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끄적 끄적...2011. 4. 11. 08:53


<봄 날>

부 제 : 가슴으로 만나는 아름다운 시간
일 시 : 2011.03.31. ~ 2011.04.17.
장 소 : 대학로 예술극장 대극장
대 본 : 이강백
연 출 : 이성열
주 최 : 극단 백수광부
출 연 : 오현경(아버지), 이대연(장남),
         장성익, 강진휘, 정만식, 박완규,
         유성진, 김현중, 김란희


배우 오현경이 또 다시 아버지 역으로 출연한다는 소식만으로도 무척 탐나는 연극이었다.
행여 놓칠세라 서둘러 조기예매를 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1984년 초연 당시 제 8회 대한민국연극제 대상을 수상했던 작품.
2008년, 무려 24년만에 극단 백수광부와 이성열 연출에 의해 다시 무대에 올랐을 때
전석 매진이라는 대기록을 세우면서 서울연극제 연출상까지 수상했다.
그리고 이번엔 24년만이 아니라 3년만에 올려진 세번째 <봄날>
1984년, 2008년에 이어 또 다시 배우 오현경이 아버지 역으로 무대 위에 선다.
배우 윤소정과 오현경.
존재감만으로도 무대를 빈틈없이 꽉 채우는 대가들.
이런 찬사조차도 배우 오현경과 윤소정에겐 왠지 민망하고 죄송스럽다.
도대체 어디서 그런 열정과 힘이 나오는 걸까?


짧은 봄날같은 젊음!
젊음은 구차한 욕망이고 버려진 그리움은 질기디 질긴 절망인가?
젊음도 그리움도 단지 탐욕의 다른 이름처럼 느껴진다.
회춘을 꿈꾸며 어린 소녀를 품어 따뜻한 기를 받으려하는 초라한 늙음도
그런 절대권력의 아비를 상대로 역성혁명을 꿈꾸듯
아비를 속이고 숨겨놓 재산을 파헤쳐 대처로 떠나 돌아오지 않는 비겁한 젊음 역시도
비루하고 누추하긴 모두 마찬가지다.
그러나 어쩌랴!
그 비루함이 바로 인간의 모습인걸...
따지고보면 젊음도 봄날도 너무 짧기에 그 댓가가 이렇게 큰 건지도 모르겠다.
산불로 황폐하고 시커멓게 변해버린 청계산의 아무도 끄지 않는 불처럼..

 

의외로 무대와 뒷배경이 빈약하고 초라해서 놀랐다.
그래도 배우 오현경이 나오는 작품인데...
그런데 참 신기하고 이상한 건,
30여분이 지난 뒤 아버지 역의 오현경 선생님이 등장하면서부터는
정말이지 무대의 휑한 여백은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더라.
장남으로 나오는 이대연도 그러더라.
"선생님은 무대에만 서시면 기운이 솟아나세요.
 평소와 달리 무대에 서는 순간 엄청난 집중력이 살아나시거든요"
75살의 배우 오현경은,
쉰아홉에 식도 수술을 받을 당시 상태가 안 좋아져서 심폐소생술로 간신히 살아났다고 한다.
그리고 계속되는 위암, 목디스크 수술을 포함한 4번의 대수술. 
현재 체중은 고작 54kg이란다.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 
54kg의 몸피를 가진 노인의 발성으로 공연장 전체가 그렇게 꽉꽉 찰 수 있다는 사실이...
딕션은 또 얼마나 정확하시던지... 
무대에 서 있는 모습 자체가 감동이었다.
공연이 끝나고 함께 연기했던 자식같은 후배 배우들도
그리고 관객들도 진심으로 우러나오는 감동의 박수를 보냈다.
(연극 자체도 감동적이지만 마지막 그 모습은 꼬끝이 찡하게 감동적이었다)

 

