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끄적 끄적...2010. 10. 23. 06:15

시간도 거의 없어서이긴 하지만
TV보다는 책으로 눈이 가는게 지금은 자연스러워졌다.
아무래도 하루종일 모니터를 들여다보는 직업이다보니
화면에서 받게 되는 눈의 피로감 때문에 더 TV를 보지 않게 되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내가 요즘 챙겨보는 TV 드라마가 하나 있다.
바로 <성균관 스캔들>




정은궐의 <성균관 유생들의 나날>은 이미 작년에 읽어서
조선시대 남장 여자의 성균관 이야기라는 걸 다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드라마를 보는 이유는,
딱 하나다.
바로 햇빛 때문에...
걸오폐인을 낳은 유아인 좋아서도.
까칠 공자 박유천과 대물 박민영의 미묘한 거짓과 끌림에 반해서도
아니라면 "나 구용하야!"를 입에 달고 사는 엄친아 송중기에 끌려서도 아니다.
그렇다고 하이틴 로맨스같은 줄거리에 두근거릴 나이도 아니고... 
드라마속에 폭포처럼 쏟아지는 햇빛.
그게 너무 예쁘고 아름다워서다.
어느 때는 황홀한 기분까지 든다.
특히 서가에 쏟아지는 햇빛을 볼 때는 온 몸에 스멀스멀 아지랭이가 핀다.
그래서 보고 있으면 욕심이 생긴다.
저 셋트장 가보고 싶다!
꼭 저 책들이 꽃힌 서가가 가서
햇빛을 받으며 오래오래 책을 읽고 싶다는 소망도.
왠지 저 햇빛들이 고스란히 거기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아서...



그건 아마도 내겐 일종의 동경 혹은 선망 비슷한 것이리라.
눈이 부실만큼 부서지듯 쏟아지는 햇빛을 보면
오래 그 속에 서있고 싶은 소망!
그런데 내 현실은 썩 유쾌한 편이 아니다.
달갑지 않은 햇빛 알러지가 심한 편이라 햇빛 아래 좀 오래 서있으면 여지없이 두드러기가 올라온다.
그리고 붉어지기 시작하면서 가려움증까지...
게다가 라섹수술로 그야말로 광명 찾은 눈은
찬란하고 빛나는 햇빛은 온전히 빋아내질 못한다.
햇빛이 눈을 찌르는 것 같아서.
그러니까 이 드라마는 이런 내게 일종의 대리만족인 되 주는 셈이다.
다분히 의도된 연출이겠지만
그렇더라도 "참 잘했어요!" 도장을 백만개 쯤 찍어주고 싶다.
남들이 들으면 이상하게 생각하겠다.
드라마를 보면서 주인공이나 사건을 쫒아다니는 게 아니라 햇빛을 쫒아다닌다고 하면...



햇빛 말고 또 하나를 말하면,
인물들이 입고 나오는 의상들.
그런데 결국 이것도 빛과 연결된다.
원색의 화려한 색감의 옷에 고급스런 느낌의 문양들.
이 옷들이 빛을 받을 때면 또 너무나 이뼈서 눈이 다 부실 정도다.
색과 빛이 조화를 잘 이뤘다고나할까?
그래서 어떤 장면에서는 그대로 뮤직비디오같은 느낌마저도 든다.
그야말로 뽀샤시~~~

사실은,
이 드라마는
햇빛 속에 오래 서 있지 못하는 나에겐 일종의 환상이고 유토피아다.
그래도 다행이지 않은가?
TV 화면을 통해서 이렇게 고스란히 볼 수 있으니까...
드라마를 이런 이유로 보는 사람이 또 있을까?
줄거리가 궁금한 게 아니라
어떤 빛과 색이 만나서 폭포같은 햇살을 만들지가 궁금해서 보는 사람!
그게 바로 나다!
세상엔 다양한 이유를 가진 사람들이 있으니까... ^^

Posted by Book끄-Book끄
읽고 끄적 끄적...2010. 8. 19. 06:28
필립 리브.
처음 듣는 작가의 처음 듣는 책이다.
제목만 들었을 때는 또 다시 영웅 이야기의 시작이려니 생각했었다.
그래서 솔직히 별 기대를 하지 않았던 것도 사실.
그런데 의외로 재미 있는 관점을 가진 소설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던 아서왕 이야기를 묘하게 비튼,
그것도 10살 여자 아이의 시각에서 본 이야기다.
...... 아서는 그저 폭군의 시대를 살았던 한 명의 폭군일 뿐이었다.
중요한 건 이야기였다 ......

