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끄적 끄적...2011. 5. 22. 17:33


정말이지 이 작품은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놓치고 싶지 않았다.
놓치고 내내 아쉬워하기에는 공연 기간조차도 너무 짧다.
단 4일 동안 고작 다섯번 공연되는 작품.
진심으로 궁금했다.
단 다섯번의 공연을 위해 이 모든 대사들을 외우는 배우들의 마음은 어떤 것이었을까?
게다가 그들이 이름만으로도 쟁쟁한 연기 9단의 내공을 가진 이 어마어마한 배우들이라면...
이호재, 전무송, 윤소정.
1969년생 이명호도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연극 배우인데
이 세 명의 대가들 앞에선 어쩐지 그조차도 아직 어린 아이에 불과하단 생각까지 든다.

연극 <응시> 
놀랍게도 초연되는 작품이란다.

"지원의 얼굴"로 알려진 조각가 권진규(1922~1973)의 삶이 모티브가 된 작품.
일본에서의 성공적인 미래를 버리고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생활고와 소외감에 시달리다
결국 51세의 나이로 자신의 아틀리에에서 스스로 생을 마감한 비운의 조각가 권진규.
그의 테라코타 휴상들는 고요하면서 동시에 극도의 공포심이 느껴질 정도로 섬득하다.
잘 썩지 않는다는 불멸의 테라코타.
차마 마주하고 오래 서있기가 힘든 그의 흉상들.
외면하려 애를 쓰지만
마지막 순간에 최면에 걸리듯 몸 전체를 돌려 다시 한 번 더 적나라하게 대면하게 만들어
결국은 각인하게 만드는 깊고도 무서운 흡인력(吸引力).
몰입과 집중은 그래서 "공포"의 다른 이름일 수 있다.
길게 늘어진 차가운 쇠사슬, 마치 피가 밴듯한 흉물스러운 붉은 벽돌가마.
생살이 찢겨 뼈가 드러난 것 같은 철조 구조물.
그리고 버려지듯 나뒹그러진 볼품없는 의자.
무대를 마주하고 앉기가 어쩐지 나는 덜컥 두렵고 무서워졌었다.
그 무대를 정면으로 마주한다는 게 버거웠다. 
어쩌자고 시작부터...



준태(이호재)의 아내 역으로 함께 무대에 오른 윤소정은 말했다.
"이호재씨는 쉽게 말해 힘이 좋고 외적인 표현에 강합니다. 전무송씨는 내적인 연기에 잘 어울리지요"
그래서 연극판에서는 이런 말도 있단다.
"전무송의 긴장, 이호재의 이완"
뭐랄까?
이 작품에서는 두 사람이 긴장과 이완을 교차시키면서 수시로 감정을 교환한다.
두 인물 모두에게서 어쩐지 귀기(鬼氣)가 느껴져 섬득했다.
어릴적 친구 형우(전무송)의 소개로
고향집에 집을 마련하게 된 준태(이호재).
그러나 이사 첫날부터 준태는 이상한 음성과 말울음소리, 글자들의 환영을 보게 된다.


절지(折枝)하여도 포절(抱節)하리라.    
(가지가 잘려져도 품어 지키리라)
포절(抱節)하다가 고사(枯死)하리라.    
(지키다가 차라리 말라 죽으리라)

기억이 한 사람을 근원의 생으로 부른다.
유년의 기억이, 첫사랑의 기억이, 그리고 모성의 기억이 그렇게 한 사람의 일생에 결정적인 타격을 가한다.
암시였을까?
도입부분 준태는 작업실에 홀로 서서 말한다.

"시간은 여기 그대로 있고,
  나는 마침내 올 곳을 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빈 집을 가득 채운 부스러진 시간의 조각들.
준태에게 남은 건 이젠 대면의 시간이다.

" 넌 왜 그렇게 너 자신을 짖누르니?
  와서 하고 싶은데로 해!
  어디에도 매이지 마!
  그래 그래, 우린 같이 가야해!"


권진규는 준태의 삶 속으로 어느새 투영된다.
또 다시 시작되는 답습(踏襲)이었을까?
아니면 윤회(輪廻)?
그러나 삶의 봉인이 뜯기면 누구도 다음을 기약할 수 없다.
내 것이었던 삶은 철저히 나를 배반하고
나는 그저 하나의 현상이 되버린다.
어디로 가야하나?
중산층을 꿈꾸던 소망은 생의 한귀퉁이로 매몰차게 내동댕이쳐졌다.
보지 않아도 되는 것을 본 사람은
그래서 뒷걸음을 치게 되는 건지도...

형우는 준태를 기어이 데려가고 싶었던 걸까?
어쩐지 나는 준태의 회귀(回歸)가 철저히 자발적이었던 것처럼 느껴진다.
준태는 스스로 선택했던 것은 아닐까?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아닐까?
귀신에 홀렸든, 노구의 심장이 진실을 견뎌내지 못했든 간에 말이다.

나는 여기 있습니다.
안락했지만 허전했던 나날들.
가만히 눈을 감고 바라보면,
잠시 숨을 멈추고 참을성있게 지켜보면 
모든 것이 다 저 뒤의 뒷쪽까지 선명하게 보인다는 것을 젊어서는 왜 몰랐을까요?
결국 버려도 버려지지 않고,
가져도 가져지지 않는 것들이었는데..
바람이 부네요. 
내 자리로 돌아갑니다.
그러니까 아주 오래전에 내가 처음 생겨나고 멸했던,
또 생겨나고 멸했던 거기로....

