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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12.31 달동네 책거리 18 : <멋진 신세계>
  2. 2008.12.28 달동네 책거리 17 : <눈먼 자들의 도시>
달동네 책거리2008. 12. 31. 06:30

<멋진 신세계> -  올더스 헉슬리

 

멋진 신세계


지난주에 이상하게도 제가 읽은 책들 속에서 오래 전에 읽었던 이 책을 여러 번 만났습니다.(기억에 무려 3번씩이나...)

참 신기하죠? (아마도 제게 또 말을 걸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예전에 이 책을 읽었을 때 맨 처음 느꼈던 건, 올더스 헉슬리는 천재라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세상에 나오는 모든 미래소설과, 미래영화는 모두 이 책에 경의를 표해야 한다고 저 역시도 생각합니다.

이 책이요... 1932년 발표된 소설입니다.

그런데 지금 읽어도 대단하다 싶을 만큼 완벽하게 미스터리한 미래적(?)인 글이고 그리고 그만큼 대단히 매력적인 글입니다.(적어도 저에겐)

이런 글을 1930년대 쓸 수 있었던 사람이라면 과히 평범하고 순탄하지 않게 살았으리라 짐작하게 됩니다. 이 사람의 사망일조차도 존. F. 케너디의 사망일과 같은 날이라 그의 명성에 비해 사망의 기사는 묻혀 버렸다고 하네요.

이 사람은 영화, 그것도 SF 영화를 만드는 사람에게는 위대한 꿈의 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터미네이터>, <블레이드 러너>, <데몰리션 맨>, <에일리언>, <AI>, 심지어 <X맨>을 비롯한 지금 세상에 나와 있는 온갖 “맨”들에 이르기까지 이 소설의 영향을 받지 않은 영화는 거의 없다고 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리들리 스콧 감독은 지난 20여년 동안 이 소설의 영화 판권을 따내기 위해 그렇게 고분분투했다고 하는데 드디어 판권을 따내 차기작으로 지금 비밀리에 준비하고 있다는 소문도 들리고 있을 만큼 이 책의 내용은 영화인에게도 꿈, 그 자체의 작품이죠.

사실 저도 무척이나 기대하고 있답니다.

최고의 SF 영화 <블레이드 러너>를 아주 인상 깊게 봤었거든요.

이 영화는 개봉 당시 너무 앞서가는 내용이라 흥행에 성공하지 못했다가 몇 년이 지난 뒤 마니아들의 성원에 의해 재편집의 과정을 거쳐 재개봉하는 이변을 만들어 내기까지 했습니다.

인디아나 존스로 지금은 너무도 유명해진 “헤리슨 포드”가 주연(무척 젊은 시절의 그를 만날 수 있습니다)이었던 인간과 인조인간과의 사투, 그리고 사랑...(절대로 절대로 공상과학적이지 않습니다. 게다가 아름답고 슬프기까지 합니다) 심지어 과히 충격적인 영상과 내용이 아직까지 제 기억에 살아있습니다.

전 원편과 재개봉된 두 편을 모두 봤습니다.

음.... 좋았습니다. 신기했고 그리고 두려웠습니다.

또 다른 형태의 공포심을 느끼게 하는 영화였죠.


올더스 헉슬리...

영국의 소설가이자 평론가인 헉슬리는 해박한 지식(제가 꿈꾸는 유토피아적인 인간의 모습이죠^^)과 날카로운 위트, 명석하고 지적인 문체로 유명한 작가입니다. 현실의 다양한 가치가 혼돈 속에서 인간 존재 자체를 완전 분해, 해체하는 과정을 실험적으로 작품 속에서 보여 주고 있다는 평가를 받았던 사람입니다.(천재 확실하죠?)

모든 세계가 철저히 계획되고, 삶 자체가 공장에서 찍어내듯 공산품화 되어 규격화 되어 있다면...

그 세계에서 정해진 계급 하에 배양되듯 인간이 탄생되고 길러지고 있다면...

그리고 그게 자신의 위치인 냥 말없이 그대로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인간들을 보게 된다면...


여기,

어느 누구도 불행하지 않은 시대가 있습니다.