아서가 신화와 전설의 용사가 된 건,
그 자신의 노력과 결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이 모든 게 누군가의 입에서 만들어진 이야기에 의해서였다면?
이 책에서 아서의 이야기와 전설을 만들었던 "마르딘"이라는 음류시인은 말한다.
“사람들은 보게 되리라 기대하는 것만 보고, 진실이라 말하는 것만 믿는다.”
그러니까 아서왕 이야기는 결국 누군가에 의해 미화된 것에 불과할 뿐 진실이 아니라고 말한다.
아서를 단지 영웅으로 만들기 위해,
영웅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의 욕망에 부응하기 위해  이 모든 이야기가 만들어 졌다는 거다.



지금껏 읽어왔거나 혹은 봤었던 아서와 이야기는
영웅적이고 정의로운 소위 "완소남" 혹은 "엄친남"  캐릭터였는데.
이 책의 아서는 지극히 현실적이고 누구보다 속물스럽다.
마법이니, 환상이니 하는 것들을 가차없이 팽개치고
인간에 속성을 발가벗기듯 그대로 들어다 보는 재미가 은근히 있다.
그야말로 지극히 "현실적"이다.
혼란의 시대, 탐욕의 군주 아서!
실제로도 아서가 대량학살을 자행한 잔혹한 사람이었다는 이야기도 있긴 하다.
실제하지 않은 인물이라는 말도 있고...
어쨌든 역사를 한 번 비틀어 꽤나 재미있는 성장 소설 한 편이 만들어졌으니
아서로서도 나쁘진 않겠다 (^^)

책에선 아서왕 보다 "그위나"라는 계집아이의 삶이 오히려 더 파란만장하고 역사적이다.
아서의 이야기를 만드는 "마르딘'에 의해 선택(?)된 아이.
계집아이였다가 남자였다가 다시 여자가 되는 아이.
그 아이의 눈을 통해 보는 아서와 그 시대의 이야기는
때로는 진지하고 때로는 우스꽝스럽다.
전설의 검 "칼리번"이 아서왕의 손에 들어오는 장면은 아주 유머러스하고 황당해 웃음이 난다.
이렇게 만들진 이야기가 반복되고 또 끊임없이 들려지게 된다면
사람들은 결국 이야기를 몽롱하지만 현실로 받아들이고 믿게 될 수밖에 없을 것 같긴 하다.
어쩌면 정말 아서왕이 그런 인물이고 그 시대가 그런 시대였는지도...
누가 알겠는가?
만나보지 않고 살아보지 않았는데...
썩 좋은, 괜찮은 소설이라고 말하긴 아무래도 좀 어렵지만
어찌됐든 작가적인 상상력만큼은 꽤 괜찮은,
재미있는 성장소설이다.
인간의 속성이 결국 "아서왕"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영웅들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들은 인간의 속성 속에서 영원히 잠들어 있다.
지금까지도 여전히......

중요한 건,
그 사람이 무엇을 했느냐가 아니다.
단순하고 명확하게 만들어진 이야기,
단지 그것만이 필요할 뿐이다.

Posted by Book끄-Book끄
보고 끄적 끄적...2010. 6. 10. 08:26


2007년 초연된 <쓰릴미>는 류정한, 최재웅이 "나"를
김무열. 이율이 "그"를 했었다.
그리고 나는 무슨 이유인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초연의 <쓰릴미>를 놓쳤다.
그리고 재공연이 됐을 때도 또 다시 몇 번을 놓치고...
겨우 작년 봄에 김우형/정상윤, 김산호/정상윤 페어의 <쓰릴미>를 두 번 관람했다.
그때 받았던 충격이란...
정상윤이라는 배우의 새로운 발견은 놀라움 그 자체였었다.
극 자체가 보는 사람을 완벽하게 집중하게 만들긴 하지만
정말 끔찍하게 집중해서 봤던 공연이다.
그리고 그 여운이 얼마나 깊고 그리고 오래 가던지...
어떻게 이럴 수 있지? 놀랐던 기억이 지금도 선명하다.
그리고는 또 얼마나 후회했던지... 류정한의 "나"를 보지 못한 것을...


