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끄적 끄적...2010. 12. 15. 06:11
2007년 코맥 매카시의 묵시론적인 소설 <로드>
2008년 주노 디아스의 <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에 이어
2009년 퓰리처상 수상한 엘리지베스 스트라우트의 세번째 소설 <올리브 키터리지>
퓰리처 상은 미국인 작가에 의해 쓰여진 작품 중
미국적 삶을 다룬 작품에 수여되는 상이다.
<로드>나 <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을 읽으면서는
미국적 삶이라는 부분에 고개를 갸우뚱했는데
이번 소설은 이해가 됐다.
사실은.... 꼭 미국적 삶뿐만은 아니다.
어쩌면 내 이야기, 우리네 가족사와 동일할지도 모르겠다.
누군가는 말했다.
"읽기는 쉽고 잊기는 어려운 소설" 이라고...
평범한 일상의 에피소드들,
그러나 그걸 에피소드라는 한 단어로 몰아넣기에는 어쩐지 미안하다.
사소한 일상을 어느날 꼼꼼히 들여다보면
의외로 그 곳에서 뜻밖의 일들과 숨겨진 진실을 찾을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올리브 키터리지"라는 이름을 살짝 우리 엄마나 할머니 이름으로 바꿔도 하나도 이상할 것 없는 일상.
그 일상의 단편들이 내내 가슴에 담긴다.
참 별 일도 아닌데...



미국 뉴일글랜드 지역 해변 마을.
여기에 한 가족이 살고 있다.
수학교사인 올리브 키터리지와 그녀의 남편 헨리 키터리지.
족부의학 전문의인 아들 크리스토퍼 키터리지.
그리고 그 주변에 함께 살아가는 이웃들.
가족과 이웃 이야기에 따뜻함을 느끼게 된다는 건,
그만큼 내가 외로워서일까? 아니면 이것도 일종의 향수일까?
하나하나의 일상이 어쩌면 그렇게 우리네 모습과 똑같은지 읽으면서 많이 웃었다.
비밀스럽게 소근대는 뒷담화같은 지인과의 대화가 있고.
함께 이웃하며 살거라 여겼던 아들은 결혼과 동시에 멀리 이사를 가버리고
(그래서 아들은 키워봤자 아무 소용 없다고 하는가 보다. 서양이든, 동양이든... ^^)
재혼한 아들의 집을 찾은 엄마는 마음과 다르게 아들과 다투고.
남편과는 의외의 장소(병원)에서 과거 일 때문에 싸우고...
그 남편은 또 어느날 뇌졸증으로 쓰러져 요양원으로 들어가고 ...
심난한가?
결코 그렇지 않다.
13편의 일상은 절묘하게 내 일상과도 거의 완벽하게 닮아있다.
어쩐지 안도감이 생긴다.
내가 평범한 인간이라는 걸 인증받은 것 같아서...



어쩌면 나도 더 나이를 먹게 되면 그럴지도 모르겠다.
약속을 잡을 땐 일부러 점심이 아닌 저녁 시간으로 잡으려 할지도.
점심은 헤어지고 나면 아직 하루가 많이 남지만
저녁약속이 있으면 종일 고대하게 된단다.
은퇴하고 홀로 남은 사람에겐 어쩌면 누군가와의 사소한 한끼 식사 약속이
가장 절실하고 소중한 이벤트로 다가올 수밖에 없는지도...
일상이라는 너무나 평범한 시간들.
그러나 이 책은 이런 일상이 결코 쉬은 삶은 아니라고 말한다.
책의 마지막에 변역가 권상미도 한 마디 보탠다.
일상을 소중하게 생각은 하지만
그걸 존중해야 겠다고는 한 번도 생각한 적이 없었노라고...

속으로 뜨끔했었다.
사실 퓰리처상이라는 수식어엔 별 감흥이 없었지만
평범한 일상을 이렇게 보석같이 만들어 낸 재능엔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엘리자베스 스투라우트!
어쩌자고 날 꿈꾸게 만드는가!
...... 작가가 되겠다면 포기하지 말며,
포기할 수 있다면 포기하되,
포기할 수 없다면 계속 글을 쓰고,
좋아하는 작가들의 작품을 필사하며
습작을 게을리 하지 말라 ......

