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끄적 끄적...2014. 9. 25. 11:37

이 멋지고 대단한 소설을 나는 앞으로 몇 번이나 더 읽게 될까?

내게 터키를, 동유럽을, 마침내는 유럽을 꿈꾸게 만들고

결국 그 곳으로 발을 옮기게 만든 나의 위대한 작가 오르한 파묵.

2004년 그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을 들었을때

나는 뛰고 있던 런닝머신에서 그대로 멈춰버렸다.

우당탕탕...

운동하던 주위 사람들이 놀라서 소리 지르고,

트레이너들은 급하게 뛰어오고,...

내게 웃지 못할 헤프닝을 안겨 줬던 기억이 지금까지도 선명하다.

처음 <내 이름을 빨강>을 읽고 오르한 파묵이란 터키 작가를 알게 됐을때

너무 화가 나서 혼자 씩씩거랬더랬다.

화의 원인은,

이 책을, 이 작가를 그제서야 알게된 내 무능(?)하고 편협한 책읽기에 대한 분노였다.

솔직히 이런 마음도 있었다.

'책읽는다고 깝죽거리더니 여지껏 헛읽었구나...'

 

확실히 두 번의 터키여행은

이 책을 훨씬 더 재미있고 생생하게 느끼게 만든다.

아야소피아 주변과 술탄궁전의 골목들을 주인공들과 함께 걷는 기분.

순간순간 공간이동되는 환상에 빠지게도 했다.

역사책이기도 하고, 탐정소설이기도 하고, 환상소설이기도 한 <내 이름은 빨강>

이 책에 등장하는 모든 것들은 다 화자(話子)이고 미스터리다. 

심지어 죽음도 말을 하고, 시체도 말을 하고, 그림도 말을 한다.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모든게 다 살아서 말을 한다.

이 책은 그야말로 alive다.

게다가 더 신기한건,

지금껏 여러번 이 책을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매번 읽으때마다 새롭게 리셋된다.

분명히 책의 내용을 완벽하게 다 알고 있임에도 불구하고

읽고 있는 동안은 이제 처음 읽는 책처럼 새롭게 빠져든다.

정말 마술같은 책.

 

나는 지금 우물 바닥에 시체로 누워있다.

마지막 숨을 쉰 지도 오래 되었고 심장은 이미 멈춰버렸다.

 

이렇게 매혹적으로 시작되는 책을 도대체 어떻게 거부할까?

덕분에 요즘 오르한 파묵의 글들을 하나하나 찾아 다시 읽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또 다시 오르한 파묵과 깊은 사랑에 빠지려나보다.

좋구나...

Posted by Book끄-Book끄
읽고 끄적 끄적...2014. 6. 16. 08:41

니나 상코비치는 언니를 잃었다.

담도암 진단을 받은지 40여일 만에 죽음은 폭격기처럼 언니를 덮쳤다.

언니를 보내고 난 후 3년간 그녀는 실픔을 잊으려고 바쁘게 살았다.

사랑하는 네 명의 아들과 남편, 그리고 더 많은 남겨진 가족들이 그녀를 위로했고 걱정했지만

그녀는 위로받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날 보랏빛 의자에 않아 400쪽이 넘는 브램 스토커의 <드라큘라>를 단숨에 읽고 나서

처음으로 편안하게 잠들었다.

그리고 그녀는 다짐한다.
"하루에 한 권, 마법같은 독서의 한 해"를 살아가겠노라고.

 

..... 언니가 죽었고 나는 살아 있다. 삶의 카드는 왜 내게 주어졌으며, 난 이걸로 뭘 해야 하는가? 난 도피에 대해 생각했다. 도피하기 위해 달아나는 것이 아니라 도피하기 위해 읽는 것이다. 20세기의 작가이자 평론가인 시릴 코널리는 "말은 살있고 문학은 도피가 된다. 그것은 삶으로부터의 도피가 삶 속으로 들어가는 도피이다'라고 말했다. 내가 책을 활용하고 싶었던 방식이 바로 이것이다. 삶으로 되돌아가는 도피 말이다...

 

그녀는 책으로 슬픔을 흡수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그녀의 선택이,,,

어쩌자고 나는 또 너무나 깊게, 그리고 절실하게 이해가 되던지.

내가 그랬으니까...

지금까지도 내가 그러니까...

살기 위해, 살아 남기 위해 나 역시도 "책"을 선택했다.

 

한 권을 끝내기 실허 가슴이 찢어진 적이 있는가?

마지막 페이지가 덮이고 한참 뒤까지도

계속 당신의 귀에서 속삭이고 있는 그런 작가가 있었는가?

                                    -엘리잡베스 메과이어 <열린 문>

 

<Tolstoy and The Purple Chair>

세상 무엇으로도 위로받지 못할 때

책을 통해서만 유일하게 위로 받아본 사람들은 안다.

읽어야 할 책을 남겨놓고는 결코 눈을 감을 수 없다는 걸.

책을 통한 위로와 도피는.

평안했고 따뜻하게 그리고 충분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바로 앞에 읽었던 줄리언 반스의 책이 겹쳐졌다.

우연의 일치였을까?

줄리언 반스 역시도 2008년 평생의 문학적 동지이자 뮤즈였던 아내를 뇌종양으로 잃었다.

위로되지 않는 슬픔을 견디던 그는 2013년 넓은 하늘 위에 기구를 띄우듯

<사랑은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를 출판했다.

 

...... 아직 젊을 때, 세상은 섹스를 한 사람과 하지 않은 사람으로 나뉘었다.

나중에는 사랑을 아는 사람과 알지 못하는 사람으로 나뉜다.

그 후에도 여전히, 세상은 슬픔을 견뎌낸 사람과 그러지 못한 사람으로 나뉜다 ......

 

오르한 파묵.

나를 지옥에서 건져내준 작가.

나는 그의 책을 읽으며 세상으로 다시 나올 수 있었다.

그래서 내게 오프한 파묵은 절대자이자, 종교이자, 구원이다.

 

내 생명은 그렇게 책과 연결되어 있다.

나는...

내가 읽은 모든 책들이 총합이다.

그게 바로 나...다.

 

...... 내게 독서의 한 해는 요양원에서 보낸 한 해였다. 그것은 내 삶을 채우고 있던 건강하지 못한 분노와 슬픔의 공기에서 격리되어 지낸 1년이었다. 그것은 책의 언덕에서 불어오는 치유력을 가진 미풍 속으로의 도피였다. 나의 독서의 한 해는 언니의 죽음으로 인한 감당할 수 없는 슬픔과 나를 기다리고 있는 미래 사이에 끼어든 행동 중지 기간, 나 자신을 위한 유예 기간이었다. 책으로 채워진 1년간의 집행유예 기간 동안 나는 회복했다. 그뿐만 아니라 그 회복 단계를 넘어서 다시 생활로 돌아가는 방법도 배웠다 ......

