, "환상"이라는 단어는 허황된 눈속임과 노골적인 드러냄이 느껴지기 때문이죠.
“Book of illusion"의 첫 장은 프랑스 낭만주의 작가 “샤토브리앙”의 짧은 글로 시작됩니다.
...... 인간은 하나의 동일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니다.
    끝에서 끝까지 이르는 여러 다른 삶을 살며 그것이 바로 비극의 원인이다 .....

그러니까 이 책은 두 사람이지만 동시에 같은 사람이기도 했던 누군가에 대한 기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두 사람의 같지만 다른 삶 이야기, 그리고 추적과 멈춤, 끌어당김과 거부가 잔잔하지만 집요하게 이어집니다.
그리고 그건 모든 인간의 모습, 그것이기도 하죠.

오래 전에 실종된, 그래서 죽었다고 믿어지는 무성 코미디 배우 “헥터 만”, 그리고 얼마 전 비행기 사고로 사랑하는 아내와 두 아이를 잃고 스스로를 불행의 삶 속으로 밀어 넣는 것으로 시간을 보내는 대학교수 “데이비드 짐머”.
어느 날, 데이비드는 TV를 통해 헥터 만이 출연한 오래된 무성 코미디 영화 한 편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헥터의 콧수염과 양복은 그에게 깊은 아우라를 남기죠.
절망 속에 살던 대학교수 짐머는 세상에 남겨진 헥터의 무성영화 12편을 보기 위해 집을 나서 몇 개월 동안 세계를 돌아다닙니다. 그리고는 다시 9개월 동안 칩거하듯 세상과 단절한 체 헥터 만에 대한 집필을 시작하고 드디어 <헥터 만의 무성 세계>라는 제목의 책을 출판하게 됩니다.
그리고 어느 날 우편함에 배달된 한 통의 편지.
헥터 만의 부인이라고 자처하는 사람이 쓴 편지의 내용은 "그가 당신을 만나고 싶어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데이비드는 처음에는 이 편지를 믿지 않았습니다.
그가 진짜 헥터 만인지 어떻게 아느냐는 답장에 그녀는 다시 편지를 보냅니다.
“제 말이 진실임을 아시는 유일한 방법은 초청을 받아들이시는 것입니다.”
편지는 계속 이어집니다.
“그 사람이 1929년 할리우드를 떠난 뒤 여러 편의 장편 특작 영화들을 쓰고 감독했다는 말씀을 드린다면 오시겠다는 마음이 드실는지요? 헥터는 이미 아흔이고 나날이 건강을 잃어 가고 있어요. 그 사람은 제게 남긴 유언장에다 자신이 세상을 뜨고 나서 24시간 내에 그 필름들과 원본을 모두 파기하라고 했는데, 저로서는 그 사람이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그녀의 편지 내용대로라면 헥터 만은 스스로 자발적인 실종을 선택했다는 이야기네요.
이 대목에서 주인공보다 오히려 제가 더 헥터 만의 진실을 추적하고 싶어지는 열망이 가득합니다.
다행히 그를 데리고 가기 위해 한 여자가 등장합니다.
헥터 만의 전기를 쓰고 있다는, 헥터 만과 함께 영화를 만들었던 카메라맨의 딸 엘머가.
함께 뉴멕시코 블루스톤 농장을 향하면서 데이비드는 헥터 만의 모든 생애에 대한 이야기를 자세히 듣게 됩니다.
그야말로 그녀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나다니엘 호손의 <모반>처럼 그를 산 채로 먹어치워 버렸습니다.
영화배우로서의 헥터 만의 삶, 그리고 스스로 실종을 선택하고 콧수염을 자르고 양복을 벗고 허먼 레서로의 삶, 얼굴을 가면으로 가리고 라이브 포르노 공연배우로 살았던 삶.
그는 그 삶들이 자신에 대한 보복 내지는 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죽음보다 단순하고 파멸보다 더 나은 방법, 끝장을 보지 않고서도 자신을 계속 죽여 나갈 수 있는 방법으로 그는 타락을 선택했던 거죠.
... 만약 내 삶을 구할 생각이라면 그 삶을 파멸시키기 일보 직전까지 가야 한다....
그런데 참 아이러니하고 재미있는 건,
헥터 만의 삶이 바로 데이비드의 삶이기도 하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두 사람은 분명 다른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어쩌면 두 사람의 삶이 이렇게까지 동일할 수 가 있을까요?
“도플갱어” 혹은 “평행이론”이었을까요?