그녀는 42살에 첫 장편 <에이미와 이사벨>을 발표했고
아직까지도 육필 원고를 고집하는 조금은 고루한 사람이다.
처음 읽은 소설이었지만 자꾸 우리나라 "박완서"와 겹쳐진다.
작가 박완서가 쓴 일상 역시도 얼마나 활홀하고 정직하더냐.
묘하게도 이 두 사람에게선
세월의 연륜과 깊이와 함께 파릇파릇한 새싹에게서나 느껴질 참신함까지 철철 넘친다.
이 두 세계가 공존할 수 있다는 사실에
지금 마냥 신비로워 하는 중이다.
내게는 지금 이 느낌이 시크릿 가든이다. ^^
Posted by Book끄-Book끄
달동네 책거리2010. 8. 31. 05:55

<The Road> - 코맥 매카시

로드(THE ROAD)

“미국 현지에서 감히 <성서>에 비견되었던 소설”
이런 광고와 함께 2008년 6월 우리나라를 그야말로 강타했던 소설입니다.
<The Road>
책의 첫 페이지부터 마지막 페이지까지 일관성(?)있게 계속 길 위를 떠도는 (도저히 목적지가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이유는...) 내용입니다.
어쩌면 우리나라 정서와는 어울리지 않는 내용이기에 이해가 어려운 부분도 있고 심지어는 거부감마저도 느껴질 수 있는 그런 소설입니다.
글쎄요... 개인적으로는 왜 이 소설이 성서에 비교되고 있는 건지 납득은 잘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사실은 독특한 메시지를 준고 있다는 사실이죠.
“인류 대제앙에서 살아남은 사람들... 그 묵시론적 이야기”... 이 책에 대한 평들의 대부분을 장식하는 해드라인 문구입니다.
하지만 그것도 제에게 설득력이 좀 없어 보입니다.(또 저의 찌질한 이해력 부족이 그 밑바닥에 깔려있긴 하겠지만요)
그들이 살아남은 유일한 사람도 아니고, 그리고 이 책엔 어떤 묵시론적인 암시나 계시 혹은 계명 같은 것들은 등장하지도 않습니다.
폐허와 추위의 땅 위에서 살아남는 10가지 방법쯤을 알려주는 길 위의 삶을 다룬 실용서는 더더욱 아닙니다.
주인공인 남자와 소년은 "불을 운반하는 사람"이라는 상징적인 의미의 존재입니다.
불이라… 인류의 문명이 시작이 불에서 비롯됐던가요?
그렇다면 그들을 계속 걷게 만들었던 건 다시 꽃피워야 할 새로운 문명에 대한 책임감이었을까요? 아니면 모든 회복의 근본이어야 할 선한 인간성 회복이었을까요? 그것도 아니면 항상 무엇인가의 완벽한 해답인 사랑? 아니면 판도라의 상자에 마지막으로 남았던 절망을 이겨낼 희망?
어쩌면 그 모든 것 다 일 수도 있고, 전혀 다른 어떤 것일 수도 있습니다.
(당신이 느끼는 바로 그것일 수도 물론 있죠)