Posted by Book끄-Book끄
읽고 끄적 끄적...2012. 7. 25. 07:31

좀 특이하고 재미(?)있는 책을 읽었다.

아이티 출신 작가 다니 라페리에르의 소설 <슬픔이 춤춘다>

다니 라페리에르는 아이티에서 캐나다로 망명한 소설가란다.

아이티 작가의 작품은 처음 읽는거라 긴장했었다.

책을 펼치는 순간 이게 소설 맞나 싶어 다시 살펴봤다.

행과 열이 정돈된 긴 서사시의 느낌.

그러다 중간준간 단문의 산문 구조가 나온다.

왠 멋을 이렇게 냈나 싶었는데 읽으면 읽을수록 구성 자체가 이야기의 흐름과 딱 맞아떨어진다.

상당히 매력적이고 흥미로웠다.

2009년 프랑스에서 메디치상을 받은수상작이란다.

메디치상은 프랑스 3대 문학상 중 하나로 세계적으로 권위가 있는 상이다.

(오르한 파묵, 폴 오스터 등 우연히도 내가 좋아하는 작가들이 이 상을 많이 수상했다 ^^)

 

자신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참 담담하고 그리고 사려깊게 썼다.

조근조근한 회고록 내지는 묵상집 같은 느낌.

책의 주인공도 아이티를 떠나 있던 사람이다.

아버지의 부고를 알리기 위해 어머니를 찾은 아들.

그러나 귀향의 장면은 마치 스쳐지나가듯 짧고 간결하다.

고향에서조차 이방인이 된 사람.

그리고 가족이지만 함께 모여 산 시간과 함께 한 추억이 거의 없는 사람들.

무덤덤할만큼 단백한 이들의 관계에  왜 자꾸 울컥하면서 가슴을 쳤을까?

슬픔이.... 춤춘다...는 책의 제목은 참 적절하고 정확했다.

분명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고 실루엣으로 남은 사람들의 움직임.

그 뭉둥그려진 움직임이 참 아프고 슬프고 서럽다.

 

우리는 두 개의 삶을 산다.

하나는 우리의 것이고

다른 하나는 어린 시절부터

우리가 아는 사람들에 속하는 나다.

 

이 문장을 읽는 순간,

아... 하고 잠시 멈칫했다.

그랬구나.

나도 이런 이유로 현실과 나 자신 사이에 점점 거리감을 느꼈던 거구나...

책의 구절이 내게 답을 줬다.

 

사람들은 항상 자신 앞에 너무나 많은 희망을 두고

자신 뒤에는 너무나 많은 실망을 둔다.

삶은 죽은 시간 없이 흘러가는

긴 리본이다.

그리고 유연한 순간 속에서 희망과 실망이 교대한다.

 

나를 담은 글을 읽으면 섬득하다.

그러나 외면할 수 없다.

이 책은 아마도 오랜 시간을 나와 함께 할 것 같다.

나는...

사실 그랬다.

무덤덤한 춤을 추며 오래고 깊은 슬픔을 차곡차곡 달래고 싶었다.

나는 시간을 기다리고 있다.

Posted by Book끄-Book끄
여행후 끄적끄적2011. 10. 21. 05:29
왕복 비행 시간을 빼면 터키에 머물렀던 시간은 고작 9일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 "고작"이란 단어는 그리움과 아쉬움, 되돌아가고픈 열망의 다른 표현이다.
그래, 처음엔 순전히 "오르한 파묵"이라는 작가 때문이었다.
(아직도 처음으로 읽었던 그의 소설 <내 이름은 빨강>을 선명히 기억한다.)
터키가 어디에 있는지, 어떤 나라인지도 전혀 모르면서
오르한 파묵이라는 작가 한 사람 때문에 그곳을 꼭 가리라 소망했고 계획했다.
9월로 일정을 잡고 비행기 티켓을 구입한 게 6월 말.
마치 전혀 여행갈 계획이 없는 사람처럼 아무 준비없이 일상에 허덕였다.
주변의 질문이 시작됐다.
"가긴 거는 거야?"
"페키지 여행으로 다시 알아봐!"
"아무것도 안 알아보는 거야?" ...
그닥 사교성이 풍부한 인간도 아니고 외국어에 능통한 것도 아니고,
하다못해 본능적인 길찾기 감각이 있는 것도 아닌 나를 사람들은 점점 더 불안해하며 바라봤다.
"한국에서도 여행 잘 안 다녀본 사람이..."
결정적인 말에 조금씩 마음이 뜨끔한 것도 사실이다.
철저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런데로 만족할만큼의 준비!
하고 싶었다. 해야겠다고 생각은 했다.
하지만 어쨌든 결론적으로 그러지 못했다.
출발하기 일주일 전에 배낭을 사면서 뭘 믿고 내가 이러냐 싶어 웃음도 났다.
인터넷 터키 배낭여행 동호회에 가입하고(그것도 달랑 한 군데만)
<프렌즈 터키> 한 권 보면서 대략의 루트만 잡았다.
터키 배낭여행 설명회에서 왠만한 책 한 권의 계획서를 가지고 온 사람들을 보면서 
거기서 나눠준 프린트 한 장만 들고 있던 나는 심하게 무안하기까기 했다.
아는 게 없어 질문도 못하는 내게 사람들이 말했다.
"배낭여행 많이 다녀보셨나봐요..."
차마 "아니요"라는 대답도 못하겠더라.
그 순간 생각했다.
어떻게든 되겠지!



터키는 배낭여행 초보자들에게 넉넉하고 따뜻한 나라였다.
동양 여자에 대한 과도한 치근댐이 있기 하지만
(피에르로티 올라가는 길에 계속 추근대며 쫒아오는 남자를 향해 급기야 버럭 화를 냈다)
대체적으로 따뜻했고 다정했다.
손가락으로 책 속의 지명을 짚어주는 어설프고 서툰 여행자에게
그들은 매번 친절하게 길을 알려줬고
심지어는 가던 길을 멈추고 정류장까지 동행해주기도 했다.
터키의 길 속에 빠져버린 이유가
사실은 이런 사람들의 도움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길 위에서 어쩌지 못하고 헤매고 있으면 거침없이 누군가가 다가와 도와줬다.
자신이 알지 못하는 곳이라면 다른 사람에게 물어서라도 알려줬다.
한국에 돌아와서 내내 그들의 도움이 고맙고 그립다.
지금도 눈 감으면 내가 걸었던 그 길들이 선연하다.
터키는 내겐 "길"이었다.
참 많이 행복하게 걸었고, 걸으면서 행복한 길이 보여주는 풍경들에 전율했고
그 길의 마디마디를 가슴에 담았다.
그 길 위에서 또 얼마나 많은 생각들을 했었는지...
터키여행을 다녀온 후
나는 얻은 것에 감사했다.
그리고 놔버리는 것이 옳은 일이라고 결론지었다.
어쩌면 이 결론을 위해 오랜기간동안 여행을 되새김질했는지도 모르겠다.
아니, 확실히 그랬다.
이제 난 좀 편해지련다.
그리고 나 혼자 단단해지리라.
 



