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끄적 끄적...2011. 4. 18. 06:22
폴 오스터의 소설은 흥미롭고 매력적이다.
폴 오스터의 세계는 항상 몇 가지의 세계가 함께 공존한다.
그리고 그런 연결되어 있기도 전혀 그렇지 않기도 하다.
그의 소설 제목처럼 그건 보이는 세계이면서
동시에 보이지 않는 상상과 공상이 만들어낸 세계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부적인 스토리텔러 폴 오스터를 거쳐가면
그 세계는 현실보다 더 생생해서 지금 살고 있는 세계를 공상화한다.
그을 읽고 있으면 내가 화자가 되고 서술자가 되어 주도적으로 이야기 속으로 파고든다.
이건 일종의 마력이고 중독이다.
때론 진심으로 궁금하다.
내가 지금 몹쓸 흑마술에 걸린건 아닌지가...


각 장마다 시점과 서술자가 달라지고
믿어지지 않는 새로운 사실의 등장과 폭로는
읽는 사람을 불연듯 섬득하게 만든다.
어쩌면 소설 속 인물 워커의 말처럼 좀 혐오스러운 이야기일수도 있겠다.
그렇다고 읽기를 그만둔다면,
보른의 말처럼 후회하게 될지도 모른다.
지금 보이는 세상에서 내가 보지 못하는 것은?
혹은 지금 보이는 세상이 내게 보이지 않는 것은?
책은 철학적인 질문으로 나를 내몬다.
나는 이 모든 사람들이 쏟아내는 폭로같은 진실들을 믿을 수 있을까?
아니면 진짜 진실이라는 게 이 중에 있기는 한걸까?
오스터의 글은 점점 재미와 함께 무거운 중압감을 남긴다.
그의 앞으로의 글들이 그래서 나는 조금씩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그의 세계가 내겐 moon hill 이다.

이 소설에서 오스터가 주장하는 바에 의하면,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현실 속에 어떤 사건이 벌어졌기 때문에 그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건이 벌어졌다고 <생각하기> 때문에(기억이든 환상이든 우연이든) 그 사건이 존재한다. 이렇게 볼 때 나라는 존재가 먼저 있는 게 아니라 내가 생각해 내는 이야기가 먼저 있고 그 이야기 속의 나는 얼마든지 <그>로 대체 가능하다.... 다시 말해 어떤 사람이 갖고 있는 - 꾸며낸 것이든 혹은 꾸며내지 않은 것이든 - 일관된 이야기가 그 사람의 자아라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인간들은 모두 호모 파블라토르(Homo fabulator, 이야기를 말하는 사람)다 

작품 속에서 <보이지 않는 invisible>이라는 단어가 명시적으로 사용된 문장을 이러하다.
.... 나 자신을 1인칭으로 서술함으로써, 나는 나 자신을 질식시켰고 <보이지 않는> 존재로 만들었다. 그리하여 내가 찾고 있던 것을 찾는 게 불가능해졌다. 나는 나 자신으로부터 떨어트릴 필요가 있었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나 자신과 나의 주제(바로 나 자신) 사이에 약간의 공간을 두는 것이 필요했다. 그래서......<나>는 <그>가 되었다.
나는 보이지 않기 때문에 나를 <그>나 <너>라고 보게 된다는 것이다.