일단 이 책에 나오는 사람들의 특징은 익명성에 있다 하겠습니다.
남자, 소년, 사내, 노인, 여자….
그 누구도 구체적인 이름이나 심지어는 형체조차도 소유하지 않기도 하죠.
마치 현대인처럼요…(혹시 난 이름이 있는데…. 라고 말하고 싶으신가요????)
어쩌면 불탄 거리에 꽂혀 있는 반쯤 타버린 인간 미라들과 주인공들이 서로 다르지 않음을 말하고 싶었던 건 아니었을까요?
살아남음의 이유가 어떤 목적과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우연 내지는 일종의 눈속임 같은 건 혹 아닐지…
실제로 이들이 살아 있는 사람들이라고 누가 감히 이야기 할 수 있을까요? 
이 책의 주인공들.
그들이 실제 "부자지간"인지도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마치 어린 신을 모시고 길에 떠나는 제자의 느낌이라고 할까요? 물론 그 신의 어깨 위엔 반드시 인류 구원이라는 대전제가 걸려 있어야 하겠죠!!
그런 점에선 확실히 성경의 모티브가 느껴지긴 합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모르지만 주인공들이 있는 지금 이 세계는 불의 재앙으로 거의 모든 인류와 세상이 멸종 상태에 있습니다.
아직 뜨거운 재앙이 열기가 채 식지 않은 이곳에서 그들은 필사적으로 음식을 구하며 방수포에 의지하여 추위를 견디며 남쪽으로 남쪽으로 낡은 쇼핑 카트를 끌고 이동하고 있습니다.
이 모습만 떠올린다면 참 코믹하고 우수운 비주얼이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두 주인공의 선문답에 가까운 단답형의 대화.
그들의 대화는 지금 그들이 처한 환경만큼이나 미약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렬한 생명의 숨결이 느껴져 차라리 비장하기까지 합니다.
잠시 찾았던 완벽한 환경의 은신처마저도 그들은 버려야 했고 또 다시 굶주림과 추위의 땅으로 마른 몸과 낡은 카트를 끌고 들어섭니다. 늘 그랬듯이…
이젠 슬슬 제 몸도 피곤해지기 시작합니다.
때론 이런 환경에 영 어울리지 않는 아이의 동정심에 제가 다 화를 내면서 몇 개 남지 않은 깡통이 마치 내 것인냥 움켜쥐며 눈에 핏발을 세우고 있는 제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책의 표현처럼 순간 제가 "좀비"가 된 듯한 느낌이죠.
이제 어떻게 살아남아야 하는 걸까요?
"인간이 살 수 없는 곳에서는 신도 살 수도 없다"고 말하는 그곳, 아니 이곳에서요.
지금 내 세상에서 "재앙"이란 어떤 형태일까요?
그 "재앙"을 뚫고 우리는 꼭 뭔가를 남겨야만 하는 걸까요?
소년은 어느 순간 묻습니다.
"아빠! 우리는 지금도 좋은 사람들인가요?"

남자는 소년을 남기고 이제 눈을 감으려 합니다.
그는 소년에게 남쪽으로 계속 가라고 말합니다.
소년은 잠시 길 위에서 마주쳤던 작은 아이를 떠올리며 묻습니다.
"하지만 길을 잃으면 누가 찾아주죠? 누가 그 아이를 찾아요?"
남자가 마지막 말을 합니다.
"선(善)이 꼬마를 찾을 거야. 언제나 그랬어. 앞으로도 그럴 거고…."
아빠라는 남자를 잃은 소년은 또 다른 남자를 만납니다.
함께 가자고 말하는 남자에게 소년은 말합니다.
"아저씨가 좋은 사람이란 걸 어떻게 알 수 있죠?"
남자는 말합니다.
"알 수 없지. 그냥 운에 맡겨야지, 뭐"
길을 잃은 소년의 앞에 나타난 남자는 꼬마를 찾아온 선(善)이었을까요?
만약 그 질문이 당신에게 주어진다면 뭐라고 말하고 싶으세요?

* 이상하게도 불편한 책들을 많이 읽고 좋아하게 됩니다.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일게 되는 건 그 불편함이 주는 즐거움과 의미 때문일겁니다.
   이 책을 읽다 보면 자꾸 또 다른 불편한 작가 주제 사라마구의 <눈 먼 자들의 도시>를 어쩔 수 없이 떠올리게 
   됩니다.
   책 표지를 다시 살펴봤죠.
   역시나 주제 사라마구의 책을 번역했던 정영목의 번역작이네요.
   이 책의 마지막 4페이지는 옮긴이의 말이 실려 있습니다.
   이 부분도 꼭 읽어보라고 권해드리고 싶네요.
   번역가의 작가에 대한 애정과 작품에 대한 믿음을 느낄 수 있는 부분입니다.
   "코맥 매카시"에 대해 어쩌면 더 잘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

