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끄적 끄적...2011. 3. 19. 05:53
김영하를 말할 때 이 작품은 항상 앞자리를 차지한다.
2001년 2월 출판된 <아랑은 왜>
2010년 다시 출판될때까지 한때 잠깐 이 책을 구입하지 못한 때가 있었다.
공교롭게도 그때 이 책을 찾으려고 잠시 여기저기 뒤적거리기도 했었다.
서평서나 아니면 책 좀 읽는다는 간서치들도 손꼽았던 책 <아랑은 왜>
김영하 작품이라면 왠만하면 다 읽었던 나로서는
너무 늦게 이 책을 읽은 셈이다.
와~~~우!
그런데 이 작품!
물건도 이런 물건이 없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사설이 길다~~~~"라고 하는 그 "사설"로
이렇게 기막히고 멋지고 완벽히 새로운 이야기가 탄생될 수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이건 확실히 "탄생" 그 자체다!


...... 아랑은 나비가 되었다고 한다 ......

소설은 별 중요하지 않은 이야기처럼
약간은 심드렁한 말투로 시작된다.
아마도 "아랑은 나비가 되었다"라고 시작했다면 나는 첫 문장부터 소스라치게 놀라지 않았을 것이다.
"나비가 되었다고 한다"라는 말 속에 담겼을 숱한 비화들과 논쟁거리들이
첫 문장을 읽는 순간 빠져들게 했다.
확실히 뭔가가 있는 있구나 기대감을 잔뜩 품게 한다.
"아랑(阿娘)" 전설을 모르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굳이 "아랑"이라는 이름을 모른다고 해도 그 전설 자체는 어릴 적 "전설의 고향"에서도 한 번쯤 봤던 숱한 이야기다.
억울하게 살해된 아랑이 신관사또가 부임하면 첫날 찾아와서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려고 하지만
지레 겁을 먹은 사또들은그만 그 밤에 줄줄이 죽어나간다.
그러다 용감한 사또가 부임하면서 아랑의 혼백을 만나 억울함을 듣고 비로소 사건을 해결한다는 이야기...
(다 아는 이야기를 굳이 쓰려니 참 민망하다)

그러니까 이 작품은,
작가의 말처럼 아랑전설을 전면적으로 재검토하여 새롭게 재구성한
아랑 전설의 틈찾기라고 할 수 있다.
작품속에 등장하는 작가는 여기저기 아주 적극적으로 개입해서
마치 한 편의 시나리오 전체를 총 지휘하는 영화감독이 된다.
연기할 배우를 캐릭터를 설명하고 그 배우와 이야기를 하고...
작품 여기저기에 다른 세상들이 시간과 공간을 오가며, 그것도 믿어지지 않을 만큼 질서정연하게 펼쳐진다.
이건 무작정 빠져들 수밖에 없는 구조고 이야기 전개고
그리고 모든 것이다.
모두가 아는 익숙한 이야기를 다르게 쓴다는 건 만만찮은 일이라고 작가는 책을 빌어 볼맨 소리를 하지만
이런 페이크조차도 무지 재미있고 흥미롭다.


전설 속 아량 이야기.
작품 속의 연출가(?)인 작가가 만든 현실 속의 가상 인물 "박"과 "영주"
그리고 또 그 작가가 만난 선운사 앞에서 큰줄흰나비 박제를 팔고 있던 현재의 아랑!
거기다가 여기저기서 친절하게 출처까지 밝혀준 각종 문헌 자료들은
은근히 이 이야기를 학구적이고 고증학적이게 만드는 묘미까지 있다.
(어쩐지 이 책에 나온 모든 문헌들이 거짓이라도 나는 진실이라고 끝끝내 믿고 싶어진다)
지금까지 알고 있던 아랑 전설의 모든 것을 뒤집는 이야기는
허를 찔리는 기분이기도 하고 농락당하고 있는 기분이기도 하다.
하지만 아랑이야기는 어디까지나 전설이다.
그러니 아무도 진실이 무엇인지는 결코 알 수 없고
그런 이유로 모든 이야기는 진실일 수밖에 없다.
김영하가 만든 완전히 다른 세계를 덮으면서 책 속의 이 문장이 오랫동안 잊히지 않는다.

......과연 누가 중독자들만큼 지루할 수 있을까? 강력한 자극이 엄습하기를 기다리고 준비하는 시간은 얼마나 길 것인가. 다가올 환상에 대한 기대가 클수록 더욱 그렇겠지 ....