무대가 짱짱하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존재감을 발산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배우 오현경의 모습을 보면서 마디마디 절감하고 감동했다.
“전 감투, 돈과 같은 세속적인 욕심은 전혀 없어요. 하지만 다 내려놓을 때도 됐는데도 배우의 자존심만은 양보 못하겠어요. 어두운 객석의 누군가가 최선을 다한 나의 연기에 ‘감정의 교류’를 했을 거라는 자부심, 그게 바로 배우의 자존심이죠.”
이동은 시간적인 것이고 정착은 공간적인 것이다.
그래서 음악은 시간예술이고, 미술은 공간예술에 속한다면
배우는 이 두 가지를 전부 아우르는 존재가 아닐까?
새로운 정착지를 찾아다니는 유목민으로서 배우의 완성은
그런 이유로 시간의 경과가 필연적인지도 모르겠다.
솔직히 나는 "아우라"라는 말에 그닥 긍정적인 편이 아니다.
그런데 배우 오현경의 무대를 보면서
왜 우리가 배우를 향해 "아우라"를 운운하는지
그 근본적인 이유를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건 카리스마조차도 쉽게 접근할 수 없는 그런 위엄이고 진심으로 충만함이었다.
그가 무대에 선 모습을 또 다시 볼 수 있을까!
폭력같은 갈증이 목울대를 넘는다.
울컥, 울컥!
배우 오현경은 좋겠다.
그는 결코 더 이상 나이들지 않으리라.
그의 회춘이, 그의 청춘이
그의 이팔청춘이 나는 눈부시게 고맙다.

노쇄한 아비가 남긴 마지막 말끝이 내내 나를 붙잡는다.
"그놈들 얼굴이나 다시 봤으며...
 죽기 전에 다시 봤으면..."

그래, 봄날은 너무 짧다.

Posted by Book끄-Book끄
보고 끄적 끄적...2011. 3. 20. 14:02

<디너>
원작: 도널드 마글리즈(Donald Marguiles)
연출: 이성열
공연기간: 2011. 3. 4 ~ 4. 3
공연장소: 대학로 예술극장3관
출연: 이석준, 정승길, 우현주, 정수영


작년에 산울림 소극장에서 초연됐을 때 꼭 보자고 생각하고 어이없이 놓쳐버린 연극이다.
미국에서 현재 가장 중요한 작가로 손꼽히고 있다는 도널드 마글리즈(Donald Margulies)의 "Dinner With Friends’가 연극의 원작이다.
이 작품은 1998년 휴마나 페스티벌에서 초연된 이후 2000년 퓰리처 희곡상을 비롯해 루실 로르텔 상, 드라마티스트 길드 상, 미국 평론가 협회 신작희곡상 등을 수상했단다.
(참 모르는 이름의 상들이 많기도 많다...^^)
이후 미국 여러 도시에서 공연되며 작품성을 인정받았단다.
물론 이런 이력들이 작품의 질을 전적으로 말해주는 건 아니겠지만(특히나 그게 우리나라에 들어왔을 경우엔...) 제목만 들었을 때도 느낌이 좋았었다.

거기다 박정환을 오랫만에 뮤지컬이 아닌 연극 무대에서 볼 수 있어서 궁금하기도 했었다.
그런데 놓쳤다!
그의 게이브를 놓친 건 아무래도 두고두고 아쉬울 것 같다.
(아무래도 이래저래 뮤지컬 "광화문 연가"를 보게 될 것 같다. 
 순전히 박정환 때문에...
 그가 부르는 이영훈의 노래들이 무지 궁금하다. 윤도현이나 송창익, 김무열 보다도 더...
 옛날 가요를 부르는 박정환의 모습은 참 좋다. 
 생각해보니 뮤지컬 <동물원>을 본 것도 그 이유 때문이었던 것 같다.)

 
12년 차 부부 이야기!
산전수전에 공중전, 그리고 원수같은 지겨움과 묘한 동지애 등등등...
참 설정 자체만으로도 할 말 많기도 그리고 할 말 없기도한 구조다.
신선함도 떨림도 흥미진진함도 난해한 숨은그림 찾기 처럼 점점 찾기 어려워지는 시간의 경과!
사랑이라는 거, 부부라는 거, 가족이라는 거...
더불어 개인이 갖는 인관관계 전반에 대해 되집어 생각하게 만든다.
이 모든 것들을 소처럼 우직하게,
그리고 꾸역꾸역 되씹게 한다.