Posted by Book끄-Book끄
달동네 책거리2010. 8. 6. 08:33

<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 - 주노 디아스

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

책을 읽고 주노 디아스(Junot Diaz)라는 작가가 너무나 궁금해졌습니다.
1968년 도미니카 산토도밍고 출생, 1974년 가족과 함께 아메리카 드림을 꿈꾸며 미국으로 이민, 뉴저지에서 생활, 엄청난 독서광인 영문학 전공자, 1996년 첫 단편 소설집 <Drown> 발표. 엄청난 호평을 받으며 1999년 “21세기를 빛낼 최고의 작가 20인”에 선정.
그리고 길고 긴 11년 동안의 침묵.
2007년 첫 장편 소설 <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 발표.
이 책으로 또 다시 미국의 온갖 문학상을 휩쓸어버린 사람.
2007년도 고맥 매카시의 <로드>가 플리처상을 수상했을 때 비평가들은 말했다고 합니다. 앞으로 <로드>를 넘어설 만한 소설은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그러나 2008년 이 작품을 최종 선정작으로 결정하면서 그들은 자신들의 결정을 다시 번복하게 됩니다.
현재까지만 30개국에 판권이 팔렸으며 영화로까지 만들어 지고 있는 이 책.
도대체 어떤 내용이기에 한갓 가난한 나라의 도미니카계 이민자에 불과한 주노 디아스의 책이 미국 전역에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켰을까요?
센세이션...
이 책의 모든 내용은 확실히 센세이션 합니다.
책의 번역자는 말합니다.
“도발적인, 관능적인, 정치적인 그리고 눈물 나게 우습고도 감동적인” 이야기라고.
하나의 소설 안에 이 모든 수식어를 전부 적용시킬 수 있다는 게 과연 가능할까요?
대하소설도 하닌 달랑 한 권 분량의 책에...

이 책에는 미국에 정착한 도미니카계 이민자 데 레온 가족이 나옵니다.
그리고 “푸쿠”라고 불리는 일종의 저주로 대변되는 단어가 나오죠.
언제나, 어디에나 존재하면서 지금도 여전히 힘을 발휘하는, 누군가의 삶에, 운명에 저주를 퍼붓는 “푸쿠”는 유럽인의 라틴아메리카 침략과 함께 이 땅에 발을 들인 신세계의 파멸과 저주를 뜻한다고 합니다.
이 소설은 3대에 걸쳐 데 레온 가문에 이어진 오랜 저주 “푸쿠”에 맞서 인생을 지켜낸 한 남자 오스카 와오의 삶을 그리고 있습니다. 책의 제목처럼 “짧고 놀라운 삶”을 말이죠.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사람은 그러나 데 레온 가문의 사람이 아닌 한때 오스카의 누나 롤라의 남자친구였던 유니오르라는 사람입니다.
자, 그렇다면 이 이야기는 또 어느 정도의 객관성을 유지하겠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겠네요.
이 소설은 한 집안의 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뛰어 넘어 식민지 작은 나라가 갖는 생존에 대한 절실함이자 군부 독재의 완벽한 철권통치에 홀로 맞서는 이야기이며, 현대 미국의 대중문화를 향해 “너더리(넌더리)”라며 과감하게 비꼬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동시에 믿기지 않는 사랑 이야기이기도 하죠.
누군가는 말합니다.
“...... 잠시 고민하다, 우리는 이것을 ‘인생'이라 부르기로 했다...... ”

