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끄적 끄적...2010. 11. 19. 08:25



윤소정, 박지일, 이호성, 길해연, 서은경.
이름만으로도 가슴이 뛰는 배우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연극 <33개의 변주곡>
2009년 3월 미국 "유진 오닐" 극장에서 초연됐을 때 
여주인공 캐서린 역을 제인 폰다가 분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 작품은 그 해 토니상 5개 부분에 후보로 올랐고 아쉽게도 무대디자인 상만 수상했다.
무대는 확실히 상을 받기에 충분할만큼 독창적이고 아름답고 실용적이다.
그리고 작품은...
무대보다 훨씬 멋지다.
연극은 캐서린의 죽는 순간까지 연구했던 베토벤 논문 서문으로 시작된다.
(이 말은 베토벤의 말이기도 하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기원에서 시작해봅시다.
어떤 것이 어떻게 생겨나게 되었는지에서 시작합시다.
왜 그런 방식으로 생겨나게 되었으며
어떻게 현재의 모습이 되었는지...




디아벨리 왈츠를 주제로한 베토벤의 테마가 있는 33개 변주곡.
이 변주곡은 베토벤의 변주 기법를 집대성한 작품이자
바하의 골든베르크 변주곡과 함께 변주곡 최고의 작품으로 손꼽히는 작품이란다.
연극을 보고 일부러 그 변주곡 전체를 찾아서 들어봤다.
베토벤의 33개 변주곡은 총 4개의 구조로 나뉜다.
(연극에서 베토벤으로 분한 박지일이 열정적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1. 발전군 : 제 1 변주 ~ 제 10 변주
2. 코트라스트군 : 제 11 변주 ~제 20 변주
3. 스케르쪼군 : 제 21 변주 ~ 제 28 변주
4. 피날레군 : 제 29 변주 ~ 제 33 변주

디아벨리의 왈츠는 50초 가량의 비교적 짧은 곡이다.
베토벤은 이 왈츠의 리듬을 가지고 총 50분이 넘는 변주곡을 만들었다.
베토벤은 처음엔 디아벨리의 왈츠를 "구두 수선공의 헝겊조각(cobbler's patch)"이라며 폄하했단다.
그러나 마음을 바꿔 무려 4년의 시간동안 이 변주곡에 집착해 33개의 변주곡을 만들었다.
왜 베토벤은 디아벨리의 왈츠에 집착했을까?
음악학자 캐서린 브랜트(윤소정)는 지금 그 부분을 추적하고 있는 중이다.
서서히 화석이 되는 루게릭 병을 진단받고서도 말이다.
캐서린은 급기야 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베토벤의 스케치가 남아있는 베토벤하우스로 날아간다.
독일의 본으로... 그것도 혼자서..
캐서린의 집착과 베토벤의 집착은,
놀랍도록 닮아있다.



현재와 19세기가 한 무대 위에서 공존하는 모습은
이 연극의 대사를 그래도 빌려 표현하자면,
"여기서부터 용들이 산다!"
딱 그렇다.
베토벤 문서연구소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 장면에서 천정의 조명이 순차적으로 내려오는 모습,
악보를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스크린에 비쳐지던 베토벤의 실제 스케치들.
그리고 무대 한 켠에서 라이브로 연주되는 디아벨리 변주곡들.
어떤 형태로 두 세계를 보여줄까 궁금했는데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깔금하고 매력적이다.
도저히 산만할 틈조차 없다.
무대에는 악보들로 빽빽하다.
시간을 가르는 것 같은 커다란 테이블.
시각적인 장치들이 너무 커서 배우들의 연기를 왜소하게 만든다는 평도 있긴 하지만
개인적으로 나는 전혀 그렇지 않는다.
왜소해지기에는 배우들의 열정이 너무 대단했다.
특히 캐서린 윤소정씨.
대상포진을 앓고 있다고해서 걱정했는데 그 걱정이 무색할만큼 아름다웠다.
지난 봄 <에이미>를 보면서도 감탄했는데 이번 역할도 감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어떻게 그 많은 대사들을 그렇게 자연스럽게 할 수 있을까?