그렇다!
나는 지금 김영하에게 중독되어 버린 것이다.
이제 나는 어쩔 수 없이 지루한 사람이 될 팔자다.
그리고 이건 순전히, 전적으로
김영하 때문이다!
Posted by Book끄-Book끄
달동네 책거리2009. 11. 30. 05:51
 <죽도록 책만 읽는> - 이권우



죽도록 책만 읽는

지난번에 소개한 간서치 이덕무와 유사한 책벌레의 책을 한 권 소개하려고 합니다.

책을 읽고 싶은데 어떤 책을 읽는 게 좋을지 모르겠다고 생각되는 분께 적극 권하고 싶은 책입니다.

일곱 개의 챕터로 구성된 이 책은 어느 한 쪽에 치우침 없이 다방변의 주제에 대한 책들을 적당한 호기심과 흥미를 유발하도록 소개하고 있습니다.

저 역시도 이 책을 보면서 희망도서 목록에 상당한 책들을 추가했고 지금 열심히 읽고 있는 중입니다.

저처럼 두루뭉술하게 주절주절(?) 책을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소위 말하는 에센스만을 짧고 간략하게 소개해 주고 있는 책입니다.

솔직히 꽤나 열등감과 부러움을 자아내게 만드는 책이죠.

그래도 평소에 책 좀 읽는다고 자부했었는데 이곳에 소개된 책들을 살펴보고는 읽지 않은 책이 훨씬 더 많다는 걸 알고는 번데기 앞에 주름잡은 스스로에 대해 반성하게 만든 계기도 됐습니다.

책의 저자 이권우!

서평잡지 <출판저널>의 편집장을 했던 사람입니다.

그야말로 책에 파묻혀 지냈던 사람이고 현재도 책을 통해 여전히 밥벌이를 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스스로 “호모 부커스”를 자처하는 사람이기도 하죠.


“호모 부커스”

책 읽는 인간 존재라는 뜻의 신조어죠.(사실은 꽤 오래된 단어이긴 합니다만...)

이 말 속에는 “공유”의 의미도 함께 포함되어 있습니다.

흔히 독서라는 건 지극히 개인적인 행위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책 읽는 자의 궁극적인 목적은 저 또한 “공유와 소통”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작가 개인과의 생각과 감정 공유를 넘어 더 많은 타인과의 적극적인 소통의 시작이 “독서”의 매력이라고 개인적으로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호모 부커스”들은 상당히 개방적이며 지독히 현실적이기까지 하죠.

어설픈 독서가들은 현실과 이상 사이의 혼동을 겪게 되지만 “호모 부커스”들은 현실과 이상을 명확하게 구분함으로써 스스로 최대한 편견 없이 판단하고 평가하는 공정함까지 소유하게 됩니다.

“박학다식”이라는 말 속에 항상 “다독”이 포함되어 있는 이유기도 하죠.

눈이 갖는 기억력, 그래서 저는 책을 통해 얻게 되는 기억과 지식들에 대해 차별성을 두게 되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책은 말이죠...

사람을 참 조용히 수다스럽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이 책, <죽도록 책만 읽는>도 그런 의미에선 상당히 수다스러운 책이죠.

그런데 그게 “바글바글” 떠들며 밖으로 퍼지는 소란스러움이 아니라 “소곤소곤” 다가오는 울림이라는 게 그 차이점이죠.

무려 110권이나 되는 책들의 수다를 들을 수 있습니다.

신문을 펼쳤을 때 부담감 없이 재미있게 보게 되는 한 컷짜리 카툰 같다고나 할까요?

짧은 글 속에 필요한 것들만 쏙쏙 알차게 들어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짧은 글 속에 촌철살인의 문구들을 자주 만나게 됩니다.

가령, “고전”에 대해 말하면서,

“고전, 제목은 알아도 정작 읽어보지 않은 책”이라는 스피노자의 말을 인용하면서 정곡을 찌르는 이야기를 시작하죠.

