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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2.01.18 <웃음 1, 2> - 베르나르 베르베르
  2. 2009.07.20 달동네 책거리 55 : <추 락>
읽고 끄적 끄적...2012. 1. 18. 05:57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여간해서는 지치지 않을 기세다.
아마도 집 어딘가에 글을 쓰는 우렁각시를 숨겨놓고 있는 건 아닐까?
그게 아니라면 어떻게 1년마다 2~3권의 책을 뚝딱 세상에 내놓을 수 있느냐 말이다.
덕분에 한동안 질적인 문제로 이 허접한 독자가 극심한 혼란을 느끼고 있긴 하다.
이제 더이상 참신하다거나 기발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는 건 베르베르의 글에선 일종의 불행이다.
예전에 했던 말을 조금 바꿔서 다시 하고 있는 듯한 지능적인 되새김 화법!
어쩐지 사기당하고 있다는 찜찜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 사람이 왜 우리나라에 이렇게 선풍적인 인기일까?
솔직히 점점 의심되기 시작했다.
딱 그즘에 읽게 된 베르베르의 새 책 <웃음>



솔직히 재미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박장대소 후 급작스럽게 죽은 인기 코미디언.
그 사건을 자살이 아닌 타살로 믿는 여기자.
웃음의 기원을 찾아 떠난 여정에서 하나하나 밝혀지는 웃음의 미스터리.
원탁의 기사나 프리메이슨같은 비밀 결사대 유머 기사단과 성서 비슷한 문구들.
정말 어딘가 파란 목갑에 들어있는 살인소담(殺人笑談)이 있을 것 같은 착시감까지...
베르베르가 모천(母泉)으로 조금 돌아온 것 같다.
웃음이라는 소재로 기발한 이야기를 만들었다.
신기한 건 미스터리 소설이긴 한데 읽는 내내 범인이 누군지가 별로 궁금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범인의 추적이 스토리의 중심이 아니라 웃음의 기원을 찾는 근원적 추적이
바로 스토리 자체이기 때문이다.
확실히 독특한 구성이다.

웃음이 하나의 에너지가 된다는 베르베르의 말에는 전적으로 동감!
......이제 권력은 대중의 웃음을 관장하는 사람들의 것이 되었어요. 그들은 매스 미디어 세계의 하위 계층에 속하는 사람들이죠. 그런데 이 하위 계층이 실제로는 지배층이에요. 그들의 지배를 보장하는 것은 불행을 잊게 하거나 상대화하는 능력, 그리고 따분한 세상을 사는 사람들의 기분을 풀어 주는 능력이죠. 권태에 대한 두려움은 이제 핵심적인 두려움이 되었어요. 내가 보기에 사람들을 웃게 하는 것은 오늘날 가장 위대한 힘이에요. 어떤 힘도 그 힘을 능가하지 못할 겁니다......
베르베르의 지적은 정확하다.
우리나라도 개그콘서트 류의 개그프로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초등학생들까지 개그맨들 흉내를 내는 걸 보고 있으면
격세지감과 함께 문득 두려움마저도 느껴진다.
웃음이 하나의 강력한 에너지임은 분명히 맞는데
어쩐지 득보다는 엄청난 해약의 형태로 자리잡는 것만 같아서...
외경심이 극단의 형태로 보여지게 될 것 같아 두렵다.
웃음을, 유머를, 개그를
점점 그저 단순히 미소로 바라보게 되지는 않는다 .
해학과 풍자를 밑바탕에 둔 촌철살인의 미학은 사라지고 
너 죽고 나 살자는 식의 극단의 몰살(歿殺)만 살아있다. 
이러다간 정말 웃음가스가 치료가 아닌 일상에서 필요한 때가 금방 올 것 같다.
가끔은 웃으면서 죽을 수 있다는 건 축복이 아닐까 생각했는데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은 듯.
성적인 에너지 에로스, 죽음의 에너지 타나토스, 웃음의 에너지 겔로스.
이제 내게 남은 에너지는 어떤걸까?
베르베르의 신작을 읽으면서
나는 내게 남은 에너지를 생각했다.
웃음이,
싹 가신다.