데 레온 가문의 첫 번째 “푸쿠”는 할아버지인 아벨라르 세대의 “트루히요”라는 도미니카 독재자였습니다.
트루히요는 실제 인물로 도미니카 공화국에 전에 없는 평화와 번영을 안겨준 대통령이었습니다. 그러나 국민들은 그 번영의 대가로 자신들의 시민적, 정치적인 자유를 희생해야만 했죠. 독재정치가 무서운 건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채워지지 않는 “탐욕”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트루히요도 그랬죠. 탐욕으로 인해 불공정 분배가 시작되고, 그것을 은폐하고 가리기 위해 수많은 정적들을 이유 없이 처단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다 군부의 지지를 잃기 시작하죠.
어디서 많이 보던 스토리 아닌가요? 우리가 실제 겪었던 스토리 결말처럼 트루히요도 농장으로 차를 몰고 가다 기관총 사격으로 암살을 당하게 됩니다.
어떤 생각이 드나요?
우리와 전혀 다른 나라에서 우리나라와 똑같은 현대사를 본다는 거.
사람들은 말합니다. 사는 건 전부 다 똑같은 거라고...
어쩌면 이 말은 정말 진리이고 진실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두 번째 “푸쿠”는 오스카 어머니의 인생을 덮칩니다.
외과 의사였던 아버지, 그리고 간호사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벨리. 그녀는 유일하게 살아남은 데 레온 가문의 핏줄이기도 합니다.
난봉꾼이었던 대통령 트루히요에게서 재능과 미모를 겸비한 두 딸을 지키기 위한 아벨라르의 노력은 결국 국가원수 중상 및 모독죄라는 결과로 그의 인생과 가문 전부를 초토화시킵니다. 재산은 몰수되고 자식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아벨라르 자신도 고문으로 인해 식물인간으로 감옥에서 생을 마감합니다. 그의 아내는 제 정신이 아닌 상태로 막내 딸 벨리를 낳고 스스로 자동차에 몸을 던지죠. 아벨라르가 그렇게 지키기 위해 노력했던 딸들마저도 모두 결국은 죽음에 이릅니다.
그렇게 모든 몰락과 추락을 겪고 살아남은 데 레온 가문의 유일한 혈육 벨리의 “푸쿠”는 남자였습니다.
그녀의 육체는 만신창이가 되어 버렸고 결국 모든 희망을 버린 채 뉴욕으로 떠나죠.
그녀에게 새로운 인생, "푸쿠“의 저주를 이기는 ”사파“의 인생이 열리게 될까요?

데 레온 가문의 세 번째 “푸쿠”는 우리의 주인공인 140kg 거구의 남자 오스카에게 찾아옵니다.
성적 매력을 유산처럼 물려받는 도미니카의 전형적인 남성들과 달리 오스카에겐 실수로도 먼저 말을 걸어오는 여자조차 전혀 없습니다.
학교 다닐 때는 유색인종에 뚱뚱한 몸으로 인해 조롱을 받았고, 교사가 된 지금도 그 상황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단지 학생일때는 같은 나이의 동료에게서 였는데 이제 나이 어린 제자들로 그 상대가 달라진 것만이 유일한 차이일 뿐이죠.
변함없이 형편없는 그의 삶 속에 그녀 “이본”이 말을 걸어옵니다.
오스카 인생 전체에서 처음으로 말을 건 여자의 등장이네요.
“이본”이라는 여자는 오스카에 비해 한참 연상인데다 반 은퇴한 창녀였죠. 게다가 소위 기둥서방이라고 불리는 경찰 애인까지 있습니다.
여기까지 읽은 분들은 그렇고 그런 이야기를 상상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렇고 그런 이야기의 결말에 3대에 걸쳐 내려온 이 집안의 모든 “푸쿠”의 저주가 송두리째 사라져 버립니다.
이상하죠?
어느 틈에 오스카에게 위로받고 있는 제 모습을 발견합니다.
 
삶에는 미신과도 같은 저주를 불러오는 “푸쿠”만 있는 게 아니라고 작가는 말합니다.
사람을 살아 있게 만드는 무엇, 저주를 피하고 “푸쿠”에 대항하는 역주문인 “사파”도 있다고 말해주죠. 그러니 사람이 산다는 건 결국 모두 “사파”인 셈인가요?
이 책을 읽고 있으면 참 묘한 감정에 쌓이게 됩니다.
순서 없이 아무렇게나 벌려놓은 벼룩시장 좌판을 보는 것도 같고, 아주 정확하고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는 백과사전을 들여다보는 느낌도 듭니다.
재미있으면서도 지독히 지적인 책!
뜨거운 불판을 들고 얼음장 위에 서 있는 느낌이라고 할까요?
이야기가 아니라 모든 역사를 읽고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이런 류의 책은...
소위 궁합이 잘 맞는 사람에겐 스파크가 제대로 튀게 만들죠.
그러니까 이 책은 저와 상당히 궁합이 잘 맞는 책이었습니다.
문득 타인의 마음이 궁금해지는 것도 어쩔 수 없네요.
당신이 이 책을 읽게 된다면
이 책은 당신에게 “푸쿠”가 될까요? 아니면 “사파”가 될까요?

Posted by Book끄-Book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