원작자 모이시스 카프먼은 작가 노트에서
이 희곡에는 무대 위 등장인물 외에 2명의 등장인물이 더 있다고 말했다.
하나는 음악이고, 다른 하나는 극에서 영상으로 나타나는 베토벤의 오리지널 스케치들.
영상을 보면서 잠깐 소름이 돋았다.
그냥 그 천재성이 섬뜩함으로 다가왔다고 할까?

"이 희곡은 디아벨리 변주곡의 탄생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토대로 하지만 나는 이 이야기를 허구의 관점에서 들여다보려고 했다. 따라서, 이 작품은 역사적 사건의 재구성이라기보다는 삶의 한순간에 대한 일련의 변주라 하겠다."  -    모이시스 카우프먼 메모

묘하게 연결되는 장면 전환들도 상당히 좋았다.
무대 위에 7명이 전부 나와서 서로 중첩되는 대사를 하는 장면은
와, 정말 황홀하더라.
내겐 그 순간이 베토벤과 캐서린이 동일화되는 장면처럼 느껴졌다.
연극을 보기 전에 캐서린과 베토벤이 대화를 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이 장면 덕분에 실제로 두 사람이 대화하는 모습이 오히려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



"기원""변모"
나는 이 연극을 두 단어로 말하고 싶다.
그리고 그 두 단어의 합일은 바로 "예술"이다.
케서린은 "예술"을 통해 베토벤과 딸 클라라를 이해하게 되고
딸 클라라 역시 "예술"을 통해 엄마 캐서린을 이해하게 된다.
그러니까 이 연극은 "과정"을 보여주고 싶었던거다.
기원을 쫒는 과정, 그리고 변모해가는 과정.
그래서 천재성이 번득이는 "예술"이 탄생되는 과정.
그야말로 여기서부터 용들이 산다...



연극의 스토리텔러가 캐서린에서 베토벤으로 그리고 클라라로 전환되는 것 역시도
하나의 변주였음을 연극을 다 본 후에 깨달았다.
그리고 날조된 기록을 남긴 베토벤의 비서 쉰들러도
비엔나의 50인 음악가에게 변주곡을 의뢰한 악보 출판업자 디아벨리도,
그리고 클라라의 연인 마이크와 베토벤 하우스의 거투루트까지도 전부 하나의 변주였음도...
그러니까 모든 사람의 삶은 전부 "변주"인거다.
그렇다면 이제 확실해진 거 아닌가?
삶은 충분히 아름다운 과정 속에 있다.

연극 <33개의 변주곡>
내게 참 다양하고 광범위한 아름다움을 남겼다.
아무래도 이 작품...
오래오래 간직될 것 같다.
Posted by Book끄-Book끄
보고 끄적 끄적...2010. 8. 25. 05:46


제 목 : 경남 창녕군 길곡면
일 시 : 2010.0730. ~ 2010.09.19
출 연 : 이주원(종철 역), 김선영(선미 역)
장 소 : 동숭아트센터 소극장
극 본 : 프란츠 크시버 크뢰츠
번안, 연출 : 류주연

<연극열전3rd>의 여덟 번째 작품이다.
몇 달 전에 유주연 연출의 <기묘여행>을 인상깊게 보기도 해서 연극열전에서 <경남 창녕군 길곡면>이 공연된다고 했을 때 놓치지 말고 찾아봐야지 생각했었다.
게다가 서울 문화의 밤 행사에 이 연극이 포함되어 있어서
8월 21일 총 2회 공연은 만원이라는 정말 파격적인(?) 가격으로 관람할 수 있었다.
솔직히 이게 왠 횡재냐 싶었다.

 
이 연극은 독일작품이다.
프란츠 크시버 크뢰츠라는 사람의 극본으로 도시 하층민의 삶을 있는 그대로 그려낸 작품이다.
독일 원제는 "오버외스터라이히" 라는데 독일에 실제 있는 작은 도시 이름이란다.
우리나라에선 연출 류주연이 직접 번안을 하면서 제목을 <경남 창녕군 길곡면>이라고 정했다.
(실제로 경남에 창녕군 길곡면이라는 곳이 있긴 하다)
2007년 초연됐고 거의 매년 재공연된 작품이다.
꼭 제목처럼 경남 창녕군 길곡면이 아니라도 대한민국 어디든 다 상관이 없다.
아웅다웅 지지고 볶으며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괜찮다.
어차피 인간이 사는 곳은 어디든 다 마찬가지니까.