                     <자소상 1969~1970>                                   <지원의 얼굴 1967>

Posted by Book끄-Book끄
보고 끄적 끄적...2010. 5. 24. 05:55

기간 : 2010.05.19 ~ 2010.05.23
장소 : 대학로 예술극장 소극장
극본 : 지경화
연출 : 채승훈
극단 : 창파
출연 : 남명렬, 김호정, 민경진, 이명호



제 31회 2010 서울연극제 참가작 8편 중에 
피날레을 장식하는(?) 작품이었던 연극 <옥수수밭에 누워있는 연인>
극본과 연출자는 낯설었지만
든든한 출연진만으로도 "must see" 목록에 포함시켰던 작품이다.
그런데 연극을 보고 난 후의 이 복잡하고 심란하고 불편한 감정들을 어떻게 말해야 할까?
공연장을 나서면서 "이제 살았구나..." 하는 안도감에
저절로 숨이 깊어진다.
참 막막하고 어려운 작품이구나...
그래도 정말 다행스러운 것은,
공연장에서 이해하지 못하고 앉아 있었던 찌질이가
결코 나 혼자만은 아니었다는 사실이 아주 큰 위로가 된다.




안개가 짙게 깔린 듯 운명적이며, 미스터리 하며, 원초적이며,
잔혹하며, 그로테스크하다!!

현실보다 잔혹한 환상, 환상보다 짜릿한 상상...

연극의 메인 헤드라잇은 이렇게 거하고 완강했다.
뒷북이긴 했지만 뒤늦게 시놉시스를 찾아봤다.
(시놉시스... 대략 참 난감하게 줄거리를 전해준다
 이것은 말을 한 것도, 말을 안 한 것도 아니여~~)

<시놉시스>
시와 도시의 경계에 선 어느 허름한 집. 여명이 어슴푸레한 새벽 그 집엔 이선(김호정)과 한보(남명렬)가 있다. 그들은 무언가로부터 도망친 듯 불안하고 초조하다. 지금 그들은 일종의 모의를 하고 있다. 이선의 아버지(한영:남명렬)로부터 거액의 돈을 타내기 위한 모략. 과연 그들은 아침을 맞아 그들의 계산대로 모든 일을 처리할 수 있을까 그들은 걱정된다. 현실의 고통과 존재하지 않는 이상이 억울하다. 마치 거인의 걸음과도 같은 파열음이 들리고 한보는 이선을 집에 남겨둔 채 밖으로 뛰쳐나간다. 그리고 얼마 뒤 낯선 부자(父子)가 집에 들어선다. 이들 부자 역시 평범한 일상의 인물들과는 거리가 멀다. 마치 마음과 육체의 고통들이 당장의 그것들을 넘어 형이상학적인 쾌락이 된 듯하다. 그리고 아버지(민경진)는 죽는다. 이선과 아들(이명호)만 남았다. 그들은 다르지만 또 닮기도 하다. 그들은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들을 이야기한다. 그때 한영이 찾아오고 한영은 총을 쏴 아들을 맞힌다. 마치 사냥꾼의 행동과도 같이. 그 사냥꾼은 바로 이선의 아버지다. 이선과 한영은 그러나 너무나 먼 거리에 있어 볼 수 없는 것처럼 서로에게 외롭다. 오늘로 인생의 마지막을 장식하려는 듯 집에 남은 모든 사람들은 자신이 가질 수 있는 가장 비극적 통로로 자신을 몰아넣기 시작한다.



처음에 나는 맨발로 등장하는 이선(김호정)과 아들(이명호)은
이미 죽은 사람들, 즉 "귀신들"이라고 생각했다.
한보(남명렬)가 느끼는 추위와 두려움을 이선은 전혀 느끼지 않았고
오히려  어느 면에서는 편안해 보이고 심지어는 그 상황을 즐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것은 모든 상황를 스스로 만들어낸 창조자가 
자신의 뜻데로 모든 게 이루어지는 걸 지켜보며 즐거워하는 묘한 관음의 시선같아 보였다.
(핀셋에 꽃혀있는 아직 살아있는 나비 표본을 바라보는 수집가의 섬뜩함이랄까?)
창백한 얼굴에 베낭을 메고 등장하는 아들은,
늙은 아버지를 졸졸 따라다니며
끊임없이 투정과 떼를 쓰는 비정상적으로 유아적인 인물이다.
불안한 시선과 페티즘을 떠올리게 하는 베낭에 가득한 여자 신발들.
그러니까  여자의 아버지 한영(남명렬)과 남자의 아버지(민경진)은
이 두 귀신들에 의해 상징적으로 죽은 존재들이며
이미 죽은  두 사람의 환상 속에만 살아있는 인물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결국은 그 환상 속 인물들과의 관계마저도
끝장을 내고 끊어버리게 되는 그런...



지금 가만히 되집어 생각해도 극의 내용은 집요하게 어렵고 표현은 찬란하게 수사적이다.
인간의 자유 의지와 숙명과의 갈등을
나비와 사막이라는 단어 속에 마구마구 구겨넣고
참을성있게 앉아있는 관객에게 일방통행적인 이해와 공감을 끊임없이 
그것도 지나치게 강요하는 것 같다.
그 강요는 심지어 거의 무차별적으로 쏟아붓는 폭력처럼 어이없이 일방적이다.
이쯤되면,
작품의 이해 여부를 떠나서
그대로 수건을 던지고 링위에 뻗어버리는 편이 어쩌면 훨씬 나은 선택이 될 것 같다.
무차별 폭력의 뒤끝은 아직까지도 불편하고 내내 찜찜하다.

"도대체 나는 왜,
 일방적으로 그렇게 얻어터지고 있어야만 했는가?"
(혹시 나 지금 K-1 본거니???)
Posted by Book끄-Book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