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끄적 끄적...2012. 10. 26. 08:00

<나의 처용은 밤이면 양들을 사러 마켓에 간다>

부제 : 2012 국립극단 삼국유사 프로젝트

일시 : 2012.10.13. ~ 2012.10.28.

장소 : 백성희장민호극장

대본 : 최치언

연출 : 이성열

주관 : (재)국립극단

출연 : 이남희(오가리), 유연수 (남두자), 김수현(하구니),

        이명행(맛탱이), 이정수, 박성연, 장희정, 정선철, 유소영,

        유진영, 이아란

 

국립극단 삼국유사 프로젝트 그 세번째 작품,

<나의 처용은 밤이면 양들을 사러 마켓에 간다>

정말이지 너무나 불친절하고 너무나 전위적이다.

세기말적인 분위기에 온갖 욕지거리, 성적인 묘사, 비어와 은어가 난무하는 무대를 지켜보는건 거의 시궁창 속을 뒹구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한창을 시궁창속을 뒹글다 보면,

이게 또 묘한게 이 불친절한 연극이 마구마구 공감이 되기 시작한다는 거다.

처음엔 분명 이런 느낌이었다.

'도대체 이걸 이해하라고 만든거야?'

아무리 어렵게 쓰기로 유명한 최지언 작가라지만 이건 심한 거 아닌가 싶었다.

전위적이어도 너무나 전위적이여서...

"빼앗긴 자의 분노를 처용설화에 빌려 묘사"했다는데 이것도 참 난해했다.

빼앗긴 자? 오가리가? 누구한테? 뭘? 왜?

(뭐 내 이해력이 많이 부족해서일지도 모르겠지만)

 

이성열 연출의 변은 이 작품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준다.

 "제목 속의 양은 김양, 이양처럼 유흥가의 여성을 지칭할 수도 있고, 희생양이 될 수도 있겠죠. 오가리가 마켓에서 양을 찾는다는 것은 좌절감 속에서 성적 타락이나 범죄행위를 하는 것일 수도 있고, 다르게는 자신의 죄를 벗게 해 줄 희생양을 찾으러 다니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전체적으로는 구원에 대한 희구가 강한 작품입니다."

교통사고로 죽은 택시기사 오가리(이남희)의 망상 속 세계.

정신찬란의 그 세계가 보고 있는 사람에게도 지독한 환멸과 혼돈을 안긴다.

급기야 등장인물의 누가 누구인지조차 모호해지기 시작했다.

마치 기본과 질서, 최소한의 예의마저 없는 대한민국의 실상처럼.

이 연극...

아주 의도적이고 철저하게 보는 사람을 불편하게 만든다.

아무래도 이 작품,

처용설화를 빌어서 지금의 현실을 폭로하고 싶었나보다.

 

만약에 이 작품에 지금같은 배우들이 출연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연극을 보면서 내내 이 생각을 했다.

이남희, 유연수, 김수현, 이명행의 연기는 난해하고 불편한 연극을 끝까지 집중하며 깊이있게 볼 수있게 만들었다.

"삼국유사 프로젝트"는 참 어렵고 힘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번 또 다시 객석에 앉게 되는 건 이런 배우들이 갖는 힘때문이다.

객석에서 보고 있으면 그 집중력있는 연기에 황홀할 지경이다.

지금도 눈에 선하다.

배우들의 눈동자와 동선과 목소리 톤이.

어렵지만 아름다운 작품.

나의 처용은 그랬다.

Posted by Book끄-Book끄
보고 끄적 끄적...2012. 5. 28. 14:10

<헤다 가불러>

 

일시 : 2012.05.02. ~ 2012.05.28.

장소 : 명동예술극장

출연 : 이혜영, 강애심, 김수현, 김성미, 김정호, 호산, 임성미

극작 : 헨리크 입센

연출 : 박정희

제작 : 명동예술극장

 

<햄릿 1999> 이후 12년만에 배우 이혜영이 연극 무대에 선다!

그것도 '현대 연극의 아버지'로 불리는 헨리크 입센의 작품으로.

<인형의 집>으로 유명한 입센의 <헤다 가불러>는 세계 초연 이후 120년 만에 우리나라에 초연무대를 갖게 됐다.

그만큼 함부러 도전하기에 어려운 작품이란 의미일까?

세계적으로 이 작품이 공연될 때는 누가 헤다 역을 하느냐가 매번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는데 우리나라가 선택한 첫번째 헤다는 배우 "이혜영"이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작품의 카리스마가 어느정도인지 가늠이 된다.