초롱초롱한 별빛 같은 아이들의 눈빛에 눈부셨고
내내 빠져 있던 길 위에 주인처럼 떠있던 달을 보면서 황홀했다.
터키에 도착했을 땐 아주 작은 손톱달에 불과했는데 
어느새 떠나는 날 배웅하는 달은 만월에 가까워있었다.
달의 이지러짐과 가득참을 눈으로 매일 쫒으면서
나는 비워서 채워지기로 다짐했다.
그래, 이제 다 비우자!
앞으로 절대 다시는 채워질 수 없다고해도
비어있음으로 나는 고요하고 평온해지리라!

당연한 일이겠지만 나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5시에 기상해서 책을 읽고 여행기를 쓰고
6시 40분에 출근해서 하루종일 이쁘고 사랑스런 태아들을 검사하며 웃는다.
여전히 퇴근후엔 헬스장에서 운동을 하고
10시쯤에 집에 돌아오면 다시 책을 보고 컴퓨터 자판을 두드린다.
12시가 넘으면 그때서야 겨우 침대로 향한다.
그래도 내겐 이제 희망이 있다.
터키에 다시 가겠다는...
그래, 다시 돌아가리라!
그리고 그때는 아주아주 오래 그곳에 있으리라.
그래도 된다면,
그곳에서 오래오래
뿌리내리고싶다.

Posted by Book끄-Book끄
여행후 끄적끄적2011. 10. 12. 05:14
오르한 파묵과 보스포러스 해협이 있는 나라 터키!
내가 오랫동안 품고 있던 터키에 대한 로망 두 가지.
오르한 파묵이 교수로 있던 이스탄불 대학은 아쉽게도 못 갔지만
(월요일에만 일반인이 들어갈 수 있단다)
보스포러스 해협 크루즈만은 꼭 타보고 싶었다.
박물관에서 나와서 트램을 타고 에미뇌뉘 선착장에 도착.
왕복 1시간 30분 소요되는 Turyol Cruise 매표소를 찾아 또 헤매다녔다.
왼편 제일 끝에 매표소가 보이길래 표를 끊으려고 했더니
판매원 아저씨가 이곳은 페리 매표소라며 크루즈는 오른쪽으로 가란다.
(사진은 페리 매표소!)
이스탄불은 페리가 일상적인 교통 수단 중의 하나다.
그래서 춮퇴근 시간이면 몰려드는 사람들로 제법 혼잡하고 복잡하다.
다행히 오후 1시 정도라 출퇴근하는 현지인이 많지는 않았지만
크루즈를 타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만으로도 북적북적하다.
생각보다 크루즈 매표소가 작고 허름해서 놀라기도. ^^




마음 같아서는 6시간 걸리는 iDO Cruise를 타고 싶었지만
시간도 그렇고 매멀미에 대한 두려움도 있고 해서 관광객이 많이 타는 Turyol cruise를 탔다.
에미뇌뉘 선착장에 가면 이 두 곳 이외에도 개인이 운영하는 서설 cruise도 많다.
잘못 선택했다가는 돌무쉬처럼 승객이 찰때까지 기다려야하는 불상사가 발생할 수 있으니
선택은 온전히 본인의 몫!
Turyol curise는 에미뇌뉘 선착장을 출발해서 루멜리 히사르 성채가 있는 보스포러스 제 2 대교(파타흐 대교)까지
왕복 운행되고 요금은 12TL 이다.
갈때는 유럽 쪽으로 가고 올 때는 아시아 쪽으로 오기 때문에 양쪽 지역을 모두 돌아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단, 어느 쪽으로 앉는지가 관건!
크루즈를 타서 오른편으로 앉는 게 더 가까이 볼 수 있다.
처음엔 왼쪽에 앉았었는데 반대편을 보니까 훨씬 가깝길래 오른쪽으로 이동했다.



루멜리 히사르 성채는 직접 찾아가서 본 것 보다는
크루즈를 타면서 전체적인 조망을 본 게 오히려 훨씬 멋있었다.
바다와 하늘 색깔도 정말 숨막히게 에뼜고
그 속에 숨은 그림처럼 보이는 빨간색 터키 국기는 풍경 속의 포인트 같다.
(터키 여행 내내 터키 국기의 선명한 붉은색이 이 나라 풍경과 얼마나 잘 어울리는지 천만번 공감했다)
에미뇌뉘 선착장쪽 바다는 투기된 쓰레기들로 좀 지저분했지만
조금만 나와도 맑고 투명한 쪽빛 바다가 눈을 사로잡는다.
해협 주변으로 펼쳐진 유럽식 건물들도 주변과 너무 잘 어울렸고...
터키인들은 신이 주신 자연환경 때문에 색채감이 뛰어날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도 잠깐 해봤다.
(무차별 공구리 정신으로 주변풍경을 무시하고 한 길만 파는 우리나라의 꿋꿋한 건축문화가 무지 생각나는 순간이다.)