작가 김연수를 이야기할 때 항상 나오는 책이 바로 이 책 <나는 유령작가입니다>였다.
문단계에서 오래전부터 주목받고 있는 그의 작품을 그래도 몇 편 찾아 읽었고,
읽고 나서 혀를 내눌렀었는데
공교롭게도 이 책은 매번 놓였었다.
드디어... 드디어.. 읽어버렸다.
김연수.
그는 아무래도 신내림을 받은 사람인 것 같다.
그것도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 그의 몸 속에 웅크리고 있는 게 분명하다.
참 볼품없는 억지스런 엉김이지만 내 또래의 나이다.
고작 그정도의 나이테밖에 갖지 못한  그가
조선 시대를 이야기하고, 신민지 시대를 이야기하고
만주 지역을 이야기하고, 혜초의 왕오천국국전을 이야기한다.
그것도 기록된 역사를 철저히 불신하면서 완벽하게 고립의 언어로 말이다.
그의 글들은 비극적이라는 표현이 희극적으로 들릴만큼 비의적이다.
이미 늙어버린 그의 언어는 세상 그 어떤 생물보다 생명력있게 펄덕인다.
그 펄덕임이 문득 무섭다.
마치 그게 유일한 생명력 같아서...
꼭 태고의 눈으로 뒤덮인 낭가파르파트 꼭대기에서 홀로 조난당한 느낌이다.
참. 비.극.적.이.다.
인간도, 인간이 만든 모든 역사도 신기루가 되는 순간이다.
그렇다면 그만둘까?
그만둘 용기도, 허세도 없는 인간은
신기루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그 신기루 속으로 자진해서 들어간다.
별 수 있나!
인간은 이해될 수 없는 존재고,
역사는 믿을 수 없는 존재인데...
달리 무슨 방법이 있을까!
Posted by Book끄-Book끄
읽고 끄적 끄적...2011. 1. 31. 06:33
방송작가가 여행을 다녀와서 책을 냈다.
별 유명한 작가도 아니고 특별히 재미난 내용도 아니었던지 그닥 인기있는 책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어느날 잘 알지 못하는 연예인이 자신의 별로 잘 알려지지 않은 책을 방송에 들고 나서 소개한다.
그리고...
지금까지 팔린 것보다 더 많은 양의 책이 팔려나갔다.
그는 말했다.
로토에 맞았다고...
내가 생각해도 이건 확실히 대박이다.
그 남자는 그 로토맞은 돈으로 또 다시 여행길에 올랐다.
한 겨울의 아이슬란드로...
해가 지지 않는 백야가 있고, 찬란한 오로라가 하늘에 떠 있는 그곳으로...



<나만 위로할 것>
책은 참 이기적인 제목을 달고 있다.
그러나 여행은 그런거 아닌가?
나만 위로하기 위해서 떠나는 지극히 이기적인 과정...

...... 나의 도시는 내게 영감을 주었고 내가 살아야 할 이유와 목표도 주었다. 가끔 도시를 떠나 한적한 시골이나 전원에 있으면 나는 지루했고, 뭔가 하지 않는 것이 한없이 불안하고 초조했다. 나는 전형적인 도시인이었고 내 도시를 사랑했다.
하지만, 어느 날 병을 얻었다. 그날 이후 나는 거리를 가득 메운 사람들이 무서웠고, 꽉 막힌 도로 위에서 견딜 수 없는 두려움을 느꼈고, 화려하게 빛나는 조명들을 바라볼 때마다 불안했다.
그런 날들이 계속되자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광활한 평야와 사람과 문명이 없는 텅 빈 풍경을 갈망하게 되었다. 그 풍경에는 끝없이 줄지어선 차들도, 화려한 조명들도, 그리고 저마다 다르거나 고집 센 사람들도 없었다. 내가 지금 이야기하는 건 광활한 대자연을 말하는 것 아닌, 말 그대로 스스로 고립된 텅 빈 곳을 동경하게 된 것이다.
나는 그런 곳을 찾아 헤매기 시작했다. 강원도의 고한부터 러시아 시베리아 호수, 미국 중부의 사막, 아무도 없고 바다거북만 살고 있는 퍼스의 해변, 눈이 허리까지 내리는 핀란드의 숲, 그리고 낮게 부는 바람소리만이 전부인 아이슬란드...... 이런 곳에서 나는 평온을 만났다. 작동되지 않던 뇌는 제대로 된 생각이라는 걸 하게 됐고, 입만 열면 허황된 꿈을 읊어대던 입은 침묵하게 되었다. 그동안 어긋나 잇던 206개의 뼈들이 다시 재조립되는 기분이 들었다 ......


솔직히 책을 통틀어 마음에 드는 대목은 이 부분 뿐이었다.
지극히 개인적이고 감상적인 글들.
저자는 추위속에서 앞니마저도 잃었다는데
책을 통해 읽는 추위는 아무래도 현실적이지 않다.
고립된 텅 빈 곳...
그 곳을 찾고 싶은 열망과 깊은 향수.
이기적인 제목과 그 이유 때문인지 모르겠다.
내가 이 책을 읽은 건...