                          김선영(선미)                                         이주원(종철)       

초연때부터 함께 부부로 출연한 김선영, 이주원은
실제 부부가 아느냐는 소리를 들을 만큼 완벽한 호흡을 자랑한다.
(그런데 부부라고 해도 정말 믿겠다)
원작자는 각 나라에서 이 연극을 공연할 때는 꼭 사투리로 공연해달라는 조건을 붙였단다.
도시 하층민의 삶을 그린 이야기에 표준말을 또박또박 쓰는 것도 좀 우습긴 하겠지만
사투리가 아니라면 연극의 재미가 아무래도 줄어들었을 것 같다.
우리나라에서는 약간은 수다스럽고 구시렁구시렁 거리는 경상도 사투리를 선택했는데
김선영, 이주원 두 배우 모두 고향이 경상도라 사투리의 묘미가 한층 자연스럽고 재미있다.
실제로 이 연극에서 구시렁거리는 부분이 많이 나오는데
100% 전부 두 배우의 애드립이란다.
두 사람도 서로 무슨 이야기를 할지 전혀 모른다고...
그리고 선미 역의 김선영은 실제로 임신중이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아기에 대한 사랑과 보호본능이 극 속에 그대로 드러난다.
역시 엄마는 늘 언제나 강하다.
(그런데 왜 아빠들은 겁쟁이가 많은건지...) 

 


결혼 3년차!
여유돈이라고는 통장에 들어있는 120 만원이 전부이고
두 사람의 한 달 수입은 대략 300만원 정도. (아내는 그나마  비정규직이다)
그래도 알콩달콩 나름대로 만족스럽게 살아가던 두 부부에게 변화가 닥친다.
계획하지 않았던 임신.
아내는 생명을 지키고 싶어하지만
남편은 아내에게 낙태를 하자며 설득 아닌 설득을 한다.
소위 돈 없으면 애 낳기도 힘든 세상에 남편은 덜컥 겁이 나버린거다.
남편은 말한다.
"아빠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떤 아빠냐가 중요하다" 고...
왜 끊임없이 나쁜 것만 찾으려고 하느냐는 아내의 질문에
남편은 "그게 현실이다!" 며 무시할 수 없는 한 마디를 내뱉는다.
남편의 말에 화가 나기도 하지만 보는 입장에서도 솔직히 할 말은 없다.
이 말이 사실이긴 하니까...
김용택 시인의 말이 떠오른다.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곳이 바로 자녀에 관한 문제라고...
맞는 말이다.
연극 속에서 남편 역시나 그 현실이 덜컥덜컥 겁이 날 수밖에 없었을거다.



급기야 아내와 남편은 한 달 지출을 조목조목 종이에 적어가며 계산기를 두드린다.
집세, 자동차, 대출금, 보험금에 심지어 부모님 용돈, 화장품, 미장원비, 술, 담배, 우유 값까지 끄집어내 계산한다.
(이 부분이 이 연극에서 가장 롱테크로 진행된다. 유치하지만 그야말로 사생결단으로 점점 치열해지는 장면 ^^)
월 300만원 수입에 지출은 2,955,000 원.
아내가 직장을 그만 두는 전제하에 한 달 수입을 200만원으로 잡고
(그러기 위해선 남편은 야간 운전까지 해야한다)
이제는 줄일 수 있는 목록들을 하나하나 삭제하기 시작한다.
차를 팔고, 술 담배를 끊고, 물만 마시고,
화장품은 립스틱만 바르고 머리를 기르고 기타 등등 기타 등등...
거의 모든 것을 안 하기로 작정했는데도 나온 금액은 1,934,000 원.
눈 앞에 남은 건 잔액 66,000 원의 현실이다.
(보는 나까지도 어쩔 수 없이 씁쓸해진다)


결론은,
어쨌든 아기를 낳기로 하니까 등장조차 하지 않는 아기 입장에서는 더없는 헤피엔딩이다.
하지만 엔딩에서 남편이 연주하는 루이 암스트롱의 어설픈 섹소폰 연주처럼 과연 부부의 현실도 누부신 "What a wonderful world" 가 될 수 있을지는 솔직히 의심스럽다.