1865년 건립된 술탄의 여름 별궁 베일레르베이 궁전(Beylerbey Sarayi).
돌마바흐체 궁전과 마찬가지로 유럽식 궁을 본따서 만든 이 궁전의 시계 역시도
아타튀르크 대통령 사망시각인 9시 5분에 멈춰져 있다.
몇 번을 생각해도 대통령에 대한 터키 국민의 경외심과 그리움이 그저 부럽고 놀라울 뿐이다.
또 놀랐던 건,
이 별궁을 지을 때 일꾼들의 화합을 위해 공사기간 내내 오케스트라가 직접 연주를 했다는 사실이다.
도대체 누가 이런 아름다운 발상을 했을까?
터키란 나라는 알아갈수록 더 매력적이고 아름답고 신비롭다.
아시아 지역의 중심지 위스퀴다르 앞바다 한가운데 홀로 떠 있는 건,
일명 처녀의 탑으로 불리는 크즈 클레시(Kiz Kulesi) 탑.  
원래는 12세기 비잔틴 제국의 해양 감시초소였는데
오스만 제국 때 보스포러스 해협을 통과하는 선박의 통행세를 밪는 곳으로 사용하기도 했단다.
자세히 보면 탑 위에 사람들이 보이는데
탑 내부에  전망 좋은 카페와 레스토랑이 있어 그곳을 찾는 사람들이다.
이 탑에는 전설이 있다.
옛날 위스퀴다르 일대를 다스리던 왕에게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딸이 있었는데
16세가 되기 전에 독사에게 물려 죽을 것이라는 예언을 듣게 된다.
왕은 고민끝에 예언으로부터 딸을 구하고자 바다 위의 탑을 만들고 딸을 그곳에 숨겨 놓는다.
시간이 흘러 딸이 16세가 되는 날,
왕은 딸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탑으로 과일바구니를 보냈는데
바구니에 몰래 숨어 있던 뱀이 나와서 결국 예언대로 공주가 그 뱀에 물려 죽어버렸다는 전설. ^^
(이런 전설 어디가나 꼭 있다!)

터키를 여행하는 내내 나는 쨍쨍한 마른 길에 온통 빠져있었다.
두 발로 발도장을 꾹꾹 찍는 곳만이 온전히 내 것이 된다는 생각에 정말 미친듯이 걷고 또 걸었다.
그런데 걷는 길이 아닌 "푸른 물길"에 그만 내 발목과 눈이 덜컥 사로잡혔다.
그래, 또 다른 전설이 이제 막 시작됐구나!
푸른 물의 전설 앞에서
풀어지듯 황홀해져 그만 물과 함께 오래오래 흘러버렸다.

터키는...
완벽하게 나를 무장해제시킨다.

Posted by Book끄-Book끄
그냥 끄적 끄적...2011. 6. 30. 13:58
오래전부터 작정했던 터키 여행.
드디어 항공권 발권까지 완료했다.
내일부터 거의 모든 항공사가 운임을 인상한다고 해서
좀 저렴한 티켓이 있나 계속 기다리다 오늘 아침에 에미레이트항공으로 결재를 완료했다.
무려 140만원!
9월 3일 밤 11시 55분에 출발해서 13일 오후 4시 35분에 한국 도착이다.
현재 덜렁 왕복 항공권만 손에 쥔 상태.
나머지는 터키에 도착해서 해결한 계획이다.
주변에서 성화다.
너무 대책없이 가는 거 아니냐고...
그런데 그냥 대책없이 갈란다.
더 늦기 전에...


서울 - (두바이 경유) -이스탄불 - 카파도키아 - 파묵칼레 - 셀축(에페스) - 이스탄불 - (두바이 경유) - 서울

가장 많이 가는 코스로 가긴 하는데
일정은 정하지 않았다.
맘에 드는 곳이 있으면 한 곳에 좀 오래 머무를수도 있어서 숙소는 따로 잡지 않을 생각이다.
도미토미 몇 군데 확인해서 현지에서 해결!
12시간 가량의 야간버스를 여러번 타는 걸 대비해서 체력도 많이 비축해야 한다.
저질체력도 그저 황송한 체력이라 걱정이 많긴 하지만 그래도 잘 해낼 것을 믿는다.
이제부터는 열심히 터키를 공부해야겠다. ^^
빨리 9월이 왔으면...



                                           <이스탄불과 보스포러스 해협>

                                                         <카파도키아>

                                                                  <파묵칼레>

                                                   <셀축, 에페스>
동양과 서양의 교차점,
현대와 고대의 건물이 함께 공존하는 곳.
최대한 많이 담고 기억하고 싶다.
터키...
어쩌면... 어쩌면...
영영 돌아오고 싶지 않을지도...
오르한 파묵이 있는 곳!
그곳에 드디어 간다.
Posted by Book끄-Book끄
읽고 끄적 끄적...2010. 10. 6. 06:31
오르한 파묵!
또 다시 이 사람에게 완벽하게 매혹당하다.
이런 이야기일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노벨 문학상 수상 이후 첫 장편소설
오르한 파묵은 말했다.
"나는 이 소설로 기억될 것이다”

5월에 우리나라에 출판됐을 당시에 바로 손에 넣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책을 펼쳐보지 않았었다.
오래오래 숨겨놨었다.
힘들 때, 지칠 때, 위로가 필요할 때 펼쳐보리라 다짐했었다.
지금은 더 오래 이 책을 간직했어야 했던건 아닌가 후회하고 있는 중이다. 
이렇게 휩싸이면 제자리를 찾기가 또 얼마나 버거울까?
단지 소설책일뿐인데도 나는 이 매혹과 질투와 신비에 화가 난다.
오르한 파묵의 책을 읽는 동안은
나는 먹지 않아도, 자지 않아도 괜찮다.
허기도 졸음도 그의 책을 손에 잡는 동안만은 저절로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버린다.
오르한 파묵!
비참함이 느껴질 정도로 나를 완벽히 매혹시키는 작가!
그것도 여러 번,
철저히 치명적으로...



한 여자와 만나 44일 동안 사랑하고,
339일 동안 그녀를 찾아 헤맸으며,
2864일 동안 그녀를 바라본 한 남자.


또 다시 신물나는 사랑 이야기라고?
맞다!
그러면서 동시에 아니다.
한 사람을 너무 사랑한다고해서
그 사람의 입과 손이 닿았다는 이유만으로 담배꽁초 4,213개를 집에 모아놓는 사람이 있을까?
귀걸이, 소금통, 도자기 개인형, 화장수 병, 라크 잔, 설탕통, 모과를 가는 강판 등은 어떤가?
이 정도의 집착이라면 사랑이 아니라
단지 도착적인 정신병의 일종이라고 판단하고 싶어질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책을 다 읽고 나면 인정하고 희망하게 된다.
언제가 꼭 "순수 박물관"을 방문하리라.
그래서 케말이 수집하고 보관했던 퓌순의 흔적이 남겨진 이 모든 물건들을 두 눈으로 확인하리라.
물론 "순수 박물관"을 방문할 땐 반드시 이 책을 들고 가게 될 것이다.
책 안에 있는 1회 무표 입장권을 보여주면서 말이다.
너무 책 속에 빠진 생각이라고 말하고 싶을까?
역시나 그렇지 않다.
올해 하반기에 터키 이스탄불에 "순수 박물관"이 정말로 일반에 공개된단다.
(계획대로라면 8월에 이미 공개됐을지도 모르겠다)
소설의 주요 배경이 된 이스탄불 추쿠르주마에 있는 퓌순의 집.
그곳을 방문하면 소설에 나오는 모든 물건들을 실제로 볼 수 있단다.
번역자의 말처럼 이야기가 책에서 나와 현실에 존재하고 있는 것을 목격하게 되는 셈이다. 
소설의 모든 것들을 재현한,
작가가 창조한 한 편의 소설이 이렇게 현실로 재현된다는 게 신비롭다.
문학이 현실을 새롭게 창조할 수 있다는 사실!
글의 힘에 전율이 인다.
...... 오르한 파묵이라는 작가의 작품을 번역하는 가장 큰 보람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그의 작품을 전 세계에서 누구보다 먼저 읽어 볼 수 있는 특권을 갖는 것이며, 처음 읽는 순수한 감동과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것이라고 답하겠다. 그러므로 이후에 이어질 지옥과도 같은 번역의 고통을 이겨 낼 수 있는 힘도 아울려 얻는 것이라고 ......
번역자 이난아는 말했다.
나는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번역자가 너무 부러워서 불같은 질투가 난다.



