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끄적 끄적...2014. 10. 2. 08:04

<고곤의 선물>

일시 : 2014.09.18. ~ 2014.10.05.

장소 :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

극본 : 피터 쉐퍼 ( Peter Shaffer)

연출 : 구태환

출연 : 박상원, 김태훈 (에드워드 딤슨) / 김소희 (헬렌 딤슨)

        김신기 (필립 딤슨), 이봉규, 고인배 외  

제작 : 극단 실험극장

 

연극 <고곤의 선물>

하마터면 이 엄청난 작품을 못보고 지나칠뻔했다.

생각해보니 내가 연극이란 장르에 빠지게 된 건,

피터 쉐퍼의 <에쿠우스> 때문이었다.

신화와 성서적인 뉘앙스가 강했던 <에쿠우스>는 문외한인 내 눈에도 신비하고, 오묘했으며, 너무 아름다워서 비장하기까지 했었다.

<에쿠우스>라는 단 한 작품만으로 나는 피터 쉐퍼를 천재의 범주에 포함시켰다.

그리고 이 연극 <고곤의 선물>로 피터 쉐퍼에게 완벽하게 무릎을 꿇었다.

나의 굴복은 아주 정당하고, 아주 깔끔하고, 아주 명확해서 오히려 감사함이 느껴질 정도다.

보는 내내 그랬다.

"이건 정말이지 미친 작품이다....!"

솔직히 나는 이 작품에 대한 어떠한 코멘트도 감히 쓰질 못하겠다.

그럴 깜냥도 못되지만 그러고 싶다는 생각조차 안든다.

내가 뭐라 끄적인다면 그건 불경죄(不敬罪)을 범하는 꼴이 되겠다.

 

신화보다 더 신화같은 이야기.

모든 암시와 복선은 너무 치밀하고 완벽해서 차라리 거짓말 같았다.

이제 어쩌면 좋을까!

고곤으 눈을 정면으로 봐버렸으니...

온 몸이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버리는건 시간문제다.

고곤을 가진 자도,

고곤을 마주한 자도,

고곤이... 된다...

 

헬렌 딤슨이 필립 딤슨에게 한 말은 사실이었다.

"그는 이제 현실이 될거예요, 당신에게 현실이 되서 다가올거예요!"

페르세우스와 아레나가,

에드워드와 헬렌이 되어 나에게 걸어온다.

복수와 심판.

그 진부한 고대의 원형은 지치지도 않고 전승되고 또 전승된다.

모든 이야기는, 모든 역사는, 모든 비극은, 모든 용서는

여기서부터 시작되고 여기에서 이렇게 끝을 맺는가!

끝도 시작도 알 수 없는 뫼비우스의 띠...

(나는 작품을 보는 내내 그걸 떠올렸다.)

 

김소희와 김태훈의 연기는,

그냥 그대로 발화(發化)더라.

저러다 무대 위에서 전소돼 사라져버리는건 아닐까 걱정스러울만큼 뜨겁고 강렬했다.

과거와 현재의 시간들은 완벽하게 컨트롤하는 김소희에겐 항복했고

모든 이야기의 핵인 김태훈에겐 굴복했다.

김태훈이 보여준건... 결코 연기가 아니더라. 

완벽한 대사였고, 완벽한 장면이었고, 완벽한 암시였고, 완벽한 결말이었다.

그냥 처음부터 끝까지 에드워드일 뿐이었다.

지금껏 내가 본 김태훈의 작품 중 가장 엄청났고, 가장 대단했고, 가장 무시무시했다.

거튼콜에 그가 무대로 걸어나오는데 그냥 저절로 일어서게 되더라.

그순간만큼은 김태훈이 고곤이었다.

고곤의 저주가 두려워 재관람조차도 망설여지는 작품.

이대로 속수무책으로 빠져들다가는

티라의 화강암 절벽.

그곳에서 떨어져 피투성이가 될 다음 사람이 꼭 나인 것만 같다.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용서"뿐이다.

그래서 헬렌의 마지막 대사를 나도 주문처럼 따라했다.

"나는 당신을 용서해. 나는 당신을 용서해, 나는 당신을 용서해..."

 

그러니 고곤이여!

부탁하노니 제발 그 눈을 나를 향해 돌리지 말아다오...