“...... 오늘, 다시 고전을 읽는 데는 다른 무엇보다 토론과 논쟁의 정신이 필요하다. 세월의 담금질을 겪으면 겪을수록 그 정신의 순도가 높아지는 것을 일러 고전이라 한다. 앎과 지혜의 고갱이가 가득 쌓인 곳간인 셈이다. 그러나 이 곳간은 좀처럼 자신의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 지적 호기심이나 의무감만으로 고전을 읽으면서 고전을 면치 못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그 정도로는 권위와 명성, 그리고 오해의 더께가 잔뜩 끼인 고전의 빗장을 열어젖힐 수 없다. 나는 고전의 문을 여는 열쇠는 치열한 문제의식이라고 여겨왔다. 우리 시대의 문제상황을 깊이 이해하고, 그 타개책을 찾기 위한 지적 분투의 필요성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을 달리 표현하면, ‘질문만들기’라 할 수 있다.

질문을 만든 사람이 고전을 경전처럼 여길 리 없다. 고전의 지은이와 토론과 논쟁을 벌이게 마련이다. 막장을 뚫고나갈 지혜를 묻고, 그 답이 현재적 가치가 있는지 토론한다. 도전적인 토론은 논쟁을 불러일으킨다. 이 과정에서 지은이의 사상이 안고 있는 한계가 드러나며, 이를 넘어서기 위한 대안을 찾게 된다. 이쯤 되면, 고전의 주위를 맴도는 지은이라는 ‘유령’이 가만히 당할 리 없다. 해석의 오류를 지적하거나 자신의 다른 책을 참조해야 한다고 복화술로 변호하기도 한다. 고전을 읽는 행위는, 그러므로 묵독일 수 없다. 제대로 읽으면 그것만큼 소란스러운 책읽기가 없다. 자신도 모르게 카니발적 책읽기에 몰두하게 된다..... “

고백컨대, 

저를 완벽히 KO패 시킨 문구였습니다.


“왜 책을 읽어야 하는가?” 그리고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하게 만드는 책입니다.

책은 그러니까 “앎과 함”의 일치를 위해 우리에게 꼭 필요한 행위라고 이 책은 말합니다.

환상은 현실보다 힘이 세다고 하죠. 그래서 우리는 환상에 머물고픈 욕망에 늘 빠지게 됩니다. 그게 어쨌든 일반적인 힘의 논리니까 말입니다.

책은. 그러니까 그 환상을 극도의 차가운 정열로 바라보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를 “~~카더라” 통신에 빠지지 않고 바른 시각과 주관을 갖게 만들어 주죠.

생각해보면 정말 책만큼 누구에게나 민주적인 것도 없는 것 같습니다.

책장을 열기만 한다면 누구에게나 공평한 세계를 그것도 비밀 없이 송두리째 보여주죠.

“다 열어보였으니 어디 한 번 맘껏 들여다봐라!”

책벌레들을 그래서 흔히 관음증 환자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책에 새겨진 다른 사람의 욕망을 책장을 커튼 삼아 훔쳐보는 책벌레들...

그러나 책을 탐하는 관음의 시선은 훨씬 더 근원적이고 깊고 고요합니다.

책을 구하고, 읽고, 즐거움을 나누는 모든 과정에 대한 일종의 은밀한 흥분감이죠.

그래서 책의 자궁이라는 것이 있다면 저 역시도 기꺼이 몸을 웅크려 작은 태아가 될 용의가 있음을 고백하게 됩니다.

“죽도록 책만 읽어도” 다 읽혀지지 못할 책들의 세계.

그 책들의 세계 속에 몸을 웅크리고 지독히 탐욕스런 관음의 시선으로 책들을 바라보자 권하고 싶습니다.

마술사의 비밀을 아는 순간 눈속임의 실체가 드러나는 게 아니라 드디어 스스로 같은 마술사가 되는 거라고 하죠.

오늘 해리포터의 세계로 함께 들어가자 여러분께 손 내밀고 싶습니다.

깊고 고요하고 간절하고 농밀한 관음의 세계가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Posted by Book끄-Book끄
달동네 책거리2009. 11. 23. 06:31
 <책만 보는 바보> - 안소영 

 
책만 보는 바보

<책만 보는 바보>

제목만 보면 어떤 책이라고 생각되나요?

좋은 책을 소개해 주는 서평집 같다는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습니다.

혹시 “간서치(看書痴)”란 단어를 들어본 적이 있을까요?

“간서치(看書痴)”란 말 그대로 “책만 보는 바보”라는 뜻으로 “책벌레”를 가리키는 말이죠.

조선의 역사 속에서 “간서치”라 할 만한 인물을 꼽으라면, (어디까지나 지극히 저의 개인적인 취향임을 밝히는 바입니다.)