Posted by Book끄-Book끄
달동네 책거리2009. 7. 20. 06:21
 <추락> - J.M. 쿳시


 추락


지적이면서 끔찍하게 치열한 책을 만나게 되면 등골이 오싹해지는 기분이 듭니다.

그리고 나면 정말 미칠 정도로 그 내용 속에 빠져들게 되죠.

오랜만에, 정말 오랜만에 그런 경험을 다시 했습니다. 지금 소개하는 <추락>이 바로 그런 충격을 안긴 책입니다.

오싹하다 못해 머릿속까지 서늘해지는 느낌.

J.M. 쿳시라는 작가의 책을 처음 읽게 된 게 도무지 억울하고 속상해서 화가 다 날 정도라고 하면 이해가 되실까요?

이 소설의 원 제목은 <치욕>입니다.(개인적으로 우리나라에서 왜 “추락”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됐는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번역가 왕은철이란 분이 작가와 합의해서 제목을 고쳤다고는 하는데 “치욕”이라는 원제가 더 책의 내용에 적합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J.M. 쿳시!

가장 타협하지 않는 작가이자 가장 분명하고, 가장 용감한 작가로 알려진 사람!

2003년 스웨덴 한림원은 그를 96회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지목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플리처상보다 더 권위 있다고 알려진 부커상을 그것도 한 작가에게 두 번 주지 않겠다는 전례를 깨고 세계 최초로 두 번이나 수상한 작가이기도 합니다.

부커상 심사위원들은 “쿳시가 수상식에 참석하지도 않을 것이고 그 이후의 만찬장에서도 그의 자리가 비어있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그를 선택했다”고 밝히기까지 했네요.

그리고 누군가는 이런 표현을 쓰기도 했습니다.

"그의 글은 아이스 피겔로 얻어맞은 느낌"이라고....

누군가는 또 말합니다.

"심오한 정치의식을 지니면서도 모든 단어들을 아름답게 조합하는 작가"라고요.

그의 글은 비록 이 책이 처음이긴 하지만,

실제로 여기에 나오는 모든 단어들은 에너지로 충만합니다. 그 에너지는 때론 “파렴치”한 욕망의 형태로, 때론 걱정 가득한 “부성애”의 마음으로, 때론 비난과 욕설, 그리고 원망과 싸움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살아 있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 살아 있기에 인정해야 하는 혹은 살아 있기에 떠날 수 없는 사람들의 선택에 대한 이야기.

이 소설 안에는 그런 살아 숨쉬는 현실이 그대로 담겨있습니다.

글의 위대함이란,

그 안에 살아온 시대가 거짓 없이 그대로 투영되어 있을 때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균형과 흥미를 잃지 않으면서도 진실을 품는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우리네 같은 평범한 사람들은 감히 시도하기조차 어려운 일일 겁니다.

J.M. 쿳시, 이 사람의 글은 그래서 그대로 현실이 되어버립니다.


50을 넘긴 “데이비드 루리”.

욕망에 따라 행동하는 대학교수 루리는 스무살 제자 멜라니와 충동적인 사랑에 빠져 잠자리를 함께 합니다. 결국 멜라니 부모의 고발로 진상위원회가 열리게 되고 루리는 추문의 한가운데 위치하게 되죠.

사과문 발표를 강요하는 그들의 요구를 거부한 루리는 결국 대학을 떠나 딸이 살고 있는 남아프리카 농장에 잠시 머무르게 됩니다.

루리는 말합니다.

“내 사건은 욕망의 권리에 관한 것이다. 어떤 동물도 본능을 따랐다는 것 때문에 벌을 받게 된다는 걸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이야기의 초반은 이렇게 좀 불편하고 파렴치하기까지 합니다.

책 제목 그대로 욕망대로 살아가는 한 인간의 추락상을 보여주고 있죠.