 

 

Posted by Book끄-Book끄
보고 끄적 끄적...2014. 4. 4. 08:06

<EQUUS>

 

일시 : 2014.03.14. ~ 2014.05.17.

장소 : 동국대학교 이해랑 예술극장

극본 : 피터쉐퍼

번역 : 신정옥 

연출 : 이한승

출연 : 안석환, 김태훈 (다이사트) / 지현준, 전박찬 (알런)

        이은주, 김지은 (질) / 유정기, 김상규 (프랑크)

        차유경, 이양숙, 노상원, 은경균 외

제작 : 극단 실험극장

 

창단 45주년이 된 극단 실험 극단의 대표 레파토리 연극 <에쿠우스>

2005년 학전블루 소극장에서 처음 봤던 <에쿠우스>의 기억은 아직도 선명하다.

그게 시작이었다.

알런의 김영민과  다이사트 남명렬에 그야말로 꽃히게 된 게.

그리고 연출 김광보 작푸을 챙겨보게 된 게.

그래서 알런을 했던 조재연이 연출과 다이사트로 출연했던 2009년 공연도 챙겨봤다.

(그때 내가 본 캐스팅은 알런은 류덕환, 다이사트는 송승환이었다.)

공교롭게도 이 작품은 매번 내게 충격을 준다.

2005년에는 완벽한 매혹이었고,

2009년에는 남창(男娼)같던 말들때문에 충격적이었고

공연이 끝난 후 말들 연기했던 배우들이 그 복장 그대로 벽에 줄지어 서있었는데 그게 그렇게 저급할 수가 없더라.

누구 머릿속에서 나온 기획인지를 놓고 정말 엄청나게 씹었었다.

그리고 2014년 세번째 본 <에쿠우스>는 아쉽게도 많이 부산하고 산만했다.

심지어 실소를 금치 못하게 만든 장면들도 있어 많이 당황스럽기까지 했다.

(나 이 작품 정말 좋아하는데...)

에매할때부터 성인인증 절차가 있어서 노출 수위가 짐작은 했지만

실제로 공연 전에 경고성 멘트도 하더라.

무대에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어서 몰래 촬영을 할 경우 조치가  취해질거라고.

 

지현준 알런.

본인이 배우로서 할 수 있는 모든걸 총동원해서 정말 미친듯이 연기한다.

그러데 나는 정말 미안하게도 37세의 지현준이 17세의 알런으로는 도저히 감정이입이 되지 않더라.

일단 보여지는 모습이 소년의 느낌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조숙을 넘어 조로(早老)했고

목소리도 일부러 소년스럽게 내려고 애쓰다보니 부자연스러워서

정신 이상이 아니라 정신지체처럼 보였다.

놀라운건 2005년 김영민 알런을 볼 땐 분명 소년의 이미지를 강하게 느꼈었다.

영화 <은교>에서 박해일 이적요에게 감정이입이 될 수 없었던 것처럼 지금의 알런도 딱 그렇다.

필사적으로 표현한다는 것과는 별개로...

어쩔 수 없는 이질감때문에 낯설었다.

 

다이사트 김태훈.

나쁘지는 않았지만  다소 과하게 흥분하는 장면들은 의외였다.

알런의 격렬한 정열을 부러워하다못해 불같은 질투에 빠진 사람 같다.

그래서 객관적인 시각이 필요한 장면들이 오히려 약하게 느껴진다. 

2005년 남명렬이 보여줬던 다이사트.

아마도 내겐 그 모습이 가장 정답에 가까웠던 것 같다. 

나는 <에쿠우스>를 보면서 한없이 심각해지는 가라앉는 것도 싫지만

코믹하게 웃는 것 더 싫다.

그런데 이번 공연에서는 그런 장면들이 너무 많다.

알렌의 아버지 역이던 김상규는 사투리톤이 너무 많아서 객석이 큭큭 웃었고

알런이 바닷가에서 처음 말을 보는 장면에서 등장하는 기수는...

개그콘서트의 한 장 면 같아 절망적스러웠다.

알런이 최면상태에서 말을 타는 걸 재연 장면은 너무나 어수선하고 산만하다.

(2005년에 이 장면을 처음 봤을 때 정말 충격적이라 할 말이 없었는데...)

중간에 인터미션 때문에 이야기가 댕강 잘리는 것도 너무나 싫다.