       2007년 류정한(나), 김무열(그)                         2009년 정상윤(나), 김우형(그)

2010년 다시 돌아온 <쓰릴미>는 무려 4쌍의 페어가 "그"와 "나"로 나온다.
내가 선택한 페어는 "최재웅-나, 김무열-그"
공연 시작 한참 전부터 예매 싸이트에서 완판이 된 페어다.
(무섭더라. 엄청난 속도로 좌석이 빠져나가는게...)
다행히 무대 위 양 싸이드에 위치한 배심원석 예매에 성공했다.
무대 정면을 볼 수 있는 좌석이었다면 더없이 좋았겠지만
그래도 배심원석이 어딘가 싶다.
시야장애는 있지만 현장감 하나는 최고였으니까.
그리고 어쨌든 예매에 성공했으니...
(실제로 시야장애는 좀 있더라. 그것도 배우 최재웅의 탁월한 두상에 의한 시야장애 ^^)



<쓰릴미>는 1924년 시카고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유괴 살인사건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작품이다.
뛰어난 두뇌, 부유한 집안 등 무엇 하나 부족할 것 없는 소위 말하는 엄친아 두 명이
어린 소년을 유괴하고 급기야 살해하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그리고 있다.
동성애와 방화, 유괴, 살인 등의 내용이 거부감을 줄지도 모르지만
실제로 보고 있으면 극 속에 완전히 몰입하게 된다.
그 오묘한 긴장감과 부도덕이 주는 은밀함은
인간의 원초적인 감정들을 충분히 들쑤시고 자극한다.
기꺼이 공범자가 되어 협조도 은폐도 동조도 다 하고 싶다.
"그"와 "나"
동성애의 두 사람 사이에 어떻게든 붙어있고 싶은 심정이 절절해진다.



단 두 명의 배우와 한 대의 피아노로 이루어진 공연.
그 피아노의 변화를 따라가는 것 또한 놓쳐서는 절대 안 되는 부분이다.
내 귀엔 피아노가 마치 배우처럼 대사를 하는 것 같다.
감정의 변화와 분위기를 타이밍 정확하게 치고 들어오던 피아노.
예전 공연에서는 배우들의 동선보다 다소 아래 위치했던 피아노가
이번 공연에서는 공중으로 올라갔다.
덕분에 배우들의 동선은 더 자유로워졌고 피아노는 은밀해졌다.
(그리고 연주자, 정말 잘 연주하더라.)
몇 번씩 뒤집히는 반전과 치밀한 심리묘사.
몸싸움(?)같이 치열하고 처절하던 그와 나의 행동과 다툼같은 이유들이 
피아노 연주와 함께 숨통을 조였다 놨다를 수없이 반복한다.
"치명적인 유혹"
그건 다름 아닌 나를 향한 정확한 멘트였다.



무대석인 배심원석에서의 관람은 극의 타이트한 긴장감을 고스란히 느끼게 해준다.
극중 "나"의 위치였던 오른쪽 배심원석은
가끔 최재웅의 표정을 보지 못하게 하는 단점이 있긴 하지만
"그"의 김무열의 표정을 샅샅히 살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김무열은 데뷔작인 <지하철 1호선> 때부터 느꼈던 건데,
표정이 참 풍부하고 조명에 따라 다양한 분위기가 연출되는 배우다.
그리고 내가 생각할 땐 본인 스스로도 그걸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아주 적절하게 자신의 장점을 극대화시켜 사용하고 있다는 느낌!
(무대 위에서 이런 영민한 배우를 보면 무지 즐겁다)
<지하철 1호선>에서 제비 역을 했던 그를 보면서 "젊은 놈이 잘하네!" 했었는데
그도 이젠 제법 선 굵은 배우가 되어 무대 위를 부지런히 꽉 채우고 있다.
그 또래 배우들 중에서 딕션도 가장 정확하고 선명하다.
TV 에서도 꽤 비중있는 역할로 많이 나와서 일반인들에게도 상당한 인지도까지 확보한 상태.
최재웅과의 12회 공연 완판의 혁혁한 공을 세운 것도 그의 역할이 상당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최재웅도 우스개소리처럼 말했었다.
"우리 팀의 강점은 김무열이 있다는 것이다"