이곳에는 아픔이나 배고픔 같은 육체적인 고통뿐만 아니라 외로움이나 슬픔 같은 정신적인 고통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어느 것 하나 부족하지 않고 원하는 모두와 사랑을 나눌 수 있는 곳, 죽음마저 감미로운 멋진 신세계.

이곳에서 태어나는 사람들은 알파, 베타, 감마, 델타 그리고 엡실론까지 다섯 가지 계급으로 나뉘어 시험관 안에서 자기 계급에 맞게 배양되어 태어납니다.

필요에 의해서 똑같은 일을 하도록 만들어진 수십 명의 쌍둥이들. 그들은 정해진 운명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사회에 순종하면서 자신의 현재 위치가 다른 누구보다도 행복하다고 느끼도록 교육받았고 실제 그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태어나기 전부터 수면학습이나 전기 자극 등을 통해 몇 백 번씩 반복하여 학습된 그 내용 그대로요.

어떤 의미에선 그들은 완벽한 유토피아적인 시대를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부모란 상스러운 단어이며 사랑이란 해서는 안 되는 금지된 행위인 이 멋진 신세계.

이곳에 세 명의 다른 사람이 있습니다.

알파계급으로 태어났지만 태아과정 중 하층계급의 실수로 열등한 체형이 된 '버나드'.

알파계급에서 유난히 지적능력이 뛰어나게 된 '엘름홀츠'.

그리고 야만인 세상에서 어머니와 함께 이 곳으로 온 '존'.

다른 사람들과 달랐기에 그래서 그들과 어울릴 수 없었던 세 사람.

결국 셋은 뿔뿔이 흩어져 각자에게 맞는 지역으로 추방을 당하게 됩니다..

심지어 존은 자신이 불행해질 수 있는 권리를 찾기 위해 노력하기까지 합니다.

불행해질 권리라......

그러나 그런 자유마저도 허용 받지 못한 존이 최후에 선택한 자유는 자살이라는 극단이었습니다.

그것만이 유일하게 그 스스로가 할 수 있는 자유의지였기에...

고통 속에서도 행복을 찾길 원했던 유일한 “인간” 존의 마지막 자유의지...

불행해질 권리마저도 거부당한 존의 세상을 향한 마지막 몸짓이 과연 그의 영혼에 평온한 자유를 안겨 줄 수 있었을까요?

그의 죽음이 무의미했다고 누가 감히 이야기 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모두 유토피아를 꿈꿉니다. 현실적인 유토피아든, 생각의 유토피아든 말이죠.

모든 이들이 행복을 누리는 사회, 아니 그게 아니라도 나 혼자만이라도 행복을 느끼겠다는  그런 극단적인 이기주의 유토피아일지라도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꿈꾸게 됩니다.

비록 유토피아가 환상과 거짓으로 버무려진 한 순간의 신기루에 불과하다 할지라도요.

그게 다름 아닌 내가 꿈꾸는 것이기에 세상 그 무엇보다 절실하며 현실적일 수 있는 거죠.


이 소설은 포드사가 T형 자동차를 생산해낸 1908년을 기원 1년으로 하여 AF 632년 즉 AD 2540년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 세계에서 포드는 기독교의 예수와 같은 존재이기도 하죠. 마치 종말론에 복종하는 사이비 종교 같은 느낌마저 드는 것도 딱 지금의 모습과 다르지 않습니다.

십자가의 가장 윗부분을 뺀 T를 형상화하고 예배시간엔 “곧 오실 그분의 강림을 위하여” 성배를 들고, “우리가 죽으면 보다 큰 삶이 시작된다”는 영생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 또한 현재의 사이비 종교의 그것들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1932년 그 시대에 이런 글을 쓸 수 있었다는 거...

물론 작가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미래사회의 한 단면을 예측한 이야기이긴 하지만 일부는 이미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현대의 모습이 그대로 적나라하고 보여주고 있는 것 같아 섬뜩함마저 느끼게 됩니다. 열 가지 우울병을 치료한다는 소마는 고통을 피하기 위해 마약에 취해 쾌락으로 도망치는 현재의 모습과도 판막이죠.


생명공학 기술의 발달은 놀라운 속도로 인간 복제 기술을 현실화하고 있습니다.

