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끄적 끄적...2013. 10. 24. 07:54

봄과 가을, 일년에 딱 두 차례 열리는 간송미술관 정기전시회.

올해 봄에 "표암과 조선남종화파전"을 놓치고 나서 얼마나 후회를 했는지 모른다.

어찌어찌 시간을 내서 마지막날 가긴 갔었다.

그런데 줄이 너무 길어서 도록만 사고 관람을 포기했다.

5시간 정도 기다려야 한다고해서...

그래서 이참에는 아예 작정을 하고 개관시간보다 30분 일찍 도착했다.

그런데 이럴 수 있는건가?

일요일이라 관람객이 많을거란 예상은 했지만

이미 성북파출소까지 줄이 이어져있었다.

솔직히 한시간 정도 기다리면 되지 않을까 싶었는데 무려 3시간이나 기다렸다가 입장했다.

작정하고 나선 길이라 가방 안에 기다리면서 읽을 책과 물을 챙겨가긴 했지만

정말 오랫만에 가을 햇빛에 노릇노릇 성실하게 익었다.

(다행이다. 잘 벼른 칼처럼 날카로운 햇빛이 아니어서...)

그대도 다 괜찮다.

끝이 분명히 있다면, 그 끝에 목적과 의미가 기다리고 있다면

충분히 기다릴 수 있다.

 

간송미술관을 들어서면 늘 마음이 편해진다.

사람의 손으로 일부러 가꾼게 아니라

나무가 가진 품성대로 제멋대로 자란 가지들을 지나오는 것도

햇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나는 열매와 작을 꽃들과 눈맞추는 것도

눈과 비, 바람을 그대로 받으며 서있는 부조물을 보는 것도

나는 늘 정겹고 포근하다.

간송미술관의 소나무는 보고 있으면

품격과 기품보다는 오랜 세월을 묵묵히 견뎌온 뚝심이 느껴진다.

그리고 앞으로 긴 세월을 더 오래 견딜 수 있을 것 같은 생존의 책임과 의무까지도...

간송 전형필 선생의 마음이 이러지 않았을까?

6.25 피난길에서까지 훈민정음 해례본을 품 안에 품고 길을 떠났던 그 애뜻함이,

일부러 일본까지 건너가 빼앗긴 문화재를 자비로 사왔던 그 견고하고 확고한 고집이

아직도 간송미술관 주변에 아우라로 살아있는 것 같다.

고인의 뜻이었다지만 봄가을 두 차례씩 무료로 전시회가 열릴때마다

보물급의 귀한 미술품을 이렇게 입장료없이 봐도 되나 싶어 늘 민망하다.

그래선지 정말 최선을 다해서(?) 불만없이 기다리게 되는 것 같다.

 

이번 "진경시대화원전"에는 김홍도와 신윤복의 보물같은 그림들이 정말 원없이 볼 수 있다.

김홍도의 그림은 웅장하면서도 단단한 직립의 수직 구도가 심지처럼 박힌다.

그 수직의 구도 끝에는 떨어지는 폭포를 받아내는 웅덩이가 있거나

한그루의 나무가 주위 풍경에 무관하듯 담담히 서있다.

뭐랄까?

견재함으로 버텨내는 고집스러움이 느껴진다.

신윤복의 그림들은 색채보다는 오히려 표정에 더 눈길이 간다.

남자들의 얼굴은 눈썹과 눈꼬리가 올라가 어딘지 심통맞고 의뭉스럽게 보이고

여자들의 표정은 꼭 이런 말을 하는 것 같다,

"그래, 어디 늬들 깜냥껏 해봐라...!"

너희 남자들 하는 모양을 내가 다 안다는 듯한 표정.

확실히 신윤복의 그림 속 여자들은 남자들보다 두어수쯤 위다.

이의양의 데생같은 그림들도 눈에 들어왔고

신한평의 "자모육아(慈母育兒)"는 엄마 미소가

김희겸의 "연호대란"은 그 귀염성에 개구장이 미소가 절로 생겼다.

(정말 대란이긴 대란이다.) 

전시된 그림에 제목과 작가명만 써있어서 좀 서운했는데

다행히 도록에는 크기와 연도, 지본수묵(紙本水墨)이나 지본담채(紙本淡彩) 라는 설명이 써있었다

그림 옆에 있는글귀들도 따로 적혀있고...

(솔직히 그림 속에 있는 한자들은 흘림체가 많아 암호처럼 느껴져서...)

전시장 유리가 그림을 왜곡돼 보이게 하는 건 많이 아쉬웠지만

오랫만에 긴 기다림 속에서 달콤한 오수(午睡)같은 시간을 보내서 행복했다.

한 번 더 둘러보고 싶었는데 유도되는 줄을 따라 그대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미술관을 뒤로 하고 내려오니

늘어선 줄이 아침보다도 훨씬 더 길다.

줄 속에 있는 사람들은 도록을 들고 내려오는 사람들을 부러운 눈길로 바라본라.

(나도 아침까지만해도 그랬는데...)

그림만으로도 황송했는데 턱없는 뿌듯함과 우월감까지 안고 돌아왔다.

 

내년 봄,

간송미술관은 내게

또 어떤 그림을 보여줄까?

벌써부터 내년 봄이 꿈처럼 기다려진다.