이 이야기는 일종의 “미궁”입니다.
비극적이면서 동시에 희망을 주는 결말.
어쩌면 “믿거나 말거나”류의 황당한 결말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다 읽고 나면 말이죠. 이런 생각을 심각하게 하게 됩니다.
“이게 정말 허구일까?”
폴 오스터의 이야기의 끝은 항상 그렇습니다.
“당신들이 이 책을 읽고 있을 때면 이 책을 쓴 사람이 벌써 오래전에 죽었다고 믿어도 좋다.”
이런 신비주의가 무책임의 한 형태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세상 모든 사람의 삶은 어쨌든 모두 익명성의 보장이고, 실종이고 그리고 은밀함의 추구임에는 분명하죠.
“나는 빌려다 쓰는 삶을 살고 있었다.”
폴 오스터의 소설 속 주인공들은 매번 이런 고백을 합니다. 그렇게 말함으로써 읽는 이에게 당신의 지금 삶은 어떠며 은밀한 질문을 던지죠.
만약에 빌려다 쓰는 삶이라고 느낀다면 그것은 단지 잠시 동안의 실종이라고 말합니다.
조만간 누군가에 의해 진실이 담긴 삶의 문이 열릴 것이고 그렇게 되면 당신의 이야기는 맨 처음부터 다시 새롭게 시작될 거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지금은 은밀하고 비밀스럽게 잘 보관하고 있어야 한다고 충고하는 셈이죠.
끝나지 않은 이야기를 읽고 있다는 느낌.
그러데 그 이야기는 앞으로도 결코 끝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세상에는 알아야 할 이야기가 있고 알지 않는 게 오히려 더 좋은 이야기가 있다고 합니다.
이야기를 알고난 전과 후가 극명하게 달라지는 경우에는 더더욱 말이죠.
저는 말이죠. 책을 읽으면 매번 그 책 속으로의 실종을 간절히 꿈꿉니다.
내 책이라는 소유욕보다 내 이야기라는 소유욕이 백배는 더 강하죠.
그래서 늘 또 다른 이야기를 찾아 나서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폴 오스터의 <환상의 책>
그 속에서 제 맘 같은 구절이 있어 에필로그로 남겨봅니다.

...... 여기까지 온 당신들은 실로 위대하다 ......


Posted by Book끄-Book끄
읽고 끄적 끄적...2010. 7. 6. 05:36
오랫만에 괜찮은 팩션소설을 읽다
울어내지 못하고 몸 안에 담겨 있는 울음을 한 장 한 장 읽어내는 느낌은
참담하기도 했고 그리고 거침없이 모욕적이기도 했다.
힘이 없는 나라의 세자라는 위치가,
굴욕적인 패배로 아비는 남한산성에서 머리를 땅에 조아려야 했고
아들은 볼모라는 이름으로 그 아비의 나라를 떠나야만 했다는 사실이
참 아프고 서럽다.
10년이 세월을 보내고 돌아왔을 때,
끊임없이 이어지는 아비의 의심은 결국 세자의 목숨까지 허망하게 만든어 버린다.
고작 두 달을 살자고 아들은 굴욕의 시간을 견뎌냈던가!