김무열의 축복받은 체격조건 역시나 그를 돋보이게 하는 큰 장점 중 하나다.
마치 양복 카탈록 모델을 보는 느낌 (^^)
저런 색깔의 수트가 어울리는 사람 별로 없을텐데 그에게는 상당히 썩 잘 어울린다.
솔직이 이번 공연에서 "그"가 입는 수트가 개인적으론 마음에 안 든다.
예젠엔 짙은색 수트였는데 이번 의상은 어쩐지 가벼워보이고 심지어 유머러스해보이기도 한다.
조끼에 커프스까지 갖춘 완벽한 수트에 이런 느낌의 노익장이라니...
그런데 김무열 "그"는 그 옷마저도 거든히 소화하더라.
오히려 히스테리하게 느껴지기까지 했으니 신체조건의 탁월함을 무시할 수는 없겠구나 싶다.
특히나 무대 위에 서는 배우라는 입장에서는 축복받은 신체조건(^^)이라 하겠다.
김무열이 반대편 배심원석에서 조명을 받고 연기하는 모습을 보면 종종 감탄을 하게 된다.
야누스적인 느낌이랄까?
대사와 노래를 부를 때 확연히 달라지는 목소리 톤도
이런 야누스적인 느낌을 갖게 만든다. 
해맑은 아이에게서 느껴지는 섬득함이라면 이해가 될까?



"나" 최재웅!
박정환과 함께 내가 열심히 찾아 보고 있는 무대 위 배우.
일단 나는 그의 독특한 대사톤이 참 좋다.
약간은 무성영화 시대의 변사를 떠올리게도 하고
상대방과 대화를 하는데도 늘 독백을 하는 것 같이 느껴지는 시니컬한 톤.
흔들리면서도 확신에 찬 눈빛은 특히나 <쓰릴미>의 "나" 역에 딱 적격이다.
과거와 현재를 왔다갔다 하면서 극을 이끌어가는 "나"
명확히 두드러지진 않지만 확실히 시간에 따라 변화하는 목소리 톤을 따라가면
그가 "나"의 심리상태를 디테일하게 표현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거기에 피아노 연주가 함께 덮일 때 느껴지는 묘한 긴장감이라니...
엄청난 몰입으로 스스로 "나"가 되는 그의 모습은 처연해서 안스럽기까지 하다.
그 감정을 무대 위에서 완벽히 드러내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
(만약 극중 "나"가 완벽히 자신의 감정을 드러냈다면 <쓰릴미>는 긴장감은 완전히 허물어져 버릴 것이다)
최재웅은 확실히 <쓰릴미>에서 완벽한 공범자,
그 모습, 그 자체였다.
숨통을 조이는 긴장감이 아니었을까?
"나"를 연기한다는 것은....



... 안아줘, 만져줘. 사랑해줘!
널 갖고 싶어!
한 번이라도 날 제대로 느낀 적 있어?
날 만족시켜줘!
뭐든 할께, 자기야!
너 없인 나도 없어!
상관없어. 너와 함께 있을 수 있다면...

이런 민망한 대사들은 최재웅은 참 절절하고 강하게 잘 친다.
사람들은 <쓰릴미>에서 "나"는 여성적이고 "그"는 남성적이라고 말하는데
나는 두 사람의 페어를 보면서 정확히 그 반대를 생각했다.
최재웅의 "나"는 남성적인 심리가 강하고
김무열의 "그"는 은근히 여성적이라고...



예전 공연에서는 포인트를 주듯 웃음이 주는 곳이 몇 군데 있었는데
이번 공연에서는 의도적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부분들이 빠져있다.
(최재웅, 김무열 페어에서만 그런가??? 다른 팀들은 못 봐서...)
그리고 나는 그게 아주 좋다.
뭐랄까 웃음조차 끼어들 여지를 주지 않는 그 빡빡한 긴장감이...
단지 그 극의 웃음 요소라면 자주빛 수틀의자!
극의 분위기와는 좀처럼 어울리지 않는 클래식하고 상당히 귀부인스러운 자태의 의자는
바라보고 있기가 민망했다.
피아노가 위로 올라간 걸 빼면 개인적으로 예전의 무대 배경이 더 마음에 든다.
너무 인위적인 나무도 그렇고...
처음 "나"의 등장 장면에서는 관객 출입구를 그대로 이용해서 훨씬 좋았다.
배심원석도 나쁘지 않은 것 같고...
배심원석 덕분에 전체적으로 무대가 타이트해진 느낌이랄까?
그래서 극의 느낌과 잘 맞아 떨어진다.
(그리고 배심원석의 관람객들 상당히 신중하고 심각한 표정으로 관람한다. 정말 배심원같이...)