퓌순과 케말.
그 둘의 사랑은 이루어졌을까?
이루워졌을 수도 있고 이루어지지 않았을 수도 있다.
인생은 절대로 우리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다고 했던가?
그렇더라도 이 사랑은 충분히 의미있고 그리고 완벽하게 아름답다.
사랑하는 사람이 눈 앞에서 사라졌을 때 삶의 모든 광채도 함께 사라졌다고 말하는 사랑.
그 사람을 보는 것만으로도 모든 것이 한순간에 제자리를 찾는 것 같고,
세상이 의미 있고 아름다운 곳으로 변해버린다는 사랑.
그녀와 한 집에 살 수 없기에 그녀의 손길이 닿았던 물건들을 하나하나 훔치는 사랑.
그 사소한 물건들은 아름다운 순간을 연상시키는 물건을 넘어, 순간의 일부가 된다.
그리고 그것은 집착적으로 사랑하지만 '소유할 수 없는' 누군가에게서 어떤 일부를 떼어 내는 행복이란다.
9년의 기다림 끝에 함께 할 수 있게 된 두 사람의 최후가 되어버린 밤.
신파라고 작위적이라고 비난하진 말자.
이 책을 읽으면 소설속 이야기는 그대로 현실이 된다.
그것도 의심할 여지가 없는 생생한 현실.
나는 내 가슴팍으로 운전대가 꽃힌 것처럼 내내 극심하게 아팠다.
그리고 그 고통은 묘하게 육체의 통증을 동반했다.
영리한 사람들은 인생이 아름다운 것이며, 인생의 목적이 행복이라는 것을 잘 안단다.
그런데 나중에는 행복하다고 말하는 건 바보들 뿐이라나!
"순수 박물관"은 그런 바보들을 위한 책이며 장소다.
점점 사라지고 희미해지는 "시간"이  하나의 "공간"으로 형체를 갖게 되는 곳.
<순수 박물관>
터키에 가게 되면 꼭 이곳에서 하루를 보내리라. 
꼭 그렇게 하리라...

너는 한때 나의 연인이었지
내 곁에 있을 때조차 나의 그리움이었지
지금 너는 다른 사랑을 찾았어
행복이 너의 것이길
고통과 번민은 나의 것이니
삶이 너의 것이 되길, 너의 것이 되길


<순수 박물관>을 탈고한지 얼마 지나지 않았지만
오르한 파묵은 이미 새로운 소설 집필에 착수했단다.
그러니 견디자, 버티자.
그의 글을 읽기 위해서라면 긴 노동같은 기다림도 나는 기꺼이 감수할 수 있다.
괜찮다.
견딜 수 있다,
버틸 수 있다.
Posted by Book끄-Book끄
달동네 책거리2010. 10. 5. 05:24

<환상의 책> - 폴 오스터

 환상의 책

폴 오스터...
참 매력적이고 그리고 신비감 가득한 미국 작가입니다.
개인적으로 “폴 오스터”와 터키의 국민 작가 “오르한 파묵”을 자꾸 비교하게 되는데요, 두 사람 모두 신비적 탐미주의자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습니다.
차이가 있다면 “오르한 파묵”은 환상 속에서 현실을 이야기한다면 “폴 오스터”는 정확히 그 반대의 방법을 택하죠. 현실 속에서 환상을 이야기하는...
그러면서도 두 작가의 이야기 방식은 참 묘하게 닮아있습니다.
“오르한 파묵”이 지적이고 명석한 백과사전적인 글을 치열하고 아름답게 쓴다면, “폴 오스터”는 가십거리스러운 사건을 잡아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면서 현실감을 갖게 만듭니다.
둘 다 범접할 수 없는 독특한 스타일을 만들어 낸 작가라고 할 수 있죠.
그리고 두 사람의 책을 우리나라에 번역하는 번역가도 멋진 한 쌍의 페어를 연출합니다.
“오프한 파묵”에게는 번역가 “정영목”이, “폴 오스터”에게는 번역가 “황보석”이...
아마도 두 이국의 작가가 다른 번역가들을 만났다면 과연 지금과 같은 느낌을 전달받을 수는 없을 것이라 감히 단정합니다.

폴 오스터의 소설들...
참 재미있습니다. 그러나 읽기를 쉽게 포기하게 만드는 책이기도 하죠.
소위 말하는 고비를 넘어야만 폴 오스터의 이야기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일단 그 고비를 넘기면 손에서 놓기가 싫어질 정도죠. 그런데 그 고비라는 게 좀처럼 넘기가 힘들다는 게 문젭니다.
읽지 않고 포기하는 자에게는 결코 비밀의 문이 열리지 않으리라는 묵시록 같기도 합니다.
우리나라에 현재 그의 소설은 전부 14권이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 중에서 저는 정확히 8권의 소설을 읽었네요.
개인적으로 폴 오스터의 화두(話頭)는 실종과 풍자, 그리고 미스터리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읽은 폴 오스터의 거의 모든 주인공들은 결국은 실종을 선택하죠.
그 과정에서 우리는 숱한 미스터리와 세상을 향한 풍자를 맞닥뜨리게 됩니다. 그리고 그 길고 긴 실종의 과정은 동양의 선(仙) 사상과 묘하게 닮아있기도 합니다.
2002년 쓰여진 이 책의 원제는 “Book of illusion"입니다.
2008년 우리나라에 발표된 “환상의 책”이라는 제목보다는 “Book if illusion"이라는 원제가 확실히 더 폴 오스터스럽네요.
"illusion"이라는 뜻에는 왠지 은밀하고 비밀스런 느낌이 있는데, "환상"이라는 단어는 허황된 눈속임과 노골적인 드러냄이 느껴지기 때문이죠.
“Book of illusion"의 첫 장은 프랑스 낭만주의 작가 “샤토브리앙”의 짧은 글로 시작됩니다.
...... 인간은 하나의 동일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니다.
    끝에서 끝까지 이르는 여러 다른 삶을 살며 그것이 바로 비극의 원인이다 .....