                                            

                                        신한평 "자모육아(慈母育兒)"

                                                  김홍도 "구룡연"                               

                                                     신윤복 "계변가화"

                                                      신윤복 " 쌍검대무"

                                                        신윤복 "연소답정"

                                                                     김득신 "목동오수" 

                                                       김득신 "송하기승"

               

                                                           김희겸 "연호대란"

Posted by Book끄-Book끄
달동네 책거리2009. 6. 2. 05:36
  <오주석이 사랑한 우리 그림> - 오주석


 오주석이 사랑한 우리 그림


아프고 힘들었던 지난주 위로받기 위해 찾아간 곳이 있었습니다.

“간송미술관”

5월 17일부터 어제 5월 31까지 2주 동안 간송미술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작품들을 전시하는 특별전이 있었죠.

간송미술관은 일 년에 두 번 봄, 가을에 약 2주 정도의 기간으로 이런 양질의 전시 기획을 꼭 합니다. (게다가 믿어지지 않겠지만 입장료도 없습니다)

올 봄에는 “겸재화파전”이 열린다고 해서 얼마 전부터 기다리고 있었죠.

시기적절하게도 이 책을 만나 미술관을 찾기 전에 반가운 마음으로 먼저 찾아 읽었습니다.


미술사학자 오주석!

우리시대 최고의 그림 읽어주는 남자였던 사람!

재미있는 입담과 수려한 문장, 그리고 혀를 내두르게 만드는 해박한 지식과 일목요연한 해석이 그림을 재미있는 소설로 읽게 만들어 주는 최고의 길라잡이죠.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에 의해 올 4월 또 한권의 유고작으로 출판된 책이 바로 오늘 제가 소개하는 책입니다.

제 생각으론 오주석이 쓴 책 중에서 가장 많은 그림을 만날 수 있는 책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림 1점을 가지고도 한권의 책을 집필했던 분이죠. 이인문의 <강산무진도>라는 책입니다)

그렇다고 깊이가 없다거나 너무 개괄적일거란 생각은 하지 마세요.

그 짧은 글 속에 그림 속에서 우리가 보고 느껴야 할 것들 그리고 심지어 품고 있는 내밀한 비밀까지도 모두 끄집어내고 있습니다.

그것도 엄청난 필력을 자랑하면서 말이죠.

이곳에 소개된 그림은 모두 27점으로 그가 생전에 신문을 통해 발표했던 원고지 10매 분량의 글들을 모아서 만든 책입니다.

글 쓰는 사람들이 제일 고사하고 싶어 하는 글이 바로 원고지 10매 내외 분량의 글이라고 하네요.

내용을 깊게 들어가기에도 힘든 분량이고, 그렇다고 간단한 소개로만 글을 채울 수도 없는 노릇이라 참 난해한 글쓰기가 된다고요.

그런데 이 책에 나온 글들은 참 재미집니다.

꼭 화톳불 피워놓고 두런두런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 같은 다정함이죠.

결정적인 순간에 이야기가 끊기면 자꾸 할머니를 채근했던 기억,

“할머니! 그 다음은~~~~”

제겐 꼭 그런 느낌의 책이었습니다.

그런데 잠시 다정한 할머니가 됐던 이 사람!

나머지가 궁금하면 이제 직접 찾아보라고 하네요.

꼭 그런 느낌입니다.

어릴 적 기대감으로 봤던 TV 만화영화에서 결정적인 순간에 나왔던 한 마디!

“다음 이 시간에~~~”

어쩐지 양 볼에 바람을 잔뜩 넣은 심통쟁이 표정이 되긴 하지만 직접 찾아보는 솔솔한 재미도 놓치고 싶지 않긴 합니다.


                               〈월하정인도(月下情人圖) - 신윤복〉


                               〈야묘도추도(野猫盜雛圖) - 김득신〉

 

간송미술관을 찾았더니 올해가 마침 겸재 정선 서거 250주년이 되는 해라고 하네요.

실제로 전시장에서 이 책에 나온 정선의 작품 3점(금강내산도, 통천문암도, 만폭동도)을 직접 보고 왔습니다.

그 짜릿함과 벅찬 기쁨이라니...


                                            <금강내산도(金剛內山圖) - 정선>


특히 책에서 인상 깊게 봤던 <통천문암도>를 실물로 보니 입이 절로 벌어졌습니다.

거의 사람 키만한 그림 크기에 그 세밀함이라니.....(이렇게밖에 표현하지 못하는 저의 무식함을 부디 용서하소서~~!)

마치 천계로 가는 입구를 보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림 앞에서 절감하게 되는 엄청난 경건함이라니!



     

         <통천문암도(通川門岩圖) - 정선>                     〈만폭동도(萬瀑洞圖) - 정선〉


안타깝게도 이젠 전시기간이 끝나 찾아보라고 권해드리지 못하겠네요.

혹 안타까워하는 분이 있다면 이 책이 충분한 위로가 되리라 생각됩니다.

멀게만 느껴지는 조선시대 그림들이 아주 정겹고 가까운 듯 느껴지실 거예요.

더불어 우리가 이미 알고 있던 그림들이 품고 있는 은밀한 비밀들을 하나하나 만나게 되면 서늘한 만족감도 덤으로 만나실 겁니다.

오주석의 글들을 읽으면, 그림 속을 이리저리 산책하고 있는 느낌입니다.

햇살 좋은 오후의 푸른 숲으로의 산책 !

자, 신발끈 잘 묶고 이제부터 같이 산책해보는 거 어떠세요?

이해의 여부를 떠나 확실히 말씀드릴 수 있는 건 황폐하고 무거웠던 마음을 잠시 “위로”받을 수 있을거란 사실입니다.

다독다독....

한권의 책이
오늘도 저를 품고 안아줍니다.


                               〈세한도(歲寒圖) - 김정희〉
Posted by Book끄-Book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