유쾌하고 즐겁게 보고 나오긴 했지만
정말 이런 고민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은 현실에 등골이 오싹할 지경이다.
아이 없이 두 사람만 행복하고 즐겁게 살겠다는 딩크족이 아니라면 결혼한 부부는 자녀를 낳아 함께 키우면서 살아가게 된다.
그걸 우리는 일반적으로 "평범"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점점 우리가 알고 있는 이 평범이라는 기준이 점점 평범 이하로 자리이동이 되고 있으니 부모 입장이라면 퍽퍽한 세상살이가 될 수밖에 없다.
아이의 세상을 wonderful world로 만들어주기 위해 부모는 소위 삑사리 가득한 인생을 살게 될지도 모른다면?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그냐?"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문제는 장 담그는 게 무서워서가 아니라
내 항아리에서 자생으로 생기는 구더기는 그런데로  봐줄 수 있어서 기껏 장을 담궜는데
멀쩡한 내 장에다가 누가 자꾸 구더기를 넣으려고 하는 사회에 있다.
그래서 연극의 말미에 나온 "절망에서 살인! 이라는 신문기사가
더 현실적으로 다가왔는지도 모르겠다

재미있었고, 배우들의 연기도 너무 좋았고.
연출과 무대도 너무 좋아서 전체적으로도 상당히 좋았던 작품임에는 분명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고 나와서는 너무 많이 참담해지는 연극이다.
그리고 누군가는 이 연극을 보면서 단지 코메디라고만 여길수도 있겠다 생각하니
그 참담함이 배가 된다.
에이! 그만 생각하자!
열심히 연습하면 삑사리 없는 "What a wonderful world"를 연주하게 될지 누가 알겠는가?
그러니 살자... 살자... 살자...
치열하게 살든, 연습하듯 살든, wonderful 하게 살든. 삑사리가 작렬하게 살든,
어쨌든 살기나 하자!
Posted by Book끄-Book끄
읽고 끄적 끄적...2010. 8. 4. 06:41
2009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헤르타 뮐러.
스웨덴 한림원은 그녀를 선정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응측된 시와 진솔한 산문으로 박탈당한 삶의 풍경을 그녀내는 작가" 라고.
(정말로 그녀의 글 속엔 이 모든 게 다 들어있다. 시, 산문, 그리고 그림까지...)
그녀는 비밀 경찰의 눈을 피해 남편이자 동료 작가인 리할트 바그너와 함께
조국 루마니아를 떠나 독일로 망명했다.
이로써 루마니아는 위대한 유산인 그녀를 잃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말한다.
그녀의 작품에 나타나는 가장 큰 특징은 "낯선 시선" 이라고...
헤르타 뮐러가 2009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하지 않았다면
나는 과연 이 작가를 알 수 있었을까?
그런 이유로 나는 지금 한림원의 선택이 그저 고마울 뿐이다.



1944년 여름 붉은 군대가 루마니아를 깊숙이 점령해 들어가고
파시즘을 신봉하던 독재자 안토네스쿠는 체포되어 처령당했다.
소련에 항복한 루마니아는 그때까지 동맹국이었던 나치 독일을 향해 급작스레 전쟁을 선포했다.
1945년 1월 소련의 장군 비노그라도프는 스탈린의 이름으로,
나치에 의해 파괴된 소련의 "재건"을 위해
루마니아에 거주하는 독일인들을 넘겨달라고 요구했다.
루마니아에 살던 1세에서 45세 사이의 독일인은 남녀를 불문하고 빠짐없이 소련의 강제수용소로 유형을 갔다.
헤르타 뮐러의 아버지 또한 이차대전 당시 나치 무장친위대로 징집되었다가 돌아왔고,
어머니는 우크라이나의 강제수용소에서 오 년간 노역했다고 한다.
수용소 이야기...
또 다시 안네의 일기의 반복이냐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 책을 읽기 시작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 생각을 완전히 내려놓게 된다.