최재웅은 노래 부를 때 목소리가 참 맑고 깨끗하다.
언듯 들으면 보이 소프라노 느낌이 들 정도로...
무심한듯 하지만 수시로 변화는 표정과 대사톤을 따라가는 것도 "나"의 심리를 이해하는 열쇠가 된다.
그래서 그의 무대는 나는 가능하면 소극장에서 보는 게 더 경이롭다.
김무열. 최재웅....
이 두 페어의 만남은 참 묘하다.
여러 곳에서 "이중성"의 경험을 보고, 듣고, 느끼게 되니까.
다시 보고 싶다.
그러나 그건 불가능하다.
미치겠다.
나 역시나 "너무 멀리 왔다. 그를 따라 여기까지..."

 

   * 2009년 너무 놀라운 경험을 줬던 "정상윤- 나, 김우형- 그"의 <쓰릴미> 



                              의미심장하게 웃던 정상윤의 ending
Posted by Book끄-Book끄
달동네 책거리2009. 4. 13. 22:08
  <1만 시간 동안의 남미1,2,3> - 박민우


1만 시간 동안의 남미

 
봄이 되니까 자꾸 바람나려고 하지 않으세요?
이러다간 아무래도 옆구리에 날개라도 돋지 않을까 싶으신 분, 일상을 버리고 훌쩍 내가 모르는 어떤 곳으로 떠나고 싶으신 분, 여기 아닌 다른 곳이라면 어디라도 환영인 분, 급기야 누가 나를 유괴(이 나이에 꿈도 야무지게....)라도 해서 딴 곳에 데려다 준다면....을 꿈꾸고 계신 분...
봄의 신기루에 온 몸이 나른하신 분들 많으시죠?
떠나면 모든 게 다 괜찮을 것 같은 마음...
오늘은 그 마음을 한번 따라가보려구요.
사람의 오감을 자극하는 여행서는,
지친 일상의 활력소가 되어 주기도 합니다.
물론 어설픈 여행서는 허황된 환상을 심어주는 심각한 부작용을 유발시키기도 하죠(아시죠? “사진과 실물은 다를 수 있습니다”..... 여행서를 보면 전 항상 이 문구가 떠오르거든요 ^^)

쌈바와 화려한 축제의 유토피아, 남미!
그 환상의 나라들을 말 그대로 찌질하고 궁상맞게 여행하고 있는 한 남자가 있습니다.
사람이 이렇게까지 운이 없을 수 있을까 싶게 가는 곳마다 속고, 물건을 잃어버리고, 차를 놓치고, 어찌어찌하여 싸구려 골방같은 숙소로만 그것도 겨우 전전하죠.
책을 쓴 작가 박민우.
그가 14달 동안 남미의 구석구석을 여행이 아니라 방랑하면서 겪은 살아있는 날 것들을 그대로 엮은 책입니다.
찌질한 자의 생동감이라니...
그런데 그게 아주 신선하고 그리고 진심으로 부럽기까지 하다는 겁니다.
코에 바람을 넣는 것도 모자라 이젠 아예 온 몸을 들썩이게 만드네요.
뭐 얼마나 대단한 여행서라고 세 권씩이나?????
남미 한 번 여행한 걸로 본전 한번 제대로 뽑으시네~~
처음엔 내가 못 가 본(가 본 곳도 변변찮지만...) 나라를 여행한 운 좋은 사람에게 보내는 개인적인 빈정상함과 부러움의 시선이 그 시작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책을 읽다보면 시기심은 점점 사라지고 혼자 깔깔대며 박장대소하게 되죠.
재미있습니다. 그리고 더불어 신선합니다.
remarkable!
딱 그래요.
어느 틈에 속편을 열렬히 기대하게까지 만들었으니 이 책, 물건임엔 틀림없습니다.
카피라이터, 기자, 시나리오 작가, 앵커 등 다양한 이력을 가진 박민우는 보헤미안 기질이 다분해 보입니다(그러나 이 사람 “완소남” 혹은 “엄친아”는 결코 아닙니다. 그러기엔 확실히 80% 정도 부족하죠... 약간(?)의 하자가....^^)
이 사람, 여행의 시작부터 왜 이럴까요?
체격만큼이나 부실하다 못해 덜렁대는 성격덕분에 여권을 고이 집에 두고 출발합니다.
결국 호된 신고식이 기다리게 되죠.
그런 그가 감히 말합니다.
“아무리 좋고 좋아도 떠남의 설렘만 못하다“.
이런 상황에선 설득력이 좀 없어 보이긴 하지만, 누군들 그러지 않겠습니까? 변종 돌연변이라 할지라도 나그네의 유전자가 발현되기를 저 역시도 간절히 갈망하고 있는데...
가끔 생각합니다.
여행을 소망하면서 쉽게 이루지 못하는 건,
시간 때문인지 아니면 금전 때문인지 아니면 두려움 때문인지...
모든 걸 뒤로 하고 떠나는 이 남자의 맘 속 자유가 그래서 전 참 좋습니다(그래도 여권까지 뒤로 하고 떠나는 건 아무래도 좀..... ^^;;)
하지만 뭐 좀 어긋나면 어때요?
처음부터 발목을 붙잡고 있는 것보단 그래도 훨씬 나은 선택 아닌가요?

