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끄적 끄적...2011. 6. 23. 15:46


차범석 5주기를 기념하기 위한 헌정공연 <산불>이 임영웅 연출로 무대에 올려졌다.
1962년에 초연된 <산불>은
2007년에 국립극장 달오름에서 마지막으로 공연됐었다.
많은 사람들을 오래 기다리게 하더니 무려 4년만에 다시 무대에 올려졌다.
항상 공연기간이 짧아서 이례적인 매진사태를 만들었고
어떻게든 보겠다고 현장에 찾아가도 왠만한 자리를 구하기가 하늘이 별따기였단다.
워낙에 출연 배우들이 쟁쟁하기도 했겠지만
그만큼 원작이 갖는 힘이 대단하다는 뜻이다.
(실제로 그렇더라) 



차범석은 <산불>이라는 작품을 통해
한국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에서 드러나는 인간 본성과 욕망, 갈등을 그야말로 과장없이 드러냈다.
그런데 요즘 세대들이 이 작품을 보고 "사실주의 최고봉"이라는 찬사에 동의할지는 모르겠다.
그러기에는 전쟁이라는 참상이 그들에겐 너무 추상적인 단어이기에...
우리 세대는 그래도 부모님이 전쟁을 겪었기때문에 듣은 이야기라도 종종 있지만
(그리고 어릴 때 반공교육도 꽤 받았다. 비록 "공산당이 싫어요!" 수준이었지만...)
지금은 저 멀리 아프칸을 떠올려 주는 것만도 고맙다 하겠다.
전쟁의 참상은...
감히 내 손으로 끄적거릴 그런 내용이 아니다.
단지 죽음의 극한 상황에서 보여지는 삶의 욕망.
그리고 그 욕망 속에서 은밀하지만 강하게 피어나는 욕망과 애욕.
육체적인 전쟁에서 또 다른 육체적인 욕망에 빠져들 수 있다는 게
예전엔 믿어지지 않았는데 지금은 알겠다.
그게 유일한 희망일 수도 있다는 걸...
그 유일한 욕망이 사람을 살아 남게 할 수도 있다는 걸...

 

 

6ㆍ25 전쟁 후 피폐해진 소백산맥의 산골마을
대나무숲, 하늘이 뚫린 듯 쏟아지는 눈, 지랄맍게 만발한 봄꽃과 불타는 산.
제작비 8억원이 들었다는 무대는 실제 마을을 그대로 옮겨온 듯 하다.
실사 크기의 초가집 2채와 산길,
실제 대나무 200그루를 무대에 세웠다는데 마지막에 공비토벌을 위해 산불로 타들어가는 무대 모습은
이런 표현이 적당할지 모르겠지만 섬득한 장관이었다.
제작자 신시컴퍼니 박명성 대표가 말했다.
"대극장 뮤지컬 제작 경험을 바탕으로 연극에서도 중장년 관객을 흡수하고 싶어 도전과 모험을 하게 됐다" 라고...
대형 라이센스 뮤지컬도 아닌 연극에 8억원의 제작비라!
도전과 모험이 확실하긴 하다.
작품 자체와 배우들의 연기는 정말 너무 훌륭하고 좋았는데
문제는 극의 시작과 막이 전환될때 들리던 피아노와 구음자.
그래도 처음엔 들어줬었다.
그런데 이게 점점 점입가경이다.
음이탈을 수시로 들락날락하던 구음자의 소리는 사실주의 최고봉이라는 연극을
순식간에 시트콤으로 전락시킨다.
나중엔 정말 미안한 말이지만 끌어내리고 싶더라.
(사람들이 실제로 그럴까봐 피아노 연주자와 구음자를 무대 아래에 배치했을까???)
작품만큼이나 이 되도 않던 퍼포먼스가 사람들 입에 많이 오르내리겠다 싶었는데
실제로 그렇더라...
차라리 강부자 선생님의 실랄하고 살벌하던 푸짐한 쌍욕을 무한 반복 재생하는게 골백번은 나았을 것을...
(지금도 이 구음자 생각하면 등골이 다 오싹하다)
 