어딘지 치열함은 줄어들고 원시성만 강조된 듯한 느낌.

 

아쉽다. 아쉽다. 너무 아쉽다.

워낙 애정이 깊은 작품이라 더 많이 아쉽다.

다이사트 박사가 세상과 단절된 알런의 자아를 되찾아 주려고 노력했듯

나의 <에쿠우스>도 본래의 자기 모습을 되찾았으면 좋겠다

자신의 고통과 싸워 자신의 세계를 찾았으면 좋겠다.

 

* 온몸을 던져 열연을 보인 배우들에게는 아낌없는 박수를 보낸다.

  왜냐하면 그들은 충분히 아름다웠기에!

 

Posted by Book끄-Book끄
보고 끄적 끄적...2011. 10. 25. 06:07

<신의 아그네스>


일시 : 2011.10.01. ~ 2011.10.31.
장소 : PMC 대학로 자유극장
출연 : 윤소정, 이승옥, 선우
극본 : 존 필미어(John Pielmeier)
연출 : 이대영

미국의 인기 희곡작가 존 필미어(John Pielmeier)의 세계적인 명작 <신의 아니그네스>는,
1982년 초연이래 지금까지 브로드웨이에서 공연되고 있는 작품이다.
우니나라에는 1893년 초연됐고
아그네스역엔 윤석화가 캐스팅됐었다.
그후에 신애라, 김혜수등 당대 최고의 여배우들이 아그네스를 연기해 화제를 불러 일으키기도 했다.
그래선지 작품이 공연될때마다 매번 작품성과 대중성에서 엄청난 흥행을 일으켜 소위 "아그네스 신드롬"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이번 공연에는 초대 ‘리빙스턴 박사’로 활약한 ‘윤소정’이 다시 리빙스턴으로 무대에 섰다.
아그네스를 보호하려는 원장 수녀 마리암 역은
오랜 기간 국립극단에서 활동해 온 원래 연극배우 이승옥이, 
아그네스 수녀역에는 뮤지컬에서 연극으로 영역을 넓힌 선우가 맡았다.
신이 주신 특별한 재능, 천사의 목소리라는 축복을 받은 아그네스 역에 선우를 선택한 건 
KBS 남자의 자격 하모니편과 무관하지는 않으리라.
살짝 속보이는 캐스팅은 아닌가 생각됐다.
연출 이대영은 이 현대적인 고전물에 조명과 음악적 요소를 더해서
극적 효과를 끌어들이려 노력했다는데 배우 선우에 대한 기대치가 상당한 듯 느껴진다.
개인적으론 이 연극을 선택한 건 순전히 배우 "윤소정" 때문이다.
세 번째 리빙스턴 박사를 맡게 된 배우 윤소정은 스스로 이 작품을 자신의 대표작이라고 말했다.



21살의 어리고 순진한 수녀가 어느날 아기를 낳는다.
그리고 그 아이는 탯줄로 목이 감긴채 휴지통에서 사망한 상태로 발견된다.
과다출혈과 정신적인 충격으로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아그네스 수녀.
아그네스는 기소됐고 그녀의 정신감정을 위해 수녀원으로 정신과 의사 리빙스턴 박사가 찾아온다.
<신의 아그네스>는,
이렇게 엄청나게 충격적인 소재와 섬세한 심리묘사로 인해
"현대인의 성서" 혹은 "여자들의 에쿠우스"로 불린단다.
순수함 속에 광적인 모습이 내재된 ‘아그네스 수녀’
그런 그녀를 신의 가까이에서 보살피려는 ‘원장수녀’
진실을 밝히는 것으로 아그네스를 구하려는 정신과 의사 ‘리빙스턴 박사’
두 시간 동안 세 명의 배우가 펼치는 열연은
논쟁이고, 소통이고, 이해고 ,치유고, 구원이다.
윤소정, 이승옥 두 노장의 연기는 어떤 젊은 배우들보다 더 열정적이고 진지하고 확고했다.
순간순간 두 개의 불꽃이 맞부딪치면서 타닥거리는 강렬함!
<에쿠우스>에서 느꼈던 트라우마(trauma)의 충돌이 이 작품에서도 느껴진다.
아그네스의 트라우마, 리빙스턴의 트라우마, 그리고 원장 수녀 마리암의 트라우마.
그건 모두 모성을 가진 여성만이 가질 수 있는 감정이다.
어쩌면 유일하게 공통된 감정일지도...
그래서 이 작품이 종교가 그 배경이 됐는지도 모르겠다.
신과 모성이라는 유일하고 절대적이며 맹목적인 사랑과 집착!
마리암 원장수녀는 은폐를 위해서가 아니라
정말로 아그네스에게 일어난 일이 신의 기적이라 믿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이 모든 게 다 신의 뜻이자, 신의 증표(證標)라고...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던 아그네스는
모든 걸 너무나 명확하고 분명하게 기억 속에 담고 있다.
신만큼 유일하고 절대적이던 어머니에게 박은 어린 시절의 학대와 성폭행.
나는 그런 아그테스가 스스로 자신과 계약을 했다고 생각한다.
마치 파우스트처럼...