솔직히 이혜영 한 명만 봐도 손해날 것 없는 작품이겠구나 생각하면서 일찌감치 예매를 했었다.

명동예술극장은 개관한 이래 나름대로 주관과 곤조(?)를 가지고 좋은 작품을 성실하게 제작해왔다.

개인적으로 처음 명동예술극장을 찾았는데

뭐랄까 어떤 독보적인 자존감 같은 게 느껴졌다.

살짝 독립군 같다고나 할까?

 

연극은 어렵다는 표현보다는 너무나 성실하고 극적이었다.

"헤다 가불러"라는 인물이 가지는 삶에 대한 욕망과 주도권에 대한 집착이 섬득하면서도 사실적이다.

고전적이면서도 섬세한 심리묘사나 대사들은 지극히 현대적이다.

한 인간, 한 여성의 마지막 이틀!

그 이틀의 시간이 평생의 시간보다 길고 강렬하다.

이 여자의 마지막은 또 얼마나 정당하고 당당한가!

삶의 주도권을 타인에게 빼앗기느니 차라리 모든 걸 던져버리겠다.

결혼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남편의 성이 아닌 아버지의 성을 그대로 고집할만큼 헤다는 자신의 삶에 주도적이었던 헤다.

그녀는 일종의 개척자였고 기획자였다.

"욕망"이라는 건 또 얼마나 치밀하고 관능적인가!

그리고 또 배우 이혜영은 얼마나 아름답고 관능적이고 화려하던가!

솔직히 길지 않은 시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배우 이혜영에게 단 한 순간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헤다야 늘 아름답지 않니!"

테스만 고모의 말에 전적으로 공감하다.

아니 솔직히 "이혜영이야 늘 아름답지 않니!"가 정확한 표현이다.

대사와 동작이 너무 우아하고 아름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장되거나 힘이 들어간 게 아니라 정말 물처럼 자연스럽게 흐른다.

50의 나이가 믿기지 않을 만큼 그녀는 젊은 헤다 역에 완벽히 동화됐고 충실했다.

무대에 서있는 자세와 눈빛, 동작 하나하나가 어찌나 당당하던지...

보는 내내 완벽히 압도당했다.

특히 커튼콜때 이혜영의 모습은 연극보다 더 감동적이었다.

뭐랄까?

무대와 관객에 대한 깊은 존경과 경외심이 담긴 인사였다.

범접할 수 없는 여신같은 신비감과 아우라에 숨이 막혔다.

 

헤다와 후반부에 심리대결을 펼치는 판사 역의 김정호의 연기도 압권이다.

서로 아닌 척 하면서 팽팽하게 당기는 그 긴강감이라니...

설정인지 아니면 실제 목소리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딘지 상대를 얕잡아보는 듯하면서 느물거리는 독특한 김정호의 목소리는 상당히 인상적이다.

표정도 너무 좋았고... 

이혜영뿐만 아니라 호산, 김수현, 강애심의 열연도 훌륭했다.

특히 이 모든 배우들의 목소리톤과 딕션이 믿어지지 않을만큼 좋았다.

아! 그리고 신비감을 주던 곱추 하녀 임성미에게도 박수를...

(이층에서 고개만 내밀던 하녀때문에 극 중간중간 정말 많이 놀랐다.)

마지막 헤다의 자살 장면.

마치 헤다가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확실하고 독보적인 보석이 된 것만 같다.

아주 극도로 아름다웠다노라 말한다면 내가 이상한걸까?

 

헤다는 아름다웠다.

그리고 배우 이혜영의 헤다는 백만 배쯤 더 아름다웠다.

그 어떤 젊은 여배우도 이햬영의 젊음과 관능을 결코 따라오지 못하리라 생각했다.

두루두루 끔찍한 작품이었고 꿈같은 작품이었다.

 

아름다운 작품을 보면

오래오래 황홀하다.

 

Posted by Book끄-Book끄
그냥 끄적 끄적...2012. 2. 10. 06:27
TV를 거의 보지 않는 내가 요즘 잊지 않고 챙겨보는 드라마가 생겼다.
40% 육박하는 시청률을 자랑하는 MBC 드라마 <해를 품은 달>
정은궐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만든 퓨전 사극 드라마다.
(그런데 사실 퓨전 사극이라는 말. 참 안 어울린다)
내가 처음부터 끝까지 다 본 드라마는 2편 정도였다.
<베토벤 바이러스>, <성균관 유생들의 나날>
그런데 아역 배우들에게 감탄하면서 보는 드라마는 아마도 이게 처음이지 않을까 싶다.
김유정과 여진구에게 연기 수업 받아야 할 어른 연기자들 참 많구나 했다.
정말 배역에 빙의되서 연기하는 아역들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감탄을 넘어서 때론 공포스럽기도 하다.
(이 아이들을 감히 아역이라고 불러도 될까?