정조 이산, 연암 박지원, 다산 정약용, 청장관 이덕무, 퇴계 이황, 율곡 이이 등을 꼽을 수 있을 겁니다.

특히 청장관 이덕무는 아예 자기 자신을 “간서치”라고 부를 정도로 책 속에 파묻혀 지냈던 인물이죠.

이 책, <책만 보는 바보>는 그러니까 바로 규장각 검서관(檢書官)이었던 이덕무(1741~1793), 그 지독한 책벌레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저자 안소영은 청장관 이덕무가 1761년 쓴 자서전 <간서치전>을 읽고 그에게 매료되어 이 책을 집필하게 됐다고 합니다. 그것도 스스로 이덕무가 되어, 역사 속의 그를 버젓이 지금의 시대 안으로 불러내고 있습니다. 이 책을 읽고 있으면 이덕무라는 역사 속 인물이 마치 내 옆에 앉아서 조곤조곤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집니다.

일생을 책 속에 파묻혀 책만 읽는다...

어떻게 생각하면 생활력 없고 현실적이지 못한 무책임한 한량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이덕무 그 자신은 결코 책만 보는 바보가 되고 싶었던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의 진정은 세상에 쓰임이 되는 사람이길 간절히 원했죠.

그런데 이 바람은 그에겐 넘지 못할 높은 산과도 같았습니다.

바로 “서자(庶子)”라는 그의 출신 성분 때문이었죠.

“...... 사람으로 태어나 가장 비참한 것은 쓰일 데가 없다는 것이다. 책만 파고들면 무엇 하나? 내 말과 글로는 세상을 조금도 바꾸어 놓지 못하는 것을. 몸을 움직여 할 줄 아는 일이 무엇이던가? 어렵게 뜻을 세웠다 하더라도 세울 뜻을 펼쳐 보일 데가 없는 나의 인생은 내내 외롭고 서럽기만 했다.....”

이덕무는 왕족의 후손이었으나 적자 혈통이 아닌 서자 혈통이었습니다. 그의 할아버지로부터 시작돼 후손으로 이어진 서럽고 서러운 서자라는 핏줄.

이 보이지 않는 서러운 핏줄로 이덕무의 앞길은 가로막히고, 주눅들 수밖에는 없었죠. 그때마다 그는 “두려움과 무기력감”에 빠져 괴로워했다고 고백합니다.

적자와 서자의 구별이 엄격했던 조선!

그 시대에 서자가 낄 자리는 도저히 없었습니다. 농사를 짓거나 장사를 하여 먹고살 방도를 찾아보려 하여도 양반의 핏줄이라 하여 달가워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존대를 받으며 구종을 부릴 수 있는 당당한 양반의 처지 또한 아니었죠. 그럴 때마다 그는 어머니가 물려준 보잘것없는 핏줄이 아니라, 아버지가 물려준 이기적인 양반의 핏줄이 한스러울 따름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가 책만 보는 바보가 될 수밖에 없었던 건 서러운 핏줄에 대한 한스러움과 어쩌지 못하는 신분에 대한 벽 때문이었던 거죠.


이서구, 유득공, 박제가, 백동수.

소위 백탑파라고 불리우는 이덕무의 깊은 벗들입니다.

명문가의 적자인 이서구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다 이 서러운 핏줄인 서자 출신이죠.

이들의 사귐은... 참 다정하고 멋스럽습니다.

아끼던 일곱 권의 <맹자> 한 질을 팔아 생계를 꾸려야 했던 이덕무를 보며 자신이 아끼던 <좌씨춘추>를 팔아 술을 샀던 7살 아래의 유득공. 우수한 성적으로 무과에 합격했으나 서자 출신으로 오랫동안 관직에 나가지 못해 산 속으로 들어간 2살 아래 처남 백동수, 사물에 대한 세밀한 관찰과 연구에 능했으나 쓰일 곳이 없어 오히려 더 마음이 아팠던 9살 아래 박제가. 명문가의 후손으로 이덕무와는 무려 13살의 나이 차이가 있던 어린 이서구까지...

그들의 사귐에는 나이와 신분을 초월하는 깊이 그 이상의 것이 있었습니다.

특히 나이 차이가 가장 많았던 이서구와의 사귐은 “이심전심”의 마음까지도 전해집니다.