두 시간 가까운 시간동안 90% 이상 등장하는 리빙스턴 박사!
배우 윤소정의 존재감은 고요한 폭풍과 같다.
결코 고성을 지르지 않으면서도 충분히 사람을 몰입시키는 엄청난 집중력.
그녀의 무대를 보고 있으면 그래서 때때로 소름이 끼친다.
원장수녀 이승옥은 처음엔 낯설었는데
극이 진행할수록 시선을 사로 잡는다.
시선처리와 대사 속에 담긴 감정표현이 정확하고 성실하다.
연륜이라는 건 정말 무시할 수 없음을 절감했다.
천진난만하고 순수한, 극의 표현을 빌리자면 유리같아 깨지기 쉬운 아이 아그네스.
선우의 첫 정극 도전은 나쁘지는 않았다.
그러나 미안하게도 순수하다기엔 그녀가 너무 나이 들어 보인다는 안스러움과
(그래서 종종 순수라기보다는 몸만 자란 지진아 같은 느낌도 든다)
성가가 성가처럼 들리지 않았는다는 건 확실히 귀에 거슬린다.
장중하고 성스러운 느낌이 들기보단 가요나 팝을 듣는 느낌이다.
직접 불렀다면 어쩌면 달랐을지도 모르지만 MR로 처리한 게 많아서 아쉽다. 
딕션과 액팅은 좋았지만 표정과 감정표현이 아직 미숙하다.
어쨌든 시작이니까...

<신의 아그네스>
오랫동안 궁금했던 작품이었는데
드디어 봤다.
그것도 다행스럽게도 윤소정,
그녀가 리빙스턴으로 분한 그 <신의 아그네스>를...

Posted by Book끄-Book끄
보고 끄적 끄적...2010. 2. 4. 06:29
 "저 소년은 오직 너제트라는 말만 포옹합니다.
  저 놈의 말 대가리를 제가 뒤집어쓴 것 같습니다. 저는 절망에 빠졌습니다"


연극 <에쿠우스>의 시작은 이렇다.

얼마나 가슴 떨리게 하고 얼마나 치열하게 바라봤던 연극인가...
내가 기억하는 <에쿠우스>는
"중독"과 "탐욕"의 또 다른 이름이다.
그래서 대학로 세번째 연극열전 시리즈의 첫번째 작품으로 2009년 다시 무대에 오른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많이 두근거렸고 그리고 첫사랑을 재회하는 것처럼 마냥 떨렸다.
송승환과 조재현의 다이사트.
젊은 시절 알런으로 무대 위에 올랐던 그들의 감회에
주책없이 동참하기까지 했다.
김태우와 류덕환, 그들의 알런이 어떤 모습일지도 궁금했다.



2005년 김영민 알런에 남명렬 다이사트를 신화처럼 그리고 아직도 현실처럼 생생하고 기억하고 있는 나...
5년만에 보게 된 <에쿠우스>는
그러나 내겐 황무지를 바라보는 것처럼 피폐한 모습이었다.
코믹버전의 에쿠우스를 보면서 10분의 뜬금없는 인터미션에도 불구하고
지루함과 오랜 싸움을 해야만 했다.
조재현 연출의 <에쿠우스>는
그전까지 봤던 집요하고 끈질기고 그리고 실험적인 공연을
과감하게(?) 시장판으로 내돌리기로 결정한 듯 하다.
연극의 대중화를 위해 몇 년 전부터 시작된 열극열전 시리즈는
아마도 조재현이라는 배우의 노력이 없었다면 지금과 같은 성공을 거두기 어려웠으리라.
그래, 그건 정말 인정한다.
그리고 그의 노력과 열정에는 누가 뭐래도 기립박수를 보낸다.
물론 연극열전의 작품들이 전부 괜찮았던 건 아니지만,
어찌됐든 뮤지컬의 대중화에 밀려 침체기에 놓여 있던 연극의 유료관객 수를 엄청나게 늘려놨다는 건
내게도 대단한 이벤트요 혁신처럼 느껴졌다.
그래도... 그래도...
에쿠우스를 시장판으로 내돌린 그의 연출에
나는 너무도 너무도 화가 치민다.