질 좋은 난자가 거액에 매매되고 복제인간 탄생도 현실로 이루어지고 있는 지금, (실제로 어딘가에서 복제된 인간이 살고 있을 것만 같다는 생각이.....)

그 실험이 계속 진화(?)하게 되면 언젠가 알파계급이 독점적 위치를 누리기 위해 수백만명의 일란성 쌍생아로 이루어진 보카노프스키 계급을 만들어 낼지도 혹 모르겠습니다.

그런 세계가 만약 당신의 현실이라면....

당신은 뭐라고 이름 붙이고 싶으신가요?

혹시.... <멋진 신세계>...

우리는 이런 세계를 정말 꿈꾸고 있는 건 아닐까요????

혹 아니라면....

조심하세요.

돌연변이를 제거하기 위해 당신 등 뒤에 누군가 서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Posted by Book끄-Book끄
달동네 책거리2008. 12. 28. 19:38

<눈먼 자들의 도시> - 주제 사라마구




인간의 공포심과 잔혹함, 그 인간성의 바닥을 들여다보게 만드는 책입니다.

단언컨대, 제가 아는 최고의 공포소설입니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보다도 더 공포스럽게 다가오죠. 헉슬리가 말한 세계는 그래도 SF적인 요소가 있어 “에이 설마...”하는 마음을 갖게 하는데 이 소설은 그냥 그 자체가 정말 너무나 현실로 다가와 사람을 섬뜩하게 만듭니다.

3년 전이네요.

“주제 사라마구”라는 작가를 알게 된 게...

처음 친구에게서 이 사람의 이름을 들었을 때, 일본 사람인가? 했더랬습니다.

1922년 포르투갈 출생으로 아직까지 건장하게 활동하고 있는 몇 안 되는 대가 중의 한 분입니다. 1998년 95번째 노벨 문학상 수상자이기도 하구요.

2008년에도 자국에서 <작은 기억들>이라는 제목의 책을 출판했네요. 90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끊임없이 작품을 써내려가고 있는 그가 사실 더 공포스럽긴 합니다.

지난달 드디어 이 원작을 토대로 영화가 만들어지기도 했죠.

감독 페르난도 메이렐러스는 원작을 조금도 훼손시키지 않고 그대로 살리기 위해 최대한 노력했다고 하네요.

그는 주제 사라마구 단 한 사람을 위해 포르투갈로 직접 날아가 특별 시사회를 열기도 했습니다. 영화가 끝난 후, 주제 사라마구가 오랫동안 조용히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동영상을 통해 우연히 보게 됐는데 제 가슴까지 찡해졌었습니다.

대가에 대한 깊은 헌사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이 작품이 영화화 된다고 했을 때, 정말 가능해? 라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어떻게 만들겠다는 거지?

설마 원작에 상처를 주게 되는 건 아닐까?

특별한 느낌을 갖게 한 책에 대한 걱정과 우려. 그리고 그냥 책으로 남겨두면 안 되나...하는 개인적인 바램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결론은 정말 괜찮은 영화가 만들어졌더라구요...

(저, 개봉하는 날 냉큼 달려가 봤습니다. ^^)


주제 사라마구의 작품은 읽은 이를 긴장하게 만들기로 유명합니다.

소설 속에 쓰이는 문장 부호도 오로지 마침표와 쉼표뿐입니다. 대화나 독백 같은 대사조차 따로 구분해서 쓰지 않고 그대로 계속 문장 안에 포함시켜 버리죠. 그래서 처음엔 당혹스런 느낌마저 갖게 됩니다.

익숙하지 않은 것들은 만날 때 느끼는 불편감이라고 할까요?

지금은...

그러한 문단 자체가 작가의 의도를 해석하는 하나의 포인터였다는 걸 이해하게 됐습니다.

그의 글을 읽을 때 긴장하지 않고 읽는다면 아마도 대번에 책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기 쉬울 겁니다.

읽는 사람의 몸도 마음도 송두리째 몰입도록 이끌기에 그의 이름 앞에 대가라는 수식어가 붙게 된 건 아닐지......(솔직히 작가에게 끌려 다니는 것도 등장인물들에게 끌려 다니는 것  만큼이나 상당히 매력적입니다)


어느 날,

사람들이 하나 둘씩 아무 이유도 없이 눈이 멀게 됩니다.

