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후 끄적끄적2015. 5. 15. 08:01

여행에서 가장 큰 즐거움 중 하나는

이른 아침 혼자 숙소를 빠져나와 발길 닫는데로 걷는 아침 산책이다.

이제 막 잠에서 깨어나기 시작한 거리는

아이같은 천진함으로 가득하다. 

한적하고 고요하지만 또 그 나름의 생기로와 밝음가득한 거리.

목적없이 가고 싶은 곳으로

툭툭 걸어가다 마주치는 모든 것들에 눈인사하는 기쁨.

잠시 뒤엔 사람들로 꽉 찰 랜드마크들이

지금은 동화속 배경처럼 고요하다.

 

 

 

이슬람시대 비단 직물 거래소였다는 알카이세리아(Alcaiceria) 거리에서

문닫친 상점을 기웃거리기도 하고 

좁은 골목을 막 지나간 물청소를 차량을 따라가고

카돌릭 이사벨라 광장(Plaza Isabel La Catolica)의 고요함에 잠시 어리둥절했다.

알함브라 궁전을 가는 미니버스 C1이 정차하는 곳.

이른 아침이라 사람의 흔적조차 없다.

텅 빈 버스 안의 운전사가 반갑게 인사를 하길래

나도 덩달아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어줬다.

문을 열어 주면서 빨리 타란다.

이미 다녀왔다고, 이제 돌아갈 짐을 싸야 한다고 대답했더니 잘 가란다.

낯선 작은 순간들이 지금 생각해도 많이 그립다.

 

Plaza Nueva 동쪽으로 쭉 걸어가면 조그만 건물이 나오는데

성 아나 성당(Iglesia de Santa Ana)이다.

1501년에 건설된 이 성당 역시도 원래는 모스크였다.

옆의 삐쭉한 종탑은 기도시간을 알려주던 모스크의 미나레.

작고 소박한 성당 앞을 한참 서성였던건

주변과의 조용한 조화가 아름다워서였다.

조화라는 말, 균형이라는 말, 절제라는 말.

그냥 가슴 속으로 스며들었다.

 

그라나다에 머물면서 제일 많이 지나왔던 기마상 건물.

(시청인지, 경찰창인지...)

여기서 숙소 호텔 나바스로 들어가는 길이 유명한 그라나다 타파스 골목이다.

늦은 밤 호텔 창문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타파스를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로 야외 테이블이 꽉 찼다.

직접 타파스 투어를 하진 못했지만

그냥 그 모습을 가만히 훔쳐보는 것도 참 좋더라.

이럴줄 알았으면 그라나다 일정을 좀 여유있게 잡을걸... .

하루만 더 머물렀어도 덜 아쉬웠을텐데...

돌아와서도 그게 제일 후회됐다.

심지어 지금까지도. 

Posted by Book끄-Book끄
여행후 끄적끄적2015. 4. 21. 07:57

호기로움도 자신감도 아니었다.

이 거대한 알함브라 궁전을 가이드없이 돌아다니겠다고 결정했던건!

사실 현지 한국어 가이드 투어를 신청할 생각이었는데

공교롭게도 내가 원하는 곳이 그날만 투어 일정이 없었다.

유럽은 현지 한국어 로컬 가이드 투어가 워낙 많아서

다른 곳을 쉽게 찾을 수도 있었지만 고민하다 그냥 우리까지 다니는 걸로 결정했다.

우루루 몰려가서 가이드 설명에 따라 똑같은 시선으로 바라보고 또 우루루 이동해야 한다는게 싫었다.

다 둘러보지 못하더라도,

중요한 곳을 놓치게 되고,

지도를 제대로 못읽고, 

입구와 출구를 못찾아 헤매게 되더라도

알함브라 궁전만큼은 나만의 시선과, 나만의 시간 간격으로 느끼고 싶었다.

그리고 그 선택은...

역시나 옳았다.

 

 

알카사바를 둘러본 후 발걸음을 옮긴 곳은 카를로스 5세 궁전.

이곳은 "알함브라 궁전의 이단아"라고 불리는 곳이다.

아랍 건축물에 홀로 서있는 르네상스 양식이라니..,

주위 환경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이렇게 용감무쌍한 궁전을 지은 인물은

궁전 이름에 나와 있듯 카를로스 5세다.

이 사람은 도대체 무슨 복은 타고 났는지

친가쪽에선 신성로마 제국을, 외가쪽에선 스페인을 물려받아 거대한 영토의 주인공이 됐다.

공식명칭은 신성로마제국에서는 카를로스 5세로, 스페인에서는 카를로스 1세.

이 궁전은 1526년 결혼한 카를로스 5세사 이곳으로 신혼여행 온 것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이왕 짓는거 주변과의 관계를 좀 고려하면 좋았을테데

바쁘신 왕께서는 당시 유행한 스타일과 스케일에만 관심이 많았던 모양이다.

그러고보니 코르도바에 있는 이슬람사원(메스카타)에 대성당을 지은 인물도 바로 카를로스 5세였다.

아무래도 이 왕께서는 "조화와 균형"이라는 개념도 "종교" 앞에선 흔적도 없이 사라졌던 모양이다.

그래도 다행스럽게도

시간이 많이 흘러 건축 당시만큼의 이질감은 느껴지진 않는다.

(그걸 온전히 이해하기엔 나의 지적, 미적 감각이 기준이하겠지만...)