세자는 아프고 싶지 않았고 아파도 말하고 싶지 않았다. 더욱이 그 아픔을 호소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아프다 말하지 않고, 호소하는 상소도 올리지 않고 선뜻 따라나서면 조선의 임금은 그런 세자를 가상하다 하실 것인가. 그래서 세자는 가고 싶지 않은 길을 떠나는 애통한 마음을.....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을 몰아내고 임금에 오른 인조.
명나라를 숭배하는 조선은 변발을 하는 청을 오랑캐라 취급하며 멸시했다.
그러나 청에게 굴욕적인 모욕을 당하고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내어주기에 이른 조선.
아비에게 스스로 청으로 가겠노라 세자는 말했지만
소현의 심정은 얼마나 절절하고 아득했을까?
기댈 곳 없는 적의 땅으로 끌려가는 세자의 단정한 아픔은
오히려 역사보다 길고 역사보다 아프다.
아비는 잠시 환궁한 아들에게 말한다.

내가 백성을 생각한다. 사저를 떠나던 그 순간부터 내가 그러했다. 백성들이 전란에 다치고 주렸다. 그 피맺힌 울음소리가 한시도 내 귀를 떠나지 않으니 내 살이 아팠다. 내 살에 베어 백성들을 먹일 수 있으면 그리했으리라. 내 목을 내주어 백성들을 살릴 수 있다면 내가 그래했으리라.
멀리 떠나 있는 아들을 생각할 때도 내가 몸이 아팠다. 베어내지 못하는 살이 붙어 있는 자리에서 아팠다. 내가 너를 생각하면 몸이 더욱 아팠다. 불로 지진 침을 맞아도그 아픔이 가시지 않다.
울거라. 네 몸에 울음이 가득할 것이다.


이런 아비였는데 무슨 이유로 아들이 환국해 돌아왔을 때 살갑게 대하지 못했을까?
공식적인 소현세자의 사망원인은 학질로 기록되어 있지만
아비에 의해 아들이 죽임을 당했으리라는 의혹이 지배적이다.
소현세자가 죽고 세자빈과 그 자식들까지도 몰살되는 참상을 겪었으니
차라리 소현세자의 처지가 덜 괴괴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인조는 무엇이 두려웠던 걸까?
자신이 광해군을 치고 왕위에 올랐듯 아들이 청의 세력을 입고
혁명이라도 하리라 믿어버렸을까?
역사라는 게, 왕의 역사라는 게 오히려 끔찍한 오명처럼 다가온다.

역모에 세자의 이름이 오르내렸다고 했다. 그 진위가 어떠하든 간에 조선의 임금이 자신의 아들을 적으로 보고 있다는 것만큼은 분명했다. 어느 임금에게 적이 아닌 자식이 있을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그 수위가 역모에 이를 정도로 높아졌으니, 세자의 입지가 더할 수 없이 위험한 정도에 이르렀음은 분명한 일이었다.
... 세자가 역모에 올랐어도, 오르지 않았어도 이미 임금의 적인 것이다.


이런 아비와 아들의 관계라니...
고되고 아프다.



이긴 자와 진 자의 자리가 다르다는 것을, 완전히 굴복해보지 않은 자는 다 알지 못하는 것이다. 진 자의 자리는 바닥이 아니라 바닥 아래보다 더 낮은 곳이었다. 더는 내려갈 곳이 없으므로 그 자리가 바로 죽음이었다. 하나의 생이 그때에 끝났고, 또 하나의 생이 그때에 시작되었던 것이다. 벌판에 세워져 있던 또 하나의 막차 안에서 패국의 세자는 언젠가 그들의 자리가 바뀌게 될 나라를 기다렸던 것이다. 자신의 생이 다하는 날까지 기다려도 안 된다면 그 다음 생에, 그 다음 생이 있을 것이다. 조선이 살아남는다면 결국 그리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세자의 염원이었다.