그러니까 이 책은 두 사람이지만 동시에 같은 사람이기도 했던 누군가에 대한 기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두 사람의 같지만 다른 삶 이야기, 그리고 추적과 멈춤, 끌어당김과 거부가 잔잔하지만 집요하게 이어집니다.
그리고 그건 모든 인간의 모습, 그것이기도 하죠.

오래 전에 실종된, 그래서 죽었다고 믿어지는 무성 코미디 배우 “헥터 만”, 그리고 얼마 전 비행기 사고로 사랑하는 아내와 두 아이를 잃고 스스로를 불행의 삶 속으로 밀어 넣는 것으로 시간을 보내는 대학교수 “데이비드 짐머”.
어느 날, 데이비드는 TV를 통해 헥터 만이 출연한 오래된 무성 코미디 영화 한 편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헥터의 콧수염과 양복은 그에게 깊은 아우라를 남기죠.
절망 속에 살던 대학교수 짐머는 세상에 남겨진 헥터의 무성영화 12편을 보기 위해 집을 나서 몇 개월 동안 세계를 돌아다닙니다. 그리고는 다시 9개월 동안 칩거하듯 세상과 단절한 체 헥터 만에 대한 집필을 시작하고 드디어 <헥터 만의 무성 세계>라는 제목의 책을 출판하게 됩니다.
그리고 어느 날 우편함에 배달된 한 통의 편지.
헥터 만의 부인이라고 자처하는 사람이 쓴 편지의 내용은 "그가 당신을 만나고 싶어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데이비드는 처음에는 이 편지를 믿지 않았습니다.
그가 진짜 헥터 만인지 어떻게 아느냐는 답장에 그녀는 다시 편지를 보냅니다.
“제 말이 진실임을 아시는 유일한 방법은 초청을 받아들이시는 것입니다.”
편지는 계속 이어집니다.
“그 사람이 1929년 할리우드를 떠난 뒤 여러 편의 장편 특작 영화들을 쓰고 감독했다는 말씀을 드린다면 오시겠다는 마음이 드실는지요? 헥터는 이미 아흔이고 나날이 건강을 잃어 가고 있어요. 그 사람은 제게 남긴 유언장에다 자신이 세상을 뜨고 나서 24시간 내에 그 필름들과 원본을 모두 파기하라고 했는데, 저로서는 그 사람이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그녀의 편지 내용대로라면 헥터 만은 스스로 자발적인 실종을 선택했다는 이야기네요.
이 대목에서 주인공보다 오히려 제가 더 헥터 만의 진실을 추적하고 싶어지는 열망이 가득합니다.
다행히 그를 데리고 가기 위해 한 여자가 등장합니다.
헥터 만의 전기를 쓰고 있다는, 헥터 만과 함께 영화를 만들었던 카메라맨의 딸 엘머가.
함께 뉴멕시코 블루스톤 농장을 향하면서 데이비드는 헥터 만의 모든 생애에 대한 이야기를 자세히 듣게 됩니다.
그야말로 그녀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나다니엘 호손의 <모반>처럼 그를 산 채로 먹어치워 버렸습니다.
영화배우로서의 헥터 만의 삶, 그리고 스스로 실종을 선택하고 콧수염을 자르고 양복을 벗고 허먼 레서로의 삶, 얼굴을 가면으로 가리고 라이브 포르노 공연배우로 살았던 삶.
그는 그 삶들이 자신에 대한 보복 내지는 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죽음보다 단순하고 파멸보다 더 나은 방법, 끝장을 보지 않고서도 자신을 계속 죽여 나갈 수 있는 방법으로 그는 타락을 선택했던 거죠.
... 만약 내 삶을 구할 생각이라면 그 삶을 파멸시키기 일보 직전까지 가야 한다....
그런데 참 아이러니하고 재미있는 건,
헥터 만의 삶이 바로 데이비드의 삶이기도 하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두 사람은 분명 다른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어쩌면 두 사람의 삶이 이렇게까지 동일할 수 가 있을까요?
“도플갱어” 혹은 “평행이론”이었을까요?

이 이야기는 일종의 “미궁”입니다.
비극적이면서 동시에 희망을 주는 결말.
어쩌면 “믿거나 말거나”류의 황당한 결말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다 읽고 나면 말이죠. 이런 생각을 심각하게 하게 됩니다.
“이게 정말 허구일까?”
폴 오스터의 이야기의 끝은 항상 그렇습니다.
“당신들이 이 책을 읽고 있을 때면 이 책을 쓴 사람이 벌써 오래전에 죽었다고 믿어도 좋다.”
이런 신비주의가 무책임의 한 형태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세상 모든 사람의 삶은 어쨌든 모두 익명성의 보장이고, 실종이고 그리고 은밀함의 추구임에는 분명하죠.
“나는 빌려다 쓰는 삶을 살고 있었다.”
폴 오스터의 소설 속 주인공들은 매번 이런 고백을 합니다. 그렇게 말함으로써 읽는 이에게 당신의 지금 삶은 어떠며 은밀한 질문을 던지죠.
만약에 빌려다 쓰는 삶이라고 느낀다면 그것은 단지 잠시 동안의 실종이라고 말합니다.
조만간 누군가에 의해 진실이 담긴 삶의 문이 열릴 것이고 그렇게 되면 당신의 이야기는 맨 처음부터 다시 새롭게 시작될 거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지금은 은밀하고 비밀스럽게 잘 보관하고 있어야 한다고 충고하는 셈이죠.
끝나지 않은 이야기를 읽고 있다는 느낌.
그러데 그 이야기는 앞으로도 결코 끝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세상에는 알아야 할 이야기가 있고 알지 않는 게 오히려 더 좋은 이야기가 있다고 합니다.
이야기를 알고난 전과 후가 극명하게 달라지는 경우에는 더더욱 말이죠.
저는 말이죠. 책을 읽으면 매번 그 책 속으로의 실종을 간절히 꿈꿉니다.
내 책이라는 소유욕보다 내 이야기라는 소유욕이 백배는 더 강하죠.
그래서 늘 또 다른 이야기를 찾아 나서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폴 오스터의 <환상의 책>
그 속에서 제 맘 같은 구절이 있어 에필로그로 남겨봅니다.

...... 여기까지 온 당신들은 실로 위대하다 ......