 



한가인의 연우역 미스캐스팅 논란과 연기력 논란이 아직까지 있긴 하지만
(공감은 한다. 국어책을 참 성실하게 읽긴 하더라)
어쨌든 성인 연기자로 넘어온 <해를 품은 달>을 보면서 
끊임없이 놀라고 있는 건 아직 어린 배우 김수현의 열연이다.
스물 다섯살이라고 했던가?
<드림 하이> 송삼동도, <자이언트>의 이범수 아역 연기도 본 적이 없어 모르지만
어쨌든 그 나이가 믿어지지 않는 연기다.
"훤앓이"까지는 아니더라도 나도 이 녀석을 보고 있으면
가끔 묘하게 두근거린다. 
배우 김수현의 진면목은
기억을 잃은 연우와의 달달한 로맨스 장면보다는
자신보다 이십년 이상 연배가 있는 선배연기자들과의 장면에서다.
조정대신들과의 그 오묘하고 찰진(?) 밀땅은 혀를 내두르게 한다.
배테랑 연기 경력의 선배들앞에서 주눅들을만도 한데
팽팽하고 짱짱한 것이 제법이다.
때로는 선배들을 압도하기도 한다.
이 녀석!
제법 멋지다!




기사에 보니 이 녀석이 <뿌리깊은 나무> 한석규를 제치고
"사극 속 가장 매력있는 왕 1위"를 했단다.
(이런 설문은 도대체 어디서, 왜 하는지 모르겠지만...)
암튼 요새 김수현이 대세긴 한 모양이다.
(항간에선 김수훤이란다)
정은궐의 소설 <해를 품은 달>을 읽긴 했는데
드라마 작가 진수완이 원작과 적당히 가감해서 현재까진  잘 쓰고 있는 것 같다.
(개인적으로 소설은 드라마처럼 재미있지 않았었는데...)
책과 드라마도 인기있지만
요즘 이 소설의 원작자인 정은궐의 미스터리도 증폭하고 있는 중이다.
<성균관 유생들의 나날>, <규장각 각신들의 나날>에 이어 <해를 품을 달>까지
연속 고공 행진을 이어가고 있다.
정은궐이라는 이름도 "은빛 궁궐"이라는 필명이라는데
얼굴은 물론이고 성별과 직업 그 어떤 것도 공개된 게 없다.
(여자라는 이야기는 있긴 하더만...)
작가 본인이 신상을 밝히는 걸 꺼려해서 모든 인터뷰도 거절하고 있단다.
지금은 청나라로 간 잘금 4인방의 이야기를 준비하고 있다는데
제목이 <청나라 스파이들의 나날>이라나?
(제목을 좀 바꿔야 하지 않을까? <청나라 간자들의 나날> 쯤으로...)
역사나 고어, 대궐 풍습에 대한 지식은 확실히 해박한 것 같다.
뭐든지 한 길을 계속 파면 일가를 이루기는 하는 모양이다.
가끔은 정은궐이란 작가, 로맹 가리 같은 부류는 아닐까 살짝 의심하게 된다.
이미 작가로 엄청난 명성을 얻은 로맹 가리가
에밀 아자르라는 또 다른 이름으로 <그로칼랭>과 <자기 앞의 생>을 쓴 것처럼
이미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유명 작가가 정은궐이란 이름으로 철저히 비밀을 유지하고 작품을 발표하는 건 아닌지...
뭐 안 될 것도 없지 않을까?
소설가 박범신도 <은교>를 발표하면서 그랬다.
"요즘에는 한번 필명으로 작품을 써서 신춘문예나 문학상에 응모해 볼까 싶은 생각도 가끔 들곤 해. 로맹 가리처럼 말이야"
비약일진 모르겠지만 그럴 수도 있을 것 같다.

김수현과 정은궐의 <해를 품은 달>
확실히 대단하긴 하다!
TV와 담 쌓고 사는 나를 이렇게 모니터 앞에 앉혀 놨으니 말이다.
오랫만에 본 낯선 내 모습!
어쩐지 살짝 재미있다.

Posted by Book끄-Book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