세자의 염원을 읽어내는 대목은 목울대마저 아프다.
죽어야 했으나 죽지 못한 자의 시간은 더 이상 어디에도 속한 시간이 아니라고 했던가!
전쟁의 시대보다 무서운 것이 정치의 시대란다.
전쟁은 오직 죽음을 위해 있지만 정치는 죽음까지 농락하기에...
전쟁이 끝나면 정치가 남고
남은 정치 속에서는 누구에게도 영원한 안식이란 없을 것이란다.
과거의 역사가 그대로 현실로 맛물리는 걸 바라보며
팩션의 세계가 아니라 현실의 세계가 나는 더 암담하고 아득해진다.
타국에 의한 굴욕이 아니라 자국에 의해 굴욕스러워지는 지금 이 순간들...
어쩌면 우리도 "학질"이라는 병명으로
계속 타살 당하고 있는 중인지도 모르겠다.
 
나중에 우리의 지금 역사도 팩션이 될까?
허구의 역사에 살고 있는 지금을 실감하면서 읽어낸 책은
한 장 한 장이 긴 한숨 섞인 고단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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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체가 책 속으로 몰입하게 만든다
이야기도 그렇고 문체도 그렇고 김훈의 <남한산성>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러면서도 느낌이 참 다르다.
정확히 말해서 <남한산성>이 인조의 입장에서 쓴 글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인조의 심경을 대변하고 있다고는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책은 청나라에 10년간 볼모로 잡혀있던 아들의 심정에 대한 글이고...
두 책을 함께 읽으면 더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지나쳤던 부분들을 다시 볼 수 있게 하지 않을까 싶어서...
조만간 <남한산성>을 다시 한 번 꺼내봐야 할 것 같다.
Posted by Book끄-Book끄
읽고 끄적 끄적...2009. 9. 6. 19:26
결말이 궁금했었다.
미카엘 팽송은 제우스가 말한 "제 9의 존재"를 조우하게 되는가?
평생 글쟁이를 자처한 베르베르스럽다.
5권까지을 읽었을때 18호 지구로 내려온 미카엘에게
뭔가 한번의 반전이 이루어지겠구나 싶었는데
두 번의 반전을 만나다.



<개미>이 과학자 에즈몽 웰즈와
<타나토노트>, <신들의 제국>의 미카엘 팽송을 끝까지 등장시키고
그 외의 자신의 다른 소설 <인간>, <파피용>에 이르기까지....
지금까지 그가 써 온 모든 이야기의 표절이자 페러디였던 세계.
이제 베르베르식 글쓰기의 한 세대가 막을 내리는 셈인가!
그의 기발함에 유머러스함에 찬사를 보낸다.



8의 세계의 신인 제우스가 말한 두 번째 산 너머의 "9 세계"
Y 게임의 우승자만이 유일하게 들어갈 수 있다고 말한 곳,
별이 된 미카엘,
그가 본 9의 세계는  다름 아닌 "어머니 은하"였다.
그리고 "어머니 은하"가 말하는 또 다른 세계 "10"
"아버지 우주"의 세계.
켜켜히 쌓인 세계들의 연속
그리고 "10의 세계"에 이어지는 최종적인 마지막 세계
"111의 세계"



결국 그 곳은 책의 한 페이지였다.
"111의 세계"란 사실은 켜켜히 쌓인 책장들을 도형으로 나타내 세워놓은 모습이었다.
편평한 세계, 극도로 납작한 평행 육면체의 우주.
어떤 책....의 한 페이지!
즉, 우리가 말하는 우주라고 하는 것은 책의 한 페이지, 바로 그것이었다.
누군가의 시선과 상상력으로써 활성화시켜 주기만 한다면
그 우주는 불멸의 존재로 살아가게 된다는 명제.
"독자"가 한 사람이라도 남아 있는 한,
우리의 우주는 어디서든 새롭게 다시 태어날 수 있게 된단다.



기발하다.
그래서 오히려 결말이 허무하게 느껴질만큼...
어쨌든 이제 미카엘 팽송과 에즈몽 웰즈는 모두 끝이 난건가?
상대적이고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서전도 마찬가지로....
그런데 묘한 건,
어딘가 끝나지 않은 이야기가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다.
혹시 모르지, 
나란 사람도 사실은 어느 책의 한 페이지에 봉사하는 허구적 존재에 불과한지도.
Posted by Book끄-Book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