알랭 드 보통이 아니라면 공항으로 여행가겠다는 사람이 있을까?
그리고 프랑스가 아니라면 작가에게 이런 제안을 한 나라가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역시나 꿍짝이 잘 맞는 조합이다.
책 속에 사진을 보니 절로 웃음이 나온다.
공항 한복판에 놓여진 커다란 하얀 책상, 노트북, 그리고 물병과 컵.
뭔가를 열심히 보고 있는 알랭 드 보통.
그가 공항의 안내인인줄 알았던지 여행객들은 그에게 길을 묻는다.
(여기나 거기나 작가를 알아보지 못하는 건 마찬가진가보다. 그래도 알랭 드 보통인데....
 하긴 누가 상상이나 할까? 세계적인 그 알랭 드 보통이 지금 공한 한복판 책상에 앉아 있으리라고...)
2009년 여름, 뜻밖에 알랭 드 보통은 히드로 공항 관계자의 초청을 받았단다.
공항의 첫 "상주작가"가 되어 세계에서 가장 바쁜 공항에서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는 권한을 주겠다는 것!
제안을 수락한 그가 일주일동안 공항에서 한 일은
"지켜보는" 일이었다.
그곳에서 일하는 직원을(노동자들), 그리고 공항을 이용하고 있는 사람들을...
유명한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리처드 베이커의 사진이
이 이례적인 여행서의 재미와 특별함을 더한다.



...... 만약 화성인을 데리고 우리의 현대 문명을 관통하는 다양한 주제들 - 테크놀로지에 대한 우리의 신앙에서부터 자연 파괴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상호 관계성에서부터 여행을 로맨틱하게 하는 마음과 태도에 이르기까지 - 를 깔끔하게 포착할 수 있는 어떤 장소에 데려가야 한다면, 우리가 가야 할 곳은 공항밖에 없을 것이다. 온갖 소란과 교차 속에서 아름답고 흥미롭게 펼쳐지는 공항 풍경은 현대 문명의 상상력의 중심에 자리한다 ......

1. 접근
2. 출발
3. 게이트 너머
4. 도착

공항만큼 사람을 설래게 하는 시작이 있을까?
어쩌면 모든 마법같은 신기루의 시작은 바로 이곳에서부터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먼 곳으로의 여행의 구체적으로 실감나는 것도.
쉬는 날이면 일부러 공항을 찾는다는 사람의 심정을 나는 알 것 같다.
그는 설래고 싶었으리라.
비록 그게 여행객의 표정뿐만 아니라 노동자의 노곤함을 보는 일이 될지라도
공항은 언제나 꿈꾸게 한다.
알랭 드 보통의 말처럼
공항은 현대 문명의 사상력,
그 중심에 확실히 있다.  
Posted by Book끄-Book끄
읽고 끄적 끄적...2010. 6. 11. 06:30
신경숙이 새로운 장편소설을 썼다.
<엄마를 부탁해>로 공전의 베스트셀러를 만들었던 그녀가 1년만에 다시 선보인 소설.
놀랍다. 그녀의 바지런함이...


"엄마를 잃어버린지 일주일째다"
<엄마를 부탁해>는 첫 문장부터 이미 내 숨을 턱 조여 왔었다.
차마 다음 줄을 읽지도 못하고 한참을 허망해하던 기억...
엄마를 잃음으로서 놓쳐버린 그 가족들이 원망스러웠고 그런 이야기를 쓴 신경숙이 원망스러웠었다.
엄마에게 그래서는 안 된다고...
왜 당신은 늘 비극보다 더 아픈 이야기만 만드냐고...
책 장을 한장씩 넘길 때마다 마디마디로 날카로운 얼음이 박이는 것 같이 아프고 얼얼했었다.
예수를 안고 있는 마리아의 피에타 상 앞에서
나는 차마 고해성사도 하지 못했다.
내가 엄마를 놓친 것 같아서...

그런 그녀가 이제 뭘 이야기하고 싶었을까?
신경숙의 일곱 번 째 소설의 시작은 이랬다.

......그가 나에게로 전화를 걸어온 것은 팔 년 만이었다.
나는 단 번에 그 목소리를 알아들었다.....