“...... 아무리 책을 좋아하는 벗이라 해도, 책의 향기를 코끝으로 먼저 느끼는 예민한 후각과 책을 만질 때마다 설레는 손끝의 미세한 떨림까지 시시콜콜 나누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이서구와는 굳이 이러한 느낌과 취향을 꺼내어 나눌 필요도 없었다. 그도 역시 그러하였으므로 ...... 수십 년 동안 그와 나 사이에서 오고 간 책들은, 서로의 손대가 묻어 닳아 갔다 ......”

책을 손에 잡는 그 작은 공간이 온 우주를 다 담을 수 있을 만큼 드넓고도 신비로웠다고 말하는 이덕무. 그는 책을 읽기 위해 방에 들어서는 순간 가지런히 꽂혀 있는 책들이 모두 자신을 향해 눈길을 돌리는 것만 같다고 말합니다. 책과 눈이 마주치는, 그 책 속에 담긴 누군가의 마음과 자신의 마음이 마주치는 설렘까지도 온전히 벗들과 나눌 수 있었던 그가 저는 참 부럽고도 존경스러울 따름입니다.


이 책 속에는 그에게 서러운 핏줄을 잊고 더 큰 세계를 만날 수 있게 도와준 스승과의 인연도 담겨져 있습니다.

“공자가 말씀하시길...”을 스스로 “스승이 말씀하시길...”로 고쳐 읽었을 정도로 이덕무는 공자의 사상과 이론에 심취해 있었죠.

월식과 일식으로 지구의 자전을 설명한 담헌 홍대용.

그는 이 세상의 중심은 바로 자기 자신이라며 우리나라 입장에서 본다면 중국도 북쪽의 큰 땅덩어리에 불과할 뿐이라고 말합니다. 조선 양반들의 지나친 사대주의의 폐해를 꼬집는 의미심장한 말이라 할 수 있죠.

선입견을 버려야만 조선이 이롭게 변할 수 있다고 말한 연암 박지원.

선입견은 결국, 자신만의 생각에 사로잡혀 사람과 사물의 본래 모습을 바라보지 못하는 편견이기도 하다고 연암은 말합니다. 그러한 편견에 사로잡힌 세상은 새로운 활기라고는 없는 세상, 변화를 거부하는 낡은 것들로만 가득한 세상이 될 것이라고 경고하죠.

조선에서도 알아주는 명문가의 자손인 연암은 자신보다 13살이나 어린, 그것도 서자 출신인 박제가를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의복을 정갈하게 갖추고 인사까지 합니다.

심지어 헤어지는 자리에서 박제가에게 이런 말까지 했다고 하네요.

“슬기로운 젊은이여! 부디 오래오래 사시게!”

이 두 스승은 그들을 자애로 대해줌으로써 세상 보는 눈을 바르게 열어 주었습니다. 자칫 기가 꺾이거나 흔들리기 쉬운 그들의 서러운 마음을 바로잡아 주고, 그들이 글을 쓰거나 문집을 낼 때마다 일일이 읽어 보고 격려해 주었다고 합니다.

아마도 이런 스승들의 가르침과 격려가 있었기에 이들 서러운 서자들이 드디어 규장각 검서관이 될 수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스승의 추천으로 연경사신단이 되어 연행길에 오른 이들은 탕탕평평의 정책을 표방한 정조의 부름을 받아 차례차례 대궐에 입궐하게 됩니다.

그 날의 감격에 대해 이덕무는 말합니다.

“...... 버려진 물건처럼 이리저리 구르던 우리들의 삶도 이제 쓰일 데가 있다는 것이 감격스럽기만 했다. 규장각 서고에 가득한 책들 속에서 좀벌레로 늙어 간다고 해도, 이 세상 어딘가에 나의 자리가 있다면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었다. 뽀얗게 쌓인 먼지를 털어 내고 세상의 빛을 향해 나온 책들처럼, 벗들과 나의 시대는 그렇게 새롭게 열리고 있었다......” 라고.

한때는 자식의 초롱초롱한 눈망울과 재능을 보는 것이 너무나  두려웠다고 그는 말합니다.