이 루리라는 남자의 욕망은 비난받아 마땅하긴 하지만 그래도 당당함과 이유 있음에 무조건 손가락질 할 수 없음을 인정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적어도 이 사람은 자신이 스스로 욕망에 따라 살고 있음을 확실히 인정하고 있으니까요. 잠시 가면을 쓰고 기다리라는 주위의 권고조차 거부할 정도로요.

딸의 농장에서 함께 지내던 루리에게,

어느 날, 3명의 흑인 남성이 딸을 집단 강간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그 일로 급기야 딸 루시는 임신까지 하게 됩니다.

자 이제부터 이 이야기는 “치욕”의 이야기로 전개됩니다.

자신에게 일어난 일들은 단지 추락으로 받아들일 수 있지만 내게서 생명이 시작된 딸에게 일어난 사건은 “추락”을 넘어 “치욕”으로 다가옵니다.

이 사람, 이 치욕의 시간을 어떻게 견디고 버텨나갈까요?

백인 지배가 종결되고 흑인 정권이 들어선 지금의 남아프리카 공화국.

과거 우리나라가 그랬던 것처럼 이곳도 지금 혼란과 변혁의 시대를 통과하고 있는 중입니다.

수백년간 지속되어 온 흑백갈등이 단순히 정권의 교체만으로 하루아침에 모두 해결될 수는 없는 일이겠죠.

어쩌면 혼란의 시대를 살아가기 위해서 그 땅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겐 그만큼의 희생과 포기가 필요한 건지도 모릅니다.

흑인지배 지역에서 살아가기 위해 백인의 선택,

만약 당신이 그 세계를 선택했고, 선택한 그 세계에 머무르기 위해서 값을 치러야 한다면 당신은 어떤 추락도 혹은 어떤 치욕도 감당할 자신이 과연 있을까요?

살아가는 게 욕망의 문제라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는 선택의 문제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흑인들의 땅을 떠나라는 아버지에게 딸은 자신의 선택을 말합니다.

“그러나 어쩌면 다시 시작하기에는 좋은 지점일 거”라고...

딸 루시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걸, 아무 것도 없는 상태로 밑바닥에서 출발하는 걸 배우겠다고 말합니다.

재산도, 무기도, 권리도 위엄도 그 무엇도 없는 본질에서부터 출발하겠다고요.

아비는 딸에게 묻습니다.

“넌 그 아이를 사랑하니?”

딸은 말합니다.

“아니요. 제가 어떻게 그럴 수 있겠어요. 하지만 그것에 관한 한 모성을 믿어야지요. 아버지, 저는 좋은 엄마가 될 작정이에요. 좋은 엄마이자 좋은 사람이 되겠어요. 아버지도 좋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해보세요“

딸은 지금 아버지의 과거에 대해 책망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불안하고 혼란한 세계를 살아내고 있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믿음. 그들이 시작할 때 반드시 지니길 바라는 그 믿음에 대한 묵시론적 바램의 표현이죠.

불안의 시대면 여지없이 나타나 점점 커져만 가는 틈.

그 틈을 매울 수 있는 건 자신에 대한 “믿음” 그 하나뿐이라고 이 책은 말하고 있습니다.

한 세대와 한 세대 사이에는 커다란 장막이 존재한다고 합니다.

그 장막이 내려오는 걸 보지 못했다고 해서 이미 내려진 장막의 존재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는 일이겠죠.

누가, 왜, 어떻게 이런 장막을 내렸는가에 대한 진상규명 탁상공론은 이제 더 이상  필요하지 않습니다.

누군가는 그 장막의 끝을 잡아야만 하겠죠.

다시 끌어 올리든, 힘껏 끌어 내리든 말입니다.

지금 스스로 추락의 시대, 치욕의 시대를 산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다시 한 번 정직하게 그 질문의 방향을 생각해봐야 합니다.

만약 견딜 수 있다면,

그리고 그 자리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당신의 치욕은 결코 당신을 추락으로 이끌진 않을 거라는 걸 믿습니다.


Posted by Book끄-Book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