“백색 공포”가 도시 전체를 뒤덮게 되죠.

정부는 급기야 그 사람들을 따로 격리하고 관리하기로 결정합니다.

여기에 눈이 멀지 않은 한 여자가 있습니다. 그 여자는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을 겁니다. 어차피 나도 곧 남편처럼 감염될 테니까......

이곳에서 여자는 눈이 먼 사람들의 모든 눈이 되어 생활합니다.

도무지 약자와 강자가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상황에서도 인간의 탐욕은 장하게도 강자와 약자의 권력을 명확히(?) 분리해냅니다. 게다가 어떠한 저항도 하지 못한 체 새로운 권력이 휘두르는 잣대에 그대로 따르게까지 되죠.

“먹을 것을 원한다면 당신들의 여자를 바쳐라”... 도대체 이런 상황에 성이라는 요소가 끼어들 자리가 과연 있는 걸까요? 그런데 정답은 어이없게도 “그렇다!”는 사실입니다.

눈 먼 남편들은, 애인들은 그들의 눈 먼 여자들을 줄 세워 보냅니다.

그리고 눈 먼 그녀들이 몸으로 얻어 온 음식물을 그들의 목 안으로 삼키죠.

아마도 그 순간, 그 곳의 사람들은 그들의 눈에 이어 그들의 입(말)조차도 잃은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슬아슬하게 유지됐던 균형감이 왠지 깨지는 소리가 들리네요.

상황이든, 사람이든, 뭐든 달라지겠구나 하는 예감...

예감은 적중합니다.

수용소에 불이 나고 눈 먼 사람들은 거리로 쏟아집니다.

아무도 그들을 제지하지도 돌아가라고 명령하지도 않습니다.

이미 그들 세상 모두가 “백색 공포”에 감염된 상태였으니까요.

거리는 온통 끔찍한 형상으로 변해 있습니다. 아무도 보지 않기에 대소변을 아무 곳에서나 보고. 질서는 무너지고 도시는 쓰레기와 똥, 오줌으로 뒤덮입니다.

차라리 인류 심판의 날처럼 느껴지기까지 하네요.

행렬이라는 거, 줄이라는 거, 이 책에서는 마치 생명줄의 연장선처럼 보입니다.

단 한 명의 눈에 의지해 서로의 어깨를 잡고 함께 걸어가는 사람들.

그들에게 세상을 사는 방법은 단 사람에 의지해서이고, 그들의 생명도 또한 단 한 사람에 의해서만 계속 이어질 수 있습니다.

그들에겐 절대자, 즉 구세주가 되는 셈이죠.

눈 먼 무리들을 이끌고 자신의 집으로 돌아온 그녀는 그들을 위해 먹을 것을 구해오고 더러운 몸을 씻기고, 옷을 세탁합니다.

힘들었겠죠, 지치고 그리고 그만두고 싶지 않았을까요? 아마도 그녀는...


이유 없이 눈이 멀었던 것처럼,

다시 이유 없이 한 사람씩 시력을 회복하게 됩니다.

읽는 사람도 공황 상태로 몰고 갈 만큼 갑작스런 상황이라 조금 당혹스럽기까지 합니다.

눈이 보이게 된 사람들 중간에 서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던 그녀는 눈이 일시적으로 하얗게 보이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갑작스런 공포로 이제 내 차례인가 중얼거리는 그녀의 눈 속에 도시는 다행히 그 모습 그대로 보여집니다.

이 모든 끔찍한 것들을 오로지 혼자서만 보고 경험한 그녀가 말합니다.

...... 나는 우리가 눈이 멀었다가 다시 보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나는 우리가 처음부터 눈이 멀었고, 지금도 눈이 멀었다고 생각해요. 눈은 멀었지만 본다는 건가. 볼 수는 있지만 보지 않는 눈 먼 사람들이라는 거죠......

그녀가 말하고 싶었던 건...

그들의 눈을 멀게 만든 그들 내부에 있는 이름 없는 뭔가에 대해서였을 겁니다.

그 뭔가는 바로 우리 자신이죠.

다행히 그들은, 아니 우리는 회복됐습니다.

그러나 누군들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요?

다시는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을 거라고......

 

Posted by Book끄-Book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