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끄적 끄적...2010. 12. 17. 05:50
기사를 기억한다.
2009년 2월 9일 성균관대학고 600주년 기념관에서
심환지에게 보낸 정조의 어찰 297통이 공개됐다는 기사를.
그때는 임금이 신하한테 보낸 편지가 뭐 그리 특별하다고...하면서 자세히 읽지 않았었다.
지극히 편애하는 정조와 관련된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조어찰첩(正祖御札帖)
흩어져 있는 것까지 합치면 모두 350편이나 되는 방대한 양의 편지다.
그것도 정조와 대립했던 인물로 알려진 노론 벽파의 핵심 인물 심환지 한 사람에게만 보낸 비밀편지.
정조는 편지에서도 폐기하라고 몇 번씩 명령했으나
심환지는 어떤 이유에선지 왕명을 거슬리고 이 편지들을 보존했다.
편지를 받은 날짜과 시각까지 따로 세세히 기록하면서까지... 
정조 독살의 주도자로 알려진 심환지에게 정조가 그토록 많은 비밀편지를 보낸 이유는 뭘까?
그리고 심환지 역시 폐기를 명령한 편지를 온전히 보존한 이유는 뭘까?
시작부터 이 책은 내 흥미를 완벽하게 잡아 끌었다.



동일한 사건에 대해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같은 공식적인 사료와
정조가 심환지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과는 사뭇 많이  다르다.
정조는 심환지를 조종하여 자신의 정치적 의도를 관철시키거나 사건에 대한 자신의 속내를 드러낸다.
실제로 심환지를 비롯한 많은 대신들의 상소문이
사실은 정조의 지시에 의해 올려졌다는 사실도 편지를 통해 알 수 있다.
정조는 여론을 청취하고 정보를 수집하는 하나의 수단으로
이런 편지들을 이용했는데 이 편지들은 비밀스럽게 오고갔으며 
완벽히 폐쇄적인 형태의 의사소통이기도 했다.
(아마도 계산된 정치적 의도가 아니었을까?)
학구적인 성군으로 알려진 정조는 의외로 어찰에서는 거친 표현을 사용하기도 했다. 
김매순에 대해선 "입에서 젖비린내 나고 미처 사람 꼴을 갖추지 못한 놈"이라고  표현했고
김이영을 향해선 "경박하고 어지러워 동서도 분간 못 하는 놈"이란 평가를 내렸다.
또 어용겸의 자제들에게는 "개돼지보다 못한 물건"이라는
상당히 걸죽한 표현도 마다하지 않았다.
(정말 새로운 정조의 모습을 이 책을 통해 많이 봤다.)
또 주둥아리를 놀린다든가, 호로자식이라는 욕설이라고 할 수 있는 표현까지도 서슴치않고 사용했다.
한 나라의 국왕쯤 되면 항상 격있는 문장으로만 편지를 썼을 것 같은 내 생각과는 다르게
정조는 이두문자와 한글까지도 함께 혼용해서 사용했다.
(아래 사진의 어찰을 자세히 보면 한글이 보일 거다. "뒤쥭박쥭"이라는....)
이 사람이 문예반정을 추진한 그 정조가 맞나 싶을 만큼 새로운 발견이다.
자신이 비판했던 소품문의 문체를 그대로 비밀편지에 사용한 정조!
개인적으로 반전도 이런 반전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도 편지를 쓰면서 혼자서 껄껄 웃지 않았을까?)



...... 정조는 개혁을 추진한 학자풍 군주로서, 조선 전기의 세종과 더불어 성군 이미지로 한국인에게 각인되어 있다. 그런 정조가 보낸 비밀편지는 자신을 독살했다고 오해할 만큼 적대적 관계로 알려진 심환지를 적극적으로 회유하고, 막후에서 비밀스런 지시와 조정을 주도하는 노련한 정치가의 수완과 동태를 생생하게 보여주었다. 민감한 정치적 사인이 담겨 있어서 국왕이 없애라고 명령한 문건인데도 고스란히 남아 있다는 사실이 관심을 한층 증폭시켰다. 게다가 비밀편지는 국왕 정조의 가볍고 다혈질적인 성미까지 폭로했다 ......