책 속의 주인공은 17살에서 22살까지 5년 동안
독일인의 러시아 수용서에서 강제노동을 하고 있는 상태다.
벌건 양배추스프와 아침에 배급되는 자그마한 빵으로 하루를 연명하면서
밤새 배고픔을 먹어야 하는 생활.
그가 하는 모든 일에는 배고픔이 담겨져 있다.
책 속에서 주인공은 말한다.
"나는 나 자신을 훔친 도둑이었고 단어들이 불시에 나를 덮쳐 붙잡았다" 라고...
자신의 자유와 권리를 잃고 수용소에 갇히게 될 때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몇 가지가 될까?
바보가 되든, 아니면 체념을 하든, 혹은 깨달은 자가 되든....
그러나 이 책은 다른 선택을 한다.
그리고 단어 선택 하나하나조차도 감탄스럽다.
책 장을 넘길수록 믿어지지 않을 만큼 묘한 편안감에 빠져든다.
수용소 이야기를 이렇게 편하게 읽어도 되는 건가 싶어 미안한 마음마저도 든다.
책의 언어는 몹시. 몹시.
아.름.답.다.
줄을 바꿔 짧게 나열하면 그대로 시가 될 수 있겠다고 생각될 만큼.
그러나 무기력하거나 허물어져 있지도 않다.
"너는 돌아올거야"
떠나는 그에게 남긴 할머니의 말을 떠올리며 그는 생각한다.
"두고 봐, 간단한 계획이지만 오래 버틸테니까."
그 다짐은 아주 건조하고 낯선 언어로 다가온다.
수용소에서 바라보는 모든 사물에 대한 시선이 시적이고 낯설다.
사람이 죽어 나가는 상황인데도 때론 몽환적일만큼 아름답다.
읽으면서 순간순간 섬득함마저 갖게 된다.
이런 감정을 갖는게 과연 정당한가???



주인공 소년은 청년이 되어 다시 돌아온다.
그러나 돌아왔을 때 그가 느끼는 것 또한 "낯섦" 그것이다.

... 수용소로 가기 전 우리는 십칠 년을 함께 지냈고 문, 장롱, 탁자, 양탄자 같은 커다란 물건들을 공유했다. 접시와 컵, 소금통, 비누, 열쇠 같은 작은 물건들도 그랬다. 창과 전드의 빛도. 그러나 지금 나는 다른 사람이었다. 우리는 서로 더이상 우리가 아님을. 다시는 그렇게 될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낯선 존재가 된다는 것은 분명 부담이지만, 믿을 수 없이 가까운 거리에서 거리감을 느끼는 것은 감당하기 어려운 부담이었다. 내 머리는 트렁크 안에 있었고, 나는 러시아식으로 숨을 쉬었다. 나는 떠나고 싶지 않았지만 낯선 냄새를 풍겼다. 하루 종일 집 안에 있을 수가 없었다. 침묵을 떠나기 위해 일이 필요했다. 나는 스물두 살이었지만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다...

<숨그네>는 인간의 숨이 삶과 죽음 사이에서 그네처럼 가쁘게 흔들리는 것을 상징하는 제목이라고 한다.
스웨덴 한림원이 2009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그녀를 선정하지 않았다면
헤르타 뮐러의 책은 결코 우리나라에 번역되지 않았을 거다.
(노벨상 수상으로 올해 그녀의 책이 2권 출판됐다. <숨그네>와 <저지대>
 내게는 더없이 다행스럽고 고마운 일이다.)
"시의 옷을 입은 비극"
숨그네를 말하는 또 다른 이름이다.
헤르타 뮐러는 말한다.
"...... 상황은 처참했다. 문자는 아름다웠다. 나는 비극은 시의 옷을 입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처참함을 고발하기 위해서는 그래도 비극은 시의 옷을 입어야 한다는 것, 그것이 내 문학의 명예였다 ......"