그녀는 이제 놓쳐버린 청춘을 이야기하려는가?
일곱 번째 장편을 앞에 두고 그녀는 말했다.
"여러 개의 종이 동시에 울려 퍼지는 것 같은 사랑 이야기. 청춘소설을 쓰고 싶었노라" 고...
한국어를 쓰는 작가로서 우리말로 씌어진 아름답고 품격 있는 청춘소설이 있었으면 했었노라고...
그녀가 선택한 단어가 나는 당황스럽다.
책장을 넘기면서 자꾸 그 "품격"이라는 낱말이 발목을 잡는다.
(그녀가 이런 단어를 사용하던 사람이었던가????)
"이번 소설은 멀어져가는 가까운 사람들을 보내주는 마음이 읽혔으면 좋겠고
슬픔에 빠진 사람들을 위로하려는 나의 마음이 전달되었으면 합니다"

정윤 - 단이, 이명서 - 홍미루
그리고 마치 시인 오규원을 떠올리게 하는 윤교수.
그녀의 글 속에서 이렇게 많은 인물들을 동시에 만나야 했던 적이 있던가?
놀랐다.
소설 속 등장인물들에 이름이 주어져서...
그녀의 K와, P, J에 익숙했던 나는 또 다시 당황한다.
그녀는 청춘을 현실화하고 싶었던 걸까?
남산 밑에 있던 과거의 서울예전을 떠올리는 풍경들과 거리들,
그리고 주말이면 내가 숱하게 헤매고 다니는 대학로의 골목들...
나도 늘 궁금했옸다.
다들 어떻게 견디고 있는지...

...... 팔 년 전이나 지금이나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고 그냥 흘러가는 법 또한 없다. 팔 년 만에 전화를 걸어온 그에게 어디야? 하고 담담하게 묻는 순간, 이제 내 마음속에 그에게 하지 못한 말들이 쌓여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남아 있는 격렬한 감정을 숨기느라 잘 지내고 있는 시늉을 할 필요도 없었다. 나는 정말 담담하게 그에게 어디야? 하고 묻고 있었으니까. 의문과 슬픔을 품은 채 나를 무작정 걷게 하던 그 말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그 쓰라린 마음들은. 혼자 있을 때면 창을 든 사냥꾼처럼 내 마음을 들쑤셔대던 아픔들은 어디로 스며들고 버려졌기에 나는 이렇게 견딜 만해졌을까. 이것이 인생인가. 시간이 쉬지 않고 흐른다는 게 안타까우면서도 다행스러운 것응 이 때문인가. 소용돌이치는 물살에 휘말려 헤어나올 길 없는 것 같았을 때 지금은 잊고 그 누군가 해줬던 말. 지금이 지나면 또다른 시간이 온다고 했던 그 말은 이렇게 증명되기도 하나보다. 이 순간이 지나간다는 것은 가장 큰 고난의 시절을 보내고 있는 이에게나 지금 충만한 시절을 보내고 있는 이에게나 모두 적절한 말이다. 어떤 이에게는 견딜 힘을 주고, 어떤 이에게는 겸손한 힘을 줄 테니까 ......


너무 많은 인물들이 나오고,
너무 많은 사건들이 나오고,
(실종, 분신, 거식, 죽음, 상처, 흔적, 군 의문사, 시위대.... 아, 숨차다!)
너무 많은 대화들이 오가고,
너무 많은 암시들과 시간들이 나온다.
그리고 결국 이 모든 것들은 눈군가의 "죽음"으로 실종되고,
그 실종을 누군가는 또 찾아나서고,
남겨진 사람들은 견디듯 살아간다.
그러다 때론 견딘다는 것조차 의도적이든 아니든 잊혀짐으로 성큼성큼 넘어가기도...

그랬던가?
죽음을 앞에 둔 윤교수가 남긴 손바닥 글씨처럼
모든 것엔 끝이 찾아오던가!
소설 속 청춘인 명서는 윤에게 말한다.
"어서 세월이 많이 흘러갔으면 좋겠다. 용서할 수는 없어도 이해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으면 좋겠다. 아주 힘센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나이가 들면 용서할 수 없는 게 이해가 됐던가?
그러나 내 세월은 자주 곡해를 이해라고 아득바득 우기게 만들더라...
그래서 오해할 수 있는 시간이 차라리 덜 빡빡했노라고...


모르겠다.
나는 이 "청춘"들을 이해하고 싶지 않아 지금 어깨가 뻐근하다.
아니 오히려 털어내고 싶다.
그들 청춘의 마지막 모습처럼.
한 밤 중에 산에 올라 소나무 위의 더깨처럼 쌓인 눈을 장대로 힘껏 털어내듯.
그랬었나?
나의 청춘도 섬처럼 고립되어 블멸의 풍경으로 각인되어 있었나?
것도 아니라면,
아직까지 내 청춘은 내내 현재진행형으로 고립중인가?
Posted by Book끄-Book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