송승환, 류덕환
스크린을 압도한 두 배우의 연기는
알몸에 가까운 근육질의 8마리 말들에 의해 철저히 유린되고 파괴된다.
(2005년에 비해 말 한 마리가 늘었다. 5년 후에는 9마리의 말이 등장하게 되는 건 아닐까???)
"정열을 파괴할 순 있어도 창조할 순 없다"
다이사트의 말이 무색할 만큼 알런의 열정은 그 전에 이미 사라졌고
(그래도 이 연극에서 제일 눈에 띄는 사람이 바로 류덕환이다.
그의 표정과 말투에는 알런이 어쨌든 담겨있다. 행동은 모호했지만... )
다이사트는 마치 TV 브라운관을 통해 드라마를 시청하듯 알런을 향해 내내 심드렁한 모습이다.
(여차하면 체널을 돌릴 기세다)
공연 시작 전에 송승환 다이사트가 먼저 나와 혼자 보란듯이 담배를 피우는 장면.
뭐랄까, 소문 무성한 무당집에서 바람잡이가 순서표를 나줘주며 손님들을 떠보는 액션 같이 불쾌했다.
그래도 아버지에 비하면 다이사트의 불쾌감은 그나마 봐줄만 하다.
철저한 금욕주의의 알런의 아버지는
"개그콘서트"에 출연해도 단박에 인기를 끌 수 있을 만큼 잔인하게 코믹하다.
코믹한 금욕주의자라니...
때때로 아버지로 인해 웃어대는 관객들.
나는 그런 웃음을 이끌어내는 연극이 너무 못마땅하고 너저분하고 난잡하게 느껴졌다.
알런의 아버지는 결코 관객에게 웃음을 주는 사람이어서는 안 된다.
그의 금욕이 비록 겉모습에 불과한 것일지라도
그런 이유로 더 철저히 냉소적인 비웃음을 안겨줬어야만 했다.
그래야 극의 후반부 포르노 영화장에서 아들을 마주치는 장면에서 이중적인 인간의 근본과의 대면을 보며
관객들 또한 스스로의 모습을 보는 듯 진저리를 쳐야 했다.
그러나 2009년 에쿠우스의 아버지는 처음부터 발정난 인간에 불과했다.
그는 아마 꿈에서도 금욕을 생각하지도 못할 인물이다.
그렇다면 알런의 어머니는?
교사출신의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어머니는
과연 자신의 아들에 대해 감정을 가지고 있기는 한건가?
2005년도에 나는 어머니에게서 어쩌지 못하는 "애증"을 느꼈다.
지금은 제멋데로 노는 아이에게 건성으로 대답하는 피곤에 찌든 부모를 보는 느낌이다.
알런의 부모들은 도대체 어쩌다 이렇게 되버린 걸까?



알런을 다이사트 박사에게 부탁하는 판사는.
아무래도 직업이 잘못 표기된 것 같다.
내가 느낀 그녀의 모습은 다이사트 박사에게 끊임없이 추파를 던지는 여비서에 불과했다.
늘씬한 다리를 보란 듯이 꼬고 앉아서
심각성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태도로 알런을 부탁하고 종종 찾아와 경과를 듣는 그녀는
당황스러웠고 깊이감이 없었다.
마치 가십기사를 대하는 여비서의 포즈 그대로였다.
그녀가 구하고 싶었던 건 불쌍한 알런의 영혼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모습이었던 것 같다.
판사가 유부남 정신과 의사를 상대로 신분상승을 꿈꾸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든 조용히 그녀의 손을 붙잡고 다른 정신과 의사를  만나게 하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돈많은 재벌 노인네라도 소개시켜줘야만 할 것만 같다.