글은 소제목에 따라 아주 잘게 부서져 있다.
어떻게 이런 제목들을 가지고 이렇게 아름다운 글을 쓸 수가 있었을까?
명아주, 시멘트, 손수건과 쥐, 슬래그 벽돌, 지팡이, 공책...
직물적인 것들이 새롭게 태어나는 모습을 목격하는 건 심지어 경이에 가까웠다.
마치 일기를 읽는 것 같기도, 아름다운 산문시를 읽는 것 같기도 한,
그러면서 아주 잘 만들어진 거부감 없는 예술영화를 감상하는 것 같기도 한 소설.
그래, 확실히 아름다운 건 분명 힘이다.
그리고 헤르타 뮐러는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아름답고 강한 무기의 소유한 작가다.
찾아봐야겠다.
그녀의 또 다른 강한 무기가 세상의 어떤 것을 막아서고 아름답게 정화시키는지...

<숨그네>를 마지막 장을 넘기면서
나는 그녀의 <저지대>를 눈독들이기 시작했다.
Posted by Book끄-Book끄
읽고 끄적 끄적...2010. 5. 26. 06:38
베른하르트 슐링크.
이 멋진 독일 작가의 글때문에 나는 오랫만에 충만했고 환상적으로 행복했다.
<더 리더 - 책읽어 주는 남자>를 읽으면서
전율에 가깝게 느꼈던 모든 감정들이
<귀향>을 읽으면서 또 다시 고스란히 찾아왔다.
그러나 그 느낌은 한 단계 위의 감정이었고 감동이었다.
법대 교수이자 판사이면서 베스트셀러 작가이기도 한 베른하르트 슐링크.
(이런 조합이 믿어지는가? 소설을 쓰는 판사라는 조합이...)
1944년 7월 6일 독일 빌레펠트에서 태어나 하이델베르크와 만하임에서 자랐다.
1981년 관공서 간의 공무 협조에 관해 쓴 교수 자격 논문이 통과되었고,
본, 프랑크푸르트 대학을 거쳐 현재는 베를린 훔볼트 대학 법대 교수로 재직 중이다.
뉴욕 예시바 대학 객원교수를 역임했으며 현재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 헌법 재판소 재판관도 겸임하고 있다.
그의 이력과 비슷한 이 책 <귀향>은 어쩌면 그 자신의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단지 주인공이 판사가 아니라 출판사 일을 한다는 차이만 있을 뿐...
그의 글에는 시간과 아픔과 신비와 현실이 묘하게 뒤섞여 있다.
읽고 있으면 소설이 아니라 너무나 분명하고 선명한 역사를 겪고 있는 느낌이다.
단 두 권 뿐이었는데도
그의 글을 읽으면서 나는 뼈마다가 아리고 저렸다.



아버지 없이 홀어머니와 함께 독일에 거주하는 주인공 페터.
(모자 사이에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는 일종의 "금기"였다)
그는 방학 때면 스위스에 거주하는 할아버지 댁에서 매년 시간을 보냈다.
<기쁨과 재미를 주는 소설> 총서를 편집하는 일을 하는 조부모는
잘못 인쇄된 종이들을 모아 손자에게 연습장으로 쓰라며 주곤 했다.
그러면서 당부한다.
뒷 장의 소설은 읽지 말라고...
금기가 허물어지는 순간 페터의 앞에 나타나는 카를의 귀향 이야기.
잠시 잊고 있다가 성인이 된 후 우연히 이삿짐에서 다시 보게 된 이야기의 배경이
어디선가 실제 보았던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일종의 기시감이랄까?)
페터는 직접 결말을 찾아 나서기로 결심한다.
그 과정에서 페터는 또 다른 금기였던 아버지의 행적까지 찾아 나서게 된다. 
"오디세이아 모티브"
탈출, 방랑, 귀향...
책 속에 등장한 모든 이야기는 오디세이아 모티브로 점철된다.
급기야는 페터 자신의 인생까지도...
결국 세상의 모든 이야기는 "귀향"에 관한 이야기라고 했던가!