 

 

이 궁전은 특징은 겉에서 보면 분명 사각형 건물인데

안으로 들어가면 눈 앞에 커다란 둥근 홀(hall)이 열린다는 거다.

내부는 2층 구조로 되어 있고

예전에는 1층 원형홀에서 투우 경기도 했다는데

지금은 바닥이 돌로 덮여져 있어 투우의 흔적을 찾을 길이 없다.

대신 매년 여름마다 그라나다 국제음악제가 개최되고

회랑 1층은 알함브라 박물관이, 2층은 순수 예술 미술관이 자리하고 있다.

별도의 입장료를 내고 관람이 가능한데

미술보다 건축에 혼이 뺏겨 있는 상태라 그냥 지나치기로 했다.

광장 한가운데는 중심점에 해당하는 동그라미가 있는데 그곳에 조카녀석을 데리고 갔다.

"아~~~"하고 소리를 내보라고 했더니 미심적은 얼굴로 따라한다..

조카가 낸 소리는 이내 커다란 홀을 지나면서 점점 크게 공명된다.

그렇게 한동안을 조카와 소리를 내면서 놀다가 다른 여행객이 오길래 자리를 양보히고 돌아섰다.

손을 잡고 걸는데 조카녀석이 갑자기 물어온다.

"정말 신기하다! 근데 고모는 이런걸 어떻게 다 알아?"

책에서 봤다고 말하려는데 조카가 또 한마디를 한다.

"하긴 고모는 모르는게 하나도 없더라!"

 

...................

 

정신이 번쩍 들었다.

조카에게 정체가 들통나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다.

휴~~~우!

Posted by Book끄-Book끄
여행후 끄적끄적2015. 4. 14. 08:30

 

론다에서 오후 5시 13분에 출발한 기차는 오후 8시경에 그라나다에 도착했다.

내 여행의 시작이자 이유인 곳

그라나다가 아니었다면, 알함브라 궁전이 아니었다면

나는 스페인 여행을 꿈꿨을까?

석류라는 뜻의 "그라나다"에서 이슬람 최후의 왕조 나스르 왕국은 만개하고 스려졌다.

와르르 검붉은 석류가 터져내리듯 그렇게 몰락한 이슬람 마지막 왕조.

그라나다에 가까울수록 떨림은 깊어진다.

맨 처음 알함브라 궁전을 알게 됐을때 그랬었다.

"내 생전에 이곳을 가는 날이 과연 올까?"

더 솔직히 말하면 나란 사람이 외국여행이라는걸 하는 날이 올까 생각했었다.

꿈같은 일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이렇게 알함브라 궁전을 향하고 있다니...

조금 많이 뭉클해왔다.

 

늦은 저녁 기차역에서 내려 택시를 타고(10 uro) 그라나다 시청사 근처에 있는 숙소에 도착했다.

도착하자마자 제일 먼저 한 일은,

동굴 플라멩고(Cueva Flamenco) 예약.

호텔 리셉션에 문의했더니 호텔에서도 예약(30 uro)할 수 있고

원하면 9시 50분에 차량이 픽업하러 올 수 있단다,..

Los Tarantos 라는 곳인데 그라나다에선 제법 알려진 곳이라 "OK!"라고 대답했다.

실제로 플라멩고 공연이 시작되는건 밤 11시지만

그전에 차량으로 알바이신 지구를 짧게 둘러보는 시간이 있었다.

군데군데 중요한 곳은 설명도 해줬고

산 니콜라스 전망대에서는 내려서 알함브라 야경을 감상하게도 해줬다.

여기서 보는 야경이 아름답다는 말을 많이 들었는데

우범지역이라 포기한 곳이었는데 동굴 플라멩고 덕분에 이렇게 볼 수 있어서 너무 감사했다.

이로써 세비아에서 플라멩고를 놓쳤던게

산 니콜라스 전망대에서의 알함브라 야경으로 완벽히 보상됐다.

(역시나 한 쪽 문이 닫히면, 한 쪽 문은 열리게 마련이다.)

아주 멀리서 빛을 받으서 서있는 성채의 모습은...

신비 그 이상이었다.

경외심이 생길 정도로!

 

 

바람의 영혼을 가진 집시들의 춤 플라멩고.

춤(Vaile)과 기타(toque), 노래(Cante), 손벽(Jaleo)이 적절히 어울러지면서

절정을 향해 나아가는 춤.

하지만 알바이신의 야경이 마음에 남아서였을까?

기대했던 동굴 플라멩고는 오히려 밋밋했다.

솔직히 고백하면,

춤을 추는 무희분들의 뱃살이 너무나 위협적이라서

가까이 다가오면 저절로 몸이 움츠려 들더라.

치마를 들어올리면 너무 건강한 다리때문에 또 깜짝깜짝 놀라고...

게다가 스페인에서 처음 마셔본 상그리아에도 특별한 맛을 못느꼈다.

(아무래도 나는 알콜류와는 절대 친해질 수 없는 인간인가보다.)

그래도 제일 기억에 남았던건 Cante.

나이가 지긋한 분이 부르는 노래는 묘한 여운과 멋이 있더라.

뭔지 모르지만 회한이 담긴 구슬픈 느낌.

 

때로는 귀가 눈보다 훨씬 더 많은걸 본다는데

그라나다 Cueva Falmenco가 내겐 딱 그랬나보다.

할레~~~!

Posted by Book끄-Book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