Posted by Book끄-Book끄
달동네 책거리2010. 4. 22. 08:19

<그건, 사랑이었네> - 한비야 

그건 사랑이었네

저는 개인적으로 목소리 크고 수다스러운 사람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습니다. 왠지 시비를 걸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 말이죠.
그런 저의 기준으로 따진다면 일단 "한비야"는 좋은 점수를 받기가 아무래도 어려운 사람이죠.
참 많이 일을 만들어서, 참 많이 지치지도 않고, 참 많이 치열하게, 참 열심히 하면서 사는 사람, 한비야!
얼마 전에는 가을에 함께 커피를 마시고 싶은 지식인 2위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1위는 안철수, 3위는 공지영이었죠)
“바람의 딸”로 지구를 걸어서 세 바퀴 반이나 돌아야 했고, 돌아와서는 다시 우리나라도  돌아줘야 했고, 그 뒤엔 불혹의 나이로 주위의 반대를 뿌리치고 중국으로 날아가 어학공부도 해야 했고, 그런 과정들을 또 몇 권의 책으로 열심히 써내야 했고...  다행히(?) 그 책들이 나란히 베스트셀러에 올라서 어느 정도 수확도 있었겠지만 말이죠.
참 복 많은 사람이라고 무작정 생각하기도 했었죠.
그녀의 책들을 차례차례 읽으면서도 솔직히 별다른 감흥을 받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생각하기도 했었죠.
“한비야와 나는 참 궁합이 안 맞는 상대구나” 라고...
이제와 10년 넘게 안 맞았던 궁합이 돌연 한 권의 책으로 찰떡궁합이 된 건 아니지만 분명 그녀에게 받은 메시지가 있음을 부정할 순 없습니다.
사람은 누군가에게 영향을 주고 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했던가요!
“무릎팍 도사”에 나와 강호동 앞에서 “조조조조~~~”을 외치던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 자주 “울울울울~~~”에 빠져 있던 저는 웃을 수밖에 없었죠.
우리 둘이 만나면 완벽한 “조울증”이 되겠구나 하는 생각에...
예전에 읽었던 그녀의 책 <중국견문론>에 이런 구절이 있었습니다.
"길을 모르면 물어보면 될 것이고, 길을 잃으면 다시 돌아가 처음부터 시작하면 될 것이다“라고...
그러니까 일단은 떠나보라는 말이었죠.
떠나라는 이야기만 들어도 온 몸이 저릿저릿했던 저는 그녀를 향한 노골적인 부러움과 시기심만 키우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건 둘의 궁합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을 거란 생각도 이제와 하게 되네요.
<여행서>로만 익숙했던 한비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왠지 온전히 여행서 같지 않았던 그녀의 글들.
투박하고 촌스러운 문체, 심지어는 너무나 개인적인 말투들을 남발하는 걸 보면서 사이비 작가라는 생각까지도 들었습니다.
그런 그가 급기야 더 개인적인 책을 냈네요.
<그건, 사람이었네>
책의 서두에서 밝혔듯 그녀는 이 책을 언니로써, 누나로써 동생들에게 조곤조곤 이야기하는 마음으로 편하게 썼다고 밝혔습니다.
“청춘”들을 위한 글!
아마 이 책의 다른 이름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그래서 ‘내가 지금 청춘인가?’하는 애매한 시기의 사람들(?)에겐 어쩌면 이 책은 특별한 이야기가 아닐 수 있습니다.

이 책을 제가 굳이 소개하는 이유는 단 하나,
그녀의 눈부신 “청춘” 때문입니다.
40의 나이에 중국으로 어학연수를 떠날 때도 기겁을 했었는데, 51살의 나이로 미국 보스턴 테프츠 대학에서 본격적인 구호 이론을 공부하겠다며 또 다시 작년 9월 유학의 길을 떠났습니다.
....... 현실 불가능한 일이라고 해도 단 한 번도 이룰 수 없는 꿈을 꾸어보지 않은 청춘, 단 한 번도 현실 밖의 일을 상상조차 하지 않는 청춘, 그 청춘은 청춘도 아니다. 허무맹랑하고 황당무계해 보이는 꿈이라도 가슴 가득 품고 설레어보아야 청춘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이것이야말로 눈부신 젊음의 특권이 아니겠는가? ......
그녀의 글처럼 도무지 그녀의 “청춘”은 끝이 날 줄 모르네요.
9년간 함께 했던 월드비전 긴급구호팀장도 그만 두고 그녀는 또 다른 세계로 나아갔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생각하는 “청춘”이라는 건 “나이”와는 하등 상관관계가 없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린 청춘”은 생동감과 활기참, 그리고 도전 정신이라면, 시간을 지나온 “성숙된 청춘”은 지식과 지혜, 명석함으로 비롯된 현실감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늦은 시작이 두렵지 않은 사람이 과연 있을까요?
그 두려움을 이기는 방법을 아마도 그녀 한비야는 알아버린 것 같습니다.
이기지 못했다면 적어도 어깨를 나란히 하고 함께 동행하는 방법을 알게 됐는지도요.
그리고 그 방법 중 하나에는 그녀가 항상 말하는 “1년에 100권 책읽기”도 분명 포함되어 있을 겁니다.

“책”
제게는 심장이 뛰고 가슴이 설레는 최고의 단어입니다.
어릴 적 제 꿈 중의 하나는 책을 읽다 눈이 멀어버리는 것이었죠. 그리고 이 어린 꿈이 “오르한 파묵”이라는 터키작가에게 맹목적인 사랑을 품게 만든 이유이기도 합니다.
참 어이없고 황당하게 들리겠지만 그런 소망을 품었던 때가 정말 있었습니다.
제가 “책”이라는 세계에 대해 품고 있는 생각과 정확히 일치하는 생각을 그녀 한비야도 하고 있습니다.
...... "독서"의 즐거움이란 책 읽는 그 자체뿐만이 아니라 도서관에 가서 책을 찾는 기대감, 찾아내서 빌려올 때의 뿌듯함, 이미 대출된 책의 차례를 기다리는 설렘, 점심을 굶어가며 모은 돈으로 서점에 가서 내 책을 사는 기쁨, 그 책을 책장에 꽃아 놓고 보는 흐뭇함, 그 책을 누군가에게 빌려주고 돌려받는 날까지 괜히 조마조마해지는 조바심까지를 포함한다......
저는 이런 마음을 “판타지”라고 이름 붙이기도 했습니다.
대학에 들어가 처음으로 아르바이트해서 받은 돈으로 제일 먼저 한 일은,
조정래의 <태백산맥> 10권을 사는 것이었습니다.
종로서적에서 이틀에 나눠 5권씩 구입해 들고 오면서 내가 세상에서 제일 큰 부자가 된 것만 같았습니다. 얼얼했던 손의 기억도 아직까지 생생합니다.
그리고 그 책은 여전히 지금까지도 제 손길을 받고 있죠.(이 책 정말 많이 읽었네요......)
사람이 사람으로서 품위를 지키며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물의 최소량은 하루에 15리터라고 합니다.
저는 그 자리에 하루에 “15장의 책읽기”가 포함되는 날이 꼭 왔으면 좋겠다고 꿈꿉니다.
책이 없었다면,
아마도 저는 참 재미없게 그리고 참 많이 힘들게 세상을 살아냈을 것 같습니다.
그런 이유로 책은,
저에게 있어 생명의 또 다른 숨구멍입니다...