...... 혼란스러웠다. 연극 《에쿠우스(Equus)는 비극인데 관객은 숭고한 주인공이나 좌절이 아니라 다른 데 집중하고 있었다. 그들의 넋을 낚아챈 건 무대 위를 뛰어다니는 말(馬)들이었다. 절대 다수인 여성 관객은 1막이 끝나고 인터미션때 온통 말 이야기뿐이었다. 그들이 숭배하는 것은 근육질의 말 같았다. 그렇다면 연극이 변한 것인가, 관객이 달라진 것인가...... 이 연극은 미완성이다. 비극을 사랑한 관객은 실망했을 수도 있다. 말들을 강조한 이번 《에쿠우스》는 이쪽과 저쪽 사이에서 서성이는 것 같았다. 대중성을 얻었지만 작품의 정신까지 전달됐는지는 모르겠다. 즐기다가도 서글퍼졌다......

누군가 이런 기사를 썼다.
그리고 나는 전적으로 이 기사에 동의하며
이렇게 동의해야만 하는 게 너무 화가 난다.
"과연 나는 누구를 숭배해 본 적이 있는가?"
알런을 치료하며 스스로 던지는 다이사트의 질문은 공허해지고 말았다.
더불어 알런이 미치게 부럽다고 말하는 그의 고백 또한 정당성을 잃었다.
말의 성전에서 의식을 치르고 널브러진 알런을 부등켜 안으며
내가 널 치료해주겠다고 했을 땐
"너나 잘하세요!"라며 친절한 금자씨가 되어 말해주고 싶었다.
피곤에 찌든 다이사트가 자신의 힘으로 구할 수 있는 건 과연 뭘까?



2005년 내가 그토록 정열적으로 봤던 에쿠우스는
성적인 판타지를 주는 애로물도
턱없는 웃음을 주는 코믹물도 아니었다.
내 기억 속 알런과 너제트가 의식을 치루듯 달리는 장면은
성스러웠고 장엄했었다.
(그리고 나는 분명 그 장면에서 눈물을 흘렸었다)
그러나 떡칠(?)을 하고 나온 건장한 보디빌더들이 취하는 과한 동작들은
경박한 섹스코드를 눈 앞에 들이대는 것 같아 불쾌하고 난감하기까지 했다.
남창처럼 외부에 전시된 썬텐된 그들의 몸을 보며 나는 연극 <에쿠우스>의 비극성을
연극이 끝난 로비에서 느닷없는 느꼈다.
(그나마 그들 얼굴이 두꺼운 분장으로 덮여있어 다행이라 생각했다. 
 맨 얼굴로 그렇게 서있었다면 얼마나 서로 난감했을까?)



2005년 포스터를 찾아 보면서 
같은 작품도 누군가에 의해 이렇게 다를 수 있다는 걸 실감하며
나는 심각하게 <에쿠우스>에 대해 현재진행형으로 당황하고 있다.
어쩌면... 어쩌면...
김영민 알런과 남명렬 다이사트가 너무 강렬했기에 내게 <에쿠우스>에 대한 고정관념이 생긴 건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결코 그 고정관념을 나는 결코 깨고 싶지 않다.
2005년 <에쿠우스>는 내겐 분명 구원같은 작품이었는데
2009년 <에쿠우스>는 내겐 이제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이 연극에 진심으로 칭클창클을 메고 싶다.
너접한 푸줏간을 다녀온 느낌이다.



    -----  only 퍼포먼스 <에쿠우스>
Posted by Book끄-Book끄
보고 끄적 끄적...2009. 6. 23. 06:38
1988년 개봉했던 더스틴 호프만과 톰 크루즈 주연의 영화 <레인맨>을 기억하는가?
이 작품은 그해 아카데미 작품상, 각본상, 남우주연상, 감독상 등
주요 4개 상을 거머쥐기까지 했다.



지금으로부터 무려 20여년 전
극장에서 이 영화를 봤었다.
아직 기억하고 있는 이유는
<킬링필드>처럼 학교에서 단체관람으로 본 게 아닌
내 돈을 내고 최초로 봤던 영화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자본주의의 위대함이여~~ ^^)



영화를 보는 내내
톰 크루즈의 잘생긴 얼굴보다
더스틴 호프만의 연기가 어린 눈에도 엄청나 보였던 기억.
"저 사람 정말 자폐아 아니야!!"
솔직히 감동을 받았던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제대로 이해나 했을까....)
그 영화의 몇 장면들은 아직 선명하게 기억 속에 남아있다.