정조어찰은 정치사 사료로도 중요한 의미를 가지지만
문학과 서예, 궁정의 문화와 생활사 같은 측면에서도 가치가 높다고 한다.
그리고 정조의 사망과 관련된 숱한 의혹들에도 단서를 제공한다.
정조는 독살됐는가? 아니면 오랜 지병으로 인한 자연사인가?
1800년 6월 28일 사망한 정조는 6월 9일, 15일에도 심환지에게 편지를 보내 병세의 심각함을 알렸다.
책을 쓴 저자 안대회는
이덕일이 <조선왕 독살사건>에서 주장한 정조 독살설에 대해  6가지 논리를 들어 반론한다.
(이덕일의 책 역시도 오래전에 재미있게 봤었다)
어쩌면 사실 심환지는 정조의 명으로 노론 벽파의 핵심인물이 된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 모든 게 다 정조의 놀라운 정치적 계획이었다면?
이 책을 읽고 정조에 대해 내가 실망했을까?
정답은 "No" 다. 그것도 Never!
성군 정조가 더 인간적으로 다가왔다면 이해가 될까?
덕분에 정조에 대한 애정이 더 생기고 말았다.
이러다 편애가 극심을 넘어 지극해질까봐 심히 걱정스럽다.


                               <정조>                                             <심환지>

* 정조의 초상화는 현재 전해져 내려오는 것이 없단다.
  우리가 알고 있는 정조의 초상화는 거의가 현대에 제작된 것들이다.
  문화의 르네상스를 만들었던 정조 입장에서 볼 때 참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Posted by Book끄-Book끄
달동네 책거리2009. 11. 18. 06:14
 <다산1, 2> - 한승원


 다산. 1


“나는 왜 영·정조 시대에 몰입하는가?”

늘 궁금한 부분이긴 한데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그냥 미친 듯이 그 시대의 인물들과 그 시대의 역사가 좋습니다.

다산 정약용만 해도 그래요.

영조, 정조, 순조, 헌종까지 모두 4대의 왕을 두루 거친 인물이고 그 4대에 걸쳐 벼슬을 했던 사람입니다.

18년간의 강진 유배시절 동안 엄청난 분량의 책을 집필했던 사람.

그리고 조선시대 진정한 의미의 지식 아카데미를 형성했던 사람이기도 한 다산 정약용.

그에 관한 책을 69세의 노구의 작가 한승원이 펴낸다고 했을 때 솔깃했습니다.(물론 저는 또 다시 살짝 흥분모드 됐겠죠!)


먼저 이 책은,

팩션이라고 하기에는 확실히 2% 부족한 감이 있습니다.

쉽게 읽혀지는 소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볍게 다가오는 글은 절대로 아닙니다.

전 개인적으로 정약용의 정보력, 박학다식함, 여러 사람을 각기 다른 방식으로 가르쳤던 엄청난 지도력, 그리고 쉼 없는 활동력 등이 늘 불가사의했습니다.

한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 지금 75세의 나이로 사망할 때까지 이뤘던 일들의 양이 참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지금처럼 클릭 한번에 온갖 정보가 주루룩 나왔던 시대도 아니고...

다산 정약용은 말합니다.

“사람의 머릿속에 책이 5천권 이상 들어 있어야 세상을 제대로 뚫어보고 지혜롭게 판단할 수 있다.”고...

5천권 이상을 읽어야 한다는 게 아니라, 5천권 이상이 들어 있어야 한답니다. 그건 이해를 하고 있어야 한다는 의미쟎아요.

솔직히 일생동안 5천권의 책을 읽는 사람이(이해는 고사하고) 과연 몇이나 되겠습니까?

이 말의 의미 속에는 내 삶을 부지런하게 이끌라는 또 다른 의미도 들어 있습니다.

정약용의 말을 한마디 더 인용해볼까요!

“이불 속의 달콤한 맛을 꿈지락거리며 즐기는 것은 게으름이다. 게으름은 세상을 반만 살게 하는 악귀다.”

정말 이쯤은 돼야 500여권이 넘는 책을 저술할 수 있었겠죠.


이 책은 1801년 신유사옥으로 죽을 고비를 간신히 넘기고 귀양살이를 하게 된 다산이 자신의 운명을 어떻게 이겨냈는지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회상과 꿈의 형태로 과거의 이야기와 바램들이 여러 개의 액자소설처럼 곳곳에 끼워져 있어 재미를 더합니다.