* 문득 궁금해집니다.
  당신에게 “책”은 무엇입니까?

Posted by Book끄-Book끄
달동네 책거리2010. 2. 10. 06:20
<크리에이티브 마인드> - 허버트 마이어스, 리처드 거스트먼

 

크리에이티브 마인드

맨 처음 책을 손을 잡게 되면 잡는 순간 느낌이 오는 책이 있습니다.

저의 경우는 오르한 파묵의 모든 책들이 그랬고(정말로 그의 모든 책들...) 파트리크 쥐스킨트, 알랭 드 보통, 주제 사라마구가 그랬습니다.

(솔직히 더 많이 있긴 한데. 뭐 하자는 플레이가 될까봐 그만 하렵니다...)

이 책 <크리에이티브 마인드>는 책 표지부터 저한테 말을 거는 느낌이 들었던 책입니다.(이런 순간엔 마치 내가 책으로 빙의 되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면 믿으시겠어요?)

어쩐지 자꾸 저를 부르는 것 같아 단번에 집어 들었습니다.

사실 다른 책을 소개하려고 했는데 저의 생각을 급선회시킨 짜릿한 장본인 되시겠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무지 무지 무지 무지 재미있는 책입니다.

이 책의 저자들 역시 엄청난 창의력을 가진 디자이너로 세계 유수의 상들을 싹들이 한 우리 기준에서 생각하면 선택받은 극히 적은 소수인들입니다.

한마디로 사람 주눅 들게 하는 인간들이란 뜻이죠.

이 책에서 우린 그런 무시무시한 인간들을 자그만치 20명이나 만나야 합니다.

근데 매력적인 건 책장을 넘길수록 이 무시무시한 인간들이 마치 바로 내 옆에 앉아 조곤조곤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다는 겁니다.

처음엔 무지 부담스러웠죠.(이들이 좀 대단한 사람들이라 말이죠... 저 실제가 아님을 알면서도 당황하고 몸 둘 바를 몰라하고 있더랬습니다)

그런데 읽다보니까, 글쎄 제가 이 사람들한테 완전 집중하고 있는 겁니다. 더 이야기해달라고 떼를 쓰는 마음으로요.(이거 빙의 맞죠? 정신분열인가?)


요즘엔 사실 "창조"의 홍수 속에 살고 있는 실정이긴 합니다.

얼마나 창조할 게 많으면 정당에서도 창조를 이름으로 내세우며 목에 핏대를 세우시겠어요?(것도 영 창조적이지 않게시리... 모냥 빠지게....)

예술계는 물론이고 과학ㆍ기업ㆍ정치에 이르기까지 이 말을 쓰지 않으면 오히려 어색할 지경이기까지 하죠. 서점에만 나가봐도 창조, 창의력 관련 서적이 봇물처럼 쏟아져 아예 대형 서점엔 '창조력 계발'이라는 부스가 별도로 마련되어 있을 정돕니다. 하지만 이런 책들은 대개 창조적인 인물들의 삶과 업적을 정말 그야말로 열심히 추적해 나열하는 수준이죠.

그러면서 평범한 우리 인간들 엄청 기운 빠지게 만드는 예기치 못한 역효과를 만드는 불상사까지 낳기도 하죠.


이 책엔 다양한 사람들이 자신의 육성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저널리스트, 기자, 연출가, 극작가, 작가, 경영인, 건축가, 영화감독, 작곡가, 디자이너, 유리조형가, 화가, 퍼스널컴퓨터 발명가, 박물관장, 조각가, 사진작가....

이 사람들의 공통점은...

“일을 즐긴다”는 아주 단순한 명제였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일을 통해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하고 싶다는 소망이었구요.

그들은 또한 말합니다.

창조적인 사람은 개방적이라고요, 그들은 자신의 아이디어를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어 합니다. 그들은 알고 있었던 거죠. 공동 작업이 얼마나 창조적일 수 있는지를, 그리고 그것을 통해 새로운 “전체”가 창조되는 짜릿함을요.


요즘 제가 절실히 느끼고 있는 부분입니다.

공동 작업의 엄청난 “창조성”을요...

예전엔 혼자 잘 하면 된다는 생각이 대부분이었습니다. 혼자 잘하려고 노력하다 보니 오히려 타인을 탓하게 되고, 다른 사람의 실수를 습관으로 생각하기도 했습니다.(이 책 아주 못쓰겠습니다. 과거의 안 좋은 모습을 고백까지 하게 만드니...)

다행인 것은,

요즘은 함께 일하는 즐거움에 대해 깨달았다는 겁니다.(완전 기특한 버전...)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얻어지는 증대 효과도 전 정말 느끼고 있거든요.

이 책의 표현 데로 정말 짜릿한 흥분이었습니다.

이런 제 마음이 아무래도 이 책을 불렀던 것 같습니다.

(확실히 책에는 영혼이라는 게 있는 것 같습니다...)


책을 보면서 저는 짧은 <독서노트> 같을 걸 기록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이 책은 제 노트의 많은 부분을 차지했고 그리고 문장 전체를 그대로 받아 적은 부분들도 참 많이 있습니다.

힘이 되는 구절들과 만나는 건 일종의 축복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창조성”은 사람의 본성처럼 모든 사람들에게 있다고 합니다. 그걸 어떻게 발견하느냐는 누구도 뭐라고 이야기 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단지 내가 나의 창조성을, 타인의 창조성을 꺾는 그런 사람은 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랄 뿐입니다.

이 책의 소개된 “스티븐 홀”이라는 건축가는 말합니다.

“창조성은,

예술 활동에만 필요한 게 아니다.

상상력은 우리가 생존하기 위해 꼭 필요한 핵심이다.

이런 것들이 없다면 우리는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그렇다면....

저는 지금 살아있는 걸까요?


Posted by Book끄-Book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