잃어버린 소설의 결말 찾기와 부재하는 아버지 찾기.
전쟁과 전후 세대의 이야기.
그리고 남자와 여자의 이야기.
절묘한 신화의 모티브.
집을 떠나기 전 아버지는 아들에게 자신을 찾으라며 흔적을 남겼을까?
거울의 반쪽을 서로 맞춰보면서 부자 지간을 확인하고
신화 속 비범한 인물이 된 아들은 온갖 역경을 슬기롭게 이겨내고
결국 아버지를 만나 적자의 정통성을 인정받게 될까?
소설의 중간 중간 나오는 귀향 이야기들은
아름답고 신비하면서도 불안하고 불편하다.
그건 아마도 독일의 역사와 비슷하리라.
"루시퍼 이펙트"를 보는 듯한 세미나를 가장한 실험 장면은 섬득하다.
......대학원생들과  미래의 정치인, 판사, 사업가, 그리고 다른 유력가들은 극단적인 조건에서 어떤 행동을 보일까? 얼마큼 협력적이고, 얼마큼 이기적일까? 얼마나 원칙을 견지하고, 얼마나 적에게 동조할까? 서로를 배신하게 만들고 서로를 적으로 돌리는 데는 어떤 장치가 필요할까? 얼마큼의 추위와 굶주림, 압력, 공포가 있어야 문명의 가면을 벗길 수 있을까? ......
역사와 정의의 문제, 악의 본질에 관한 예리하고 비열한 현실을
읽는 사람은 각오하고 똑똑히 목격해야 한다.
그리고 그보다 더 많은 또 다른 이야기들까지도...



페터는 아버지의 아들이 될 수 있을까?
그러나 이 해답은 혹은 결말은 여기에서 전혀 중요하지 않다.
권하고 싶다.
꼭 읽어보고 느껴보라고...
가슴 속에 굵은 금이 생길만큼 이 책은 특별하다.
나는 지금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또 다른 책 <다른 남자>를 꿈꾸고 있다.
이 사람을 다 읽어내고 싶다.
그의 단편 <사랑의 도피>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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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사랑하면서도 사랑받지 않을 수 있고, 그것을 불공정한 것으로 느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응답받지 못한 사랑의 공정함도 있는 법이죠.

아버지에 대해 알고 나서부터 그래. 마치 아버지에게 터뜨리지 못한 분노가 다른 분출구를 찾아 헤매는 것 같아.... 그동안 난 항상 세상에서 한 발짝 물러나 살아왔고, 설령 잠시 세상에 발을 담근다 해도 저항이 있으면 언제라도 후퇴할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 같아.

악의 선한 면이란 악이 선을 위해 쓰일 수 있다는 겁니다.
가난과 고통이 진보와 문화를 가능케 하고, 폭력이 평화를 보장하고, 무고한 사람들의 희생이 정의로운 혁명과 정의로운 전쟁을 성공으로 이끕니다.
나는 그가 이것을 일부러 연출하고 즐겼다고 확신했다. 그는 강의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에게 연구하고 생각하는 법을 가르치려 했고, 더 나아가 학생들을 바꾸려고 했다. 어떻게 바꾸려는지는 몰라도......

자신이 잘못하지도 않은 일로 사과해야 하는 자기비판의 모든 형식이 결국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무너뜨리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존감이 붕괴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는 항상 진실과 거짓을 행하고 있다. 다만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에 대한 결정은 개인이 내려야 한다.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그리고 악이 자유롭게 떠돌아 다녀도 되는지 아니면 선을 위해 이용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결정도 개인 소관이다. 이는 우리 개인이 올곧게 결정을 내린다는 것과는 다를 뿐 아니라 그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다.

이런 이유로 과거에는 남은 사람들에 대한 희생자의 값어치에 비례해서 살인을 처벌했다. 예를 들어 아버지에게 있어서 아들이나 딸의 값어치, 주인에게 노예의 값어치가 그것이다. 오랫동안 흑인을 살해한 백인이 백인을 살해한 흑인보다 경미한 처벌을 받은 것도 그래서이다. 살인자로서의 행위가 더 관대한 처분을 받은 것이 아니라 희생자의 가치가 그만큼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종 청소의 경우는 별 양심의 가책 없이 편하게 살인을 저지를 때가 많다. 희생자들의 죽음을 슬퍼할 사람들을 아예 하나도 남겨 놓지 않기 때문이다. 인종 청소의 전제는 이렇다. 청소할 민족을 고립시키고, 그들을 다른 민족들과 함께 이루는 세계의 질서 속으로 편입시키지 않고, 다시는 일어서지 못하도록 그들의 뿌리까지 뽑아버려야 한다.

Posted by Book끄-Book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