낮선 곳의 화려한 눈요깃거리들을 소개한다거나, 맛있고 고급스런 혹은 그 나라의 대표적인 민속음식을 소개한다거나 멋진 숙소를 구경하게 될 거란 기대는 이 책에선 버리세요.
대신 우리는 사람을 만나게 될 겁니다.
까만 피부에 초롱한 눈을 가진 맑은 아이같은 사람, 푸짐한 살집에 더 푸짐한 인정을 가진 사람, 그리고 기꺼이 찌질한 여행자를 구원(?)해주는 그때그때 상황에 또 적절하게 등장해주는 멋진 흑기사들을 말이죠.
괜히 저 역시도 함께 손잡고 싶어지는 사람들...
이 사람도 고백하고 있네요.
“여행 중 최고는 사람을 향해 가는 여행이다. 거대한 산맥보다 더 장엄하고, 한낮에 퍼붓는 소나기보다 더 예측하기 힘들다”라고요...
Timing!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주는 것에도 타이밍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멈칫거리면 이미 늦는다고, 생각하고 주저하는 시간은 짧지만, 늦음으로 인한 후회는 너무 길다고...
이 여행서는 재미와 함께 순간순간 이 남자의 단상들이 나올 때면 가슴이 서늘할 정도로 섬뜩해집니다. 그러나 그 섬뜩함은 공포에서 비롯된 것과는 확연히 다릅니다.
3권의 책을 전부 읽고 나면,
이 사람 왠지 한번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까지 듭니다.
왠지 사람을 낯설게 대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핸드 드립 커피”
같은 커피를 가지고도 바리스타에 따라, 물의 온도, 핸드 드립의 높이, 그리고 드립 방식에 따라 맛과 향이 천차만별이 되는 커피.
우습게 들릴지 모르지만 작가가 꼭 이 핸드 드립 커피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어쩐지 나를 만나면 내게 적절한 향과 맛으로 이야기할 것 같은 사람.
이런 느낌을 주는 책이라면,
이 책으로의 여행도 꽤 괜찮은 여행이 아닐까요?

근거 없는 자신감도 자신감이라고 하네요. 헛된 자신감으로 돌아오는 부작용보다는, 그 자신감에서 발산되는 무한한 용기와 추진력을 믿으라고.
비록 사실이 아닐지라도, 그 자신감이 과장되었을지라도 없는 것보다는 있는 편이 사람을 훨씬 다부지게 만든다네요.
여행의 매력은... 그래요.
모르는 무언가에, 모르는 누군가에게 조금씩 물들어가면서 결국 “함께”를 얻을 수 있게 된다는 거, 그 약속할 수 없는 “함께”가 때로는 그 무엇보다도 더 견고하고 든든한 이유가 될 수 있다는 걸 깨닫게 된다는 거.
그래서 사람들은 기꺼이 또 다시 길 위에서 짐을 꾸리게 되나봅니다.
거침없이 다가가기 위해서요.
길을 모르면 어떻고, 길을 잃으면 어떻겠습니까?
모르면 물어보면 될 것이고, 잃었으면 되돌아가 처음부터 다시 찾아가면 될테니까요.
늦어지면, 까짓것 내가 너무 치열하게 헤맸다고 고백해버리는 거죠.
생각해보세요.
사실, 땅에서 발이 떨어지는 모든 순간이 “여행”의 시작입니다.
어때요? 이젠 떠날 준비가 다 되셨나요?
그렇다면 건승하세요.
그리고 돌아와 제게 이야기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모든 순간  “함께”였다고....


Posted by Book끄-Book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