6.25 전쟁의 포화 속에서 과부들만 남은 두메 산골.
전쟁에 남편을 잃고 시할아버지와 시어머니(강부자), 바보 시누이를 건사하며 사는 점례(서은경)는
부상당해 마을로 내려온 빨갱이 규복(조민기)을 대나무밭에 숨겨놓고 보살피다 서로 정이 들고 만다.
그러다 그 모습을 이웃집 과부 사월(장영남)에게 들키고 둘은 모종의 합의(?)를 한다.
두 사람이 밤마다 그분을 번갈아 가면 돌보기로...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당장 신고하겠다는 사월의 육체적 욕망을 결국 점례는 따를 수밖에 없게 된다.)
"점례만이 그 사람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권리가 어디 있어?"
"점례에게 소중한 남자는 내게도 소중하니까"
코믹한 대사이기도 하지만 인간 욕망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대사라 등골이 다 오싹하다.
급기야 남자가 씨가 마른 과부마을에서 사월은 임신을 하게 되고
숨어있는 공비토벌을 위해 조상대대로 내려온 점례네 대나무밭은 붉은 화염에 휩싸인다.
점점 붉게 물드는 마을과 넋을 잃은 듯 서있는 점례의 모습.
처절한 삶이란, 불타는 욕망이란 붉은 환영과 매캐한 연기,
그 자체다.

 

강부자, 권복순, 서은경, 장영남의 연기는 흠잡을 수 없을만큼 치열하고 아름다웠다.
노익장을 과시하는 배우들이 TV 화면이 아닌 무대 위에서 혼신의 힘을 다하는 모습은
그 자체로도 대책없는 감동이다.
그리고 그 모습은 실제로도 엄청난 감동이고 울림이었다.
이들 외에도 함께 출연한 모든 배우들의 열연은 눈이 시리도록 아름답다.
시할아버지와 정말 바보같던 시누이까지...
(이 대목에서 구음자가 다시 떠올라 막막하다... 음이라도 정확하던가...)
이 작품이 해오름이 아니라 규모가 더 작은 곳에서 공연됐었으면
아마 느껴지는 감동이 더 크지 않았을까 살짝 아쉬움이 남는다..
그래도 이게 어딘가!
드디어 <산불>을 봤는데...

Posted by Book끄-Book끄
보고 끄적 끄적...2010. 12. 11. 05:50

"판소리, 세계를 만나다"

피아노 연주자이자 작곡자인 임동창이 10년의 칩거를 마치고 돌아왔다.
특유의 환한 웃음과 함께...
<本-Born-Burn>
한국판페라단(단장:오지윤) 주최로 12월 4일, 5일 이틀동안 국립극장 하늘극장에서 열린 이 공연은,
열악한 공연장 환경에도 불구하고 썩 괜찮은 공연이었다.

"판페라"...
어딘지 낯설고 어색한 단어다.
판소리와 오페라 (Pansori+Opera)의 조합어.
한국의 전통의 소리에 클래식한 오페라를 접목한 새로운 시도라고 하겠다.
정체불명의 퓨전 비빔밥을 보게 되는 건 아닐까 잠깐 걱정하기도 했지만 그러기에는 임동창의 열정과 깊이가 크고 깊다.
그의 "산사 음악회"를 기억하는가!
개구진 얼굴에 다정한 사투리가 남아있는 그의 말은 듣고 있는 것만으로도 미소를 짓게 한다.
그리고 섬세하고 서정적인 피아노 연주들...
오랫만에 그의 연주를 직접 들을 수 있다는 게 내겐 제일 큰 이슈이자 기쁨이었다.

국악의 세계화...
공연을 보면서 이 정도라면 시작이 나쁘지는 않다고 공감하고 안심했다.
꼭 글로벌이란 단어를 굳이 네세우지 않더라도 충분히 신선하고 아름다운 공연이었다.
임동창.
재즈 피아니스트에서 국악 피아니스트로의 변신(?)
10년의 긴 칩거를 마치고 2010년 7월 창작곡집 발표와 함께 그가 돌아왔다.
그리고 그 첫 무대를 명창 오지윤과 크로스오버 테너 임태경과 함께 했다.
10년 동안 그가 꿈꾸었던 건 무엇이었을까?
그는 말했다.
"이제 시작일 뿐입니다" 라고...