벌써 다섯 번째 커플 연기란다.
이석준과 정수영의 탐과 베스.
추상미에겐 미안한 이야기지만 이 두 사람, 정말 부부같다.
그것도 징글징글한 부부!
그러면서도 이 부부의 관계는 충분히 이해가 되고 공감된다.
분노가 최고의 최음제가 될 수 있다는 탐(이석준)의 대사도 어떤 의미인지 알겠다.
10년 이상 된 부부들을 보고 있으면
일상이 싸움같과 그 싸움은 또 어이없는 슬랩스틱 코미디스럽다.
끝장과 새로운 시작!
뫼비우스의 띠처럼 참 오묘한 관계다.

 

게이브 정승길.
예전에 남산에서 <내 심장을 쏴라>에서 철학자로 나온 모습이 그와의 첫 대면이었다.
그때도 참 느낌이 좋았었는데
<디너>에서는 정말 맞춤옷을 입고 있는 것 같다.
(정승길의 <루시드 드림>을 봤어야만 했었다... 또 다시 때늦은 안타까움이라니...)
사실을 고백하자면 작품을 보면서
공감이 가장 많이 됐던 인물도, 그래서 위태로움을 가장 많이 느꼈던 인물도 게이브였다.
끝장을 선택하는 부부보다 피아노를 배우는 걸 선택한 게이브가 나는 더 측은하고 안스럽다.
그래도 그런 선택이 부부를, 가족을, 그리고 타인과의 관계를 온전하게 유지하게 만드는 게 아닐까?
탐과 베스, 게이브와 카렌.
두 부부 중 누구의 가치관과 선택이 옳은 건지는 알 수 없다.
또 옳다 한들 꼭 그게 정답이 될 수도 없다.
막막하지만 그게 삶이고 일상이다.
함께 식사를 하다 충격적인 이야기를 듣고 놀라고 괴로워하지만
다시 또 다시 목구멍으로 꾸역꾸역 밥을 넘기게 되는 게 일상이다.

사랑과 음식!
이 두 가지는 공통점이 많다.
준비하는데 시간이 어느 정도 필요하고, 적당한 장식으로 시각적인 즐거움도 줘야하며, 유쾌하게 함께 나눌 이야기도 한두개쯤은 꼭 생각해둬야 하고, 그리고 결국엔 꽉 찬 포만감으로 마무리가 되어야 한다.
그러다 유효기간이 지났음을 알게 되면,
선택이라는 것도 해야 한다.

‘사랑이...어떻게 안 변하니?’
영원히 함께함의 공포!
포스터의 문구들은 순간순간 그 선택이라는 걸 섬득하게 만든다.

부부라는 건,
그리고 부부로 산다는 건,
더 이상 남자와 여자라는 생물학적인 성의 결합이 아니다.
어쩌면 부부는 제 3의 성(性)으로 새롭게 분류되어야만 할지도 모르겠다.
탐의 선택도 게이브의 선택도 나는 결코 인정하지 않으련다.
그리고 베스와 카렌도...
문득 차가운 물을 벌컥이며 사납게 마시고 싶어진다.
왠지 목구멍으로 달게 넘어갈 것 같다.
그들의 식탁속에 내가 잠시 끼어 앉아있었던 게
잘 한 짓이었을까? 아니면 그 반대였을까?
많은 생각을 두서없이 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부부(夫婦)라는 인간관계의 접경지대가 문득 불모지처럼 황량하다.
불모지엔 생명이 없으리라는 확신은,
그러나 매우 위험하고 옳지 않은 믿음이다.
뜻밖의 일은,
어느 곳이라도 의외의 모습으로 파고들 수 있다.
그러니 확신은 끝장보다 더 황폐한 불모지다.

* 암전 속에서 끊임없이 그러나 조심스럽게 움직이던 무대 크루들의 모습은 상당히 아름다웠다.
  소음에 유난히 민감한 몹쓸 귀를 가진 나지만,
  이들이 내던 무지 조심스럽고 정성이 담긴 소음은 달콤한 디저트 같았다.
Posted by Book끄-Book끄