그 어린 아이들의 마음과 생각이 영글어 갈 무렵에는 이 세상에 태어나 무슨 꿈을 꾸며 살아야 하는지 묻는 것만 같아 두려웠다고요. 철이 들어 자신들의 처지를 알고 체념한 듯 꽉 다문 입술을 보면 서글프기까지 했다 말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아이들의 이야기에 마음껏 같이 웃어 주고, 이 세상의 모든 것이 궁금하기만 한 그 물음에 성의껏 대답해 줄 수 있게 되었노라 진심으로 기뻐하고 있습니다. 여릿여릿한 뼈대와 무른 살들이 차츰 강건해지고 단단해지듯이, 품은 뜻에 따라 자신의 삶을 만들어 나가려는 노력들을 진심으로 격려하고 축복해 줄 수 있을 것 같다고 말이죠.

그리고 실제로 이들 서얼 출신 백탑파는 조선의 역사 속에서 수많은 업적을 남깁니다.

박제가의 <북학의>, 유득공의 <발해고>, 그리고 이덕무의 아들에 의해 정리되어 세상에 나온 이덕무의 <청장관전서>, 정조의 명에 따라 이덕무, 박제가, 백동수에 의해 만들어진 <무예도보통지>까지...

특히 <무예도보통지>는 무예 동작 기법을 세세하게 그림으로 그려 넣음으로써 글을 모르는 병사들까지도 쉽게 따라 배울 수 있게 만든 이론과 실제가 겸비된 최초의 군사 훈련서이기도 하죠.

이렇게 세상 속으로 나온 이들은 더 큰 미래의 조선을 생각하며, 자신의 아이들에게 이어질 더 나은 세계를 위하여 일생을 공헌하고 헌신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업적들의 근본은 어릴 때부터 시작된 방대한 깊이의 책읽기에서 비롯된 것임을 누구도 부인하지 못합니다.

그가 책을 통해 나눴던 옛사람들과의 깊은 시간의 공유를 이제 저는 아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눈에 보이지도 않고 손에 잡히지도 않는 시간이지만, 그 시간의 흔적은 사람의 기억과 마음속에 남는다고 합니다. 그 흔적은 그렇게 서로의 삶 속에 깊숙이 들어가면서, 시간 속에 길을 내기도 하고, 각자의 시간을 서로에게 나누어 주기도 한다네요.

시간을 나눈다는 것,

그것은 반드시 얼굴을 마주 대하고 있는 사람들끼리만 할 수 있는 일이 아닐 것입니다. 책을 통해 우리는 옛사람들의 시간을 나누어 받을 수도 있고, 그 반대로 우리의 시간을 옛사람에게 나누어 줄 수도 있다고 이덕무는 말합니다. 그들의 소망이 나를 통해 이루어질 때 옛사람들은 그만큼의 사간을 더 살아가고 있는 것이라고요.

그렇다면 어설픈 저의 책읽기 또한 옛사람들에게 생명을 주는 하나의 의미가 될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간서치 이덕무의 말처럼 어쩌면 저 역시도 조금은 이덕무의 벗이 되었다 감히 말할 수 있을지도요.

“...... 오랜 세월이 흐른다 하더라도 누군가 나의 마음속에 스며들어와 나의 진심을 이해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서로 시간을 나눌 수 있다. 옛사람과 우리가, 우리와 먼 훗날 사람들이, 그렇게 서로 나누며 이어지는 시간들 속에서 함께 하는 벗이 되리라 ......”


* 책을 읽으면서 중간중간 나오는 모퉁이 그림들이 너무 예뻐 눈을 떼지 못했습니다. 다정하고 소담스러운 그 단정한 그림들이 너무 사랑스러워서요.

이 책, 아무래도 오래오래 그리고 깊게깊게 사랑하게 될 것만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이덕무의 단정한 마음을 빌어 그가 밝힌 책읽기의 이로움을 옮겨 봅니다.

1. 굶주린 때에 책을 읽으면, 소리가 훨씬 낭랑해져서 글귀가 잘 다가오고 배고픔도 느끼지 못한다.

2. 날씨가 추울 때 책을 읽으면, 그 소리의 기운이 스며들어 떨리는 몸이 진정되고 추위를 잊을 수 있다.

3. 근심 걱정으로 마음이 괴로울 때 책을 읽으면, 눈과 마음이 책에 집중되면서 천만 가지 근심이 모두 사라진다.

4. 기침병을 앓을 때 책을 읽으면, 그 소리가 목구멍의 걸림돌을 시원하게 뚫어 괴로운 기침이 갑자기 사라져 버린다.


나의 책읽기는 나에게 어떤 이로움을 주는지...

오래오래, 깊게깊게 생각하게 합니다.


Posted by Book끄-Book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