1부(東), 명창 오지윤의 "심청가"
2009년 12월 29일 서울 남산 국악당에서 총 4시간 30분 동안 심청가 완판독창회를 했던 명창 오지윤.
소리를 잘 모르는 문외한이지만
판소리완창이란 단어를 들으면 덜컥 무섬증이 인다.
비록 한시간 남짓이었지만
이렇게 오랫동안 한자리에 앉아 판소리를 들어봤던 적이 있던가?
적어도 나는 처음이다.
45인조 오케스트라의 연주와 함께 듣는 심청가는 절묘하게 아름답다.
탁성에 가까운 사람의 소리와
그 소리를 뒷받침하던 오케스트라의 선율.
뭐 특별한 게 있겠냐며 듣고 있다가 솔직히 화들짝 놀랐다.
의외로 맞춤옷을 입고 있는 것 같아서...
북, 거문고, 가야금, 해금, 아쟁, 대금
국악연주자들의 그야말로 신들린듯한 연주는
탄성과 박수를 절로 자아내게 한다.
다섯명이 차례로 독주할 때는 신명도 나고 무지 애도 탔다.
국악기의 소리는 아무래도 사람의 육성 그대로인 것 같다.
정말 다섯개의 국악기가 서로 다른 목소리로 말을 하더라.
(특히 해금 소리를 오래 잊지 못할 것 같다. 꼭 숨겨놓고 몰래 듣는 연인의  말소리같다...)



2부(西)
임동창의 피아노 반주만으로 크로스오버 테너 임태경이 앵콜까지 전부 다섯 곡의 노래를 불렀다.
지금은 뮤지컬 배우로 더 알려져버렸지만
임태경의 처음 연주를 알고 있는 나는 솔직히 요즘 그의 음색 변화가 많이 속상하고 안타깝다.
그의 목소리는 하나만으로도 완벽한 하모니였고 연주였는데...
그래도 근래에 들었던 그의 음색 중에서는 제일 편안해서 다행스러웠다.
양중해의 시에 임동창에 곡을 붙인 <동백아래에서>는 참 좋더라.
본격적인 무대에 해당했던 3부(和), 4부(合).
판소리와 서양음악을 오지윤과 임태경이 몇 소절씩 번갈아 부르는데
어색한듯 하면서도 의외로 꽤 잘 어울린다.
재미있다. 이런 느낌, 이런 시도...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판소리 "쑥대머리"와 영화 로미오와 줄리엣의 "A time for us"가 이렇게 서로 잘 어울릴 줄...
너무나 귀염성있는 두 명의 나레이션으로 시작된 4부,
"1300년의 사랑이야기"
두 대의 바이올과 한 대의 콘트라베이스
그리고 임동창의 피아노.
오지윤과 임태경은 구음으로만 노래한다. 아니 이야기한다.
확실히 이 곡 속에는 이야기가 있고 그리도 대사가 있다.
공연을 준비하면서 임태경은 말했었다.
... 동양의 것고 서양의 것, 남자의 소리와 여자의 소라, 이렇게 극과 극으로 다르리라고 정의되는 것이 어떻게 어우러져 하나가 될 수 있는지, 그러므로 결국 음악은 하나다라는 깨달음을 공유랄 수 잇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 

음악은 다르지 않다.
소리는 다르지 않다.
느낌은 다른지 않다.
음악과 소리는 마음이고 대화고 눈맞춤이고 살부빔이다.
현란하고 화려한 기교의 사운드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어쩌면 임동창은, 함께 연주했던 그 모든 사람들은
"쉼"을 주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겟다.
참 잘 쉬었다고... 그래서 다정해졌노라고...
그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동백언덕에서
                        -양중해

십년 뒤에
동백언덕에 갔더니
동백꽃은 예전대로 붉게 피었구나

전에 봤던 얼굴 기억해 두었다가
어찌 혼자 왔느냐
무슨 일이 있었느냐는 것이 아닌가
그렇고 그렇더라고 했더니
어찌 그럴 수가
어찌 그럴 수가

슬픈 것은 난데
동백꽃들끼리 일제히 울음을 터트린다

십년 전
내가 동백언덕을 찾아가던 사연을
아무도 모르는 줄 알았는데
동백꽃들은 이미 알고도
모르는 척 하고 있었더구나!


참 좋은 시였다.
아! 그리고 3부와 4부 사이에 임동창의 피아노 독주 "4월의 신부"도...
음악을 만드는 사람은 참 행복하겠다.
듣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좋은데...

Posted by Book끄-Book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