어린 시절부터 주자학을 읽은 다산은, 성년이 된 다음에는 천주학에 심취했지만 나라에서 금하고 조상의 제사를 지내지 못하게 한다는 이유로 천주학을 버리고 정학으로 돌아서게 됩니다.

그러나 그의 재능을 시기했던 노론 벽파들은 천주교를 신앙으로 받아들여 순교한 그의 셋째 형 정약종을 근거 삼아 둘째형 정약전과 그를 태형에 처하고 유배를 보냅니다.

노구의 몸으로 유배를 떠나는 두 사람은 그 길로 다시 만나지 못하는 처지가 되고 말죠.

다산에게 둘째형은 멘토의 위치에 있었습니다.

다산은 책을 완성하면 둘째형에게 보내 감수하게 하고 부족한 부분에 대한 첨삭을 전해 받기도 했을 정도니 그 둘의 애틋함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이 되시나요?

그런 둘째형이 유배 중 사망하게 되고 역시 유배중이라 차마 찾아가지 못하는 정약용은 애끓는 탄식을 하게 됩니다.

형제이면서, 스승이며 아비이기도 했던 형.

그런 형을 잃은 그의 상실감과 절망이 읽는 동안 가슴 아리게 만들었습니다.

애뜻한 혈육의 정은 자식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강진에 유배되어 있으면서도 다산은 자식들에게 살뜰한 편지를 자주 보내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게으르고 나태한 자식들을 호되게 야단치기도 했죠.

닭을 키운다는 아들의 말에 “양계”에 대한 체계적인 책을 만들어 보라며 그와 관련된 자세한 조언까지 하는 걸 보면 그의 박학다식의 경지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조차 되지 않습니다.

개인적으로 전 정약용은 신선의 경지에 도달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말은 종교적인 표현은 아닙니다. 그저 한 사람의 힘으로 이룰 수 없는 길을 그야말로 지극한 경지까지 스스로 만들어 간 사람이기에 위대함 그 이상을 느끼게 되는 거죠.

제게 있어 다산 정약용은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 그 자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더 관심이 가는 지도 모르겠네요.


“예가 아닌 것은 보지도 말고, 예가 아닌 말은 듣지도 말고, 예가 아닌 말은 입에 담지 말며, 예가 아니면 행하지 말라.”

이 말은 한사코 예를 외면하고 있는 지금의 위정자들에게 정말 필요한 잠언인 것 같습니다.

“물은 배를 뜨게도 하지만 배를 전복시키기도 한다. 임금은 배다. 임금도 잘못하면 백성들이 그를 정치하고 바꿀 수 있다.”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나만은 아닐 것이다....”라고.

그러나 이 책을 읽고 나면 이러한 나태하고 편협한 이기심이 조금씩 불편해지기 시작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이 글은 참 다정하다는 느낌입니다.

멀게만 생각되는 역사 속의 인물 정약용을 내 바로 옆에서 느낄 수 있게 만들어 주니까요.

글이 다정할 수 있다는 거...

저처럼 또 다는 누군가도 느낄 수 있다면 좋겠네요. ^^


* 참고로 정민의 <다산 선생 지식 경영법>과 이덕일의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 1, 2> 권이 있습니다.

앞의 책은 분량도 꽤 되고 좀 전문서적의 느낌이라 쉽게 손에 잡히지 않을지도 모르겠지만 조목조목 읽다보면 정약용의 신비감에 완전히 매료되게 만듭니다. 심지어 읽는 이를 진정한 정약용 마니아로 환골탈태시키는 매우 위험한(?) 책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후자에 소개한 책은 2권으로 되어 있긴 하지만 쉽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책입니다.
이덕일이라는 작가가 쓴 책들은 개인적으로 적극 추천하고 싶습니다.
역사를 참 재미있고 흥미진진하게 이야기해주는 사람입니다. 역사의 신비감과 아련함이 내 옆의 현실감으로 바짝 다가오는 느낌이죠.
혹 관심이 가신다면 한번 읽어보심이......
(후회는 없을 것임을 확실히 보증하는 바입니다...^^)


Posted by Book끄-Book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