"서번트 신드롬"을 가진 자폐아  형 "레이먼드 바비드"와
인터넷 주식 트레이더 동생 "찰리 바비드"
어느날 찰리는 아버지의 죽음으로 형의 존재를 알게 된다.
만약, 내게도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형제가 어느날 나타난다면....
그것도 같은 부모밑의...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된다.





탈렌트와 영화배우로 유명한 임원희. 이종혁의 뒤를 이어
멋진 연극배우 김명민과
감초역의 코믹 연기의 대가 뮤지컬 배우 김성기.
그 둘이
레이몬드와 찰리를 연기했다. 



씁쓸했던 것은
대중적으로 인기가 있는 두 사람이 공연했을 때와
공연료 차이가 달라졌다는 사실 (30000 -> 25000)
대중의 힘이라는 게 가격까지도 조정하는구나 싶어
왠지 연극인들이  설움에 공감하게 된다.



<햄릿>, <에쿠우스>, <나쁜 자석>
그리고 그는 기억하기 싫겠지만 첫 뮤지컬 <카르멘>까지 (그건 좀..... @@::)
내가 아는 김영민은
연극 위에서 그대로 꽃이 되는 사람이다.
그의 몰입력은 신비감까지도 불러일으킨다.
그런 그의 무대를 오랫만에 볼 수 있다는 생각에 설랬다.
그리고 그 설램에 대한 보상을 그는 역시나 해줬다.
그의 눈물...
그 간절함과 미안함과 절실함.
어쩌면 내리는 빗소리보다 내겐 더 큰 빗소리로 남겨졌는지 모른다.



내겐 적격인 <라만차의 돈키호테>로 기억되는 뮤지컬 배우 김성기1
<사랑은 비를 타고>의 소심쟁이 노총각 형,
<벽을 뚫는 남자>에서 열연했던 일인다역 (그의 알콜중독 의사는 꺄아~~~),
<미녀는 괴로워>에서의 성형외과 의사에 이어, <자살 여행>까지...
그의 코믹연기는 그야말로 물이 오를데로 올라
마치 실생활도 그렇지 않은지 의심하게 만든다.
왠지 빈 듯한 헐렁함 속에 꽉꽉 채워진 치밀함
그에게서 발견할 수 잇는 매력 포인트!



매표소 앞에 붙어 있는 홍보물.
역시 대중의 힘은 어디든 강력하다.
<베토벤 바이러스>의 여파가 이곳 공연장까지 이어지길
얼마나 바랬을까.....
(그러나 역시 대중은 대중이다!)



2시간 가량의 연극을 보면서
혹시, 
나도 <레인맨>을 잃어버린 건 아닐까? 생각했다.
시간이 자나도 레이몬드는 동생 찰리를 잊지않고
천재적인 기억력으로 매 순간순간을 전부다 기억하고 있었다.
찰리는 발음이 명확해지기도 전에 그 형을 떠나 보냈다.
(형의 자폐 증세가 동생에게 위협이 될 것을 두려워한 아버지에 의해...
그 아버지 역시 사랑하는 장남 레이몬드는 눈물로 병원에 맡겼다)
찰리의 불명확한 발음은 레이몬드를 레인맨으로 만들었다.
그 레인맨은 찰리의 힘든 순간을 함께 해준 유일한 친구였다.
자신만이 만날 수 있는  상상의 친구.
자신이 만든 <레인맨>
그렇게 알고 있었던 찰리....



형과의 재회로 찰리는
이미 이 세상을 떠나버린 아버지와의 관계까지도 회복한다.
그리고 그토록 두려워했던 한 가정을 꾸미기까지도...
혹 마음속에 잃어버린 것들이 있는가?
그렇다면 이제 찾아보라!
어쩌면 바로 거기서
당신의 관계 회복이 시작될지도 모른다.



연극 사이사이  흐르던 비틀즈의 노래와 빗소리
그리고 소극장에서 처음 만난 회전 무대
무대가 돌아가는 소음까지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 순간,
나는 <레인맨>과 완전한 소통의 관계를 이루고 있었으니까...

Posted by Book끄-Book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